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2천 년의 비밀 - 사마천이 만든 중국사

[이 책만은 꼭]

들어가며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관史觀이다. 일정 사건이나 사실에 대해서 어떤 가치관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역사의 내용은 완전히 바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알기 이전에 그 역사를 쓴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도 중요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민족사를 우리 시각이 아니라, 중화 사대주의사관과 일제 식민사관 등으로 오염된 역사관으로 보아 왔다. 해방 이후에도 제대로 된 사관을 정립하지 못한 채, 여전히 잘못된 역사관으로 우리 역사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사正史인 『환단고기』를 위서僞書라는 망발로 치부하며 그 가치를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과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중국 통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대한 주석 작업을 해 온 이덕일 소장의 신작 『사기, 2천 년의 비밀 - 사마천이 만든 중국사』 발간은 그 의미가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기』가 지니고 있는 역사학계의 위상은 굉장히 크고, 그 가치에 비례하여 우리 한민족사는 완전히 비틀려 있기 때문이다. 『사기』에는 우리의 상고사를 엿보게 해 주는 자료가 들어 있는데, 이 부분이 아주 교묘하게 왜곡되어 있다.

따라서 『사기』만 제대로 연구되더라도 지금의 중국 역사를 시작한 주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이 책은 동이족의 관점으로 바라본 사마천의 『사기』에 대한 기록이며 우리의 원뿌리를 찾는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부터 사마천이 속이고 조작한 ‘사기詐欺’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책 내용 살펴보기


이 책의 핵심은 그동안 중국 최고 역사서로 인정받아 온 『사기』에서 한족의 정통 계보가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 살피고 그 과정에서 사마천의 숨은 의도를 파헤치고 있다.

이 책은 총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기전체 역사서의 탄생〉에서는 사마천은 왜 기전체紀傳體라는 형식으로 역사를 서술하였는지, 그리고 ‘민족’이라는 용어에 담긴 상반된 의미를 통해 책 내용에서 계속 언급하는 동이東夷와 화하족華夏族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실체가 없었던 한족漢族을 만들고 그 한족들이 중국사를 창조하였다는, 그렇게 만든 한족들의 천하사가 바로 『사기』임을 천명하고 있다.(본문 35쪽 참조)

이어 2장 〈중국 고대사는 동이족의 역사〉에서는 오제五帝 이전 삼황三皇의 실제 모습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바로 삼황의 첫 번째인 복희씨伏羲氏와 신농씨神農氏 등을 다루면서, 이 삼황은 동이족이었음을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로 논증하고 있다. 3장 〈오제를 찾아서〉에서는 중국민족이 자신들의 시조로 여겼던 황제黃帝의 민족 귀속성과 성 및 출생지 등과 함께 사마천이 지우려 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어 오제의 또 다른 인물들인 전욱顓頊과 곡嚳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에 대해서 다룬다. 여기서는 요순선양堯舜禪讓의 진실과 더불어, 중원 고대사의 실체에 대해서 큰 충격을 준 낙빈기駱賓基의 『금문신고金文新考』를 통해서 순임금이 요임금의 두 딸과 혼인한 것은 동이족의 혼인 풍습임을 설명하고 있다. 요임금과 순임금의 도읍지는 동이족의 유적지이고, 이들 역시 동이족임을 말한다.

이어서 황제를 중국사의 시조로 삼으면서, 동북아 5대 역사 왜곡의 시초인 탁록대전琢鹿大戰의 진실을 밝히고 있다.

4장 〈하•은•주 삼대의 시조들〉에서는 역시 동이족 국가인 하夏나라와 상商나라 그리고 주周나라 시조들의 혈통을 말하고 있다. 이어 주나라가 중원을 점령하면서 중국中國이라는 개념과 화이관華夷觀이 탄생했음도 알려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5장 〈『사기』 「세가」의 세계世系〉를 통해서 중원을 지배했던 이들이 동이족 출신의 제후국임을 밝히고 있다.

저자는 이 책 전반에서 동이족의 실체는 중원中原에 널려 있으며, 이들에 의해 중원 대륙을 비롯한 동아시아 역사가 진행되었음을 밝히면서, 사마천이 『사기』에서 감추려 했던 역사의 실체를 밝히는 첫 작업이 이 책의 발간임을 말하고 있다. 계속해서 『사기』가 감추어 왔던 비밀들이 후속 작업을 통해서 더 명백히 드러날 것으로 기대해 볼 수 있다.

책 내용을 바탕으로 본 한중 고대사의 비밀


중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가장 큰 난제는 중국사의 시작이 언제부터냐는 것이다. 이는 중국 민족의 시작이 언제부터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중국 민족은 유방劉邦이 세운 한漢나라를 따서 한족漢族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우禹임금의 하나라에서 ‘하夏’ 자를 따고 산시성陝西省 화산에서 ‘화華’ 자를 따서 하화족夏華族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문제는 한족, 즉 하화족 역사의 시작이 언제부터냐는 것인데, 사마천은 황제黃帝부터 시작하는 「오제본기五帝本紀」로 중국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사마천의 이런 설정에 의문을 품은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오제 전에 삼황三皇이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색은索隱』의 편찬자 사마정司馬貞은 사마천이 삼황을 삭제한 데 불만을 품고 복희, 신농, 여와씨를 수록한 「삼황본기三皇本紀」를 따로 편찬했을 정도로 사마천의 계보도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사마천은 오제의 시작을 황제로 설정했지만 서진西晉의 황보밀皇甫謐(215~282)은 『제왕세기』에서 삼황도 수록하고 황제가 아니라 소호少昊를 오제의 첫 번째로 꼽았다. 사마천이 황제부터 중국사를 시작한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사마정과 황보밀 등은 사마천이 삼황과 오제를 삭제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중국은 최근 산둥성山東省 남부 임기臨沂(린이)시에 거대한 동이문화박물관을 열었다. 여기에 네 명의 동이족 군주를 전시해 놨는데, 태호복희씨太昊伏羲氏,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치우蚩尤, 순舜임금이 그들이다. 삼황의 시작이 태호복희씨이기 때문에 삼황부터 『사기』를 기술하면 한족의 중국사가 아니라 동이족의 중국사가 되기 때문에 삼황을 삭제한 것이다.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의 역사 왜곡과 역사 만들기는 여기서부터 비롯하였다.

화하족은 실체가 없다
저자는 우선 ‘민족民族’이라는 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한다. 혹자는 민족이 근대에 생겼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말을 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에 대해 저자는 ‘역사의 기초를 모르는 무리한 주장들’이라고 하였다. ‘민족’이라는 용어 자체는 서구에서 들어온 용어들을 일본에서 한자로 만든 것이 맞다. 그렇지만 1872년에 민족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고 해서 이때부터 민족이 생겼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민족을 족류族類 또는 겨레라고 하였다. 그리고 근대 유럽 사회의 민족은 중세 코즈모폴리턴cosmopolitan 사회가 무너지고 민족국가가 들어서면서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된 후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제국주의帝國主義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민족주의는 제국주의가 아니라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의미이다.

동아시아에서 민족을 뜻하는 한자는 크게 이夷와 화華로 나뉜다. 화華는 꽃이 핀다는 뜻인데, 중국의 전국시대와 전한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여기에는 한족漢族의 의미가 없다. 반면 이夷는 상商(은殷)에서 만든 갑골문에 나오고, 주나라의 청동기에 새겨진 금문金文에 여러 번 나온다. 이夷는 ‘큰 화살을 쏘는 사람’이라는 뜻과 평(평정平定)한다는 뜻이 있다.

주나라가 은나라를 꺾고 중원을 차지한 후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자신들의 주요 영역인 허난성河南省 낙양 일대를 하락河洛(즉 황하와 낙양 일대 지역)이라고 구분했는데, 이를 중국中國이라고 부르면서 화이華夷 개념이 생겨났다고 한다. 즉 주나라를 중심으로 사방의 겨레를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분류하면서 하화夏華와 이夷의 개념이 생겼는데, 이는 사마천의 『사기』 이후 뚜렷해졌다.

현재 중국인들은 자칭 한족漢族이라고 한다. 이 한족의 전신은 하화족夏華族이라고 말하는데, 하나라가 자신들을 중국으로 여겼다는 사료적 근거는 찾기 힘들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즉 하화족의 실체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이 숨기려고 했던 특급비밀 - 삼황
응수조종태호복應須祖宗太昊伏인댄 하사도인다불가何事道人多佛歌오
마땅히 선천 문명의 조종祖宗은 태호 복희씨인데 웬일로 도 닦는 자들이 허다히 부처 타령들이냐! (증산도 도전道典 5편 282장 3절)


강씨는 인류의 시원 성姓이니 상고시대 동방 배달의 신농씨神農氏로부터 시작하니라. 신농의 아버지 소전씨少典氏가 군병 감독의 명을 받고 강수姜水에 살았으니 신농이 그곳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성을 강姜씨로 하니라. 신농의 후손 강태공姜太公은 동방 신교의 일맥一脈을 한족漢族에 전수하고, 병법兵法과 정치政治로써 천하 만세에 은혜를 베푸니라. (도전道典 1편 12장 2절 ~4절)


삼황은 흔히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를 꼽는데, 복희씨와 신농씨는 부동이지만, 황제는 수인燧人, 축융祝融, 공공共工 등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또한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으로도 말하며 이는 천지인 삼재三才 사상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한다. 이 천지인 사상은 한민족 고유의 핵심 사상으로 이는 동이족 문화임을 알 수 있다. 즉 태호복희씨와 신농씨가 동이족 출신이기에 사마천은 이 삼황을 삭제하려 했음을 저자는 문헌 자료를 근거로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씨氏와 성姓의 차이점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우리가 흔히 혼용해서 사용하는 씨氏와 성姓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즉 복희씨, 신농씨, 강姜씨, 희姬씨 이렇게 되어 있는데, 성이 씨보다 큰 개념으로 여러 씨들을 포괄한다.

성은 주로 토템에서 생긴 것으로 추정하는데, 성姓 자의 부수가 ‘여자 여女’인 것은 성이 모계 사회에서 나왔음을 말해 준다. 모계 사회가 부계 사회로 전환되면서 성이 나뉘어 씨가 다시 나타나는데, 하상주夏商周 3대 때 씨는 귀족 종족 제도의 대표적 칭호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분화되면서 성이 한 가족이 후대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칭호라면, 씨는 성 중에서 갈라져 나가 일부가 사용하는 것으로, 나라 이름이나 읍의 이름, 또는 관직이나 직업의 이름을 씨로 삼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고대에는 주로 자라서 성공한 곳을 성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신농씨는 강수姜水에서 살았기 때문에, 강姜씨의 시조가 되고, 황제는 희수에서 자라 희성姬姓이 되었다. 즉 성姓은 지금의 본관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사마천이 삭제한 김金씨의 시조,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사마천이 쓴 오제 중에서 황제헌원黃帝軒轅의 맏아들은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이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를 현효玄囂 또는 청양씨青陽氏로 기술하고 있다. 저자는 이 현효 청양이 중원 상고사 최대의 수수께끼 인물인 소호少昊라고 지적하고 있다. 즉 화하족의 정통 역사를 쓰려는 사마천은 그 시조를 황제로 잡았는데, 그 아들은 동이족으로 잘 알려진 소호금천씨이기 때문에 고민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아들이 동이족인데, 아버지는 화하족인 셈이 된다. 이를 통해 소호금천씨는 황제의 계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소호금천씨는 배달국 초기 주곡관主穀官인 고시씨高矢氏의 방계 후손으로 되어 있다. 황제黃帝 역시 웅씨족 후손인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부친인 소전씨少典氏의 별파이다.

소호씨는 황제헌원의 계통을 이은 전욱고양顓頊高陽과 대립 관계에 있었고, 배달국 태호복희씨의 법을 닦아, 태호太昊 다음 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소호少昊라 하였고, 금덕金德에 의해 임금이 되어 금천金天이라 하였다고 한다. 소호는 궁상에서 태어나 동이의 수령이었다고 전해지며, 관직명을 새의 이름으로 했다고 한다. 또한 즉위했을 때 봉황이 날아왔다고 전해진다.

소호금천씨는 한국의 김金씨들, 특히 경주 김씨慶州金氏와 김해 김씨金海金氏 그리고 김해 허씨金海許氏는 소호금천씨를 시조로 언급하고 있다. 당唐나라에 살았던 신라인 김씨 부인의 행적을 기록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는 신라 김씨의 조상이 소호씨금천이라고 새겨져 있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는 가야 왕족 출신인 김유신의 묘비명에 시조가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고 새겨져 있다는 기록이 있다.

동북아 역사 왜곡의 시초 - 금살치우擒殺蚩尤
사마천은 중국사의 시조로 황제를 설정했지만, 그 전에 염제신농씨의 세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며 계보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냈다. 즉 신농씨가 제후들을 제압하지 못하였으므로 황제가 스스로 병법을 익히고 군사를 길러 제후들을 정벌하니 제후들이 다 복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치우만은 복종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즉 황제헌원 당시 치우와 염제는 복종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사마천은 황제가 먼저 염제와 싸웠다고 한다. 황제와 염제가 싸운 곳이 판천阪泉 들판이다. 이때 염제는 우리가 아는 신농씨가 아니다. 이를 『환단고기』 「신시본기」에서는 ‘유망楡罔의 때’라고 하였다. 즉 당시 중원은 염제신농씨의 나라가 다스리고 있었으며, 유망은 마지막 8세 임금이었다. 이때 중원이 어지러워짐을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때 헌구軒邱(황제헌원)가 불복하므로 치우천황께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탁록涿鹿에서 대전쟁을 벌이셨다.


그러나 사마천은 『사기』 「오제본기」에서 사실과 반대로 기록하였다.

신농씨의 나라가 쇠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툴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사납게 짓밟았으나 신농씨는 이를 휘어잡지 못하였다. 이때 헌원이 무력으로 제후들을 치니 모두 와서 복종하였다. 그러나 치우가 가장 사나워 칠 수가 없었다. 이때 치우가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키므로(蚩尤作亂), 탁록의 들에서 싸워 치우를 사로잡아 죽이고(擒殺蚩尤) 신농씨를 대신하여 천자가 되었다.


즉 황제헌원이 난을 일으킨 치우를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왜곡시켜 놓았다. 동북아 역사 왜곡의 시작인 치우작란蚩尤作亂과 금살치우擒殺蚩尤의 기록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그 반대이다. 즉 황제작란黃帝作亂, 금황제擒黃帝이다. 승자와 패자를 반대로 적어 놓은 것이다.

이에 대해 당나라의 학자 장수절張守節은 『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 자세한 주석을 달아 놓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치우가 죽은 뒤 천하가 다시 소란해지자 황제가 드디어 치우의 형상을 그려서 천하에 위엄을 떨치자 천하에서 모두 치우가 죽지 않았다고 이르면서 팔방의 모든 나라가 다 복종했다.... 공안국孔安國은 “구려九黎 임금의 호가 치우蚩尤이다.”라고 하였다.


저자는 “황제가 치우를 꺾고 중원의 패권을 차지했다면, 그 자체로 중원의 지배자가 된 것인데, 제후들이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고, 패배자인 치우의 형상을 그려서 천하에 위엄을 떨칠 수 있었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책 160쪽)”고 하며 그 역사의 진실에 대해서 강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 치우천황과 황제헌원의 탁록대전의 진실에 대해서는 『환단고기』 내용을 참고하거나, 본지 2020년 7월 호 ‘창세역사 성인열전’ 배달국 14세 자오지 환웅 下 - 군신軍神 강림 편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하상주 3대의 역사와 요순 선양의 진실
요순에 얽힌 역사의 진실

세상에서 우순虞舜을 대효大孝라 일러 오나 순은 천하의 대불효니라. 그 부친 고수高叟의 악명이 반만년 동안이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하였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으리오. 세상에서 요순지치堯舜之治를 일러 왔으나 9년 홍수는 곧 창생의 눈물로 일어났나니 요堯는 천하를 무력으로 쳐서 얻었고, 형벌刑罰은 순舜으로부터 나왔느니라. (도전道典 4편 30장 1~4절)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은 전통적으로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알려져 왔다. 특히 유학자들이 요순선양堯舜禪讓이라 하여 가장 이상적으로 삼은 왕위 계승 방식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후대 유학자들이 윤색한 것이고 실제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왕위가 찬탈된 것을 합리화한 경우가 많다고 저자는 말한다.

공자는 『서경』에서 제요부터 중국사가 시작하는 것으로 서술하였는데, 제위를 아들 단주에게 세습하지 않고 제순에게 선양했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죽서기년』과 『한비자』 등에서는 선양설을 부정하면서 제순이 제요를 무력으로 협박해 제위를 빼앗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선양이 아니라 찬탈이라는 설에 장수절도 주목했다. 그는 『사기정의』에서 요순선양설과 다른 기록이 『죽서기년』에 있다고 말했다.

『죽서기년』에 “옛날 요의 덕이 쇠해서 순에게 갇히게 되었다. 또 언주偃州에 옛 성이 있는데 현의 서북쪽 15리에 있다.”라고 했다. 또한 “순이 요를 가두고 다시 단주를 쓰러뜨려 아버지와 서로 만나지 못하게 막았다.”라는 기록도 인용했다. (114~116쪽)


사마천은 제요帝堯에 대해서 가능한 모든 문장력을 동원한 문학적 수사로 극찬을 하고 있다. 어질기는 하늘과 같고, 지혜롭기는 신과 같은 임금이어서 백성들은 요임금에게 해를 향하는 것처럼 쏠리고, 구름이 덮어서 적셔 주는 것처럼 바랐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마천이 요임금을 극찬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제주의 왕조에서 국왕의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유학자들은 여러 개념을 만들어서 군주권을 제약하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천명天命과 선양禪讓 같은 것들이다. 군주가 정치를 못하면 천명이 다른 인물에게 옮겨질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요임금 같은 선양의 전범典範을 만들어서 후세 임금들이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사마천이 요임금을 높이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가 요임금이 이족夷族의 땅을 지배했다는 점이다. (121~122쪽)


그러면서 지금의 산둥성 청주 지역을 다스렸다는 『서경』 기록을 인용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동이족들과 충돌한 기록이 나오기 때문에 이때 일은 일시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고 전한다.

이 책에서는 하상주夏商周 삼대의 시조들 모두 동이족 출신임을 여러 근거 자료로 서술하고 있다. 즉 화하족과 동이족의 혈통 문제에 대해서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는 현재 동이족과 우리 한민족과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강단 식민사학의 행태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아쉬운 점


이 책의 주된 이야기는 중국의 제왕들이 동이족 출신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내용이며, 여러 문헌을 인용하며 이를 논증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환단고기』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언가 『사기』 내용에 의문을 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제대로 된 역사는 무엇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명쾌하게 밝혀 주지는 못하고 있다.

중국 고대사의 진실을 조금 알 것 같지만 여전히 안개 속에 싸여 있는 느낌인데, 이 주제를 논증하기 위하여 『환단고기』의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역사를 서로 비교해 살펴보았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동이족과 우리 한민족과의 연관성에 대해 문헌과 역사적 사실, 혈연적 관계, 문화의 유사함 등을 좀 더 서술해 주었다면 이 책을 읽는 데 보다 유익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후 이어지는 다른 책 발간에서 그런 점을 기대해 본다.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신주 사기』


이 책이 나오게 된 결정적 계기는 저자를 비롯해서 30여 명 정도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 삼가주석三家注釋을 포함해 『사기史記』를 강독하면서부터였다. 이들의 연구 결과로 나온 책이 바로 『신주 사기』이다. 세계 최초로 사기 본문과 삼가주석을 번역하였을 뿐 아니라, 새로운 관점의 주석을 추가하여 현재 「본기」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출간되고 있다.

그동안 사마천 『사기』는 「세가世家」나 「열전列傳」의 일부 장면들이 널리 알려지면서 재미있는 책으로 인식되지만, 사실 제대로 알려고 하면 방대하고도 난해한 역사서이다. 예로부터 『사기』를 풀이한 수많은 주석서들이 난무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수십 종의 주석서 중 대표적인 주석서가 위진남북조 시대 당시 남조 송나라 때 진수의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의 아들 배인裵駰의 『집해集解』와 「삼황본기」를 쓴 당나라 사마정司馬貞의 『색은索隱』, 당나라 때 『사기』 연구에 몰두한 장수절張守節의 『정의正義』를 꼽는데, 이를 ‘삼가주석三家注釋’이라고 한다. 삼가주석을 보지 않고 『사기』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삼가주석은 본문보다 방대하고 동양 고대 사상과 제도, 관습 등에 해박해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인데, 때로는 사마천의 본문과 충돌하기도 한다. 그래서 삼가주석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사기 연구의 길이기도 하다.

『신주 사기』는 사마천이 쓴 본문과 삼가주석을 모두 번역하고 그 아래 원문을 수록했다. 또한 의역을 최대한 피하고 한 문장 한 문장 직독직해를 원칙으로 삼아 번역했다. 그래서 한자를 조금 아는 독자라면 원문과 대조하며 원문을 읽는 지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단순한 중국사가 아니라 하화족의 역사 속에 숨겨진 동이족의 역사를 찾는 여정이야말로 현재 정체성의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가 『신주 사기』를 읽어야 하는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지은이 이덕일

1차 사료를 바탕으로 하여 조선 후기 노론사관과 일제 강점기의 식민사관이 변형시킨 우리 역사의 원형을 현재에 되살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역사가이다. 그는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우리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새로운 역사관의 정립을 위해 총성 없는 역사 광복 전쟁을 치르고 있다.

방대한 문헌 사료를 치밀하게 분석해서 우리 역사에서 해방되지 못한 여러 문제를 지적하고, 남의 눈이 아니라 나의 눈으로 역사와 사회를 보자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시작으로 치열한 역사의식으로 무장한 50여 권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지은이가 밝힌 『신주 사기』의 발간 배경
저자는 이 책을 발간하게 된 이야기를 책머리에 싣고 있다. 굉장히 신비로우면서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진다는 믿음을 확인시켜 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저자는 10여 년 전 한 겨울에 단군조선의 첫 번째 수도였던 하얼빈 답사를 갔다. 그곳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사기 주석서인 다키가와 스케노부瀧川資言의 『사기회주고증史記會注考證』 한 질을 발견하여 사 오게 된다. 다키가와는 기존의 ‘삼가주석三家注釋’ 밑에 자신의 고증을 덧붙여 방대한 이 책을 간행하였다.

몇 년이 지난 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 삼가주석을 포함한 『사기』를 대상으로 원문 한 자 한 자를 강독하였다. 약 8년 정도 진행된 이 강독을 함께 한 이들의 상당수가 번역 및 연구진의 일원이 되어 우리 관점의 주석을 단 『신주 사기』가 발간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사마천이 『사기』를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역사를 저술한 것이 아니고 만들어 냈음을 느꼈다고 한다. 이는 저자가 삼가주석을 포함한 『사기』 원전 강독을 하지 않았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라고 하니, 『사기』는 참으로 읽기 어려운 책이 맞는 것 같다. 그동안 수많은 지식인들이 『사기』를 읽었을 터인데,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결론인 것이다.

역사 왜곡의 전통은 현재 중국 정부에 의해 자행되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비롯한 역사공정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2천여 년간 감추어 왔던 역사의 실체를 찾으려는 시도이자 시발점이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조선조 주자학자들의 중화 사대주의사관과 여전히 횡행하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친일 식민사관이라는 미몽迷夢에서 벗어나 역사관의 혁명이 일어나야 할 때이다.

동양 역사학의 아버지 사마천과 『사기史記』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기史記』는 한 무제漢武帝 당시 역사가인 사마천司馬遷의 저서이다. 역사학의 성인, 사성史聖으로 추앙받고 있는 사마천은 남성의 생식기를 거세당하는 궁형宮刑의 치욕을 이겨 내고 상고 시대부터 전한 무제까지 2천 년에 걸친 중원 대륙의 통사를 지었다.

『사기』는 기존 일기 형식의 편년체編年體에서 벗어나 제왕의 이야기인 본기本記와 일반인들을 다룬 열전列傳이 중심이 되어 왕조 시대를 정리하는 데 적합한 기전체紀傳體 사서의 효시이다. 이런 서술 방식은 후세 사가의 모범이 되어 중국의 정사와 우리나라의 『삼국사기』와 『고려사』가 모두 이 형식을 따르고 있다. 신중하고 객관적인 기술, 생생한 인물 묘사로 인간학의 보고寶庫로 알려져 있다. 한문으로 쓴 가장 아름다운 명문이라는 칭송도 있다. 그러나, 황제의 오제 시대를 비롯해서 동아시아 상고사에 치명적인 왜곡과 말살을 자행하였다. 대표적인 첫 작품이 본문에서 언급한 ‘금살치우擒殺蚩尤’ 기록이다.

삼황오제三皇五帝란?
이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부분은 동아시아 역사의 제왕인 ‘삼황오제三皇五帝’에 대한 부분이다. 흔히 중국의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제왕들로 세 명의 황皇과 다섯 명의 제帝를 말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 사마천은 삼황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오제부터 다루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진실은 본문에서 언급하였듯, 이 삼황오제는 동이족 출신의 성황들이며 우리 배달국과 연관이 깊은 인물로 동아시아 문명을 연 주인공들이다. 현재 알려진 황제皇帝란 단어의 어원이 이 삼황오제에서 비롯되었다. 전국 시대를 통일한 후 진시황이 새로운 호칭을 정하면서 삼황오제의 글자를 따서 ‘황제’라는 호칭을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