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사관의 진실 | 환단고기가 처음 밝혀 주는 역사 진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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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는 한민족의 역사 경전이면서
동시에 종교 경전이요 문화 경전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우리 역사, 문화의 원형을 밝혀 주는 보배로운 사서이다. 특히 환단고기는 다른 사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역사 사실이 많이 실려 있다. 『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의 해제 편에서는 ‘환단고기에서만 전해 주는 새로운 역사 진실’이라고 하여 이를 52가지로 정리하여 밝혀 주고 있다. 이를 중심으로 환단고기의 진정한 역사적 가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9 지명으로서의 영고탑을 밝혀 준다!
영고탑은 소도제천의 성지다!



戊戌二十八年(무술이십팔년)이라 會九桓諸汗于寧古塔(회구환제한우영고탑)하사 祭三神上帝(제삼신상제)하실새 配桓因桓雄蚩尤(배환인환웅치우)와
及檀君王儉而享之(급단군왕검이향지)하시니라
재위 28년 무술(단기 751, BCE 1583)년에 임금께서 구환족의 모든 왕을 영고탑에 모이게 하여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지낼 때, 환인천제·환웅천황·치우천황(14세 환웅천황)과 단군왕검을 배향하셨다. (『단군세기』 16세 위나 단군 조)

丙申三十六年(병신삼십육년)이라 修築寧古塔(수축영고탑)하시고
作離宮(작이궁)하시니라
재위 36년 병신(단기 989, BCE 1345)년에 영고탑을 개축하시고 별궁[離宮]을 지으셨다. (『단군세기』 20세 고홀 단군 조)

辛丑六年(신축육년)이라 臣智陸右(신지육우)가 奏曰阿斯達(주왈아사달)은
千年帝業之地(천년제업지지)라
大運(대운)이 已盡(이진)하고 寧古塔(영고탑)은 王氣濃厚(왕기농후)하야
似勝於白岳山(사승어백악산)하니
請築城移之(청축성이지)하소서 한대 帝不許(제불허
)하시니라
재위 6년 신축(단기 1054, BCE 1280)년에 신지 육우陸右가 주청하기를, “아사달은 천 년 제업帝業의 땅이나 대운이 이미 다했고 영고탑은 왕기가 농후하여 백악산보다 나으니, 청하옵건대 그곳에 성을 쌓고 천도하시옵소서.” 하니, 임금께서 윤허하지 않으시니라. (『단군세기』 22세 색불루 단군 조)


단군세기를 보면 영고탑이라는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첫 번째 기록에서 16세 단군이 영고탑에 구환족의 모든 왕을 모이게 했다고 한 데서 영고탑이 제천의 성지였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기록에서도 영고탑을 개축하였다고 했는데 이는 소도제천의 단을 새로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세 번째 기록에서는 ‘영고탑으로 천도하자.’고 하여 영고탑이라는 말이 특정 지역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영고탑이 좁은 의미로서 특정 공간을 가리킨다면 세 번째의 영고탑은 특정 지명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것으로 볼 때 처음에는 소도제천을 올렸던 특정 지역을 영고탑이라고 불렀고 나중에 가서 그 명칭이 그 지역을 대표하는 지명으로 굳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정한 건물이나 특정한 공간이 지명으로 확대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흔한 일이다(서울의 압구정동).

그런데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이 이 ‘영고탑’이란 단어를 꼬투리 잡아서 『환단고기』 전체를 위서로 몰았다. ‘영고탑’이 청나라의 시조 전설과 관련 있는 지명이므로 청나라 이후에 생겨났고, 따라서 고려 시대에 쓰인 『단군세기』와 『북부여기』, 그리고 조선 중기 때 쓰인 『태백일사』에는 ‘영고탑’이란 지명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위서론자인 조인성은 『환단고기』에 자주 등장하는 영고탑은 청나라 시조 전설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영고탑이라는 지명은 청나라 이전에는 사용할 수 없으므로 위서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만일 ‘영고탑’이란 지명이 청조 이전에 쓰인 용례가 있다면, 위서론자들이 제기한 문제는 일고의 가치가 없는 억지 주장이 된다. 그런데 실제로 그러한 기록이 존재한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는 『명실록明實錄』을 인용하여 “명나라 초기에 동해와집부東海窩集部를 설치했는데 여기에는 호이합呼爾哈, 혁실혁赫實赫, 영고탑寧古塔 등의 로路가 속한다[國初名東海窩集部, 所屬有呼爾哈, 赫實赫, 寧古塔等路].”라고 하였다. 이렇게 영고탑이라는 명칭이 명대 초기 사서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암이 살던 고려 말에 영고탑이란 명칭이 통용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영고탑이라는 명칭이 배달과 고조선의 제천 행사를 이어받은 부여의 영고迎鼓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44세 구물 단군이 재위 2년(BCE 424) 3월 16일에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올렸다고 하였다. 부여는 고조선을 이은 나라이므로 부여 영고제는 곧 고조선의 제천 행사인 것이다. 영고탑은 바로 삼신상제님께 올리던 천제인 영고제를 지내던 ‘소도 제천단’이 있던 곳(영고제를 지내던 터)이다. 후대에 청나라가 그 땅을 차지하면서 와전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영고迎鼓의 원래 의미와 표기법이 잊혀져 영고寧古가 되었고, 우리말의 ‘터’를 특特, 태台, 탑塔 등으로 음사하면서 영고탑寧古塔이란 말로 정착됐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청나라 초기에 한족漢族 사대부로서 영고탑으로 유배된 오조건吳兆騫의 아들 오진신吳振臣이 쓴 『영고탑기략寧古塔紀略』에서는 금나라 아골타가 기병한 곳으로 여섯 형제가 여섯 개의 주요한 마을을 이루어서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하였다.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이 영고寧古가 6을 뜻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다. 그것은 한자어 ‘영고寧古’가 만주어 ‘닝군Ninggun’으로서 숫자 여섯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고탑이 만주말로 6개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하여 그 이전에 다른 의미로도 존재했을 가능성까지 배제하는 것은 학자로서 좋은 태도가 아니다. 영고탑의 유래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음에도 위서론자들이 ‘영고탑’을 오직 청나라 때 만들어진 지명으만 해석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러한 여러 설을 알지 못한 데에서 나온 오류인 것이다.

20 고조선의 우현왕 제도를 밝혀 준다!
단군조선에는 대단군 아래 좌현왕·우현왕이 있었다.



是歲(시세)에 高登(고등)이 叛據開城(반거개성)하야 抗命天王(항명천왕)이어늘
馬韓(마한)이 方擧兵討之(방거병토지)할새
到紅石嶺界(도홍석령계)하야 聞天王(문천왕)이 許高登爲右賢王(허고등위우현왕)하고 乃止(내지)하니라
이해에 고등이 개성에서 반역하여 천황(21세 소태 단군)에게 항명하였다. 마한 왕이 바야흐로 군사를 일으켜 고등을 치려 하였으나 홍석령에 이르러 천황께서 고등을 우현왕으로 삼을 것을 윤허했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했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환단고기』는 단군조선의 국가 통치 제도 삼한관경제를 자세히 밝혀 준다. 이를 달리 말하면 좌현왕·우현왕 제도이다. 고조선 초기의 국가 통치 제도는 진한의 천황(대단군)을 중심으로 번한과 마한의 왕(부단군)이 좌우에서 각각 보좌하는 비왕裨王 제도였다. 또한 삼한에도 각기 좌·우 비왕을 두었는데 이를 좌·우현왕이라 한다. 비왕 제도는 이미 배달국 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초대 단군왕검께서도 14세에 비왕이 되어 섭정하신 바 있다. 이 제도는 신교의 삼신 사상을 기초로 해서 성립된 것으로, 흉노로 전파되었다. 특히 흉노의 우현왕은 좌현왕과 더불어 선우單于 아래 최고 직책이었다. 좌현왕을 좌도기왕左屠耆王이라고도 하였는데, 항상 선우의 태자를 좌현왕으로 임명하였고, 선우의 유고有故 시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 백제의 전성기에도 좌·우현 왕 제도가 있었다.

『송서宋書』 「이만전夷蠻傳」에는 “그리하여 행관군장군 우현왕 여기餘紀를 관군장군으로 임명하고, 행정로장군 좌현왕 여곤餘昆과 행정로장군 여훈餘暈을 함께 정로장군으로 임명하였다[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爲冠軍將軍, 以行征虜將軍左賢王餘昆·行征虜將軍餘暈竝爲征虜將軍].”라고 하였다.

『사기』 「흉노열전匈奴列傳」에는, “좌우현왕, 좌우곡리왕, 좌우대장, 좌우대도위, 좌우대당호, 좌우골도후를 두었다. 흉노에서는 ‘현賢’을 일러 ‘도기屠耆’라고 하기 때문에 항상 태자를 좌도기왕으로 삼았다[置左右賢王, 左右谷蠡王, 左右大將, 左右大都尉, 左右大當戶, 左右骨都侯. 匈奴謂賢曰 ‘屠耆, ’ 故常以太子爲左屠耆王].”라고 하였다. 좌우현왕 제도는 단군조선을 계승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똑같이 운영되었다. 단군조선에서 우현왕은 변한 왕이 맡았고 좌현왕은 마한 왕이 맡았다.

21기존 사서에서 3개 항목만 전해 오던 팔조금법의 전체 조항을 밝혀 준다!


爲民設禁八條(위민설금팔조)하니 相殺(상살)에 以當時償殺(이당시상살)하고
相傷(상상)에 以穀償(이곡상)하고
相盜者(상도자)는 男沒爲其家奴(남몰위기가노)오 女爲婢(여위비)하며

毁蘇塗者(훼소도자)는 禁錮(금고)하고
失禮義者(실예의자)는 服軍(복군)하고 不勤勞者(불근로자)는 徵公(징공)하고
作邪淫者(작사음자)는 笞刑(태형)하고 行詐欺者(행사기자)는 訓放(훈방)이러니
欲自贖者(욕자속자)는 雖免爲公民(수면위공민)이나 俗猶羞之(속유수지)하야 嫁娶(가 취)에 無所售(무소수)라
(색불루 단군 때) 또 백성을 위하여 금팔조를 정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 살인한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제2조 : 상해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보상한다.
제3조 : 도둑질한 자 중에서 남자는 재산을 몰수하여 그 집의 노(남자 종)로 삼고 여자는 비(여자 종)로 삼는다.
제4조 : 소도를 훼손한 자는 금고형에 처한다.
제5조 :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역시킨다.
제6조 : 게으른 자는 부역에 동원시킨다.
제7조 : 음란한 자는 태형으로 다스린다.
제8조 : 남을 속인 자는 잘 타일러 방면한다.
자신의 잘못을 속죄한 자는 비록 죄를 면해 공민이 될 수 있었지만, 당시 풍속이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시집가고 장가들 수 없었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丙辰元年(병진원년)이라.
帝有仁德(제유인덕)하사 民有犯禁者(민유범금자)면 必曰(필왈)
糞地雖汚(분지수오)나 降雨露有時(강우로유시)라 하시고
置而不論(치이불론)하시니라
아술 단군의 재위 원년은 병진(환기 5213, 신시개천 1913, 단기 349, BCE 1985)년이다.
임금께서 어진 덕이 있어 백성 중에 ##금법禁法##을 범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분지糞地(오물 구덩이)가 비록 더러우나 비와 이슬이 가리지 않고 내리느니라.” 하시고, 죄를 논하지 않으셨다. (『단군세기』 9세 아술 단군 조)


고조선에는 일찍부터 법 제도가 있었다. 바로 팔조법, 팔조금법이라는 제도다. 고조선 8조법은 여덟 가지 죄와 그에 대한 처벌을 정한 최초의 성문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팔조금법은 범금팔조犯禁八條라고도 하며, 8조 중 3조의 내용만이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相殺, 以當時償殺).
② 남의 신체를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보상한다(相傷, 以穀償).
③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소유주의 집에 잡혀 들어가 노예가 됨이 원칙이나, 자속(自贖: 배상)하려는 자는 50만 전을 내놓아야 한다(相盜,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환단고기』에는 『한서』 「지리지」에 빠져 있는 나머지 5개 항목까지 모두 상세히 열거되어 있다. 지금의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고조선의 8조금법>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이 8개 조항은 고대 사회의 법률 제도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상까지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이것만으로도 단군조선이 이미 고대국가로서 체계와 면모를 완전히 갖춘 문명국가라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단군세기』 9세 단군 조에 ‘범금’이라는 표현이 있어 팔조금법 이전에도 일정한 법 체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전’에는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8조의 교법敎法을 만들어 인민을 교화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중화사관에 의한 역사 왜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