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梁·楊)씨 가문들의 역사상 발자취

[한국의 성씨]

이명규(객원기자) / 서울목동도장

이번 호에서는 알고 있으면 유용한 양씨 가문들의 역사상 발자취에 대하여 제주 양씨를 포함한 여러 양씨에 대하여 다루어 본다.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양씨로는 들보 량 자를 쓰는 양씨梁氏, 버들 양 자를 쓰는 양씨楊氏가 대표적이며 그 외에 도울 양 자를 쓰는 양씨襄氏, 나무 목 변의 들보 량 자를 쓰는 양씨樑氏 등이 있다.

양씨梁氏의 연원


우리나라 모든 양씨의 시조는 탐라耽羅 개국 설화의 삼신인三神人 중 한 사람인 양을나良乙那이다. 제주 삼성인 양梁·고高·부夫씨의 시조인 삼신인은 맏이가 양을나良乙那, 둘째가 고을나高乙那, 셋째가 부을나夫乙那이다.

그중에서도 양대兩大 성姓인 양씨와 고씨 집안은 삼신인의 서열을 놓고 서로가 맏집이라고 엇갈린 주장을 해 왔다. 양씨의 연원에 대하여 『고려사高麗史』, 『동국통감東國通鑑』, 『해동역사海東繹史』에 나온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태고太古 시기엔 제주도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 어느 날 한라산 북쪽 땅속에서 삼신인三神人이 솟아 나왔다. 이곳이 삼성혈三姓穴인데 모흥혈毛興穴이라고도 한다. 이때가 단군 창업과 동시대이다. 삼신인 중 맏이가 양을나요, 둘째가 고을나, 셋째가 부을나다. 세 사람이 탄생한 시기는 당요唐堯 9년이라고 구보舊譜에 실려 있으나 유사 이전有史以前의 일이라 고증할 수는 없다.

씨족사의 개요


양씨梁氏는 제주 양씨濟州梁氏·충주 양씨忠州梁氏 등이 널리 알려진 양씨다. 양씨는 모두가 제주 양씨에서 분관되었는데, 제주도에 분포된 토박이 양씨는 제양濟梁, 육지에 널리 퍼져 있는 양씨를 육양陸梁이라 한다. 제주 양씨는 양을나良乙那를 도시조로 한다. 제주 양씨의 중흥 시조 양순梁洵은 양탕梁宕의 후손으로 서기 682년 신라의 국학에 입학하여 한림학사가 되었다. 신라에서는 양순을 한라군漢拏君에 봉하여 후손들이 제주를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신라 통일 후 한라군 한림학사翰林學士 양순良洵과 성주왕자작星主王子爵 양섭천良涉川을 이은 후손으로 혜공왕 때 상대등을 지낸 양상良相, 선덕왕 때 각간角干(재상)과 부원군이었던 양품良品, 애장왕 때 우찬선대부右贊善大夫를 지낸 양열良悅, 문성왕 때 시중侍中을 지낸 양순良順, 진성왕 때 도원수를 지낸 양길良吉, 고려 태조 6년까지 항전했던 충신 경산부장군京山府將軍 양문良文 등이 있었다.

고려의 개국에도 양씨 가문은 일역을 맡았다. 고려 왕조 창업에 많은 공훈을 세운 양능길梁能吉(현 충주 양씨 시조)은 그 후 삼중삼한대장군三重三韓大將軍으로 예성군蘂城(현 충주)君에 봉해졌다. 탐라성주로 고려와 평화 외교의 기틀을 마련한 양구미梁具美, 성종 때 병부낭중兵部郎中, 동관시강학사東官侍講學士를 지낸 양능양梁能讓도 고려 때 양씨 문중을 빛낸 얼굴이다. 양능양은 경학의 대가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 국자감에서 전례와 경의를 강의하였고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귀국해서는 학교를 세워 영재 교육에 힘쓴 당대의 석학이었다.

이 밖에 고려 때 이름을 날린 인물로는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양주운梁朱雲(원종 때 용성龍城부원군), 양한충(공민왕 때 종묘사령종부정宗廟寺令宗簿正이며 한림학사翰林學士로 12대를 이은 재려십이한림지문在麗十二翰林之門의 종실宗室이다), 양한정梁漢精(공민왕 때 찰방察訪), 양한좌梁漢佐(공민왕 때 시랑侍郞), 양우梁祐(충렬왕 때 집현전 대제학) 등이 있다.

특히 양우는 조선 개국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남원의 교룡산蛟龍山에 은거,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충절을 지킨 절신이다. 이성계가 양우를 집현전 대제학에 임명했으나 세 차례나 거절했다. 그는 이후 움막 속에서 사람을 만나지도 않고 숨어 살다가 생을 마쳤다. 세인들은 그를 가리켜 동방의 백이숙제伯夷叔齊라고 하였다. 이성계가 그를 벌하려 했을 때 중신들이 “양우를 벌하면 충신의 길이 막힌다.”고 간하여 죽음을 면했다고 한다. 양우가 91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사흘 동안 그의 움막 위에 무지개가 서고 교룡산에 천둥소리가 울려 사람들은 “충신의 높은 절개가 하늘과 땅에 통하였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양성지梁誠之는 조선조(세종~성종)에 우뚝 솟은 양씨 문중의 인물이다. 훈구파의 중진으로 집현전에 들어가 부수찬·교리 등을 지내다 『고려사高麗史』 개찬改撰에 참여했다. 이어 집현전 직제학에 승진했고 이조판서·양관대제학·대사헌 등을 지냈다. 문물제도와 국방·앙병·농경 등의 일대 개혁, 홍문관과 규장각의 창설, 「연변방수도沿邊防戍圖」와 「팔도지리지」 작성 등 그가 남긴 역사적 위업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저서로 「눌재집訥齋集」, 「논선서論善書」, 「시정기時政記」, 「삼강사략三綱事略」 등이 있다.

청백리 양관梁灌은 덕미군수로 있을 때의 선정이 상감의 귀에까지 들어가 왕은 이를 그림으로 그려 조회 때마다 보여 주며 “이는 청백리 실황實況이니 제신들은 이를 본받아 선정에 힘쓰라.”고 당부했을 정도의 인물이다. 송시열과 교분이 두터웠던 호남의 거유 양산보梁山甫와 중국에까지 문명을 떨쳤던 양희梁喜(이조참판) 등도 조선 초에서 중기 사이에 문중을 빛냈다.

양씨 가문은 문인 못지 않게 무인도 많이 배출했다. 선조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양대박梁大樸이 있다. 그는 사재를 털어 4천여 의병을 모집, 임실·영암 등지에서 왜병 3백여 명을 몰살시킨 명장이었다. 그가 전선에서 병사하자 조정에서는 충장忠壯의 시호를 내렸다.

제운당霽雲堂 양경신梁景信은 임진왜란 때 고제봉高霽峯과 더불어 창의, 담양에 집결하여 임진 7월 10일 와평臥坪(눔벌) 전투에서 왜군을 맞아 싸웠고, 조문열趙文烈(趙憲)군軍 휘하에 합류하여 연곤평延崑坪 전투에 참전, 당 30세로 700의사와 더불어 순절하였다. 양산숙梁山璹도 임진왜란 때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참전, 의주까지 나아가 어전에 보고하여 공조좌랑을 제수받았고, 진주산성에서 분전하다가 김천일金千鎰·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남강에 투신 순절하였다. 인조 9년에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되고 순조 9년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철종 8년에는 충민忠愍의 시호가 내려졌다.

양몽설梁夢說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주성에서 싸웠으며 양응록梁應祿은 임진왜란 때 동향의 5의사와 함께 왜적 수십 명을 죽이고 전사했다. 숙종 때 삼도수사三道水使를 지낸 양세현梁世絢의 집안은 그 후 5대에 걸쳐 18명의 병사兵使·수사水使를 배출했다.

열강의 세력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각축을 벌이던 고종 때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로즈 제독이 거느린 프랑스 함대를 격파했던 양헌수梁憲洙도 양씨 가문의 대표적 무인이다.

양씨 문중은 항일운동사에도 선명한 업적을 남겼다. 양상기梁相基는 1908년 80명의 동지를 규합,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광주와 담양·창평·장성 등지에서 친일파를 살해하고 일본 건물들을 파괴하는 등 전과를 올리다 담양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양한규梁漢奎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 남원에서 의병 1천 명을 모아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며 북으로 진격하다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양기하梁基瑕는 공주군수를 지내다 한일합병 후 만주로 망명 대한독립단 교통부장과 광복군 정보국장 등을 지냈다. 1922년 김구 선생과 함께 노병회를 조직했고 1929년 조선혁명당의 정치부 책임자로 활약하다 1932년 환인현桓仁縣에서 일경의 습격으로 서거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됐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에는 양전백梁甸伯과 양한묵梁漢黙이 있다. 양한묵은 1906년 이준李儁 열사와 함께 헌정연구회를 조직했고, 이듬해 손병희孫秉熙 등과 천도교 중앙총무를 결성, 친일파들에 맞섰다. 3.1운동 때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됐다.

양기탁梁基鐸은 상해 임시정부 주석·국무령 등을 지내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외롭게 살다 간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다. 그는 또 ‘한영韓英사전’ 편찬에 참여했던 선각자이며 1904년 영국 사람 베델과 함께 ‘코리아 타임즈’를 발간했으며 이듬해 ‘대한매일신보’를 창간, 주필이 되어 항일사상을 고취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4년간 복역했고 1920년 동아일보 고문에 취임했으며 1937년 중국에서 사망할 때까지 조국의 독립과 후배 양성을 위해 일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무공훈장이 수여됐다.

제주 양씨의 분관


남원 양씨南原梁氏
남원 양씨는 신라 통일기에 양자영梁自瀛이 공을 세워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남원 양씨로 관적하게 되었으며, 남원 양씨는 후대에 내려오면서 문헌의 실전失傳으로 그 이하의 선계先系를 알 수 없어, 후대에 양능양梁能讓으로부터 계대하는 병부공파兵部公派와 양주운梁朱雲으로부터 계대하는 용성군파龍成君派로 크게 분파되는데 병부공파가 남원 양씨의 약80%를 차지한다.

대표적인 병부공파의 인물로는 고려 때 양견梁堅이 광정대부匡靖大夫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거쳐 진현관進賢館의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동국의 백이숙제라고 불리는 양우梁祐는 판도판서의 대제학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

조선조에는 남원군에 봉해진 양성지梁誠之가 남원 양씨 가문을 크게 빛냈다. 그는 1441년(세종 23년) 진사와 생원에 합격하고, 식년문과(정시 과거)에 급제하여 경창부승慶昌府承, 성균관 주부主簿를 거쳐 집현전集賢殿 부수찬副修撰을 지내고 교리校理 등을 역임하였다. 또 춘추관의 기주관記注官 겸 고려사高麗史 수사관修史官으로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집현전의 직제학直提學에 승진했으며, 1453년(단종 1년) 왕명으로 조선도도朝鮮都圖·팔도각도八道各圖를 작성하고, 이듬해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를 찬진撰進하였다.

양성지의 고손 양윤신梁允信은 학행으로 사헌부의 감찰에 올라, 명종 때 을사사화로 유배되었다가 방면되어 사천현감이 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양사원과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웠으나 부자가 순절하였다.

근대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의병장 양한규梁漢奎가 남원 양씨의 가통을 이었다. 양한규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권을 회복하고자 1,0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1907년 2월 남원으로 진격하여 입성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죽었고, 전열을 재정비한 진위대의 공격으로 남원 점령은 무산되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충남 논산시 상월면 신충리에는 남원 양씨의 문중 사당 신충사가 있다. 남원 양씨는 757년(경덕왕 16년) 나라에 공을 세워 남원백에 봉해진 후 남원을 본관으로 삼아 분적하였다고 한다. 논산에 입향한 남원 양씨의 인물로는 조선 중기 무신 양함梁諴이 있다. 양함은 임진왜란 때 함창현감으로 출전하여 전사한 인물로 사후 300여 년이 지난 1886년 충절을 인정받아 정려를 내려 받았다. 양함은 임진왜란 당시 충주 탄금대에서 악전고투 끝에 최후까지 선전하였지만 29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하였다. 치열했던 전투의 결과로 시신조차 거두지 못하고, 초혼장으로 지금의 논산시 노성면 가곡리에 안장하였으며, 약 300년 후인 1886년 그의 후손들이 살았던 상월면 신충리에 정려를 건립하였다.

충주 양씨忠州梁氏
충주 양씨忠州梁氏 중시조 양능길梁能吉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에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삼중삼한대장군三重三韓大將軍으로 국가의 대업을 이룩하여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지자 제주 양씨에서 분적하였다. 충주 양씨의 주요 인물로는 고려 때 상장군上將軍 양유달梁攸達,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양일梁逸, 정위正位 양창梁暢, 검교첨사檢校詹事 양공소梁公紹,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중서시랑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中書侍·同中書門下侍·平章事 양원준梁元俊 등이 있다. 조선조의 주요 인물로는 세종 때 이조좌랑, 병조정랑을 지낸 양여공梁汝恭과 그의 손자로 이조정랑 및 사헌부 지평을 역임한 양순경梁舜卿, 순조 때 양종간梁宗幹 등이 있다.

기타 양씨梁氏
그 밖에 제주 양씨를 동원으로 하는 나주 양씨羅州梁氏와 임천 양씨林川梁氏가 있다. 나주 양씨는 양인梁認을 시조로, 임천 양씨는 양적梁逖를 시조로 한다는 것 이외에는 문헌이 없어 자세한 세계나 본관의 유래 등은 확인할 수 없다. 이 외에 양梁 자를 성으로 하는 양주 양씨楊洲梁氏가 있지만 선계를 자세히 확인할 수 없다.

가문의 대표적 인물


주요 역사적 인물
양팽손梁彭孫 - 양팽손은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화가이다. 1510년(중종 5)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다. 현량과賢良科에 발탁되어 정언正言·전랑銓郞·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기도 하였다. 정언으로 재직할 때 이성언李誠言을 탄핵한 일로 인해 대신들의 의계議啓가 분분하였지만, 조광조·김정金淨 등 신진 사류들로부터는 언론을 보호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글씨와 산수화에 뛰어났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그의 작품 <산수도山水圖>는 묘사가 정확하고 필치가 고답적이다.

양산보梁山甫 - 양산보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자는 언진彦鎭, 호는 소쇄옹瀟灑翁이다. 총명하고 단정한 성품으로 어렸을 때부터 글을 깨우쳤다. 무등산 아래에 소쇄원이라는 별서 정원을 짓고 두문불출하며 스스로를 소쇄옹이라 하였다. 그 후에도 여러 번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유받았으나 끝내 버티어 나가지 않고 한가롭게 산중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연구하며 지냈다.

현대 주요 인물
양주동梁柱東 - 양주동은 대한민국의 시인, 문학평론가, 국문학자, 영문학자, 문학번역가, 수필가, 문학 교수이다. 호는 무애无涯로,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1923년에 동인지 「금성金星」으로 등장하여, 1930년에는 시집 「조선의 맥박」을 펴내기도 했다. 이후에 향가 해독에 몰입하면서, 고시가古詩歌 해석에 힘을 쏟았다. 특히 1942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향가 25수 전편에 대한 해독집인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를 펴냈다. 이어 1947년에는 「여요전주麗謠箋注」를 통하여 고려가요에 대한 주석을 집대성하였다.

양향자梁香子 - 삼성전자에 고졸 여직원으로 입사해서 상무이사에까지 올라, 삼성 그룹 역사상 첫 여성 출신 임원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2016년 1월 12일 더불어민주당의 외부 인사 영입으로 입당해 기자회견을 열고, “학력·성별·출신의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노력했다.”고 살아온 길을 말했다. 21대 국회위원으로 당선되었고 이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남았다.

양학선梁鶴善 - 1992년 12월 6일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의 기계 체조 선수이다. 2012년 하계 올림픽 기계 체조 남자 도마 종목의 금메달리스트이자, 대한민국 체조 종목 최초의 금메달리스트이다.

버들 양楊 자를 쓰는 양씨楊氏


문헌에 따르면 양씨楊氏는 중국에서 계출된 성씨로, 원나라에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오른 양기楊起가 황제의 명을 받고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충렬왕비)를 배종하고 고려 원종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착하게 된 것이 우리나라 양씨의 시초가 된다. 또 다른 기록에는 양기가 원나라의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중서성의 정승으로 있을 때인 1349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공민왕비)를 배종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도 한다.

남원 양씨南原楊氏
남원 양씨南原楊氏는 양경문楊敬文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남원 양씨 족보에 의하면 양경문은 고려조에서 지영월군사知寧越郡事(지방장관)를 역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후손들은 몇 대에 걸쳐 남원에 살아온 선비 집안으로, 본관을 남원으로 하였다.

역사에 기록된 남원 양씨 인물을 보면,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현종 때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좌복야左僕射에 오른 양진楊稹과 공민왕 때 개성윤開城尹으로서 흥왕사의 변에 공을 세워 1등 공신에 오르고 우왕 때 찬성사상의贊成事商議로 있다가 창녕에 유배된 양백익梁伯益이 유명했다. 또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인물로는 양여공楊汝恭이 있다. 그는 세종 때 병조좌랑을 지냈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시와 글씨에는 능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 사헌부의 집의를 지낸 양자유楊子由, 호조 정랑을 지낸 양공준楊公俊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남원 양씨 가문이라고 하면 열녀烈女 숙인 이씨淑人李氏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씨 부인은 고려 말 우왕禑王 3년, 시아버지 양이시楊以時와 집현전 직제학으로 있던 남편 양수생楊首生을 한 해 사이에 사별하는 불행을 당했다. 게다가 이씨 부인은 그때 임신 중이었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기가 바쁘게 친정에서는 개가를 권했으나, 몇 달 뒤 아기를 낳았는데 11세 양사보楊思輔다. 그 후 남편의 고향으로 낙향을 결심하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길 수 없다.”는 뜻을 밝힌 서찰을 남기고 천 리 길을 걸어 남원 교룡산蛟龍山 아래 남편의 옛집으로 내려왔다.

남원으로 내려온 지 얼마 안 돼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운봉雲峰으로 쳐들어왔다. 남원 양씨의 일점혈육을 품에 안은 이씨는 피난길에 비홍치飛鴻峙에서 순창淳昌 무량산無量山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산세가 너무 아름다웠다. 유복자를 안전하게 키울 생각만 하던 이씨 부인은 이곳으로 서둘러 이사를 해서 자리를 잡았다. 가진 것이라곤, 시아버지 양이시와 남편 양수생의 문과 합격증인 양홍패兩紅牌, 그리고 1세 양경문楊敬文에서 8세 양서령楊瑞齡까지의 가승보가 전부였다. 이때 이씨 부인이 자리를 잡은 무량산 아래 집터는 지금까지 6백여 년간 23대에 걸쳐 대대로 종손이 지켜 오고 있다.

명당자리에 위치한 이 집터에는 신비한 일화가 하나 전해진다. 순창군 디지털순창문화대전과 중앙일보사가 발행한 『성씨의 고향』에 실린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집을 지키던 사람이 ‘집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고 오로지 양씨楊氏라는 것만 압니다.’라는 말과, 모자母子를 보고 ‘부인의 집입니다.’라는 말만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다는 이야기이다. 하여튼 무량산 아래 명당터에서 자란 양사보는 후에 사마시에 합격했고 음사로 벼슬길에 나가 함평현감을 지내는 등 탄탄한 가문의 터를 다지게 된다. 고려조에 양이시·양수생 부자가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명문으로 떠올랐다가 양수생楊首生의 요절로 꺼져 버릴 뻔했던 가문을 한 여인의 위대한 모성애로 건져낸 것이다.

청주 양씨淸州楊氏
시조는 후한 양진楊震의 43세손인 양기楊起로, 원나라의 금자광록대부중서성정승으로 있을 때 고려 공민왕의 비妃인 노국대장공주를 배종, 충정왕 3년 우리나라에 와 정착하였다. 그 뒤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많은 외교적 공헌을 하여 삼한창국공신 상당백에 봉해졌고, 청주를 관향으로 하사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청주를 본관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양지수楊之壽는 시조 상당백 양기의 아들로, 광정대부로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냈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또한 양기의 손자 충간공忠簡公 양백연楊伯淵은 공민왕 초 판합문사判閤門事를 거쳐 상호군上護軍으로서 최영崔瑩 휘하에 종군하며, 공민왕 12년 흥왕사興王寺의 변變이 발생했을 때 이를 수습한 공功으로 일등 공신에 이어, 추성익위공신推誠翊衛功臣이 되었고 개성윤開城尹에 특진되었다. 그 뒤 동강도지휘사東江都指揮使에 이어 왜구를 수차례 격퇴하여 대원수大元帥가 되었으며, 우왕 3년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퇴은退隱 양치楊治는 세종 19년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육진六鎭 개척에 공을 세워 영광군수靈光郡守, 함경도병마사咸鏡道兵馬使까지 되었으나, 단종 1년 난정亂政을 개탄하고 산중에 은거하였다.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은 조선 명종 1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평창·강릉·함흥·회양·철원·안변 도호부사都護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금강산에도 자주 드나들어 금강산 만폭동萬瀑洞과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을 새긴 바위가 남아 있다.

양사언의 시는 기발했으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유명한 시조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금강산유람기金剛山遊覽記’를 남겼고, 조선 전기 4대 서예가로 불렸다.

양순민楊舜民은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로 호종한 공으로 호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청계淸溪 양사기楊士奇는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으며, 그의 형 양사언과 함께 시詩에 뛰어났다.

주부主簿를 지낸 양충백楊忠伯의 아들인 도곡道谷 양응춘楊應春은 현감을 지내다가,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趙憲을 따라 청주에서 적을 무찔렀고, 뒤이은 금산錦山 싸움에서 고전분투 끝에 순절하였다. 그 뒤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양사언의 아들인 감호鑑湖 양만고楊萬古는 광해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통진부사通津府使를 지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예에 뛰어나 씨족을 더욱 빛냈다.

청주 양씨의 집성촌으로는 충남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전북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 전남 무안군 몽탄면 다산리, 전남 신안군 임자면 삼두리가 있다.

밀양 양씨密陽楊氏
밀양 양씨의 시조 양근楊根은 고려 말에 밀성군密城君(밀성은 밀양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후손들은 청주 양씨에서 분적하여, 그를 시조로 하고 밀양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를 잇고 있다고 한다. 양근은 청주 양씨의 후손으로 뒤에 남원으로 분적, 남원 양씨의 시조가 된 양경문楊敬文의 아버지이다. 양문楊文은 밀성군 양근의 아들로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인 양세경楊世經은 전서典書를 지냈다. 뿐만 아니라 양오楊墺는 현감을, 양호생楊好生은 부사를 역임했다. 이 밖에도 졸헌拙軒 양허국楊許國은 통정대부에 책록되었으며, 아금당牙禁堂 양도남楊道南은 학자로 칭송을 받았고, 양정빈楊挺彬은 현감을 지내 씨족을 빛냈다.

안악 양씨安岳楊氏
안악은 원래 고구려의 양악군楊岳郡이다. 안악 양씨의 시조 양만수楊萬壽는 청주 양씨 시조 상당백上黨伯 양기楊起의 셋째 아들로 고려조에 전서典書를 지냈는데, 공이 있어 안악군安岳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 뒤 후손들이 청주에서 분적하여 그를 시조로 하고 안악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다. 역대 인물로는 공조전서工曹典書 양정간楊貞幹, 조선조 양지택楊之澤(소윤少尹), 양식楊湜(좌찬성左贊成), 양정楊汀(판서判書), 양호楊浩(현령縣令), 양동楊洞(현령), 양지楊沚(좌위솔左衛率), 양윤원楊潤源(부사府使), 양언개楊彦漑(사직司直) 등이 있다.

현대 주요 인물
양희은楊姬銀 - 대한민국의 가수 겸 방송인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에서 3녀 중 장녀로 태어난 양희은은 경기여자중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나왔다. 대학교 1학년 때인 1971년에 가수로 데뷔하였다. 데뷔곡이자 대표곡이 되어 버린 노래는 1집 앨범에 수록된 〈아침 이슬〉이다. 이 노래의 작사 및 작곡자 김민기는 당시 작사를 할 때 민주화에 대한 열망 같은 직접적인 내용은 담지 않았다고 했지만, 당시의 민중들은 군부 독재로 억압받는 시대 상황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입각해 민주화에 어울린다고 해석하여 이 곡을 많이 불렀고, 1970~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곡이 되었다.

양순직楊淳稙 - 해군본부 정훈차감, 3선 국회의원 등을 지낸 대한민국의 군인·언론기업가·정치인이자 예비역 대한민국 해군 중령 출신이다. 아호는 심산心山이다. 1925년 5월 11일 충청남도 논산군에서 태어났다. 충청남도 공주고등보통학교 졸업을 거쳐 서울대학교 교육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1948년 4월에 해군 소위로 임관되어 복무하였으며 1961년 3월, 해군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그 후 서울신문 사장을 지내다가 6~7대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79년 YM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체포,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1980년 정치활동 규제에 묶였다가 해제, 김대중을 따르며 신한민주당 부총재를 지내기도 하였다.

중화 양씨中和楊氏, 통주 양씨通州楊氏
중화 양씨中和楊氏 - 중화中和는 평안남도의 지명으로 고려 초에는 당악唐岳으로 불렸다. 중화 양씨의 시조는 양포楊浦로 알려져 있다. 시조 양포는 고려 고종 때 시중을 지냈으며 나라에 공을 세우고 당악군唐岳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중화로 하였다. 한편 청주 양씨에서는 양포가 청주 양씨 시조 양기의 여섯째 아들이라고 한다. 시조 양포의 묘는 평안남도 중화군 정면 양지리에 있다.

통주 양씨通州楊氏 - 통주는 중국의 지명이다. 통주 양씨 시조 양복길은 원래 중국 통주 출신으로 명나라 9의사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나라가 망하자 소현세자를 따라 동래하여 북벌을 꾀하였으나 실패하자 귀화하여 경기도 광주廣州에 정착, 세거하게 되었다. 통주는 지금의 중국 베이징北京이다.

[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1) 한국인의 족보 (https://www.youtube.com/watch?v=QV4Xl8PoGtI)
2) 위키백과 제주 양씨, 남원 양씨, 청주 양씨 등
3)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4)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5) 김성회의 성씨 이야기
6) 통계청 홈페이지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제주 양씨濟州梁氏 등



양良을 양梁으로 고친 역사적 배경
모든 양씨는 탐라의 신인 양을나를 시조로 하는 동계 혈족이며 본래는 양성良姓을 쓰다가 서기 374년(신라 제17대 내물왕)경 탐라의 양탕梁宕이 신라로 들어가 광순사廣巡使가 되면서 양성梁姓으로 개성改姓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고려 말기까지는 양良과 양梁 두 가지로 쓰여 왔으나, 고향에 남아 있는 제량濟梁은 오래도록 양良으로 칭한데 반해 일찍 육지로 이주한 육양陸梁이 양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출처 : 탐라기년耽羅紀年)

양씨삼강문梁氏三綱門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에 있는 양씨삼강문은 충민공 양산숙梁山璹 일가 7명을 기리기 위해 인조 13년(1635)에 세운 정려문旌閭門이다. 원래는 양산숙을 비롯하여 효자, 열녀, 절부 각 2명씩을 모셨으나, 회진 임씨會津林氏 문중으로 출가한 양산룡의 딸은 임씨 문중에서 모시고 있어 현재는 여섯 분의 정려만을 모시고 있다.

반송 삼절사盤松三節祠
반송 삼절사盤松三節祠는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송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건축물로 양지梁誌·양조한梁朝漢·양통한梁通漢 등 임진왜란 때 순절한 양씨 일가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1839년 동래부사 이명적李明迪이 사당과 강당을 세워 삼절사라 이름하고 강당을 세한당이라 하였다. 면적 1,320㎡에 사당, 재실, 관리사 등의 목조건물이 있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양만춘楊萬春(梁萬春)과 양규楊規
우리나라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양씨는 고구려의 명장 양만춘楊萬春(또는 梁萬春)과 양규楊規이다. 양만춘은 고구려 말 안시성 성주로서 당 태종에 맞서 안시성을 지켜 제1차 여당전쟁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끈 장수이다. 양규楊規는 고려 중기의 무신으로 제2차 고려-거란 전쟁 때 크게 활약한 장수이다. 고려-거란 전쟁 당시 흥화진을 지키던 장수로 곽주, 구주, 여리참 등지에서 수많은 거란군을 죽이고 포로 수천 명을 구출하는 등 혁혁한 공로를 세웠으나, 거란 성종이 이끄는 주력 부대에 항전하다가 김숙흥과 함께 전사하였다. 양만춘과 양규는 외침을 막아서 우리 민족을 지킨 위대한 인물들이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나라에 오래전부터 양씨楊氏가 살고 있었음을 알 수는 있으나, 국내외 양씨 가운데 이들 두 사람을 상계로 하는 후손을 찾을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