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역사 성인열전 | 동방의 패자霸者, 대진국(발해) 멸망 원인 분석과 부흥 운동

[역사인물탐구]
이해영 / 객원기자


* 사씨史氏(태백일사의 저자인 이맥)는 말한다. 걸걸중상이 패망한 후 남은 무리를 모아 험한 곳으로 피신하여 스스로 보전한 것은 옛날에 태왕(주나라 문왕의 조부인 고공단보)이 빈邠 땅으로 떠난 것과 같다. 고왕高王 조영祚榮이 창업의 자질이 있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라의 기틀을 닦으신 것은, 구천이 월나라를 일으킨 것과 같다. 영토가 확보되자 문덕으로써 이를 닦고 제도를 고치고 관작을 정비하시고, 군현을 두어 큰 나라에 대항하셨다. 나라의 영역이 5천 리에 이르고 역사가 300년에 이르러 당시에 사방에 대진을 능가할 나라가 없었으니 역시 강성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으니,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 그러나 끝내 발해사를 쓰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 유득공의 『발해고』 서문에서


대진국 문물과 제도의 틀을 마련한 문황제 대흠무大欽茂


장문휴로 하여금 당나라의 등주를 공격하며 강력한 대당 전쟁을 벌인 무황제의 뒤를 이은 문황제는 내치에 힘을 기울이며 평화를 추구하는 대외 관계를 추구하였습니다. 당나라는 물론 일본에까지 사신을 보냈는데, 일본에 보낸 사신 편에 자신을 고려 국왕이라고 자칭했습니다. 대진국의 국력이 신장된 데 위기를 느낀 신라의 경덕왕은 재위 21년인 762년 북방에 6성을 축조하고 태수를 두어 대비하였습니다. 백제의 후예인 일본은 대흥 22년에 사신을 보내 ‘신라 정토征討 계획’을 실현하자면서 신라 협공을 제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자 신라도 고립될 것을 우려해 대흥 54년 사신을 파견해 관계 정상화를 제의하기도 하였습니다.

혼란의 대진국


대진국은 건국 후 3세 무황제와 4세 문황제를 거치면서 발전의 기틀을 잡았으나 대흥 57년(793년) 문황제 붕어 이후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 혼란은 818년 11세 성종 선황제聖宗宣皇帝 대인수大仁秀 즉위 전까지 25년 동안 6명의 황제가 교체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문황제의 아들 대굉림大宏臨이 일찍 죽는 바람에 친족 아우 원의元義를 옹립하였으나, 성품이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재위 1년 만에 살해되고, 대광림의 아들 대화흥大華興(또는 대화여大華璵)이 즉위하니 바로 인종仁宗 성황제成皇帝입니다. 그러나 이듬해에 붕어하고, 임금의 숙부인 숭린崇璘이 즉위하니, 목종 강황제穆宗康皇帝입니다. 이후 의종 정황제毅宗定皇帝 원유元瑜, 강종 희황제康宗僖皇帝 언의言義, 철종 간황제哲宗簡皇帝 명충明忠 등이 즉위하나 재위 기간도 짧았고,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11세 성종 선황제聖宗宣皇帝 인수仁秀에 이르러서야 대진국은 다시 중흥의 기회를 맞게 되었습니다.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은 해동성국 대진국


선황제는 태조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4세손으로 이때 제왕의 혈통 계보가 달라졌습니다. 타고난 천품이 영명하고, 덕성과 기질이 신령스럽고, 재주는 문무를 겸비하여 태조 대조영의 풍모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반안군왕般安郡王 대야발大野勃은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선황제는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였고, 『신당서』 「발해열전」에 “해북海北의 여러 부족을 쳐서 크게 영토를 넓혔다.”고 기록될 정도로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대진국에 적대적이었던 흑수말갈이 이 무렵부터 당나라에 조공을 중지하고 다시 대진국에 신속臣屬되었습니다.

선황제는 선대의 무황제와 같은 정복 군주로 확장된 지역까지 관리하기 위해 이전의 3경 외에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와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를 더해 5경 15부 62주로 행정조직을 완비하였습니다. 남경남해부는 본래 옛 남옥저의 땅으로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요동반도 남쪽에 있는 해성현海城縣입니다. 서경압록부는 본래 옛 고리국槀離國 땅이고, 지금의 요하遼河 상류 지역인 임황臨潢입니다. 대진국의 오경제五京制는 고구려의 오부제五部制와 신라의 오소경五小京 및 백제의 오방五方 제도를 계승한 것입니다. 이는 『환단고기』 「삼신오제본기」에 기록된 삼신三神 오제五帝 사상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대진국의 오경제는 요遼와 금金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선황제의 중흥 노력에 힘입어 그 뒤를 이은 12세 장종 화황제莊宗和皇帝 이진彛震, 13세 순종 안황제順宗安皇帝 건황虔晃, 14세 명종 경황제明宗景皇帝 현석玄錫에 이르기까지 국력을 크게 떨쳐 당나라에서는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의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융성했던 이 무렵의 역사적 사실은 오히려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9세기 중반부터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쉽게도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도 이때 기록은 시호 정도 외에는 자세하지 않습니다.

대진국은 알려져 있다시피 거란족에게 멸망당했습니다.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새로운 왕조가 일어나면, 비록 왜곡은 있을지언정 그 이전의 왕조 역사를 정리해 주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거란족은 대진국을 멸망시킨 뒤에 도성을 불사르고 백성들마저 강제로 이주시켜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족인 고려에서 대진국의 역사를 대신 기술해 주지 않은 아쉬움이 우리에게는 더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이제 대진국의 멸망 과정과 줄기차게 이어졌던 망국 이후 회복 운동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진국의 멸망 이유는 무엇일까?


10세기 동아시아 상황
대진국 마지막 황제는 15세 애제哀帝 대인선大諲譔입니다. 대인선이 재위하던 10세기 초엽 동아시아 전체는 거대한 격변에 휩싸였습니다. 후신라는 중앙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 세력이 일어나 고려 태조 왕건과 궁예, 견훤 등이 자웅을 겨루는 후삼국後三國 시대가 전개되었습니다. 서남쪽 당唐나라는 지방 절도사들이 난을 일으켜 하남 지역의 절도사 주전충朱全忠이 907년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後粱을 세웠지만 이도 얼마 가지 못해 망하고, 이존욱李存勖이 후당後唐을 세우는 등 극도의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후 조광윤의 송宋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기까지 약 70여 년에 걸친 오대십국五代十國의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때 대진국이 국력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었으면 이런 혼란한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국력을 신장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호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호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세력은 열하熱河 북쪽의 거란契丹이었습니다. 이때 거란은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흩어진 부족들을 통합해 916년 황제 지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921년 남하해 중원의 여러 성을 공략해 성공하자 자신감을 얻고, 후방의 위험이 될 수 있는 대진국 문제를 매듭짓고 난 뒤 중원으로 쳐들어가려고 했습니다.

한 세대 이상 지속된 대진국과 거란의 전쟁
사실 흥기하는 거란과 대진국 간의 전쟁은 선황제 시기부터 시작해서 약 20년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즉 900년대 야율아보기가 거란의 힘을 모으던 시기부터였습니다. 거란은 결집된 힘으로 대진국의 요동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팽창하는 거란에 두려움을 느낀 대진국은 주변 나라들과 연합하여 거란을 견제하려 하였지만, 당시 동아시아 전체가 혼란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진국과 연합할 세력이 없었습니다. 거란이 발흥하자 대인선은 개국 이래 적국이었던 신라와도 교결交結하는 등 주변 여러 나라들과 동맹을 맺어 거란과 맞서려 했으나, 신라는 925년 대진국과의 관계를 파기하고 거란과 외교 관계를 맺었습니다. 『요사』에 따르면 신라는 925년 거란이 대진국을 공격하자 군사를 파견해 거란군을 지원했습니다. 궁예가 세운 태봉泰封과 뒤를 이은 고려도 거란에 사신을 파견하는 외교 정책을 지속하였습니다.

924년 요동 지역 탈환을 위해 대인선은 군사를 일으켜 거란군을 무찌르고 요주자사遼州刺史 장수실張秀實을 죽이고 포로를 되찾는 등의 대승리를 거뒀습니다. 그러나 이 요동 전투는 대진국이 거둔 마지막 승리였습니다. 복수의 칼날을 간 야율아보기는 925년 서방 정벌에 성공한 뒤 천제를 올린 후 12월 21일 대진국에 대해서 대대적이면서도 전격적인 총공격에 나섰습니다.

전격적인 거란의 공격
대진국에서도 거란과의 접경지대에 정예 부대를 배치하였습니다. 이를 알고 있던 거란은 전통적인 침입 경로인 요동 방어선을 우회해서 수도를 직접 치는 과감한 공격을 시도하였습니다. 보급로 차단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서쪽 방어의 요충지인 부여부扶餘府로 진격하였습니다. 이 부여부가 포위 사흘 만에 함락당하자(1월 3일), 대진국은 노상老相(늙은 재상이란 뜻으로 이름인지, 아니면 관직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함)에게 주력군 3만을 주어 이를 막도록 하였습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대진국의 대응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대진국 멸망의 열쇠를 쥔 인물, 노상老相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 백제의 계백 장군과 결사대를 연상케 하는 이 정예군은 거란과 별다른 교전 없이 맥없이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노상이라는 인물은 후에 거란이 대진의 땅에 세운 거란 분국인 동단국東丹國의 재상급인 우대상右大相이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이 노상이라는 인물이 사전에 거란과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우선은 선황제 즉위 과정에서 바뀐 제왕의 혈통에 어떤 문제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요사遼史』 「야율우지耶律羽之」전에서는 대진국의 멸망 원인을 ‘마음이 멀어진 틈을 타 싸우지 않고 이겼다(離心乘而動故不戰而克)’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황제 대인선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고위 관료급인 노상과 그 세력들의 배신이 결정적인 멸망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로도 줄기차게 이어지는 대진국 부흥 운동이 200여 년간 지속된다는 점에서도 수도 함락이라는 갑작스런 변수는 너무 안타까운 역사의 현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대진국 멸망 과정


마지막 황제 대인선
거란은 926년 1월 9일 수도인 상경용천부(홀한성忽汗城)를 포위했습니다. 부여성이 함락되고, 노상이 이끈 3만 군대가 패배하고 나서 불과 일주일 만에 수도가 포위된 것입니다. 대인선은 백성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렸고, 결사 항전의 의지를 폈으나 결국 4일 만에 항복을 하였습니다. 이로써 대진국은 15세 애제哀帝 청태淸泰 26년(단기 3259년, 서력 926년) 1월 12일, 세조 대중상과 태조 대조영 이래 15대 25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거란군이 총공격에 나선 지 한 달 남짓한 시간에 만주와 요동 지역을 호령하던 대제국이 일순간에 무너졌습니다.

마지막 황제 대인선에 대해서는 이렇다 평가할 만한 기록이 없으므로 정황 추측을 해 보면 이렇습니다. 대인선은 주변 세력과 친선을 도모하고, 성장하는 거란의 요동 공격을 20여 년 동안 저지하며 호각지세互角之勢를 이루었습니다. 물론 누대에 걸쳐 요동 방어선을 공고히 해 왔었지만, 나라의 정세가 혼란하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대인선은 비록 망국의 군주이지만, 이런 부분은 잘 조절했던 통치자였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상경용천부 함락 이후
함락된 수도 상경용천부는 방화로 인해 며칠간 불타올랐습니다.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는 처음에 대인선을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때와 같이 전격적인 수도 함락이었기 때문에, 대진국 전역에서 수많은 저항 세력이 등장했습니다. 이에 야율아보기는 조서를 내리며 회유를 시도하였지만, 대인선은 유민들을 모아 부흥 운동을 펼치려고 시도했습니다.

결국 성난 야율아보기는 다시 상경용천부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그해 7월 거란군의 회군 때 대인선과 황후를 끌고 가서 거란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현 내몽골 파림좌기) 서쪽에서 살게 하였고 이후 기록은 없습니다. 이때 야율아보기는 대인선과 황후에게 각각 오로고烏魯古와 아리지阿里只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이는 야율아보기와 그 부인이 대진국을 멸망시켰을 때 탔던 말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굉장한 모욕적인 처사였습니다.

야율아보기는 엣 대진국 영역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운 뒤 돌아오던 중 부여부扶餘府에서 926년 병사하였습니다. 이후 거란은 승승장구하였지만, 1019년 고려와 맞붙은 귀주대첩에서 강감찬 상원수에 의해 10만 정예군이 몰살당하면서 기세가 꺾여, 1125년 말갈의 후예인 여진이 세운 금金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대진국 멸망 원인은 과연 무엇인가?


대진국은 왜 갑작스럽게 멸망하게 되었을까요?

우선 거론되는 멸망 원인은 대진국의 백성이 고구려인과 말갈인의 이중적 구성이라 위기의 순간에 단합하지 못하였다는 설(주로 흑수말갈)과 14세 명종 대현석 시기부터 이어 온 귀족들의 권력 다툼과 횡포, 마지막 황제 대인선의 무능으로 인한 민심 이반설 등이 대표적입니다.

한편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한국학 교수 개리 레드야드는 대인선이 거란에 항복할 때 모두 소복 차림이었다는 기록을 들어 어떤 흉사로 인해 대진국이 멸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백두산 화산 폭발에 의한 자연재해 등으로 멸망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기록이 없기에 그 시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복합적인 이유로 발해가 멸망한 것으로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위에 든 여러 가지 멸망 원인에 개인적 의견을 더하자면, 대진국은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원인과 조선 시대 병자호란 패배의 원인이 합쳐진 결과라고 보입니다. 즉 고구려 멸망에는 연개소문 자식들의 내분으로 인한 혼란과 연남생의 매국 행위가 있었습니다. 백제는 계백 장군이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막아서 번 시간 동안 공주로 파천한 의자왕을 웅진 방령인 예식진禰寔進이 배신하고 왕을 사로잡아 당군에 투항했습니다. 대진국은 계백 장군 같은 결사대가 없었고, 추측이 맞는다면 노상과 같은 민족 반역자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제 수도 사비성은 주변이 평야가 많아 지금의 대전大田 계족산성을 지나면 별다른 방어 시설이 없습니다. 대진국 수도 상경용천부도 부여성에서부터 평야가 펼쳐져 있어 방어선이 취약한 구조였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거란군은 훗날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 때처럼 신속한 기병을 앞세워 오직 수도 점령과 황제 생포를 목표로 진격하는 기동전을 펼쳤습니다. 이런 복합적인 요인에 백두산 폭발이라는 자연재해가 합쳐져 300년 대제국이 망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꺼지지 않은 혼 - 대진국 부흥 운동


부흥 운동의 서막
고려 태조 9년 대진국이 거란에 의해 멸망당하자, 대진국 유민들은 고구려 제국 재건 의지를 표방한 고려에 많이 귀순하였습니다. 태자 대광현大光顯이 수만 명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귀순하자, 왕건은 그에게 왕계王繼라는 이름을 하사해 왕실 족보에 올리고,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습니다.

또한 대진국 각지에서 부흥 운동이 꽤 오래도록 지속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지배층은 소수의 고구려인, 피지배층 다수는 말갈인이라는 불안한 이중 구성 때문에 멸망했다고 하는 설은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말갈인이라고 하는 이들 역시 만주 지역에 살던 고구려인입니다. 다 같은 대진국 백성이라는 정체성과 동질성을 지닌 이들이었기 때문에 끈질기고도 긴 항쟁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는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서술된 내용을 바탕으로 간략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대진의 옛 영토를 다스리기 위한 거란의 분국, 동란국
대진국 멸망 이후 그 영역에 세워진 첫 왕조는 거란이 수도 상경 용천부에 세운 괴뢰국인 동란국東丹國입니다. 동란국(또는 동단국)은 곧 ‘동쪽에 있는 거란국’이란 뜻입니다. 이때 거란은 국호를 요遼라고 하였습니다.

동단국은 야율아보기가 맏아들 배倍를 인황왕人皇王으로 봉하여 대진국 영토에 세운 나라입니다. 연호를 감로甘露로 정하였으며, 상경용천부인 홀한성忽汗城의 이름을 천복天福城으로 고쳐 수도로 삼았습니다. 천자의 관과 옷을 표준으로 삼아서 열두 줄 면류관을 쓰고 모두 용의 형상을 그렸습니다. 대진국의 옛 제도를 이어받았는데, 우대상右大相으로 대진국 멸망 당시 3만 정예군을 이끌었던 이로 추정되는 노상老相을 삼았습니다.

이후 야율배耶律倍는 거란의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자 930년 후당後唐으로 망명했습니다. 요나라 중앙 통치 기구의 통제를 받던 동단국은 감로 27년인 952년 12월에 요나라가 동경 중대성中臺省을 폐지하면서 없어졌습니다.

대진국 지배층이 세운 정안국과 흥료국
928년 대진국의 권신權臣 열만화烈萬華가 서경압록부에서 정안국定安國을 건국했으며, 나중에 오현명烏玄明이 계승하였습니다. 오현명은 고려 경종 6년인 981년 여진의 사신을 통해 송나라에 국서를 보냈고, 송나라도 회답을 보냈습니다. 이후 정안국과 송나라의 외교가 빈번해지자, 이를 시기한 거란 성종聖宗은 986년 정안국을 토벌하였습니다.

대진국 멸망 103년 후인 1029년, 대진국 태조 대조영의 7세손이자 요나라 동경東京 장군이었던 대연림大延琳이 요나라의 내분을 이용해 흥료국興遼國을 세웠습니다. 대연림은 천흥天興 황제라고 자칭하고, 연호를 천경天慶으로 정했습니다. 이해는 고려 현종 20년이었는데, 대연림은 요나라와 싸우는 한편 고려와 동맹을 맺으려 했지만 고려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고립된 흥료국은 이듬해 요나라에 정벌되었습니다. 대진국 왕손 대연림이 세운 나라 이름이 요나라를 부흥하자는 뜻의 흥료국이었던 것은 그가 대진과 요나라의 통합을 꿈꿨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마지막 부흥 운동, 고영창 장군의 대발해국
고려 예종 11년인 1116년, 발해 유민인 고영창高永昌이 동경 요양성東京 遼陽城에서 대발해국大勃海國을 건국합니다. 요동 유수 소보선蕭保先이 정치를 가혹하게 하자, 당시 비장裨將이었던 고영창이 수십 명과 함께 술김에 용맹을 믿고 칼을 들고 담을 뛰어넘어 소보선을 죽였습니다. 고영창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융기隆基라 하였으며, 요동 50여 주를 차지하였습니다. 대발해국은 다른 이름으로 대원국大元國이라고 했는데, 요나라는 대원국을 멸망시키려 했지만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침 흥기하던 금나라의 침공을 받았고, 고영창은 친위대를 이끌고 도망쳤으나 도중에 사로잡혀 참살당했습니다. 이로써 대진국 부흥 운동은 그 막을 내렸습니다.

대진국 역사에 대한 평가


대진국은 고구려의 후신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옛 강역을 회복하고 더 넓은 영토를 통치하였으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천자의 제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은 신라 중심의 사고에 젖어, 조선 전기 이맥李陌이 『태백일사』 「대진국본기」를 펴내고 조선 후기 유득공柳得恭이 남북국 시대라는 인식으로 『발해고渤海考』를 쓰기 전까지는 대진국을 우리 역사에 포함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이렇듯 대진국 역사를 소홀히 한 사이에 중국은 대진국을 동북공정의 첫 번째 대상으로 삼아 자국 역사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현재 대진국 영역에 한국인은 들어가지 못하고 있으며, 기존 강단사학자들은 그럴 의지조차 없습니다. 그 영역에 진입해서 유물과 유적들을 연구하지 못하는 상황이고, 이를 항변해야 할 한국 사학자들은 그저 중국이 내어 준 논리와 자료에 순응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대진국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바탕에는 『환단고기』가 있습니다. 인류사와 한민족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대진국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들을 귀와 눈을 우리는 열어야 합니다.


<참고문헌>

『역주본 환단고기』 (안경전, 상생출판, 2012)
『이덕일의 한국통사』 (이덕일, 다산북스, 2020)
『한국사 제왕열전 』 (황원갑, 마야, 2007)
『발해고 』 (유득공, 송기호 역, 홍익출판사, 2020)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 (소원주, 사이언스북스 , 2010)



거란 황실은 고구려 후예인가?
대진국을 멸망시킨 거란은 요하에서 일어난 민족의 한 갈래로 182년까지는 선비씨鮮卑氏라고 하였습니다. 거란은 고구려 광개토열제의 정벌을 받은 뒤로 오랫동안 고구려의 속국으로 있었습니다. 한때 당나라에 예속된 적이 있었으나, 5대 10국 시대가 되면서 북방의 패자로 등장하였습니다. 태조 야율아보기는 916년에 이르러 황제를 칭하고 926년 대진을 멸망시키면서, 송宋을 멀리 남쪽으로 밀어내고 중원의 북방을 차지하여 몽골과 만주, 북중국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거란족이 일어난 지역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옛 고리국槀離國 일대였습니다. 이 고리국은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와 후북부여(졸본부여)를 세운 동명왕 고두막한이 태어난 고향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북부여의 모체라 할 수 있는 나라가 바로 고리국이고, 이 고리국을 이은 나라가 고추모 성제의 고구려입니다. 그렇기에 고구려와 거란 황실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을 것임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가설에 힘을 실어 주는 발견이 하나 있었습니다.

1986년 내몽골 통료通遼시 내만기奈曼旗 청룡산에서 요나라 진국공주陳國公主(1000~1018) 야율씨의 부부 합장묘와 묘지墓誌가 발견되었습니다. 묘지에 따르면 공주의 성씨는 요나라 황성皇姓인 야율耶律씨로 경종景宗 야율현耶律賢의 손녀입니다. 아버지는 경종과 황후 소작蕭綽의 둘째 아들이자, 요나라 성종聖宗의 동생인 진진국왕陳晉國王 야율융경耶律隆慶입니다. 진국공주는 외삼촌인 부마도위 소소구蕭紹矩에게 시집갔으나, 그만 열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부부가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는데, 공주의 얼굴에는 황금 가면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묘지명 내용 중에 “본래 그 성씨의 시작은 일찍이 고씨高氏의 후예로서 6대 후손이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는 요나라를 세운 야율씨가 고씨라는 뜻으로 고구려 고씨의 후예일 가능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요나라 도읍 상경임황부 자리인 현 내몽골 파림좌기에는 지금도 거대한 고구려 토성이 존재하고 있으며, 고구려 태조 태왕을 비롯해서 여러 임금들이 공격했던 서안평 자리입니다. 여러모로 보아도 거란의 역사는 우리 역사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대진국 멸망의 미스터리 - 백두산 화산 대폭발
“낯선 곳의 노두에서 눈에 익은 이 화산재와 만나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 때면 잠시 작업을 멈추고 멀리 백두산이 위치한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조용히 눈을 감으면 그 옛날 광활한 들판에 불고 있던 바람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멀리서 사람들의 함성과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가 바람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이 백두산의 화산재는 사가들이 기록하지 않았던 그 시대와 그 시간들을 회고하게 한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그곳에 살다 간 사람들의 숨결을 느끼게 해 준다. 그곳에는 시가 있고, 꿈이 있고, 역사의 치열한 불꽃이 교차한다.

…… 동해를 건너간 백두산 화산재는 한 때 그곳에 존재했던 국가의 흥망과 사라져 버린 인류 문명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오랫동안 잊혀 왔고,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도 노래하지 않았던 한 편의 장대한 대 서사시인 것이다.”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 제 9장 필드노트 442~443쪽


고구려 유민이 말갈족 등과 함께 건국한 대진국의 영토는 고구려 전성기의 약 2배, 후신라의 약 5배에 달했습니다. 천제를 올려 삼신상제님을 신앙하는 신교가 융성하였고, 독자적 연호와 천하관을 지닌 천자국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진국은 건국 258년째 되던 해에 거란족의 침입을 받고 불과 10여 일 만에 멸망했습니다. 우리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개척하고 문물이 융성했던 대진국이 왜 그처럼 순식간에 멸망했던 것일까요. 대진국의 멸망은 우리 역사의 큰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한데, 그중에는 백두산 폭발이 대진국 멸망의 원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대진국이 멸망한 것은 서기 926년인데, 비슷한 시기에 백두산의 화산 폭발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백두산 폭발은 베수비오 화산보다 100배 강력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폭발을 일으킨 화산은 1815년에 발생한 인도네시아 숨바와 섬의 탐보라 화산입니다. 당시 직접적인 피해로 사망한 주민만 해도 7만여 명에 달했으며, 분출된 화산재로 인해 반경 600㎞까지 3일 동안 캄캄한 밤이 되었습니다. 그 화산재는 성층권으로 올라가 지구의 기온을 수년간 1도가량 낮췄으며, 유럽과 한반도까지 이상기후와 흉작에 시달렸습니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10세기에 일어난 백두산의 화산 폭발은 그보다 더 위력이 컸다고 합니다. 백두산 폭발로 방출된 황의 양이 탐보라 화산 폭발 때 발생한 황의 양보다 더 많았던 것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백두산 폭발은 폼페이를 멸망시킨 이탈리아 베수비오 화산보다 100배나 더 강력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진국 멸망 원인은 백두산 화산 폭발이었는가?
대진국 멸망 원인이 미스터리한 이유는 기록의 부재와 더불어 대진국의 유적이 거의 모두 자취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살펴보았듯이 대진국의 멸망에 대한 그나마 자세한 기록은 거란이 남긴 것이고,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도 상세한 내용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때 대진국의 수도이자 5경 중의 하나였던 상경용천부 일대는 화산 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현무암으로 지층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역시 백두산 폭발이 대진국의 멸망 원인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로 꼽히고 있습니다. 백두산이 대진국 멸망 시기에 폭발했다는 점은 사실이니, 이 때문에 멸망했을까요?

백두산 폭발 시기는?
인류 역사상 최대 폭발이지만 백두산 폭발 시기에 대한 정확한 연구 결과가 없다는 점도 이 가설을 뒷받침해 왔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백두산 폭발이 실제로 일어난 시기는 과학자들과 역사학자들에게 매력적인 연구 대상이었고, 기존 연구들은 백두산의 폭발 시기를 대진국 멸망 후인 930~940년으로 추정했습니다.

그런데 2017년 백두산의 폭발이 대진국 멸망과는 관련이 없다는 좀 더 명확한 연구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 지리학과가 주축이 되어 클라이브 오펜하이머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은 중국 측에서 발견된 화석화된 잎갈나무에 대한 새로운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법으로 얻은 백두산의 정확한 분화 연대 측정값을 이용해 백두산의 폭발 시기를 3개월의 오차 범위로 추정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화석화된 이 나무에는 서기 775년 지구에 영향을 미쳤던 방사선 폭발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방사성 폭발이 당시 생존해 있던 모든 나무에 흔적을 남겼다는 것은 최근에서야 밝혀진 사실입니다. 연구팀은 북한에 직접 들어가 3년 동안 백두산을 탐사하고 백두산의 탄화목을 분석한 결과 대분화는 정확히 946년의 마지막 2~3개월 사이에 있었다고 밝힌 것입니다. 대진국 멸망보다 20년 후의 일입니다.

이는 946년~947년 사이에 하늘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렸다는 『고려사』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또한 일본의 한 사찰에서 발견된 연대기 중 ‘하얀 재 가루가 눈처럼 내렸다’는 946년 11월 3일의 기록과도 맞아떨어집니다. 백두산 폭발 당시 화산재가 일본까지 날아간 사실은 일본 지질조사단에 의해 밝혀진 바 있습니다.

만약 이 연구 결과가 확실하다면 그동안 의문으로 남아 있던 대진국 멸망 후의 기록들도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일본 역사에 의하면 대진국은 멸망 후인 930년대에도 계속 사신을 보내 왔으며, 고려사에는 934년 대진국의 태자 대광현이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했습니다.

진짜 멸망 원인은?
어쩌면 위 기록들처럼 대진국은 단 한 번의 침공으로 멸망한 것이 아니라 비록 수도는 함락되었지만, 거센 부흥 운동으로 거란과의 장기적인 전투를 벌였다가 백두산 폭발로 인해 그 마지막 동력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아무튼 이후 백두산 대폭발이 대진국의 멸망 원인이었다는 가설은 힘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자연의 대변화가 일순간에 일어나지 않듯이 대폭발 이전에 크고 작은 분화가 연이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영향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성산입니다. 그 성산에서 붉은빛이 흘러나오고 검은 연기가 피어나는 것을 본 대진국인들은 어떠했을까요? 그 심리적 충격과 불안은 가히 공포였을 것입니다. 하늘의 재앙, 세상의 종말, 아니면 새로운 세상의 열림으로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백두산 대폭발 이후 죽음의 땅이 된 만주는 200년 정도 지나서 다시 생명이 번창하는 땅이 되었고, 그때 영웅 아골타가 등장하면서 말갈인의 후예들이 금金나라를 세우며 다시 중원을 경략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