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와 임나의 진실을 밝힌다(2)

[종도사님 말씀]
도기 148. 12. 7(금), 2018년 세계환단학회 추계학술대회, 부경대학교 대학극장

4. 임나일본부를 둘 수 없었던 문화적 증거


임나일본부를 내세운 침략역사관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그것은 백제라는 친정집이 망하고 나서 기록된 『일본서기』에서 비롯됩니다. 『일본서기』를 보면, 대륙과 전혀 관계없이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천조대신)의 손자 니니기(황조신)로부터 신무神武로 해서 만세일계萬世一系로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찍부터 한반도 남부로 가서 무릎을 꿇리고 지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왜곡된 기록이 침략사관이 돼서 얼마나 많은 우리 조선의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며 참혹한 피의 역사를 만들었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일본서기』, 『대일본사』에서 그런 왜곡된 사관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후 구로이타 가쓰미黒板勝美,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등이 주장한 임나일본부설을 스에마스 야스카즈末松保和가 총정리해서 1949년에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를 발간했습니다. 그런데 임나일본부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엉터리 주장을 추종하고 발전시키는 강단사학자, 식민사학자들이 이 땅에 멀쩡히 살아 있습니다.

대마도는 여기 부산에서 한 50km 떨어져 있고, 배를 타고 가면 한 시간 정도 걸립니다. 요새 쾌속정 타고 가면 30분도 안 걸릴 텐데요.

그런데 과연 일본의 주장대로, 일본이 대마도를 거쳐서 가야 땅을 정벌할 수 있었는가? 가야가 살아 있었을 때 일본이 배를 타고 쳐들어와서 막강한 백제, 신라, 가야를 무릎 꿇릴 수가 있었는가?

임나일본부설이 말이 안 된다는 세 가지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당시 일본은 해상 수송 능력이 없었습니다. 일본의 기록을 보면 657년에 일본 승려들과 사신들이 신라의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가려 했으나 승선을 거절당해서 가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또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는 신라 선주들이 승선을 거부해서 귀국하지 못한 사태도 벌어졌습니다. 839년에는 당에서 일본으로 돌아오는 선원이 부실한 일본 배에 타기를 거부했습니다. 자기 나라 배를 타면 빠져 죽기 십상이라고 거부한 겁니다. 그래서 신라 배를 타고 귀국합니다. 최재석崔在錫 같은 분은 백제가 망할 때 일본의 제명여왕齊明女王이 백제 부흥군에게 백여 척의 대선단을 지원해서 금강 하류에서 전쟁을 했다는 내용도 전부 조작된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둘째는 의복 문제입니다. 15세 응신왕이 입던 복식을 보면 모든 걸 말해 줍니다. 바느질, 침선針線 기술도 제대로 없었다는 겁니다.

그다음은 왕궁을 보면 압니다. 말로국, 이도국, 왜노국의 현지 왕의 주거지를 보면 그냥 입이 다물어지고 맙니다.

왕궁을 지을 때 맨땅에다 기둥을 박아서 허름하게 2층으로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7세기 말이 되어서야 초석입주礎石立柱라 해서 주춧돌을 바닥에다 놓고서 기둥을 올렸습니다. 이 사진은 690년경에 지은 등원궁藤原宮(후지와라 신궁)이 있었던 곳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정벌은 고사하고 일본열도를 다스릴 국력과 권위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삐뚤어진 일본의 황국사관, 침략사관에 의해서 너무도 많은 역사의 희생을 치렀습니다. 임진년 조일전쟁뿐 아니라, 근래 명치유신 이후로 약 천만 명의 조선 동포들이 죽임을 당하고 역사의 뿌리, 시원 역사가 송두리째 말살됐습니다. 이 어둠의 역사에서 우리 모두가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고 진정으로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본론 2. 가야와 임나의 인류 원형 소도제천 문화


1. 가야 제국의 역사문화와 유물


1) 삼성조 시대 가야 지역의 역사문화 유물
본론 2로 넘어가서 가야와 임나의 인류 원형 소도제천 문화, 가야와 임나의 문화 원류정신을 전체 문화사 측면에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가야 땅에는 일찍이 2~3만 년 전 구석기 문화유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만 년 전 이후 환국 시대의 신석기 문화와, 배달^단군조선의 역사문화와 관련된 여러 가지 유물이 나옵니다.

1987년 7월 대마도의 오자키 유적지에서 5백여 점의 토기 파편이 나왔는데, 일본 벳푸 대학 고고학 팀이 분석해서 모두 9천 년 전에 한반도에서만 만들어진 융기문隆起文과 세침선문細沈線文 토기임을 확인했습니다. 고고학적으로 7천 년 전에 한반도에서 대마도로 건너가 살았다는 도항정주기渡航定住期의 정설이 9천 년 전까지 올라간 겁니다.
1)

1) 박영만, 『동방의 태양 한민족』, 16~17쪽


신석기 시대 7,700년 전의 배와 노는 단순한 형태이지만 이것은 한반도 위쪽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낚싯바늘, 발찌 같은 것은 지금 화면에 선명하게 나오는데 참 아름답습니다. 청동기 유물인 간돌칼은 현지에 가서 보면 작품성이 아주 뛰어납니다.

2. 가야 제국의 초기, 중기, 후기 역사와 유물


1) 가야사 개요

2) 가야 제국의 유물
가야의 유물들, 장식품을 보면 철을 녹이는 1,300도 온도에서 가공한 유리로 만들어진 여러 가지 장식 예술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방패 장식으로 사용된 파형동기巴形銅器와 3단, 4단으로 된 귀걸이 양식을 보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어떤 교수님은 연구실에 아름다운 귀걸이 한 쌍을 걸어 놓고 그 사진을 자기 서책에 실었는데 너무도 보기 좋았습니다.

3) 가야 문화 속의 유목문화 특성
가야의 문화 정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북방 대륙 유목문화의 특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북방 유목문화의 중심에 있는 흉노, 훈족의 문화 상징은 첫째로 동복銅鍑(청동 솥단지)인데요. 경주, 가야에서 나온 동복은 그 조상들이 살았던 황하의 오르도스 지역의 동복과 거의 비슷합니다.


또 순장제도가 같고, 천자를 상징하는 왕관은 소도제천 문화 양식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기마 무사단과 비슷한 막강한 무사들의 갑옷이 있습니다.

4) 가야 문화의 일본 전수
가야 문화가 구주九州(규슈)로 넘어갔기 때문에 지금 일본에는 가야 지명과 닮은 지명이 아주 많습니다. 일본에는 백제, 신라, 고구려의 문화보다 가야 문화가 훨씬 더 넓게 그 저층에 깔려 있습니다. 가야 문화를 토대로 백제, 신라, 고구려 문화가 녹아 있고 그 이전의 배달 단군조선의 문화도 저층에 깔려 있단 말입니다.


3. 가야 대왕국의 인류 원형문화, 소도제천 문화 성지


1) 구지봉
가야 대왕국은 인류 원형문화, 소도제천 문화의 성지인 구지봉龜旨峰을 중심을 해서 어떤 문화양식을 뿌리내렸는가? 우리가 김해를 가면 김수로왕 왕릉 뒤에 허황후 능이 있고, 그 왼쪽으로 구지봉이 있거든요.

구지봉은 청년이 몇 걸음 뛰면 올라갈 것 같은 낮은 동산이지만 고인돌 양식의 제천석이 있습니다. 거기는 거북이 고개를 내밀고 물을 찾는 형국입니다. 그곳에 터널이 뚫려 있는데 예전에는 그 위가 도로였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산의 맥을 끊으려고 도로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김해에서 인물이 안 나온다고 그 도로를 덮고 대신 터널을 뚫었고 그때부터 김해에서 김해 김가 인물이 나온다고 거기서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2) 가야산과 우두산
그런데 가야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 성산은 어디인가? 스사노오素戔嗚尊가 소시모리에 살다가 이즈모出雲로 건너가서 평정하고 후에 니니기邇邇芸命에게 이양했는데, 니니기의 증손자인 신무神武(진무)왕이 바로 일본의 초대 왕이라 합니다. 소머리산에 대한 세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는 일본학자 가나자와 쇼자부로金澤庄三郎가 주장한 설인데 소머리산은 경주 근처 소호리蘇湖里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춘천 우두산牛頭山을 말하는데 지역 주민들이 ‘옛날에 여기가 소머리 나라’라는 말을 합니다. 일본 신사파들이 주장하는 겁니다.

셋째로 세상 사람들이 잘 안 가는 거창군 가조면의 우두산牛頭山입니다. 합천 가야산(높이 1,430m) 아래에 약 1,000m 되는 우두산이 있어요. 가야의 중심 성산 우두산에는 일본을 건국한 황조신皇祖神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본의 여자 태양신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이 남동생 스사노오素戔嗚尊와 싸우고서 보기 싫다고 동굴에 숨었는데, 고천원高天原의 신들이 당집에서 닭 모가지를 비틀어 울게 하여 동굴에서 뛰쳐나오게 했다는 겁니다.

예전에 거기(우두산)가 왕궁터였다는 흔적이 있습니다. 장군봉 아래에 있는 왕궁터가 궁배미(宮城址)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그걸 조사해서 알고는 지기地氣 맥을 끊기 위해 땅을 파서 저수지(소류지)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저수지가 지금도 그대로 있어요. 저 전봇대 서 있는 중앙이 왕궁터의 중심이었다고 합니다.


전체 왕궁터 넓은 땅을 지금도 ‘고만리’라 합니다. 높을 고高 자를 써서 고만리高萬里 또는 옛 고古 자를 써서 고만리古萬里라 합니다. 그게 일본 역사에서 말하는 고천원高天原입니다. 자신들의 왕국, 일본 나라를 최초로 세운 신무왕의 조상 니니기가 출발한 하늘의 땅 고천원입니다.
2)

2) 고천원이 바로 대가야국이 있었던 그 땅(거창군 가조면)이라는 말을 합니다. 고천원은 일본에서 국조신으로 받드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그의 남동생 스사노오노미코토를 낳은 부모 신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신을 비롯한 신대神代 7대의 신들이 살았던 곳이다. 일본 천왕가의 원적지, 고향이 되는 곳이다.


3) 『환단고기』가 전하는 일본 왕실의 기원
『환단고기』는 여기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단군조선에는 1세 시조 단군으로부터 마흔일곱 분의 단군이 있었습니다. 3세 가륵 단군 때 두지주豆只州의 예읍濊邑에 있던 소시모리素尸毛犂라는 자가 배반해서 참수를 당했는데 그 후손 협야노陜野奴가 일본에 가서 왕을 참칭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35세 사벌 단군 조를 보면 언파불합彦波弗哈이라는 장군을 쿠마소, 지금의 웅습熊襲으로 보내서 정벌했고, 그다음 36세 매륵 단군 때는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幋命을 보내서 일본 삼도三島(규슈九州, 혼슈本州, 시코쿠四國)를 평정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여기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어쩌면 더 정확할 수가 있습니다. 35세 단군 때 언파불합이 36세 단군 때의 협야후(일본의 1세 신무神武왕)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언파불합과 협야후가 부자지간이라는 겁니다. 『일본서기』에는 초대 신무神武왕의 젊을 때 이름이 ‘협야’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때요? 『환단고기』하고 똑같죠? 『환단고기』에 박수를 칠 만합니다. (박수)

본론3. 가야문화의 중심 주제, 천지 소도제천 문화의 뿌리


1. 김일제와 한무제


이제 가야문화의 주제, 천지 소도제천 문화의 뿌리를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흉노의 왕자인 김일제金日磾가 동생 김윤金胤과 함께, 그 후손들과 더불어 어머니 땅의 정신이 두드러지는 변한에 가야를 세웠다는 겁니다.


1) 김일제는 어떤 인물인가
김일제를 알려면 김일제가 모신 주군 한무제漢武帝를 같이 알아야 합니다. 진시황의 진秦나라 다음에 한漢나라가 열렸는데 진나라(BCE 221~BCE 206)는 십여 년 만에 망해 버렸습니다. 중국 민족은 진나라를 자기들의 정통 문화역사로 내세우기에 부족하다고 여기고 한고조漢高祖가 세운 한나라를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족漢族’이라 합니다.

김일제는 흉노족 휴도왕休屠王의 아들인데 BCE 121년 한무제가 흉노를 공략하던 때에 그 어머니 알씨閼氏와 동생 김윤도 같이 잡혀 왔습니다. 5천 년 중국사에서 가장 강력한 한무제는 한고조 유방劉邦의 증손자로서 7세 황제였습니다. 김일제는 황제의 말을 돌보는 마부 일을 했는데 어느 날 한무제가 시찰을 나왔습니다. 다른 마부는 모두 한무제 곁의 궁녀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김일제는 아주 엄숙하게 앞만 바라보며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한무제는 ‘김일제가 휴도왕의 아들이고 왕손’인 데다 품위 있는 자태가 마음에 들어서 말을 기르는 총책임자 마감馬監 자리를 줍니다.

김일제는 키가 190cm가 넘고 용모가 아주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알씨가 강력하게 품격 있는 왕손 교육을 했습니다. 김일제는 아들 셋을 뒀는데 큰아들이 궁녀를 희롱하는 걸 보고 그 음란한 행위를 미워하여 ‘너 때문에 잘못하면 우리 집안이 멸족을 당한다’고 하며 죽여 버렸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한무제가 더 신임을 한 겁니다.

2) 한무제는 어떤 인물인가
한무제(BCE 156~BCE 87)는 중국 역사상, 인류 역사상 어떤 인물인가?

『한서』라든지 사마천의 『사기』 「봉선서」를 보면, 한무제가 천제를 올린 예식이 있잖아요. 그걸 체계적으로 조용할 때 들여다보면서 여러 종교 문화 예컨대 유대교 구약성경, 인도의 유명한 베다 경전에 나오는 숱한 신들을 찬양하는 노래와 비교해 보면, 한무제는 인류 역사 속에서 어떤 인물인지 나름대로 최종적으로 판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

① 중국사 제1의 제사왕, 한무제
한무제가 16세 때인 BCE 141년에 즉위하고 나서 제일 먼저 시작한 게 무엇인가? 두드러진 것은 어떤 종교 예식, 특히 신을 섬기는 예식을 자주 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매우 즐겨서 한 겁니다.

36세 되던 해에는 감천궁甘泉宮을 확장합니다. 감천궁은 원래 흉노족이 천지의 거룩한 신들, 가장 높으신 텡그리신 하나님에게 제를 올리는 제천단이 있던 성지인데 진나라가 그걸 뺏어 버립니다. 그 감천궁의 천지 제사 문화의 비밀을 전수받고 깨달은 한무제가 제천에 더 욕심을 낸 겁니다.

한무제는 45세 때 우주의 궁극의 신, 태일신太一神에 제사를 지냅니다. 그리고 47세 때는 감천궁에서 태을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태산에 가서 봉선제封禪祭를 지냅니다. 그리고 강태공이 동방의 신교 삼신문화를 확장해서 산동성에 팔신제八神祭라는 축제를 만들었는데 흥미롭게도 한무제가 팔신제를 지냈습니다. 팔신제를 지내려면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산동성을 답사해 보니 천주天主, 지주地主 등 신위를 모신 신전이 다 떨어져 있어서 몇 시간씩 가야 됩니다.

한무제는 51세(BCE 106년) 때에 명산대천에 사당을 짓고 태산에 제단을 더 높이 쌓았습니다. 또 명당明堂에서 한나라 고조 제사도 지내는데, 증조부인 한고조 유방과 상제님(천지의 원原천주님) 위패를 같이 모시고 제를 지냈습니다. 이것은 동방에서는 전통이자 최상의 영광입니다.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 조상을 천주와 동급으로 모시고 제를 지내는 것은 유일신 문화에서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또 한무제는 중국 역사의 시조 황제헌원의 능에 가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한무제의 제사 문화에 대한 열정과 정성은 대단합니다. 어떤 때는 밤새워서 제를 지냅니다. 그리고 천주, 천신에 제를 지내고 나서 “내가 땅의 신, 지기신地祇神에게도 제를 지내야 되는데 그걸 못 했다.” 하고서 하동河東에 순행하여 후토신后土神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② 신선문화에 심취한 한무제
한무제는 동방의 신교문화에 대해서 나름대로 아는 것이 많았습니다. 동방의 태고의 신선문화, 노자 장자 이전의 신선문화에 대해 눈을 떠서 이소군李少君을 불러들여 양생술, 장생법을 배웠습니다. 한무제는 이소군을 떠받들어 살아 있는 신선으로 여겼고, 이소군이 죽자 신선이 되어 승천했을 것이라 생각하여 사당도 지어 줍니다.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을 불러오는데 그중에 제일 재미있는 자는 난대欒大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리고 술책을 써서 아는 소리를 하고, 정말로 이것저것을 잘 맞혔어요. 그래서 한무제가 오리장군五利將軍에 임명하고 한 달 내에 천사장군天士將軍, 지사장군地士將軍, 대통장군大通將軍의 자리를 주고 나중에는 천도장군天道將軍 자리까지 줍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거짓이 들통나자 주살해 버렸습니다.

한무제는 동방의 신선문화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 ‘아는 자가 있으면 데려오라’ 하고 수천 명 군사를 보내 신선을 찾게 합니다. 초기에 동방 신선 안기생安期生이 있다고 하자 데려오게 합니다. 또 무당을 좋아하고 용한 점쟁이가 있으면 데려오게 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도에 대해서, 동방 신선문화에 대해서 궁금한 점을 물었습니다. 무당들을 아주 후하게 대접하고, 죽으면 신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③ 태일신에게 천제를 지낸 한무제
한무제가 즉위한 지 7년 뒤인 23세 때(BCE 134년) 취화산翠華山에 태을사太乙祠를 세웠습니다. 한무제는 하늘과 땅과 인간에 대한 아주 숭고한 인류 원형 창세문화의 세계관, 신관, 인간관에 나름대로 정각正覺을 한 사람입니다.

유기謬忌라는 사람이 어느 날 한무제에게, 천제를 올리려면 반드시 ‘태일신에게 제를 올려야 된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이 “고대에 천자는 삼 년마다 한 차례 태뢰太牢로 삼일신三一神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바로 천일신天一神, 지일신地一神, 태일신太一神입니다.”라고 글을 올렸습니다. 그래서 궁궐 동남방에 태일신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올렸습니다.

亳人薄謬忌奏(박인박유기주)호대 祠太一方(사태일방)에 曰天神貴者太一(왈천신귀자태일)이오
太一佐曰五帝(태일좌왈오제)라
古者(고자)에 天子以春秋(천자이춘추)로 祭太一東南郊(제태일동남교)라 하니라.
其後人(기후인)이 有上書言(유상서언)호대
古者(고자)에 天子(천자)는 三年壹用太牢(삼년일용태뢰)로 祠神三一(사신삼일)하니 天一(천일)과 地一(지일)과 太一(태일)이라 하니
天子許之(천자허지)하야 令太祝領祠之於忌太一壇上(영태축령사지어기태일단상)하고 如其方(여기방)하니라

박현亳縣 사람 박유기薄謬忌가 태일신太一神에게 제사를 올리는 방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주했다. 천신 중 태일이 가장 존귀하고, 태일을 보좌하는 것은 오제五帝입니다. 고대에 천자는 매년 봄, 가을에 장안 동남쪽 교외에서 태일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 후 또 어떤 사람이 상서를 올려 이렇게 말했다. 고대에 천자는 삼 년마다 한차례 태뢰로 삼일신三一神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바로 천일신天一神, 지일신地一神, 태일신太一神입니다. 천자는 그의 상소문을 윤허하고, 태축에게 박유기가 상주하여 세운 태일신 제단 위에서 그가 상소한 방안에 따라 제사를 지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사기』 「봉선서封禪書」)


그리고 한무제는 흉노의 천지소도 제천 성지, 감천궁을 진나라로부터 계승해서 여기서 국사도 많이 보고 제를 올렸습니다.

취화산翠華山은 어떤 산인가? 취화산은 본래 태을산太乙山이라 불렸습니다. 현장을 가 보면 취화산의 거대하고 장중한 모습이 입구에서부터 보이는데 산을 올라가면 저기에 천지天池가 있고, 취선궁聚仙宮이 있습니다. 그 깊은 산속에 아주 잘생긴 바위가 우뚝 서 있는데 그것은 태을진인太乙眞人 바위입니다

그리고 올라갈 때 보면 태을관성太乙觀星이란 제목의 안내판이 있는데 ‘태을관성은 태을진인이 별자리를 관측하던 곳’이라 합니다.

9천 년 인류 원형문화, 유^불^선^기독교 모든 종교의 인류 황금시절 원형문화의 세계관, 우주관, 신관, 인간관의 중심 주제는 ‘하늘과 땅과 인간은 조물주와 동일한 신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아버지로, 땅은 어머니로, 인간은 천지의 영원한 아들과 딸로서 존재합니다. 이것은 한순간도 떠나 본 적이 없이 일체의 관계, 천일·지일·태일로 영원히 살면서 삶과 죽음을 오락가락합니다.

④ 흉노족과 40여 년 전쟁을 한 한무제
한무제는 평생 북방의 흉노족과 전쟁을 했습니다. 43년간(BCE 133~BCE 90) 전쟁을 하다 보니 나라가 피폐하여 나중에 ‘나는 역사의 죄인’이라 고백한 유명한 명문(윤대輪臺의 죄기조罪己詔
3)
)이 있습니다.
3) 윤대輪臺의 죄기조罪己詔 : “짐이 즉위한 이후 망령되고 그릇된 일을 많이 저질러 천하의 백성들을 근심케 하고 고통스럽게 했다. 후회가 막급하다. 오늘 이후 백성을 힘들게 하고 국가의 재력을 낭비하는 일을 일체 중단하노라.” (짐즉위이래朕即位以來 소위광패所爲狂悖 사천하수고使天下愁苦 불가추회不可追悔 자금사유상해백성自今事有傷害百姓 미비천하자糜費天下者 실파지悉罢之)


흉노가 계속 침입하여 몇천 명 백성을 죽이고 잡아간 것이 『한서』 여기저기에 보입니다. 한무제는 주군으로서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 등 여러 명장을 보내어 흉노를 토벌하게 했습니다. 위청은 한무제의 둘째 황후인 위황후의 동생으로 흉노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그런데 한나라의 역사 운명을 바꾸어 놓은 사람은 곽거병(BCE 140~BCE 117) 장군입니다. 곽거병은 어떤 인물인가? 한마디로 어릴 때부터 한무제가 이름도 지어 주고 아들처럼 데리고 다니면서 길렀습니다. 한무제를 지킨, 한漢 왕조를 지킨 특수부대 코미타투스 1호입니다. 곽거병은 얼마나 용맹스러운가? 18세 때(BCE 123년) 장군이 돼서 흉노 토벌에 나갔는데 2천 명의 목을 벱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무제가 28세 때(BCE 129년) 처음 출정한 위청 장군은, 흉노 천자가 제천성지 소도에서 유명한 오월 용성대제龍城大祭를 지내는 중에 제천단을 파괴하고 아주 무참하게 짓밟아 버립니다.

그리고 한무제가 36세 때인 기원전 121년에는 곽거병이 흉노의 소도 지역 하서주랑河西走廊을 점령했습니다. 하서주랑은 황하 서쪽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데 남쪽으로 기련산祁連山이 있고 북쪽에 몽골고원이 있습니다. 그 고원 사이에 유명한 열양列陽의 약수弱水가 있는데, 그 약수를 옛날부터 그곳 사람들이 흑수黑水라 했습니다. 기련산은 흉노족의 가장 성스러운 대성산입니다. 천지 하나님께 제를 올리는 소도제천이 있는 성역인데, 예로부터 그곳 사람들은 기련산을 천산天山(하나님의 산), 백산白山이라고도 했습니다.

흑수黑水, 백산白山이 있는 곳은 성지입니다. 동아시아의 모든 산맥은 곤륜산에서 뻗어 내리는데 거기서부터 흑수, 백산이 계속 있습니다.

동북아 가장 끝자리에도 흑수 백산, 흑룡강과 백두산이 있습니다. 흑룡강성 쌍압산시雙鴨山市 칠성산七星山에서 인류 역사가 뒤집어지는 고고학 유적 칠성제단이 발굴되었습니다. 태일성과 칠성을 받드는 3단계 삼신제단이 나왔잖아요.

곽거병이 기련산, 천산의 제천 성지를 완전 파괴하고, 휴도왕의 아내 알씨 부인, 왕자 김일제와 김윤 등 왕족을 포로로 잡아 옵니다. 그 전후에도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흉노의 왕족들, 장군들 목을 베고 그 시신을 성스러운 감천궁 하나님 제단에다 늘어놓았습니다. 벌건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시신들 모형을 현지 박물관에서 직접 보면 누구도 깜짝 놀라게 됩니다.

북방 훈족, 흉노의 만고에 없는 천지 제천단 성지가 완전 파괴된 지 2년 뒤(기원전 119년)에, 곽거병이 단독으로 했든지 한무제의 명을 받아서 했든지 낭거서산狼居胥山에 가서 봉제封祭, 고연산姑衍山에 가서 선제禪祭를 지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2년 뒤(기원전 117년) 곽거병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리고 열 살이 된 아들(곽선郭嬗)도 죽고, 그 뒤에 곽거병의 동생(곽광霍光)이 죽었습니다. 그 후 곽광의 아들 곽우霍禹와 부인 현顯 등의 역모가 발각되어 멸족을 당해 버립니다.

⑤ 비극의 제왕 한무제의 집안 이야기
그러면 한무제 집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제왕이 한무제인데 왜 그런가? 흉노의 천지 제단을 완전히 파괴하고 너무도 많은 흉노 백성, 장군, 왕족의 목을 벤 그 악척이 발동하여 그랬다고 봅니다.

기원전 91년 한무제가 태자(유거劉據, BCE 128~기원전 91)를 죽게 만든 사건이 발생합니다. 강충江充이란 나쁜 놈이 한무제와 태자를 자꾸 이간질하는데,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세 번 하고, 열 번 정도 하니까 한무제가 흔들리고 태자를 의심합니다. 태자의 신하 한 사람이 황제의 전용 도로를 지나갔는데 이것이 강충에게 발각되자 강충은 한무제에게 반역자가 있다고 고변했어요. 태자는 무고巫蠱
4)
행위를 하여 태자를 해치려 한 강충과 시비가 붙게 됩니다.

‘태자가 강충의 목을 베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은 한무제는 군대를 보냈고, 태자는 결국 자살해 버립니다. 이런 사건으로 밀고 당기고 하면서 양측에서 서로 수만 명을 죽입니다.

나중에 한무제는 태자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 후 황후가 낳은 여덟 살짜리 아들(유불릉劉弗陵)을 황태자로 삼았습니다. 무제는 곽광霍光에게 “그대는 주공周公의 일을 하라.” 하고 일어나서 절하게 하고 황태자를 보좌토록 조치할 때 김일제도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한무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일제는 한무제의 가장 충직한 3대 충신 가운데 하나인데 한무제가 오로도스 제후 자리를 줬을 때는 워낙 겸손해서 사양하다가 한무제가 죽기 직전에 받았다고 합니다. 현장에 가 보면 한무제의 능이 피라미드 능으로 잘돼 있습니다. 그 오른쪽에 한 왕실을 지킨 장군들, 충신들의 묘가 있는데 김일제 묘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한무제 그리고 김일제, 곽거병, 위청의 역사를 보면서 북방 흉노족과 한漢 제국 그리고 진한秦漢 제국의 역사를 비교하게 되는데요. 진시황도 틈만 있으면 산동성 쪽에 가서 동방 신교 원형문화 정신, 신선문화 정신을 전수받아서 실제로 신선이 되려 했던 사람입니다. 진시황의 죽음에 대해서는 ‘태산에서 봉선제를 지내고 순시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여러 가지 단약丹藥을 실험적으로 맛보다가 중독되어 죽었다, 간신 조고趙高가 죽였다’는 등 여러 설이 있습니다.
4) 저주 대상을 목제 인형으로 만들어 땅속에 묻어 놓으면 저주 대상에게 재앙이 내리게 된다는 미신.


⑥ 한무제는 진시황을 넘어 완전한 대통일 제국을 꿈꾼 제왕
한무제
5)
는 동북아의 중국사뿐만 아니라 환국^배달^조선 이후의 역사 전체에서 볼 때도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통일 대제왕 겸 가장 신성한 제왕, 제사장 제왕이 되려 했던 인물입니다. 그 전범이 되는 중심인물이 한무제였다는 것을 과거 사서를 쭉 더듬다 보면 우리 스스로 절감하게 됩니다.
5) 한무제의 혈통을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이 있다. 한나라 시조 한고조 유방은 한족이 아니라 웅족 계열이다. 중국의 역사 시조인 4,700년 전 황제헌원의 호는 유웅有熊이고 진한 제국의 창업자 진시황과 한무제도 서방 한족이 아니다.


2. 소도제천의 문화


1) 제천금인의 수수께끼
최치원이 왕명을 받고서 쓴 봉암사鳳巖寺 지증대사智證大師 적조탑비명寂照塔碑銘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옛날 동국의 여러 나라가 정립鼎立하던 때 백제에 소도蘇塗라는 의식이 있었다. 그것은 중국 한무제 때 감천궁에서 지낸 금인金人의 제사와 같다.’는 것입니다.

2) 제천금인은 흉노의 문화 정신
흉노족이 감천궁을 진시황에게 뺏기자 제천금인을 휴도왕이 있는 곳으로 모셔 갔습니다. 제천금인祭天金人은 하나님에게 천제를 올릴 때 모신 금으로 만든 사람 모습의 신상神像인데 키는 약 3m였다고 합니다. 이게 부처 문화의 근원입니다. 이 제천금인은 흉노족의 정신을 묶어 주는 하나님 텡그리신 신앙의 상징입니다.

흉노족의 감천궁을 빼앗은 진시황은 함양의 북서쪽에 있는 감천산甘泉山에 감천궁을 다시 세웠고, 그 뒤 한무제가 BCE 138년에 확장하였습니다. 후에 곽거병에게 휴도왕이 죽고 왕자 김일제와 그 동생 김윤이 한나라의 감천궁甘泉宮으로 잡혀 왔습니다. 감천궁이라는 것은 ‘북두칠성(천지조화의 별)의 이슬을 먹고서 신선의 기운을 받는다’는 뜻으로 그곳에 통천대通天臺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동방의 신교문화는 천일·지일·태일입니다. 즉 천지와 하나가 돼야 영원한 불멸의 생명이 된다는 겁니다. 중국의 수행법은 도교문화를 통해서 부활하게 됩니다.

3) 유목문화의 삼신문화
동서 모든 유목문화에서 나라를 창건한 역사를 보면, 국가 경영 방식이 전부 3수로 돼 있습니다. 유럽의 헝가리로부터 러시아, 몽골 등의 건국사를 보면 구스, 루스, 울루스 등 셋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서 다스린다는 겁니다. 이런 삼 구스, 삼 울루스의 원형은 동방 단군조선의 삼신·삼한 문화입니다.

4) 신라와 가야 왕실에 들어온 제천금인
그런데 이것이 최종적으로 어디서 열매를 맺는가? 바로 이 가야 땅에 와서 열매를 맺기 시작합니다. 신비의 왕국 가야의 창건자(김수로왕)는 흉노 대제국의 휴도왕의 후손입니다. 형인 김일제의 자손은 경주로 가고, 동생인 김윤의 자손은 가야의 김수로로 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경주 김씨 신라 쪽이 큰집이고 김수로 가야 쪽이 작은집이 됩니다.

김해의 금관가야가 멸망한 것은 532년이고 대가야가 망한 게 562년으로 30년 차이입니다. 금관가야가 망할 때 마지막 구형왕仇衡王의 증손자가 김유신金庾信이고, 저쪽 큰집 출신의 김춘추金春秋는 신라 진지왕眞智王의 손자입니다. 김일제와 김윤이라는 투 킴Two Kims의 자손이 와서 왕조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가야 왕조의 마지막 역사를 쓰는 두 주인공, 마지막 투 킴도 그 후손인 김유신과 김춘추입니다. 김유신이 김춘추에게 여동생을 보내고 삼국 통일을 이끌어 가는데, 둘 다 화랑이었습니다.

5) 일본에 전수된 삼랑문화
신라 화랑문화는 신교입니다. 화랑의 원말은 천지화랑天指花郞인데, 다른 말로 삼랑三郞입니다. 지금 강화도에 가면 삼랑성三郞城이 있잖아요. 삼랑의 원래 말 삼시랑三侍郞은 석 삼三, 모실 시侍, 젊은이 랑郞인데, 일본어로 ‘사무라이さむらい’가 됐습니다. 이 모실 시侍 자를 따서 사무라이를 일본어 한자로 ‘시侍’라고 합니다.

사무라이는 누구를 모셨는가? 일반적으로 사무라이를 ‘자기 주군을 모시는 자’로 정의합니다. 일본 학자들은 사무라이 문화가 일본 동부 해안의 농촌에서 자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북아의 문화 원류정신을 무시한 겁니다. 일본은 천 년 역사의 쇼군, 무사의 문화를 넘어서, 결국은 명치유신을 통해서 왕도문화, 메이지 정권을 창출했습니다.

가야의 꿈이 좌절되면서 작은집의 모든 역사문화의 원류 정신이 큰집으로 넘어갔습니다. 가야는 죽지 않았고, 통일신라를 통해서 결국은 백제를 무너뜨립니다.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에서 보면 중심국은 고구려 대제국이지만, 신라가 또 고구려를 무너뜨립니다. 이렇게 한반도를 통일했는데, 저 북쪽에서 대중상大仲象, 대조영大祚榮 부자가 『환단고기』에서 말한 대진大震, 식민사학^중화사관에서 말하는 발해渤海를 건국하여 남북국 시대로 들어갑니다. 그 후로 일본에 전해진 가야문화는 전부 신라문화 양식으로 기록됩니다.

3. 대마도의 역사와 문화


1) 대마도 역사문화의 중요성
① 대마는 마한이다
대마도對馬島는 한때 명백히 가야 땅이었습니다. 대마의 뜻을 알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대마도는 어떤 섬인가? 일본의 기도슈신義堂周信(1325~1388)이라는 유명한 도사가 쓴 일기장으로 『공화일용공부약집空華日用工夫略集』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대마내대마한지의야對馬乃對馬韓之義也’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대마對馬는 마한馬韓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런 대마對馬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일본 문화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명쾌하게 알 수 있습니다. 쓰시마는 ‘두 섬’이에요. 시마가 섬이니까 쓰시마Tsusima로 발음한 것입니다.


또 ‘대마도對馬島’에서 ‘마馬’는 ‘마한馬韓’이라는 뜻입니다. 이때 마한은 무엇인가? 단군조선이 망하고 북삼한이 남삼한으로 전환되기 전에는 한반도 전체가 마한이었습니다. 단군조선이 망하면서 사람들이 계속 한반도로 내려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마도의 ‘대對’라는 것은 마주 대할 대對 자입니다. 어디를 마주하는가? 단군조선의 땅 마한도 되고, 그 후 남삼한의 변한도 됩니다. 또 백제도 될 수 있고, 신라도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말 마馬 자가 들어갔으니까 ‘단군조선의 마한馬韓 땅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따라서 ‘마한은 우리의 고향이다. 우리 문화의 조국은 마한이다. 우리는 마한에서 왔다’는 것이 대마對馬의 뜻입니다.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를 보면 대마도에 대한 최종 정의가 나와 있습니다.

任那(임나)는 乃對馬全稱也(내대마전칭야)라 自古(자고)로 仇州大馬(구주대마)는 乃三韓分治之地也(내삼한분치지지야)오 本非倭人世居地(본비왜인세거지)라
임나는 대마도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옛날부터 규슈와 대마도는 삼한이 나누어 다스린 땅으로, 본래 왜인이 대대로 살던 곳이 아니다. (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본비왜인세거지本非倭人世居地’, 본래 왜인들이 살던 땅이 아니라 했습니다. 대마 전체가 임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대마도는 단군조선의 문화가 일본으로 전수되는 경유지로서 일본 창세역사가 이루어지게 한 문화의 자궁입니다. 한때 역사의 심장부였습니다.

② 대마도는 삼한이 나누어 다스린 땅
대마도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졌는데 그 중심은 고구려에 속한 인위가라仁位加羅였습니다. 아래는 백제에 속한 계지가라雞知加羅이고 맨 위는 신라에 속한 좌호가라佐護加羅였습니다. 가야 땅이던 대마도를 백제, 고구려, 신라가 나눠 다스려서 ‘삼가라三加羅’라고 했습니다.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삼가라의 지명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음을 대마도 현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任那分爲三加羅(임나분위삼가라) 所爲加羅者首邑之稱也(소위가라자수읍지칭야)오
임나任那는 나뉘어 삼가라가 되었는데, 이른바 가라加羅라는 것은 중심이 되는 ‘수읍’을 부르는 이름이다. (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그리고 임나가 되었든, 가라가 되었든, 가야가 되었든 이것은 바로 일본에서 말하는 가라쿠니 즉 한국韓國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삼가라 가운데 중앙에 있는 인위가라에서 ‘인위仁位’는 왜 중요한 의미가 있는가? 바로 ‘환국^배달^조선 삼성조의 환인^환웅^단군의 천지광명의 문화 종통을 계승한 것은 고구려’라는 뜻이 ‘인위’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2) 대마도와 구주에 펼쳐진 일본의 신도 역사관
대마도 문화역사의 원류와 일본 구주九州(규슈)에 퍼진 일본의 신도 역사관을 현지답사한 것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사실, 역사를 찾다가 우리 집안이 다 망해 버렸습니다. 우리 할아버지^아버지^나, 삼대三代가 재산, 인생, 청춘을 바쳤고 어떤 때는 생사가 오락가락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기쁨도,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도 함께 있습니다. 우리가 꼭 지켜야 할 신성하고 웅대한 한민족의 신교문화 속에 인류 보편의 역사관과 새로운 문명을 열 수 있는 통일 문화의 진정한 이야기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정말로 세상을 사는 진정한 목적을 찾고 잃어버린 문화역사 정신을 복원하는 일에 확신을 가지기를 희망해 봅니다.

① 일본의 신도 역사관과 신관의 중심 주제
우리가 일본의 역사문화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본 문화역사의 중심 주제는 무엇인가?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일본 역사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정신문화, 신사문화의 원류는 조화삼신造化三神, 일곱 신입니다. 신교의 삼신^칠성 사상이 바탕이 되어 신화 체계가 수립되었습니다.

일본의 창세역사의 근본 바탕은 조화삼신입니다. 조화삼신은 무엇인가? 천어중주존天御中主尊(아메노미나카누시노카미), 고황산영존高皇産靈尊(다카미무스비노카미) 그리고 신황산영존神皇産靈尊(가미무스비카미)입니다. 천어중주존天御中主尊을 알면, 일본 역사문화의 궁극의 근원을 깨닫게 됩니다. 인류 역사의 근원인 천상 신도세계의 하나님 문화의 근본을 깨치는 것입니다. 천어중주존, 고황산영존, 신황산영존은 말이 낯설고 어려울 수 있지만 대한민국의 지식인이라면 우주의 조화삼신을 일컫는 이 일본식 호칭을 좀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다 함께 한번 따라 읽어 볼까요?

“천어중주존天御中主尊 고황산영존高皇産靈尊 신황산영존神皇産靈尊”


천어중주존天御中主尊에서 ‘어御’는 존칭입니다. 그리고 ‘천중天中’은 하늘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천어중주’는 하늘의 중심이 되는 주신主神입니다. ‘존尊’은 신神과 같은 의미로 일본말로 카미かみ입니다.

고황산영존高皇産靈尊은 저 높은 곳에 계시면서 우리들을 직접 다스리시는 위대한 신이라는 뜻입니다. 일본의 신도 구조에서 고황산영존과 신황산영존 두 분은 부부 관계처럼 묘사되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그리고 칠성문화에 일곱 신이 있습니다. 앞의 세 분은 독신이고, 뒤에 네 분은 부부신인데, 바로 그 마지막이 유명한 이자나기伊邪那岐와 이자나미伊邪那美입니다.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는 일본 황조皇朝를 여는 주신이고, 그들의 자녀인 천조대신天照大神, 월독신月讀神, 소전명존素戔鳴尊은 황조신皇祖神 삼남매입니다. 그 삼남매의 첫째가 바로 천조대신(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이고, 여동생이 월독신(쓰키요미노미코토)이고, 막내가 말썽꾸러기 남동생인 소전명존(스사노오노미코토)입니다.

이 삼 남매가 한반도에서 대마도를 거쳐 본주本州(혼슈)로 넘어간 것이 일본 왕조의 창세역사가 펼쳐진 과정입니다.

② 배달 환웅의 건국 이야기를 베낀 일본 창세 신화
이 신들이 가야를 통해서 대마도를 거쳐 일본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신라를 통해서 대마도를 거쳐 일본 구주九州(규슈)로 해서 가시하라 신궁橿原神宮으로도 들어갔습니다. 나라奈良 남쪽 가시하라시市에는 일본 초대 왕 신무神武(재위 BCE 660~BCE 585)를 모신 신궁이 있습니다.

그런데 들어가는 과정을 보면, 천상에서 천조대신의 아들인 천인수이존天忍穗耳尊(아메노오시호미미노미코토)과, 고황산영존의 딸인 고번천천희명栲幡千千姬命(다쿠하타치지히메노미코토)의 아들로서 일본 왕조의 실질적 우두머리인 경경저존瓊瓊杵尊(니니기노미코토)이 소전명존의 아들인 대국주신大國主神으로부터 일본 국토를 이양받습니다. 이것이 천손강림天孫降臨 신화입니다. 니니기瓊瓊杵尊의 자손에서 일본 왕가의 초대 왕인 신무神武가 나와 왕권을 세웠습니다. 이때 천조대신, 여자 태양신 하나님한테 무엇을 받는가? 바로 왕권의 상징인 칼, 곡옥, 거울 삼종의 신기神器를 받습니다.

일본의 문화인류학자 오카 마사오岡正雄(1898~1982)에 따르면, “이것은 천신인 환인桓因이 아들 환웅桓雄에게 삼종의 보기寶器를 내려 주어 신단수 아래에 가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했다는 단군신화 내용을 그대로 본뜬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여러 학자에 따르면, 일본의 창세신화는 환국에서 내려온 환웅천황의 동방 백두산 신시神市 건국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 주장합니다.

③ 황조신이 고황산영존에서 천조대신으로 바뀐 사건
원래 일본 왕실의 주신은 여자 태양신 천조대신天照大神이 아닙니다. 사실은 중간에 주신이 바뀌었어요. 본래는 ‘천손天孫인 니니기를 지상으로 내려보낸 천신天神’ 즉 고황산영존高皇産靈尊이 일본 역사의 황조신皇祖神이었는데 모종의 사건에 의해서 천조대신으로 바뀌어 버린 겁니다. 태양신太陽神 하느님을 모시던 무녀巫女가 이세신궁伊勢神宮 신전의 주인으로 들어가서 앉아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사건
6)
인가? 제40대 일본 왕 천무天武(덴무, 재위 673~686)가 조카 홍문弘文왕(재위 671~672)을 내치고서 대권을 잡기 위해 천조대신과 약속을 했습니다. ‘내가 왕이 되면 당신을 우리나라의 주신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고, 왕권을 잡은 다음에 천조대신을 주신으로 섬겼습니다. 이후 이세신궁과 일본 10만 개 신사 심장부에 천조대신이 일본의 하나님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6) 임신壬申의 난, 672년.


④ 한국인과 일본인의 미트콘드리아 유전자는 95% 일치
대마도는 일본 문화의 원류입니다. 일본 문화의 자궁이 대마도입니다. 동경대 교수라든지 그 외에 일본의 전문가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일본 사람들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를 조사해 보니까 조선 사람과 95%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 사람이 곧 한국 사람, 도래인渡來人이라는 뜻입니다. 또 일본 사람은 90% 이상이 또라이渡來とうらい라 하는데 그게 도래인이라는 말입니다. 저 문화 조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입니다.

3) 인류 원형문화가 살아 있는 대마도의 조화삼신 신사
① 원도元嶋(모토지마) 신사
대마도의 종씨宗氏는 원래 송씨宋氏였습니다. 그들이 조상신을 모신 만송원萬松院(반쇼인)이라는 곳에 대마도 도주들의 계보가 있습니다. 거기에 가서 그 위상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송씨 이전에는 아비루阿比留 문자를 만든 아비루씨阿比留氏 가문 사람들이 13세기까지 대마도를 다스렸는데, 그 가문이 대대로 신직神職을 지낸 묘견 신사妙見神社
7)
즉 원도元嶋(모토지마) 신사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우주 조화삼신의 으뜸이 되는 천어중주존을 모시고 있어요.


② 고어혼高御魂(다카미무스비) 신사와 신어혼神御魂(가미무스비) 신사
고어혼高御魂 신사에서는 고황산영존
8)
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마도 북쪽 좌호 마을에 위치한 신어혼神御魂 신사에서는 셋째 조화삼신 신황산영존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 근교에 천신다구두혼天神多久頭魂 신사가 있습니다. 여기에 대마도 역사의 큰 비밀이 있습니다.
7) 『대주신사지對州神社誌』에는 “진택영부북진묘견鎭宅靈符北辰妙見”이라 되어 있다.


8) 전승에 따르면 바닷가에 크고 빛나는 바위가 표착하여 이를 고황산영존의 신체로 삼았다고 한다. 이곳 고황산영존의 신을 야마토의 신무神武왕이 권청하여 일본 황실의 황조신이 되었다고 한다. ( 『대마국지』)


③ 천신다구두혼天神多久頭魂(てんじんたくずだま덴진다쿠즈다마) 신사
천신다구두혼天神多久頭魂 신사에서 ‘다구두多久頭’는 무엇인가? 아침에 깨어날 때, 하늘에다 기도도 해 보고 생각을 해 보기도 했습니다.

신사 뒤에 보면 세 개의 산봉우리가 있습니다. 봉우리 위에 어떤 성지와 같은 표석이 있다고 전해 옵니다. 신사의 맞은편에는 ‘좌호가라佐護加羅’라는 표지판이 길가에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사의 좌우에 서낭당 돌탑이 있는데 아주 깊은 인상을 줍니다. 더 뒤로 들어가 보면 신전이 없습니다. 뒤에 있는 세 개의 산봉우리를 신체神體, 신의 몸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걸 삼신산三神山
9)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신사를 보면 고황산영존과 신황산영존의 자손으로 알려진 다구두혼을 주신으로 모신다고 합니다. 일본어 발음에는 받침이 거의 없으니까 ‘단군’에서 받침을 떼면 ‘다구’가 됩니다.

‘다구두’는 ‘단군의 머리’니까, 바로 시조 단군始祖檀君입니다. 환웅천황과 웅녀가 우주광명 문화의 도통을 전수받아서 결혼을 해서 낳은 사람을 모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을 시조 단군을 모신 신사로 봅니다.

여기에 재미있는 설화가 있습니다. 태양신 기운을 받은 어떤 여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를 ‘천동天童’이라 했다는 간소남艮小男 전설이 있습니다. 이것을 천도신앙天道信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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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합니다. 단군조선 마한의 소도제천蘇塗祭天의 순수 원형이 신앙 형태로 여기에 남아 있는 겁니다. 이 소도를 천신단天神壇의 상징으로 가지런하게 쌓는 소도 신앙의 원형은 대마도에만 남아 있습니다.
9) 이 신사는 천신산을 신체로 하는데, 이 산에는 숫봉우리(雄岳), 암봉우리(雌岳), 큰봉우리(大平)가 있다. 이 천신산이 세 봉우리로 구성된 것은 일신을 모신 것이 아니라 삼신을 모셨기 때문이다.


10) 천도신앙은 하늘이 지상에 내려보낸 아들 즉 천동을 모시는 신앙이다. 이 천동이 바로 단군인 것이다.



④ 다구두혼多久頭魂(たくずだま다쿠즈다마) 신사
대마도의 남쪽 쓰쓰豆酸 마을로 가면, 북쪽의 천신다구두혼 신사와 음양 짝이 되는 다구두혼多久頭魂 신사가 있습니다. 정문 왼쪽 기둥에 보면 신사의 이름이 한자로 멋지게 쓰여 있습니다. 다구두혼 신사는 북쪽의 천신다구두혼 신사와 함께 일본 신사문화의 원형을 보여 줍니다. 그 중심에 전각이 하나 있고 2층에는 아비루阿比留 범종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사의 신체는 천도산天道山이라고도 하는 용량산龍良山(다테라산)인데요. 일명 솟도산卒土山으로도 불립니다.

⑤ 해신海神(かいじん가이진) 신사
쓰시마에 하치만 신사가 북쪽과 남쪽
11)
에 각각 대표로 하나씩 있는데 북쪽 신사는 일본의 하치만궁八幡宮의 발상지로도 여겨집니다. 처음에는 와타즈미미코わたづみ御子 신사로 불렸는데 하치만 신궁으로 바뀌었다가 현재는 해신 신사海神神社
12)
로 개칭되었습니다. 바다 신의 딸인 풍옥희豊玉姬(도요타마히메)
13)
는 일본 초대 왕 신무의 할머니인데, 해신 신사는 풍옥희의 아들인 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彦波瀲武鸕鶿草葺不合尊(우가야후키아에즈노미코토)을 모시고 있습니다.
11) 남쪽의 이즈하라厳原에 위치한 이즈하라 하치만궁은 677년에 북쪽의 하치만 신령을 권청하여 생긴 신사로 대마도 하도의 하치만 신앙의 중심지이다.


12) 해신 신앙과 하치만 신앙이 융합되어 있다.


13) 풍옥희는 해신海神의 공주로 잃어버린 화살을 찾기 위해 용궁을 방문한 호오리火遠理命(신무왕의 할아버지)와 결혼하였다. 아이를 낳으러 해변으로 들어가는데 남편에게 들여다보지 말라는 부탁을 했으나 남편이 어기고 들여다보니 흉측하였다. 이에 노한 풍옥희는 용궁으로 돌아가 버렸다.


⑥ 화다도미和多都美(わたづみ와타즈미) 신사
화다도미(와타즈미) 신사에는 다섯 개의 도리이가 바다를 향해 세워져 있습니다. 바닷물이 들어올 땐 도리이 세 개가 물에 잠긴다고 합니다. 가서 보면 풍광이 아주 멋있습니다. 화다도미 신사는 풍옥희를 모시는데, 신무의 아버지 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이 이모인 다마요리히메玉依姬(풍옥희의 여동생)와 결혼해서 신무神武를 낳게 되었다고 합니다. 와타わた는 바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도리이가 거제도를 향하고 있습니다.

4) 일기도壹岐島
① 이키박물관
대마도에서 구주九州(규슈)로 가다 보면 구주 바로 옆에 일기도壹岐島가 있습니다. 이 섬을 이키국壹岐國이라고도 합니다.

이키박물관에 가 보면 2층에 미륵불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것은 쿠카이空海 스님 집안에서 만든 것입니다. 쿠카이 스님은 불교 팔만대장경의 법신^화신^보신의 진리를 완성한 훔吽이라는 우주의 신성한 생명의 궁극의 소리, 우주성령의 생명의 근본 소리를 구체적으로 밝혀내어 『훔자의吽字義』라는 책을 지었습니다. 일본 국민들이, 왕을 비롯하여 모든 지성인, 종교인, 사업가들이 가장 존경하는 쿠카이 스님은 원래 속성俗姓이 사에키佐伯인데요. 그 집안사람이 미륵불상을 세운 걸로 보아 쿠카이 스님 집안이 미륵신앙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② 헤소이시(へそ石)와 아고카케세키(顎かけ石)
이키섬에는 또 무엇이 있는가? 신세神世 7대七代의 일곱 주신 가운데 막내인 이자나기伊邪那岐와 이자나미伊邪那美가 일본의 여덟 개 섬을 만들 때 서로 뺑뺑 돌았다고 하는 기둥이 있습니다. 그 왼쪽에는 신성한 배꼽돌도 있습니다. 이 배꼽돌(배꼽바위) 옆에는 이자나기가 세웠다는 ‘아고카케세기顎かけ石’라 불리는 돌기둥이 있습니다. 이 돌기둥은 일본 신화에서 천신天神이 강림한 국중지주國中之柱를 상징하는 것으로 환웅이 강림한 신단수와 같은 개념으로 봐야 합니다.

③ 월독月讀(つきよみ쓰키요미) 신사

일본 신화에서 천조대신天照大神과 스사노오素戔鳴尊는 자주 등장하지만 달의 신인 쓰키요미月讀神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쓰키요미를 모신 월독 신사가 일기도에 남아 있어서 이들의 신화가 대마도와 일기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키섬에서 천조대신이라는 태양신과 월독신이, 일월이 합덕을 해서 규슈로 넘어간 것입니다.

5) 신비의 섬 오키노시마와 종상대사宗像大社(むなかたたいしゃ무나카타다이샤)
대마도와 이키섬 바로 오른쪽에 오키노시마沖ノ島라는 신비로운 작은 섬이 있습니다. 오키노시마는 일본인이 평생에 한 번은 꼭 가 보고 싶어 하는 섬으로 고대부터 여성의 출입을 금하는 풍습을 지키는 신神의 섬입니다. 여기에서 4세기~10세기경 유물 약 8만 점이 나왔습니다. 종상대사宗像大社, 무나카타다이샤라는 큰 신전에 그 유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거기 신보관神寶館에 가 보면 우주 원십자 반지를 크게 찍어서 걸어 놓았습니다. 또 말 장신구에서 열여섯 개의 점을 볼 수 있고, 신선神仙문화의 모습을 보여 주는 유물도 있습니다. 저 16수라는 것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에요. 북방 대륙 천신문화의 중심 주제는 태일신太一神인데 그것이 현상 우주에서는 바로 팔음팔양八陰八陽입니다. 16수는 팔음팔양 문화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대마도와 이키섬, 오키노시마의 신사와 유물을 보면, 환국·배달·조선 이후 가야를 중심으로 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 문화가 대마도를 통해 일본 구주九州로 건너가서 일본 신사문화가 꽃을 피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문화가 본주本州(혼슈)로 들어가 에도문화江戸文化와 동경의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 현대 문명까지 이어져 온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일본의 낙후된 국가 수준을 보여 주는 기록
해운 수준
齊明(제명) 三年(삼년) 九月(구월) 有間皇子(유간황자)
性黠陽狂(성힐양광) 云云(운운) 往牟婁温湯(왕모루온탕) 僞療病來(위료병래) 讚(찬) 國體勢曰(국체세왈) 纔觀彼地(재관피지) 病自蠲消(병자견소) 云云(운운) 天皇(천황) 聞悅(문열) 思欲往觀(사욕왕관)
是歲(시세) 使云於新羅曰(사운어신라왈) 欲將沙門智達(욕장사문지달)
間人連御廐(간인련어구) 依網連稚子等(의망련치자등) 付汝國(부여국) 使令(사령)
送到大唐(송도대당) 新羅(신라) 不肯聽送(불긍청송) 由是沙門智達等還歸(유시사문지달등환귀)
제명齊明 3년(657) ^^^^^^(중략)^^^^^ 이해에, 사인使人을 신라에 보내 ‘사문지달沙門智達, 간인련어구間人連御廐, 의라련치자依網連稚子 등을 신라국의 사인에 붙여 대당에 보내고 싶다’고 하였으나 신라가 듣지 않아 사문지달沙門智達 등이 그대로 귀국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天平寶字(천평보자) 六年(육년) 四月(사월) 丙寅(병인) 遣唐使駕船一隻(견당사가선일척)
自安藝國到于難波江口(자안예국도우난파강구)
着灘不浮(착탄불부) 其柂亦復(기타역부) 不得發出(부득발출) 爲浪所揺(위랑소요) 船尾破裂(선미파열)
천평보자天平寶字 6년(762) 4월 17일, 견당사遣唐使가 배를 타고 안예국安藝國(岡山)에서 난파難波(大阪) 강구江口에 도착하였는데 여울에서 배가 뜨지 않고 끌어도 여의치 않아 출발하지 못하였는데 파도에 동요하여 선미船尾가 파손되었다.(『속일본기續日本紀』)

승화承和 6년(839) 8월 20일, 당唐에 도착한 3척의 (일본) 배의 선원이 일본 선박의 부실함을 싫어하여 초주楚州에서 신라 선원 60인이 운항하는 신라 배 9척을 타고 귀국하였다.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의복 수준
其風俗不淫(기풍속불음) 男子皆露紒(남자개노계) 以木緜招頭(이목면초두)
其衣橫幅(기의횡폭) 但結束相連(단결속상련) 略無縫(약무봉)
婦人被髮屈紒(부인피발굴계) 作衣如單被(작의여단피) 穿其中央(천기중앙) 貫頭衣之(관두의지)
그 풍속은 음란하지 않고 남자는 모두 노계露紒(맨머리를 드러냄)하여 목면木緜으로 머리를 묶는다. 그 옷은 횡폭橫幅(가로로 된 옷감)을 묶기만 하여 서로 연결하고 대체로 바느질하지는 않는다. 부인婦人들은 머리를 풀어(被髮) 굽게 묶고 (屈紒), 옷을 홑이불처럼 만들어 그 중앙에 구멍을 내고 머리를 꿰어서 입는다. (『삼국지』 권 30, 「위서」 ‘동이전’ 중 ‘왜인전’)


왕궁 건축 수준
황극皇極 2년(643)4월 28일. 권궁權宮(임시 거처)에서 옮겨서 아스카(飛鳥)에 있는 홰檜나무 껍질로 이은 신궁新宮으로 옮겼다.

제명齊明 원년元年(655), 이해 겨울에 아스카(飛鳥)에 있는 나무껍질로 이은 궁宮이 화재
를 입었다. 그래서 아스카의 천원궁川原宮으로 천거遷居하였다. (『일본서기』)



가야, 신라와 훈족의 친연성
북방 기마민족의 공통된 유물은 동복, 복각궁, 편두, 순장, 돌무지덧널무덤 등이다.

신라, 가야의 지배자들이 북방 기마민족, 즉 흉노의 후예로 거론되는 결정적인 유물 중 하나로 동복이 거론된다. 말에 싣고 다니는 동복은 기원전 8세기나 기원전 7세기 무렵에 출현해 기원후 5세기나 6세기 무렵에 소멸되는데 유목 민족의 특성상 매우 넓은 지역에 걸쳐 발견되고 있다. (이종호, 『 황금 보검의 비밀』, 183쪽)


일본 신화의 고천원은 고만리

이자나기 유일한 아들인 스사노오 노미코토는 성격이 난폭하였다. 그래서 아마테라스가 경작하던 밭두둑을 허물고, 밭에 망아지를 풀어놓아 황폐화시켰다. 또 제사 지내는 신궁에 분뇨를 뿌리고, 신의神衣를 짜는 재복전齋服殿의 지붕을 뜯고 말가죽을 벗겨 던지는 행패를 부렸다. 마침내 흑심을 품고 군사를 일으켰으나 고천원의 여러 신에게 붙잡혀 추방되기에 이르렀다. 이때에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를 피해 천석굴天石窟에 들어가 숨었는데 고천원의 신들이 상세常世의 장닭(長鳴鳥)을 모아 일제히 울게 하고 굿을 하여 아마테라스를 간신히 구출했다. 『일본서기』에 보이는 이 기사는 거창군 가조의 비계산飛鷄山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고만리 들 중앙에 궁배미(宮城址) 소류지沼溜地가 있는 곳이 바로 궁궐터이다. 소류지 기초석은 마치 옛날 궁궐의 초석을 옮겨 쌓은 듯하고, 주위에 사방으로 높은 산이 병풍처럼 에워싸 높고도 광활한 고천원, 마치마 벌을 실감케 한다. 이곳에 일제 때까지 ‘궁배미(宮城址)’라 쓴 큼직한 팻말이 작은 초당草堂에 서 있었으나 광복 후 소류지를 조성할 때 없어졌다고 한다.

일본서기에 나타난 신무천황神武天皇(진무덴노) 기록
彥波瀲武鸕鷀草葺不合尊(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
以其姨玉依姬爲妃(이기이옥의희위비) 生彥五瀬命(생언오뢰명)
次稻飯命(차도반명) 次三毛入野命(차삼모입야명)
次神日本磐余彥尊(차신일본반여언존) 凡生四男(범생사남)
久之彥波瀲武鸕鷀草葺不合尊(구지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
崩於西洲之宮(붕어서주지궁) 因葬日向吾平山上陵(인장일향오평산상릉)
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은 이모 옥의희를 비로 삼았다. 언오뢰명을 낳았다. 다음 도반명, 다음 삼모입야명, 다음 신일본반여언존 모두 네 아들을 낳았다. 얼마 후에 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은 서주궁에서 죽었다.

그래서 일향 오평산의 상릉에 장사지냈다. (『일본서기』)


一書曰(일서왈) 先生彥五瀬命(선생언오뢰명)
次稻飯命(차도반명) 次三毛入野命(차삼모입야명) 次狹野尊(차협야존)
亦號神日本磐余彥尊(역호신일본반여언존) 所稱狹野者(소칭협야자)
是年少時之號也(시년소시지호야) 後撥平天下奄有八洲(후발평천하엄유팔주)
故復加號曰神日本磐余彥尊(고부가호왈신일본반여언존)
일서一書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먼저 언오뢰명을 낳았다. 다음 도반명, 다음 삼모입야명, 다음 협야존인데 협야존의 다른 이름은 신일본반여언존이라 한다. 협야라는 것은 어릴 적 이름이다. 후에 천하를 평정하여 팔주를 다스렸다. 그러므로 또 이름을 더하여 신일본반여언존이라 한 것이다. (『일본서기』 신대神代 하下)


일본 창세역사의 고향 거창 가조
가야 대왕국은 인류 시원의 나라, 환국의 문명 시스템을 부활시킨 유일한 나라다. 동서 인류 문화의 영원한 고향인 12환국과 9환족의 건국 원리가 가야 속에서 그대로 계승되었다. 9간九干과 초기 12가야설이 이를 말해 준다.

김해 금관가야의 젖줄 낙동강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일본의 창세역사를 잉태한 황금시절 가야 대왕국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땅, 거창이 있다. 이곳 가조면에는 우두산이 있고 그 너머에 자리한 가야산은 대왕국 가야의 중심 산이다. 이곳은 가야 대왕국의 시원역사와 일본의 창세역사가 만나는 역사의 현장이다.

대가야와 금관가야 시조의 어머니이자 가야산신인 정견모주는, 1억 2천만 일본인이 그들의 국가 창세신이자 태양신으로 모시는 천조대신이며, 이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고향이 바로 이곳 거창군 가조다.

가조산 일대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신대편에 기록되어 있는 일본 왕가의 조상신이 살았던 고천원高天原에 비정되는 중심 터로서, 아마테라스와 그녀의 남동생 스사노오노에 관련된 지명과 유적지가 곳곳에 남아 있다.

『일본서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가 동굴에 숨자 천지가 암흑 속에 묻히게 되었다. 여러 신들이 동굴 속에 숨은 그녀를 밖으로 불러내기 위해 굿판을 벌였다. 수탉이 힘차게 울자 마침내 아마테라스가 동굴 밖으로 나왔으며 천지는 다시 밝아졌다. 한편 남동생 스사노오노 미코토는 계속해서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고천원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 소시모리曾尸茂梨를 출발하여 곰나루(진해 웅천熊川)에서 진흙배를 타고 출운국出雲國을 거쳐 일본으로 갔다.”고 전한다.


『고사기』에 따르면, “천지가 처음 열렸을 때 고천원에서 탄생한 신은 천어중주존과 고황산영존, 그리고 신황산영존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신들은 바로 환국^배달^조선의 시원역사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고천원도 고대 한국의 창세역사가 발원한 곳에서 생겨났다.

그런데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전하는 일본 왕가 신대神代 7대七代의 신神들이 살았던 원적지原籍地요 고향인 고천원이 어디인지를 두고 논란이 있다.

일본은 춘천 우두산을 고천원으로 비정한 바 있지만, 이곳은 우두산이라 하는 것 외에는 기록과 일치하는 조건이 딱히 없다. 그러나 거창군 가조와 우두산은 『일본서기』에서 묘사하는 고천원의 지리적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땅이다.

첫째, 고천원高天原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지형이 높고 넓은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가조는 어떠한가? 가조는 웅혼한 기상의 고산준령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해발 평균 천 미터가 넘는 분지 지형이다. 가조평야라 불리는 고만리高萬里 30만 평의 너른 들판! 그 중앙에는 궁궐터의 흔적인 궁배미(宮城址)라는 지명이 아직도 전해 오고 있다. 풍수지리학으로 볼 때, 이곳이 한국과 일본의 역사기록 내용과 한반도에서 가장 정합하는 곳이다.

가야산에서 뻗은 오도산은 외청룡으로, 단지봉은 외백호로 밖에서 가조를 감싸며 비계산에서 뻗은 숙성산은 내청룡으로, 우두산에서 뻗은 장군봉은 내백호로 안에서 한 번 더 가조면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이 터의 명당(혈穴) 기운을 끊기 위해 땅을 파서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당시 궁궐의 초석으로 추정되는 돌들이 저수지 축조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둘째, 아마테라스를 구출하기 위해 여신 아메노 우즈메가 굿을 하였던 장소로 추정되는 삼한 시대의 소도 당집이, 가조 당동 마을 서쪽 기슭에 있는데, 본래 이곳은 스사노오노 미코토를 우두대왕으로 모시던 곳이다.

셋째, 아마테라스의 남동생 스사노오가 소시모리(牛頭山)를 출발하였다는 우두산(1,046m)은 해인사 가야산(1,430m)의 최고봉인 우두봉에서 남서쪽으로 10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우두산 장군봉 9부 능선에서 발견된 천석굴天石窟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고천원高天原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가 남동생 스사노오노 미코토(須佐之男命)의 포악한 횡포를 피해 숨은 동굴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고천원高天原, 천석굴天石窟, 당집, 소시모리 우두산 등은 『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기록과 정합하고 있다. 따라서 경남 거창군 가조면이야말로 진정한 일본 왕가의 본향이라 할 수 있다. 만세일계로 내려왔다는 일본 왕실의 원뿌리도 가야 대왕국의 창세역사에 그 근원을 두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 할 수 있다.

이처럼, 일본 창세역사의 출발점이 바로 거창군 가조 지역임에도 일본은 ‘고대에 한반도를 식민 통치했다’는 날조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며 일본 시원역사의 발상지를 북방으로 밀어 올려 강원도 춘천의 삭막한 우두산에 소시모리 신화를 만들었으며 지금도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곽거병의 생애(BCE 140년~BCE 117년)
❶ BCE 123년. 위청을 따라 출전, 기병 800기를 이끌고 본대에서 벗어나 수천 리를 진격, 2천 명의 목을 베고 18세에 표기장군驃騎將軍이 됨.

❷ BCE 121년. 농서에서 만 명을 이끌고 출전, 900명의 목을 베고 휴도왕과 태자를 사로잡음. 이해 여름 북지에서 출진, 기련산까지 진군, 추도왕酋涂王을 사로잡음. 투항한 적이 2,500명, 참수하거나 사로잡은 자가 3만 2백 명이고, 다섯 왕과 그들의 어미, 선우의 연지閼氏와 왕자 59명, 상국, 장군, 당호, 도위 등 63명을 사로잡음.

❸ BCE 120년. 만 명을 거느리고 농서에서 출진. 8천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음. 휴도왕休屠王을 무찌르고 휴도왕이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쓰는 황금상을 노획하고, 흉노 군사의 수급과 포로로 잡은 수가 7만여 명이었음. 그러나 좌현왕과 그의 장군들은 놓침.

❹ BCE 119년. 대군에서 출격하여 대장군 위청과 함께 선우를 공격. 7만 443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흉노군의 3할을 무찌름. 낭거서산에서 봉제를 올리고 고연산에서 선제를 드린 후 한해까지 거쳐 되돌아옴.

❺ BCE 117년. 24세로 사망.

한무제의 충신 김일제
망하라의 난
김일제 일가가 한나라에 포로로 붙잡혀 온 지 30여 년이 지난 기원전 90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망하라莽何羅가 그 동생 중합후重合侯와 모의하여 모반을 일으켜 무제를 암살하려 했다. 무제가 일어나기 전에 죽이려고 새벽에 망하라가 칼을 품고 무제의 침실로 막 들어가는 것을 마침 소변을 보러 밖에 나온 김일제가 우연히 보고 달려들어 망하라를 껴안고 구르며 ‘망하라가 모반을 일으켰다’고 소리쳤다. 곧 한 무제가 놀라 깨었고, 망하라와 김일제가 엎치락뒤치락 뒹굴고 있었다. 이에 좌우에서 칼을 뽑아 찌르려 하니 무제는 김일제가 다칠까 염려하여 말렸다. 이윽고 망하라를 결박 지어 죽여 버렸다. 이 사건이 있은 뒤 3년이 지난 기원전 87년 무제는 8세의 아들을 태자로 삼고 시중 곽광을 대사마 대장군으로 삼아 어린 태자를 보필 하도록 부탁하고는 그다음 날 죽었다. (서동인, 『흉노인 김씨의 나라 가야』, 118쪽)


무제가 죽기 전에, 김일제를 포로로 잡아 왔던 곽거병의 동생 곽광과 김일제를 불렀다. 곽광이 물었다. “만약 폐하께서 세상을 버리시게 된다면 누가 후사가 되겠습니까?” 한무제가 답했다. “그대가 앞서 받은 그림의 뜻을 모른단 말인가. 막내아들을 세우고 그대는 주공周公의 일을 하라.” 이에 곽광은 자신이 김일제보다 못하다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양했다. 김일제도 자신은 외국인이며 곽광보다 못하다고 말하자 무제는 곽광을 대사마대장군, 김일제를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하고 어린 황제를 보필하라는 유조遺詔를 남기고 다시 김일제를 제후국의 왕인 투후로 봉했다.

제천금인 기록
봉암사鳳巖寺 지증대사적조탑비명智證大師寂照塔碑銘
석당동표정치지추昔當東表鼎峙之秋 유백제소도지의有百濟 蘇塗之儀 약감천금인지사若甘泉金人之祀

❷ 『사기색은史記索隱』의 위소韋昭의 말
작금인이위제천주作金人以爲祭天主

❸ 『흉노통사匈奴通史』의 최호崔浩의 말
호제이금인위주胡祭以金人爲主 금부도금인야今浮圖金人也

❹ 본이휴도작금인本以休屠作金人 위제천주爲祭天主 고인사성김씨운故因賜姓金氏云 : 본래 휴도왕休屠王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제천祭天한 까닭으로 김씨金氏의 성을 주었다고 한다. (『한서』 「김일제 열전」)

❺ 곽거병霍去病(서한의 군사가, 기원전 140년~기원전 117년)이 휴도왕休屠王의 제천금인祭天金人을 얻은 것은 기원전 2세기 말이고 인도에서 불상을 조각하고 불상을 채용한 시기는 이보다 늦으므로 이 금인金人은 불상이 될 수 없다. 만약 불상이라면 제불금인祭佛金人 또는 부도금인浮圖金人이라 불러야 한다. 우리는 이 제천금인을 흉노휴도왕의 제천용祭天用으로 보며 불교와는 연관이 없다고 본다. (천쉬징陳序經, 『흉노통사』)

사무라이의 기원, 삼시랑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연 주축들은 모두 젊은 사무라이들이다. 사무라이는 고구려의 조의선인, 백제의 무절, 신라 화랑도의 정신을 융합하여 계승했다. 그 근원은 신시배달의 삼(시)랑문화이다. 삼랑은 삼신상제님을 모시는 한민족 고유의 신교 종교 집단이자 앨리트 무사도武士道 집단이었다.

護守三神(호수삼신)하야 以理人命者(이리인명자)를 爲三侍郞(위삼시랑)이니
本三神侍從之郞(본삼신시종지랑)이오
三郞(삼랑)은 本倍達臣(본배달신)이니 亦世襲三神護守之官也(역세습삼신호수지관야)니라.
삼신을 수호하여 인명을 다스리는 자를 삼시랑三侍郞라 하는데,
본래 삼신을 시종侍從하는 벼슬이다.
삼랑三郞은 본래 배달倍達의 신하이며,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을 세습하였다. ( 『 환단고기』 「신시본기」)


일본에 삼랑문화를 전한 최초의 사무라이는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아메노 히보코)이다. 또한 천일창은 웅신단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옴으로써 일본 신사문화의 뿌리이기도 하다.

사무라이는 한자로 모실 시侍 자, 또는 선비 사士 자를 쓴다. 일본 봉건 시대의 무사 계급을 말한다. 원래는 유력 귀족이나 여러 다이후大夫를 섬기는 통상 위계 6위 정도의 하급 기능직 관인층이다. 일본에서 사무라이 문화가 대두된 것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가마쿠라鎌倉막부幕府를 세우면서이다. 요리토모는 세 아들을 사무라이로 키웠다.

사무라이는 세 가지 특권을 가졌다. 기리스테고멘切捨御免, 타이토帶刀, 묘지名字가 그것이다.

‘묘지’는 성姓을 가질 수 있는 특권이고, ‘ 기리스테고멘’은 평민이 사무라이에게 누를 범했을 경우 그 자리에서 목을 벨수 있는 특권이며, ‘타이토’는 칼을 허리에 차고 다닐 수 있는 특권이다. 여기서 기시스테고멘과 타이토는 고구려의 조의선인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일본 사무라이들만의 독특한 할복腹切り(はらきり) 문화는 나라와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신라 화랑도 정신의 변형이다. 일본 사무라이문화의 결정판은 가모족鴨族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의 손자 이에미쓰의 손으로 완성되었다.

대마도의 명칭 변화
1855년~1877년에 발행한 영국 지도에는, 대마도를 ‘두 섬(Tsu Island)’으로 표기했다. 이것은 우리 선조들이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대마도를 ‘두 섬’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다. 나중에 일본이 ‘두Tsu’라는 명칭은 그대로 인용하고 뒤에 섬Island 대신 시마sima(섬, 島)를 붙여서 ‘쓰시마Tsusima’라 한 것이다.

대마도는 삼가라三加羅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
1948년 8월 18일. 이날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사흘째로 이승만 대통령의 첫 기자회견이 열렸다.

“우리는 일본에 대마도를 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대마도는 우리 영토인데 350년 전 일본이 탈취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 기자회견은 이듬해에도 계속됐다.

왜 이승만 대통령은 첫 기자회견에서 ‘대마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였으며 또한 대마도 반환을 언급한 것인가?

우리가 모르는 역사의 비밀을 이승만 대통령과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한국이 다스렸던 대마도#
1) 대마도 명칭의 유래
대마도는 두 개의 섬으로 되어 있다. 제주도의 약 3분의 1 크기에 3만여 명의 사람들이 살고있다. 부산에서 약 50km, 일본 규슈에서는 약 82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대마도對馬島는 이름의 유래를 보더라도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대마는 바다 건너 조선의 마한과 마주 대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마도는 두 개의 섬으로 되어 있어, 우리 선조들이 ‘두 섬’으로 부르던 것을 후에 ‘섬’을 뜻하는 일본어 ‘시마’를 붙여 ‘두시마’, 즉 ‘쓰시마’로 불리게 되었다. 어원과 명칭이 모두 우리나라에서 비롯된 것이다.


2) 한국의 지배를 받은 대마도의 역사
대마도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문화가 전수되는 첫 번째 관문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일본은 한국의 식민지배를 위해서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던 소통로인 대마도를 가만두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역사학자 다보하시 기요시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으로 활동하던 1923년 7월 동경제대 출신 구로이타 가쓰미와 함께 대마도로 건너가 한국 관련 문서 6만 6,469매, 고기록류 3,576권, 고지도 36매, 고서 18점, 그림 53점 등을 은폐하거나 태워 버렸다고 한다. (출처: 하라다 사이에쿠, 『역사와 현대』)

그럼에도 대마도의 역사를 밝히는 기록은 여러 사서에 남아 있다.

❶ 고려 시대의 대마도
『고려사』에는 대마도 도주가 고려의 무관 벼슬인 ‘만호’관직을 갖고 있었다는 것 역시 고려가 대마도를 실제로 다스렸다는 것을 말해 준다.

❷ 조선 시대의 대마도
조선 『세종실록』에 “대마라는 섬은 본시 계림(신라)에 속한 우리나라 땅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더욱이 1750년 제작된 『해동지도』에는 대마도가 부산 동래의 행정구역임을 밝히고 있으며, ‘백두산은 머리이고 대관령은 척추이며 영남 지방의 대마도와 호남 지방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고 함으로써, 제주도와 함께 조선의 기운이 흐르는 우리 영토로 지정하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전도와 19세기 이후 외국인이 그린 여러 지도에서도 대마도를 일본의 영토가 아닌 한국의 영토로 분명히 그려 놓고 있다.

❸ 사국 시대의 대마도
대마도가 한국의 역사 강역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은 고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대마도에는 단군조선으로부터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문화의 체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상대마上對馬의 가미쓰시마 안의 히타카츠와 도요에서는 가야식 고분과 김해 지방에서 사용되던 토기가 발굴되었다. 미네에서는 세형동검과 환두대도가 발굴되었는데, 특히 환두대도는 대마도와 가야의 연관성을 보여 주는 중요한 표지 유물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대마도를 다스렸다는 놀라운 역사 진실을 밝히고 있다. 대마도가 곧 임나이며, 삼국이 나누어 다스렸던 삼가라였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현지답사를 해 보면 상대마 지역에‘좌호佐護’, 도요타마에는 인위仁位, 미쓰시마에는 계지鷄知라는 이름으로 삼가라의 지명이 도로표지판과 우체국명 등에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대마도는 일본 열도 개척의 첫 관문
대마도의 고대 역사 진실을 밝히는 것은 한국과 일본의 시원 역사에 얽힌 실타래를 푸는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일본 역사문화의 원류와 10만 개 신사문화의 원형정신도 바로 대마도에 살아 있다.

대마도는 배달·단군조선 이후 도래인들이 넘어가일본 열도를 개척하기 위해 발판으로 삼은 전진기지이자 문화 전수의 첫 관문이었다

일본의 창세신화는 단군신화와 유사
일제강점기에 한국사를 연구했던 일본인 학자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는 ‘신라에서 일본에 건너온 아메노히보코天日槍 왕자가 가져온 곰신단(熊の神籬)이 고조선의 태양신을 모셔다 제사 지내는 하늘의 제사 종교의식’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일본 교토京都산업대 문화학부 교수는 “한국 단군檀君신화의 환웅桓雄과 가야의 수로왕, 일본 개국 신화에 등장하는 천손 니니기瓊瓊杵가 서로 유사한 요소를 갖고 있다.”며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가 한반도계^중국계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자나기^이자나미 부부신
남신인 이자나기와 여신인 이자나미가 천부교天浮橋 위에서 긴 창으로 바다를 휘휘 저어서 오노고로시마淤能碁呂島가 되었고 이 섬을 ‘국중지주國中之柱’로 삼고 담로도淡路島, 사국四國, 은기도隠岐島, 구주九州, 일기도壹岐島, 대마도對馬島, 좌도도佐渡島, 본주本州 등을 대팔주大八州로 삼았다. 이것이 일본열도 창조 신화이다. 여기서 창을 가지고 휘저음으로써 만들어진 섬이 바로 일기도이다. 또한 한반도에 속해 있었던 대마도를 천부교로 표현하였다. 이 신화는 아마테라스가 대마도를 발판으로 일본 최초의 섬인 오노고로시마 즉 일기도를 정복한 다음 일본열도를 차례차례 정복해 나간 것을 상징한다.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천부교天浮橋 위에 서서 함께 의논하여 “이 아래에 어찌 나라가 없겠는가?”라고 말하며 창을 아래로 휘저어 푸른 바다를 찾았다. 그 창날 끝에서 뚝뚝 떨어진 바닷물이 응고되어 하나의 섬이 되었다. 이를 일러 은어려도磤馭慮島(오노고로시마)라 한다.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그 섬에 내려가 부부가 되어 살면서 국토를 낳고자 하였다. 그래서 은어려도를 나라의 중심 기둥으로 삼아 이자나기(陽神)는 왼쪽으로 기둥을 돌고 이자나미(陰神)는 오른쪽으로 돌았다. 이 두 신이 기둥을 나누어 돌다가 건너편에서 서로 만났다. ( 『일본서기』 「신대上」)

대마도의 대표적 신사들
천도天道신앙의 두 신사, 천신다구두혼 신사·다구두혼 신사
1443년, 서장관으로 대마도와 일본을 다녀온 신숙주(1417~1475)가 세종의 왕명을 받아 편찬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에는 대마도에 살아 있는 소도문화 풍습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대마도의 남쪽과 북쪽에 높은 산이 있다. 두 곳 모두 천신산이라고 하는데 남쪽은 아들신 산(子神山)이고, 북쪽은 어머니신 산(母神山)이라고 한다. 그곳에서는 신을 숭상하여 집집마다 음식을 차려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다. 산과 들의 초목과 짐승은 누구도 감히 침범할 수 없으며 죄인이 도망쳐 신당神堂 안으로 들어가면 또한 감히 쫓아가서 잡지 못하였다.”


대마도 전역에는 천신다구두혼 신사와 다구두혼 신사를 중심으로 단군조선의 소도蘇塗제천 성지聖地 문화가 민간에 퍼져 있는데 이것을 대마도에서는 천도天道신앙이라고 한다.

천신다구두혼 신사 외에도 많은 소도가 지금도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람 키 높이의 돌무지탑을 이름하여 ‘액막이’라는 뜻의 ‘야쿠마의 탑(ヤクマの塔)’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천신다구두혼 신사에는 우리의 서낭당에서볼 수 있는 돌무지탑과 제단이 있다. 소도로 삼고 천제를 모셨던 신앙의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천신다구두혼 신사에서 모시는 제신이다. 이곳은 바로 신사의 뒤쪽에 있는 세 봉우리의 산을 신체神體로 모시고 있다. 이 세 봉우리의 산을 천도산天道山 또는 천신산天神山으로 부른다. 우리가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을 신성시하여 삼신산三神山으로 모시듯이 대마도에서도 이 천도산을 삼신산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천신다구두혼 신사 근처에는 신황산영존神皇産靈尊을 모시는 두 신사가 있다. 먼저 사고강(좌호강) 건너 천신다구두혼 신사天神多久頭魂神社와 마주 대하고 있는 신어혼 신사神御魂神社가 있다. 그리고 동쪽으로 20여 분을 차로 가면 주지노구두 신사舟志乃久頭神社가 있다. 작은 시골길 옆나무들에 둘러싸인 인적이 없는 조용한 이 신사도 신황산영존神皇産靈尊을 모시고 서낭당 돌무지탑의 영향을 받은 석탑이 양쪽으로 서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신황산영존神皇産靈尊이 다구두혼신多久頭魂神의 어머니신(母神)이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는 점이다.

천신다구두혼 신사와 관련된 설화에 따르면, 태양신의 기운을 받은 여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를 천동天童이라고 했다. 일본의 학자들은 천동天童신앙이 후대에 천도天道신앙으로 변한 걸로 보고 있다.

이즈하라는 대마도를 다스린 종씨의 본거지(万松院)이다. 이즈하라현에서는 해마다 7월 24일이면 어린아이들을 위한 축제인 지조봉地蔵盆 마츠리가 열린다. 이즈하라 시내 골목을 다니다 보면 지장보살 동자상을 모시거나 작은 돌을 모신 아기자기한 신사들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천동신앙이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단군문화기행>의 저자인 박성수 교수도 ‘이곳 청수산에서 내려다보면 하치만궁이 있는데, 청수淸水는 약수, 곧 신수神水라는 뜻이므로 하치만궁도 본래는 천동天童, 곧 단군을 모신 천도 신사의 하나였다’고 그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대마도의 남쪽 츠츠 마을에 있는 다구두혼 신사多久頭魂神社는 아들신(子神) 천도산(龍良山)을 섬긴 신사라 본전이 없었는데, 신불습합神佛習合으로 불교가 유입되면서 현재와 같은 신사가 생겼다. 신사 뒤편에 서낭당의 당산나무 같은 큰 녹나무가 있는데 이는 원래 소도의 신단수에서 유래했다. 신사 부근의 소토산卒土山에는 팔정각八丁角이라는 성지가 있는데, 소토란 삼한의 소도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다구두혼 신사多久頭魂神社를 오르는 첫 번째 도리이를 지나면 고황산영존을 제신으로 모시는 고어혼 신사高御魂神社가 있다.

일본의 역사학자인 오카 마사오岡正雄(1898-1982)는 천신인 환인이 아들 환웅에게 ‘3종의 보기寶器’를 주어 신단수 아래로 내려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한 단군신화의 내용을 본뜬 것이 일본 신화이며 일본 황실‘신기神器 3종’의 발자취라고 하였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미루어 볼 때, 일본 창세신화 속 조화삼신인 고황산영존高皇産靈尊과 신황산영존神皇産靈尊은 각각 한민족 상고 역사의 주인공인 환웅천황과 황후인 웅녀이며 그 자녀인 다구두혼신多久頭魂神은 단군왕검으로 볼 수 있다.

동방 신교의 소도제천 문화가 북삼한과 남삼한에서 도래한 개척자들에 의해 일본 문화의 자궁인 대마도에 유입되었고, 또 일본열도에 전해졌다.

대마국의 제일궁 해신海神 신사 가이진 진자
북대마도의 서쪽, 한반도를 향해 서 있는 해신海神 신사! 이곳은 처음에 ‘해신의 아들’을 뜻하는 ‘와타즈미わたづみ 미코御子’ 신사로 불렸었다. 이후 하치만 신앙과 결합하여 하치만궁八幡宮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대마국對馬國 제일궁第一宮 신사가 되었다. 명치 3년에 와타즈미 신사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현재 한자 표기의 해신 신사로 바뀌었다.

인위항(니이仁位) 근처에 위치한 와타즈미(和多都美) 신사와 함께 일본 초대 왕 신무神武의 할머니인 도요타마히메, 즉 풍옥희豊玉姫命와 아버지인 우가야후키아에즈(鵜茅草葺不合)를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있다.

해신 신사는 일본 하치만八幡 신앙의 발상지로도 여겨진다. 하치만八幡신은 한반도에서 넘어간 대표적인 신으로 원래는 야하타八幡신이라 불렸다. 이 야하타신의 유래는 가라쿠니辛国와 깊은 연관이 있는데, 가라쿠니는 일반적으로 가락국, 즉 가야를 의미한다.

해신 신사 앞 해안가에는 소도제천 문화의 상징인 서낭당 돌무지탑이 바다 건너 한반도를 향해 기도하듯 늘어서 있다. 신사 안에는 신라 시대의 동조여래입상과 고마이누 석상 등이 있어 예로부터 한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일본 역사서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많은 신들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들이다. 그러나 대륙과 한반도와의 관계를 감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역사 인물들을 신화 속의 신神으로 각색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후세들은 일본 창세역사 속 인물들을 신화로만 알게 되어 역사의 뿌리를 더욱 알기 어려워졌다.

일본 왕실의 본향 와타즈미和多都美신사
와타즈미 신사는 대마도의 중앙 인위仁位 지역에 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오가던 뱃길의 중간에 위치해 지정학적 의미가 매우 큰 곳이다. 더불어 와타즈미 신사는 일본 건국신화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무대이자 고대 일본 신도神道의 성지이기도 하다. 이곳은 니니기의 아들인 히코호호데미노 미코토彦火火出見尊와 바다 신의 딸인 토요타마-히메 즉 풍옥희豊玉姫를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있다.

일본 건국신화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신무왕의 할아버지 히코호호데미노 미코토彦火火出見尊는 잃어버린 화살을 찾기 위해 용궁을 방문했다가 바다 신의 딸인 도요타마히메豊玉姫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우가야 후키아에즈(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彦波瀲武鸕鷀草葺不合尊)이다. 나중에 이모인 다마요리히메玉依姫와 결혼하여 네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넷째가 협야狹野로서 훗날 일본을 건국한 초대 신무神武왕이다. 이상의 내용만 보더라도 와타즈미 신사는 일본 왕실의 본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환단고기』에는 신무왕 부자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어 놀라움을 주고 있다. 제35대 사벌 단군 때 바다 위웅습熊襲을 평정한 장수 언파불합彦波不合과 제36대 매륵단군 때 삼도(왜 열도)를 평정한 협야후 배반명이 그들이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언파불합과 협야후 배반명이 부자 관계’로 나오고 있어 『환단고기』 기록의 정합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창세역사의 신비를 품은 와타즈미 신사는 그 이름에서도 한반도와의 연관성을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 모시는 제신 도요타마히메(풍옥희)는 해신의 딸이다. 신사 이름의 ‘와타(わた)’는 ‘바다(海)’를 뜻한다. 또 그들은 배를 모시고 있다. 와타즈미 신사의 도리이는 다섯 개인데 모두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곳은 일본 내륙이 아니라 바다건너 한반도를 향하고 있다. 다섯 개의 도리이를 일직선으로 연결하면 닿는 곳! 바로 그곳에 거제도 가라산이 있다!

해발 585m의 가라산加羅山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어 예로부터 군사 요충지였다. 그리고 태평양을 향해 있는 항구가 있다. 김해의 금관가야와 거제도에서 대마도를 오갈 때 표지가 됐던 가라산! 이것이 다섯 개의 도리이가 가리키는 비밀이다.

한편 규슈 서북쪽의 당진唐津시는 ‘가라쓰’로 불린다. 바로 ‘가야인들의 항구’라는 뜻이다. 동북쪽에 있는 이토시마糸島시에도 해발 365m의 가야산可也山이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거제도-대마도-북규슈의 가라쓰로 이어지는 바닷길은 해상왕국 가야인들이 개척하며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연결하던 가야의 해상 실크로드였다.

해상 소도蘇塗 오키노시마沖ノ島와 종상대사宗像大社
대마도와 일기도의 동쪽 망망대해에 홀로 있는 섬이 있다.

바로 삼신三神이 머무는 섬! 오키노시마沖ノ島! 지금도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될 정도로 바다 위에 존재하는 신성불가침의 성역 오키노시마沖ノ島는 마치 해상 소도蘇塗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오키노시마는 가야의 해상 활동이 왕성하던 4세기 후반부터 9세기 헤이안 시대까지 5백여 년에 걸쳐 만들어진 스물두 개의 제사 유적에서 십만여 점의 국보급 문화재가 출토되었다. 가야계 청동거울, 곡옥, 동검 등의 신기삼종神器三種을 비롯해 각종 철제 무기류 그리고 우주 원십자형 순금 반지와 신선문화를 상징하는 말 꾸미개 등 해상왕국 가야의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는 이들 제사 유물은 규슈북부(무나카타시宗像市) 종상대사 신보관神宝館에서 소장, 전시하고 있다.

5백여 년간 행해졌던 해상 소도 오키노시마의 제천문화는 신사 배치에도 그대로 녹아 있다. 세 곳에 신사를 만들어 세 여신을 모시는 종상대사!

오키노시마沖島 충진궁沖津宮 ; 다고리히메田心姫神
오오시마大島 중진궁中津宮 ; 다키츠히메湍津姫神
무나카타시田島 변진궁辺津宮 ; 이치키시마히메市杵島姫神

이러한 삼신문화의 체계는 규슈의 우사하치만신궁宇佐神宮(다가와시田川市)과 히코산신궁英彦山神宮(무나카타시宗像市)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상에서 볼 때 신교의 삼신문화가 일본열도에서도 제일 먼저 규슈에서 활짝 꽃피웠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무나카타시 종상대사의 신성한 숲에는 ‘신이 강림한 땅’이 있는데 고궁제장高宮祭場이라 하여 사각형의 터에 신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바로 히모로기神籬 제단의 원형이자 삼신문화의 으뜸이 되는 신상, 곧 ‘종상宗像’의 실체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지배 세력이었던 무나카타 종상씨들은 삼한의 소도제천 문화에서 가장 존귀한 신상神像을 모시고 건너간 도래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자료>
『환단고기』 완역본
『오순제 박사의 대마도 역사기행』
『쓰시마 여행기』 2001안보회
『단군문화기행』 박성수
『삼국유사』 일연
『해동제국기』 신숙주
『일본은 한국이더라』 김향수
『일본민족문화의 원류와 일본국가의 형성』 오카마사오
<참고영상>
일본 매일방송 <종상대사와 오키노시마>
일본 SAGA TV <오키노시마의 보물>
종상대사∙오키노시마 관련유산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