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신賢臣과 석학碩學의 산실 여산礪山 송씨宋氏

[한국의 성씨]

이명규(객원기자) / 서울목동도장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역사상 많은 현신賢臣과 석학碩學을 배출했으며, 특히 민족이 국난을 당할 때는 충절과 기개로서 민족 수호에 사력을 다한 우리 민족사에 빛나는 선조를 무수히 배출한 대성이다. 선계先系는 국내 송씨의 도시조라 할 수 있는 송주은宋柱殷의 후손인 송자영宋自英이 슬하에 3형제를 두었는데, 첫째가 여산 송씨의 시조인 송유익宋惟翊이요, 둘째가 은진 송씨의 시조인 송천익宋天翊이며, 셋째인 송문익宋文翊이 서산 송씨의 시조로서 우리나라 모든 송씨의 연원을 이루고 있다.

송씨宋氏의 연원


송씨의 시조는 상商나라(은殷나라) 30대 왕인 제을帝乙의 장자인 미자계微子啓인데, 왕위를 동생 신辛에게 빼앗겼다. 동생 신이 바로 은나라의 마지막 왕이자 폭군인 주紂왕이다. 주周 무왕武王이 혁명을 일으켜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미자계는 상나라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주 무왕이 폭군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을 제후로 봉하고 유민을 관리케 했으나, 다시 무경이 난을 일으키자 그를 진압하였다.

하지만 미자계는 무경의 난에 가담하지 않았으므로 은나라의 수도 호경鎬京에 식읍食邑을 주어 유민들을 관리케 하였다. 미자계가 제후로 봉해진 나라가 바로 송宋나라였다. 송나라는 이후 700년간 존속하다가 BCE 286년에 제, 위, 초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송나라 유민들이 송씨宋氏를 성으로 쓰면서 송씨가 생겨났다.

우리나라 송씨의 유래는 당나라에서 온 호부상서戶部尙書 송주은宋柱殷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국내 송씨의 도시조都始祖인 셈인데, 그가 우리나라에 온 이유는 분명치 않다. 그의 7세손인 송순공宋舜恭이 송성용宋成龍, 송흥용宋興龍, 송인용宋仁龍, 송복용宋福龍 4형제를 두었는데, 송인용의 후손이 진천 송씨鎭川宋氏가 되고, 송복용의 후손이 홍주 송씨洪州宋氏가 되었다. 또 장자인 송성용의 둘째 아들 송정열宋正烈의 후손은 신평 송씨新平宋氏가 되었고, 송성용의 장자인 송흥렬에서 야성 송씨冶城宋氏(둘째 송맹영宋孟英의 후손), 김해 송씨金海宋氏(셋째 송계영의 후손)가 갈려져 나갔다. 그 송흥렬의 장자가 송주은의 10세손인 송자영宋自英이며, 그가 송유익宋惟翊, 송천익宋天翊, 송문익宋文翊 3형제를 두어 각각 여산 송씨礪山宋氏, 은진 송씨恩津宋氏, 서산 송씨瑞山宋氏로 갈려져 나갔다고 한다.

고문헌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우리나라 송씨의 관향貫鄕은 무려 172본이나 된다. 172개 송씨의 본관 중에서 여산礪山⋅은진恩津⋅진천鎭川⋅남양南陽⋅용성龍城⋅철원鐵原⋅청주淸州⋅홍주洪州 등 20여 본관만이 현존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여산⋅은진⋅진천 세 본에서 전체 송씨의 9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밖의 송씨는 대부분이 여산이나 은진에서 분파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송씨는 근원을 같이 하는 종친으로, 이본異本이라 할지라도 서로 통혼하지 않는다.

씨족사 개요


여산 송씨礪山宋氏의 시작과 부침浮沈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송자영宋自英의 큰아들 송유익宋惟翊을 시조로 하는 성씨다. 시조 송유익은 고려 때 진사를 지냈으며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되었다. 조선 세종 때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 성씨조姓氏條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성씨조姓氏條를 보면 여산의 가장 대표적인 성씨였음을 알 수 있다. 송유익을 시조로 내세우기는 하지만, 가문의 번창을 가져온 것은 4세 송송례宋松禮에 이르러서였다.

4세손 송송례宋松禮의 자는 입인立仁, 시호는 정렬공貞烈公이다. 고려 원종 때에 완전 항복의 표시인 개경으로의 환도還都 여부를 두고 원종 측과 임유무林惟茂 측이 대립하고 있을 때 왕정복고王政復古에 기여한 공으로 추성익대보리동덕좌명공신推誠翊戴輔理同德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다. 계속 관직이 상승하여 후에 도첨의사사중찬都僉義使司中贊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에 의해서 가문 발전의 기초가 닦인 여산 송씨는 자손 대에까지 계속 번성을 하였다.

송송례의 큰아들인 송염宋琰은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올랐고, 그 아들인 송방영宋邦英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쳤으며 충렬왕을 보필하여 크게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송염宋琰계系보다는 그 동생인 송분宋玢계가 더욱 세력을 얻어 가세를 떨쳤다. 양의공송분良毅公宋玢은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1300년 우중찬右中贊으로 추성찬화안두공신推誠贊化安杜功臣이 되었다. 그의 네 아들인 송진宋瑨, 송린宋璘, 송유宋瑈, 송서宋瑞는 각각 우부승지右副承旨, 지신사知申事, 낭장郎將, 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을 지내, 부자에 걸쳐 모두 현달하였다. 그중에서도 송송례宋松禮 - 송분宋玢 - 송서宋瑞로 이어지는 3대에 걸쳐 상상上相을 역임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 충렬왕파로서 충선왕과 대립 관계에 있었는데, 충선왕이 원정에서 세력을 잡자 송방영宋邦英과 송린宋璘이 주륙誅戮되고, 송분가宋玢家도 적몰籍沒이 되는 정치적 파란도 겪어야만 했다.

여산 송씨의 분파
여산 송씨는 6세손에서 크게 5개 파로 갈라진다. 송휘宋煇계가 원윤공파元尹公派, 송방영宋邦英계가 밀직공파密直公派, 송원미宋元美계가 소윤공파小尹公派, 송린宋璘계가 지신공파知申公派, 송서宋瑞계가 정가공파正嘉公派로 나누어진다.

충렬왕 이후에 정치적 변동으로 가문이 적몰되기도 하였으나, 송씨 가문의 가세는 크게 손상받지는 않고 유지된 것 같다. 조선 개국 후에도 여전히 많은 관직자를 배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신공파知申公派의 11세손인 송현수宋玹壽 대에 이르러서는 단종비端宗妃(정순왕후定順王后)까지 배출하고 있다. 조선 개국 이후 여산 송씨가家의 유명 인물을 파별로 살펴보겠다.

원윤공파元尹公派
먼저 원윤공파元尹公派는 송염宋琰의 아들인 송휘宋煇를 파조로 하며, 그 5세손인 송문宋文에서부터 다시 덕산 송씨德山宋氏로 행세하다 평온을 되찾자 여산 송씨로 환원還元했다.

송거신宋居信은 시호가 충정忠靖이다. 조선 태종의 비 원경왕후와 친척이었으므로 태종 잠저시潜邸時에 수렵에 동행하였다가 호환虎患을 대신한 덕으로 태종이 즉위한 후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봉되었고 내자소경內資少卿, 호용순위사대호군虎勇巡衛司大護軍, 상호군上護軍, 우군첨총제右軍僉摠制 등을 역임하고 여량군礪良君에 봉해졌다.

원윤공의 5세손인 송문은 조선 개국 때 개국공신으로 덕성군德城君에 봉해졌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다.

송간宋侃은 원윤공元尹公의 6세손인데, 세종, 문종, 단종 3대에 걸쳐 벼슬을 하여 관직은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판서刑曹參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단종이 손위遜位하고 세조가 즉위한 후 영월로 노산군魯山君(단종)을 찾아 팔도진무사八道鎭撫使로써 순무巡撫 결과를 복명復命하고 단종이 시해당한 후에 김시습金時習, 조상치曺尙治 등과 함께 계룡산에 들어가 2년간 복상했다. 그 후 흥양興陽(현 고흥)에 은거하였다. 1791년 정조 때에 이르러 그의 유자적儒者的 충절이 인정되어 충강공忠剛公 시호諡號를 받아 서원에 배향되고 증직되었다.

원윤공 8세손 송익필宋翼弼의 자는 운장雲長이요 호號는 귀봉龜峰이다. 문장 도덕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이율곡李栗谷 성우계成牛溪와 더불어 도의로 사귀었으며 8대 문장의 한 사람으로 김사계金沙溪, 김신독재金愼獨齋, 서채봉徐菜峯, 민노봉閔老峯 등 많은 거유를 배출하였다. 후에 대제학을 증직받고 문경공文敬公으로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당진군唐津郡 입한재立限齋와 그 외의 여러 사우祠宇에 배향되었고 많은 유집遺集을 세상에 남기었다.

12세손인 송대립宋大立은 이순신 휘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순직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기록하고 호조참의兵曹參議의 벼슬을 증직하였다. 송대립宋大立의 아우인 송희립宋希立도 이순신 장군 밑에서 전투에 참가하였다. 충무공이 전사한 바로 그 전쟁터에서 그의 죽음을 감추고 끝까지 독전하여 승전으로 이끌었으며, 뒤에 선무원종공신 1등에 기록되었다. 임진년의 국난을 당하여 많은 충신, 의사를 배출한 것도 당시 가문의 큰 자랑이었다.

밀직공파密直公派
밀직공密直公 송방영宋邦英에게는 완琓, 표標, 군보君輔의 세 아들이 있었다. 송표宋標는 대광첨의大匡僉議 상호군上護軍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졌는데, 그의 아들 송유충宋有忠이 청주 송씨淸州宋氏의 비조鼻祖가 된다. 그는 충숙왕 때에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졌으나 그의 생졸生卒, 배위配位 및 묘소 등에 관한 문헌이 전해지지 않는다.

송승은宋承殷은 송유충의 손자로 단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행성균관대사성行成均館大司成이 되었는데 단종이 폐위되자 외직으로 나갔다. 칠원현감으로 부임하면서 가족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그의 후손들이 김해 서쪽 하계면下界面에 대대로 살게 되었다.

송정남宋廷男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송빈宋賓의 둘째 아들로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지어 조식曺植을 제향하고 수직壽職으로 통정첨지중추부사通政僉知中樞府使를 받았다. 그의 아들 송수는 부모에게 성경誠敬을 다한 것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숙종 연간에 『동국여지승람』을 신증할 때에 본 고을의 고적을 찾아 증보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소윤공파少尹公派
소윤공파는 송원미宋元美를 파조로 한다. 송륜宋倫은 소윤공의 증손인데, 세종 때 이래 광흥창승廣興倉丞으로 있다가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전라도 금구현으로 낙향, 은거하였다. 그의 아들 송극창宋克昌도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거쳐 영광군수로 재직하다가 부친과 함께 낙향한 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송천희宋千喜는 송극창宋克昌의 아들인데, 조선 성종 20년 문과에 급제한 후 삼사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황해도 관찰사, 부승지副承旨,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대사헌, 형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전선銓選(사람을 골라서 뽑음)에 사私가 없었다는 평을 들었고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소윤공 13세손 송일중宋日中은 시헌時獻의 아들로 호는 송재松齋, 필법이 절륜絶倫하여 명성이 일세에 진동하고 판서判書 이인징李麟徵이 중국 사신으로 갔을 때 그의 초예서草隸書를 보였더니 부신部臣들이 일자천금一字千金이라 이르더라 하였다.

지신공파知申公派
지신공파知申公派는 양의공良毅公 송분宋玢의 둘째 아들인 송린宋璘을 파조로 한다. 지신공의 후손들은 단종의 양위와 세조의 즉위를 둘러싸고 영욕을 번갈아 거치게 된다.

송익손宋益孫은 시호를 양묵襄墨이라 하며 자는 익지益之이다. 단종 원년에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 등을 제거한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이 되었다. 한성부판관, 종부시宗簿寺, 한성부, 예빈시禮賓寺의 소윤少尹을 거치고, 1463년 나주목사가 되어 여산군에 봉해졌다. 예종 원년에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오르고 부호군副護軍,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에 이르렀다. 이와는 달리 송석손宋碩孫은 단종 원년 거사에 반대하였고, 세조가 즉위하자 금마金馬(전북 익산)에 내려가 은거하였다.

여산 송씨의 후손들 중에서 세조의 즉위를 전후하여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단종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와 그의 부父인 송현수宋鉉壽이다. 송현수의 시호는 정민貞愍이며, 송복원宋復元의 아들이다. 본래 수양대군과는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단종 2년에 그의 딸이 비로 책봉되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使가 되고 여량군礪良君에 봉해졌다. 그런데 성삼문 등의 사육신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수양대군의 두둔으로 무사할 수 있었으나,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가 사사賜死됨에 이르러서는 생명조차 부지할 수 없었다. 세조의 공신들이 중심이 된 양사의 주장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그의 묘소조차 어디인지 찾을 수 없다. 숙종 24년(1698년) 노산군魯山君이 단종으로 복위되자 그 이듬해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추증되고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송현수의 딸로 단종비로 책봉된 정순왕후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됨에 이르러 부인夫人으로 강봉되었다. 그 후에 단종이 영월로 귀양 가자 청룡사靑龍寺에 스님으로 들어가서 일생을 마쳤다. 아버지 이하 일문이 멸족당하는 정치사의 변동 속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쳤을 것이다. 숙종조에 이르러 단종이 복위되자 왕비도 정순왕후로 추봉되었다. 청룡사靑龍寺는 후에 영조의 명에 의해 정업원淨業院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像賢은 송복흥宋復興의 아들로서 157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다. 주서注書, 경성판관鏡城判官을 거쳐 종계판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호조⋅예조⋅공조의 정랑正郞⋅사행감정司幸監正⋅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고 1591년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나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동래부사로 재직하면서 왜병에 항전하다 장렬히 전사한 것은 유명하다. 그의 충절을 기려 이조판서吏曹判書⋅찬성贊成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동래의 낙안서원樂安書院, 개성의 숭절서원崇節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고부의 정충사旌忠祠에 제향하였다.

송성명宋成明은 숙종 31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대사간⋅대사성⋅부제학을 역임하였는데, 청淸나라에 다녀온 후 도승지⋅예조판서 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지내고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을 편저하였다. 그 동생인 송진명宋眞明은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使를 역임하였고, 학행과 청렴으로 이름이 높았다.

지신공의 19세손인 송종혁宋鍾赫은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낸 송면재宋冕載의 증손이다.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주민을 주동하여 일병에 투석전을 벌이다가 순절하였다. 21세손인 송영만宋榮晩은 무과를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고, 22세손인 송만섭宋萬燮은 고종조에 외직을 거쳐 경주부윤慶州府尹까지 지냈으나,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산속으로 은거하였다.

정가공파正嘉公派
정가공파正嘉公派는 도첨의우정승都僉義右政丞을 지낸 송서宋瑞를 파조로 하며, 여기에서 양주 송씨楊州宋氏가 갈라진다. 정가공正嘉公의 큰아들 송인번宋仁蕃은 봉익대부판사복시사奉翊大夫判司僕寺事에 이르렀고 둘째 아들인 송윤번宋允蕃은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른 반면, 셋째인 송의번宋義蕃은 조선 개국에 반대하여 은거하였다. 송인번宋仁蕃의 아들인 송전宋琠은 가선대부판나주목사嘉善大夫判羅州牧使에 이르렀고, 송지宋祉의 아들인 송유치宋有徵는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중보문간대제학門下侍中寶文閣大提學에 이르렀으나 조선 개국 후 전주로 낙향해 버렸다. 송문림宋文琳은 정가공의 5세손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까지 이르렀다.

숙정공肅靖公 송질宋軼의 호는 취춘당醉春堂, 자는 가중可中이다. 정종조에 과거에 급제한 후 관직에 나아가 경기도관찰사, 우찬성右贊成,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513년(중종 8년) 우의정을 거쳐 뒤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이 되었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여원부원군礪原府院君에 책봉되었다. 그의 손자인 송인은 중종의 셋째 공주 정순옹주貞順翁主와 결혼하여 여성위礪城尉에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으로 금군禁軍을 통솔하였다. 지은 글이 많았으나 다 없어지고 ‘신암집頣菴集’ 한 권만이 전해지고 있다.

송언신宋言愼은 이황李滉을 사사하여 경의에 관해 문답한 것이 많이 남아 있으며, 대사간⋅도승지⋅대사성⋅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송서의 11세손인 송미현은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고, 영조 4년에 단성현감으로 재직 중 이인좌의 난 토벌에 공을 세웠고, 영조 32년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12세손인 송대길宋大吉은 인조 원년에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경주부윤⋅한성부우윤⋅도승지⋅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노모를 극진히 봉양한 것으로 이름이 있었다.

19세손인 송진희宋鎭熙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아 주자 성리학 연구와 강학으로 일생을 마쳤으며, ‘주자서촬요朱子書撮要’ ‘선현예설유총先賢禮說類叢’ 등을 남겼다. 송주면宋宙勉은 최익현의 문인으로 1910년에 나라가 망하자 물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선생 중에서 면암勉庵(최익현)의 절의를 본받은 의사義士라 하겠다.

고려 후기 원종 때 송송례宋松禮에 의해 가문의 기틀을 다지고 성장하기 시작한 여산 송씨가礪山宋氏家는 조선조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숱한 고관, 대작들을 배출한 대성大姓인 것이다.

여산 송씨의 분관


청주 송씨
밀직공密直公의 아들이 송표宋標이고, 송표의 아들 송유충宋有忠이 청주 송씨淸州宋氏의 비조鼻祖가 된다. 청주군淸州君 송유충宋有忠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나라에 공훈을 세워 청원군淸原君에 훈봉勳封되고, 2세 훤暄은 조선 개국에 참여한 공훈으로 서원군西原君에 습봉襲封되었다. 청원과 서원은 모두 지금 청주淸州의 옛 이름이다. 3세 대사성大司成 송승은宋承殷은 계유정란癸酉靖亂 때 빙부聘父 대제학大提學 최연崔淵과 함께 낙향落鄕하여 처음으로 김해金海에 살기 시작하였고, 4세 훈련참군訓練參軍 송숙형宋叔亨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김해향약金海鄕約을 제정制定하였다. 5세 송유호宋由浩는 성균관 생원을 지내셨고, 6세 송경宋經, 7세 송창宋昌 두 분은 모두 절제사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양주 송씨
양주 송씨楊州宋氏는 정가공파正嘉公派에 근원하여 분적되었다. 시조 송도성宋道成은 정가공의 현손인데 조선 개국 초에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역임하고 양주에 복거卜居한 후 후손들이 계속 세거하였다. 후에 난을 피하여 공주에 옮겨 살다가 다시 영남 지방으로 옮겨 갔으나, 선조의 세거지였던 양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송도성의 증손 송효지宋孝智가 조선 초에 아들 송희주宋希周와 함께 주부主簿를 역임하여 가세를 일으켰으며, 참봉 송덕림宋德林의 손자 송순령宋舜鈴이 직장을 역임하여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송영호宋永祜와 송재호宋在祜가 뛰어났는데, 김화식金華植, 이봉로李鳳魯, 김창숙金昌淑 등과 더불어 만주와 몽고 지방에서 개간 사업을 일으켜 장기적인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송영호宋永祜는 만주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을 결의하고 국내로 돌아와 자금을 모으다가 피체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송재호宋在祜는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면도칼로 목을 잘라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수개월간 입원 치료를 하면서도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양주 송씨의 가맥을 이었다.

여산 송씨와 같은 뿌리 송씨


용성 송씨龍城宋氏
본관 용성龍城은 수원도호부 남쪽 약 80리 지점을 중심으로 경기 남서부 일대를 관할하던 용성현龍城縣이었다. 고구려 때는 상홀현上忽縣이라 했고 신라 경덕왕 때는 차성현車城縣으로 개칭했다. 고려 태조 때는 차성현이 용성현으로 개칭됐고, 현종 때 수주水州에 편입되었다. 수주는 원종 때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수주목水州牧으로 승격되었다.

용성 송씨는 중국 경조京兆 출신으로 당나라 때 호부상서를 지낸 송주은宋珠殷의 후손으로 전하는 송엄경宋嚴卿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송엄경의 선대는 수원(용성)과 양주揚州 송산리松山里 등지에서 세거했는데, 엄경은 양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성장한 엄경은 문과에 급제하고 관계에 나아가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쳐 경상도사慶尙都事를 역임하였다. 1456년에 군사郡事로서 전공前功에 의하여 상등훈에 책록되었고 이어 창성부사昌城府使(평안북도 북평北平)로서 창성진병마절제사昌城鎭兵馬節制使를 겸임하였다. 재임 중인 1461년 여진족들이 쳐들어와서 선량한 농민을 잡아가고 축생을 죽이는 등 만행을 저지르자 엄경은 그들과 싸우는 한편 회유하여 끌려간 11명을 되돌려받았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엄경은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졌다. 만년에 조야朝野가 시끄러워지자 세상사 덧없음을 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은신할 것을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경상도사 재임 당시 익히 보아 온 빼어난 경관의 오가리五佳里(현 경남 창녕군 길곡면 오호리)에 천거遷居하게 된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곳에 살면서 송엄경을 시조로 받들고 봉군지封君地인 용성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면서 시조의 현손 송가빈宋季賓의 아들 대에서 가세가 크게 번성하여 종파宗派⋅골룡파骨龍派⋅오호파五湖派⋅마천파馬天派⋅광심정파廣心亭派⋅보림파寶林派⋅거창파居昌派⋅옥동파玉洞派 등으로 갈라져서 계대하고 있다.

은진 송씨恩津宋氏
은진 송씨의 도시조都始祖 역시 송주은으로 되어 있으나 언제, 어떻게 고구려⋅백제⋅신라 3국 중 어느 나라에 귀화했는지 기록이 없다. 그의 7세손인 송순공宋舜恭의 후손 송자영宋自英이 송유익宋惟翊⋅송천익宋天翊⋅송문익宋文翊 등 세 아들을 두었는데, 송유익은 여산 송씨礪山宋氏의 시조로 송천익은 은진 송씨恩津宋氏의 비조로 송문익은 서산 송씨瑞山宋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은진 송씨 시조 송대원宋大原은 송천익의 후손으로 대대로 은진에서 살아왔으나, 송천익 이후의 대를 알 수 없어 고려 때 판원사判院事를 지내고 은진군에 봉해진 송대원을 시조 및 1세조로 받들고 은진으로 정했다.

은진 송씨 족보에는 시조가 판원사를 지낸 송대원으로 되어 있으나, 실은 백제 말엽에서 고려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 은진군에 봉해진 송천익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설이 있다는 것을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입증하고 있다. 시조 송대원의 6세손인 송유의 후대 송계중宋繼祀⋅송계중宋繼中 형제에서 송계중이 사직공파, 송계사의 아들 송요년宋遙年⋅송순년宋順年이 각각 목사공파牧使公派⋅정랑공파正郞公派로 크게 분파되었고, 후대에서 다시 50여 파로 갈라진다.

여산 송씨 주요 인물


송질宋軼질의 셋째 딸
송질宋軼의 셋째 딸은 남양 홍씨 가문으로 시집을 가 홍씨 가문 영화의 절정을 이루게 한 어머니이자 아내였다. 중종 때 영의정에 오른 남양 홍씨 문희공 홍언필洪彦弼이 그녀의 남편이고, 아들이 홍섬洪暹이다. 홍섬은 선조 때 영의정을 세 번 역임하며 명상이자 청백리의 칭송을 들었는데 부자가 정승을 지낸 드문 기록을 세웠다.

그녀의 아버지 송질은 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므로, 친정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모두 정승인 ‘세계사상 유일의 복 많은 여성’이다. 당시에도 왕비와 대신의 부인 등 상류사회 부인들의 사교 모임이 있었는데, 왕비는 송씨 부인이 나타나면 꼭 일어서서 마중하며 깍듯한 존경을 표했다 한다. 그 까닭을 묻자 왕비는 자신은 남편이 임금일 뿐이지만 송 부인은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모두 재상이니 어찌 내가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했다. 송 부인은 명문의 여인답게 예의범절에 밝고 부덕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여장부였다고 한다.

군의 정치적 중립을 지킨 송요찬 장군
송서宋瑞의 후손으로 육군참모총장과 내각 수반을 지낸 충남 청양 출신 송요찬宋堯讚도 여산 송씨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송요찬은 군사영어학교를 1기로 졸업하고 수도사단장과 제3사단장⋅육군참모총장⋅계엄사령관⋅외무부장관⋅경제기획원장과 내각 수반을 지냈다. 6.25 한국전쟁 때 함흥 함락 등 동부전선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워 중공군 2개 사단을 섬멸하기도 했다. 육군참모총장 재직 시 좌익 경력 등으로 어려움에 처했던 박정희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특히 자유당에 의한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일어난 4.19 혁명 때는 계엄사령관으로서 군의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고 국민에게 신뢰감을 부여함으로써 유혈 사태를 방지하고 4.19 혁명을 성취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선불교 중흥에 이바지한 경허 스님
경허鏡虛 성우惺牛 선사는 조선 말기의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중흥조로 출현하여 무애하고 자애로운 생활 속에서 전등傳燈의 법맥을 이으며, 선불교를 진작시킨 혁명가이자 대승의 실천자였다. 스님의 속명은 동욱動旭, 법명은 성우惺牛, 법호는 경허鏡虛이다. 본관은 여산 송씨로 1849년 전주 자동리에서 부친 송두옥宋斗玉과 모친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9세에 경기도 과천 청계사로 출가하여 계허 스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절에 와 있던 어느 거사에게서 사서삼경을 배우고 기초적인 불교 교리를 익혔다.

이후 당시 교계의 태두였던 계룡산 동학사의 강백講伯 만화보선萬化普善 화상에게 천거되어 불교 경론을 배우고, 불교의 일대시교一代時敎뿐 아니라 유서儒書와 노장老莊 등의 사상을 고루 섭렵하였다. 23세에 스승 만화의 뒤를 이어 동학사 강백으로 추대되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경허 스님은 전국 곳곳에 선원과 선실을 개설하여 새로운 선 수행 풍토를 조성했다. 선풍을 진작시킨 그의 문하에는 한국 불교 선문을 빛낸 만공滿空⋅혜월慧月⋅수월水月 등이 있다.

일본불교 예속화 정책 막아낸 만공 스님
만공 스님의 속명은 도암道巖, 법호는 만공滿空, 법명은 월면月面이다. 만공 스님은 속세의 성이 경허 스님과 같은 여산 송씨이다. 전라북도 태안에서 부친 송신통과 모친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3년 13세가 되던 해 김제 금산사에서 불상을 처음 보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공주 동학사로 출가하여 진암 문하에서 행자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경허 스님을 따라 서산 천장사로 와서 태허泰虛 스님을 은사로 경허를 계사로 사미십계를 받고 법명을 월면이라 하였다.

경허 스님의 법을 이은 스님은 덕숭산에 와서 금선대를 짓고 수년 동안 정진하면서 모여든 납자들을 제접하며, 수덕사修德寺⋅정혜사定慧寺⋅견성암見性庵을 중창하고 많은 사부대중을 거느리며 선풍을 드날렸다.

스님은 일제 강점기 선학원禪學院의 설립과 경제적 자립을 위한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 운동에 지도자로 참여하였으며, 마곡사 주지로 있던 1937년 조선총독부 데라우찌가 개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불교를 일본불교화하려는 일본의 한국 불교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우리 불교계를 지켰다. 이는 일제 치하의 치욕스런 불교 정책을 쇄신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만공 스님은 또 31본산 주지 중에서 유일하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여산 송씨 효부 송기태⋅서점순 부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행동도 고귀하게 한다.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조용히 실천해 온 경기도 안산 옥산동에 세거하던 송기태는 선고(부친)의 유업을 이어 온 효자로 알려져 있다. 한국이 산업화로 접어들던 1950년대부터 영농을 해 가며 4남 1녀를 서울로 보내 공부시켰고, 동네의 어려운 이웃을 찾아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여산 송씨이다.

특히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는 전쟁사에 남아 있는 금화지구 전투의 숨은 영웅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송기태는 국가의 보상도 거절하였고, 국민으로서 당연히 조국을 지키기 위해 참전했고 더구나 전우들이 모두 전사한 마당에 홀로 참전 용사 대우를 받을 수 없다며 끝내 보상도 거절한 채 사망할 때까지 몸속에 총탄이 박힌 채로 살아왔다고 하며, 오히려 동네의 어려운 이웃을 찾아다니며 그들 몰래 양식 등을 나눠 주는 선행을 펼쳐 왔다고 한다.

송기태의 이러한 선행을 어려서부터 보아 온 막내딸 송천숙도 아버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살고 있다. 송기태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도움의 손길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여산 송씨의 현대 인물
내각 수반 송요찬, 국회의원⋅민주당 최고위원⋅제5대 인천광역시장 등을 역임한 송영길, 경기대 교수 송하성, 전 고법 부장판사 송영천, 초대 민의원을 지낸 안성 출신 송우태, 안성시 의원을 지낸 송우태의 아들 송형근, 파독 간호사 출신 송은숙, 경기도 안성에서 효자⋅효부로 이름난 송기태⋅서점순 부부, 한국화학연구원 본부장을 역임했고 2014년 현재 울산화학연구소 본부장으로 재임 중인 송봉근, 그리고 경기도 안성 옥산동의 농업경영인 송윤근, 공수부대 장교 출신으로 교편을 잡고 있는 송승근 씨 등이 여산 송씨를 빛낸 현대 인물들이며, 이외에도 수많은 여산 송씨가 사회 각계에서 활약 중이다.

[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1) 한국인의 족보 (https://www.youtube.com/watch?v=QV4Xl8PoGtI)
2) 위키백과 여산 송씨
3)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4)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5) 김성회의 성씨 이야기
6) 통계청 홈페이지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여산(礪山)



여산 송씨 세계도

본관지 여산은 어떤 곳인가
여산은 여량礪良과 낭산朗山이 합쳐져 생긴 지명이다. 여량현은 본래 백제의 지량초현只良肖縣이었는데,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여량으로 바뀌어 전주도독부 관내 덕은군德殷郡의 영현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년)에 전주에 속하였다. 낭산현은 본래 백제의 알야산현閼也山縣이었는데, 경덕왕 때 야산野山으로 바뀌어 전주도독부 관내 금마군金馬郡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년)에 낭산으로 고쳐 고려 시대에는 전주에 속하였다가 1400년(조선 정종 2년)에 여량의 속현으로 되었다. 1404년(조선 태종 4년)에 여량의 ‘여礪’ 자와 낭산의 ‘산山’ 자를 따서 여산현으로 하였다.

여산은 전라도와 서울 방면 간의 길목으로 관내에 양재역良才驛이 있었고, 병자호란 때에는 이곳에 의병청義兵廳이 설치되었다. 충청도 접경의 작지鵲旨에는 매년 7월 15일에 부근 지역의 양도 주민들이 모여 수박희手搏戱로 승부를 다투며 즐기는 풍속이 있었다. 또한 접경 지대의 황화정은 전라도의 신구 관찰사가 교대하는 곳이었다.

정순왕후
송현수의 딸이자 단종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는 부인으로 강등되어 흥인지문 밖의 동망봉(서울 종로구 숭인동)에서 초가집을 짓고 시녀와 살다 청룡사 스님으로 입산하여 82세까지 홀로 살다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었을 당시 멸문지화로 시신을 거둘 친척조차 없어 올케인 경해공주 시댁(해주 정씨)에서 시신을 거두고 장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지금도 그녀가 살았던 동망봉(단종이 유배된 동쪽을 바라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지금의 숭인공원)과 함께 단종과 이별을 했다는 청계천 영도교(영이별다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