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역사 성인열전 | 천하 사방에 다물多勿의 기상을 펼친 고구려 광개토태왕, 고담덕(上)

[역사인물탐구]

이해영 / 객원기자

*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17세를 내려와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십팔 세(391년)에 제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태왕永樂太王이라 하셨다. 호태왕好太王은 그 베푼 은택이 하늘에 미치고 불의를 바로잡는 위무는 사해를 뒤덮었다. 부정한 무리를 쓸어 없애시니 백성은 직업에 안정되었다. 나라가 부강하니 백성이 은성殷盛하고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광개토경평안호태황비문 중에서』)


위기의 고구려와 태왕의 등장


4세기 후반 동방의 패자 고구려는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북방 기마민족과 흥기한 남쪽의 백제를 동시에 상대하면서 고국원제가 전사를 하고 말았습니다. 국가의 존속조차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해가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고구려는 이런 시련을 극복하고, 동아시아 역사 지형의 판을 크게 흔들어 버리는 위대한 태왕이 등장하게 됩니다. 우리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신나는 대목이라고 할 고구려 19대 태왕 광개토태왕입니다. 이제 이 위대한 태왕의 업적과 원대한 비전을 2회에 걸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구려의 흥기의 발판을 닦다 - 소수림제와 고국양제


전사한 고국원제의 뒤를 이은 이는 소수림제小獸林帝였습니다. 고국원제의 맏아들로 이름은 구부丘夫였습니다. 고국원제 25년인 355년에 태자로 책봉되고 371년 10월 고국원제가 평양성 싸움에서 전사하자 고구려 17세 태왕이 되었습니다. 기골이 장대하고 지략이 뛰어난 인물로 전해지며 이미 태자에 오르기 전부터 정사에 관여하여 부황인 고국원제를 도와 국방과 행정 전반에 걸쳐 많은 경험을 쌓았고, 외교 문제에도 적극 가담하고 있었습니다.

즉위한 소수림제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문치를 통한 중앙집권화 정책과 복수를 위한 백제 압박 정책을 수립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태왕 직속 부대와 각 나부那部 소속 부대로 나누어 있었는데, 이런 전사 집단을 태왕의 군대이자 고구려의 군대로 일원화하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한 번에 동원할 수 있던 병력이 최대 3만 명 정도였는데 반해, 후일 광개토태왕은 신라 구원에 5만 명의 보기步騎(보병과 기병)를 동원할 수 있게 됩니다.

소수림제의 업적 - 태학 설립, 불교 수용, 율령 반포
소수림제는 단군조선 시대부터 제천행사를 주관하는 소도蘇塗 옆에 있던 경당扃堂에 더해 태학太學이라는 최고 교육기관을 설립하였습니다. 경당은 미혼 자제들에게 독서, 활쏘기, 말달리기, 예절, 가악歌樂, 권박拳搏(검술을 겸함) 등을 익히게 하였습니다. 태학은 중앙 관료나 귀족 자제들에게 충과 효를 강조하는 유학과 좀 더 수준 높은 무예를 가르치며 최고의 인재를 길러 내었습니다.

그리고 즉위 이듬해인 372년 전진前秦의 임금 부견符堅이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順道와 불상, 경문 등을 보내자 사신을 보내 사례하였습니다. 전진은 모용씨慕容氏의 전연을 패망시킨 저족氐族이 세운 나라입니다. 부견은 화북 일대를 통일한 강국의 군주로서 그 여세를 몰아 양자강 이남의 동진東晉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시키겠다는 야심을 품었습니다. 이런 부견도 고구려에 대해서만은 온건한 자세를 보였습니다. 이에 소수림제는 부견과 화친을 맺고, 동진과도 돈독한 관계를 맺어 두어 외교적으로 백제를 고립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적극 수용하여 기존의 신교문화와 함께 종교적 일체감을 꾀하게 하였고,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 체제를 일신하였습니다. 여기서 율律은 형법을 말하고, 령令은 행정법과 소송법 체계를 말합니다. 이렇게 문치주의를 표방하였지만, 소수림제는 백제에 대해서 공세를 취하여, 재위 7년인 377년에 백제 근구수왕近仇首王이 3만 군사로 평양성을 공격하자 이에 맞서기도 하였습니다.

전운이 감도는 고구려와 고국양제故國壤帝
이런 와중에 384년 소수림제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이 없어서 그 아우인 이련伊連이 즉위하니, 바로 광개토태왕의 부황父皇인 고국양제故國壤帝입니다. 고국양제 당시 전진의 부견은 급하게 동진을 무너뜨리기 위해 80만 대군을 동원하였지만, 비수淝水(안휘성 합비현에 흐르는 회하淮河의 지류)에서 동진의 사현謝玄이 이끄는 소수 병사에 대패하였습니다. 이른바 비수대전으로 이로 인해 전진은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부견을 도왔던 모용황慕容皝의 다섯째 아들 모용수慕容垂가 384년 중산中山(현재 허베이 성 정주定州)에 도읍하여 후연을 건국하고, 고구려의 요동을 넘보게 되었습니다. 고구려와 후연의 격전지는 용성龍城으로 지금의 요령성 서쪽 조양시입니다.

고국양제는 후연군 및 백제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백제를 고립시키기 위해 재위 9년인 391년 신라와 우호 관계를 맺고 신라의 내물이사금은 조카 실성實聖을 인질로 보내게 됩니다. 이는 광개토태왕비문에 신라는 본래 속민屬民이라고 한 내용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쪽으로 후연을 축출하고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하던 고국양제는 이해 5월에 붕어하고 태자가 즉위하였습니다. 대고구려 신화의 서막이 열린 것입니다.

초립동 태왕의 등극


391년 고구려 수도 국내성 광명전光明殿에서 18세의 태왕이 등극하였습니다. 이때 단군조선 때의 「어아가於阿歌」가 천악天樂으로 연주되었습니다. 어아가는 신시배달 시대 옛 풍속으로 제사를 지내면서 삼신을 맞이하는 노래로, 전쟁에 임할 때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부르게 하여 사기를 돋우는 군가이기도 하였습니다. 후에 광개토태왕이 말 타고 순행하여 마리산에 이르러 참성단에 올라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렸을 때도 이 천악을 사용하였습니다.

태왕의 휘는 담덕談德 또는 안安, 평안平安이라고 하였습니다. 고국양제의 아들로 374년 갑술생입니다. 이듬해인 375년에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이 사망하는데, 영웅의 뒤를 이어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였습니다. 연호는 영락永樂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웅위雄偉하고, 뜻이 고상高尙하였습니다.

큰 공적과 성스러운 덕으로 세상 어떤 임금보다 뛰어나 위대한 황제라는 의미의 열제라 불린 광개토태왕은 배달(밝달)국과 단군조선 시대의 방대했던 영토와 신교문화를 부흥시켜 회복한다는 고구려 국시인 다물多勿주의를 완성한 위대한 황제입니다. 이제 그의 업적을 살펴보겠습니다.

북벌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다 - 거란, 숙신 정벌과 동부여 정벌


거란의 8부 중 필혈부라고 보이는 패려(과려顆麗, 비려碑麗)에 대한 공략은 영락 원년부터 시작되어 395년에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광개토태왕비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영락 5년 을미에 패려稗麗가 순종하지 않아(부단히 침입하여 붙잡아 간 사람들을 귀환시키지 않자) 왕이 직접 군대를 인솔하고 가서 정벌하셨다. 부산富山과 빈산貧山을 지나 염수鹽水 위에 이르렀다. 3개 부락 600~700의 영營을 깨뜨리고 소, 말, 양떼들을 사로잡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 여러 지방을 고루 순수하셨고, 관경管境을 순행하고 사냥을 하며 돌아오셨다.


거란은 4세기 무렵 등장하여 『삼국사기』에는 소수림제 재위 시기인 378년에 처음 나타납니다. 거란족의 기원에 대해서 선비의 별종, 또는 동호東胡의 일파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현재는 흉노와 선비족 또는 양 족속의 혼합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소수림제 재위 8년 거란이 고구려 북쪽 변경을 침입하여 8개 부락을 함락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백제 및 후연과의 거듭된 전쟁으로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영락 원년인 391년 9월에 거란을 정벌하여 이때 끌려간 고구려 백성을 되찾아 왔고, 395년 원정에서는 염수鹽水를 얻게 됩니다. 염수는 소금이 나는 호수나 강을 뜻하는데, 내몽골 적봉赤峯 북쪽에는 여러 염호鹽湖가 있고, 시라무렌강은 염하鹽河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니, 패려稗麗는 바로 이 지역에 있었을 것입니다. 즉위한 해에 내몽골까지 진격하여, 여러 가축과 소금 생산지를 획득하면서 경제적 이득과 후연 정벌을 염두에 둔 교두보를 확보한 것입니다.

광개토태왕의 거란 복속으로 그 세력권 내에 있던 평량平涼도 손쉽게 얻게 되었는데, 이곳은 간쑤성甘肅省 평량현平涼縣 서북으로 실크로드로 연결되는 통로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간쑤성 둔황 석굴에 있는 고구려 계통의 벽화에서 이때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영락 8년인 398년 광개토태왕은 숙신肅愼을 정벌하였고, 이후 숙신은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숙신은 고구려에 내지와 같은 곳이기 때문에 소규모 군대로 반란 세력을 제거하는 정도의 군사행동을 하는데 그쳤던 것 같습니다. 숙신은 말갈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하는데, 고구려는 과거 단군조선처럼 이웃 여러 나라의 조공을 받는 천자의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입니다.

4세기 중반 고국원제 때 모용선비慕容鲜卑와 백제에 거듭 패하면서 동부여에 대한 통제력도 약해졌습니다. 동부여가 더 이상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지 않자 영락 20년(410년) 광개토태왕은 생애 마지막 정벌을 단행합니다. 비문은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그래서 호태왕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토벌하러 가셨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때 고구려가 격파한 동부여의 성이 64개이고 촌이 1,400여 개인데, 동부여는 이로써 큰 타격을 입고 국세가 크게 약해졌다가, 광개토태왕의 증손자인 문자명제 3년인 494년에 고구려에 통합되고 말았습니다.

혼란한 중원 상황을 이용한 고구려


여기서 잠시 중원의 상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광무제 유수劉秀가 세운 후한은 221년 위나라 조비曹丕가 후한의 마지막 군주인 헌제에게 양위를 받으면서 멸망하였습니다. 이때가 그 유명한 위촉오魏蜀吳 삼국지 시대입니다. 하지만 조위曹魏는 촉을 멸망시킨 중신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司馬昭를 거치며 멸망하고, 오나라를 멸망시킨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이 진晉나라를 세웁니다. 이 무렵 선비족은 모용외慕容廆의 지휘 아래 조양 지방을 중심으로 힘을 형성하고 진과 고구려의 변방을 노략질합니다.

중원을 통일한 진나라는 왕족들의 세력 다툼인 이른바 ‘팔왕의 난’을 겪으면서 공중분해되고 맙니다. 이틈을 노려 흉노와 선비족 등이 중원으로 진출하여 나라를 세우게 되었고, 고구려 미천제도 과감한 팽창정책을 감행하여 영토 확장을 하게 됩니다. 316년 진나라가 멸망하고, 화북 지대는 북방 유목 민족이, 양자강 이남은 진晉을 비롯한 한족이 세운 나라가 대립하는 남북조南北朝 시대가 열립니다. 이후 589년 수나라 문제文帝 양견楊堅에 의해 진陳이 멸망하며 재통일하기까지 약 360년간 중원은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이 남북조 나라를 이이제이以夷制夷로 이용하여 세력 확장을 도모하였습니다. 고구려가 주로 대립하였던 나라는 선비족의 모용씨가 세운 연燕나라였습니다.

숙적 후연後燕을 정벌하다.


모욕감을 준 후연에 대한 복수의 서막
모용씨의 모용외가 죽은 후 아들들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다가 모용황慕容皝이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전연前燕을 건국한 모용황은 고구려군의 허를 찌르며 국내성을 점령하고 미천제美川帝의 시신을 꺼내 가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태후 주씨周氏와 황후를 비롯한 도성의 백성 5만을 용성으로 압송하였습니다. 그리고 고구려가 연나라의 신하국이 되겠다는 치욕적인 외교관계를 맺게 하였습니다. 고구려 황실과 고구려 사람들에게 씻기 힘든 굴욕감을 안겨 주었기 때문에 전연의 뒤를 이은 후연後燕 또한 고구려 즉, 광개토태왕에게는 복수의 대상이었습니다. 광개토태왕은 즉위하자마자, 서북의 염수鹽水 지역을 정복하였습니다. 이어 거란병을 동원하여 후연의 후방인 연군燕郡 지역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고구려와 후연의 공방전
후연의 3대 국왕 모용성慕容盛과 광개토태왕의 첫 충돌은 영락 9년인 399년이었습니다. 이해 광개토태왕은 5만이라는 유례없는 대군을 징발해서 바다를 건너 왜군을 격파하였습니다. 수군을 몸소 거느리고 대마도와 규슈九州에 있는 왜의 전진기지를 격파하며 남방을 안정시키고 있었을 때 후연의 모용성이 침략한 것입니다.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모용희慕容熙를 선봉으로 삼아 3만 군사를 몰아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을 함락시키고 700여 리의 땅을 빼앗았고, 5천여 호를 잡아갔습니다. 이는 광개토태왕 치세에 경험한 최대의 피해였습니다.

곧바로 반격에 나서 영락 11년(401년) 군사를 보내 숙군성宿軍城(지금의 요령성 북진北鎭)을 공격하고 후연의 평주를 공격하였습니다. 평주자사 모용귀慕容歸는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고, 고구려군은 평주를 점령한 후 여세를 몰아 유주를 압박하였습니다. 이어 영락 13년(403년) 겨울 11월에는 유주로 진공하여 후연의 도성을 향해 진격하였습니다. 이 와중에 백제와 왜 연합군이 대방帶方 지역을 침입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자 이를 정벌하는 사이에 새로 연왕이 된 모용희가 요동성을 공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성에서 방비를 철저히 하여 후연군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고구려 거란 연합군의 후연 공격
영략 15년(405년) 광개토태왕은 거란병을 동원하여 후연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혼란에 빠진 후연군이 고구려와 거란 연합군을 막기 위해 후방으로 간 동안 고구려군은 대릉하 지역을 습격하였습니다. 거란군이 퇴각하자 후연은 3천 리를 다시 행군하여 고구려와 싸워야 했습니다. 퇴로에서 고구려의 공격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고구려 목저성木底城을 공략하였지만, 결국 뚫지 못하고 대패하게 되었습니다. 고구려에 대한 후연의 공격은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자멸하는 후연
407년 선비족의 탁발부拓跋部가 세운 북위北魏가 후연을 공격하자 후연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때 고구려는 무력해진 후연 조정을 대신하여 진鎭을 유주 자사로 파견하였습니다. 그러자 북연 13군의 태수들은 고구려가 파견한 지방관 진에게 복종하게 되었고, 후연 조정의 지방에 대한 통제는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후연 왕실에는 커다란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중위장군中衛將軍 풍발馮跋이 용성으로 잠입해 후연의 모용희를 죽이고 석양공夕陽公 고운高雲을 추대해 임금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고구려 출신이 후연 왕이 되다
고운은 342년 고국원제 12년에 전연 군대에게 끌려간 고구려 귀족인 고화高和의 손자입니다. 고운은 심지가 깊고 도량이 넓었으며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무예가 뛰어난 태자 모용보慕容寶를 시위侍衛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모용보는 고운의 능력을 높이 사서 양자로 삼고 모용씨라는 성을 하사였습니다. 그래서 중국 사서에서는 그를 모용운慕容雲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407년 즉위하고 국호를 대연大燕(일반적으로 북연北燕이라고 부름)으로 하고, 다시 성씨를 고씨로 고치게 됩니다. 고구려와 영토 문제로 다투던 숙적 후연의 국왕으로 고구려 출신이 즉위하게 된 것입니다. 양국 관계의 근본적 변화였습니다.

광개토태왕과 북연
영락 17년(407년) 3월 광개토태왕은 북연에 사신을 보내 축하하는데 『삼국사기』에서는 “종족의 정을 베풀었다(叙宗族).”고 전하고 있습니다. 북연의 고운은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 답례케 하였습니다. 고구려가 종주국, 북연이 제후국으로 두 나라의 관계가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광개토태왕은 고운을 예우하면서 북연의 영토인 대릉하에서 허베이성河北省 지역 전체를 지배하였습니다. 북연은 고구려의 위성국가가 되었고, 북위 등 북조北朝 여러 나라가 고구려를 침범하는 것을 막는 완충지대가 되었습니다.

천하 사방을 고구려의 깃발 아래 모이게 하다.


광개토태왕은 18세 청소년 나이 때 즉위하여 39세의 청년으로 세상으로 떠날 때까지 동쪽으로는 연해주와 그 이북, 서쪽은 난하 지역을 넘어 화북 일대, 남쪽으로는 예성강에서 충주와 영일만을 잇는 지역, 그리고 북쪽은 싱안링산맥興安嶺山脈 북쪽 헤이룽강黑龍江 일대를 직접적인 영향권으로 두고, 여러 제후 국가를 둔 왕 중의 왕, 태왕太王이었습니다.

즉 거란, 평량(간쑤성), 후연, 백제, 신라, 왜(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를 조공국으로 복속시켰고, 중국 북부에서 만주, 한반도, 일본 전역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신교문화로 통일한 단군 이래 초유의 대제왕입니다. 대부분의 재위 기간을 말 위에서 보내며 진취적인 기상과 개척 정신으로 대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지난 원대한 포부의 한 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아마 중원 대륙까지도 넘어서서 단군조선 시대의 영역을 회복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다음 호에서는 광개토태왕이 주로 상대했던 백제와 왜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서 그의 포부가 어떠하였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100년간 논쟁에 휩싸이며, 소위 임나일본부설이라는 판타지 소설보다 못한 소리에 이용된 광개토태왕비 비문에 얽힌 진실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이덕일의 한국통사』(이덕일, 다산북스, 2020)
『삼국사기 상하』(김부식, 이병도 역, 을유문화사, 1997)
『한국고대전쟁사1-전쟁의 파도』(임용한, 혜안, 2011)



『환단고기』로 밝히는 광개토태왕 17세손의 비밀
우리는 광개토태왕릉비를 통해서 『환단고기桓檀古記』가 진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문에는 광개토태왕이 시조로부터 17세손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광개토태왕이 고추모성제로부터 13세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 기존 사학계에서는 19대 왕에서 6번의 형제 상속 또는 종손 상속을 제외하면 고추모성제의 13세손이라는 주장을 폅니다. 즉 4세 민중제는 3세 대무신열제의 동생, 6세 태조열제는 2세 유리성제의 손자, 7세 차제는 태조열제의 동생, 8세 신제는 7세 차제의 동생, 10세 산상제는 9세 고국천제의 동생, 18세 고국양제는 17세 소수림제의 동생이기 때문에 이를 제외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환단고기』를 보면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로부터 4세손이 고추모성제가 되므로 따져 보면 17세손이 되는 것입니다. 아주 명쾌합니다. 이를 통해 고구려 역사가 900년이라는 미스터리도 풀리게 됩니다. BCE 232년 해모수가 단군이 되고, 고구려가 668년 멸망했으므로 정확히 900년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 사서 중 하나인 『신당서』에는 당의 시어사 가언충이 ‘「고구려비기高句麗祕記」에 말하기를 고구려는 900년에 미치지 못하여 마땅히 80의 대장에게 멸망할 것이다. 고씨가 한대漢代로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 900년이요, 이적李勣의 나이 80입니다.’라고 한 기록이 있습니다. 역시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당의 가언충이 고구려는 한漢대로부터 나라를 가져 오늘날 900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고구려 역사에 대해서 김부식이 잘못 판단하고, 오히려 당의 가언충이 올바르게 보고 있다는 점을 『환단고기』를 통해 증명하게 됩니다.

*표 광개토태왕비문과 삼국사기로 본 광개토태왕의 전적 기사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