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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인물탐구]

    창세역사 성인열전 | 수 제국에 맞서 고구려를 지켜낸 대신大臣 을지문덕乙支文德 (上)

    - 영양태왕과 병마도원수 강이식



    이해영 / 객원기자

    * 진주 강씨의 도시조(都始祖)는 고구려의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이식(以式)으로 용맹이 출중하고 지략이 뛰어난 희세의 명장이라. 수(隋)나라 문제(文帝)의 30만 대군을 격파하고, 그 아들 양제(煬帝)의 침입에 맞서 을지문덕을 휘하로 하여 수의 백만 대군을 물리쳐 나라를 구하였나니 (증산도 도전 1편 12장 5~6절)


    * 논하여 말한다. 수나라 양제가 요동의 전쟁에서 동원한 군대의 규모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대단했다. 고구려는 한쪽 지역의 작은 나라였지만, 이를 막아 냈다. 스스로 지켜 냈을 뿐만 아니라 그 수나라 군대를 거의 섬멸하였으니, 이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경전(춘추좌씨전)에서는 “군자君子가 있지 않으면, 그 어찌 나라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 『삼국사기』 김부식의 평가


    태왕의 후예들


    장수태왕長壽太王
    광개토태왕의 뒤를 이은 이는 태자 거련巨連으로 바로 제20세 장수홍제호태열제長壽弘濟好太烈帝, 즉 장수태왕입니다.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하고, 선황의 뜻을 받아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려 지금의 요양인 평양으로 천도하고, 백제 개로왕을 잡아 죽이는 등 영토를 넓히고 개척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지금의 금강인 웅진강熊津江 이북이 고구려에 귀속되었으며, 북연北燕과 거란 북쪽에 있던 몽골족의 한 갈래인 실위室韋 등 여러 나라가 다 같이 입조하여 우리의 형제 족속(서족叙族)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왕을 매금寐錦이라 하고, 백제 왕인 어하라와 함께 남평양에서 만나 공물 바치는 일과 국경에 주둔시킬 병사의 숫자를 약정하였습니다. 장수태왕은 413년에 즉위하여 491년까지 79년 동안 통치하였으며, 5세기의 동아시아 질서는 고구려가 주도하였습니다.

    문자명열제文咨明烈帝
    장수태왕의 뒤를 이은 이는 그 손자인 제21세 태왕 문자호태열제文咨好太烈帝로 연호는 명치明治였습니다. 명치 11년에 제, 노, 오, 월의 땅을 귀속시키며 영토를 점점 넓혀 나갔습니다.

    불안한 고구려 후기 왕실사와 대대로大對盧라는 관직


    강력한 황권과 카리스마를 지닌 광개토태왕과 장수태왕의 치세를 지나면서, 고구려의 후기 왕실은 제22세 안장제安藏帝부터 귀족들의 반발로 혼란했습니다. 551년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은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면서 한강 유역을 획득하였습니다. 신라 흥기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거기에 안장제는 『일본서기』에 따르면 시해를 당했다고 나옵니다. 안장제의 뒤를 이은 제23세 태왕 안원제安原帝 때는 유달리 천재지변이 많았습니다.

    이 안원제의 즉위를 두고 녹군鹿群과 세군細群이라는 귀족들 간의 내부 전쟁이 있었다고 『일본서기』의 「백제본기」 인용 기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왜곡된 기사가 많은 『일본서기』이지만, 자국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이 기사는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도 이때 고구려 황실과 내부는 크게 혼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귀족들은 상호 연립 정권을 수립하는 선에서 휴전하게 되는데, 이때 나타난 관직이 바로 대대로大對盧입니다. 대대로는 국사國事를 총괄하는 국정 최고 관직으로, 그 선임권은 태왕이 아니라 귀족들에게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글의 주인공인 을지문덕은 이 대대로였거나 이에 버금가는 중요한 인물이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평원제의 열린 정책으로 다시 일어서는 고구려


    6세기 중반 들어서 고구려의 황권이 급속히 약화되고 귀족들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면서 고구려의 국력은 급속히 약화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고구려 제25세 평강상호태열제平岡上好太烈帝가 즉위하게 됩니다. 평원제平原帝로 불리는 이분은 담력이 크고 말을 잘 타고 활쏘기를 잘하여 고추모성제의 기풍이 있었다고 합니다. 연호를 대덕大德으로 하였으며, 정치와 교화에 매우 밝아 내정이 안정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평원제는 즉위 이듬해인 560년 시조묘始祖廟에 제사를 지내며 그간 왕권에 도전할 만큼 성장한 귀족들에게 경고를 하였습니다. 대덕 7년(565년) 정월에는 맏아들을 태자로 책립함으로써 왕권 강화와 함께 태자의 지위를 확고히 해 두었습니다.

    열린 정책으로 인재를 등용하다
    평원제의 여러 치적 가운데 가장 눈여겨볼 부분은 재야에 묻혀 있던 여러 인재들을 적극 영입한 일입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바보 온달溫達’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자주 울어 부황에게 놀림을 받은 평강공주가 제 발로 온달을 찾아갔다고 하지만 이는 전설일 뿐입니다. 본래 평강공주는 상부上部의 고씨高氏 집안에 시집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를 거역하고 온달을 찾아가 부부의 연을 맺을 정도로 신흥 무장 집단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훗날 수나라 및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을지문덕이나 강이식, 연개소문, 안시성주 양만춘 같은 명장이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열어 준 이가 평원제입니다.

    급변하는 중원의 정세와 평원제


    대덕 18년(576년)에 북주의 무제가 고구려를 침략하자, 평원제는 바보 온달로 유명한 대장 온달을 거느리고 출전해서 갈석산과 배찰산을 치고, 추격을 벌여 지금의 섬서성 유림에 있는 유림관楡林關에 이르러 북주北周를 대파하였습니다.

    북주는 선비족의 한 갈래인 우문씨宇文氏가 북위에서 갈라진 서위西魏를 빼앗아 세운 나라입니다. 이 북주의 외척 양견이 대덕 23년인 581년 수隋나라를 건국하였습니다. 평원제는 전통적인 이이제이夷以制夷 외교정책으로 중원의 남북조 분열을 이용해 고구려의 위상을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던 대덕 31년 드디어 수나라가 진陳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하는 일대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평원제는 중원 대륙 통일이 고구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전쟁의 조짐으로,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면전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량을 비축하여 방어할 계획을 세우던 평원제는 대덕 32년(590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수나라 두 황제를 물리친 명군 영양태왕의 치세


    수隋의 침략 야욕이 드러날 즈음 제26세 고구려 태왕으로 즉위한 인물은 평원제의 맏아들인 영양무원호태열제嬰陽武元好太烈帝, 즉 영양태왕입니다. 영양태왕의 휘는 원元 또는 대원大元으로 평양제平陽帝라고도 하였으며, 연호는 홍무弘武입니다. 풍채와 정신이 뛰어나고 호쾌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제세안민濟世安民)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고 합니다.

    영양태왕의 대내 치적
    영양태왕 때에는 천하가 잘 다스려져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번성하였습니다. 또한 황권도 강화되어 중원을 통일한 강력한 수제국과의 전쟁을 총지휘하였으며, 을지문덕과 강이식, 연태조 등이 활약할 수 있도록 한 위대한 열제가 영양태왕입니다. 우리는 이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안정된 국력을 바탕으로 수 문제의 1차 공격을 격퇴한 홍무 11년(600년)에는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으로 하여금 종래 역사서인 『유기留記』 100권을 간추려 『신집新集』 5권으로 정리해 펴내도록 하였습니다.

    영양태왕의 대외 관계
    다원적인 축에 의해 유지되어 온 6세기 무렵 동아시아 국제 질서는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하면서 고구려와 수나라 간의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화전和戰 양면에 걸쳐서 노력하던 영양태왕은 홍무 9년(598년)에 말갈 군사를 이끌고 요서遼西 지역을 선제공격하였습니다. 4차례에 걸친 고구려와 수나라의 거대한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밖에도 매제인 장군 온달로 하여금 아단성阿旦城을 공격하게 하고, 거듭 서울 지역을 공략하였습니다. 왜倭와도 활발히 교류하여 595년에 일본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된 혜자惠慈를 보내주었고, 610년에는 담징曇徵과 법정法定 등을 파견하는 등 일본에 많은 문화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제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와 고구려가 격돌하게 되는 경과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400년 만에 중원을 통일한 신생 제국 수나라의 도발


    589년 중국 남조 시대의 마지막 왕조인 진陳을 멸망시켜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제압한 수隋나라 문제文帝(양견楊堅)는 후한이 위·촉·오 삼국으로 나뉜 220년을 기준으로 삼으면 360여 년 만에 중원을 통일하였습니다. 수나라는 고구려와 언어가 통했다는 선비족이 주도해 세운 나라로, 중원의 새로운 천자로 등극하면서 동북아의 강자이자 시조 추모성제를 ‘천제지자’라고 표현한 고구려와 일전이 불가피하였습니다.

    개국한 지 17년의 세월 동안 수나라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크게 안정된 상태였으므로 이러한 치세를 수 문제의 연호를 따서 ‘개황開皇의 치治’라고 하였습니다. 후대인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정관貞觀의 치’와 비견되기는 하지만, 이때가 영토 및 인구수와 물자가 더 풍부했다고 합니다. 해마다 풍년이 들어 국고가 넉넉해지고, 흐트러졌던 민심도 안정돼 갔으며 주변국들을 차례로 복속시키는 데 성공한 수 문제의 관심은 마침내 동아시아 최강자 고구려로 향했습니다.

    597년 수 문제는 고구려 영양태왕 앞으로 한 통의 서신을 보냈습니다.

    “왕이 남의 신하가 되었으면 모름지기 짐과 덕을 같이 베풀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말갈을 못 견디게 괴롭히고 거란을 금고禁錮시켰소. 그때 사자를 보내어 그대 번국을 위무한 것은 본래 그대들의 인정을 살펴보고, 정치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자 함이었소. 그런데 왕은 사자를 빈 객관에 앉혀 놓고 삼엄한 경계를 펴며, 눈과 귀를 막아 영영 듣고 보지도 못하게 하였소. 무슨 음흉한 계획이 있기에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관원을 금제하면서까지 방찰을 두려워하오? 또 종종 기마병을 보내어 변경 사람을 살해하고, 여러 차례 간계를 부려 사설邪說을 지어내었으니, 신하로서의 마음가짐이 아니었소.

    왕은 요수遼水의 폭이 장강과 어떠하며, 고[구]려의 인중人衆이 진국陳國과 어떠하다고 보고 있소? 짐이 만약 포용하여 길러 주려는 생각을 버리고 왕의 지난날의 허물을 문책하고자 하면 한 명의 장수로도 족하지 무슨 많은 힘이 필요하겠소! 간절히 깨우쳐 주어 개과천선할 기회를 허락하노니, 마땅히 짐의 뜻을 알아서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기 바라오.”
    - 『수서』 「동이열전」 고구려


    말갈을 괴롭히고 거란을 금고시켰다는 구절은 말갈과 거란이 고구려의 제후국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중국과 조선은 고대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으로서 충돌이 없는 때는 피차 내부에 분열이 있어서 내부의 통일에 바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서신 하나로 협박을 하면서 고구려를 얕잡아 보고 호언장담하는 수 문제의 야심에 맞서 일갈하는 한 장수가 있었습니다.

    제1차 고수 전쟁의 영웅, 병마도원수 강이식姜以式


    수 문제의 국서를 놓고 영양태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 의견을 물었습니다. 이때 장수 강이식姜以式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따위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화답할 게 아니라, 칼로써 화답하는 게 옳을 것입니다!”

    영양태왕은 즉각적인 개전을 주장하는 강이식의 용맹을 높이 치하하며 선제공격을 명하였습니다.

    강이식은 태어난 때와 사망한 때를 알 수 없지만, 수나라와의 전쟁에 병마원수兵馬元帥로서 정병 5만 명을 이끌고 참전하였습니다. 이듬해(598년)에 대병력을 이끌고 요서遼西에서 수나라 요서총관 위충韋沖과 교전한 뒤, 임유관臨楡關으로 거짓 후퇴를 하였다가 다시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수나라 수군총관 주라후周羅喉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개선하였습니다.

    우리나라 명문 거족인 진주 강씨 족보에는 진주 강씨의 시조를 강이식으로 전하며 그 행적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단재 신채호 역시 『조선상고사』에서 현재는 남아 있지 않는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 등의 기록을 인용하여 강이식은 임유관 전투 등에서 승전을 이뤄 내어 1차 고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라고 하였습니다.

    “《대동운해大東韻海》에는 강이식을 살수 전쟁 때의 병마도원수라 하였고, 《서곽잡록西郭雜錄》에는 강이식을 임유관 전쟁의 병마원수라고 하여 두 책의 기록이 같지 않다. 그러나 살수 전쟁에는 왕의 아우 건무(후의 영류제)가 해안을 맡고 을지문덕이 육지를 맡았으니 어찌 병마도원수 강이식이 있었으랴? 그러므로 《서곽잡록西郭雜錄》의 기록을 좇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기록이 다 맞으며, 실제 살수대첩 때는 영양태왕의 명령을 받아 전군을 지휘한 총사령관은 을지문덕이고, 요동성을 중심으로 한 요동 전역에서 수 양제가 지휘하는 수나라 본군을 발목 잡은 고구려 육군 지휘관은 강이식, 수나라 수군을 유인 섬멸한 고구려 해군 지휘관은 훗날 영류제가 되는 건무 황제皇弟가 맡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는 다음 회에 좀 더 부연해서 서술하겠습니다.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강이식의 묘역은 지금의 만주 펑지현奉吉縣인 심양현瀋陽縣 원수림元帥林에 있었다고 합니다. 경상남도 진주시 비봉산飛鳳山 자락에 있는 봉산사鳳山祠에서는 해마다 음력 3월 10일에 강이식 장군을 진주 강씨 시조로 제향하고 있습니다. 본관이 진주인 이유는 그 후손인 진縉이 후신라(통일신라) 시대에 진양후晉陽候로 봉해진 데서 유래합니다.

    수나라와 첫 번째 격돌하다.


    수 문제의 모욕적인 국서가 온 이듬해 고구려 영양태왕은 친히 말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요서 지방을 선제공격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거란의 군사 수천 명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가 지금의 산동 지역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지휘관은 연개소문의 아버지인 서부대인西部大人 연태조淵太祚였습니니다.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는 이 당시 “서부대인 연태조를 보내어 등주를 토벌하고 총관 위충을 사로잡아 죽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공격은 고구려의 휘하에 말갈과 거란이 있음을 공개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었습니다. 대규모 침공이 아니라고 해도 일단 치고 빠지면서, 기선을 제압함과 동시에 나라 전체를 태왕 중심의 전시체제로 재편하였던 것 같습니다.

    토벌 진격 당시 임유관臨楡關에는 수나라의 위충이라는 장수가 지키고 있어 고구려의 침략을 막아 냈다고 하지만, 이 공격으로 인해 임유관 일대가 초토화되었고 그때 활약한 인물이 강이식 도원수였습니다. 임유관의 위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당시에는 허베이성河北省 무녕현撫寧縣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진황도시 무녕현에서 조금 서쪽이 낙랑군 조선현이 있던 노룡이고, 그 남쪽이 갈석산이 있는 창려현昌黎縣으로서 고대부터 중원과 단군조선의 국경 지역이었습니다. 당시 요동이나 요서는 지금의 허베이성 일대입니다.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지역이 아닙니다.

    선제공격으로 임유관 일대가 초토화 되면서 수나라는 임유관 후방에서 출병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고구려의 전략적 목표는 달성되었고, 철저하게 준비하며 기다리는 고구려라는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수의 30만 대군은 순한 먹이처럼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장마와 폭풍으로 30만 대군이 괴멸하다?
    - 패전의 기록을 지우다.


    598년 고구려의 선제공격에 분노한 수 문제는 넷째 아들 한왕漢王 양량楊諒과 강남의 진陳나라 평정에 공을 세운 왕세적王世積에게 육군과 수군 30만 군사를 주어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영양태왕 9년에 벌어진 제1차 고수高隋대전, 임유관臨楡關대첩입니다.

    기세 좋게 출병한 수나라 30만 대군은 죽은 자가 10명 중에 8~9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처절한 패배를 당했습니다. 전쟁의 경과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패배 이유를 육군은 장마를 만나 군량의 수송이 끊어지고 전염병이 돌았기 때문이며, 수군은 폭풍을 만나 병선兵船을 많이 잃어버려서 철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양태왕은 수의 침략을 두려워해서 사신을 보내 사죄하는 표문을 올렸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수나라의 처참한 패전을 감추기 위한 왜곡 날조의 기록입니다.

    제1차 고수대전, 임유관대첩의 진실


    제1차 고수대전의 진실은 이렇습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친 고구려 영양태왕의 작전에 말려들어 수나라 30만 대군은 전멸하였습니다.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는 이때의 전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견이 또다시 양량, 왕세적 등 30만 명을 보내 전쟁할 때, 겨우 정주定州를 출발하여 요택에 이르기도 전에 물난리를 만나 군량 수송이 끊기고 유행병이 크게 번졌다. 주라구周羅緱가 병력을 동원하여 등주登州를 점거하고, 전함 수백 척을 징집하여 동래東萊에서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향하다가 아군에게 발각되었다. 주라구가 후진後陣을 맡아 막으면서 전진하다가, 문득 큰바람을 만나 전군이 표류하다 빠져 죽었다. 이때 백제가 수나라 군대에게 길을 인도해 주겠다고 제의하였으나, 고구려에서 은밀히 타이르자 실행하지 못하였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요서를 공략하던 앞선 말갈의 군사들이 요서총관 위충과 접전을 벌이다 거짓으로 패한 척하며 임유관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임유관 일대를 초토화시켰습니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수 문제는 양양과 왕세적에게 30만 대군을 보내 그들을 뒤쫓게 하는데 여기에 수군총관 주라구의 군대까지 따라붙게 하였습니다.

    주라구는 일부러 거짓말을 퍼뜨려 군대를 평양으로 몰아가는 척 수를 쓰다가 양양의 군대에 보급품을 대 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강이식 도원수의 군대는 바로 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주라구의 군대를 격파시켰습니다. 주라구의 군대를 무너뜨린 뒤 강이식 장군은 성책을 굳건히 지키되, 별도의 영이 내려질 때까지는 절대로 나아가 싸우지 말게 하였습니다.

    양양이 거느린 수나라의 주력 군대를 상대하기 위한 다음 작전은 ‘싸우지 않고 힘 빼기’였습니다. 고구려군은 성城안 깊숙이 진을 치고 들어앉아 수비에만 집중하는 전략을 썼습니다. 아마도 이때 조의선인들이 후방에서 교란과 함께 수군의 보급로를 끊는 활동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양양이 이끄는 수나라 대군은 요하 하류인 요택遼澤에서 포위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요택은 『환단고기』에 따르면 “황하 북류 동쪽”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훗날 당 태종이 이끄는 당군唐軍이 괴멸을 당한 곳입니다.

    보급로는 끊긴 데다가 장마철에 전염병까지 도는 바람에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가 된 수나라 진영에서는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 가는 병사들이 속출하자, 퇴각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때를 기다리던 강이식 장군 휘하 고구려군은 그들을 뒤쫓아 가서 완전히 섬멸하고 위풍당당하게 도성으로 개선하였던 것입니다.

    전쟁의 영향과 폭군 등장


    고수대전의 승리는 고구려가 힘으로도 천자의 제국임을 다시 입증한 것입니다. 승전 2년 후 영양태왕은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역사서인 『신집新集』 5권을 편찬하게 하였습니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수 문제의 대패는 수나라 정세에도 소용돌이를 몰고 왔습니다. 이 전쟁으로 큰 봉변을 당한 수 문제는 두 번 다시 고구려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혼란의 남북조 시대를 수습하고, 중원을 재통일하며 강력한 리더십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수 문제 양견楊堅의 말년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공처가恐妻家였던 그는 북조의 명문가 태생인 독고황후의 도움으로 황제가 되었습니다. 독고황후는 대가 센 여성으로 황제인 남편의 여자관계에 대한 간섭도 유별났습니다. 그래서 수 문제는 독고황후가 죽을 때까지 후궁을 두지 못했다가, 황후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후궁들 치마폭에서 벗어날 줄 몰랐습니다. 방탕한 생활로 수 문제는 중병에 걸렸습니다. 이때 아비의 후궁인 진 부인을 탐낸 태자 양광楊廣이 문제를 살해하고 604년에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수나라 제2세 황제인 양제煬帝입니다.

    이에 반발한 동생 양량이 양제 타도를 내걸고 거병했으나 양제의 측근 양소楊素에게 진압당했습니다. 아비를 죽인 패륜아라는 오점을 벗고 조정 내 반발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수 양제는 뭔가 보여 줄 게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낙양에 새 궁궐을 짓고, 토욕혼과 서돌궐을 복속시키고 통주에서 항주까지 3백 리에 이르는 대운하를 만들었으며, 만리장성을 수축하면서 권력을 다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구려를 무너뜨려야 수나라가 진정한 천자의 제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침략의 명분을 찾던 수 양제는 동돌궐과 신라에 대한 영향력 다툼에서 밀리자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하였습니다. 20세기 초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100만 대군이 실제 동원된 사상 최대의 원정군이었습니다. 고구려는 또다시 위기에 빠졌습니다.


    <참고문헌>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조선상고사』(신채호, 비봉출판사, 2006)
    『이덕일의 한국통사』(이덕일, 다산북스, 2020)




    수隋제국 약사
    수隋나라는 4세기 동안 남북이 갈라져 각각 다르게 발전하던 중원을 통일한 왕조로 581년에서 618년까지 존속하였습니다. 수 양제가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에게 피살당하고 수 제국이 멸망하는 해인 618년에 고구려의 영양태왕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수의 초대 황제는 선비족 출신으로 북주北周(557~581)에서 상국相國이라는 고관을 지낸 양견楊堅으로 시호는 문제文帝입니다. 북주가 음모와 살해의 소용돌이 속에서 분열되자 권좌를 차지하고 북중국을 확고히 장악하였고, 580년 말경에 남서부를 차지하여 중국을 통일하였습니다. 수도는 장안長安에 두었고, 비록 단명하기는 했지만 문예 부흥과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이런 기운으로 수 제국은 최고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습니다.

    수나라는 네 차례에 걸쳐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으나 모두 실패하였고, 제2세 양제煬帝의 치세는 대운하의 공역과 반란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양제가 살해되고 뒤를 이은 공제恭帝는 1년도 채 다스리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을지문덕의 호쾌한 심법 세계 - 도통의 요체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는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심법 세계에 대해 언급한 구절이 있습니다. 을지문덕은 신교를 대각한 인물로 다음과 같이 도통道通의 요체要諦를 말하였습니다. 살수대첩으로 잘 알려진 제2차 고수대전의 주인공 을지문덕을 다루기 전에 그가 남긴 글을 음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도로써 천신(삼신상제님)을 섬기고, 덕으로써 백성과 나라를 감싸 보호하라. 나는 천하에 이런 말이 있다는 것을 안다.

    사람이 삼신일체의 기운[氣]을 받을 때, 성품[性]과 목숨[命]과 정기[精]로 나누어 받나니, 우리 몸속에 본래 있는 조화의 대광명은 환히 빛나 고요히 있다가 때가 되면 감응하고, 이 조화의 대광명이 발현되면 도道를 통한다.

    도를 통하는 것은, 삼물三物인 덕德과 지혜[慧]과 조화력[力]을 몸으로 직접 체득하여 실천하고, 삼가三家인 마음[心]과 기운[氣]과 몸[身]의 조화를 성취하며, 삼도三途인 느낌[感]과 호흡[息]과 감촉[觸]이 언제나 기쁨으로 충만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도를 통하는 요체는 날마다 염표문念標文을 생각하여 실천하기에 힘쓰고,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 다스려 깨우쳐서[在世理化], 삼도三途 십팔경十八境을 고요히 잘 닦아[靜修境途, 이는 『삼일신고』 제5장 인물에 나오는 말] 천지광명(환단)의 뜻과 대이상을 지상에 성취하는 홍익인간이 되는 데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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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12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