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학


불모지에 뛰어들어 세계최고가 되기까지

삼성휴대폰, 모토롤라 따라잡기

우리민족은 누구나 다 가슴속에 신바람의 용광로를 품고 있다. 일단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판몰이 에너지가 강력하게 분출한다.

지난 2002년 월드컵때, 붉게 용출하는 에너지의 폭포수를 우리 모두가 온몸으로 체험하지 않았는가? 어찌 월드컵뿐이랴. 불과 10여년 만에 대한민국은 휴대폰, 인터넷 보급률 세계최고를 성취했다. 지난 1970년대 오일달러가 넘쳐나던 중동 건설경기현장을 판몰이한 그 기상으로, 현대문명의 총아라 일컫는 정보통신 분야를 석권천하를한 것이다.

판몰이 근성은 깊숙이 내재된 우리 한민족의 본성의 하나다. 판몰이 근성은 기적을 창출한다. 이미 우리는 세운의 역사현장에서 그 기적을 여러 번 목격했다. 이제는 선천인류를 총체적으로 추수하는 '개벽과 상생의 판몰이'가 남아 있을 뿐!

혹자는 이런 생각을 할지 모른다. '과연 가능할까?' 하면 된다! 그 생생한 실례를 삼성 휴대폰 신화를 통해 확인해 보자.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누구도 상상조차 못했다. 삼성 휴대폰이 '휴대폰의 벤츠, 세계최고의 명품'이 될줄을. 세계 최초, 업계 최초라는 그런 신기록들이 수없이 따라다니는 삼성 휴대폰, 그 판몰이의 드라마를 들여다보자.



본문은 KBS1TV -신화창조의 비밀 〈제6회 다윗, 골리앗을 이기다-삼성 휴대폰 신화〉(2003년 12월 12일 방영)를 요약정리했다.



1988년 삼성 최초의 휴대폰 SH100 ★★★★★

삼성 연구진들이 속이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마침내 삼성 최초의 휴대폰이 탄생했다. 그것이 1988년의 일. 모토롤라에 비해 기술은 뒤졌지만 그래도 최초의 국산제품이라는 자부심이 담긴 휴대폰이었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아무리 비싸도 모토롤라 제품을 산다는 생각을 쉽게 버리지 않았다. 다음 1년 또 그다음 1년, 삼성 휴대폰은 단점들을 보완하며 계속 신제품을 내놓았지만 판매대수는 1~2천대를 넘지 못했다. 자기의 손으로 만든 제품들이 연거푸 실패했을 때의 그 참담한 심정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 회사 안팎에서 휴대폰 사업을 접는다는 소문이 나도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그때까지 휴대폰 사업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맨손으로 이 사업에 뛰어든 개발팀 주인공들이 사업을 포기할 수 없었다. 비록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했지만, 실패의 과정을 통해서 실낱같으나마 희망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휴대폰이 앞으로 몰고 올 21세기의 대변화를 직감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이런 느낌은 전장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마케팅 전략, 최고를 추격하라

국내 기술로는 휴대폰을 만드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시각이 많았던 시점에서, 업계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외국 업체를 따라잡기 위한 야심찬 계획이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에서 모토롤라의 점유율은 60퍼센트에서 최고 70퍼센트. 그에 비해 삼성휴대폰은 10퍼센트도 채 되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모토롤라에 비해 형편없이 뒤져있는 전세를 역전시켜 보겠다는 것이었다. 말이 전략이지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목표였다.

"3년 안에 모토롤라를 국내시장에서만이라도 한번 이겨보자, 하는 그런 계획을 얘기했을 때 주위에서 우리 직원들마저도 상당히 불신했죠. 1~20프로 정도의 시장 차이 같으면 그런 꿈을 꿀 수 있겠는데…."
(조진호, 44세, 삼성전자 휴대폰 마케팅팀 사원, 애니콜 브랜드 개발, 현 삼성전자 휴대폰 마케팅 그룹장)



마케팅 전략, 이미지를 변신하라

모토롤라를 따라잡기 위한 3개년 계획서는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고 제1단계로 삼성 휴대폰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그것은 바로 삼성휴대폰의 고유상표를 만드는 것이었다.

소비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새로운 이름으로 삼성 휴대폰의 부활을 시작하겠다는 뜻이었다. 전사원을 상대로 이름을 공모한 결과 결정된 이름이 애니콜. 오늘날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바로 그 이름이다. 순조롭지 않은 출발이지만 마케팅의 첫 단추를 꿴 셈이었다.


기술개발, 위기를 기회로 삼아라

당시만 해도 휴대폰이 흔치 않던 시절. 모토롤라와는 달리 삼성 휴대폰은 번번이 산에서 통화에 실패했다. 전국토의 70퍼센트가 산인데 산에서 통화가 안 된다면 말이 안된다. 문제는 수신율이었다. 당시 휴대폰 기술연구원으로서, 문제의 심각성을 전해들은 기술개발팀에서는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만약에 이 기술만 확보한다면 모토로라를 한번 이길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연구원들과 함께, 서로 격려하면서 다시 한번 희망의 불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최도한, 49세, 삼성전자 기술개발실 과장, 현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개발3 그룹장)


낮에는 연구실에서 밤에는 산악에서 기술팀의 연구와 실험이 계속되었다. 산악지형을 뚫는 최적의 안테나 길이, 안테나와 부품들 사이에 금을 입힌 연결부, 그리고 수신율을 최대로 높일 수 있는 부품까지, 모든 기술이 수신율 강화에 집중되었다. 더이상 경쟁업체의 제품을 뜯어보고 재조립해보는 식의 원시적인 연구는 필요치 않게 되었다. 자체적으로 기술이 개발이 되면서 삼성만의 독자적인 품질기준, 그리고 각종 성능을 테스트하는 방법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1994년 삼성휴대폰 애니콜 등장 ★★★★★★

1994년 3월 드디어 새로운 휴대폰의 시제품이 완성되었다. 개발팀에서는 곧바로 당시의 상무였던 이기태에게 전달했다. 그는 흠집하나 없는 새로운 제품을 다짜고짜 바닥에 팽개치고 짓밟았다. 그만의 독특한 품질 테스트였다. 강도실험을 거치는 동안 삼성 휴대폰에는 또 하나의 노하우가 생겼다. 이것은 내부의 기둥을 많이 세우면서도 휴대폰의 크기를 더 작게 하는 집적기술. 덕분에 새 휴대폰은 무려 870Kg의 압력을 견딜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최초의 애니콜 휴대폰. SH-770이다.

1994년 5월 최초의 삼성 애니콜 시판과 함께 통화율을 강조한 대대적인 판촉행사가 시작되었다. 시판 1년만인 1995년 9월 삼성 휴대폰은 모토롤라 휴대폰과 나란히 어깨를 겨루게 된다. 시장점유율 47%.

국내 신문들이 모두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삼성 휴대폰의 급성장과 함께 반대로 기세가 꺽인 건 모토롤라. 그 누구도 믿지 않던 모토롤라 추월 전략이 현실이 됐다. 1983년 휴대폰 사업을 시작한 뒤로 12년 만에 처음 호황을 맞았다.

"이렇게 딱 뒤집으니까, 직원들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거죠. 아, 이제 됐다. 우리 가보자." (마케팅팀 조진호)

"7전 8기 아니냐. 어려운 기술이었지만 100에서부터 히트 모델인 770이 나올 때까지는 말이 일곱번이지 거의 여덟번째 나온 작품이 770인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신이 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날은 전부 모여서 밤새도록 술도 좀 마시고 서로 피로도 풀고 격려도 하고…." (기술개발팀 최도환)


성공의 비결-마케팅과 기술의 절묘한 조화

이후 한국시장을 최고 8~90퍼센트까지 장악했던 모토롤라의 시장 점유율은 끝도 없이 추락했다. 모토롤라가 지배하던 한국 휴대폰 시장의 전세는 삼성 애니콜에 의해 완전히 역전했다.

최초의 애니콜 모델은 20만대가 팔려나갔다. 이후 1년이 멀다하고 새로운 모델이 개발되면서 삼성 휴대폰의 인기는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결국 모토롤라는 1997년 한국시장 점유율 0퍼센트라는 치욕적인 기록까지 내고 만다.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거대기업이 휴대폰 사업을 시작한지 8년밖에 되지 않은 국내기업에게 졌다는 것은 그야말로 일대사건이었다. 카폰을 비롯해서 새로운 휴대폰 모델을 내놓을 때마다 시장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던 삼성이, 세계 초일류기업 모토롤라와의 대결에서 1995년에 승리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소비자들의 요구를 정확히 읽어낸 마케팅과 기술개발의 절묘한 조화였다.

돌아보면, 그 사이에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이 있었고, 최고의 품질을 지닌 제품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들이 밤낮으로 진행되었다. 한 예로, 삼성전자 구미공장에서는 통신분야 불량품들을 150억원 어치나 불태워버린 일대사건을 겪기도 했었다.

"전 사원의 모든 힘이 이 속에 다 들어 있거든. 열정에서부터 어떤 집념, 최첨단의 기술, 이런 것들이 다 응고된 거예요." (이기택 상무)


명품 탄생의 비밀 : 오기, 열정, 기술개발 ★★

이제 삼성 휴대폰은 한국만의 휴대폰이 아니다. 세계 IT 업계에서는 최고의 휴대폰, 명품 휴대폰으로 주저 없이 삼성 휴대폰을 꼽는다. 2003년 현재 세계 매출순위 2위. 그리고 4조 5000억원의 브랜드 가치를 지니게 된 삼성 휴대폰.

이 모든 것이 20년전 불과 40명의 인원으로 시작한 무선개발실에서 만들어낸 성과다. 한때는 휴대폰 사업 자체가 존폐의 위기에 놓이기도 했지만, 한국인 특유의 근성과 집념이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신화의 배경에는 어김없이 남다른 야망을 품고 열정을 쏟아부은 역경의 주인공들이 있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해서 실패를 밥먹듯이 하던 삼성 휴대폰이, 1995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모토롤라를 꺽은 후 2003년 현재 아시아, 이스라엘, 프랑스, 인도, 이란에서도 모토롤라에 앞선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묶어서 볼 때, 과연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오기
처음부터 업계 최고가 되겠다는 높은 이상과 열정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품질에 대한 집착


이 세 가지가 한해 4억 6천만대가 팔리는 휴대폰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삼성 휴대폰의 신화창조의 비밀이자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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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한반도에 전화도입
이후 70년간 전화교환수에 의존해야 했던 통신후진국, 한국! 1970년대 고속성장으로 뒤늦게 통신기술에 불이 붙었지만 세계는 이미 휴대폰 개발에 돌입한 뒤. 맨손으로 세계 휴대폰시장이라는 전장에 뛰어든 삼성! 앞선 기술과 최첨단 문화가 조화되어 있는 이 작은 휴대폰기술 개발에 청춘을 바친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86년 한국최초의 삼성카폰-40명이 시작한 무선개발 3년만에 이룩한 성과

1988년 삼성 최초의 휴대폰 SH100 개발 -10명이 2년동안 이뤄낸 형설지공

1994년 삼성 휴대폰 애니콜 생산 -6년만에 8번째 모델 완성

1995년 국내에서 모토롤라를 꺽고 한국시장 51% 점유

1997년 다시 2년만에 모토롤라 한국시장 점유율 0퍼센트로 추락

1998년 중동의 기술강국 이스라엘 진출, CDMA 시장점유율 65% 부동의 1위 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