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열전 | 로마 제국을 연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의 갈리아 전쟁

[역사인물탐구]
이해영 / 객원기자



전쟁 승리가 가져온 혼란


■ 가중한 세금
포에니Poeni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마침내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하고 그 주변의 광대한 토지를 차지하였다. 로마는 정복한 토지를 속주屬州(식민지)로 삼았다. 속주에는 토지 수입의 10분의 1이 인두세로 부과되었다. 여기에 파견된 총독에 따라 가혹한 지배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이들은 몇 년 치 세금을 미리 내도록 하는 등 속주민들에게 가중한 부담을 안겨 주었다.

■ 자영농 몰락으로 이어지는 사회 혼란
오랜 전란으로 토지는 황폐화되었고 자영농은 몰락했다. 귀족 지주들의 대농장(라티푼디움Latifundium)이 발달하게 되고, 여기에 속주에서 값싼 곡물이 로마로 유입되면서 자영농은 더욱 몰락했다. 이들은 중장보병으로 로마군의 근간을 이룬 자들이었다. 이제 군인은 직업 군인 제도로 바뀌면서 군벌화되기 시작했다. 몰락한 자영농들은 도시로 몰려들었고 빈민층이 되었다. 이들은 비좁은 곳에서 궁핍하게 살아야 했고, 비위생적인 주거생활을 해야만 했다. 당시 로마 인구 100만 중 30만 명이 이런 빈민이었다. 정치 형태도 원로원, 집정관, 호민관 등으로 권력을 나누고 견제하며 균형에 중점을 둔 복합 정치체제에서 점차 과두적인 엘리트 정치로 변모하였다. 새로 등장한 유력자들은 굶주린 빈민들에게 식료품을 무료로 제공하고, 검투사 시합이나, 전차 경기 등의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세력을 키워 나갔다.

■ 제1차 삼두정치
가중되는 혼란은 새로운 체제를 요구하였다. 이에 로마는 3명의 실력자에 의한 삼두정치三頭政治 시대가 열렸다. 당시 로마 최고 갑부 크라수스Crassus와 당대 최고의 군사 영웅 폼페이우스Pompeius가 공동 집정관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에 정치적 두뇌가 뛰어났던 카이사르는 이 둘 사이를 화해시키는 법안으로 슬쩍 참여하면서 제1차 삼두 정치가 열렸다. 제2차 삼두정치는 카이사르 사후 주도권 쟁탈을 벌인 옥타비아누스Octavius, 안토니우스Antonius, 레피두스Lepidus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명문 귀족 출신 카이사르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BCE 100년 7월 12일 로마의 유서 깊은 가문인 율리우스 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로마 건국자 후손 집안으로 명문 귀족에 속하지만, 카이사르가 태어날 즈음에는 집정관은 고사하고 법무관을 배출한 지도 오래된 빈약한 가문에 불과하였고, 그가 태어날 당시는 매우 가난했다.

■ 권력투쟁에 시달리는 로마
그가 태어난 때를 전후해서 30여 년간 그의 고모부인 마리우스Marius와 술라Sulla의 대결이 극을 달리고 있었다. 마리우스는 더욱 민주적인 정부를 요구하는 민중파를 대표하였고, 마리우스 휘하에 있던 술라는 원로원파(옵티마테스optimates: 최선의 사람들)를 대표하였다. 그의 가문은 민중파로 분류되었고, 그 덕분에 당시 로마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술라의 의심을 그림자처럼 달고 다녀야 했다. 더구나 그는 민중파 집정관이었던 킨나Cinna의 딸과 결혼하여 술라의 의심은 증폭되었다. 젊은 열정으로 카이사르는 독재관 술라를 모욕하여 도망자 신세가 되기도 하였다. 다행히 가문의 중재로 용서받고 군에 합류하여 소아시아 원정을 떠났다. 그곳에서 카이사르는 용감하고 뛰어난 군인으로서 자질을 드러냈다.

■ 빛을 보지 못했던 30대
술라가 죽은 뒤 로마로 돌아온 그는 23세에 변호사로 개업했으나, 당대 최고의 연설가 키케로Cicero와 맞붙어 참패를 당했다. 27세에 제사장으로, 31세에 회계감사관인 재무관으로 선출되면서 정치 경력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고, 35세에 안찰관, 37세에 법무관 및 최고 제사장에 올랐다. 이미 30대 초반에 화려한 사회적 성공을 거둔 당대 인사들에 비하면 뛰어난 경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민중과 가까운 위치에서 정책 운영 면에서 착실한 성과를 쌓아 가며 대정치가가 되기 위한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 한편으로 한니발Hannibal의 기반이었던 이베리아 반도 총독으로 성공적인 임기를 보내며 군사 기술을 갈고 닦았다.

■ 마흔, 세계의 중심을 향해 가다
드디어 41세 되던 해 로마 공화정 최고 지위인 집정관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제1차 삼두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최고 권력에 오를 유일한 길은 새로운 정복 사업에 있음을 깨달았다. 로마의 영토가 빠르게 넓어지면서 사람들은 국가의 수장으로서 단 한 사람의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름 있는 지도자들은 평민의 지지와 각 군단의 지휘권을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했다. 집정관 임기를 마치고,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총독이 되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갈리아 원정의 배경과 전략
갈리아는 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북부, 스위스 대부분과 라인 강 서쪽을 포함한 당시의 지역을 부르는 말이다. 갈리아인과 로마인은 이미 수 세기 전부터 관계가 삐걱거리고 있었다. BCE 5세기에 갈리아의 켈트 부족이 비옥한 포Po강 유역으로 내려와 그곳에 살던 로마 정착민들과 충돌하기도 하였고, BCE 390년 갈리아인이 로마군을 물리치고 로마를 약탈하기도 하였다.

■ 새로운 도전의 땅, 갈리아
당시 로마는 갈리아 부족과의 전투에서 이긴 적이 별로 없어서 인접한 갈리아 부족들과 외교관계를 맺어 가능한 한 전쟁을 피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규모의 헬베티Helvetii족(스위스 원주민)이 프랑스로 이주하는 도중에 로마의 속주를 침입하면서 갈리아 원정은 시작되었다. 켈트-게르만 혼혈 부족인 헬베티족은 갈리아족 중 전투력이 가장 막강하였다. 그들의 강력한 전투력은 훗날 신의와 충성으로 죽음을 불사하는 스위스 용병으로 면면히 이어져 올 정도로 강력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헬베티족은 최강 전투력으로 갈리아 통일을 꿈꾸고 있었으므로, 만약 이들에 의해 갈리아가 통일되면 로마의 팽창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했다. 카이사르는 4개 군단 2만 명을 이끌고 갈리아 지역으로 출정하였다. 프랑스의 국민 만화 <아스테릭스>는 이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 연이은 승리
카이사르는 헬베티족을 공격해 둘로 갈라놓은 다음 따로따로 격파해서 다시 스위스 산지로 몰아내 버렸다. 다음 해에는 지금의 벨기에 부근에 자리 잡고 있던 벨가이Belgae족과 전투를 벌였다. 전투 도중 상브로강 부근에서 매복 공격을 당해 거의 무너질 뻔했으나 결국, 로마군은 벨가이족을 패퇴시켰다.

■ 게르만과 브리타니아Britannia 원정
다음 해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침공한 두 게르만 부족, 우시페테스Usipetes족과 텐크테리Tencteri족을 대량 학살하기도 하였다. 그런 다음 지금의 본Bonn 근처 라인강에 거대한 다리를 건설하고 보복 전쟁을 벌이기 위해 게르만족의 땅으로 진격했다. 카이사르는 역사상 지금의 독일 땅에 입성한 첫 번째 로마 장군이 되었다. 하지만 게르만인은 전혀 싸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18일 만에 철수하였다. 그해 8월 말,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넘어가지 못한 칼레 해협(도버Dover 해협)을 넘어 지금의 영국 지역인 브리타니아Britannia를 침공하였다. 로마인에게 브리타니아는 문신을 한 전사들이 전차를 타고 등장하는 신비로운 이야기의 배경을 가진 신화의 땅이었다.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 연합군의 히트 앤 런(Hit-and-run) 전술을 기병으로 막고 곧바로 반격하는 전술로 격파해 버렸다. 이듬해에는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가서 브리타니아 남부 지역 대부분을 약탈하고 점령하였다.

■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
로마군보다 머리 하나가 크고 체력이 좋고 뛰어난 기병 군단인 갈리아인들을 대상으로 이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갈리아 부족들이 워낙 독립적이었던 까닭에 그들의 단결력과 조직력이 형편없었던 덕분이었다.# 만약 이 약점을 극복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우려는 BCE 52년 아르베르니Arverni족의 젊은 부족장 베르킨게토릭스Vercingetorix의 봉기로 현실이 되었다.

반격에 나선 갈리아족
■ 갈리아 부족들, 단합해서 일어서다
BCE 52년 1월 매서운 추위 속 어느 날 저녁 중남부 갈리아의 여러 언덕 사이에 있는 외딴곳에 몇몇 갈리아 부족 사람들이 모였다. 과거에 이들은 종종 적으로 맞섰지만, 지금은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머리를 맞댔다. 그들은 6년째 자신들의 땅과 가족을 약탈하고 자유를 빼앗아 간 로마 정복자들을 쳐부수기 위해 비밀 동맹을 맺었다. 갈리아인의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카르누테스Carnutes족이 그 선두에 섰다. 카르누테스족 땅은 갈리아 한가운데 있었으며, 고대 켈트족의 고위 전문직 계급인 드루이드druid 사제들이 해마다 이곳에 모여 제사를 지내고 부족 간에 벌어진 분쟁을 해결하곤 했다. 갈리아인들은 카르누테스족의 수도인 케나붐, 지금의 프랑스 오를레앙Orléans을 습격하면서 로마에 대한 반격을 시작하였다.

■ 청년 장군 베르킨게토릭스의 전략
베르킨게토릭스는 케나붐에서 로마군을 습격한 사건을 기점으로 갈리아족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갈리아 역사상 최초로 강력한 연합 부대가 결성되었고, 로마에 충성하는 부족들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서서히 프랑스 남부에 있는 로마인의 도시들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겨울을 나던 카이사르는 황급히 군대를 이끌고 출격하였다. 카이사르는 한겨울에 프랑스 중남부에 있는 세벤느Cévennes산맥에 2m 높이로 쌓인 눈을 치우며 진군하여 아르베르니족 본토로 진격했다. 재빠르게 갈리아 중심부로 들어선 카이사르는 보급품을 확보했다. 이에 갈리아 연합군은 게릴라 전법에 돌입했다. 도시와 농장에 불을 질러 황폐한 땅만 남겨 놓고, 식량을 찾으러 나온 로마군과 보급 부대를 공격하였다.

■ 위기에 빠진 카이사르
당시 로마군은 빠른 갈리아 기병보다 느린 보병 중심에 적은 병력, 그리고 군량 보급 문제라는 약점을 안고 있었다. 게르고비아Gergovia에서 베르킨게토릭스가 큰 승리를 거두면서 카이사르는 갈리아 한복판에서 고립되어 굶어 죽을 상황에 빠졌다. 식량을 구하지 못하도록 마을을 불태우는 청야전술淸野戰術과 빠른 기병으로 로마군을 고립시켜 각개격파를 감행하는 전략에 카이사르도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카이사르는 청야전술에서 빠진 유서 깊은 도시 아바리쿰(프랑스 부르주Bourges)을 습격, 함락시키고 주민 4만 명을 학살하여 2년 치 식량을 확보하면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갈리아 원정의 분수령, 알레시아Alesia 전투(BCE 52년)
■ 베르킨게토릭스의 승부수, 스스로 미끼가 되다
청야전술과 게릴라전술로 카이사르를 잡겠다는 전략이 실패하자, 베르킨게토릭스는 승부수를 던진다. 그는 현재 프랑스 디종Dijon 부근 오주아Auxois 산꼭대기에 있는 고립된 성채 도시 알레시아Alesia로 스스로 들어가 로마군에 포위를 당했다. 그곳은 정상이 평평하고 주위는 강으로 둘러싸인 지형이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알레시아 성벽 안으로 퇴각하기 전 갈리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카이사르를 공격할 군대를 모집했다. 이 과정에서 로마의 동맹인 아이두이Aedui족까지도 베르킨게토릭스에 협력했다. 그의 계획은 스스로를 미끼로 하여, 카이사르가 자신을 포위하면 수만 명의 다른 갈리아인이 뒤에서 카이사르군을 포위 공격해 로마군을 완전히 격파하는 것이었다.

■ 로마군은 진지 구축의 장인들이었다
이런 상황을 간파하고 있던 카이사르는 전대미문의 포위망을 구축한다. 본래 로마군은 항상 진지를 제대로 공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갈리아인에게는 무척 생소했지만, 로마군에게는 일상다반사였다. 로마군은 전투만 하는 집단이 아니었다. 그들은 일반적인 토목기사, 건축가를 능가하는 뛰어난 공병 부대였다. 로마군 캠프는 어느 곳에 가든지 작은 도시를 만들 정도였다. 이를 표준화시켜 매우 빠르게 공사할 수 있었다. 현재 유럽의 많은 도시들은 이런 로마군의 기지機智에서 유래했다. 마치 카이사르 자신이 공사장의 현장 감독이 되고 숙달된 로마군은 공사장 노동자가 된 것처럼 매우 독특한 이중 방어 포위망을 구축하였다. 마치 현대 참호전과 유사한 야전 상황이 로마군에 의해 실현된 것이다.

■ 알레시아 공방전의 결과
양군은 필사적으로 미친 듯이 전투에 임했다. 결정적으로 카이사르가 진홍색 망토를 두르고 직접 근접전에 뛰어들자, 전세가 로마 쪽으로 기울었다. 끔찍하고 혼란스러운 전투 끝에 갈리아인의 전열이 무너졌다. 잘 조직된 제국의 군대와 부족 개념이 남아 있는 군대 사이의 전투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항복하고, 갈리아 전쟁도 사실상 끝이 났다.

갈리아 전쟁의 결과
드디어 끝났다. 카이사르 자신에게 부와 명예와 권력을 안겨 주었고, 이후 몇 세기 동안 유지될 서유럽의 지도가 결정된 갈리아 전쟁이 끝난 것이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승리하면서 명성뿐 아니라 병사들의 충성심까지 얻어 낼 수 있었다. 오랜 기간에 걸친 갈리아 전쟁은 로마의 재정을 부유하게 했으며, 로마의 국경을 라인강까지 확장시켰다. 이는 로마인들에게 도시 국가 로마에서 벗어나 넓은 시야를 키우게 해 주었다. 제국으로 향하는 발판이 구축된 것이다. 한편 유럽 내륙에 처음으로 그리스 로마의 문화가 전파되면서 서유럽 문화권의 기초가 형성되는 계기도 마련되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 삼두정치의 와해
갈리아 전쟁을 마치자 로마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복귀하라는 최종 경고를 내렸다. 삼두정치는 이미 BCE 53년 크라수스가 죽으면서 함께 막을 내린 상태였다. 게다가 폼페이우스에게 시집간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가 BCE 54년에 사망하면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결속마저 약화되었다.

■ 루비콘Rubicon 강을 건너다
갈리아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대중적 명성을 더욱 크게 얻은 카이사르는 원로원에게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길 원하는 원로원파와 현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카이사르의 대립은 결국 폭발하였다. 공화정 로마법에 의하면 원로원의 허가가 없으면 로마 본토와 속주를 나누는 경계선인 루비콘강에서 휘하 군대를 이끌고 국내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BCE 49년 1월 12일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상이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나아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과 함께 루비콘강을 건너 자신의 조국 로마에 반기를 든다.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쾌속 진격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원로원과 내전을 벌였다. 상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병력으로 내전을 치르게 된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 때와는 달리 승리의 연속을 구가하진 못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 폼페이우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다
카이사르가 이탈리아를 장악한 뒤,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은 장기화되었다. 그러던 중 그리스 테살리아 지역에 있는 파르살루스Pharsalus 평원에서 양자는 최후의 대결을 펼쳤다. 카이사르의 군대는 폼페이우스 군대에 비해 전투 경험만은 우세했다. 카이사르는 수적 열세인 아군을 적진 가까이 접근시켜 아군의 패배감을 없애 주는 한편 적의 진용을 직접 관찰했다. 카이사르는 노련한 병사들을 교대로 공격에 가담하게 했고, 경험이 적은 폼페이우스 기병을 무력화시켰다. 한낮의 그리스 태양 아래에서 폼페이우스군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도피하였다. 하지만 그를 수행하던 이들에게 살해당했고, 카이사르는 이를 핑계로 이집트 왕위 계승에 관여하였다. 세기의 미녀 클레오파트라를 왕위에 오르게 하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카이사리온Caesarion을 낳았다.

■ 종신 독재관이 되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 소아시아의 젤라에서 미트라다테스 대왕의 아들 파르나케스를 격파하면서 소아시아 패권을 잡는다. 이때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라는 세 마디 보고를 원로원에 보내 잔존한 폼페이우스 세력에 경고를 보냈다. 이후 폼페이우스 아들과 싸워 승리하면서 5년간에 걸친 내전을 종식시키고, BCE 44년에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

■ 카이사르의 개혁 정책
카이사르는 각종 사회 정책 사업과 개혁 사업을 추진하였다. 우선 그는 새 질서의 표어를 관용으로 내걸었다. 자신의 정적政敵들에게 어떠한 탄압도 가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등용하여 로마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복지 정책과 실업 대책과 같은 빈민 구제 사업, 식민지에 대한 정책 개선을 통해 소금까지 뿌려 불모지로 만든 카르타고를 부활시켰다. 또한 달력을 태음력에서 율리우스력曆(서양 달력의 기원)이라고 불리는 태양력으로 개혁하였다. 통화 개혁과 사법개혁, 행정 개편을 단행하는 한편, 아시아와 그 밖의 지역에서 폐해가 많았던 징세 청부 제도를 폐지하여 세금을 경감하였다. 또한 로마 시민권을 확대하여 공직 등용의 폭을 넓혔고, 대규모 토목 사업으로 로마를 정비하였다. 그는 군사 전략을 짜내는 장군으로도 탁월했지만, 민심의 향방을 정확하게 파악할 줄 아는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브르투스Brutus 너마저!


카이사르의 최후
각종 개혁 사업을 추진하며 개혁의 실효를 거두는 카이사르를 왕위를 탐내는 자로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다. 종신 독재를 선언한 카이사르가 자신의 권력으로 왕위에 오르려 했는지는 아직 논란이 분분하다. 아무튼 BCE 44년 3월 15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원로원 회의가 열리곤 했던 폼페이우스 극장 바로 동쪽 대大회랑에서 카이사르는 암살자들의 칼에 23군데가 찔리면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카이사르의 암살을 공모한 자들은 카이사르의 독재와 개혁 정치에 분개하거나, 그의 지지 세력 중 기대했던 지위를 얻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었던 자들이었다. 암살 주모자 중 카이사르와 함께 갈리아 전쟁을 치르고 내전 중에도 그와 함께했던 군단장급 장교가 5명이나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데키우스 브루투스였다. 카이사르가 죽을 때 “브르투스 너마저!”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때 브루투스가 데키우스 브르투스인지 아니면 마르쿠스 브르투스인지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다.

문사文士 카이사르
카이사르가 살았던 BCE 70년부터 BCE 14년까지 약 한 세기는 ‘라틴 문학의 황금시대’였다. 이 시대는 키케로와 카이사르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둘은 산문에 능했으나 문체는 사뭇 다르다. 키케로의 문장은 화려하고 곡진하였다. 반면 문인이라기보다는 군인에 더 가까운 카이사르의 문장은 건조하면서 직선적이었다. 카이사르는 원래 동물적인 정치 감각의 소유자였다. 그 자신이 훌륭한 웅변가이긴 했지만, 키케로를 뛰어넘지 못하자 제1의 웅변가가 되기를 포기하였다. 대신 제1의 정치가, 군인이 되었다.

무사武士 카이사르
■ 카이사르만의 군단
카이사르는 군대에 자신을 맞췄다. 그는 처음부터 장병들과 똑같이 생활했다. 똑같은 음식만 먹고, 똑같은 막사에서 자고, 병사들과 함께 두 발로 행군했다. 카이사르와 이전 지휘관의 가장 큰 차이점은 군대에 대한 인식이었다. 카이사르는 군대가 자신의 목숨을 지켜준다고 생각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목숨을 보전하는 것 또한 중요했다. 군대가 강해지고 그들이 자신에게 충성할수록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확률도 높아진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모든 편의를 부하들에게 양보하였다. 자기 목숨보다 더 값진 것은 없으므로 자신을 위해 싸워 줄 부하들에게 가장 많은 월급과 전리품 일체를 하사했다. 그가 원한 건 전쟁을 승리를 이끈 군대의 지휘관이라는 명예뿐이었다.

■ 실천하는 지도자 카이사르
카이사르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전과를 올린 자에겐 상을, 잘못을 저지른 자에겐 관용을, 패배한 자에겐 위로를 건넸다. 절대 부하들을 버리지 않았다. 말단 보병까지 이름을 외우고 함께 생활하였다. 또한 군대가 자신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그들 각자의 목표로 공유하기를 원했다. 카이사르는 승리의 대가를 지나치다 싶을 만큼 부하들에게 나눠 줬고, 자기 몫으로 남겨 둔 자금은 부상당한 장병들의 복지와 전사자 가족들에게 생활비로 지급했다. 이런 그에게 로마군은 감화되었다. 병사들은 자신들을 아끼고 고마워해 주는 지도자가 카이사르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가 승리할 때마다 부와 명예가 자신(병사)들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왕이면 카이사르 밑에서 싸우기를 원했고, 그래서 적이었던 폼페이우스를 따르던 군단조차도 속속 카이사르에게 지휘를 요청하기도 했다.

■ 카이사르 전략의 특징
카이사르는 강제성이 아닌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지도력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한편 그의 전략은 신속함이었다. 신속하게 계산하고 결정했으며 신속한 이동으로 주도권을 잡고, 적을 놀라게 하고, 상대의 병력을 분산시켰다. 신속함으로 전술적 기회를 잡거나 실수를 만회했으며, 신속한 추격을 통해 완전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에게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지칠 줄 모르는 힘이 있었고, 두려움이나 위험을 무시하는 동시에 무모함을 거부하는 강인한 용기가 있었다. 대담함과 신중함을 겸비했고, 계획뿐 아니라 기회를 이용할 줄 알았으며, 강인한 정신과 육체를 지니고 인간적이었다.

카이사르의 리더쉽

요약


공화국 로마는 포에니 전쟁 승리 이후 심한 성장통을 앓았다. 체제의 변혁은 시대의 흐름이었다. 이런 시대적 흐름을 정확히 파악한 사람이 카이사르였다. 40대에 시작한 갈리아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로마의 실권자가 된 카이사르는 문무를 겸전했던 인물로 집권 중 개혁의 성공으로 로마인들에게 제국의 마인드를 심어 준 로마 역사상 최고의 천재였다. 카이사르 사후 로마는 제국으로 변모하였고,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천 년간 지속되었다.



카이사르를 괴롭힌 갈리아족의 영웅, 베르킨게토릭스(베르생제토릭스)

베르킨게토릭스Vercingetorix는 현재 프랑스 중남부 오베르뉴Auvergne 지역의 아르베르니 부족 출신으로 카리스마 넘치는 젊은 귀족이었다. 20대 초반으로 키 크고 잘생긴 외모에 불같은 성격을 지녔다고 전한다. 갈리아 전쟁 이전에 특별히 지도력이나 정치적 기량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갈리아 부족 간의 단합 및 총궐기를 주도하였고, 귀족과 농민을 비롯하여 수천 명이 그를 따랐다. 그에 대해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에서 ‘무한한 정열을 지녔으며, 강철처럼 엄격한 기강으로 우유부단한 자들을 공포에 떨게 한 인물’이라고 기록했다.

알레시아 전투에서 패배한 베르킨게토릭스는 성안에 함께 남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희생해서 그들의 목숨을 구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말을 타고 천천히 카이사르의 진영으로 향했다. 로마로 끌려간 그는 BCE 46년 카이사르의 개선식이 진행되는 동안 대중 앞에서 전시되었다가 교살되었다. 그의 명성은 후대에 이어져 프랑스 나폴레옹 3세부터 드골에 이르기까지 애국주의자들의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카이사르의 참호 전략
카이사르가 만든 방어망은 독특한 구조물로 끝을 날카롭게 다듬은 4m 높이의 말뚝을 일정한 간격으로 박아 놓은 방어용 울타리와 같았다. 주위에는 물이 있든 없든 해자垓子도 만들었고, 나무토막에 쇠못을 박아 설치한 장애물 지대도 있었으며, 뾰족한 말뚝이 박힌 구덩이도 있었다. 두 벽 사이에 자리를 잡은 로마군은 도시와 평원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는 동시에 양쪽으로 공격할 수도 있었다. 카이사르는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독창적인 총사령관이었다.

카이사르 지도력의 특징
초여름부터 초가을까지 7주 동안 카이사르는 알레시아를 포위했다. 이곳에서 카이사르는 로마군을 역逆포위한 갈리아 연합군의 파상공격에 맞서 높은 망루에 올라 전투를 진두지휘하였다. 적재적소에 지원군을 보내는 기동방어를 전개하였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원군 10만 명을 맞아, 병사들의 능력을 한계치 이상으로 끌어냈다. 이는 갈리아 전쟁을 통해 병사들이 단련되며 단결력과 의지가 상승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대안을 제시하며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는 지휘관이었다.

두 명의 브루투스
■ 데키우스 브루투스
카이사르 군단장 중의 한 사람으로 그는 카이사르의 사람이었다. 카이사르가 유언장에서 그를 제2의 상속자로 지목했을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 마르쿠스 브루투스
카이사르의 공공연한 애인이었던 세르빌리아의 아들이다. 그는 카이사르의 반대파였던 원로원파였으나 카이사르는 그를 용서해 주었고, 카이사르의 밑에서 출세의 가도를 달렸다.

카이사르의 방대한 독서량과 폭넓은 저술 활동
카이사르는 방대한 독서량과 함께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도 수시로 글을 써 다양한 책을 출간하였다. 그는 언어 전달 능력과 문장력이 뛰어났다. 시와 산문, 편지 등도 수없이 남겼다. 많은 부분이 없어졌지만, 마흔이 넘어 시작한 8년간의 갈리아 전쟁을 기록하여 전쟁 기록 분야에서 최고의 교과서가 된 「갈리아 전쟁기」와 로마 내전을 기록한 책 「내전기」가 남아 있다. 라틴어로 쓰인 이 두 권의 책은 현재까지도 라틴 문학의 정수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문체는 간결하고, 질박하고 힘이 있으며 명료하다.


<참고문헌>
『인물로 보는 서양고대사』(허승일 외, 도서출판 길, 2006)
『이윤기의 그리스로마 영웅 열전』(이윤기, 민음사, 2011)
『로마인 이야기 4, 5』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6)
『난세에는 영웅전을 읽어라』(김욱, 쌤앤파커스 , 2013)
『역사를 바꾼 세계 영웅사』(스펜서 비슬리외 지음, 이동진 옮김, 해누리 , 2018)
『전쟁연대기 1』(조셉 커민스, 김지원 옮김, 니케북스 , 2013)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카이사르, 김한영 옮김, 사이, 2010)
『카이사르의 내전기』(카이사르, 김한영 옮김, 사이, 2013)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미야자키 미사카츠, 이영주 옮김, 알에이코리아, 2018)
『서양 고대 전쟁사 박물관』 (존 워리, 임웅 옮김, 르네상스,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