파락호破落戶의 비밀

[공감&힐링]

파락호破落戶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나요?

파락호는 조선시대 때 재산과 세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탕진하는 난봉꾼을 이르는 말입니다. 파락호 중에서도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의 노름판을 돌면서 가장 큰 손으로 유명세를 떨친 김용환, 그는 안동 사람으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13대 종손입니다. 김용환은 밤새워 노름을 하다가 돈을 따면 그냥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고, 돈을 잃게 되면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새벽몽둥이야!”


그때 몽둥이를 든 그의 아랫사람들이 현장을 덮쳐 판돈을 챙기면, 김용환은 그 돈을 들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그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논과 밭 18만평(현재 시가 200억원)을 팔아 노름판에 탕진하였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반대로 실패했지만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祠堂까지 팔려고 하였습니다. 김용환은 급기야 무남독녀 외동딸이 시집을 가서 시댁에서 농을 사오라고 받은 돈마저 노름돈으로 탕진하고 대신 집에 있던 헌 농짝을 보내줍니다. 윤학준은 『양반동네 소동기』란 책에서 3대 파락호로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1930년대 형평사衡平社 운동 투사였던 김남수, 그리고 김용환을 꼽을 정도였습니다. 평생을 아버지를 원망하고 살았던 딸 김후웅은 아버지에게 올리는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 문중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꼬.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 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김용환은 해방 다음해인 1946년 4월 26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떠난 후 여러 증언을 통해 노름돈으로 탕진한 줄 알았던 집안 재산이 만주 독립군 군자금으로 들어간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김용환은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얻는 대신에 몰래 독립군 군자금을 지원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노름꾼이 되어서라도 전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을 지원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


김용환이 어렸을 적, 할아버지 김흥락이 사촌 의병대장 김회락을 숨겨줬다가 왜경들에게 발각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흉악한 왜경들 앞에서 종가 마당에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된 김용환은 그 이후부터 항일운동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다짐합니다. 식구들이 고초를 당하지 않으려면 그 일은 은밀히 진행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김용환이 숨을 거두기 직전, 그의 오랜 지기知己가 이제는 말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권유했지만, 그는 ‘선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네, 아무 말도 하지 말게나’ 하며 눈을 감았습니다.

반세기가 지난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용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합니다. 그가 파락호라는 누명을 얻으면서까지 지키려했던 이 나라. 우리는 그 소중함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