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역사 성인열전 | 중원의 고구려 왕국, 제나라 이정기李正己 4대 역사

[역사인물탐구]

이해영 / 객원기자

* 대진국 세종 광성문황제 대흥 45년(단기 3114, 781)에 치청淄靑 절도사 이정기李正己가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대에 항거하니,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어 싸움을 돕게 하셨다. 이정기는 고구려인으로 평로平盧에서 태어났다. 대흥 22년(단기 3091, 758)에 병사들이 군의 통수자 이희일李希逸을 쫓아내고 정기를 세웠다. 이정기가 죽자(단기 3114, 781) 아들 납納이 아버지를 따르던 무리를 거느렸다. 대흥 56년(단기 3125, 792)에 납이 죽자 아들 사고師古가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 사고가 죽자 그 집 사람들이 발상發喪을 하지 않고, 몰래 사람을 보내 밀密 땅에서 (이복동생) 사도師道를 맞아들여 받들었다(단기 3139, 806).
- 대진국 당시 산둥반도 일대를 다스린 제齊나라 이정기 일가에 대한 유일한 국내 사서 기록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나라를 그르친 큰 죄인, 안록산

형렬이 다시 “대전에 끌려온 죄수는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그와 같이 엄하게 다스리는 것입니까?” 하고 여쭈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죄인은 안록산安祿山이니라.” 하시거늘 형렬이 여쭈기를 “안록산이 배은망덕한 죄를 지은 것이 이미 천여 년 전의 일인데 지금까지도 미결수로 남아 있다는 말씀이옵니까?” 하매 상제님께서 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라를 그르친 큰 죄인은 그 죄가 워낙 크기 때문에 백 년에 한 번씩도 신문訊問하게 되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4편 35장 9절 ~ 12절)


이정기의 제나라를 아십니까?


이정기의 제齊나라? 아마 많은 분들이 생소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 역사에서 제외되어 있지만, 중국 산동 지방을 중심으로 고구려 유민이 세운 왕국이 바로 제나라입니다. 이 나라를 세운 이는 이납李納이고, 그 기반을 닦은 이는 그의 부친인 고구려 유민 이정기李正己입니다. 대고구려 제국의 수도 평양성이 신라와 당唐의 연합군에 의해 668년 함락되고 100년쯤 지난 765년에 건국된 제나라는 산둥山東반도와 중원 일대 그리고 해상 지역에 대해 독자적인 통치력을 행사했습니다. 당연히 당나라에 대한 조공을 거부하였으며, 동아시아의 대국 대진국 및 신라와 왕성하게 교역한 명실상부한 독립 국가였습니다.

이정기(732~781)는 고구려 유민으로 본명은 회옥懷玉입니다. 무명 소졸에서 제왕의 자리에 오른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중국 정사인 『신·구당서』와 『자치통감』에 수록되어 있고, 국내 사서로는 유일하게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적은 분량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도 『환단고기』 기록이 가지는 가치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제 한때는 세계 제국 당나라를 멸망으로 이끌 정도로 강성했던 제齊나라(765~819)를 연 이정기 4대 55년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록산의 난으로 기울어진 당 제국


755년 당 현종 천보 14년 11월 9일!
범양范陽(지금의 베이징北京 지역) 절도사 안록산安祿山이 15만 명에 달하는 정예군을 이끌고 남하한 것은 당 제국뿐 아니라, 인근 평로군 전체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안록산은 현종의 명으로 역적 양국충楊國忠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댔지만, 그것이 반당 봉기라는 사실에는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안록산과 부하 사사명史思明과 그 자녀들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인 ‘안사安史의 난’은 안록산과 사사명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755년 양력 12월 16일부터 763년 2월 17일까지 진행되면서 당 제국의 통치력이 약화되고 사방의 절도사들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안록산은 나라 이름을 연燕이라고 하고 스스로 황제를 선포하였습니다.

당 현종은 초기에는 국정을 잘 이끌어 ‘개원開元의 치治’라고 하며 당의 재번영을 이루는가 싶더니, 며느리였던 양귀비에 빠졌고 국정을 소홀히 하였습니다. 정치에 싫증을 느껴 환관인 고력사와 외척인 양국충에게 국정 운영을 넘겼습니다. 환관과 외척들의 전횡과 부패 속에서 제도와 관리들은 타락할 수밖에 없었으며, 권력 다툼은 안록산에게 난을 일으킬 명분을 주었습니다. 기존에는 양귀비를 당이 멸망한 원인으로 보기도 했지만 이는 남성 위주의 시각으로 논한 것이며, 당 제국은 자체 모순의 권력 다툼과 환관의 발호, 절도사의 강성함과 여기서 유발된 내전과 국력 소모로 멸망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때 발생한 안사의 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나라의 정치 제도는 무너졌습니다. 또한 위구르족 등 이민족에 의해 수도 장안이 함락되면서 당나라 전 국토가 유린당하며 황폐해졌습니다. 수많은 반란 속에서 지방의 절도사 세력이 성장하였고, 중앙 정부에서는 여전히 환관과 외척들이 권력 다툼을 벌였습니다. 당나라는 강남 지역의 풍부한 경제력 덕분에 명맥을 유지하였습니다. 이정기 왕국은 이 강남에서 장안으로 가는 운하를 막으며, 당의 숨통을 조였습니다. 겨우 이정기 왕국을 제압한 당나라는 875년 황소의 난을 거쳐 절도사인 주전충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이정기, 후희일을 추대하다


이정기는 대릉하大陵河 상류 지역에 위치한 영주(요령성 조양)에서 732년 태어났습니다. 영주는 고구려 멸망 후 평양성 등의 고구려 유민들이 집단적으로 끌려갔던 지역으로 북방 유목 민족들과 교호하는 중심지였습니다. 대진국 개국공신인 말갈 장수 걸사비우가 봉기하기도 한 곳입니다. 근처 평로군은 안록산이 최초로 맡게 된 지역이었습니다. 740년 평로병마사가 되었다가 초대 평로절도사가 됨으로써 북방에 독자적인 기반을 마련하였던 것입니다. 이 평로군의 주된 임무는 실위室韋와 말갈靺鞨 그리고 대진국을 막는 임무로 최정예 군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안록산의 난과 대진국과 관계
그렇기 때문에 안록산이 이 지역을 두고 남하했다는 것은 대진국의 양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당시 대진국은 문황제 치세로 매우 강성하였기 때문에 안록산의 근거지인 범양으로 치고 들어와 당 제국 본토를 공략했다면, 과거 장문휴가 등주를 공격했던 것보다 더 큰 영향을 당 제국에 미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진국에서 이에 대한 움직임이 별로 없던 것으로 봐서, 어느 정도 양해가 있었거나 평로군 군대가 강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 안록산의 난이 발생한 755년에 수도를 중경현덕부에서 상경용천부로 천도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문황제는 전반적으로 당나라와 평화롭게 지내려 하였지만, 필요 이상의 요구에는 일절 응하지 않았습니다. 758년 당나라는 대진국에 사신을 보내, 안록산 무리의 진압을 위해 기병 4만의 출병을 요청해 왔지만, 문황제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한편 781년 평로치청절도사에 오른 이정기가 당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에는 기마 부대의 기동력 강화에 필수적인 군마를 이정기에게 수출하기도 하였했습니다.

758년, 안사의 난 당시에 전대 평로절도사인 왕현지가 병사하자, 이정기는 왕현지의 아들이 절도사가 될 것을 염려하여 왕현지의 아들을 살해하고 같은 고구려 유민이자 고종사촌 형인 후희일侯希逸을 평로절도사에 추대하고 자신은 그 부장 지위에 올라섰습니다. 이후 공격해 오는 해족의 군대와 안록산군을 피해, 바다를 건너 산동 지역의 청주를 점령하고 청주 절도부까지 장악하는 기염을 토하게 됩니다.

후희일을 내 쫓고 자립하다.
765년 군사들이 방탕과 사치를 일삼는 후희일을 내쫓고 이정기를 세우게 됩니다. 여러 활동에서 군사들의 신망을 얻게 되자, 이를 시기한 후희일이 이정기를 제거하려 했지만, 군사들에 의해서 제지되고 이정기는 병사들이 추대한 최초의 절도사가 되었습니다. 이정기는 심성이 강직하고 무력이 상당히 뛰어나 사람들의 신임을 받았다고 합니다.

산둥반도에서 세력을 키우고


이렇게 절도사가 된 이정기는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여 독자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안록산의 난으로 국세가 기운 당 조정은 회옥이라는 본명 대신 정기正己라는 이름을 내리면서, 평로치청절도관찰사平盧淄靑節度觀察使 겸 해운압발해신라양번사海運押渤海新羅兩蕃使라는 관직을 주었습니다. 이는 발해 이동以東 즉 대진국과 신라에 대한 외교 업무를 전담하는 역할이었습니다. 이에 더해 요양군왕遼陽郡王에 봉하였습니다.

이정기는 766년 3월 신라가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칠 때부터 첫 업무를 관장했습니다. 이후 신라 사신의 출입을 관장하면서 신라는 물론 대진국과의 무역을 통해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그가 다스린 산동과 회대淮岱 일대는 영토가 신라보다 넓고 인구도 더 많았습니다. 또한 소금과 철, 농산물이 풍부한 중원 경제의 심장부이기도 했습니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독자 세력을 형성하다
이정기는 부역과 세금을 균등히 하고 정령政令을 엄히 하였으며, 대진국의 법제와 세제를 도입하여 삽시간에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을 강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치청淄靑 번진藩鎭(지방 통치 관할 지역)은 당에 조세를 전혀 납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인사권을 행사하는 사실상의 독립 국가였습니다. 이때 이정기가 다스린 지역은 치청제등래淄靑齊登萊 등 10주州에 이어 조복서연운曹福徐兗鄆의 다섯 주를 취하여 총 15개를 다스리고, 정예 군사 10만을 거느리는 최대 번진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 중 서주徐州는 강회조운江淮漕運의 요충지로 강남의 물자가 낙양과 장안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었습니다.

당나라를 연파하고 전성기를 연 이정기


국력이 절정에 이른 상황에서 이정기는 779년 청주靑州를 아들 납에게 맡기고 서쪽 운주鄆州(동평東平)로 치소를 옮겼습니다. 드디어 중원을 도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대종代宗이 사망하고, 절도사들에게 강경한 입장을 보인 덕종德宗이 즉위하였습니다. 덕종이 절도사 세습을 허락하지 않자, 이정기는 전열, 양숭의梁崇義 등과 함께 거병하였습니다.

이정기의 10만 대군은 속속 제음濟陰에 집결하였습니다. 제음은 당나라의 행정수도인 낙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황하 중류 지역에 있었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전통적인 수도인 장안과 낙양 그리고 왕조의 발상지인 태원을 중히 여겼습니다. 당 조정은 집결하는 이정기의 대군에 맞서기 위해 변주汴州, 즉 나중에 조광윤이 세운 북송의 수도가 되는 개봉開封에 성을 쌓고 대비하였습니다.

결전의 때가 다가오면서 양측은 장안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운하의 길목인 용교埇橋(지금의 안휘성 숙주宿州)와 와구渦口에 군대를 보내어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습니다. 781년 대진국 문황제는 장수를 보내어 이정기를 도왔습니다. 이에 힘입어 이정기의 군대는 당군을 연파하고 드디어 용교와 와구를 점령하여 당나라 운하의 물산 운송을 완전히 두절시켰습니다. 풍부한 남부의 물산이 올라오지 않게 되자 당의 수도 장안은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였고, 이정기의 치청淄靑왕국은 최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정기는 한반도와 마주 보는 산둥성山東省은 물론 안후이성安徽省과 장쑤성江蘇省 일대까지 다스렸습니다. 이는 신라보다 몇 배 넓은 영토였습니다.

천명天命 - 대당 항쟁을 이어 가는 아들 이납李納


그러나 급변이 발생하였습니다. 승승장구하던 이정기가 781년 만 49세에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천명이었을까요? 이정기 일가는 그리 명이 길지 못했습니다. 이정기 뒤를 이은 이납李納은 35세, 그 뒤를 이은 이사고李師古는 38세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명을 달리하니 이 또한 하늘의 명인가 싶습니다.

아무튼 이정기가 죽은 후 그의 지위는 아들 이납(758~792)에게 계승되었습니다. 치청왕국의 주축은 사실상 이정기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치청왕국의 급격한 약화를 가져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정기와 동맹 관계였던 양숭의梁崇義가 당과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전사하면서, 치청왕국은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납은 아버지 이정기의 죽음을 숨기고 전열을 정비하였으나, 이정기의 사촌 형인 서주의 이유李劉가 덕주의 이사진李師眞과 체주의 이장경李長慶 등을 이끌고 당에 투항함으로서 12주로 통치 영역이 줄어들었고, 용교와 와구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당군은 여세를 몰아 공격해 왔습니다. 치청왕국의 군대는 한때 복양濮陽에서 관군에 포위되어 항복 직전까지 몰렸습니다.

그러나 궁지에 처한 이납은 좌절하지 않고 회서淮西의 이희열李希烈과 함께 용교와 와구를 재탈환하고 운하를 다시 불통시켰습니다. 당의 요충지인 변주를 공격하기도 했으며, 강회에서 상공하는 조운선단을 차단하는 등 활발히 당에 저항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 조정은 치청왕국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존립이 위태롭다는 판단에 따라 전국적으로 군사 총동원령을 내리고 선무절도사 유현좌劉玄佐에게 치청왕국을 정벌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당나라는 무리한 군사 징발로 인해 군사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었으므로, 치청왕국 정벌을 위해 동원된 경원군涇原軍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 장안을 점령해 버렸습니다. 당의 덕종德宗이 부랴부랴 양주梁州 등지로 피난할 정도로 치청왕국과 경원군의 반란은 당나라에 위협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덕종은 반당反唐 번진을 이끈 인물들에게 높은 관직을 내리면서 회유하려고 했습니다. 치청왕국의 이납도 그런 회유 대상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납, 제나라를 세우다
782년 11월 이납은 춘추전국 시대에 산동 지역에 있던 제齊나라를 국호로 사용하며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하늘에 알리는 제천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제왕齊王 이납은 아버지 때와 같이 당나라와는 무관하게 관리를 임명하였고, 자신이 다스리는 영역에서 거둔 세금을 당 조정에 납부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납은 당 조정과 극단적인 대립은 피하면서 세력을 온존시키는 전략을 세워, 명실상부 산동 지역을 다스리는 임금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대진국, 신라 등과의 교역권을 독점해 부를 축적함으로써 당 조정이 보았을 때 가장 강성한 번진으로 군림하였습니다. 그러던 792년 제왕齊王 이납李納은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별세 당시 슬하에 이승무李承務, 이사고李師古, 이사도李師道, 이사현李師賢, 이사지李師智 등 5남을 두었습니다. 당나라에서는 이납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3일 동안 정사를 폐지했다고 합니다. 이는 제나라가 어느 정도 강력했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강력했던 이사고의 제나라


792년 5월 제왕 이납이 죽자, 청주자사를 지내던 15세 나이의 이사고李師古가 백성들에 의해서 옹립되었습니다. 이에 당나라 조정에서는 이사고에게 운주와 평로치청을 관할하고 신라 및 대진국 등과 교역할 수 있는 관직을 주었습니다. 이는 이사고가 제나라의 왕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사고는 이납의 후기 정책을 계승하여 당 조정과는 극단적인 대립을 피하면서 내부 세력을 보존하려 했습니다. 반면에 위협을 가하는 이웃 번진과의 충돌은 더욱 빈번해졌습니다. 나이 어린 이사고가 즉위하자, 주변 절도사 가운데 왕무준이 이사고를 가볍게 여겨 소금 생산지인 체주, 합타蛤朶, 삼차三汊를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사고는 사람을 보내 이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마침 왕무준의 아들 왕사청의 군영에 불이 나서 왕무준은 싸우지도 못하고 회군했습니다.

이사고는 염전을 확보하여 국가 재정을 더욱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대진국, 신라, 일본과 외교 통상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경제력은 더욱 강력해져 갔습니다. 이사고는 제나라를 강력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 망명자들을 불러 모아 그들을 융숭하게 대우하였습니다. 당에 대항해 죄를 짓고 도망한 사람들에게도 자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신하가 당에 귀순하려는 낌새만 발각되어도 그 가족을 죽일 정도로 당에 대한 적대감이 대단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사고는 당나라를 공격하려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806년 6월 32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습니다.

제나라 이사도 VS 당나라 헌종


이 무렵 제나라뿐만 아니라 당 조정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당 순종順宗을 이어 당 중흥의 영주로 일컬어지는 헌종憲宗이 즉위하였습니다. 헌종은 지방을 배경으로 독자적 힘을 행사하는 절도사를 억압하고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즉위 초부터 군소 군벌들 제압에 나선 헌종은 815년 12월부터 투항한 다른 번진들을 앞세워 치청왕국 토벌에 나섰습니다.

806년 형 이사고가 죽자, 그림 그리기, 피리 불기를 좋아했던 이복동생 밀주密州 자사 이사도李師道는 제나라의 계승자가 되었습니다. 제나라 3대 군주였습니다. 초기에 당 조정은 그에게 관직을 주지 않았지만, 토번의 발호 등으로 이사도를 견제할 군사적 힘이 없어서 결국에는 이사고에게 주었던 관직을 이사도에게 주었습니다. 이사도 재위 시 치청왕국은 이사고 시대 못지않게 발전했습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이사도의 정치에 대해 “법령이 하나처럼 같은 데다 세금마저 균일하게 가벼워 절도사 중에서 제일 강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사도의 영향력은 다른 절도사들의 후계 구도가 잘못되었을 때 직접 개입할 정도로 강성했습니다.

이사도는 당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였습니다. 815년 낙양에서 가까운 하음창河陰倉을 불사르고, 건릉교建陵橋를 끊어 버리는 등 당 조정을 교란시켰습니다. 이사도는 낙양에 수백 명의 군사를 주둔시키며 반란을 획책하고, 번진 토벌론을 주창하는 재상 무원형武元衡을 암살하는 등 전력을 다해서 정면 대결에 나섰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번진들이 당 헌종의 공세에 무너져 치청 토벌전에 가담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선봉이 서주 지역의 무령군으로, 훗날 신라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며 해상무역을 장악한 장보고張保皐가 당시 무령군武寧軍의 소장少將이었습니다. 당군과 각 번진들에다가 신라인들까지 합세한 공세에 이사도는 정면 대결로 맞선 것입니다. 그러나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 유오劉悟가 당군을 막는 대신 몰래, 운주성으로 들어가 이사도를 시해했습니다. 819년 2월의 일이었습니다. 이정기가 군사들의 추대로 평로치청절도사가 된 지 54년, 이영요를 토벌하고 15개 주를 장악하여 독자권을 행사하며,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중원의 한복판을 장악한 이정기 일가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습니다.

당나라는 반란을 평정하면 그 우두머리만 처형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이사도의 운주성에서는 1,200여 명에 달하는 이사도의 측근들을 재판도 없이 집단 학살을 하였습니다. 그만큼 고구려의 후예들이 무서웠던 것입니다.

이정기 일가의 대당 항쟁의 의미


이정기 왕국, 제나라는 사라졌지만 그 결과 중국 대륙 동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신라 교민과 고구려 및 백제 유민들이 재기하였습니다. 이들은 동아시아 무역 판도를 양분하며 해상무역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해 갔는데, 대표적 인물이 장보고와 고려 태조 왕건의 선조들이었습니다.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중원 대륙에 강력한 세력을 떨친 이정기는 당나라 고위 장교이며, 동시에 산동 지역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반독립국을 세우고, 당 왕조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인물입니다. 정통성 확보의 명분으로 당나라 종성宗姓인 ‘이씨李氏’를 하사받는 등의 모습을 보면 과연 고구려 계승 의식을 지니고 있었는가에 대해 의문점은 있지만, 그가 세운 치청왕국은 대진국과 고구려 등의 영향을 받은 문화와 법제, 관제, 세제를 이용하고 있었고, 그의 주변에는 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있었음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정기 왕국이 55년 동안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정기의 능력이 아니라 대진국에서 이정기와 그 가문의 뒤를 봐주었기에 가능했다는 분석도 많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안록산의 난을 어느 정도 진압을 했고, 게다가 곽자의郭子儀라는 불패의 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나라가 마음만 먹었다면 토벌할 수 있었지만, 당시 대진국은 중요 군사물자인 말을 대놓고 지원하는 등 이정기 세력을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이미 문황제 시기에 등주성 공격으로 호되게 당한 전력이 있는 당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초기 이정기 왕국을 도모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에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이정기 왕국은 당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갈 정도로 강성해졌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연재를 마치며


이제 긴 연재를 마칩니다. 『태백일사』 「고려국본기」 부분이 남아 있지만, 이전에 <명장열전> 시리즈에서 서술했던 인물들과 중복되기도 하여,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다뤄 보도록 하겠습니다.

『환단고기』는 단순한 역사서가 아닙니다. 창세 시원 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정신사의 보고이자, 우리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보물과 같은 책입니다.

그간 연재를 진행하면서 깨달은 점은 삼신상제님을 신앙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았던 시기에 우리는 자주성을 가지며 융성하였다는 점입니다. 환국, 배달, 조선과 고구려, 대진국이 그러했습니다. 그때는 신교神敎가 융성하였고, 이를 가르치는 참스승들이 있었으며, 위정자들도 이를 지키고 널리 알리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지키는 삼랑三郎 집단이 늘 있었습니다. 반면에 나라가 망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할 때는 이런 부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시대에 맞게 새롭게 작성됩니다. 더 정확하게는 해석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지나간 역사에서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참고할 역사가 우리는 무려 1만 년 이상이나 되는 역사 대국입니다.

하지만 지금 매국 식민사학자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우리의 혼과 참역사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온전한 역사를 배우지 못한 우리는 정신적인 불구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고 그 혼을 되찾게 해 주는 책이 지금까지 살펴본 『환단고기』입니다.

『환단고기』는 비단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인류의 시원사와 정신사 문화사를 바로잡아 주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까지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를 위서라는 가벼운 언설로 폄훼하는 숙맥 같은 이들은 더 없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환단고기』를 숙독하고, 그 가르침을 깊게 연구하고, 과거 우리 선조들이 하였던 삼신수행법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천명을 완수해야 할 것입니다. 더 좋은 글로 이런 부분을 함께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읽어 주신 여러 독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참고문헌>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이덕일의 한국통사』(이덕일, 다산북스, 2020)
『장군과 제왕 2』 (이덕일, 웅진지식하우스, 2005)
『광개토대왕이 중국인이라고?』(월간중앙 역사탐험팀,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2004)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치청왕국 멸망까지 연표

819년 신라가 당나라를 도운 이유
819년 당 헌종憲宗은 이사도의 평로치청왕국을 정벌하기 위해 신라 헌덕왕憲德王에게 군대를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헌덕왕은 순천군장군順天軍將軍 김응원金應元에게 3만을 거느려 당을 돕게 하였습니다. 당시 치청왕국은 대진국과 긴밀한 관계였습니다. 양국은 같은 고구려의 뿌리로 한편이 되고, 당과 신라는 다른 한편이 되어 대립하는 국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신라가 매년 당나라에 보내는 사신 길을 치청왕국에서 막으며 교류를 방해하였습니다. 치청왕국이 당과 대립하던 40여 년 동안 신라는 겨우 일곱 차례밖에 당에 사신을 보내지 못할 정도로 외교관계에 심각한 장애를 겪었습니다. 신라로서는 당이 무너지면 북쪽의 대진국 및 서쪽의 치청과 대립해야 하고, 더불어 백제의 후예인 일본과의 사이에서 독자적인 생존이 어려워질 것이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라는 국내 사정이 어려운데도 대규모 파병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출병 결정이 819년 7월이고 2월에 이미 치청왕국이 무너진 뒤라, 기록의 오류가 아니라면 실제 출병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의 아리랑사史
660년 사비성 함락, 668년 평양성 함락으로 역사 대국 백제와 고구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나라가 망했을 때 대응 방식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여기서는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의 운명과 관련 인물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백제의 유민
먼저 백제입니다. 멸망 당시 황산벌에서 계백과 5천 결사대는 끝까지 싸우다 순사殉死하였습니다. 그 외 의자왕을 비롯한 1만 명은 당나라로 끌려갔습니다. 이어진 백제 부흥운동이 내분으로 인해 실패하였습니다. 이때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백제 장수 흑치상지는 왕성인 부여씨로 태어났는데, 흑치黑齒 지역에 봉해져서 성씨가 흑치로 되었다고 합니다. 이 흑치의 위치에 대해서는 중국 남방 광서廣西 또는 필리핀으로 보는 시각들이 있는데, 아직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흑치상지는 백제 부흥군을 이끌며 백제의 성 200여 곳을 되찾는 전과를 올렸지만, 당장唐將 유인궤劉仁軌에게 항복하고 당나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돌궐과의 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우고 대장군까지 올랐지만, 잔혹한 관리로 유명한 주흥周興 등의 무고로 조회절趙懷節 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사후 맏아들 흑치준黑齒俊 등의 노력으로 신원되어 벼슬을 되찾았습니다.

그 외 유력한 귀족이나 기술을 가진 집단은 왜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지배층으로 자리를 잡아 일본 고대 국가의 건국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이때 국호를 왜倭에서 일본日本으로 바꾸는 등 체제를 정비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백제인들은 그대로 백제 땅에 살며 우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서토로 강제 이주를 당한 고구려 유민
백제처럼 일본이란 든든한 배후 세력이 없던 고구려 유민들은 여기저기로 갈가리 찢겨 나갔습니다. 우선 평양성 함락 직후 보장제를 비롯한 왕족과 귀족들은 당으로 끌려갔습니다. 대진국과 이정기의 나라는 당 제국의 멸망까지 몰고 갔었기 때문에 강력한 잠재력을 가진 고구려에 대해서 당은 경계심을 끝까지 풀지 못했습니다. 당은 기회가 될 때마다 고구려 사람들을 당나라로 끌고 갔습니다. 우선 645년 안시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퇴각할 때 항복한 일부 고구려 장수들을 포함해서 대다수 전쟁 포로를 끌고 갔으며, 669년 고구려 멸망 직후에는 고구려 지배 계층을 양자강과 회수 이남 및 산시성, 허난성 일대 그리고 더 먼 서쪽 지역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고구려 핵심 계층의 강제 이주는 고구려 문명의 붕괴를 가져왔습니다. 이들이 이동한 지역에는 고구려 후손들이 비록 말과 뿌리를 잃어버렸지만 소수민족으로 거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중국 서남부 산악 지대의 마오苗족, 태국 라후족 등으로 그들의 언어와 풍습을 살펴보면 본래의 우리와 너무나 유사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스스로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잃어버린 측면이 큽니다. 역사 복원이 시급한 이유일 것입니다.

이런 고구려 유민들 중 당 조정에서 군공을 세우며 출세한 인물이 고선지高仙芝와 이정기李正己입니다. 이정기는 본문에서 살펴보았으며, 고선지는 간쑤성甘肅省 지역에 거주한 고구려 유민으로 서역 원정을 가서 사라센 제국과 맞서 싸운 명장입니다. 그 유명한 탈라스 전투에서 패하였지만, 이때 전해진 제지술로 유럽 문명의 싹을 틔웠습니다. 안록산의 난 때 이를 진압하려 했으나, 모함에 걸려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왕모중王毛仲은 당 현종의 일등 공신이 되기도 하였고, 왕사례王思禮는 무장으로 성공하여 관서 병마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귀족으로 당에 항복하고 매국 행위를 했던 연남산 같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신라와 일본으로 간 고구려인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나라가 망하기 직전 12개 성을 바치며 신라에 귀부하였습니다. 이어 고구려 부흥운동이 실패할 때 (고)안승이 4천여 호를 이끌고 신라에 합류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신라와 인접한 지역에 살던 고구려인들은 자연스럽게 신라인이 되었습니다. 나당 전쟁 당시 신라와 연합군으로 함께 당에 맞서 싸웠습니다.

고구려 유민 중에는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로 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712년, 지금의 동경 지방에 고마군(고려군高麗郡)을 설치하여 고구려인을 집단 안치시켰다는 『속일본기』 기록이 있습니다. 고마군은 1896년 사이다마현 이라마군에 병합되기 전까지 무려 1,180년이나 존재했는데 이곳을 다스린 사람은 고구려 왕족으로 알려진 약광若光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고마신사에서는 약광에게 제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돌궐 등 유목민 사회에 투항한 사람들
고구려인은 오래전부터 북방 유목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져 왔습니다. 특히 돌궐과는 비록 첫 접촉에서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수와 당과의 전쟁에서는 상호 협조하는 관계로 발전하였습니다. 돌궐은 고구려 유민과 함께 당에 공동으로 저항하였습니다. 특이하게도 고구려에서 막리지를 지낸 고문간高文簡은 돌궐의 묵철가한의 딸 아사나씨阿史那氏와 혼인하여 돌궐의 부마가 되었습니다. 돌궐은 고구려 유민 집단을 고유한 생활과 조직을 유지하도록 하면서 공납과 군사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외에도 고정부高定傅와 고공의高拱穀는 고려대수령高麗大首領이라 불리면서, 돌궐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으며 유민들을 이끌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진국 건국과 이정기 나라에 합류한 고구려인
고구려 본토에 남아 있던 대다수 고구려 사람들은 대중상과 대조영의 대진국 건국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그 외 영주 지역에 있던 고구려인들은 이정기 나라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만큼 고구려의 혼은 꺼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