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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문무겸비와 지행합일의 나주 정씨羅州丁氏

    이명규(객원기자) / 서울목동도장

    우리나라의 정씨는 나라 이름 정鄭 자를 쓰는 정씨鄭氏, 넷째 천간 정丁 자를 쓰는 정씨, 단위 정程 자를 쓰는 정씨가 있다. 우리나라 정씨는 대부분 나라 정鄭 자를 쓰고 있다.

    정씨丁氏는 당나라 출신인 정덕성丁德盛을 도시조都始祖로 한다. 이를 압해 정씨押海丁氏라고 하는데, 후대에 나주 정씨羅州丁氏·영광 정씨靈光丁氏·의성 정씨義城丁氏·창원 정씨昌原丁氏로 분관되었다. 이번 달에는 ‘9대옥당’을 배출한 나주 정씨를 알아보자.

    나주 정씨羅州丁氏의 유래


    나주 정씨의 본관
    나주 정씨羅州丁氏의 본관은 처음에는 압해押解였다. 압해현은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면으로, 고려 초에는 나주에 속한 현이었으나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으로 모두 나주로 철수하여 한때 무인도가 되자 조선조 태종 9년(1409년)에 이르러서는 폐현廢縣이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나주 정씨는 한동안 관적을 나주압해 정씨로 쓰다가 영조 연간에 이르러서 마침내 나주로 본관을 고쳐 오늘날까지 사용해 오고 있다.

    시조 정덕성丁德盛
    나주 정씨羅州丁氏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정덕성丁德盛이 나온다. 정덕성은 당나라 등주鄧州의 정영丁營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과거에 급제한 후 문종 때 대승상에 오르고, 무종 때 대양군大陽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선종 때 직언 상소한 것이 노여움을 사 아들, 손자 등과 함께 지금의 전남 신안 압해도押海島에 유배되었다. 후에 당나라에서 죄를 사하고 입조하라고 하는 칙서가 왔으나, 노약한 몸을 이끌고 돌아갈 수 없어서 압해도押解島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 후손들이 압해 정씨라고 정하고 세계를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씨丁氏의 연원은 중국이다. 중국에서 정씨丁氏가 생겨난 연원을 따지면 3,000년 전 주周나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주나라의 첫 번째 제후가 주나라의 큰 공신이었는데, 아들 강급姜伋이 죽은 이후 그 시호를 정丁이라 하였는데, 그 이후 그의 지손支孫들이 정씨丁氏를 성姓으로 삼았다(姜子牙是周朝的大功臣﹐兒子姜伋死後﹐也被周王追謚為丁公﹐其子孫便以丁為姓) - 「통지通志·씨족략氏族略」, 남송의 사학자 정초鄭樵 찬撰

    현재 중국에서는 정씨를 제양당齊陽堂 정씨丁氏라 칭하고 있다. 하지만, 정약용丁若鏞은 정덕성을 도시조로 하는 압해 정씨의 연원을 이야기하면서도, ‘사실 관계에 대한 고증이 어렵다’며 회의를 표하기도 했다.

    나주 정씨의 분파
    나주정씨종회羅州丁氏宗會에서 펴낸 ‘월헌집月軒集’에는 문과급제자 64명의 명단이 실려 있다. 기호畿湖의 현성顯姓이라 하지만 한 문중에서 이만한 수의 대과 합격자를 낸 씨족도 드물다. 조선조 9대 옥당玉堂은 나주 정씨뿐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정조正祖가 “옥당玉堂(홍문관)은 정가세전지물丁家世傳之物”이라고 했을 정도다. 뿐만 아니라 나주 정씨는 문필에 능한 문한文翰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분도 많다. 대표적인 인물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 정약전丁若銓·정약종丁若鍾의 형제들이지만, 이분들 말고도 유명한 문집으로 역사에 이름을 빛낸 분이 여러 명이다. 그중에 앞서 언급한 ‘월헌집月軒集’은 병조참판을 지낸 정수강丁壽崗의 저작 문집이며, 영조대왕이 어제어필御製御筆로 칭찬을 하였다. 그 외 정범조丁範祖의 ‘해좌문집海左文集’, 정시한丁時翰의 ‘우담문집愚潭文集’ 등이 있다. 말하자면 나주 정씨는 사신뿐 아니라 문행과 학덕으로 나라 안에 널리 이름을 빛낸 인물들을 배출한 명족이라고 한다.

    나주 정씨羅州丁氏의 파명派名을 보면, 크게는 교리공파校理公派, 월헌공파月軒公派로 나뉜다. 족보族譜 경오보庚午譜 서문에는 나주 정씨는 고려조에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낸 정윤종丁允宗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작게는 교리공파校理公派에 사직공파司直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 부사공파府使公派로, 월헌공파月軒公派에 문화공파文化公派, 공안공파恭安公派, 첨정공파僉正公派, 연안부사파延安府使, 어사공파御使公派, 전적공파典籍公派, 서윤공파庶尹公派, 야은공파野隱公派, 사련공파司公派로 나뉘어졌다.

    나주 정씨羅州丁氏의 대표적 인물


    월헌月軒 정수강丁壽崗은 학문에 뛰어난 문장가
    월헌月軒 정수강丁壽崗은 이미 십대에 사서오경四書五經은 물론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이르기까지 두루 익혀 성종 5년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그 3년 뒤에 문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그의 관직 이력을 보면 성종 2년 이후부터 연산군 5년에 이르기까지의 8년간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 성종 22년에 가지고 있던 직책은 사간원의 정언正言(정6품 간언관)이었다. 생애 자료에는 적시되지 않았지만, 실록을 보니 동료들과 의견을 달리한 사유로 사직을 위한 그의 상소문이 올라 있다. 월헌은 이때 국경을 범한 북방 오랑캐들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주청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사간원 동료들의 반대 의견을 따랐고, 이에 월헌공의 주장은 배제되었다. 월헌이 당시에 주장한 북벌론은 그 실상과 아울러 역사적인 의의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후 8년간 월헌에게 관직이 제수된 사실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월헌은 문장뿐 아니라 학문과 행검이 모두 뛰어나 연산군 당시에 홍문관의 부제학副提學이 되었고 성균관의 대사성大司成이 되었으나 끝내 사퇴로 일관해 연산군의 비위를 거슬러 ‘영구히 벼슬길에 들어 쓰지 말라’는 왕명이 있었다. 중종반정으로 원종공신에 녹훈됨과 아울러 3대에 대한 추증이 있었다.

    9대 옥당(홍문관) 배출에는 까닭이 있었다
    월석月石 정수곤丁壽崑은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지냈는데 특히 문장에 뛰어나 ‘동방문선東方文選’에 그의 시문이 실려 있다. 월봉月峰 정옥형丁玉亨은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간 뒤 검열檢閱 이조정랑吏曹正郞·장령掌令을 거쳐 판결사判決事를 지냈으며 병·형조판서兵·刑曹判書에 있을 때 법령의 모순을 조정한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을 저술했다. 그는 또 진하사進賀使로 명에 다녀왔으며 보익삼등공신保翼三等功臣·금천군錦川君에 봉해졌으며,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라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지냈다. 예법에 통달하여 중종, 인종의 국장國葬 때 제조提調가 되었고 명종 때 공안恭安의 시호가 내려졌다.

    삼양재三養齊 정응두丁應斗는 조선조 중종 29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중종 33년 호당湖當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이조좌랑吏曹佐郞·정언正言·교리校理·사간司諫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승진하여 참의參議, 대사간大司諫, 승지承旨, 대사헌大司憲, 경상·경기·평안·함경·전라관찰사, 공조참판을 거쳐 병조판서, 좌우찬성에 이르렀다. 그는 천성이 부지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고, 덕성이 뛰어나 효행과 의義·열烈에 본보기가 되었다고 한다. 관압사管押使로 중국에 가서는 ‘강목광의綱目廣義’, ‘무경武經’ 등의 서적을 가져오기도 했으며, 국방 강화를 주장한 ‘삼도관방록三道關防錄’을 저술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정忠靖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우은寓隱 정시술丁時述은 보첩譜牒에 밝아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가 되어 ‘선원록璿源錄’을 교정하였고,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를 저술하였다. 정도복丁道復은 태안, 춘천, 안주에 재임해 있을 때 선정을 베푸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를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좌승지左承旨, 홍문관弘文館, 경연관經筵官 등을 역임했다.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은 독학으로 성리학을 연구하였고 원주에 은거하며 후진 양성과 농업에 종사하였다. 도학군자로 명성이 높아 여러 차례 집의執義, 사업司業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진선進善에 있을 때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위를 잘못이라 상소하였다가 삭직削職을 당했다. 숙종 22년 장희빈의 강호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는 등 당파와는 관계없이 자기 뜻을 기탄없이 토론하였는데, 그의 학문은 정약용丁若鏞, 이익李瀷 등 실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담愚潭 선생이라 불리었으며, 광암사廣岩祠에 향사享祀하였다.

    두호斗湖 정시윤丁時潤은 문과에 급제한 후 삼사三司를 두루 역임했다. 시강원 필선에 있을 때 탐관오리의 처단과 빈민 구제를 주장했으며, 정씨족보丁氏族譜(순천보順天譜)를 간행했다.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는 홍문관에 들어간 뒤 대사간大司諫·이참吏參·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홍문관제학에 이르렀고 순조 1년에는 지실록사知實錄事가 되어 ‘정조실록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3불운한 조선의 천재,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가족#>
    정약용丁若鏞(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은 남인南人 가문 출신으로, 이익李瀷의 유고遺稿를 보고 민생을 위한 경세의 학문에 뜻을 두고 이얼李蘖(둘째 형 약전의 처남)에게 서학을 배웠다. 그는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청년기에 접한 서학西學(천주교) 때문에 주문모周文謨 사건에 연관되어 좌천되었고 신유박해辛酉迫害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으로 인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기나긴 유배 기간 동안 학문적인 체계를 완성하고 5백여 권의 많은 저서를 남겼다.

    사실 정약용은 벼슬길에 오른 뒤 서학과 거리를 두었다. 그가 천주교에 거리를 둔 결정적인 계기는 진산사건珍山事件이었다. 1791년, 전라도 진산珍山(지금의 충남 금산)에서 윤지충尹持忠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들인 윤지충은 어머니의 상喪을 천주교식으로 치렀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神主를 불살랐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단정했다. 천주교 서적의 수입을 금하고 윤지충을 전주 감영에서 참수형에 처했다. 신해박해辛亥迫害다. 정약용은 천주교가 아무리 평등하고 개방적인 사상이라고 해도 우리의 전통인 제사를 거부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1797년 정약용은 정조에게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배교背敎 사실을 공개했다.

    그는 유배 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하여 일표이서一表二書(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 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왕조적王朝的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다산茶山 정약용의 사상은 당시 사회가 직면해 있던 봉건적 질곡桎梏을 극복할 수 있는 탁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그를 실학사상實學思想의 집대성자集大成者이자, 조선 후기 사회가 배출한 대표적 개혁사상가로 평가하고 있다.

    일성루一成樓 정약전丁若銓은 왕명으로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를 편찬한 뒤에는 벼슬을 버리고 천주교에 입교하여 전교傳敎에 힘을 기울였으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자산어보玆山漁譜’, ‘논어탄論語灘’, ‘송정사의松政私議’ 등을 저술했다.

    정약종丁若鍾 역시 천주교에 입교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회장天主敎會長으로 전교에 힘쓰다가 신유박해 때 옥사하였다.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丁夏祥은 9차례나 북경에 오가며 신부의 파견과 조선대리감목구朝鮮代理監牧區 설치를 요청하여 여러 번 서양의 신부를 맞아들이는 등 전교에 활약하였고 신학 교육을 받았으며, 기해박해 때 순교한 뒤에는 복자福者의 위에 올랐다. 그가 체포되기 전에 집필하였다는 ‘상재상서上宰相書’는 우리나라 유일의 호교론護敎論으로 중국에서도 널리 전도에 활용되었다.

    현대의 인물로 우향又香 정대유丁大有는 서예의 대가로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지냈는데 그림에도 능하여 매화를 특히 잘 그렸다.

    석인石人 정태진丁泰鎭은 신문학新文學에 뜻을 두어 연희전문학교, 미국 컬럼비아 대학원을 마친 뒤 함흥영생여고咸興永生女高에서 교편을 잡았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우리말 큰사전’을 편찬하다가 타계했다.

    나주 정씨는 도시조로부터 후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뛰어난 학행과 실천으로 대변되는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음을 알 수 있다. 9대 옥당玉堂 배출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 한편으로 월헌月軒 정수강丁壽崗은 국경을 범한 오랑캐들의 강력한 응징을 주장하여 동료들과 의견을 달리했던 사례다. 그리고 영창대군에게 죄를 주자는 주장을 처음 한 정호관丁好寬이나 실학사상의 집대성자이자 대표적 개혁사상가였던 정약용丁若鏞 등은 나주 정씨 가문에서 눈여겨봐야 할 인물들이다.

    나주 정씨와 같은 뿌리 정씨


    <3영광 정씨靈光丁氏#>
    영광 정씨는 다른 이름으로 영성 정씨靈城丁氏라고도 한다. 영광의 옛 이름이 영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손들은 본관을 다르게 쓰고 있다. 영광 정씨의 시조는 고려 고종 때에 태학생원太學生員을 지낸 정진丁晋인데, 그의 손자인 정찬丁贊이 공민왕 때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영성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영광 정씨 인물 중에는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부사직을 지낸 정곤의 아들이다. 단종 원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언에 이르렀다. 하지만, 단종이 왕위를 뺏기자 관직에서 물러나 전북 태인에서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가사문학 작품인 ‘상춘곡’을 지었으며, 저서로는 ‘불우헌집’이 전하고 있다. 또 일제강점기 이동백·송만갑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결성하여 근대 창극을 정립하는 데 기여를 한 정정열도 영광 정씨 사람이다.

    의성 정씨義城丁氏
    의성 정씨는 영광 정씨에서 분적한 성씨이다. 압해 정씨 도시조인 대양군大陽君 정덕성의 23세손인 정영손丁令孫은 공민왕 때 경산부사京山府使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다. 그 후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고,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기에 그 후손들이 의성을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의성 정씨에는 판서공파判書公派·야은공파野隱公派·부사공파府使公派 등이 있다.

    창원 정씨昌原丁氏
    창원 정씨는 선先 창원파와 후後 창원파로 나뉜다. 선창원파의 중시조는 정연방丁衍邦으로, 그는 상호군을 지냈다. 그의 계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정덕성의 손자 정응도와 고려 때 의창(창원의 옛 이름)군에 봉해진 정필진이 있다.
    후창원파의 중시조 정관丁寬은 고려 공민왕 때 공신이 되어 창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창원을 본관으로 삼았다. 창원 정씨의 인물로는 중종 때 정환丁煥·정황丁黃 형제가 있으며, 정춘丁春·정대수丁大水 등이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웠다. 정황은 인종의 장례 때 예법을 준수할 것을 주장하다가 정미사화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창원 정씨의 주요 파는 선창원계에서 부승공파·노위공파·사정공파가 있으며, 후창원계에서는 직장공파·현령공파·창랑공파 등이 있다.

    [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1) 한국인의 족보 (https://www.youtube.com/watch?v=QV4Xl8PoGtI)
    2) 위키백과 나주 정씨
    3)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4)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5) 김성회의 성씨 이야기
    6) 통계청 홈페이지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나주羅州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信者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흰 비단에 적어 중국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고자 한 밀서密書이다.

    주문모周文謨 사건
    1795년(정조 19년) 을묘년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체포하려다 놓친 을묘실포사건乙卯失捕事件을 계기로 전개된 천주교 박해의 옥사獄事를 가리킨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하남 정씨河南程氏
    하남河南은 경기도 하남이 아니라, 중국 화북華北 지역의 남부를 일컫는 말이다. 북쪽은 하북河北, 북동쪽은 산동山東, 동쪽은 안휘安徽, 남서쪽은 호북湖北, 서쪽은 섬서陝西, 북쪽은 산서山西와 접하고 있다. 예로부터 이 지역은 북에 황하, 남에 회하淮河가 흘러 수륙 교통이 편리하였기 때문에 중원中原이라고도 불렸다. 정씨程氏의 시조는 정우程羽이다. 그는 중국 후진後晉의 진사가 되었으며 송나라 태종 때 태자소사太子少師를 지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정씨의 시조는 그의 18세손인 정사조程思祖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입국할 때, 20여 명과 함께 배종하여 고려에 들어왔다. 충정왕 때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를 지냈고, 공민왕 때 한산군에 봉해졌다. 이에 후손이 정우를 시조로 정사조를 동래시조로 삼고 하남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나주 정씨 관련 유적
    석류재錫類齋 - 신안군 압해면 동서리 군암동 마을
    신안군 압해면 동서리 도창 마을에서 조천 마을로 넘어가는 중간 지점으로 해발 73.52m의 구남봉 남쪽 산사면 도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석류재는 압해 정씨(나주 정씨) 문중 재각으로 1957년에 건립하였다. 재각에는 오성공筽成公 및 태사공太師公의 위패가 봉안奉安되어 있다. 오성공은 정열도丁烈道이고, 정덕성의 아들이다. 태사공은 오성군의 양자로 신라 진성왕 때 태사령을 역임했다. 친부親父는 금성군이다. 석류재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이며 팔작지붕이다. 석류재 앞의 안내문에는 압해 정씨의 오성군과 태사공에 대한 이력 사항과 관련 유적으로 신도비와 석류재에 대한 연혁이 쓰여 있다.

    진주 평거 고려高麗 고분군古墳群 - 사적 제164호
    1079년(1호분)부터 1229년까지 150년간에 걸쳐 축조된 나주 정씨 고분군이다.

    경상남도 진주시 평거동에 있는 고려 시대 고분군은 평거동 석갑산石岬山 남사면에 축조되어 있는 총 6기의 고려 시대 방형분으로 호석護石에 고분의 축조 시기와 피장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6기 모두 나주 정씨羅州丁氏 집안의 무덤으로 고려 시대 1079년(1호분)부터 1229년(6호분)까지 150년간에 걸쳐 축조되었다.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내부 시설은 알 수 없으나,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이나 경기 지방의 조선 초기 방형분 등의 예를 통해 상자 모양의 석실일 것으로 추정된다.

    정옥형丁玉亨⋅정응두丁應斗 신도비神道碑
    정옥형丁玉亭 신도비神道碑는 용인시 양지면 제일리 산37-1번지의 황새말에서 총신대학교 대학원으로 들어가는 도로의 오른쪽에 있는 비각碑閣 안에 있다.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1호에 지정되었다. 공안공 정옥형丁玉亭 신도비神道碑는 방부개석方趺蓋石 양식으로 옥개석의 지붕 위쪽에서 처마 안쪽까지 기왓골이 도드라지게 표현되어 있다. 전액篆額은 “공안공신도비명恭安公神道碑銘”이라 하였다. 비문은 남양 홍씨로 영의정을 지낸 홍섬이 짓고 한호(석봉)가 썼으며 남응운이 두전頭篆을 했다. 충정공 정응두 신도비 역시 방부개석 양식이다. 비문碑文은 남구만이 짓고 썼으며 최석정이 두전을 했다. 총 높이 약 321cm, 비신 높이 234cm, 너비 94cm, 두께 42㎝이다.

    정옥형은 앞서 말한 대로 중종中宗 8년(151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정랑正郞,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大司諫,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大司憲, 판서判書 등을 지냈는데, 형조판서 재임 시 소윤小尹으로 대윤大尹의 제거에 협력하여 보익공신保翼功臣 3等에 책록되었다. 신도비神道碑란 왕이나 2품 이상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비에 새겨 그의 묘墓 가까이에 세워 두는 것으로, 이 비碑들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정옥형과 그의 아들 정응두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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