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로 문화읽기 | 제천 문화의 기록, 왕실의 천지제사

[칼럼]
한재욱 / 본부도장

천지제사 의례


하늘과 땅, 곡식의 신에게 지내는 천지제사天地祭祀는, 국가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왕권 유지 계승의 핵심 요소였다. 따라서 천지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 의례는, 왕실의 그 어떤 행사보다도 중요시 여겨졌으며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다섯 가지 국가의 중요한 예제 중 길례에 해당하는 의례 가운데, 하늘신을 위한 제례인 환구제圜丘祭, 국토와 오곡의 신을 위한 제례인 사직제社稷祭, 농사와 양잠의 신을 위한 제례인 선농제先農祭·선잠제先蠶祭의 네 가지 의례를 중심으로, 조선 시대 하늘과 땅에 지냈던 천지제사 의례를 종합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핵심을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번 기고에서는 시대별 환구제※의 천제 내용을 살펴보겠다.

※ 책에서는 환구제圜丘祭의 본래 명칭은 원구제圓丘祭라고 말한다. 한자어 ‘圜’의 발음에는 ‘원’(둥글 원)과 ‘환’(두를 환) 두 가지가 있어 학계에서는 ‘圜丘壇’의 발음을 둘러싼 논란이 있다. 예기禮記의 주석에는 원구로 발음한다고 되어 있고 조선에서도 원구라는 명칭을 썼다. 그런데 2005년 문화재청에서는 ‘환구단’으로 부를 것을 공식화했다. 그 근거는 고종황제가 원구단을 조성하고 천제를 지낸 내용을 보도한 독립신문에 환구단으로 표기했다는 것이다. 이에 이 글에서는 기록과 상황에 따라 원구와 환구를 혼용해 사용했다.


원구제는 교郊제사


책의 첫 부분에서는 제사 문화의 기록을 갑골문을 통해 은殷나라에서 상제님을 지고신으로 모시던 문화와 『시경詩經』에서 주周나라 문왕이 조심하고 공경하여 상제를 밝게 섬겨 많은 복을 받았다는 내용, 『서경書經』과 『춘추春秋』의 문헌 등을 통해 교郊제사의 기록을 소개한다. 그러나 천제 문화의 원형을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는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따르면 제사 문화의 본고향은 동방의 한국이다. 저자가 중국 문헌에서만 그 시원을 찾으려 했던 점이 아쉽지만, 그럼에도 왕실의 천제 대사가 이 땅의 모든 왕들에게 가장 중차대한 과업이었음을 소개하는 자료로서 이 책은 읽어 볼 가치가 충분하다 하겠다.

제사 장소인 교郊, 즉 교외란 왕성 밖 100리 이내의 지역... 또는 용과 같은 신비한 존재가 출현하기도 하는 상서로운 지역이기도 했다. - 『왕실의 천지제사』 16쪽


옛 문헌들 속에서 교郊(성 밖 교)에서의 제사, 즉 교제사는 천자인 제왕이 거행하는 제천 의례의 명칭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예기의 왕제 편에서는 천자는 천지에 제사하고, 제후는 사직에 제사하고, 대부는 오사에 제사한다고 하여 하늘과 땅에 대한 제사가 제왕의 고유한 권한이자 의무임을 강조한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원구제와 교제사의 관련성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논쟁이 있었는데, 원구제가 교제사의 으뜸으로 천신에 대한 최상위의 제례를 의미하게 된 것을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왕숙王肅의 주장으로 원구제가 곧 교제사라는 정체성과 위상이 확립되었다고 한다.

원구는 하늘을 본뜬 둥그런 구릉이라는 뜻(천원지방天圓地方)으로, 원구제라는 명칭은 동지에 천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제단인 원구에서 유래한 것이다. 위魏나라의 왕숙王肅은 원구와 교는 같은 곳을 가리키는 것이며 동지와 정월의 제천 의례가 모두 원구에서의 교제사라고 주장했다. - 『왕실의 천지제사』 17쪽


제천례의 시작


먼저 이 책에 나온 제천례祭天禮의 유래 부분이 미약해 환단고기 내용을 보충해 소개한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太白逸史」 환국본기桓國本紀에서는 ‘환인천제께서 천신(삼신상제님)에게 지내는 제사를 주관하였다[主祭天神].’라고 기록하였다.

「신시본기神市本紀」에는 약 6천 년 전에 배달을 개척한 커발환 환웅천황님이 나라를 세우면서 삼칠일(21일)을 택해서 백성들에게 제천 예식을 가르치셨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시조 단군왕검도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에서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아사달에 도읍하였다고 나온다. 16세 위나 단군 때 삼신상제님께 제를 올렸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도 마리산 참성단에 올라 친히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셨다. 중국도 태산에 삼신상제님을 모신 옥황정이 있다. 중국은 우주의 신을 여덟 범주로 나눈 팔신제八神祭가 있다. 사마천 사기 봉선서에도 진시황제는 명산대천과 팔신에게 제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제齊나라 풍속에 팔신제가 있으니... 이는 참성단에서 제천하던 풍속이다.” - 태백일사 신시본기

중국의 팔신제 문화가 마리산 참성단에서 제천하던 풍속이라는 것이다. 팔신제 신위의 첫 신위가 천주天主와 지주地主이다. 강태공은 중국 천하에 동방 신교의 팔신제를 전파했다. 첫 번째가 천주인데 이 천주란 말을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이마두利瑪竇) 신부님이 16세기에 중국에 와서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쓰고 가톨릭이 천주란 말을 써서 천주교가 된 것이다. - 환단고기 북콘서트 강화도 편 3부


환국, 배달, 조선의 제왕님들께서 모두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셨고, 고구려 광개토대왕께서도 단군왕검이 올랐던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리셨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중국의 팔신제 문화도 참성단의 풍속이라는 기록은 실로 놀랍다. 중국의 천제 문화는 동방 신교 문화를 그대로 전수받은 것이다.

이 책의 내용에서 단군 이후로 이어지는 제천례는 삼국 시대를 소개한다.

고구려는 매년 10월 동맹이라는 제천례가 시행되었다고 하는데 교외에서 제물을 바치는 교제사로 제천례를 거행했다고 한다. 백제는 4개의 중월(사계절 중간달)에 천신과 지신을 함께 제사했는데 이것은 천지제사를 행했다는 것이다. 온조왕 이후에는 남쪽 교외에 제단을 설치하고 천지제사를 지냈는데 제단 이름이 대단, 남단, 남교로 나타난다. 그런데 남단, 남교라는 명칭은 고려와 조선 왕조, 대한제국까지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중요한 기록이라고 생각된다. 신라는 영일현에 있는 일월지에서 천신과 지기에 제사를 드렸으니 역시 천지제사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부여는 매년 납월 영고迎鼓, 예는 매년 10월 무천舞天이라는 제천례를 거행했다. 이 책은 고대에 한국 역사의 모든 나라들이 제천례를 국가 차원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로 인식했고 그것이 천지제사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간략히 전한다.

고려 : 환구단에서 기곡대제를 올리다


고려는 개성 남쪽 교회에 환구단을 설치하고 제천례를 거행했다. 고려 6대 왕 성종은 환구단으로 행차해 기곡제祈穀祭(풍년 기원 제사)를 하고 고려 태조를 배천(천신에게 배향)하는 행사를 했다. 우리나라에서 환구단에 기곡대제를 올린 것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고려 18대 왕 의종 대에 정해진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 기록에는 환구단에 상제와 오제(5개 방위의 신) 신위가 있었다고 전한다. - 『왕실의 천지제사』 36쪽


이렇게 제천례를 했던 고려였지만, 세계 제국을 건설한 원元나라의 정치적 간섭이 시작되면서 황제국 고려는 제후국으로 전락하였고 국왕에 대한 칭호는 황제에서 왕王으로 격하되었다. 그 첫째 왕인 충렬왕은 원나라 쿠빌라이 황제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왕비로 맞았다. 이후로 고려는 줄곧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다.

이후 주원장이 원나라를 북쪽으로 쫓아내고 명明나라를 건국하는데, 고려를 방문했던 명나라 사신 주탁이 제후국인 고려에서 제천례를 거행하는 것은 예에 합당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이를 계기로 고려의 제천례는 1385년 고려 32대 우왕 대에 폐지된다.

조선 전기의 제천례


- 태조太祖 대 : 원단에서 신하가 제를 올림
조선 건국 직후 조선이 제후국에 해당하므로 제천례를 거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명분론과 조선은 농업 국가이므로 천신에 대한 기곡제祈穀祭나 기우제祈雨祭를 지내야 한다는 현실론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다.

신하들은 상소를 올려 원구는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예제이므로 이를 폐지하자고 했다. 예조(육조의 하나로 예악, 제사, 과거 등에 관한 일을 관장)에서는 삼국 시대 이래로 계속 거행된 원구단 제천례를 갑자기 폐지할 수 없으니 다만 원구단의 이름을 원단으로 바꾸자고 제안했고 태조가 수용했는데, 원단의 기우제는 국왕이 직접 거행하는 것이 아니라 명을 받은 신하가 대신하는 형식이 되었다. - 『왕실의 천지제사』 39쪽


천자국으로서 원구단에서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던 문화가 조선 시대에 제후국으로 격하돼 원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신하가 제를 올리는 상황이 된 것이다.

- 태종太宗 대 : 원단에서 기우제를 지내다
태종은 개성과 한양에 원단을 세워 신하에게 기우제를 지내게 했다.

제문에는 자신의 죄를 네 가지로 열거하면서 자신의 잘못 때문에 하늘의 재앙을 불러들였지만, 불쌍한 소민(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도록 비를 내려 줄 것을 간절히 요청했다. - 『왕실의 천지제사』 41쪽


책에는 태종이 직접 기우제를 지냈다는 내용은 없지만, KBS 대하드라마 〈용龍의 눈물〉은 이 기록을 극에 반영했다. 사극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이 드라마의 마지막 159화에는 물러난 왕, 상왕인 태종太宗이 오랜 가뭄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구제하고 세종 시대의 안정을 위해 기우제를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하늘의 상제와 종묘사직, 산천백신은 도와주옵소서. 죄는 이 몸에게 물으시고, 이 나라 백성과 주상(세종)을 위해서 길을 열어 주시오소서. 비를 내려 주시오소서.” - 드라마 〈용의 눈물〉, 태종 이방원


간절한 기도 끝에 마침내 비가 내리자 이러한 대사를 남긴다.

“드디어 이 몸의 청을 들어주시나이까? 하늘의 상제와 종묘사직과 산천백신들이시여. 드디어 이 몸을 용서하여 주시나이까.”


태종 역을 맡은 배우 유동근 씨의 연기는 대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고 기억한다. ‘하늘의 상제시여. 비를 내려 주소서.’를 피 끓는 음성으로 절규하는 그의 목소리는 절절했고, 드라마였지만 실제로 비가 오지 않으면 하늘이 무너질 듯한 분위기였다.

이때까지 원단에 모시는 신위는 고려 시대와 마찬가지로 호천상제昊天上帝와 오제五帝였다. 그런데 1411년 10월 남교에 원단을 다시 쌓으면서 제후가 제천례를 거행하는 것은 예제상 적합하지 않으니, 중국의 동쪽에 위치한 조선에서는 오제의 하나인 청제靑帝에게만 제사를 지내자는 신하의 주장이 제기됐다.

태종은 원단의 제천례는 유래가 오래되었다면서 거절했다. 그 뒤로도 같은 건의가 있었지만, 태종은 호천상제에게 올리는 제사가 적절치 않다면 청제에게도 마찬가지라며 거절했다. 신하들은 거듭 제천례 중지를 요청하지만 이후에도 원단의 기우제는 계속되었다.

- 세종世宗 대 : 신하들 반대에 부딪혀 제천례 폐지
세종 대에도 원단의 제천례는 계속되다가 제후에게 적합하지 않으니 폐지하자는 주장으로 마침내 폐지되었다. 1419년에 가뭄이 심해지자 변계량은 다시 제천례를 거행할 것을 요청한다. 그는 제천례를 할 수 있는 명분을 제시하는데, ①우리나라에서 2천 년 동안 거행된 행사이고 ②조선은 넓은 땅의 나라이니 작은 나라가 아니라는 것 ③가뭄이 있을 때는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 무방하다는 것이었다.

세종은 1443년 국왕이 직접 제천례를 거행하겠다며 ‘천자는 천지에 제사하고 제후는 산천에 제사하는 것은 중국 안의 제후에 한정된 것’이라는 논리를 펴 신하들을 설득하지만, 반대가 다수여서 무산됐다.

이 책은 이처럼 조선 시대 내내 천지 혹은 상제님께 올리는 제사를 두고 왕과 신하가 토론하면서 논리를 펴는 장면들을 소개한다. 천자국의 지위를 한번 잃게 되자 대한제국이 나올 때까지 수백 년 동안 이 방황과 고민은 계속되는 것이다.

- 세조世祖 대 : 환구단 복원, 국왕이 직접 환구제를 올리다
세종 대 말기에 폐지된 제천례는 세조 대에 복구되어 정례화되었다.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는 단군 이래 우리나라는 중국과 별개의 세계를 이루었고, 굳이 중국의 제도를 따를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는 조선이 제천례를 독자적으로 거행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제공했다. 1457년 새해에 세조는 면복(면류관, 구장복)을 갖춰 입고 환구단으로 행차하여 제천례를 거행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국왕이 직접 제천례를 거행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 『왕실의 천지제사』 46쪽


세조는 예제禮制를 정리한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라는 고려 시대의 기록을 바탕으로 환구단을 복원하고 환구제에 사용할 아악도 마련한다. 환구단을 관리할 환구서란 관청도 설치하여 환구단의 제례 절차를 의논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환구단에 3개의 유壝가 있었다는 상정고금례의 기록인데, 유壝는 제단의 둘레에 쌓은 낮은 담이라고 한다.

동이족의 활동 영역이던 홍산紅山문화 우하량 유적에서는 3단으로 되어 있는 제단과 적석총이 많이 발굴되고 있다. 중국에서 명明⋅청淸의 황제들이 천제를 지내던 북경 천단공원의 원구단도 우하량 적석총과 동일한 형태의 원형 3단이다. 우하량 적석총도 천단공원의 원구단과 마찬가지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릴 때 사용하는 제단으로 지어진 것이다. 고려 시대의 환구단도 세조 대에 복원된 환구단도 3수의 상징으로 구성된 것이다.

1457년(세조 3년) 세조는 면복을 갖추고 환구단에 올라 환구제를 올렸다. 이때 영신, 전옥폐, 진조, 초헌, 아헌, 종헌, 철변두, 송신, 망료 절차 순으로 진행됐는데, 그 각각의 절차에 쓰인 악장과 선율 중 전옥폐(고전 아악 중 하나)와 아헌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름다운 옥을 벌여 놓으니 폐백도 깨끗하여라. 비로소 깨끗한 제사를 올려 엄숙히 상제를 대하도다. - 전옥폐

내가 받들고 내가 올리니 술잔에 술이 가득하도다. 상제께서 이미 드셨으니 멀지 않고 가까이 계시도다. - 아헌


상제님께서 이 제사에 꼭 감응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와 예의 양식인 것이다. 성균관 사예 김수온은 제천례 거행 후 잔치에 사용할 악장을 지어 올렸는데 그 내용에도 역시 상제님이 등장한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돌보아 신성한 자손들이 탄생하니 덕은 백왕의 으뜸이요 공적은 한 나라에 베풀어졌다. 엄숙한 환구단에 상제께서 빛나게 임하시니 처음으로 성대한 예를 거행하여 신과 사람이 기뻐하도다. - 『왕실의 천지제사』 48쪽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현 애국가 가사와도 비슷한 내용이다. ‘환구단에 상제께서 빛나게 임하시니’라는 구절에서 조선의 왕과 신하와 백성들은 환구제에 상제님께서 임하시길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457년 1월 15일, 세조가 환구단에 행차하여 제천례를 거행했다. 조선의 국왕이 직접 제천례를 거행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이때의 환구단 제천례는 매우 파격적인 행사였다. 국왕이 직접 거행한 최초의 제천례였던 데다 신위나 제기를 배치하는 것은... 황제국의 면모와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 『왕실의 천지제사』 48쪽


- 광해군光海君 대 :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다
광해군은 세조 대의 고사를 인용하여 제천례를 거행하려고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천제를 지내는 것은 천자만 거행할 수 있는 예제이고, 세조 대의 제천례는 한때의 우연한 행사라는 주장이었다. 광해군은 역적들을 토벌한 것을 상제님께 알리겠다는 정치적 명분을 내세웠지만 천자와 제후의 예제에 대한 생각은 넘어서기 어려웠다고 한다. 비록 거행은 못했지만 자신의 업적을 상제님께 고하려는 광해군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왕들이 상제님을 대하는 태도였을 것이다.

광해군 이후 환구단의 제천례에 대한 논의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조선 후기 국왕들은 환구단 대신 남단이나 북단에서 기우제를 올렸다. 한양 남교에는 풍운뇌우단(남단)이 있고, 북교에는 여단(북단)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효종孝宗, 숙종肅宗, 경종景宗 임금이 남단에서 기우제를 거행했다고 한다.

- 영조英祖, 정조正祖 대 : 북단에서 기우제를 지내다
환구단 제천은 하지는 않았지만 영조英祖는 북교(북단) 기우제를 했다고 한다. 그 이유가 의미 있다. 영조는 남단이 환구단圜丘壇에 해당하고 북단은 방구단方丘壇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천원지방의 이치로 천지의 제례를 거행하는 환구와 방구를 남북단에 놓고 의미를 둔 것이다. 이것은 정조正祖도 같은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남단은 옛날에 교사郊祀하던 환단이다... 우리 동방이 나라를 세운 것은 단군에서 시작되었는데, 역사서에는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쌓고 제천례를 거행했다고 한다... 광묘(세조) 이후에는 환단이란 이름을 남단으로 고쳤으니 국군이나 주현에서 각각 풍사와 우사에 제사하던 제도를 사용한 것이다... 공경하고 정결함이 다하는 정성을 보인다면, 환단과 남단의 이름이 다르다고 해서 서로 다른 제도이며 차이가 있다고 하겠는가? - 정조실록 #>

정조는 단군 때부터 제천례를 거행해 왔으며 남단은 환구단에 해당하는 것으로 파악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백제에서 온조왕 이후 남단에서 천지제사를 지냈다고 하니 영조와 정조는 최소한 백제의 천지제사 역사를 알고 있었고 남단을 환구단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책에서는 환구단의 제천례가 천자의 예이므로 혐의(외교적 마찰)를 피하기 위해 이름을 남단으로 바꾼 것이며, 남단의 제례에 정성을 다한다면 환구단이든 남단이든 마찬가지라고 했다. 조선 후기의 왕들은 사대모화事大慕華에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상제님을 모시는 제천례를 이어 갈 수 있는 실용적인 길을 찾아 간 것으로 생각된다.

대한제국 : 환구단을 건설하고 황제로 등극하다
세조 대 이후 제천례는 제후국에서 거행할 수 없기 때문에 중단되었지만, 대한제국의 황제는 제천례를 거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이 때문에 고종高宗은 대한제국 수립을 준비하면서 도성의 남쪽에 환구단을 건설했고, 황제 등극의 예를 이곳에서 거행함으로써 대한제국이 자주 독립국임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리는 효과를 거두었다.

고종 대의 환구단 기록은 1895년 사전 개혁안에 처음 등장한다. 여기에서 환구제는 대사로 규정되어 천지를 합하여 제사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는데 이와 함께 농경 생활이나 중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제례들(명나라 황제를 모신 대보단, 임진왜란 때 구원병 이끌고 왔던 장수를 모신 선무사 등)이 모두 폐지되었다. 이는 아마도 청일전쟁에 패한 청국을 더 이상 천자국의 위상으로 볼 필요도 없고, 독자적인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위해 주변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1895년 남단이 있던 자리에 환구단이 건축되었다. 이때 남단을 환구단으로 조성한 것은 남단을 환구단으로 간주했던 영조나 정조의 생각을 반영한 조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1897년 고종은 환구단 제도를 정비하면서 제단을 새로 건설할 것을 결정한다.

천지를 함께 제사하는 것은 사전祀典에 있어 가장 큰 것입니다. 예전에는 남교에서 풍운뇌우에만 제사를 지냈는데... 밝게 섬기는 예의로 볼 때 매우 미안합니다. - 장례원경掌禮院卿 김규홍金奎弘의 건의


김규홍의 건의는 기존의 남단에서 하는 제례가 미흡한 것이 많으니 도성 안에 새로운 제단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책에서는 천자국으로 하늘땅을 모시는데 예법으로 보면 천지 앞에 죄송스러운 상황이라는 뜻이다. 고종은 “천지를 합하여 제사하는데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지금 아뢴 것은 실로 짐의 뜻에 부합한다.”고 하며 환구단 건설의 명을 내린다. 환구단 건설 장소는 소공동으로 정해졌다. 남교에 있던 환구단을 도성 내부에 둔 이유는 시대의 편의에 따른 것이라고 <대한예전大韓禮典>에 기록해 두었다. 그러나 책의 저자는 환구단 건설 장소가 그 전까지 중국 사신의 숙소였던 남별궁이 있던 자리로, 이는 대한제국이 중국에서 분리된 독립국임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서술했다.

단군왕검은 삼신의 원리에 따라 나라를 삼한, 즉 진한·번한·마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이것이 바로 고조선의 국가 경영 제도인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이다. 고종 황제가 선포한 국호 ‘대한’이 바로 이 삼한에서 유래하였다. ‘삼한을 크게 하나로 통일한다[三韓一統].’는 뜻에서 대한이라 지은 것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함으로써 동북아의 중심이었던 옛 조선 삼한의 영광을 회복하려 하였다. - 환단고기 해제 300쪽


이러한 배경으로 정해진 대한이란 국호가 처음 사용된 문서는 환구단 고유제告由祭(큰일이 있을 때 그 사유를 고하는 제사)의 제문과 황제국의 탄생을 선언하는 조서였다. 고유제 제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신은 황천상제께서 이 나라를 돌보아 주심에 힘입어 독립의 기초를 세우고 자주권을 행사했습니다. - 환구단 고유제 제문


짐이 부덕하여 마침 어려운 때를 당하였는데 상제께서 권고하여 위태로움을 편안함으로 바꾸고 독립하는 기초를 창건하여 스스로 주장하는 권리를 행하라 하시니, 황제의 칭호를 추존코자 하매 천지에 제사를 고하고 황제의 자리에 나아감에 국호를 정하여 가로되 대한이라 하고 이해로써 광무 원년을 삼고 이에 역대 고사를 상고하여 따로 큰 제사를 행한다. - 즉위칙어


2010년 제작된 EBS 다큐 <잊혀진 나라 13년>에서는 고종황제의 즉위칙어卽位勅語 내용이 방송되었다. 즉위칙어는 고종황제가 즉위하면서 내린 말씀이다. 고종은 황제로서 자신의 꿈을 즉위칙어에 담았다. 내용을 잘 살펴보면 상제님의 명으로 대한제국과 천자국을 선포하고 환구제를 올리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고종황제가 명분으로 한 얘기든, 아니면 실제 계시나 꿈으로 상제님을 뵈었든 간에 대한제국이 상제님의 명으로 탄생한 것이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1899년 동지에 고종은 환구단에서 성대한 의식을 거행했다. 태조를 호천상제에 배향하는 대제와 동지대제를 동시에 거행했는데, 고종황제가 제례를 주관하고 황태자가 배석했다. - 『왕실의 천지제사』 70쪽


고종은 태조를 황제로 추존하고 환구단의 황천상제에 배향(신주를 모심)함으로써 효경에서 말하는 최대의 효를 실천했다. 황천상제님이 계신 곳에 같이 모셨다는 것이니 우주 통치자 하느님과 조상 하느님을 동시에 모셨다는 뜻이 되겠다.

상생방송에서 방영한 다큐 〈환구단의 비밀〉에는 고종이 환구단에 올라 황천상제님께 천제를 올린 뒤, 그동안 중국을 사대하며 형식적으로 인식해 왔던 상제 문화를 바르게 정립하고 대소 신료에게 상제를 정성스럽게 공경할 것을 명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오직 상제가 날마다 여기를 내려 보고 있으니 마땅히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하며” - 고종실록高宗實錄


1981년 2월 황궁우 복원 공사를 하던 도중 발견된 상량문에서 대한제국 당시 고종황제가 국가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상제께 고하는 글귀가 발견됐다. “국운이 영험으로 장구하고 만백성이 다 같이 복되고 안락하고 평온하게 하여 주소서.”라고 상제님께 기도했다는 내용이다. 고종실록의 이 기록과 상량문 글귀는 고종이 얼마나 상제님을 공경하고 나라의 모든 일을 상제 문화로써 복원하려 했는지 잘 알려 주고 있다.

일제 강점기


1910년 한일강제병탄韓日強制竝呑과 함께 환구단 제사는 완전히 폐지되었고, 1911년 2월 환구단 건물과 부지는 조선총독부의 관할로 넘어갔다. 대한제국은 없어지고 일본 식민지가 되면서 독립국임을 상징하던 환구단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1911년 일본 거류민단은 환구단을 개방하여 공원으로 조성할 것을 청원했다. 또한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된 이후 외국인 여행자의 편의를 위해 호텔 건설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나타났다. 결국 환구단이 서 있던 자리에 1914년 580여 평의 조선총독부 철도 호텔이 완공되었다. 호텔은 어떤 곳인가? 좋게 얘기하면 국제적인 행사를 치를 수 있고 외교를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은 우주 통치자 상제님과 땅의 신을 모시던 신성한 공간이었다. 대한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던 그곳이 잠을 자고 식사하고 변을 보는 곳이 된 것이다. 현 조선호텔 건물이 제단에 해당하고, 제단의 중심부는 호텔 중앙의 대합실 지점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일제가 환구단을 폐지한 까닭은 일왕만이 하늘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논리 아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한편, 독립의 구심점으로 작용할 근원을 사전에 제거해 버리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 『왕실의 천지제사』 71쪽


환구단이 사라진 뒤에도 천지신위를 봉안한 황궁우皇穹宇와 고종의 즉위 40년을 기념한 석고단石鼓壇, 정문과 동문 일부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남아 있던 부속 건물들에 대한 일제의 해체는 계속되었다.

환구제 복원 시도 : 황궁우에서 신위봉안식을 거행하다


현재 서울시 중구 소공동에 위치한 환구단 터에는 천지 제사를 지내던 환구단은 없고, 신위를 모시던 황궁우와 돌로 만든 석고, 그리고 환구단 삼문三門만이 남아 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환구제의 복원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다.

그동안 몇 차례에 걸쳐 환구제 복원을 위한 민간단체의 시도들이 있었는데, 2007년 4월 30일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주관하여 환구제를 추진하였다. 종묘에서 환구제 제례를 위한 고유제가 열렸고 이어 환구단 쪽으로 이동해 황궁우 안에 황천상제皇天上帝(하늘신)와 황지기皇地祇(땅신)를 비롯한 17 신위를 모시는 신위 봉안식을 거행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2008년 11월 27일에는 환구제가 처음 재현되었다. 다만 환구단이 사라져 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환구단에서 거행하던 제례를 황궁우에서 지냈다. 1910년 모두 폐지된 국가 제사들은 1960년대 말 종묘제를 시작으로 사직제, 선농제, 선잠제 등의 순으로 복원되었으나 환구제만은 그렇지 못했다.

하늘제사인 환구제는 우리나라에서 땅제사인 사직제와 사람제사인 종묘제와 함께 ‘천지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국가 의례다. 원래 환구제는 3단으로 조성된 둥그런 환구단에서 천지제사를 지내는 것이 원칙이지만, 환구단이 남아 있지 않은 관계로 황궁우 실내를 부득이 환구단의 상단으로 삼고, 황궁우의 난간을 환구단의 중단으로, 황궁우 뜰을 환구단 하단으로 삼아 제례를 행하였다. 이 행사는 환구제의 중요성을 알리는 계기는 되지만, 오히려 엉뚱한 황궁우에서 환구제를 지냄으로써, 그 공간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심어 줄 가능성이 크다.
- 『왕실의 천지제사』 135쪽


이 책은 환구제 복원의 출발은 환구단의 복원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환구제 복원을 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일제가 환구단을 훼철한 이유는 일본의 천황만이 하늘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논리 아래 대한제국의 하늘제사를 차단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이 목적은 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효과적으로 달성되어 있다.

제천 문화 부활의 과제


광복은 되었으나 식민사학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자기 조상을 부정하는 현실로 말미암아 역사 광복은 여전히 되지 못했고, 역사 광복의 측면에서 보면 환구단의 훼철은 일제가 마치 혈穴 자리에 쳐 놓은 대못과 같은 상황이다. 일제가 이 땅의 무수한 혈 자리에 쇠 말뚝을 박아 천지 정기를 끊으려 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상제 문화의 복원에서 볼 때 환구단 훼철은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 자리에 쇠 말뚝을 박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인류 역사의 정통 고갱이(정수)를 가진 한국이지만 철저히 파괴된 세운의 역사 속에서 복원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천지의 어버이이신 상제님과 태모님, 환인·환웅·단군 삼성조와 지존의 신위를 모신 진정한 의미의 환구단, 대신전은 1차로 증산도 본부 태을궁에서 대천제 문화로 부활했고, 앞으로 후천 수도의 중심이요, 만국재판소가 될 천황봉 대신전에서 완전하게 부활할 것이다.



고려는 천자국이었다
후신라(통일신라)와 대진이 공존한 남북국 시대를 계승한 고려高麗는 고구려의 후예라는 의식이 확고하였고, 대진과 마찬가지로 황제국 체제를 지향하였다. 이러한 지향은 고려의 정치 체제에서 먼저 드러난다.

고려의 정치는 3성(중서성, 문하성, 상서성)과 6부(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 체제였다. 유교의 명분론에 따르면 ‘성省’이나‘ 부部’는 제후국에서 사용할 수 없고 천자국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이다. 고려가 금金나라에 보낸 국서에서도 고려 왕은 스스로 자신을 황제라 칭했다. 금나라 역시 고려가 황제국임을 인정하고 국서를 보낼 때 “대금 황제가 고려국 황제에게 글을 보낸다.”라는 표현을 하였다.

고려 중기의 유명한 문인 이규보는 1209년에 지은 ‘연등회 축시’에서, 고려 국왕을 천하를 일가로 만든 중심적 존재로 보고 ‘천자’라는 표현을 썼다. 다음 내용은 고려 왕조 시절 원구단에 사용한 축문의 내용이다.

상천上天의 덕은 무성無聲이며 생물이 그로 인해 살아갑니다. 나라의 근본은 식량에 있으며 사람이 그로 인해 살아갑니다. 봄을 맞아 수확을 기대하며 제사 드립니다. 상제上帝의 은혜가 아니면 민民이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上天之載無聲 物資以遂 有國之本在食 人恃而生 方届上春 用祈嘉糓 非帝之賜 斯民何資)

-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전집東國李相國全集 권제40卷第四十>


고려 시대에도 상제님의 은혜가 아니면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겠냐며 상제님께 올리는 원구단 축문에 분명히 기록해 놓았다. 수도인 개성에 황제가 제천 의식을 거행하는 원구단을 설치한 것도 천자국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