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와 임나의 진실을 밝힌다(1)

[종도사님 말씀]
도기 148. 12. 7(금), 2018년 세계환단학회 추계학술대회, 부경대학교 대학극장

프롤로그


감사합니다. 오늘 가야의 꿈을 되찾을 수 있는 이곳 부산, 낭만의 도시에서 1,500년 전 좌절된 가야의 문화 그 숭고한 꿈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환단고기』의 근본 주제는 지난 1만 년 한국인과 인류의 창세역사의 문화 정신입니다. 그 역사를 만든 문화의 원형정신을 상징하는 주제어는 신神, 삼신三神, 일신一神, 삼신일체三神一體, 삼신상제三神上帝와 같이 불과 한두 글자나 서너 글자입니다.

대우주의 광명문화가 하늘과 땅과 인간 속에서 어떻게 일체로 작동되는가? 그것이 하늘에 있을 때는 환桓이고, 어머니 땅속에 있으면 단檀이고, 우리 인간의 몸속에 있으면 천지광명 한韓입니다. 우리는 천지의 아들과 딸로서 천지부모의 우주광명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환단고기』는 한韓사상을 담고 있는, 우주광명 문화의 원전이자 문화 경전입니다. 동방 신교의 우주관과 신관과 인간관을 근본으로 한 진정한 우리의 역사 경전입니다. 한국인의 문화역사 지평을 넘어 지구촌 인류의 보편역사관, 원형문화 정신을 밝혀 주는 유일한 책이 『환단고기』입니다. 우리는 『환단고기』 원전 공부를 창의적이고 긍정적인 시각에서 좀 더 건강한 마음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꼭 간직하고 발전시켜 나가고 완성해야 할 원형문화 정신을 전하는 무궁한 이야기가 『환단고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구촌을 30년간 답사했는데요, 『환단고기』 문화가 지구를 넘어서 이 우주에 꽉 차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것은 저의 체험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도 좀 더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가 배운 역사의 잘못된 상식을 되돌아보고 그것을 넘어서서 새로운 희망을 잊힌 왕국, 가야의 역사에서 찾아보고 분단의 아픔을 치유할 진정한 새 소식이 무엇인지 배워 보고자 합니다.

가야의 시원역사, 가야를 관통하는 진정한 역사 정신은 무엇인가? 그 역사의 중심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서론: 한국 뿌리 역사의 왜곡, 말살


결론은 역사 전쟁입니다. 동북아 역사문화 주권 전쟁입니다. 현대사의 주제인 가을개벽, 후천개벽을 앞둔 마지막 역사 주권 전쟁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우리가 이 늦가을의 정취를 맛보며 산책로를 거닐 때 문득 떠오르는 것은 ‘역사는 무엇보다 힘의 법칙이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복과 패망, 충돌과 화해, 조화와 배신의 길을 끊임없이 오가면서 오늘의 인류 역사문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 중심에 있었던 가야. 이 가야의 역사문화 정신은 오늘 분단의 역사 현실에서 어떤 새로운 희망적인 소식을 전해 줄 수 있는가? 이것을 한번 생각해 보면서, 오늘 용광로처럼 역사의 변화 동력이 들끓었던 백제와 신라, 북방의 강대국 고구려 사이에 끼어서 5백 년 왕조의 역사를 이어 오다가 마침내 무너진 가야의 문화 정신의 원류가 무엇인지 더듬어 보겠습니다.

1. 국통 파괴: 엉터리 침략사관
가야의 역사문화 정신을 관통하기 위해서는 첫째, 우리의 역사를 간단히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국통, 우리 역사의 족보, 우리의 시원 역사문화는 그 뿌리까지 파괴되었습니다. 환국과 배달, 조선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환국을 부정하면 환국·배달·조선이 다 부정됩니다. 또 조선을 부정하면 그 이전의 배달과 환국이 저절로 사라져 버립니다. 인과법칙에 따라서 환국과 배달, 조선은 어느 하나가 부정되어도 한국인의 근본정신 틀이 꺾이고 파괴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오늘의 한국인은 고구려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국통을 거꾸로 돌려 오늘날 분단의 역사에서 조선, 고려, 사국시대로 올라가 보면 고구려는 과연 어디서 왔는가? 그것이 바로 광개토대왕비 비문에 있습니다. 고구려는 ‘출자북부여出自北夫餘’, 북부여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이것보다 정확한 고구려의 근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광개토태왕비

惟昔始祖都牟王之創基也(유석시조추모왕지창기야)에 出自北夫餘(출자북부여)하시니 天帝之子(천제지자)시오 母河伯女郞(모하백여랑)이시니
생각하옵건대 옛적에 시조 추모왕께옵서 나라 터를 창업하시었나니 북부여로부터 출하시었으며 천제님의 아들이시오 어머니는 하백 여랑이시니


환국·배달·조선에서 북부여로 국통이 계승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여사를 가르치지 않아요. 교과서에 실제 부여의 역사는 몇 줄 안 됩니다. 환국·배달·조선에서 북부여로 넘어가서 열국시대로 넘어가는데 이 북부여가 완전 부정되어 버리고, 그 자리에 엉터리 침략사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이라는 엉터리 역사의 마지막에 일본제국주의 침략사관에 따른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중화사관과 일제침략사관, 이 두 가지가 하나로 어우러져서 한국인의 역사문화 정신의 기본 바탕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습니다. 부정해 버린 것입니다.

2. 가야 대왕국 문화의 원형정신
저는 가야를 대왕국으로 봅니다. 가야는 단순한 6가야 연맹체가 아니었습니다. 가야의 독창적인 문화 정신은 무엇인가? 가야문화 속에는 대륙의 웅대한 역사문화의 원형정신이 살아 있습니다. 과거 역사 속에서 인류의 영원한 문화 원형정신을 들여다볼 수가 있어요. 바로 그 속에서 우리 인간이 태고의 시간 이래 살아오면서 본능적으로 외치는 그 한마디가 있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왜 인간으로 태어나는가? 우리 인생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역사의 목적지는 무엇인가? 인간과 자연 그리고 동서양 종교 사상사에서 모든 구도자, 기도꾼, 성자들이 추구한 깨달음의 영원한 진리 주제는 무엇인가?

이것은 서양 그리스 신화, 로마 제국사, 이집트, 중동, 기독교, 유대 민족의 구약성서, 팔만대장경의 불교 가르침, 유교·도교의 가르침보다도 근본적인, 진정으로 살아 있는 인류 역사의 중심 주제입니다. 그것이 가야문명사 속에, 그리고 우리 가슴속에 힘차게 살아 있습니다.

제가 동서양의 많은 유적지를 보고 느낀 것이 있습니다. 박물관 진열장 안에 전시된 유물이 비록 작고 보잘것없지만 여유 있는 마음으로 잘 보면 ‘야, 정말로 기적 같다. 어떻게 수천 년, 수만 년 전에 저런 물건을 만들었을까?’ 하고 감탄하게 됩니다. 구석기, 신석기의 옛사람들, 인류 조상들이 만든 유물·유적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때로는 경이로운 마음을 가지고 과거 문화의 숨결을 잘 들여다보면 오늘 우리들 속에 진정으로 살아 있는 인류 역사문화 정신을 늘 새롭게 깨닫고 말할 수 없는 큰 기운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론 1. 가야와 임나의 진실



본론으로 넘어가서, 오늘 주제를 크게 세 가지로 잡아 봤습니다. 첫째는 가야와 임나의 진실입니다. 저 뒤 플래카드에 ‘가야와 임나의 역사 진실을 밝힌다’고 쓰여 있어요. ‘가야와 임나의 진실’, 한번 소리를 질러도 기분이 좋거든요. ‘가야와 임나의 진실!’

가야란 어떤 나라인가? 우선 가야의 문화 원류 정신을 제대로 못 보는 근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관의 빈곤에 기인합니다. 환국을 계승한 배달·단군조선의 국통 전개에서 ‘북삼한에서 남삼한 시대로 전환한 논리’를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주관과 국통 두 가지를 제대로 복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주관을 근본으로 해서 역사의 대세를 봐야 됩니다. 인류가 자연 속에서 시련을 극복하는 힘은 무엇인가? 이 우주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하늘은 무엇이며, 땅은 무엇이며, 이 천지는 우리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 돌아가는가? 천지와 나, 신과 나, 조물주 하나님과 나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환단고기』의 우주관·신관을 더듬어 찾다 보면 진리의 해답이 『환단고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서 인류의 사유의 원형, 궁극의 원형이 『환단고기』에 있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학문이 짧고 역사관이 빈곤해서, 또 식민사학의 여독이 아직 가슴속에서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편향된 시각은 인생을 망치고, 학문의 근본을 파괴하는 무서운 원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아상我相을 벗어야 됩니다.

1. 남삼한의 성립과 가야의 건국
가야 역사문화의 신비와 역사 정신의 근본을 보려면 무엇보다도 남북 삼한관, 북삼한北三韓에서 남삼한南三韓으로 전환되는 역사의 논리에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쉽게 말해서 단군조선이 무너진 뒤에 북쪽에 있던 삼한 백성들이 한강 이남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 남삼한입니다.

식민사학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하지만 실제로 중삼한中三韓이 있었습니다. 중삼한은 한반도에 있었던 남삼한입니다. 지금 이 부산도 가야 땅입니다. 부산, 김해는 금관가야 땅입니다. 그러니까 이쪽은 변한이고 경주 저쪽은 진한입니다. 그다음에 저쪽 충청도, 전라도는 마한입니다. 남삼한은 단군조선의 북쪽 삼한 백성들이 나라가 망하면서 한강 이남으로 내려와서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북삼한 즉 단군조선을 신화의 역사로 송두리째 부정했습니다. 대륙삼한, 북삼한이 기록에 있는데도 그것을 엉뚱하게 해석하고 조작하고, 잘못된 역사관으로 ‘없다’고 말했습니다.

1) 익산에 마한을 세운 번한의 상장 탁

이 남삼한이 성립된 이후에 신라, 백제 그리고 가야가 건국되었습니다. 마한 땅, 충청도에는 단군조의 번한에 있던 상장上將 탁卓이 군산 쪽으로 와서 익산益山에 월지국月支國
1)
을 세웠습니다. 그때 왕검성을 뺏긴 번한의 마지막 부단군 준왕準王(기준)이 군산으로 들어와서, 탁 장군이 나라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1) 낙랑의 이주와 동시대인 기원전 194년 모수리慕漱離 단군 때, 번한의 상장上將 탁卓이 번한을 떠나서 오가五加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월지月支 땅에 이르렀다. 탁이 세운 월지국을 중마한中馬韓이라고도 하였다.


2) 북삼한의 유민이 내려와 세운 신라

약 2,200년 전에 당시 중국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한고조漢高祖의 증손자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쳐들어왔습니다.

그때 한무제를 격퇴한 민족의 영웅이 서압록인西鴨綠人 고두막한高豆莫汗입니다. 이분이 뒤에 북부여 5세 고두막高豆莫 단군이 됩니다. 그 따님이 파소婆蘇인데, 그분을 ‘선도산仙桃山 성모’라 부릅니다. 파소가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밴 상태로 한반도 경주에 내려왔는데 만주에 있었던 단군조 진한의 유민들과 육촌장六村長이 박혁거세를 받들어 신라를 건국했습니다.

斯盧始王(사로시왕)은 仙桃山聖母之子也(선도산성모지자야)라
昔(석)에 有夫餘帝室之女婆蘇(유부여제실지녀파소)가 不夫而孕(불부이잉)하니
爲人所疑(위인소의)하야 自嫩水(자눈수)로 逃至東沃沮(도지동옥저)하고
又泛舟而南下(우범주아남하)하야 抵至辰韓奈乙村(저지진한나을촌)하니
時(시)에 有蘇伐都利者(유소벌도리자)하야 聞之(문지)하고 往收養於家(왕수양어가)러니
而及年十三(이급년십삼)에 岐嶷夙成(기억숙성)하야 有聖德(유성덕)이라
於是(어시)에 辰韓六部(진한육부)가 共尊(공존)하야 爲居西干(위거세간)하니
立都徐羅伐(이서라벌)하고 稱國辰韓(청국진한)이오 亦曰斯盧(역왈사로)라.

사로斯盧의 첫 임금(박혁거세)은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의 아들이다. 옛적에 부여 황실의 딸 파소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남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이에 눈수嫩水에서 도망하여 동옥저에 이르렀다가 또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한辰韓의 나을촌에 이르렀다.

그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이 소식을 듣고 가서 아이를 집에 데려다 길렀다. 나이 13세가 되자 뛰어나게 총명하고 숙성하며 성덕이 있었다. 이에 진한 6부가 함께 받들어 거세간居世干이 되었다. 서라벌에 도읍을 세워 나라 이름을 진한辰韓이라 하였고, 사로라고도 하였다. ( 『환단고기』 「태백일사」)


先是朝鮮遺民(선시조선유민) 分居山谷之間(분거산곡지간) 爲六村(위육촌)…
是爲辰韓六部(시위진한육부이에)
이에 앞서[#2)
조선의 유민(단군조선인)이 산골짜기에 나뉘어 살며 6촌을 이루었다.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 『삼국사기』)#]
2) 박혁거세의 신라 건국보다 180년 앞선 단군조선 말기이다.


3) 흉노제국의 황손 김일제의 후손이 가야를 세움

번한과 진한의 유민들이 합류해서 김해 방면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때 북방 대륙의 유목문화 가운데 가장 강력한, 동서 문명을 교류시킨 흉노의 황손皇孫인 김일제金日磾의 후손
3)
이 남삼한의 변한에 들어와 가야 왕조를 열었습니다. 신라에 들어가 경주 김씨의 시조가 된 김알지金閼智와 가야를 세운 김수로金首露는 조상이 같으므로 큰집과 작은집의 관계와 같습니다.
3) 1954년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 동쪽 교외 궈자탄郭家灘에서 출토된 ‘김씨 비문’에는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금천少昊金天씨이다.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의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이시다. (중략) 먼 조상은 일제日磾이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을 하였다. (중략) 한이 난리가 나서 괴로움에 처하자 멀리 피해 요동遼東에 살게 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2. 가야는 어떤 나라인가
1) 가야는 삼한 가운데 변한

북삼한에서 남삼한으로 전환되어 진한, 변한, 마한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삼三’은 우주의 원형문화입니다. 신성한 수, 3수를 근거로 한 것입니다. 하늘에 삼신, 땅에 삼한, 인간 몸속에 삼진三眞이 있어요. 우리가 하늘을 인식할 때도 천문을 보면 자미원, 천시원, 태미원 이렇게 삼원三垣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늘과 땅과 인간 몸속에 있는 마음의 원형, 인간 몸속에 있는 영원한 신성은 3수로 작동이 됩니다. 극미 세계인 원자도 그렇습니다. 우리들 마음 의식 경계도 3수의 구성 원리로 말합니다.

이것을 인류 원형문화의 경전 「천부경」의 논리로 보면 ‘천일天一 · 지이地二 · 인삼人三’입니다. 가야는 삼한 가운데 변한입니다. 하늘의 도는 천일 마한이고, 어머니의 도는 지이 변한이고, 그리고 천지의 주인, 인간의 도는 인삼 진한입니다. 이 인삼을 태일太一로도 말합니다.

2) 가야에는 어머니 문화가 강렬하게 살아 있다

변한, 가야는 땅의 정신이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는 곳입니다. 문자 그대로 천지인에서 어머니 땅의 문화 정신을 크게 깨우쳐 줍니다. 건국자 수로왕과 허황후의 결혼 이야기, 러브스토리에서 그런 정신을 크게 느낄 수 있습니다. 수로왕의 작은 공주로 알려진 묘견妙見 공주는 일본에 들어가서 구주九州에 야마대邪馬臺라는 연맹체 통일 왕조의 나라를 열었습니다.

3) 가야 문화의 원형정신

가야는 무엇보다도 문화의 원형정신을 잘 보존했습니다. 천지의 문화 원형정신을 분명하게 제천문화 성역으로 구축했어요. 중국 기련산祁連山 쪽에는 상상할 수 없는 문화의 깊은 추억을 안겨다 주는 소도제천 성역이 있었습니다. 흉노의 소도제천 문화는 쉬운 말로 대우주의 지고신至高神 하나님을 모시는 예배 문화입니다. 신을 모시는 숭고한 문화 그것을 다른 말로 신의 대행자 ‘텡그리Tengri 고도孤塗’라 합니다. 흉노는 천자문화의 역사 정신을 뚜렷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4) 상제님의 천명을 받아 혼인한 김수로와 허황후

①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

수로왕과 허황후가 만날 때 그냥 만난 것이 아닙니다. 수로왕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황천상제님께서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와서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했다.” 그때 아홉 구九 자에 칸干이라 하는 간干 자, 구칸九干이 모여들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습니다. 우리가 왕님을 모시게 됐다고!

所居北龜旨(소거북구지) 有殊常聲氣呼喚(유수상성기호환)...
皇天所以命我者(황천소이명아자) 御是處(어시처)...
북쪽 구지에서 “황천상제께서 나에게 명하시길,
이곳에 와서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셨다.”

九干等如其言(구간등여기언) 咸忻而歌舞(함흔이가무) 未幾仰而觀之(미기앙이관지) 
唯紫繩自天垂而着地(유자승자천수이착지) …
구간九干들이 ... 모두 기뻐하여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얼마 되지 않아 ... 자줏빛 줄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았다.

尋繩之下(심승지하) 乃見紅幅裹金合子(내견홍폭과금합자) 開而視之(개이시지) 
有黃金卵六圓如日者(유황금란육원여일자) ... 過浹辰(과협진) 翌日平明(익일평명) ...
而六卵化爲童子(이육란화위동자)... 其於月望日卽位也(기어월망일즉위야) 
始現故諱首路(시현고휘수로) 或云首陵(혹운수릉) 國稱大駕洛(국칭대가락) 又稱伽耶國(우청가야국) 
줄이 내려온 곳을 찾아가니 붉은 보자기가 금합을 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금합을 열어 보니 태양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 열이틀이 지나고 그 이튿날 아침... 어린아이로 변해 있었는데... 그달 보름에 왕위에 올랐다. 세상에 처음 나타났기 때문에 이름을 수로 혹은 수릉이라 하고 나라를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 불렀다. ( 『삼국유사』 「가락국기」)


그러니까 구칸이 김수로를 대칸, 왕으로 모신 것입니다.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쭉 내려오면서 금합, 금으로 된 함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 알이 여섯 개 있더라’는 것은 천자가 탄생한다는 것을 하늘에서 신성 의식, 신교로 내려 준 겁니다. 누가 그 신교 메시지 받은 것을 읽어 준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줏빛 줄은 뭘까요? 그건 천자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셔야 될 주군이 오시는가 보다’ 해서 구칸이 모인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기껏해야 몇백 가구를 거느린 작은 부족장입니다. 하여간 구칸이 모여서 대칸을 모신 겁니다.

그런데 수로왕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하나로부터 셋을 이루고 이 셋은 일곱을 이루니 일곱 성인이 머물 땅이다.’
4)
이것은 「천부경」 문화입니다. 하나에서 셋, 셋에서 일곱이 된 것입니다. 일신은 삼신이 되고, 삼신은 구체적으로 칠성이 됩니다. 칠성은 도교, 유가에도 있습니다. 또 불가에 칠불시대가 있었고, 기독교 요한계시록에 하나님의 일곱 성령 문화가 나옵니다. 그것은 천지의 뿌리가 되는, 우주 생명의 근본이 되는, 우주 통치 사령탑이 있는 천주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 세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디에 나오든지 우주의 원형수학 정신에 근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4) 하황자일성삼何況自一成三 자삼성칠自三成七 칠성주지七聖住地 고합우시固合于是


② 김수로와 허황후

그런데 재미있게도 허황후가 또 이런 얘기를 합니다. 허황후가 “제가 본국에 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꿈을 꾸셨는데, 함께 황천상제님을 뵈었답니다. 그 상제님이 ‘가락국의 선량한 임금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보냈다. 신령스럽고 거룩한 이는 오직 그 사람뿐이다’라고 하셨어요.” 이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있는 내용입니다. 원본을 보면 ‘기유재이其猶在耳’, 상제님, 삼신상제님, 황천상제님 말씀이 내 귀에 지금도 울린다고 했습니다. ‘유재猶在’, 아직 유猶 자, 있을 재在 자, 그 말씀이 아직도 내 귀에서 울리고 있다는 겁니다.

妾是(첩시) 阿踰陀國(아유타국) 公主也(공주야) 姓許名黃玉年二八矣(성허명황옥년이팔의)
“저는 아유타국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 이름은 황옥黃玉, 나이는 16세입니다.”

父王與皇后(부왕여황후) 顧妾而語曰(고첩이어왈) 爺孃一昨夢中(야양일작몽중) 同見皇天上帝(동견황천상제) 
부왕과 황후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비와 어미가 어젯밤 꿈에 함께 황천상제님을 뵈었는데

謂曰(위왈) 駕洛國元君首露者(가락국원군수로자) 
天所降而俾御大寶乃神乃聖(천소강이비어대보내신내성) 惟其人乎(유기인호)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락국의 선량한 임금 수로는 하늘이 내려보내어 왕위에 올랐으니, 신령스럽고 거룩한 이는 오직 그 사람뿐이다.

且以新莅家邦(차이신리가방) 未定匹偶(미정필우)
卿等須遣公主而配之言訖升天(경등수견공주이배지언흘승천) 
또 새로 나라를 다스리는데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 그의 배필이 되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形開之後(형개지후) 上帝之言(상제지언) 其猶在耳(기유재이)
꿈에서 깬 뒤에도 상제님의 말씀이 아직 귀에 있구나.”라고 하셨습니다. ( 『삼국유사』 「가락국기」) 


③ 허황옥, 동방 가야행 루트

허황후가 천상의 하나님, 삼신상제님으로부터 ‘동쪽으로 가서 너의 배필을 만나라. 왕님을 만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떠났다는 것 아닙니까.

예전에 한양대학교 김병모金秉模 교수님이 기록에 따라 추적을 했습니다. 인도 아유타국에서 그 후예들이 중국으로 왔는데, 양자강 서쪽 사천성
5)
으로 왔어요. 지도가 지금 나오고 있습니다. 사천성 안악현安岳縣 보주普州에서 양자강을 떠나 남쪽으로 해서 김해 주포主浦까지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지금도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임나는 김해의 고려 시대 명칭인 임해臨海와 같은 이름이고, 임해는 주포의 방언’이라는 설을 일본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5) 인도에서 이주한 허씨(허황옥의 할아버지)가 중국 양자강 서쪽 사천성 안악현 보주에서 살다가 한족의 박해로 양자강 동쪽 무한武漢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양자강을 통해 황해를 건너 남해를 경유하여 김해(주포)로 옴.(김병모, 『가락국과 허황옥의 출자』)



④ 김수로와 허황후의 열두 자녀

가야의 건국자 김수로와 허황후는 자식 열둘을 낳았습니다. 아들 열에 딸 둘인데, 큰아들은 거등왕居登王이 되었습니다. 허황후가 ‘내가 열둘을 낳았는데 전부 김가가 되느냐, 두 아들은 허씨로 해 달라’ 해서 둘은 허씨가 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김해 김씨와 허씨는 서로 결혼을 안 합니다.

일곱 왕자는 어떻게 되었는가? 허황후의 오빠가 장유화상長遊和尙 또는 보옥선인寶玉仙人이라는 스님이었다고 합니다. 장유화상이 ‘도 닦으러 가자’ 해서, 일곱 왕자가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들어갔는가? 가야산에서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중에 득도한 곳은 하동河東 칠불사七佛寺
6)
입니다. 2년 만에 근본 도통을 해서 구름을 타고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곱 왕자가 일본 규슈(구주九州) 남부에 가서 제2의 가야국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가 보면 일곱 수로 된 여러 가지 축제가 지금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6) 칠불사는 1세기경에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그들의 외숙인 범승梵僧 장유보옥長遊寶玉 화상을 따라와 이곳에서 동시 성불한 것을 기념하여 김수로왕이 국력으로 창건한 사찰로서, 가야불교의 발상지이다.


駕洛國首露王有子十人(가락국수로왕유자십인)이로대 一(일)은 爲儲君(위저군)하고
二人(이인)은 賜許氏(사허씨)하고
七人(칠인)은 志絶塵寰(지절진환)하고 從寶玉仙人(종보옥선인)하야 自伽洛山入雲上院(자가락산입운상원)하고
學道成仙(학도성선) ... 而又稱七佛矣(이우칭칠불의)러니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에게는 아들이 열 명 있었는데... 일곱 사람은 인간 세상을 끊는 데 뜻을 두어, 보옥선인寶玉仙人을 따라 가락산으로부터 운상원에 들어가서 도를 배워 신선이 되었는데... 그들을 칠불七佛이라고도 불렀다. ( 『가락삼왕사적고駕洛三王事蹟考』)


이처럼 지구 문명을 크게 잡아 흔들고 동서 문명을 교류시킨 북방 유라시아 문화의 중심에 있던 강력한 흉노의 황손이 내려와서 가야를 세웠고, 남방의 인도 왕국의 황녀, 공주님이 와서 결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주 흥미롭고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미래 역사의 가장 숭고한 원형문화의 정신을 깨우치려는 천지의 원 조화주 하나님, 삼신상제님의 천명에 의해서 가야 정통 왕국이 건설되었다’는 것입니다.

3. 임나와 임나일본부의 진실
그러면 가야는 임나인가? 임나는 가야란 말인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것은 무엇인가?

일본 침략자들이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한국 사학계에서도 임나일본부라 부릅니다. 지금도 일본 우익 교과서를 보면 야마토 왜[大和倭]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 지역에 진출하여 임나에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고 백제·신라·가야를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했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입니다. 이 일본의 주장을 확장시킨 우리나라 학자들도 있습니다.

예전에 이 동방에 있는 조선 백성들은 문자도 없고 아주 미개한 야만인이었는데 기자라는 아주 큰 분이 찾아오셔서 조선을 개화시켜 문자도 알게 하고 발전시켰다는 것이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입니다. 이러한 불의한 침략사관의 한 전형, 최종적인 중심 주제가 임나일본부
7)
입니다. 많은 논문, 서책도 나오고 해서, 임나일본부는 이미 한일 양국에서 극복이 되고 있습니다.
7) 임나일본부가 369~562년까지 200년 동안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것이다.


1) 임나일본부의 출처

① 임나일본부의 발전 과정

임나일본부를 주장하게 된 근원은 『일본서기日本書紀』와, 1657년부터 1906년까지 250년에 걸쳐서 만들어진 『대일본사大日本史』
8)
입니다.


일본 학자 3인이 임나일본부를 나름대로 구체적으로 전개했는데요. ‘임나라는 것은 작게 보면 바로 부산 옆 김해, 금관가야이고 그 중심 땅이 김해인데, 넓게 보면 6가야 땅 전부이다’라는 것입니다.
8)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안을 패망시키고 동경 에도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손자인 미토水戸 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徳川光圀가 명력明暦 3년(1657)에 편찬에 착수하여 명치시대인 1906년에 완성한 본권 73권, 열편 170권과 그 외의 책을 합하여 총 397권이다.


『일본서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신공황후 때에 삼한과 가라를 평정하고 임나에 ‘일본부’를 두고 삼한 또는 한국을 통제하였다.”라고 주장하였다

임나는 구야한국=임나가라에서 기원하여, 백제·신라의 통일권 내에 들어가지 않는 모든 한국을 포함하는 지역의 총명이며, 정치적으로 임나가라를 중심으로 하는 여러 한국의 직접지배 체계이며, 외곽의 백제와 신라를 간접지배로 복속시켰으며 임나·백제·신라의 3자를 통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한국 땅의 통일운동은, 그 제1·제2의 중심체(백제·신라)가 도중에 억압당하고, 제3의 중심체(임나가라: 일본)가 공덕을 완성시킨 것이다. -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 69~70쪽)


②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설

삼한정벌설은 15세 응신왕應神王의 어머니 신공황후가 쳐들어와서 ‘신라 왕을 무릎 꿇려 놓고서 삼한(고구려, 백제, 신라)을 다 굴복시키고 영원히 조공을 바치게 했다’는 겁니다. 아주 쉬운 말로 문화 종주인 자기 주군의 뺨을 치고, 무릎을 꿇렸다는 말입니다. 『일본서기』를 보면 그 내용이 참 기가 막힙니다.

황후는 재물이 많은 보배로운 나라를 얻고자 ... 몸소 서쪽을 치고자 하였다. ... 순풍이 불어 범선이 파도를 타니 노를 젓는 수고로움 없이도 곧 신라에 이르렀다. ... 신라왕(파사매금波沙寐錦[#9)
)은... 두려워 전의를 상실했다. ... “어찌 군사를 내어 방어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항복하였다.

흰 줄을 목에 드리우고 두 손을 뒤로 묶고 ... “길이 천지와 함께 복종하여 사부飼部(미마카이)가 되겠습니다. ... 춘추로 조공을 거르거나 태만하여 말빗과 말채찍을 바치지 않는다면 천신지기여, 벌을 주십시오.” 하였다. ...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왕이 신라가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 스스로 영외로 나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지금 이후부터는 길이 서번西藩이라 일컫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내관가둔창內官家屯倉으로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삼한三韓이다.
( 『일본서기』 「신공황후섭정전기」, 중애기仲哀紀 9년)#]
9) 파사매금: 80~112년에 신라를 다스린 파사이사금과 이름이 같으나 연대가 맞지 않다. 200년은 신라 나해왕 때이고, 일본 측 주장대로 120년을 더하면 흘해왕 때이지만 이름이 맞지 않으므로 이 기록 자체를 설화나 조작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제가 각성하기 위해서 원본과 번역본을 비교해 보면서 다시 한 번 읽어 봤습니다. 『일본서기』 「신공황후섭정전기神功皇后攝政前紀」 중애기 9년(서기 200년) 조를 보면, 신라왕이 스스로 흰 줄을 목에 드리우고 두 손을 뒤로 묶고서 ‘길이길이 천지가 다하도록 영원히 복종해서 조공을 바치고 굴복하겠나이다. 그렇지 않으면 벌을 주십시오. 천신지기天神地祇여, 천지의 신이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라가 항복했다고 하니 고구려, 백제 왕도 그냥 나와서 머리를 조아렸다는 겁니다. 이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일본에 사는 도래인들이 백제, 고구려가 망하고 나서 일본에서 『고사기古事記』를 편찬하면서 역사를 조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제계 왕들이 일본 역사 주권을 잡은 이후의 역사를 조작한 겁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서 이렇게 악의적으로 신라의 무릎을 꿇리고 비하한 것입니다.

2) 일본이 ‘가야가 임나’라고 주장하는 근거

임나라는 말이 나오는 우리나라 기록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된 ‘임나가라任那加羅’와 창원에 있는 봉림사鳳林寺 진경대사비眞境大師碑에 기록된 ‘임나왕족任那王族’ 그리고 『삼국사기』 「강수전强首傳」에 가야에서 신라에 귀화한 대문장가 강수强首가 자신의 고향을 ‘임나가양任那加良’이라 쓴 기록입니다.

도대체 임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임나는 어디인가?

윤내현尹乃鉉 교수는 임나를 연구한 학자들의 공력을 객관적으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임나는 한반도에 있다. 가야 땅에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임나는 일본 땅에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가야 땅도, 일본 땅도 아닌 대마도가 임나다’라는 겁니다. 『한국열국사 연구』 뒤쪽에 보면 아주 자세히 분석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환단고기』에, 임나에 대한 최종적 정의가 나온다고 합니다. 윤 교수님도 ‘『환단고기』에 나오는 임나는 대마도이고, 대마도는 삼가라로 나눠졌고 대마도 전체가 임나라면, 임나일본부는 볼 것도 없다’고 하면서 ‘이 한마디 『환단고기』의 기록 내용으로 끝난 것이다’라고 합니다.

3) 임나의 뜻: 왕의 땅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임’은 환인의 ‘인仁’입니다. 임나任那라 할 때 임任은 ‘님’입니다. 우리가 ‘잊지 못하는 님, 사랑하는 님’ 할 때의 님입니다. 그리고 나那는 ‘나라’를 말합니다. ‘임나는 잊지 못할 님의 나라’입니다.

이 임나 문화의 근원은 9천 년 동서 인류 문명의 원형, 영원한 문화의 고향인 환국의 ‘환인’입니다. 안파견安巴堅 환인桓因입니다. 그 환인에서 지도자를 뜻하는 ‘인仁’이 나왔습니다. 실제로 수메르 문명에서도 지도자를 ‘인(En)’이라 했습니다. 또 이 환인에서 우리말로 ‘임금님’이라 할 때 ‘임, 님’이 나왔습니다. 이처럼 임나는 ‘님의 나라, 왕의 나라, 주군의 나라, 주인의 나라’를 뜻합니다. 대마도인들이 주군의 나라, 님의 나라를 그리워해서 임나라 한 것입니다.

이병선李炳銑 같은 분은 임나는 ‘미마나任那’인데, ‘미마’는 ‘주인, 님’이고, ‘나’는 ‘땅’이라 했어요. 또 문정창文定昌이라는 분은 단군조선 백성들이 남쪽으로 이주했는데, 대마도와 구주까지 가서 ‘잊지 못할 우리 주군의 나라, 옛적의 주의 나라’ 또는 ‘처음 나라, 형님의 나라’를 임나라 했다는 겁니다.

임나가 나라가 됐든지, 한 지역 이름이 됐든지 그 근본은 ‘그리운 고향’입니다. 예전에 한반도 남쪽에 있던 삼한의 백성들이, 또 이전부터 북쪽에 있던 단군조선과 그 이전의 배달 시대의 우리 조상들이 내려오면서 고향을 그리워했을 것 아니에요? 그분들이 임나를 외친 겁니다. 충청도 천안에 ‘망향望鄕 휴게소’가 있습니다. 망향은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거예요. 임나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우리들의 옛 고향은 다 임나’라 할 수 있습니다.

4) 임나는 대마도다

① 임나가 대마도임을 밝혀 주는 『일본서기』

『일본서기』에서 발원돼서 ‘임나일본부’가 나왔습니다. 『일본서기』 숭신崇神 65년(서력 전 33년) 조에 뭐라고 했는가? ‘임나에 있는 한 신하가 조공을 바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임나의 위치를 기록하면서 ‘계림의 서남쪽이고, 북쪽은 바다에 막혀 있다’고 했습니다. 임나는 ‘북쪽이 바다에 막혀 있다. 바다에 떠 있다’는 겁니다. 『일본서기』 원본 자체에 임나는 한반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축자국筑紫國으로부터 2천 리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임나는 일본 구주도 아니고 바로 대마도라는 겁니다.
10)
『일본서기』 자체에서 분명한 해답을 알 수 있습니다.
10) 임나국견소나갈질지任那國遣蘇那曷叱知 영조공야令朝貢也 임나자거축자국任那者去筑紫國 이천여리二千餘里 북조해이재계림지서남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② 임나는 대마도의 전칭

『환단고기』는 임나에 대해서 아주 총체적으로 해답을 내려 줍니다. 이것보다 더 화끈하고 완벽하게 지리학적 또는 문화적, 문화교류사적인 측면에서 임나와 임나일본부의 진실을 전하는 기록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임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앞에서 『일본서기』 숭신 조를 말했지만,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를 보면 ‘대마도의 서북쪽이 원래 임나다’라고 했습니다. 이 기록은 아주 자세합니다. 대마도의 서북쪽 작은 땅이 바로 임나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마도의 왕초가 살았는가 봐요. 그 지역에 강력한 족장이 살면서 세력을 넓혀서 대마의 북도, 남도를 점령해서 두 섬 전체가 임나가 됐다는 겁니다.

대마도는 그 모습이 고구마처럼 생겼습니다. 저 위쪽은 신라가 다스린 ‘좌호가라佐護加羅’이고, 중심은 원 종주인 고구려가 다스려 ‘인위가라仁位加羅’라 하고, 저 아래쪽은 백제 쪽에서 지배해서 ‘계지가라雞知加羅’라 했습니다. 닭 계雞 자를 썼는데 현지에서는 ‘계치’라 합니다. 실제로 오늘날 대마도에 ‘인위, 좌호, 계지’라는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대마도를 답사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환호합니다. 삼가라의 이름이 학교, 거리, 우체국, 가게, 식당 이름에 쓰이고 있습니다. 『환단고기』에 박수를 한번 쳐 주세요.

(박수)

이처럼 『일본서기』와 『환단고기』 기록을 통해서 대마도가 본래 임나 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임나는 어떤 땅인가? 임나의 진실은 무엇인가?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임나는 본래 대마도에 있었고, 임나를 다스린 수도 역할을 한 곳은 국미성國尾城’이라 나옵니다.

任那者(임나자)는 本在對馬島西北界(본재대마도서북계)하니
北阻海(북조해)하고 有治曰國尾城(유치왈국미성)이오.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에 위치하여 북쪽은 바다에 막혀 있으며, 다스리는 곳을 국미성國尾城이라 했다.

後(후)에 對馬二島(대마이도)가 遂爲任那所制故(수위임나소제고)로
自是(자시)로 任那(임나)는 乃對馬全稱也(내대마전칭야)라.
뒤에 대마도 두 섬이 마침내 임나의 통제를 받게 되어 이때부터 임나는 대마도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任那(임나)가 又分爲三加羅(우분위삼가라)하니
所謂加羅者(소위가라자)는 首邑之稱也(수읍지칭야)라.
임나가 또 나뉘어 삼가라가 되었는데, 이른바 가라라는 것은 중심이 되는 읍을 부르는 이름이다.

自是(자시)로 三汗(삼한)이 相爭(상쟁)하야 歲久不解(세구불해)하니
이때부터 삼한三汗(삼가라의 왕)이 서로 다투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화해하지 못하였다.

佐護加羅(좌호가라)는 屬新羅(속신라)하고
仁位加羅(인위가라)는 屬高句麗(속고구려)하고
雞知加羅(계지가라)는 屬百濟(속백제)가 是也(시야)라
좌호가라가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가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가 백제에 속한 것은 이 때문이다. (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



그런데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보면 아주 재미있는 게 있습니다. 6가야의 위치를 쭉 얘기하면서 저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이고,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이고, 남쪽은 국미國尾라 합니다.

이 ‘국미’를 학자들이 대부분 ‘나라의 꼬리’라 해석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역사 인식이 넓어지면 ‘원래 가야 땅은 대마도까지이다. 그 당시에는 그랬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5) 일본부는 왜의 외교사절단이라는 이상한 해석

그런데 이 문제를 일본 학자들이 나름대로 학문 논리를 가지고 엉뚱하게 해석했습니다. 최근에 임나일본부의 ‘일본부’ 해석이 아주 재미있게 전환되고 있습니다. 요즘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일본부’에 달아 놓은 주를 보면, “일본은 왜의 후속 표기니까 일본부에서 ‘부府’라는 것은 어사지御事持
11)
이다.”라고 했습니다. 임금님이 ‘너 어디어디를 갔다 오라’ 해서 파견한 사신, 외교사절이라는 것입니다. 일본부를 ‘미코토모치’(ミコトモチ, 임금의 일을 받드는 사신)라 하고, 임나일본부에서 ‘부’라는 것은 어떤 국가의 통치기관이 아니라 사절단을 말한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안의 아라가야阿羅伽耶를 해석하되 ‘옛날에 아라국(안라국)이 있었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안라일본부安羅日本府가 나오는데, 왜 사신들이 여기에 머물면서 주로 무역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근무한 적이 있다’라고 하여 사신들이 머물던 안라일본부를 말하고 있습니다.
11) 왜의 사람으로 활동했던 사람은 이쿠하노오미(的臣), 키비노오미(吉備臣), 카와치노아타히(河內直), 그리고 아현이나사(阿賢移那斯)와 좌로마도(佐魯麻都)였다. 하지만 아현이나사와 좌로마도는 『일본서기』에 가야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앞의 세 사람이 일본부의 실체라고 볼 수 있다. 키비노오미는 임나일본부로서 임나 또는 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이었으며, 카와치노아타히는 안라일본부로서 안라 즉 아라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이었다. 이들은 주로 아라가야에 머무르고 있었으며 그 역할은 가야지역을 통한 선진문물의 교역이었을 것이다.(남재우, 『아라가야 역사읽기』))


6) 임나일본부의 허구를 증명한 대성동 고분

1991년 김해 대성동大成洞 고분이 발굴될 때 임나일본부의 존재 여부를 놓고 난리가 났습니다. 이때 천지개벽을 해 버렸습니다. 가야 문화 역사의 실체가 다 나와 버린 거예요. 그해 2월에 일본 NHK TV 방송사와 문화해설사들이 현지를 취재했고, 3월 4일 NHK에서 ‘역사의 탄생 시간’이라는 프로에서 그것을 방영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뭐라고 했는가? ‘여기서 나온 파형동기巴形銅器는 일본보다 훨씬 앞선다. 파형동기는 일본에서 백 점이 나오고, 대성동 13호 고분에서 6점이 나왔는데 여기 것이 훨씬 오래됐다. 또 마구류馬具類를 보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가 실재했음을 보여 준다. 문화의 선진과 후진의 차이로 볼 때 임나일본부가 만들어질 가능성은 없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임나일본부는 입에 올리지도 말라, 그건 조작된 역사다’라고 이미 약 30년 전에 일본 공영방송에서 증명한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칠불사 아자방亞字房
■ 1,100여 년 전에 신라 효공왕 당시(지마왕 때라는 설도 있음) 금관가야에서 온 구들도사로 명성이 높았던 담공 스님께서 이곳에 이중 온돌방을 축조했는데 내부 구조가 버금 아(亞) 자 모양으로 생겼다 해서 아자방이고, 옆에 있는 굴뚝을 입 구(口) 자로 보면 벙어리 아(啞) 자가 되는데, 이곳은 처음부터 벙어리처럼 말을 못 하는 침묵의 방 수행처로 만들어졌다. 이곳은 한 달 반을 그 온기가 지속됐다 하여 신비한 방으로 널리 당나라까지 알려져 있었고, 그 온돌의 특이성으로 세계 건축사전에도 등재돼 있다. 이 아자방에서 수도를 통해 득도한 고승은 수없이 많다. 서산대사는 수도를 한 후 아자방에 관한 시를 짓기도 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쌍계총림 말사인 칠불사는 문수(文殊)보살 도량으로 애써서 공부나 기도를 하면 문수보살이 그 사람을 도와 일체 소원을 성취시킨 일이 많다. 양택으로는 북쪽으로 금강산 마하연, 남쪽으로는 지리산 칠불암이 최고라고 한다. 도선국사의 옥룡자비결에 보면 칠불암 터를 백자천손하는 터이고, 부귀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석숭을 능가하는 길지라 하는데 앞으로 무수한 도인과 대재벌을 여럿 배출할 것이라 알려져 있다. (출처: 경남일보)

가야의 일곱 왕자, 그들은 과연 어디로 갔는가
일본 발상의 땅
일본 남부 규슈는 고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가장 먼저 정착했던 땅이다. 그래서 일본의 고대 문화도 이곳에서 먼저 일어났다. 규슈 남쪽 사쓰마반도.

그 남쪽에 가세다加世田시가 있다. 이곳에는 <일본 발상의 땅>이라는 놀라운 비석이 있다. 바로 일본인들이 그들의 시조로 생각하는 천손 니니기(瓊瓊杵尊)의 궁궐터 근처에 세운 것이다.

신화에 따르면, 천손 니니기는 볍씨와 신종삼기를 가지고 다카치호(高千穗)봉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가라쿠니다케(韓國岳) 곧 한국산으로 가서 ‘여기는 좋은 곳이다. 왜냐하면 가라쿠니(駕洛國)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한반도 가야와 천손 니니기와의 연관성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일본 천손강림 신화 속 니니기는 가야의 일곱 왕자를 모델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근거를 사쓰마반도에서 찾을 수 있다.

가고시마현 미나미사쯔마시市 이곳 해안의 이름은 거친 바닷길로 신이 건너왔다고 해서 쿠로세(黑瀨) 혹은 카미와타리(神渡)라고 부른다. 해안가 절벽에 2개의 낡은 비석이 서 있다.

경경저존瓊瓊杵尊 상륙지上陸地!

바로 천손 니니기가 이곳 해안으로 상륙한 것을 기념한 비석이다.

그런데 다카치호봉 정상으로 내려온 니니기가 굳이 외지고 험한 해안으로 상륙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가야의 일곱 왕자가 규슈로 이주했다는 사실을 천손강림 신화로 기록했던 것이다.

지난 30년간 고대 동아시아 교류사와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를 연구해 온 아라타 에이세이(荒田榮誠)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는 모두 일본으로 건너가 남규슈 가고시마에 정착한 후 토착 세력을 흡수하여 방어용 산성을 쌓고 고쿠부평야를 개척했는데, 벼농사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 남규슈 일대를 장악하여 구노국狗奴國이라는 연합왕국을 건설했습니다.’

아라타 에이세이의 주장은 국내 학자들의 <일곱 왕자 일본 도항渡航설>과도 일치하는 대목이다.

규슈의 남쪽 중앙에 자리한 기리시마!
해발 1,700m의 한국산(韓國岳)과 천손 니니기가 강림한 다카치호봉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바다와 만나는 끝자락에 자리한 비옥한 땅, 고쿠부(國分)평야!

바로 이곳에 1,900여 년 전,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터전을 일구며 살았던 일곱 개의 산성, 시치쿠마(七隈/七熊)가 있다.

“기리시마시 고쿠부·하야토에는 옛날에 7개의 '쿠마(隈,熊)'라고 불리던 지역이 있었습니다. 토미쿠마(富隈), 시시쿠마(獅子隈), 에미쿠마(笑隈), 히라쿠마(平隈), 호시쿠마(星隈), 코이쿠마(恋隈), 쿠마사마(久満崎)라는 7개의 '쿠마(隈,熊)'입니다.”
- 다사키 히로유키田崎弘行(기리시마시 향토관 전문위원)


일본에서 곰이란 뜻의 쿠마(熊)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의 체격이 원주민보다 월등히 컸기 때문에 붙여진 말이다. 그래서 일곱 왕자가 세운 산성도 일곱 곰을 뜻하는 시치쿠마(七熊)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은 쿠마와 같은 발음의 다른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

일곱 산성은 고쿠부평야 북쪽에서 부채꼴 형태로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그 중심에는 총사령부격인 구마소성(熊襲城)이 있었는데, 유사시 7개 성이 연합하여 방어가 용이하도록 산성을 구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고쿠부 지역은 분국이라는 이름처럼 일곱 왕자가 건설한 제2의 가야왕국이었던 것이다.

일곱 왕자의 흔적은 기리시마 주변에 산재한 나나야시로(七社)라는 <7개 신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창건 연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간직한 신사도 있는 만큼 현존하는 칠사신사는 일곱 왕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유적이다. 이처럼 가야 출신 일곱 왕자의 유적으로 가득 찬 규슈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가야사박물관이다.

참고문헌 : 김향수 「일본은 한국이더라」
아라타 에이세이 「신무천황발상의 본관」
정치순 「일본 건국신화의 현장을 가다」 外


NHK 역사탄생
일본 국영방송 NHK는 지난 1991년 3월, <역사탄생歴史誕生>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임나일본부의 수수께끼任那日本府の謎 : 고대일본과 한반도古代日本と朝鮮半島>라는 주제로 한·일 간에 첨예하게 대립하던 역사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프로그램 진행자였던 구주대학 니시타니 타다시(西谷正) 교수와 제작진이 함께 김해 대성동고분 발굴 현장을 찾아 취재와 방송을 제작했을 정도로 일본인들에겐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방송에서 다뤘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니시타니 타다시西谷正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 정부는 식민지사관의 중요한 요소로서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는다고 하여 상당한 조사를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조사를 담당한 학자들은 ‘임나일본부의 유적과 유물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임나일본부라고 하는 선입관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보고서에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견은 당시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묻혀 버렸습니다.”


일찍이 대륙과 고대 일본을 잇는 한반도의 현관 역할로 번영하였고, 선진 기술, 문화를 꽃피웠다고 문헌에 기록된 금관가야伽倻국!
하지만, 지금까지 확실한 소재지도 모르고, 고고학 자료도 부족하고 그 실체는 거의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 환상의 왕국이 1,600년간의 잠에서 깨어났다.

지금까지 <가야지방의 고고학적 고찰>에 의하면 ‘일본이 이 땅에 직할 기관을 두고 한반도 진출의 거점으로 삼았다’는 학설은 그 근거가 원래 희박하여 <임나일본부>의 존재가 의문시되어 왔으며 이번 대성동고분군 발굴(1991년 대성동고분군 발굴 현장)로 인해 그 의문은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

대성동고분군에서는 왕묘王墓로 추정되는 길이 8미터의 대형 목곽분이 다수 발견되었다. 부장품으로 한국에서 처음 발견된 파형巴形동기, 통형筒形동기 등 각종 청동기와 150장의 철정鉄鋌 그리고 갑옷, 철검, 무구武具, 마구馬具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이는 북방 고구려 또는 동북아시아 기마민족의 습속을 이은 것들이다.

방대한 출토품들을 볼 때, 당시 금관가야에는 독자적인 문화가 있었고 강력한 힘과 고도의 기술을 가진 나라였을 것이다.
반면, 임나일본부설을 적극적으로 지지할 만한 그 어떤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가야는, 고대 일본과 어떤 관계였으며 임나일본부의 실체는 무엇인 걸까.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던 임나일본부가 없다면 일본 국가의 기원 문제가 대두되게 된다. 종래 야마토 정권의 국토 통일은 5세기에는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유력했으나 오히려 6세기 이후가 아니냐는 의견처럼 일본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큰 문제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금관가야의 김해 대성동고분군 발굴은 이 환상의 왕국을 재조명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로부터 새로운 관점으로 일본 고대사의 재검토를 촉구하고 있다.

<참고자료>
영상: NHK 역사탄생, <임나일본부의 수수께끼> 편
서적: 「NHK 역사탄생12」 NHK역사탄생취재반
서적: 대성동고분박물관 간행물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