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개국 성씨, 횡성橫城 고씨高氏

[한국의 성씨]

횡성橫城 고씨高氏의 본관은 횡성橫城이며 고구려의 국성國姓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나와 있듯이, 고구려는 부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부여의 개국 성씨는 해解씨이지만, 고구려를 건국하면서 시조왕 추모鄒牟도 성씨를 고高씨로 고쳤다. 그러므로 해씨와 고씨의 자손은 동질적인 부여 계통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번 호에서는 고구려 고씨의 후손인 횡성 고씨를 다루어 보기로 한다.

유래


중시조 인승仁承의 12세손 민후旻厚가 강원도 횡성에 정착하면서 횡성 고씨의 중시조가 된다. 횡성 고씨는 1824년 족보가 발견됨으로써 고구려 마지막 28세 보장왕寶臧王(?~682, 재위 642~668년) 이후 국내에서 절손된 것으로 알려진 고구려 고씨로 밝혀졌다. 지금 중국의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을 비롯한 만주 지역에서 혈통을 보존하고 살고 있는 조선족, 요양 고씨遼陽 高氏도 고구려 고씨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 고씨의 시조는 고주몽이며 중시조는 보장왕寶臧王의 둘째 아들 인승仁承(?~?)이다. 인승은 고구려의 왕자로 보장왕의 아들이며 고구려 부흥 운동 때 보덕국報德國을 건국한 보덕왕의 동복형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로 끌려가지 않았으며, 나당 연합군을 피해 강원도 횡성으로 숨어 은신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른다면, 그는 고주몽의 21세손이며, 광개토왕의 9세손이 된다. 그의 12세손 민후旻厚가 강원도 횡성에 정착하여 횡성 고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한다. 인승의 20세손 고휴高烋는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그분의 산소와 사당이 횡성읍 궁촌리에 있다. 고휴의 후손들은 현재 매년 10월 첫째 주 일요일 횡성읍 궁촌리 사당에 모여서 봉제사를 하는데 약 200명이 참석한다고 한다. 횡성 고씨의 파派로는 소윤공파少尹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선전공파宣傳公派가 있다. 4만여 명의 횡성 고씨 후손들은 강원도 횡성, 원주, 제천, 영월, 정선 등지와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기록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고를 성씨로 삼았다는 내용이 공통적으로 나온다(國號高句麗因以高爲氏).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추가적인 내용이 있다. 본래 성씨는 ‘해解’였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로 햇빛을 받아 태어났으므로 고高를 성씨로 했다는 것이다(本姓解也 今自言是天帝子承日光而生故自以高爲氏).

한편, 백제에 대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백제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다. 『삼국사기』는 백제의 성을 부여씨로(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同出夫餘故以夫餘爲氏) 『삼국유사』는 해씨로(故以解爲氏)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서 부여씨夫餘氏와 해씨解氏는 똑같은 고구려 왕족의 성씨로 보아야 한다. 더군다나 차자借字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부여씨와 해씨는 같은 성씨인데, 부여夫餘는 음차표기音借表記가 된 것이고, 해는 사음훈차似音訓借로 표기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환단고기가 밝히는 고주몽의 혈통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고구려의 시조는 동명성왕이요 성은 고씨, 휘는 주몽이다.”라고 하여 동명과 주몽을 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고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기록했다. 두 가지 모두 잘못된 기록이다. 『환단고기』는 해모수와 고주몽의 관계에 대해 분명하게 밝혀 준다.

稾離郡王高辰(고리군왕고진)은 解慕漱之二子也(해모수지이자야)오 沃沮侯弗離支(옥저후불리지)는 高辰之孫也(고진지손야)니 皆以討賊滿(개이토적위)
功(공)으로 得封也(득봉야)라.
弗離支(불리지)가 嘗過西鴨綠(상과서압록)이라가 遇河伯女柳花(우하백녀류화)하야 悅而娶之(열이취지)하고 生高朱蒙(생고주몽)하니 時(시)
則壬寅五月五日也(즉임인오월오일야)오
고리군稾離郡의 왕 고진高辰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고, 옥저후沃沮侯 불리지弗離支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한 공으로 봉토를 받았다.
불리지가 일찍이 서압록을 지나다가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나 기뻐하며 장가들어 고주몽을 낳았다. 때는 임인(단기 2255, BCE 79)년 5월 5일이요.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

先是(신시)에 宗室大解慕漱(종실대해모수)가 密與須臾(밀여수유)로 約襲據故都白岳山(약습거고도백악산)하시고
稱爲天王郞(칭위천왕랑)하시니 四境之內(사경지내)가 皆爲聽命(개위청명)이러라.
이에 앞서 종실宗室인 대해모수께서 은밀히 수유국須臾國과 약속을 하고, 옛 도읍지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거한 뒤에 스스로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셨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두 해모수의 명을 따랐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至是(지시)하야 卽位於卒本(즉위어졸본)하시고 自號東明(자호동명)하시니 或云高列加之後也(혹운고열가지후야)라.
이에 (고두막단군이 환기 7090년, 신시개천 3790년, 단기 2226년, BCE 108년에)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호를 동명이라 하셨다. 어떤 사람은 이분을 고열가(고조선의 마지막 47세 단군)의 후예라 말한다. (『환단고기』 「북부여기 하」)


『환단고기』에 따르면 고주몽은 해모수의 5세손이다. 이 기록은 우리 고대사의 잃어버린 고리를 푸는 중요한 열쇠이다. 해모수의 해씨와 고구려의 고씨는 한 뿌리 성씨이다. 해解 자가 태양을 상징한다면, 고高 자 역시 높을 고 자로 태양과 연관이 있다. 부여라는 말 역시 태양과 관련이 있다. 해(日), 고高, 부여扶餘가 모두 태양과 관련된 성씨이다. 부여는 백제의 왕성이었다. 실제로 백제를 세운 비류와 온조는 고주몽의 둘째, 셋째 아들이다. 『환단고기』는 한韓·중中·일日의 고대 역사뿐만 아니라 성씨의 기원에 대해서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보물 같은 역사서이다.

횡성 고씨의 분파에 대해


횡성 고씨가 제주 고씨의 분파인가?
제주 고씨와 횡성 고씨(고구려 고씨)는 연관이 없는 성씨들이며, 성씨를 한자로 표기할 때 횡성 고씨가 고高로, 제주 고씨가 고髙로 쓰는 이유는 제주 고씨 중에도 횡성 고씨로 불리는 파가 있어 이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고을나髙乙那를 시조로 삼는 제주 고씨의 방계이자 고을나의 11세손 고인비髙仁庇를 시조로 삼던 제주도 출신 횡성 고씨가 실제로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제주 출신의 횡성 고씨가 생겼던 이유는 고구려 횡성 고씨와 제주 출신 고씨가 혼인하게 되면서 생긴 일로 판단된다. 제주 출신 횡성 고씨 중시조 고형산高荊山은 고구려 횡성 고씨 족보에는 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 제주 출신 횡성 고씨들은 다른 제주 출신 고씨들과 함께 1988년 모두 제주 고씨로 합본하여 제주 고씨 화전군파花田君派로 분류되며, 그 이후 더 이상 고을나를 시조로 하는 횡성 고씨는 존재하지 않는다.

요양遼陽 고高씨
고구려는 668년(제28세 보장왕 27년) 나·당 연합군에 패해 멸망하여, 고주몽을 시조로 하는 고구려 고씨는 혈통이 끊어진 것으로 일반에 알려져 왔다. 그러나 고구려 고씨는 엄연히 혈통을 유지해 왔다는 사실이 요양 고씨의 족보 「고씨가보高氏家寶」를 들고 한국을 찾았던 고지겸高之謙 씨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고씨가보」에 따르면 고지겸 씨는 장수왕의 59세손이다. 1686년 작성돼 중국 학계에서 검증을 받은 이 족보에는 가문의 시조가 장수왕 고련高璉으로 기재돼 있다. 1995년 3월 5일자 강원일보에 요양 고씨의 후예들이 같은 조상의 후손인 횡성 고씨를 찾았다고 보도된 바 있다. 당시 고지겸 씨 등은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백리 고한석 씨 등 횡성 고씨들을 방문하고 횡성 고씨 중시조 묘소를 참배했다. 또 고지겸 씨의 유언에 따라 손자인 고붕高朋 씨는 한국에 유학을 와서 연세대어학당을 거쳐 강남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요양 고씨는 중국 요양遼陽에 본관을 두고 있는데, 후연의 고운, 당나라 장군 고선지 후예들의 본관이며, 만주와 발해 지역의 고씨들은 대부분 고구려와 관련이 있다. 고씨는 고구려 왕족과 국민에서 나온 성씨로서, 4세기 무렵 고구려가 지린에 수도를 두다가 평양으로 옮길 때 국호를 고려로 고치면서, 그 무렵부터 고씨 성을 사용하였다. 또한 고구려 왕조 시대에 장군이나 국민들도 국호를 따라 고려라는 성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한국계 고씨에는 왕족과 무장 계급, 일반 국민들이 모두 포함돼 있다. 중국의 요양遼陽 고高씨는 요령성遼寧城 태안현台安縣의 한 작은 읍인 대고려방진大高麗房鎭에 2천여 명이 살고 있다.

일본의 고마高麗씨
한반도에 정착한 횡성 고씨와 달리,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건너가 뿌리를 내린 보장왕의 아들로 약광若光이 있다. 약광은 고구려인 1,799명을 이끌고 일본의 무사시 고마高麗에서 마을을 시작했다. 이 무사시 지역의 고마씨는 보장왕의 후손들로 고약광高若光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고약광은 668년 고구려 패망 후, 일본 나라 시대에 사이타마로 정착하였다. 일본에서 우지(씨氏)로 고마씨高麗氏를 받았으며 카바네로 코니키시(왕王)를 받아 귀화 후 정식 명칭은 고마노코니키시 약광高麗王 若光이 된다. 보통은 카바네를 생략한 고마노 약광高麗 若光으로 불린다. 약광의 일본식 발음은 쟛코(일본어: じゃっこう)이다. 약광과 같이 망명한 고구려 승려 승락勝樂이 성천원과 고마신사의 전신인 승락사勝楽寺를 세우고 그가 일본으로 건너오면서 가져온 환희천歡喜天(또는 성천聖天이라고도 함)을 안치한 것으로 전해진다. 약광은 사후 군민郡民들에 의해 불법佛法을 지키는 산신山神으로 추대되었으며 종손이 대대로 승락사 안에 있는 사당(산신각)에서 제사를 집행하였다. 그러나 명치유신 이후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에 따라 승락사가 성천원과 고려신사로 분리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본에 건너간 약광은 716년 일본의 무사시국 주변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고려(고구려)’군을 건립하였다. 일본 천황은 무사시武藏 지방에 고마군高麗郡을 설치하고 약광을 초대 군수로 임명하여 같이 망명한 고구려인들을 옮겨 살도록 했다. 이들 후손들은 26대까지는 고구려 자손끼리 혼인해 혈통을 이어 오다가 그 뒤 일본인들과 혼인 해 지금은 거의 다 일본 사람이 되었다.

1,799명의 고구려인들은 세공, 직물, 철제 등 기술에 능한 사람들이었고, 종이 제조 기술까지 전파했다.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에 최초로 종이 제조 기술을 전해 주었지만 이를 일본에 대중화시킨 사람들은 이들이다. 또 이들은 철제 기술과 말을 이용해 일본 무사 집단을 형성하였고, 장군산 고분에서 출토된 동완, 장식대도裝飾大刀, 철제마주鐵製馬冑, 철제무기鐵製武器 등의 유물들이 이를 증명해 준다. 일본의 기마 문화가 유라시아 최강 기마 국가인 고구려인들에 의해 대중화된 것이다.

일본에는 또 다른 고구려 고씨의 후손으로 30년 동안 일본 궁내청에서 활동하던 연주자 ‘시바 스케야스’가 있다. 고구려 제22세 안장왕安藏王의 후손이다. 또 ‘고마 게이코’ 씨는 NPO(민간 비영리 단체)를 조직해 대표로 활동하고 있는데, <빛의 아들로 태어난 고추모는 평화의 세상을 실현하고자 했다>는 고구려 전설에 대한 콘서트를 전 세계적으로 열고 있다. ‘고마 게이코’ 씨는 “주몽 같은 경우, 하늘이 낳은 자식 아닌가, 만인을 평안하고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정신을 가지고 살았으며, 이에 대해 말해 주면 모두들 감동한다. 고구려는 끝나지 않았다, 멸망하지 않았다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자신의 평소 신념이며, 고구려가 자신의 운명이자 인생 자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고마(고구려) 사진공방의 대표 ‘아타라시 다스야’도 고구려의 후손이다. 조상 때부터 1,300년을 고마(고구려)에 거주한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공방의 이름도 ‘고려사진공방’이라 짓고 고마(고구려)를 지키고 있다. ‘아타라시 다스야’ 씨는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많은 사람들이 도래한 지가 벌써 1,300년이란 시간이 흘러서 지금은 이루마군, 히다카마치, 히다카시로 명칭은 바뀌었지만 아직도 본래는 고마군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횡성 고씨·고마씨·요양 고씨는 활발히 교류를 이어 오고 있다. 대부분의 집안 교류는 고구려 역사의 종주국이며 집성촌 규모가 가장 큰 대한민국의 횡성 고씨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다. 2008년 8월 23일 구리시에서 열린 고구려역사기념관 건립 행사에 고마씨 고약광의 60세손인 고마 후미야스와 고마신사 궁사 내외, 횡성 고씨 고준환 종친회장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 밖의 고씨


개성 고씨
개성 고씨開城 高氏 시조 고영신高令臣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1097년(고려 숙종 2년) 우찬선대부右贊善大夫, 1099년 이부낭중추밀원우승선吏部郎中樞密院右承宣을 역임하고, 1101년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고 이어 형부시랑우간의대부刑部侍郎右諫議大夫에 올랐다. 1105년 예종이 즉위하여 비서감직문하성秘書監直門下省이 되고, 1108년(예종 3년) 상서로서 서북면병마사가 되고 이듬해 동지추밀원사를 거쳐 이부상서지추밀원사吏部尙書知樞密院事에 올랐으며, 1113년 검교사공참지정사檢校司空參知政事가 되었다. 개성 고씨는 조선 시대 문과 급제자 12명을 배출하였다. 2015년 인구는 18,247명이다. 개성 고씨는 고려의 도읍지인 개성을 본관으로 하기 때문에 횡성 고씨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제주 고씨 양경공파良敬公派라고도 하며 횡성 고씨와는 관련이 없다.

장흥長興 고高씨
장흥 고씨長興 高氏 시조 고중연高仲橼은 제주 고씨 1세조 고말로高末老의 10세손으로 고려 말 홍건적의 제2차 침입 때 고려 공민왕을 호종하여 호종공신으로 책봉되면서 장흥백長興伯에 봉해졌다. 장흥 고씨는 조선 시대 문과 급제자 28명을 배출하였으며, 대표적인 인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이 유명한데 횡성 고씨와는 관련이 없다. 2015년 인구는 장흥 고씨 75,517명, 장택 고씨 38,539명이다.

광녕廣寧 고高씨
광녕 고씨廣寧 高氏의 시조는 명나라 한림원의 태학사였던 고한봉高翰鳳의 5세손 고유보高有寶이다. 그는 명·청 교체기에 청나라 지배를 받는 것을 거부하고 심양에 인질로 잡혀간 조선의 척화파를 따라 조선에 들어와 평안북도 상원에 정착하였다. 고유보는 송宋나라 진종(968~1022년) 때 인물 고경高瓊의 후손으로, 6대조는 명나라 예부시랑을 지냈다. 본관은 중국 함평로 광녕이다. 광녕 고씨는 횡성 고씨와는 관련이 없는 성씨다. 2000년 인구는 8가구, 27명에 불과하다.

주요 인물


횡성 고씨의 주요 인물로는 고구려의 왕들과 고구려 유민으로 당의 장수였던 고선지, 북연의 초대 천왕이며 추존 황제인 고운, 고구려의 부흥 운동을 전개했던 고안승, 횡성 고씨의 중시조 고인승, 독립운동가였던 고창희, 의학박사인 고민환 등이 유명하다.

고선지高仙芝(? ~ 755년) 아버지는 고구려의 유민으로 당의 장수였던 고사계高斯界이다. 721년 스무 살의 나이에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당나라 유격장수가 되어서 토번吐蕃국(현 티베트) 세력을 격파하였으나 다시 패배하였고 신장 지역에 지속적으로 공격을 나섰다. 이후 압바스 왕조의 동쪽 영역 확장을 듣고 안서도호부에서 훨씬 서북쪽으로 떨어진 탈라스강으로 군대를 이끌고 먼 길을 떠났으나 탈라스 전투(751년)에서 패했다. 747년 안서도호부의 부도호가 되었고, 당시 토번(현 티베트)과 연결되어 있던 소발률을 격파하였다. 755년 안녹산이 뤄양을 점령하고 난을 일으키자 진압 명령을 받고 안녹산의 서진을 저지하던 중, 자신의 옛 부하였던 감군 변영성의 모함을 받고 결국 참수당한다. 탈라스 전투에서 포로가 된 당의 제지 기술자를 통해 서방에 제지 기술이 전해진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후세에 들어 고선지의 사적은 오렐 스타인의 중앙아시아 답사로 발굴되고 재인식되었다.

고안승高安勝 보덕왕報德王(재위: 674~683년)으로 보덕국의 제1세 군주이다. 사실상 고구려의 29세 군주라 할 수 있다. 보장왕의 서자로 횡성 고씨 중시조 고인승高仁承의 동복 동생이다. 신라 문무왕에 의해 보덕국왕으로 봉해졌으며 금마저(전라북도 익산시)를 하사받고 고구려 유민들과 호남 지방에서 고구려 부흥 운동을 전개해 보덕국報德國의 왕이 되었다. 670년 고구려의 장군 검모잠이 당나라에 반발하여 부흥 운동을 시작했을 때, 고구려 왕으로 추대되었다. 683년 문무왕의 누이와 결혼하고, 신문왕의 명으로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신라가 고구려계 유민들을 대거 통합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668년 고구려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게 멸망당한 뒤, 보덕왕 안승은 사야도史冶島에 머무르고 있었다. 670년 검모잠이 사야도에 있던 안승을 한성으로 맞아들여 왕으로 추대하고 고구려 부흥군을 일으켰다. 그 후 고구려 부흥군은 소형小兄 다식多式을 보내 신라에 대해 복속당할 것을 약속하고 도움을 청했다. 문무왕은 그들을 금마저金馬渚에 머물도록 했다. 그러나 당군의 압박을 받게 되자, 이에 대처하는 방안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투항했다.

고연무高延武 호남 지방에서 고구려 부흥 운동을 전개하던 보덕국報德國의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이다. 668년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정복하자, 670년 나당 전쟁에서 고연무는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신라의 사찬沙飡 설오유薛烏儒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 말갈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곧 도착한 대규모 당군을 피해 퇴각하였다. 이후 신라 문무대왕이 고구려 왕족인 안승을 보덕국왕으로 임명했을 때 고연무의 벼슬은 대장군大將軍, 태대형太大兄에 이르렀다. 또한 680년(문무대왕 20년), 신라에 사신으로 가서 문무대왕이 보덕국왕 안승에게 조카딸과의 혼인을 허락한 것에 감사의 표문을 전하기도 했다. 683년 신라가 보덕국을 남원경南原京(전라북도 남원)으로 재편입한 후, 고연무의 삶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고창희高昌熙 대한제국 독립운동가로, 호는 신암新巖이다. 1905년부터 1908년까지 대한제국 하급 관료로 지내다가, 1909년 기유각서 사건이 이루어지자 공성恭城이라는 법명으로 출가하였으며 1916년 환속한 후, 1919년 정찬도鄭燦道·백기환白基煥 등과 함께 서간도 지역으로 건너가 대한독립임시군정부大韓獨立臨時軍政府로부터 사령서辭令書를 받고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에 종사하였다. 그 후 1920년 중국 유하현柳河縣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총재 이상룡李相龍으로부터 군자금 모집 및 한인들의 항일 민족 관련 연대 의식을 고취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귀국했다. 이후 그는 이근수李根洙를 만나 다이너마이트를 입수하여 일본 관청 폭파와 친일 관리 처단을 논의한 후 동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비밀결사 모험청년단冒險靑年團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고민환高敏煥(1952년 3월 14일~ ) 대한민국의 산부인과 의사이자 의학박사이며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소령이다. 영남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와 영남대학교 의료원 산부인과 과장을 거쳐 경기도 고양에서 고산부인과 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을지대학교 초빙교수 겸 을지병원 산부인과 초빙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는 「부인종양학」, 「산과학」, 「부인과학」, 「부인과 내시경학」 등이 있다.

나오면서


현재 중국에서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지방 소국 역사로 취급하며 대한민국의 역사 침탈을 시도하고 있다. 오늘 고구려 고씨에 대한 연구도 고구려 역사를 밝히는 것이고, 동북공정에 맞서 고구려 역사에 대한 우리 주권을 더 확실히 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설명하였듯이 고구려와 백제는 똑같이 고주몽의 후손이다. 백제 역사와 고구려 역사를 하나의 혈통으로 묶는 것도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1) 해씨와 부여씨에 대하여 (https://www.youtube.com/watch?v=xZ9NtDOFFHc)
2) 위키백과 횡성 고씨
3) 성씨 정보 (http://www.surname.info)
4)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5) 재외동포신문 (http://www.dongponews.net)
6) 통계청 홈페이지



차자借字(음차音借, 훈차訓借, 사음훈차似音訓借)
역사서에 나오는 인명과 지명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음차, 훈차, 사음훈차 등 차자를 이해하여야 한다. 표음문자가 나오기 이전에 뜻을 전달하기 위하여 쓰이던 방법이 차자借字다. 차자의 방식은 음차, 훈차, 사음훈차가 있다.

음차音借 - 음을 빌려 쓰는 방식 : ‘벌(판)’을 伐 (음이 ‘벌’)로 표기하는 방식.

훈차訓借 - 뜻을 빌려 쓰는 방식 : ‘벌(판)’을 原 (뜻이 ‘벌’)으로 표기하는 방식.

사음훈차似音訓借 - 비슷한 음을 빌려 쓴 것 : ‘달구벌達句伐(대구의 예전 명칭)’은 『삼국사기』에 ‘달구화達句火’라고도 했는데, ‘화火’의 음이 ‘불’이므로 대신 표기한 것이다.

결국 ‘부여’라는 명칭이 아래 표와 같이 다양하게 표기된다. 그런데 이것이 왕족의 이름으로도 쓰이게 되면서 ‘부여’씨가 탄생한 것이다. 비슷한 용례로 옛사람 이름 중에 불弗이 들어간 경우가 많은데, 고구려 제15세 미천왕의 이름 ‘을불乙弗(于弗 또는 乙弗里라고도 함)’이 대표적 예다. 또 『고려사절요』를 보면 여진족의 이름에도 불弗이 많이 쓰인다. 또 신라의 ‘거칠부居柒夫’와 같이 ‘부夫’로 쓰기도 한다. 결국 한자 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같은 국명[불/bur]이 이름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피휘避諱에 대하여
피휘避諱는 휘로 쓰인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 관습이다. 때에 따라서는 글자뿐 아니라 음이 비슷한 글자를 모두 피하기도 했다. 이런 관습이 생겨난 것은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예에 어긋난다고 여겼던 한자문화권의 인식 때문이다. 피휘의 종류로는 국휘國諱, 가휘家諱, 성인휘聖人諱, 원휘怨諱 등이 있다. 피휘의 방법으로는 소리가 같거나 비슷한 글자로 대체하는 대자代字, 공백으로 남겨 놓는 결자缺字, 피할 글자의 한 획, 특히 마지막 획을 긋지 않는 결획缺劃 등의 방법이 있다.

피휘의 예
◆ 신라 시대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와 숭복사비문崇福寺碑文에서 육십갑자의 병진丙辰과 병오丙午를 각각 경진景辰과 경오景午라고 썼다. 이것은 당나라 고조高祖의 아버지 휘 ‘병昞’의 음을 피하기 위해 ‘경景’을 썼기 때문이다.

◆ 고려 시대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구당서》, 《신당서》 등의 중국 문헌에서 당 고조 이연李淵의 휘를 피하여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성을 천泉으로 고쳐 쓴 것을 알지 못하고, ‘천개소문’이라 표기하였다.

◆ 고려 시대 봉암사鳳巖寺 정진대사탑비문靜眞大師塔碑文에서 ‘문무양반文武兩班’을 ‘문호양반文虎兩班’이라고 썼다. 이것은 고려 혜종의 휘 “무武”를 피하기 위해 “호虎”를 썼기 때문이다. 중국 황제가 아닌 한국 왕의 휘를 피한 기록은 이것이 처음이다.

◆ 고려 시대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고려 정종의 휘 ‘요堯’를 피하기 위해 ‘고高’라고 표기하였으며, 고려 혜종의 휘 ‘무武’를 ‘호虎’로 바꿔 기록하였다.

고려 말에는 충선왕이 즉위함에 따라 충선왕의 휘 ‘장璋’을 피하기 위해 경상도 장산현章山縣을 경산현慶山縣으로 고쳤다.

◆ 한나라 경제의 이름이 유계劉啓였기 때문에 ‘계啓’ 자를 쓰지 않기 위해 이십사절기 가운데 계칩啓蟄을 경칩驚蟄으로 바꾸었다.

◆ 1777년 청나라에서 왕석후王錫侯라는 학자가 건륭제의 이름을 책에 쓴 죄로 본인을 포함하여 관련된 자 수십 명이 처형된 사건이 있었다.

중국의 고高씨
중국의 고씨는 강성姜姓 계통이 대다수(중국 고씨 중 90% 이상)를 차지한다. 제나라 왕 강태공의 9세손 제 문공文公의 증손자 강혜姜傒가 고씨 성으로 변경하여 고혜高傒라 하였고, 이후 제나라의 노현盧縣(현재 중국 산둥성 창칭구 서부와 더저우시 서남부 일대)에 봉읍을 받으면서, 후손들이 봉읍의 이름에서 따서 노씨盧氏를 성으로 삼았다. 강혜는 중국 고씨의 시조이자 중국, 한국 노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중국 한족漢族 강성계 고씨는 한국의 고씨와는 연관이 없다. 고씨는 중국에서 성씨 인구 1,600만 명으로 중국 성씨 인구 순위 15위에 랭크되어 있을 정도로 큰 대성大姓이다. 중국 고씨는 중국은 물론 타이완, 태국, 말레이시아 등지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데, 특히 중국 복건성 안계현은 고성촌으로서 동남아 고씨들의 주요 원적지이다. 그 외에 강씨의 제나라가 멸망 후 강씨와 고씨 등 강성姜姓계 성씨들이 한반도와 일본으로 대거 이동하였는데, 현재 일본의 성씨 중 다카하시(高橋), 다카(高)씨 등 ‘고高’가 들어가는 일본 성씨는 한족 강성姜姓계 고씨의 후손이라는 구전이 전한다.

횡성의 연혁과 관련 유적지
횡성은 강원도 서남부에 위치한 지방 소도시로 한우와 안흥찐빵 등이 대표적인 특산물로 유명하며 역사적으로 고주몽을 시조로 하는 횡성橫城 고씨高氏의 관향으로 알려져 있다.

◆ 고구려 시대에는 횡천현橫川縣 또는 어사매於斯買라 하였으며,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 황천현潢川縣이라 개칭되었고 삭주朔州의 영현領縣으로 되었다. 고려 시대에 다시 횡천현으로 개칭되어 춘주春州의 속현屬縣으로 되었다가 뒤에 원주原州의 속현으로 바뀌었다.

◆ 1389년(공양왕 1년)에 비로소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횡천이라는 명칭은 군의 젖줄인 섬강이 남북으로 흐르지 않고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기 때문에 가로의 뜻인 ‘횡橫’ 자를 쓰게 된 데서 유래하였다.

◆ 1413년(태종 13년)에 감무가 현감縣監으로 개칭된 예에 따라 현감이 파견되었다. 다음 해에는 홍천洪川과 발음이 비슷하다고 하여 횡성현橫城縣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 1895년(고종 32년) 관례에 따라 횡성군으로 개칭되어 춘천부春川府의 관할이 되었다. 이듬해에 다시 강원도에 소속되었다.

◆ 천주교의 수용 과정에서 신유박해와 병인박해를 피해 천주교인들이 이곳에 찾아들어 마을을 이루고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1910년 9월 1일 원주군 서원면書院面이 횡성군으로 편입되었다.

◆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이 지역에서도 만세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76년 8월 15일에 3·1운동기념비협찬회와 동아일보사가 공동으로 횡성읍 읍하리 3·1공원에 3·1운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1950년 6·25 전쟁 때에는 북한군과의 치열한 전투장이 되었다. 이때 희생된 이 고장의 영령들을 추모하고 국군 및 유엔군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충혼탑과 기념비가 곳곳에 건립되어 있다.

고씨 유적지
가장 넓은 영토를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선진 문화 대제국이었던 고구려는 횡성 고씨의 선조들, 한민족이 건설한 나라이며 엄연히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로 간직되어야 한다. 횡성 고씨들이 남긴 다음의 유적과 유물들을 통해서 대륙을 호령하던 웅혼한 기상을 느끼고 가슴 깊이 간직하기를 바란다. 유지遺址로는 중국 집안의 국내성 옛터, 광개토대왕릉과 대왕비, 장군총, 고구려 고성, 대성산성과 안학궁터, 광개토왕 때 세워진 광법사, 평양성, 오녀산성, 서대총, 쌍영총, 안악3호분, 충주 장미산성, 중원 고구려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