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역사 성인열전 | 대진국 창업과 전성시대 - 3대 성왕聖王 이야기

[역사인물탐구]

이해영 / 객원기자

* 단기 3068년 서기 735년 당과 왜, 신라가 모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니, 천하가 모두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렀다. 심지어 ‘발해 사람 셋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한다’는 말까지 있었다. 이때 임금과 백성이 화락하고, 역사를 논하고 의로움을 즐겼다. 오곡이 풍등하고 온 세상이 평안하여 대진 육덕의 노래(大震六德之歌)를 지어 당시의 모습을 찬미하였다. -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 대진국大震國의 땅 넓이는 9천 리로 영토가 크게 개척되고 문치文治를 잘 베풀어서, 위로 수도에서 아래로 주현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교가 있고 구서오계九誓五戒(조의선인皂衣仙人의 종교 사상을 사회화, 대중화하는 교육 강령으로, 부여의 구서인 효孝·우友·신信·충忠·손遜·지知·용勇·염廉·의義와 고구려의 다물 오계인 충忠·효孝·신信·용勇·인仁을 말함)를 아침저녁으로 외워 익혔다. 봄가을로 관리의 공적을 조사하고 여러 사람이 의논하여 어진 인재를 천거하였다. 사람들은 일찍부터 힘을 차차 쌓아 기르면서 집에서 인재로 쓰이기를 기다렸다. 이로부터 나라가 부강해지고 안팎이 편안하고 기쁨이 넘쳐 도둑질하거나 간사하게 모의하는 폐단이 저절로 사라졌다. 당과 왜, 신라, 거란이 모두 두려워하여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 만방에서 모두 성인이 다스리는 해동성국이라 칭송하였다. -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 (당나라 현종) 20년(732년)에 대무예는 그의 장수 장문휴를 보내 수군을 거느리고 등주 자사 위준을 공격하게 했다. 현종은 조서를 내려 대문예를 유주에 파견하여 군사를 징발하여 그를 치게 하고 태복원외경 김사란金思蘭을 신라에 보내 군사를 징발하여 발해의 남쪽 지역을 공격하게 했다. 마침 산이 막히고 날씨가 추운데다 눈이 한 길이 넘게 쌓였으므로 병사의 태반은 죽는 등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 『구당서』 「발해말갈」 중

평양성은 함락되고


7세기 동북아시아는 국제 세력이 재편되는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660년 백제는 신라에 병합되었고, 668년 9월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이에 만주를 포함한 고구려 지역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비록 당나라의 힘이 미치는 지역은 요동에서 평양에 이르는 통로와 그 인근이었고, 안시성을 비롯한 다른 지역은 건재하였지만, 보장제를 비롯한 지배층의 부재는 망국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설인귀薛仁貴를 책임자로 정하고 2만 명 군사를 주둔시켰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부흥 운동에 겁을 먹고는 유민들을 요서와 중원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시켰습니다. 격렬한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에 당나라는 676년 2월 안동도호부를 요동의 요양으로 후퇴시키면서 점차 유명무실화되어 버렸습니다. 그 와중에 고구려 유민은 남쪽 신라로 망명하여 고구려 재건 운동을 펼쳤지만 결과적으로 신라의 대당전쟁에 이용만 당하고 복국復國의 꿈은 무산되었습니다. 이에 그대로 신라 백성으로 살거나, 일부는 고구려 옛 터전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향했던 고구려 옛 터전에는 고구려를 잇는 새로운 나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진국 건국의 비밀 - 잃어버린 30년


고구려 28세 보장제 개화開化 27년인 668년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될 때 진국振國 장군 대중상大仲象이 지금의 서요하인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함락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에 무리를 이끌고 험한 길을 달려 단군조선의 세 번째 도읍인 장당경 아사달이 있던 개원開原을 지났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따르기를 원하는 이들이 8천 명이었다고 합니다. 함께 동쪽으로 들어가 동모산東麰山에 이르게 됩니다. 동모산은 일명 천계산天桂山으로 동모산東牟山이라고도 합니다. 지금의 만주 길림성 돈화시敦化市 남쪽 현유현賢儒縣에 있는 성산자산城山子山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웅거하면서 성벽을 굳게 쌓고 스스로 보전하여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 칭하고 연호를 ‘광명을 다시 회복한다’는 뜻의 중광重光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기로는 고구려 멸망 후 30년 후인 698년에 대진국大震國이 건국되었다고 하는데, 이미 고구려 평양성 함락과 함께 대진국은 건국되었습니다. 잃어버린 30년이라고 할 수 있죠.

격문을 사방에 전하니 가는 곳마다 멀고 가까운 여러 성에서 합류하는 자가 많아졌습니다. 대중상은 오로지 고구려 옛 영토를 회복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며 노력하다가 중광 32년인 서기 699년 5월에 붕어하니, 바로 대진국의 세조世祖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입니다.

대조영大祚榮, 천문령에서 당나라 이해고 군대를 격파하다


당시 당나라는 중국 최초이자 유일한 여제女帝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696년 5월 거란족의 지도자인 송막 도독 이진충李盡忠과 귀성주 자사 손만영孫萬榮이 폭압을 일삼은 영주 도독 조문홰趙文翽에 항거하여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당시 영주營州는 거란, 말갈, 고구려 유민 등이 어울려 살았던 지역으로 지금의 요령성 조양朝陽 일대입니다. 거란의 거병에 여러 다른 민족들이 연합하였고, 이에 후고구려의 대중상大仲象과 그의 아들 대조영大祚榮 역시 중심이 되어 당나라와 싸우게 되었습니다.

거란군은 17만 명의 당군을 섬멸하는 등 맹렬한 기세로 나아갔으나 697년 4월 돌궐족의 개입으로 손만영이 피살되는 등 급격하게 와해되었습니다. 이에 당나라는 대중상과 말갈에 대해 대대적인 공격을 함과 동시에 대중상에게 진국공震國公을 말갈 지도자 걸사비우乞四比羽에게 허국공許國公을 봉하는 유화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허울뿐인 명예직임을 알고 있었기에 모두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습니다.

이에 당나라는 항복한 이진충의 양자였던 거란 장수 옥검위대장군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와 중랑장 색구索仇로 하여금 대대적인 섬멸전을 감행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때 공교롭게도 후고구려의 대중상이 붕어하였습니다. 후고구려로서는 최고의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태자였던 대조영大祚榮은 부고를 전한 사자를 따라 영주 계성薊城에서 무리를 이끌고 와서 2세 고황제高皇帝로 제위에 올랐습니다. 이때가 신시개천 4596년, 단기 3032년 서력 699년의 일입니다.

지금의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영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 지역에 홀한성忽汗城(대진국의 수도인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10만 명의 군병을 모아 그 위용과 명성을 크게 떨쳤습니다. 정책을 정하고 제도를 세워 당을 적으로 삼고 항거하며 복수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말갈 대장군인 걸사비우와 연합하여 이해고의 당나라 대군에 맞섰습니다. 대조영은 출중한 용맹과 지략까지 겸비한 당대의 영웅으로 어려서부터 용맹이 뛰어났으며 말을 잘 탔고 활을 잘 쏘았다고 합니다.

대조영과 걸사비우가 이끄는 군대는 천문령天門嶺으로 이해고의 군대를 유인하였습니다. 천문령은 훈허渾河와 휘파허輝發河의 분수령인 지린하따링吉林哈達領으로 추정되며 후일 대진국에서 거란으로 가는 영주도營州道의 길목입니다. 치열한 접전 중에 말갈 지도자 걸사비우가 전사하였습니다. 하지만 대조영은 끈질기게 추격하는 당나라군을 유인 포위하여 적장 이해고만 겨우 몸을 피해 탈출하게 할 만큼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를 천문령 대첩이라 합니다.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大震國


대진국 2세 고황제高皇帝 대조영은 중앙과 지방의 정치 군사 기구를 정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장수를 나누어서 군현을 두어 지키게 하였고, 떠돌아다니는 백성을 불러 어루만지고 보호하여 정착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백성의 신망을 크게 얻어 나라의 모든 기강이 새로워지고 국력이 강성해졌습니다. 이에 국호를 대진大震이라 하고 연호를 하늘의 종통을 계승한다는 뜻의 천통天統이라고 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옛 땅을 상당히 회복하고 6천 리 땅을 개척하였습니다.

그때까지 복속하지 않고 있는 주변의 말갈족을 회유하거나 굴복시켜 인구와 군사력을 늘리는 한편 밖으로는 돌궐에 사신을 보내 국제적 위상을 확보하였습니다. 이에 당나라와도 불필요하고 무모한 대결을 피하기 위해 천통 7년 아들 대문예를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보내 숙위宿衛하도록 하였습니다.

대조영은 이런 유연한 강온 전술을 사용해 주변 지역을 정복하며 대진국을 과거 고구려에 버금가는 대제국으로 건설해 나갔습니다. 마침내 당 현종 이융기李隆基는 713년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하며 그 세력을 인정하겠다는 의도를 보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발해라는 국호가 나왔습니다. 당연히 이는 당나라가 외교 정책상 일방적으로 부른 호칭이지, 대진국은 4세 광성문황제 때 스스로 고려국 왕 대흠무라 칭할 정도로,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천통 21년인 719년 봄에 대조영이 대안전大安殿에서 붕어하니, 묘호는 태조太祖이고, 시호는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입니다. 태자인 무예武藝가 즉위하여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하였습니다.

3세 무황제의 당나라 정벌기


전쟁의 원인
대조영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3세 무황제武皇帝 대무예大武藝 시절에도 대진국은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동아시아의 강대국 당唐과의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당의 제국주의적 야욕 때문이었습니다. 당나라의 현종玄宗은 말년에 며느리였던 양귀비와의 사랑으로 안녹산의 난을 유발하긴 하였지만, 이 당시에는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이때를 개원의 치라고 합니다. 오랫동안 골치를 썩이던 거란이 716년 투항한 데 이어 대진국 무황제 8년인 726년 흑수말갈까지 항복해 오자 옳다구나 하고 이를 좋은 기회로 여겨 그들로 하여금 대진국을 공격하도록 부추겼습니다.

말갈족은 원래 7개 부족이 있었는데, 흑수말갈黑水靺鞨을 제외한 6개 부족은 이미 대진국에 복속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대진국과 각을 세우며 대립하던 흑수말갈은 형세를 보더니 더 강한 쪽이라고 판단한 당나라에 붙어 버렸습니다. 그동안 대진국의 강성한 기세에 맞서 감히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던 당나라는 흑수말갈이 스스로 항복하자 마침내 대진국에 대한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반역자 대문예大文藝
흑수말갈이 항복하자 당나라는 헤이룽강 하류의 흑수말갈에 대해, 흑수주黑水州를 만들고 장사長史라는 관직을 설치하여 지배력을 갖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대무예는 당과 흑수말갈이 앞뒤에서 협공할 속셈이라고 단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친아우인 대문예大文藝(또는 大門藝)와 외삼촌(또는 장인이라는 설도 있는) 임아상任雅相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하여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문예는 지금 흑수말갈을 치는 것은 대진국보다 무력이 월등한 당나라의 노여움을 살 것이고, 마치 전성시대에 30만 대군으로 당나라와 싸웠다가 망한 고구려와 같은 운명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만류하였습니다.

대무예는 이를 듣지 않고 진군을 강행시켰습니다. 그러나 대문예는 흑수말갈과의 경계 지역에서 다시 글을 올려 중단할 것을 간하였습니다. 아마도 당나라에 숙위宿衛로 가 있는 동안 당의 화려한 문물과 강성한 국력에 압도되었거나, 끈질긴 회유와 협박 공작에 의해 친당파가 되어 버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믿었던 친동생 대문예의 배신에 대무예는 크게 노해 사촌 형인 대일하大壹夏를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비겁한 동생 대문예를 불러들여 죽여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대문예는 두려워서 당나라로 망명했고, 이에 당 현종은 대문예의 항복을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벼슬을 내렸습니다.

당나라와 벌인 치열한 외교전
대무예는 대일하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정벌하게 하였고, 마침내 항복을 받아 내고 그들을 복속시켰습니다. 그 뒤 당 현종에게 마문궤馬文軌 등을 보내 대문예의 죄상을 말하고 그를 잡아 죽일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당나라의 현종은 그를 안서安西(지금의 신강성新彊省 지역)에 머무르도록 하고, 이도수李道邃 등을 보내어 의리상 죽일 수 없어 지금의 광서 장족 자치주 지역인 영남 지방으로 유배했다고 알렸습니다. 그러나 대문예에 대한 당나라의 후대와 속임수를 빤히 꿰뚫고 있었던 대무예가 강력하게 항의하자, 당 현종은 정말로 대문예를 영남 지방으로 피신시켜 버렸습니다.

이에 대무예는 낙양에서 자객들을 모아 대문예를 암살토록 하였지만,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닌 대문예는 이들을 모두 이겨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공교롭게도 728년에 당에 숙위 중이던 대무예의 아들 대도리행大都利行이 의문의 병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730년에 당의 압제를 받아오던 거란 추장 가돌 칸이 병사를 일으켜 당나라의 꼭두각시놀음을 하던 거란 출신 우두머리 송막 도독을 잡아 죽이고 거란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돌궐과 동맹을 맺고 해족과 손잡은 뒤 당나라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등주를 공격하다
732년 당나라가 거란과 해족의 공격으로 정신없게 되자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고 여긴 대진국 무황제 대무예는 당나라 원정 명령을 내렸습니다. 원정 작전의 총사령관으로 대장大將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산둥성의 등주登州와 내주萊州 지역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당나라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잡아 죽이고 산둥성 일대를 공황 상태에 빠지게 만들었으며 이후에도 오랫동안 대진국의 영향권에 속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나중에 고구려 후예인 치청 절도사 이정기李正己가 제나라를 건국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무황제가 이끄는 본진은 만리장성 인근 지금의 북경 근처인 유주幽州까지 진군하여 당나라를 위협하였습니다.

당과 신라의 공격을 막아 내다
당 현종은 분노하여 군대를 보냈지만, 싸움에 이기지는 못하였습니다. 다음 해인 733년 수비 장수 연충린淵忠麟이 말갈병과 함께 요서 대산帶山 남쪽에서 당나라군을 대파하였습니다.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난하 지역입니다. 이에 당나라는 신라와 밀약을 맺고 신라군도 북상하도록 하였습니다. 당나라에서는 좌령군장군左領軍將軍 개복순蓋福順과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에서 병사를 모아 대진국을 공격하게 하고, 신라군은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金允中으로 하여금 대진국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무황제는 보병과 기병 2만을 보내어 이를 격파하였습니다. 마침 큰 눈이 내려 신라와 당나라 군사 중에 얼어 죽는 자가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이에 추격하여 하서河西의 이하泥河에 이르러 경계를 정했는데, 지금의 강릉 북쪽 이천泥川이 그곳입니다. 해주 암연현岩淵縣은 동쪽으로 신라와 경계를 접하였는데, 암연은 지금의 옹진입니다. 이때부터 신라가 해마다 조공을 바치고, 임진강 이북 여러 성이 대진국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에 당과 신라가 연합하여 쳐들어왔으나 아무 공도 없이 물러가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나당 전쟁으로 소원해졌던 신라와 당은 이때 군사적인 실효는 거두지 못했지만, 예전의 친밀한 관계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반역자 대문예는 끝내 대진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당에서 살다 죽었습니다.

대진국 전성기 4세 문황제 대흠무大欽武(737~793)


강성한 대진국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전격적인 기습으로 승기를 잡은 무황제는 이후에도 계속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인안 16년에는 구다, 개마, 흑수 등 여러 나라가 나라를 바쳐 항복하였습니다. 송막에 12성을 쌓고, 요서에 6성을 쌓아 드디어 5경 60주 1군 38현을 두었습니다. 이에 대진국의 강역은 9천여 리가 되었습니다. 사방의 모든 나라들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습니다. 736년 3월 16일 대영절大迎節을 맞아 서압록하 상류에서 삼신일체 상제님께 천제를 올렸습니다. 서압록은 지금의 서요하로 옛 고리국의 땅입니다. 고구려의 원시조 해모수가 고리국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고구려를 잇는 대진국으로서는 경배해야 할 곳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 한맞이(대영절) 행사는 당나라를 이긴 기념의 의미 외에도 만천하에 신교의 종주국이자 고구려의 후예라는 점을 부각시킨 아주 큰 규모였을 것입니다.


신교 문화 대부흥
인안 19년에 당나라 결전에서 승리한 무황제가 붕어하니 묘호는 광종光宗입니다. 이에 태자인 대흠무大欽茂가 4세 문황제로 즉위하였고, 연호를 대흥大興이라고 하였습니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기록된 대흥이라는 칭제건원稱帝建元 기록은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의해서도 그대로 입증됩니다. 1949년 길림성 돈화현 근교 육정산六頂山 고분에서 출토된 문황제의 둘째 딸인 정혜 공주貞惠公主 묘비에 대흥大興이라는 연호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길림성 화룡 용두산에서 발견된 문황제의 넷째 딸 정효 공주貞孝公主의 묘지에서도 황상皇上이라는 표기가 나왔습니다. 이것으로 볼 때 ‘대진국이 당나라에 예속된 일개 지방 정권이라거나 제후국’이라는 중국 측 주장은 명백한 역사 왜곡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진국은 당나라와 대립하며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녔던 고구려와 같은, 칭제건원을 한 황제국, 천자국입니다.

문황제 대흠무는 도읍을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옮겼습니다. 즉위 이듬해인 738년에는 태학(주자감胄子監)을 세워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치고, 환단의 옛 역사(桓檀古史)를 강론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학자들에게 『국사國史』 125권을 편찬하도록 명하였습니다. 문치文治는 예악을 일으키고, 무위武威는 여러 주변 족속을 복종시켰습니다. 이에 동방 대광명의 현묘한 도, 즉 한민족 국교인 신교神敎가 백성들에게 흠뻑 젖어 들었고, 홍익인간의 교화가 만방에 미쳤습니다. 가히 신교의 삼신 신앙을 계승한 대진국 전성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258년의 역사를 가진 대진국에서 57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을 통치한 대흠무는 793년 붕어하니 묘호는 세종世宗이고 시호는 광성문황제光聖文皇帝입니다.

<참고문헌>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이덕일의 한국통사』(이덕일, 다산북스, 2020)
『발해고 』 (유득공, 송기호, 홍익출판사, 2020)
『한국사 제왕열전 』 (황원갑, 마야, 2007)@




발해渤海인가? 대진大震인가?
대진국의 역사가 다양하게 해석되고 국호조차 명확하게 정립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대진이 남긴 기록과 문헌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선 후기 유득공이 『발해고』에서도 언급하듯 고려의 가장 큰 실책은 발해의 역사를 남기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국은 자국 중심으로 대진국의 역사를 해석하고, 중국 학자들은 심지어 발해라는 국호를 당으로부터 받았을 뿐만 아니라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면서 역사 침략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항해야 할 대한민국 역사학계는 여전히 식민사관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어, 역사 교과서에서조차 발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계속해서 단추가 어긋나듯이, 처음에 국호를 잘못 불러서 지금은 대진국 하면 오히려 낯설어하고 있습니다. 국호를 바로잡는 일은 대진국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진국은 668년 고구려가 망한 후 진국 장군 대중상이 ‘후고구려’를 세우면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대조영 때 국호를 대진大震이라고 했습니다. 진震은 동방을 뜻하며 대진은 ‘동방 광명의 큰 나라’ 또는 ‘위대한 동방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뒤를 이은 대무예는 당 현종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였으며, 11세 선황제 대인수 시절에 주변 나라들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란 칭송을 받았습니다. 4세 대흠무 시기에는 고려라고 칭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마 대진국 사람들은 스스로를 고구려, 또는 고려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건국 초기 몇십 년 동안 지극히 불안한 국제 정세와 대당 외교 노선을 둘러싼 강경파와 온건파의 갈등 속에서 대진이라는 국호와 발해라는 국호가 혼재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고 했듯이, 대진국의 국호는 ‘대진’이거나 고려 또는 고구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에서 부른 발해라는 호칭을 정식 국호라고 했을 리는 없습니다. 고려라는 호칭이 후대의 태조 왕건이 세운 고려와 겹치고, 고구려는 고추모 성제께서 세운 고구려와 겹친다면, 대진국이라는 국호를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당나라 원정 사령관, 장문휴張文休


대진국 제3세 황제 무황제 인안 14년인 732년 9월, 황명을 받은 일단의 군사들이 압록강 어귀를 출발하여 해로로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봉래시에 있던 당나라 등주를 기습 공격하였습니다. 사령관은 장문휴張文休였습니다. 그의 이름과 행적에 대해 우리나라 사서에서는 『태백일사』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고, 중국 『구당서』, 『신당서』 등에서만 간혹 몇 줄 나올 정도입니다. 그래서 가계나 생몰 연대를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대진국 무황제 때 있었던 당나라 원정 기사에 등장할 뿐입니다.

당시 등주는 당나라 동해안의 중요한 경제적, 군사적 요충지입니다. 과거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수군 기지였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공격했다는 것은 당나라의 침략 의지를 좌절시키는 선제공격의 의미가 큽니다. 중요한 기지였기 때문에 많은 수군과 육군이 주둔하고 있었겠지만, 장문휴가 지휘하는 대진국의 군대는 신속하고 강력하게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질풍노도 같고 전광석화 같은 전격적인 기습 작전이었습니다. 장문휴는 기습 작전으로 당나라 방어군을 섬멸하고 곧바로 등주성을 공격하여 등주 자사 위준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처음 공격할 때와 마찬가지로 신속하게 철군하였습니다.

이로써 등주에 대한 당나라의 수군 기지로서의 역할을 상실시킴과 동시에 당나라의 전투 의지를 상실케 하는 큰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때 무황제가 이끄는 대진국의 주력군은 당나라 영주와 평주 지방을 점령하고, 북경 근처까지 진격하였습니다. 이에 두려움과 분노가 치민 당 현종은 신라까지 동원하여 대진국을 토벌하려 하였지만, 효과적인 무황제의 방어와 역습에 막혀 결국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구려를 무너트린 세계 최강국 당나라와 맞서 이런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펴고 위세를 떨쳐 대진국을 당과 대등한 대제국으로 끌어올린 원동력은 위대한 제왕 무황제와 그가 발탁한 장문휴 같은 출중한 장수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진국 개국 일등 공신, 대장군 걸사비우乞四比羽
대장군 걸사비우乞四比羽의 아버지는 걸사지추乞四紙槌로 알려진 말갈족 지도자이자 대장군입니다. 『당서』 「발해전」에 따르면 당나라 측천무후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인 696년 여름 5월에 조문홰의 잘못된 정치로 인해 거란인들이 영주에서 봉기하자, 걸사비우는 영주에 있던 대조영과 함께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탈출하였다고 합니다. 무후가 이를 진압할 틈이 없었기 때문에 걸사비우를 허국공에 봉했으나,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요수를 건너 오루하奧婁河(지금의 목단강)에 성을 쌓고 머물러 견고하게 지켰습니다. 이에 698년 당나라는 이해고를 위시하여 대군을 보냈는데, 걸사비우는 이에 맞서다가 전사하였습니다.

여기서 살펴볼 대목은 말갈인이 과연 어떤 족속이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유득공이 <발해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외국에 보낸 사절단을 비롯한 상층에도 말갈인들이 적잖게 기용되고 있었습니다. 총체적으로 볼 때, 대진국의 종족은 고조선과 고구려를 구성하고 있던 예맥⋅부여 계통의 고구려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거론되는 말갈인이란 어떤 특정 종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쑹화강松花江 유역의 속말말갈이니, 백두산 지역의 백산말갈이니 하는 것과 같이 지역에 따라 주민 일반에 대해서 중국 측에서 낮춰 부르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쑨진지 같은 중국 학자도 말갈은 어떤 민족이나 종족도 아닌 예맥이나 숙신, 고아시아의 3개 종족으로 이루어진 일부 부락 군이나 부락 연맹 같은 것이라고 하여 말갈의 종족성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한규철 경성대 사학과 교수도 말갈은 당나라 사람들이 고구려 변방 사람들을 낮춰 부른 이름이라고 주장하면서, 말갈을 고구려와 다른 종족으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합니다. 백두산 지역 사람을 백산말갈白山靺鞨이라 한다든지, 쑹화강 유역 사람을 낮춰서 속말말갈粟末靺鞨이라 불렀기에 『신당서』에서 대조영을 ‘속말말갈’이라 한 것은 ‘쑹화강 지역 시골 사람’의 다른 표현이라는 주장입니다. 전원철 박사도 비슷한 주장으로 “중국인들이 말하는 말갈은 곧 고구려이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이 말하는 것처럼 대진국은 말갈인들이 세운 지방 정권이 아니라, 고구려의 후예들이 세운 고구려의 당당한 계승국입니다. 상식적으로도 고구려가 망했다고 해서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이 바로 다른 나라 사람으로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여전히 고구려 사람들입니다. 하물며 고구려 평양성이 함락된 바로 그해에 대중상이 후고구려를 세웠기 때문에 고구려인이나 말갈인은 같은 족속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입니다.

말갈의 군장이며 대장군인 걸사비우는 변방에서 고구려를 끝까지 지키던 장수였습니다. 비록 고구려의 정규군에 편입된 세력은 아니었지만, 끝까지 대중상, 대조영 부자와 운명을 함께하며 대진국의 건국을 이룬 개국 공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