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B다시보기 | 상징으로 보는 여행 5회 - 유럽의 장모님 마리아 테레지아 이야기

[STB하이라이트]

강사: 오동석 인문여행작가

이번 시간에는 합스부르크 역사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유럽의 장모님’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1. 카를 6세


카를 6세Karl VI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신성로마제국 황제이며,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입니다. 이 카를 6세의 후사를 이을 아들이 일찍 죽게 됩니다. 그래서 “여자도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칙령을 만들어서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에게 왕위를 넘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르만인들이 오래전에 살리카 법(Salic law)을 만들었는데, 이 법전에 보면 ‘여성의 왕위 즉위 금지법’이 실려 있습니다. 이 법을 근거로 독일의 뮌헨을 중심으로 한 바이에른 왕가의 카를 7세Karl VII가 “내가 오스트리아의 왕이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다.”라고 선언을 하고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면서 전쟁이 발발하게 되는데, 이 전쟁이 8년 동안 지속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카를 7세가 죽으면서 끝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1745년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하게 되는데 실질적인 권력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갖게 됩니다.

2.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국왕이며,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로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불립니다.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는 문학과 음악을 좋아하는 인문학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1세의 혹독한 교육을 받고 군주로서의 큰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를 도와주는 대가로 실레시아 지역을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 테레지아가 이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프리드리히 2세는 실레시아 지역을 먼저 차지해 버립니다. 실레시아 지역은 철광석과 석탄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오는 곳으로, 이곳을 점령했기 때문에 독일에서는 ‘프리드리히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며,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포츠담이라는 도시에 프리드리히 대왕이 직접 설계한 상수시 궁전을 짓기도 했습니다. ‘상수시Sanssouci’라는 말은 ‘아무런 걱정이 없는’이라는 의미입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학문의 수준이 높아 계몽주의 사상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면서 프랑스의 지식인 볼테르를 데려와 대화도 하고 악기 연주도 할 줄 아는 똑똑한 군주였다고 합니다.

3.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이자 마지막 군주입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이 프로이센이 빼앗은 실레시아 지역을 되찾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이 엄청난 전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말은 독일 국민의 신성한 로마 제국이란 의미로 독일의 황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프로이센이 등장하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통제력과 권위가 약해지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실레시아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7년 전쟁이 벌어집니다.

이 7년 전쟁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이 전쟁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주변국도 참전하게 되는데 영국과 프랑스의 동맹이 바뀌게 됩니다. 오스트리아-프랑스-작센-스웨덴-러시아가 동맹을 맺고, 영국-프로이센-하노버의 연합과 싸우게 됩니다. 초반에는 프로이센이 전쟁을 유리하게 끌고 갔지만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의 도움으로 전쟁이 마무리되어 갈 때쯤 엘리자베타 여제가 갑자기 죽어 버립니다.

엘리자베타 여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표트르 3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열렬한 지지자였기에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이 선언과 함께 7년 전쟁이 허무하게 끝나면서 결국 실레시아 지역은 프로이센에 남게 됩니다.

※ 프로이센 왕국(1525~1947)
유럽 동북부와 중앙유럽 지방 일대에 존재했던 나라. 독일 역사상 두 번째 통일 국가인 독일 제국의 건국을 주도.


4.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혼인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와 로트링겐 공가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가문이 합스부르크로트링겐Habsburg-Lothringen입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근친혼으로 인해 주걱턱을 비롯해서 많은 유전병에 시달렸는데 로트링겐 가문과 결혼을 하면서부터 주걱턱이 사라집니다.

5.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란츠 1세와의 사이에서 20년 동안 16명의 자녀를 낳게 되는데 자녀들의 결혼식 중 가장 유명한 결혼식이 막내딸인 마리아 앙투아네트와 프랑스 루이16세와의 결혼식입니다. 유럽의 왕실들은 왕실 교육을 시킬 때 프랑스어를 쓰게 할 정도로 프랑스에 대한 동경이 있었는데 마리아 테레지아도 프랑스 부르봉 왕가와 가까이 지내기 위해 자녀들을 정략적으로 결혼을 시켰습니다.

마리아 안나 요제파 안토니아(1738~1789)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첫째 딸입니다. 곱사등의 장애가 있어서 평생 마리아 테레지아와 함께 살다가 수녀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마리아 엘리자베트 폰 외스터라이히 여대공(1743~1808)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섯째 딸이지만 생존한 딸들 중에서는 셋째 딸입니다. 이 여섯째 딸은 미모가 상당해서 마리아 테레지아가 첫 번째로 정략결혼을 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천연두에 걸리면서 곰보 자국이 심해 결혼을 못 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카를 요제프 요셉(1745~1761)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일곱 번째 자녀로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었는데 천연두로 일찍 요절하게 됩니다.

마리아 아말리아(1746~1804)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덟 번째 자녀로 프랑스 부르봉 왕가에 강압적으로 시집을 가게 되어 평생 마리아 테레지아와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합니다.

마리아 카롤리나 폰 외스터라이히(1752~1814)는 마리아 테레아의 열세 번째 자녀로 스페인 페르디난도 1세와 결혼하여 7남 11녀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막시밀리언 프란츠(1756~1801)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열여섯 번째 자녀로 막내아들입니다. 쾰른의 대주교이자 튜튼기사단장을 역임하고 어린 베토벤을 발굴하고 후원자가 되기도 한 인물입니다.

6. 쇤부른 궁전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에 만들어진 궁전으로 ‘아름다운 샘’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궁전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 비견되는 궁전을 만들기 위해 지어졌다고 합니다. 쇤부른Schönbrunn 궁전은 방이 2441개, 부엌이 131개가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궁전입니다. 지금 일반인에게 공개된 방은 40여 개의 방인데 외부인이 들어와서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유럽에서 바로크 양식이 가장 잘 보존된 궁전이기도 하며, 세계 최초의 동물원과 식물원이 있는 궁전이기도 합니다.

쇤부른 궁전에서는 지금도 매년 쇤부른 음악제를 하는데 유럽 최고의 음악가들과 오케스트라를 초청해서 무료로 일반인들이 음악을 즐길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궁전 내부를 보면 여성적인 섬세함이 많이 느껴집니다. 궁전 안에 있는 ‘그레이트 갤러리’라는 대연회장은 로코코 예술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무도회나 리셉션 장소로 사용되는 곳이며, ‘빈 회의’와 같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쇤부른 궁전은 방이 화려하기로도 유명한데 그 중에서 ‘뷰 라크 룸’이라는 프란츠 1세가 서재로 쓰던 방이 독특합니다. 중국 베이징에서 생산된 자개장을 가져와서 꾸몄다고 합니다. 남편 프란츠 1세가 죽은 후에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편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백만 금의 방’이란 곳이 있습니다. 매우 희귀한 장미목으로 만들어져 당시 공사비로 백만 길더가 소요되었다고 하는 방입니다. 이 방의 벽면에는 페르시아와 인도 무굴제국에서 공수한 황실 기록화가 콜라주 기법으로 붙여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