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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인물탐구]

    창세역사 성인열전 | 수나라 100만 대군을 전멸시킨 살수대첩薩水大捷의 영웅, 을지문덕乙支文德 (下)

    이해영 / 객원기자

    *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최고最古의 5언 4구 을지문덕의 시
    (與隋將于仲文詩(여수장우중문시), 贈隋將于仲文詩(증수장우중문시), 遺于仲文(유우중문) 등으로 불린다.)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 귀신같은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 신묘한 계획은 땅의 이치를 다했노라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 싸움에 이겨서 그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 동서고금 허다한 싸움이 있지만, 적은 군사로 강대국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쳐서 그림자도 못 돌아가게 하고, 백만 병 적진에 출입하기를 을지문덕같이 한 자가 있는가? 어린아이도 그 위엄을 듣고 울음을 그치며 초목도 그 이름을 알고 두려워할 것이다. 그 털끝 하나, 침 하나만 본받아도 독립을 보전하고 역사에 빛날지니, 을지문덕은 우리 4,000년 동안에 제일의 위인이요 온 세계에서도 그 짝이 드물다. - 단재 신채호 『을지문덕전』에서


    * 薩水漡漡漾碧虛(살수상상양벽허)하니 隋兵百萬化爲魚(수병백만화위어)라.
    至今留得漁樵語(지금유득어초어)하니 不滿征夫一哂餘(불만정부일신여)라.

    살수 물결 세차게 흘러 푸른빛 띠는데
    옛적 수나라 백만 군사 고기밥이 되었구나.
    지금도 어부와 나무꾼에게 그때 이야기 남았건만
    명나라 사신은 언짢아 한 번 웃고 마는구나.

    조선 개국공신인 문충공 조준趙浚(1346~1405)이 명나라 사신 축맹祝孟과 함께 평안도 안주에 있는 백상루百祥樓에 올라 읊은 시로 명 사신은 이에 항의했지만, 명백한 사실이라 더는 말을 못했다고 합니다.


    세계사상 최대 규모 원정군


    고구려 영양열제 홍무 22년, 수나라 대업大業 7년(611년) 2월. 수양제는 양주 땅에서 백관을 초대해 큰 연회를 베푼 다음, 원정을 위해 북상했습니다. 양제는 화려한 용주龍舟를 타고 장강에서 운하를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가 황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영제거永濟渠라는 새로운 운하로 들어가 허베이의 탁군涿郡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 선발된 사람 3천여 명이 걸어서 배를 따랐는데, 추위와 굶주림과 피로로 열에 한둘은 죽었다고 합니다. 이전에 고구려가 입조하지 않으면 탁군으로 나아가겠다는 자신의 말을 지켰으며 이는 고구려에 대한 선전포고였습니다.

    이곳에서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이듬해 612년 정월 마침내 고구려 원정에 나서게 됩니다. 제2차 고수대전의 발발이며,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세계사상 최대 규모의 원정군이 고구려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백만 대군! 과장이 아닌 실제로 백만 대군이 고구려로 향했습니다. 『수서隋書』 권4 제기帝紀 제4 양제하煬帝下 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 규모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總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총일백일십삼만삼천팔백),號二百萬(호이백만),
    其餽運者倍之(기궤운자배지)
    (총병력은) 113만 3,800명이고, 200만이라 (과장해) 불렀으며, 식량 운반자는 그 배였다.


    이에 대해 우리 측 사서인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모두 113만 3,800명인데 2백만 명이라 하였으며, 군량을 수송하는 자는 그 배가 되었다. (중략) 매일 1군씩을 보내어 서로 거리가 40리가 되게 하고 진영이 연이어 점차 나아가니, 40일 만에야 출발이 완료되었다.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지고 북과 나팔 소리가 서로 들리며 깃발이 960리(460㎞)에 걸쳤다. 어영御營 안에는 12위衛⋅3대臺⋅5성省⋅9시寺(이들은 수나라의 모든 관부를 말함)를 합하고, 내외전후좌우內外前後左右 6군을 나누어 예속시키고 다음에 출발하게 하니 또한 80리를 뻗쳤다. 근고近古 이래 보지 못한 출병의 성대함이었다.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 23년 1월 기사.


    이에 맞서는 고구려의 병력은 알려진 바로는 3만 명 정도였는데, 「태백일사」에서는 조의皂衣 20만 명으로 적군을 거의 멸하였다고 나오니, 아마도 고구려 총병력은 수나라 침략군에 버금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수양제隋煬帝 양광楊廣


    이 대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수나라 양제煬帝는 누구일까요? 양광楊廣은 선비족 후손으로 수문제의 둘째 아들입니다. 598년 1차 고수대전高隋大戰에서 강이식姜以式 대장군에게 패한 수문제는 패전의 충격에 빠져 고구려에 대한 일체의 공격 계획을 중단하였고, 고구려에 대한 대우를 전쟁 이전처럼 하였습니다. 수문제는 수양제와 달리 대운하 공사가 필요한 것은 알지만, 백성들이 힘들다고 하자 중단하였고, 백성들의 삶을 위해 세율을 낮추고 근검절약한 보기 드문 성군이었습니다. 소모된 국력을 기르고 나라를 점차 안정시켜 고구려 원정 패배로 인한 후폭풍을 그럭저럭 수습하였습니다.

    고구려 영양열제嬰陽烈帝께서도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 교섭을 모색하였고, 왕권을 강화하고, 역사서 『신집新集』을 편찬하게 하여 백성들의 자부심을 한껏 높였으며,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여 혹시 모를 신라와 백제의 북진을 미리 차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수나라에서는 정변이 일어났습니다. 604년 7월 수문제의 둘째 아들 양광이 아비와 형을 죽이고 제위를 찬탈하여 황위에 올랐습니다. 바로 수양제입니다. 그는 오만하고 잔인하면서도 허영심이 남달라, 즉위하자마자 낙양에서 탁군에 이르는 대운하를 다시 건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변국들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그에게 선황 시절 패배를 안겼던 동방의 강국 고구려는 눈엣가시였을 것입니다.

    수문제 때부터 축적된 국력에 대운하 건설로 남쪽의 물자가 원활하게 운반되는 상황이 되자 드디어 사상 최대의 원정군을 편성하여 침공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수나라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며 무리하게 진행하여, 병선을 건조하는 도중에 전체 일꾼의 30~40%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집결한 군대가 이동하는 과정에서 마음대로 쉴 수도 없어서 피로에 쓰러지는 자가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보급도 길은 멀고 험해서 제때 수송하지 못하였습니다. 정해진 분량을 나르지 못하면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대열에서 이탈해 도망간 수송자들은 여기저기 떼를 지어 다니는 도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당시 ‘무향요동낭사가無向遼東浪死歌, 즉 요동에 끌려가서 헛되이 죽지 마라’라는 반전 가요가 유행하였다고 합니다.

    위기의 고구려. 개국 이래 최대의 위기가 성난 파도처럼 엄습해 오고 있었습니다. 파란과 시련, 그리고 승리라는 영광의 시대가 오고 있었습니다.

    기록이 사라진 영웅, 을지문덕


    수나라 100만 대군에 맞선 이는 고구려 대신大臣 을지문덕乙支文德이었습니다. 우리 민족 3대 대첩 중 하나인 살수대첩薩水大捷의 주인공인데 그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빈약합니다. 귀주대첩龜州大捷의 인헌공 강감찬 장군이나 한산대첩閑山大捷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데 말입니다.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매우 간략히 언급이 된 부분과 중국 측 기록에 실린 몇 줄 정도, 그리고 「태백일사」의 기록뿐입니다. 뒤를 잇는 연개소문은 그 가계가 어떻게 되는지 등을 알 수 있는데, 을지문덕은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고구려 멸망으로 고구려 역사책이 모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고, 둘째로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 참고했던 『구삼국사』나 『고기』 등의 역사책에 고구려와 수⋅당 제국 간의 전쟁 기사가 누락되었을 가능성입니다. 살수대첩 이후 이어진 연개소문의 정변과 같은 정치적 혼란과 국운을 건 당나라와의 전쟁으로 사서를 편찬할 경황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 대신大臣, 을지문덕


    비록 역사의 기록은 부족하지만, 남아 있는 여러 전설과 당시 정황 등을 통해 불세출의 명장 을지문덕의 일생을 더듬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을지문덕은 567년에 태어나 629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맥李陌 선생이 지은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는 을지문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을지문덕은 고구려 석다산 사람이다. 일찍이 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삼신의 성신이 몸에 내리는 꿈을 꾸고 신교 진리를 크게 깨달았다. 해마다 3월 16일인 대영절大迎節이 되면, 말을 달려 강화도 마리산摩利山에 가서 제물을 바쳐 경배하고 돌아왔다.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천제를 올렸다. 이런 제천 의식은 배달 신시의 옛 풍속이다.


    18세기 조선 시대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1794년 저술한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도 “을지문덕은 평양 석다산石多山 사람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석다산石多山은 평안남도 증산군 적송면赤松面 석삼리石三里에 위치한 해발 271m의 산이라고 합니다. 돌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합니다.

    석다산에서 무예 수련을 한 을지문덕의 무술 스승은 ‘우경’이라는 도사라고 알려져 있는데, 아마 조의선인이었을 겁니다. 이곳에서 한민족의 뿌리인 환인, 환웅, 단군성조 이래 한민족의 국교요, 동방 문명의 정교正敎인 신교神敎를 대각하며 문무를 겸전했습니다.

    이 평양 인근에는 을지문덕에 관한 전설이 많이 내려옵니다.

    어느 날 을지문덕이 불곡산 석굴 속에서 책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때 큰 구렁이 한 마리가 그를 해치려고 기어들어 왔다. 잠결에 괴이한 살기를 느낀 을지문덕이 눈을 뜨면서 번개같이 칼을 휘둘러 구렁이의 목을 쳤다. 그때 칼로 내려친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돌로 만든 책상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지금도 그 석굴에는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돌 책상이 남아 있다고 전한다. 석다산에는 지금도 을지문덕이 쓰던 돌집이 남아 있으며, 그 안에는 돌상도 하나 있고, 석다산 맞은편에 있는 높은 산은 ‘마두산’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을지문덕이 타고 다니던 말이 나왔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평안남도 평원군 운봉리 대원산에서 을지문덕이 무술 훈련을 하면서 활을 쏘는데 과녁이 잘 보이지 않자, 높이 자란 나무들을 칼로 쳐서 시야를 훤히 트이게 만들어 놓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나무들은 을지문덕이 칼질을 한 그 높이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을지문덕의 관직은 대신大臣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당서』에 따르면 “고구려 왕은 오색 무늬의 옷을 입고 흰 비단(白羅)으로 관冠을 만들며, 가죽 띠에는 모두 금테를 둘렀다. 대신大臣은 푸른 비단관(靑羅冠)을 쓰고, 그다음은 진홍색 비단관(絳羅冠)을 썼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보아 태왕과 대신 그리고 다른 신하들 간에 의복의 구별이 명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을지문덕에 대한 이설은 맞지만 고위 귀족 출신이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한 나라 군대의 최고 통수권자이자 외교 협상권을 갖출 정도였으면, 귀족 최고위 직책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당시 수양제가 수하 장수들에게 영양열제와 을지문덕을 만나면 반드시 사로잡으라고 밀명을 내린 걸 보면 외국에서도 그 이름이 잘 알려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일설에는 고구려 초기 명신 을소乙素와 대신大臣 을파소乙巴素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을지는 을乙만이 성이고, 지支는 존대의 접미사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 개국공신이자, 신교문화의 맥을 잇는 유서 깊은 집안 출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동성에 발이 묶인 수나라 대군


    다시 홍무 23년 612년 요하 부근. 2월에 요하에 다다른 수나라 대군은 부교를 가설하여 요하를 건너려고 했으나, 첫 접전에서 역전의 용장이라는 맥철장麥鐵杖 등이 전사하면서 초전부터 여지없이 사기가 꺾이고 말았습니다. 요하에서 고구려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요하를 건너는 데 2개월을 소모하였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요하를 건너 요동성(허베이성 창려) 공성에 들어갔습니다.

    수양제의 원래 계획은 우중문于仲文과 우문술宇文述로 하여금 육로로 요동을 공격하게 해서 요동을 뚫고 고구려의 본토로 잠입할 때, 보급품을 실은 내호아來護兒의 수군이 이에 합류하여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요동성에서 발목이 잡혔습니다.

    방어에 불리한 평야성인 요동성의 고구려 군사와 백성은 성을 잘 지켜 냈습니다. 이들의 눈물 나는 분전 덕분에 이후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의 승패가 갈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와 함께 고구려의 계략이 제대로 먹혔던 전투가 이 요동성 공방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군은 농성하는 도중 상황이 불리해지면 바로 수나라군에 항복 의사를 타진하였습니다. 최고 통수권자인 수양제가 군을 이끄는 친정 체제였던 것이 수나라에게 독소로 작용했습니다. 항복 의사를 타진하면 일선 부대 지휘관에서 양제까지 보고가 올라가는 데 시간이 걸리고, 이를 의논하는 데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결정을 내리고 그 명령을 전달하는 데 다시 시간이 소요되는 등 자꾸만 시간이 깨지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연히 이 기간 동안 휴전이 불가피했으며, 그사이에 고구려군은 요동성 피해를 복구하고, 수비군의 손실을 메우는 데 총력을 쏟았습니다.

    애초에 수양제는 “일체 전쟁은 진격하고 정지함을 모두 반드시 아뢰어 회답을 기다릴 것이며 제멋대로 하지 말라.”라고 명령을 내렸고, 덕분에 수나라 장수들은 급하게 싸워야 할 때 감히 멋대로 나서지 못하고 황제의 명을 받느라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이렇게 세 번에 걸쳐 시간을 벌면서 방어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수양제의 고구려 원정 목적 자체가 고구려의 완전한 멸망인지, 국왕의 입조인지, 아니면 단순한 복종인지도 불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수양제는 허세와 과시욕에 차서 이동식 궁전을 짓는다는 등 헛된 일을 벌이면서 시간을 낭비하였습니다.

    압도적인 병력과 물량으로도 6월이 될 때까지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수양제는 자신이 직접 요동성으로 달려와 독전을 했습니다. 그러나 요동성은 요지부동이었고, 병력과 물자의 손실과 함께 이제 요동에는 겨울이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요동성에서 3개월이라는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한 수양제는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지게 되었습니다.

    평양성을 점령하라!


    수양제는 가장 신임하는 장수인 우문술과 우중문에게 30만 5,000명의 정예군을 주고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수양제의 특명을 받은 별동대는 요동성을 우회하여 진격하였습니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기습 작전을 펼쳐야 할 군사들에게 100일분의 식량과 무기 등을 지니게 하였으니, 처음부터 진격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국군이 군장을 꾸릴 때의 무게는 약 20㎏에 육박합니다. 여기에 100일 치 식량으로 약 30㎏을 더 짊어진다고 가정하면 그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곳곳에는 고구려군과 조의선인들이 살벌한 게릴라전을 펼칠 것이라 행군의 난이도는 인간이 수행할 수 없는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길도 산길에다 도로 사정도 좋지 않았을 것이니, 이는 죽음의 행군이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전쟁영웅 고건무高建武의 활약


    수나라 별동대는 중간중간 식량을 버리면서 진군하였는데, 이들의 희망은 내호아의 수군이 이끌고 올 보급품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희망의 불씨를 꺼 버리고, 전쟁의 판세를 결정짓는 사건이 평양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수군 총사령관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내호아는 뱃길을 통해 패수 하구로 들어와 평양성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상륙하게 됩니다. 하지만 고구려 최강의 수도 방위군과 친위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지휘하는 사령관은 영양열제의 동생 고건무高建武였습니다.

    고건무는 용맹과 무공이 아주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고구려군은 일부러 져 주면서 내호아를 유인했습니다. 거듭된 작은 승리에 도취된 내호아는 4만 병력을 가려 뽑아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였습니다. 이에 평양성은 성문이 열린 채였으며, 내호아의 수군은 병력을 풀어 약탈을 하면서 대오도 갖추지 않았습니다.

    평양성 외성의 빈 절에 군사를 숨겨 두고 거짓 퇴각한 고구려군은 적을 유인하여 흩어진 수나라 군사를 하나씩 낚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황제皇弟 고건무가 이끄는 결사대의 눈부신 활약으로 내호아의 수군은 불과 수천 명만이 살아 돌아갈 정도였습니다.

    수나라 부장 주법상周法尙이 진영을 정비하여 겨우 수군은 바닷가 포구에 주둔하기만 하였습니다. 후예 우중문, 우문술이 패퇴하자 바로 철군하여 버렸습니다. 만약 수군이 30만 육군 별동대와 평양성 근교에서 합류, 보급과 공성용 무기들을 지원받았다면 상황은 고구려에 불리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명심에 눈이 먼 내호아가 독단적으로 공격을 수행하다 수군이 궤멸되면서 보급이 완전히 끊긴 채 적의 수도 앞에서 고립된 우중문, 우문술의 30만 별동대에게 한 사람이 찾아옵니다. 바로 을지문덕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이 무렵 수나라 별동대 본영에 들어선 이는 고구려 대신이요, 총사령관인 을지문덕이었습니다.

    을지문덕은 홀로 적진으로 찾아들어 가서 우문술과 우중문 등에게 항복하겠노라는 뜻을 전하게 됩니다. 사실 항복은 거짓이고, 항복한다는 핑계로 수나라군의 허실을 탐지하려는 것이 본래 목적이었습니다. 출전에 앞서 수양제는 “고구려 왕이나 을지문덕이 오거든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밀명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우중문은 이게 웬 떡이냐고 속으로 기뻐하면서 을지문덕을 붙잡아 놓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위무사로 종군한 상서우승 유사룡劉士龍이 항복하겠다고 제 발로 찾아온 적장을 생포한다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고, 또 대국의 체면도 말이 아니라면서 한사코 반대하였습니다. 이에 우중문은 어쩔 수 없이 을지문덕을 돌려보내게 됩니다.

    이때의 상황은 고구려 재상인 을지문덕이 직접 정탐이나 하러 갔다기보다는 서로 의사가 타진되었던 상태로 보입니다. 앞서 요동성에서도 항복한다고 하면서 시간을 번 고구려이기 때문에 정말 항복할 생각이면, 재상인 을지문덕이 직접 찾아오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협상을 핑계로 시간을 끄는 용도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협상을 시도하기 위한 시간 끌기라면 을지문덕과 같은 고위층 인사가 방문하는 게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항복 의사를 밝히고 돌아간 후 전혀 소식을 전해 오지 않자 그제야 속은 것을 눈치챈 우중문은 평양성으로 진격하려고 합니다. 반면 우문술은 병사들의 사기가 꺾였고 군량마저 동난 상황이기 때문에 신중론을 펴지만, 우중문의 지휘를 받는 처지라 별수 없이 명령을 따라야만 했습니다.

    결국 추격전이 벌어집니다. 배고프고 지친 수나라 군대는 정처 없이 을지문덕을 추격하였고, 적군의 지친 기색을 눈치챈 을지문덕은 이들을 피곤하게 만들려고 싸울 때마다 거짓으로 패하여 달아났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을지문덕의 작전 계획에 따라 청야전술淸野戰術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청야전술은 성 밖에 있는 집이건 밭이건 모두 비워 놓고 먹을 만한 것은 모두 치워 버렸으며 우물에는 독을 타는 등 곡식 한 톨도 적에게 주지 않는 계책을 말하는데, 필연적으로 백성들의 고통이 수반됩니다. 이를 감수했다는 것은 고구려 지배층과 일반 백성들 간에 유대와 깊은 신뢰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사들이 더욱 지치도록 하면서 고구려 영토 깊숙이 유인하게 됩니다. 수나라 군사는 마침내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30만 정예 병력을 몰살시킨 살수대첩薩水大捷


    당시 수나라 별동대의 생각은 평양성에 도착하면 보급 물자를 충분하게 가진 수군과 합류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영리한 지연 전술로 평양에 먼저 도착한 수군水軍이 독자적인 작전을 펴다 고건무 장군에 의해 궤멸되었고, 수나라 별동대는 만신창이가 되어 평양성까지 어떻게든 도착했지만 지치고 굶주려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진퇴양난에 빠진 수나라 장수에게 을지문덕은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를 보냈습니다. 언뜻 글만 보면 적을 칭찬하고 추켜세우는 글로 보이지만, “너희는 이미 졌고, 더 이상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라는 의미였습니다. 이런 도발에 수나라 장수들은 분노하였지만, 그들도 역전의 명장들이라 더 이상 작전 속행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퇴각을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방진方陣을 치면서 고구려의 공격을 염려하며 규모 있게 퇴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곳곳에 매복해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고구려군이 사방에서 지친 수나라 군사들을 사정없이 추격하여 맹렬히 공격하였습니다. 수나라 군사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곳이 바로 살수薩水 유역입니다. 기존 강단사학에서는 살수가 청천강淸川江으로 알려져 있는데 살수대첩이 있기에는 강폭이 작다고 합니다. 이에 의문이 드는 지역이고, 적군이 반쯤 건넜을 때 둑을 터뜨려 수장水葬시켰다고 하지만 이도 잘못입니다.

    실제로는 도하渡河 중인 수군을 공격하여 넓은 평지에서 몰살시켰습니다. 이 살수의 위치에 대해 북한 학계에서는 요동반도에서 바다로 흐르는 대양하大洋河의 지류인 소자하哨子河로 보고 있습니다. 위당 정인보鄭寅普 선생은 개평현蓋平縣 주남하州南河라고 하였으며, 최근 문성재文盛哉는 살수가 만주 요령성遼寧省 혼하渾河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러 사정으로 보건대, 한반도의 청천강은 살수가 아니고, 지금의 요동 지역에 있던 하천이 살수라고 보입니다.

    살수 일대를 도하하는 수나라 군대를 고구려군은 맹렬하게 공격하였습니다. 지상군의 방어력에 제일 취약한 순간은 도하 중일 때입니다. 군이 분열되어 있고, 서로 연계가 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희생된 것은 후군으로 고구려군의 맹공에 붕괴되고 지휘관인 우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할 정도로 철저하게 궤멸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30만 대군 전체에 극도의 공포심을 전염시켰고, 최소한의 편제와 통제가 무너지면서, 이들은 인간 좀비처럼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패주하는 수나라 정예군 중 수양제에게 살아 돌아간 이는 2,700명이었습니다. 완벽한 전멸이었습니다.

    그리자 남은 수나라군 총병력은 즉시 퇴각하였고, 수양제는 사신을 보내 화평을 구걸하였으나 을지문덕은 듣지 않았고, 영양열제도 추격의 엄명을 내렸습니다. 이에 을지문덕은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승리의 기세를 타고 곧바로 몰아붙여, 태원太原과 유주幽州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의 산시성陝西省과 허베이성河北省 북부 일대입니다. 그곳의 주와 현에 들어가서 다스리고, 떠도는 백성을 불러 모아 안심을 시켰습니다.

    이것으로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의 2차 전쟁이 종결되었습니다. 겨우 돌아간 수양제는 패전의 죄를 물어 유사룡을 처형하였습니다. 우중문은 감옥에 갇혔다가 이듬해에 화병으로 병보석을 받고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살수대첩의 의의와 영웅의 최후


    당시 수나라 군대 지휘관들은 통일 과정 중 벌어진 수많은 전투들에서 승리를 거둔 역전歷戰의 지휘관들이었고, 그들의 전략 구상은 꽤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을지문덕을 비롯한 고구려군 수뇌부는 수륙 양면으로 침공해 오는 수나라군을 최대한 끌어들여서 절묘한 시간차 공격으로 잘라내며 각개 격파를 하였고, 주력으로 살수에서 갈무리하여 섬멸하는 통쾌한 일격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 역사상 야전에서 거둔 가장 큰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살수대첩을 이끈 을지문덕의 기록은 더 이상은 없습니다. 다만 수와 전쟁 이후 평양 서방의 용악산 밑에 있는 귀촌에 초당을 짓고 노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1930년 잡지 「별건곤別乾坤」 34호에 실린 ‘을지문덕 묘참배기’에 따르면, 그의 묘는 강서江西와 대동大同 두 고을을 접경한 평안남도 강서군 잉차면芿次面 2리에 위치한 현암산玄巖山에 있기는 하지만 당시에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아일보> 1938년 5월 24일자에는 평양기독청년회관에서 평양 지역 지식인들이 을지문덕의 묘를 보수하기 위한 모임을 조직했다는 기사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수양제 피격 사건과 수나라의 멸망


    살수대첩 이후 홍무 25년인 614년에 수나라는 고구려를 다시 한 번 쳐들어옵니다. 그 전해인 613년에도 침략하였지만 또다시 요동성에서 막혔고, 예부상서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이 일어나 급히 회군하여 반란을 진압하기도 하였습니다.

    수양제는 먼저 군사를 보내어 비사성卑奢城을 겹겹이 포위하고 한때 승리하면서 기세를 올리긴 하였습니다. 이때 영양열제는 진격을 늦추기 위해 양현감의 반란 때 고구려로 망명한 곡사정斛斯政을 돌려보내려 하였습니다. 때마침 조의선인 일인一仁이라는 분이 자원하여 따라가기를 청하였습니다. 수양제가 고구려에서 보낸 표表를 읽는 중에 일인이 소매 속에서 작은 쇠뇌를 꺼내 쏘아 가슴을 맞혔습니다. 이에 수양제가 놀라 쓰려져 정신을 잃었습니다.

    뒤에 수양제는 좌우를 돌아보면서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친히 작은 나라를 치다가 졌으니, 이것이 만세의 웃음거리가 아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후 전쟁은 지지부진해졌고, 수양제는 군사를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장장 16년 동안 4차례에 걸친 수나라의 침공은 그렇게 끝이 났고, 고구려에 대한 무리한 원정이 원인이 되어 수나라의 국력은 피폐해졌습니다. 백성의 삶이 곤궁해지자 각지에서 반란이 쉴 새 없이 일어났고, 호족과 귀족들까지 군웅할거를 함에 따라 수나라 조정의 통제력은 약화되었습니다.

    마침내 617년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宇文化及이 수양제를 시해하였고, 이로써 수나라는 중국을 재통일한지 불과 40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으며 다시 한 번 중원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같은 해 9월 고구려의 영양열제가 재위 29년 만에 붕어하니 실로 하늘이 수 제국의 침공을 막기 위해 보낸 현군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후 평양성 전투의 전쟁 영웅인 이복동생 고성高成, 즉 고건무高建武가 태왕으로 즉위하니 고구려 27세 영류제입니다.

    고구려의 강성을 온 천하에 떨친 을지문덕


    우리의 영웅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은 살수대첩 이후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출장입상出將入相했던 고구려의 대신이요. 전쟁 영웅인 을지문덕의 자취가 전혀 알려지지 않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고구려는 수나라와 격전을 치르며 여러 역경과 시련들을 이겨 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이후 당태종 이세민이 이끄는 만만치 않은 당나라 대군을 물리칠 수 있는 저력을 축적하게 된 것은 분명합니다. 조선 시대 순암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양만춘의 안시성 싸움으로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를 강국으로 여겨 감히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을지문덕의 공로다.


    실제로 임진왜란 초반 당시 조선이 일본군에게 속절없이 무너질 때 당시 명나라에서는 수나라와 당나라를 물리친 나라가 왜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가 하면서, 일본과의 내통을 의심했다고 합니다.

    고려 시대 김부식은 고구려가 수양제의 100만 대군을 섬멸한 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라고 극찬하였습니다. 조선 세조 때 양성지梁誠之는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며 모셔야 할 역사적 인물로 12명의 왕과 24명의 신하를 추천했는데, 고구려에서는 시조 추모성제와 영양열제 그리고 을지문덕을 천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숙종은 1645년 평양에, 1670년 평안도 안주에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각각 충무사忠武祠, 청천사淸川祠라는 현판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항일 전쟁기인 20세기 초 의병들의 군가인 「용진가」에도 을지문덕의 이야기가 이순신 통제사와 더불어 나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도 『을지문덕전』을 짓고 다음과 같이 그를 칭송하였습니다.

    을지문덕은 고구려 대신大臣라 하였는데, 대신이라고 말한 것은 틀림없이 그때에 대대로大對盧(총리대신)를 말한 것이거나 막리지莫離支(군부대신)를 말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또한 좌보左輔나 우보右輔(좌보와 우보는 모두 국무대신)를 말한 것인데, 어느 것이건 간에, 고구려의 주력主力이 전적으로 을지문덕에게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살수薩水에서의 싸움은 한 나라의 흥망이 달린 문제였으므로 을지문덕이 싸우려고 하면 전국이 다 싸우고, 을지문덕이 물러나려고 하면 전국이 다 물러나며, 을지문덕이 거짓 항복하여도 전국의 상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거짓 항복인 줄 알고 의심하지 않았으니, 대개 임금이 그를 전적으로 신임하였고 백성들이 그를 깊이 신뢰하였기 때문에, 그가 밖에 나가서는 군대의 대장이 되고 안에 들어와서는 재상의 자리에 앉아서, 안으로 정사를 살피고 밖으로 적국을 물리치는 계책을 강구하여 한 나라의 안위가 그 한 몸에 달려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단군 2931년에 영양왕이 요서로 쳐들어가서 싸움을 촉발시킨 이후부터 살수 전투 이전의 일들은 모두 을지문덕이 한 일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마도 을지문덕이 없었다면 고구려의 기상은 죽고 수나라에 의에 멸망당했을 것이며, 패륜 무도하고 오만한 수양제에 의해 백제와 신라까지 무사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영양열제와 함께 임금과 신하가 다 하늘이 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문헌>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을지문덕전』(단재 신채호원저, 박기봉 편역, 비봉출판사, 2006)
    『이덕일의 한국통사』(이덕일, 다산북스, 2020)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황원갑, 인디북, 2004)




    살수대첩의 또 다른 주역, 황제皇弟 고건무高建武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영웅이 또 있습니다. 영양열제의 이복동생으로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평양성을 지켜 전쟁 상황을 완전히 바꿔 버린 인물, 고건무高建武입니다.

    만약 이때 고건무가 내호아의 수나라 수군을 패퇴시키지 않았다면, 30만 정예의 수나라 별동대가 보급을 받고 이들이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는 풍전등화의 상황이 전개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영양열제가 후사 없이 붕어하자 고건무가 고구려 제27세 황제에 오르니, 바로 영류제榮留帝입니다. 영류제가 즉위하기 6개월 전인 618년 3월에 수나라는 몰락하고, 당나라를 비롯한 할거 정권이 성립되었습니다. 이 혼란을 잠재우고 통일을 이룬 당나라 고조 이연은 고구려와 화친을 제의하였습니다. 이에 영류제는 수나라와 치른 전쟁의 피해를 복구해야 했고, 신라와 백제가 계속 고구려 변방을 노리는 상황에서 전쟁을 하는 일은 위험하다는 온건주의 성향을 펴게 됩니다.

    고구려 멸망 과정으로만 본다면 영류제의 이런 처사는 꽤 합당한 처사라고 봅니다. 고구려가 잘 구사하는 청야전술은 온전히 백성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전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백성들의 고충을 잘 아는 전쟁 영웅 영류제는 되도록 전면적인 전쟁을 피하고 힘을 기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연개소문의 아버지인 연태조에게 당의 침략에 대비하는 천리 장성을 주도하게 합니다. 이는 선대의 소수림제와 고국양제 때 전면전을 피하면서 힘을 기르고 이후 광개토열제 때 동아시아를 제패했던 것을 상기해 보면 그리 나쁘지 않은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친당적이고 온건한 영류제의 정책에 반발한 강경파의 수장 연개소문의 정변으로 고구려 귀족들은 거의 몰살하고, 영류제도 시해당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후 연개소문은 비록 당나라와의 전쟁에서는 승리하였지만, 후계 구도에서 문제점을 드러냄으로써 내분에 의해서 고구려가 멸망하는 데 큰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화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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