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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X파일]

    대한사관의 진실 | 학문적 양심이 없는 망설 - 그들은 왜 환단고기를 두려워하는가?(5)


    우리 역사학에는 세 가지 병독病毒이 있다. 바로 왜독·중독·양독의 삼독三毒이다. 그러나 이 삼독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우리들 자신의 사대주의事大主義 정신이었다. 유교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주의 세계 질서에 안착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기자의 후손임을 자처했고, 우리의 역사를 수거하고 감추어 버렸다.

    일제는 여기에 더해 우리를 영원히 저들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의 사서를 멸절시키려 했다. 오랜 기간 축적된 역사 파괴의 결론이 ‘단군신화’라는 용어이다. 『환단고기』에 대해 부정을 위한 부정의 논리를 펼치는 일부 강단사학자들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알아보자.

    여덟째, 기타 위서론자들의 주장


    모름지기 ‘學者’라는 타이틀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오직 진실眞實을 추구하고 진실에 목말라야 할 것이다. 그 진실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먼저 사실事實(Fact)이 있다. 사실은 어떤 사물事物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이다. 사물에는 보는 시각이나 입장에 따라 다양한 사실이 존재한다. 그러한 사실들을 모으고, 가려내었을 때 우리는 사물의 실체實體 즉 진실을 만날 수 있다. 진실을 찾고, 진실을 지키기 위해 투쟁해온 위인들에 의해 역사는 진보해왔다. 나아가 우리는 진실을 통해, 진실을 찾아낸 그 힘으로 眞理의 대장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따라서 오직 진실만이 모든 학문의 기초 토대가 되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 진실을 찾는 1차 무기가 바로 Fact이다. 만약 Fact를 무시하거나 왜곡한다면 적어도 학자나 지성인이라고 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환단고기』는 대한민국과 북한의 고대사학계에서 위서僞書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反論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아직도 한사군, 낙랑군이 한반도 북부, 평양 지역에 있었다는 등 중국 동북공정에 유리한 주장을 펴고 있다. 그들은 한사군 한반도 북부지배설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편찬으로 한사군에 관련된 책
    1)
    을 내기도 하였다. 그런 주류 강단사학은 자신들의 역사 논리와 맞지 않은 주장이 가득한 환단고기를 대부분 위서로 치부하고 있다. 그러나 기존 강단학계의 정설을 부정하는 학자도 많고, 『환단고기』를 긍정적으로 보는 학자도 적지 않다. 또한 긍정적으로 보는 논문 및 책자
    2)
    도 적잖게 나오고 있다.

    또한 북한의 학계에서는 『환단고기』를 인정하고 있다. 지난 2006년 3.1절 자주선언대회가 있었다. 남측에서 동학민족통일회 노태구 공동의장, 임형진 사무총장과 단군학회 정영훈, 하문식, 윤명철 교수 등 10명이 참석한 2월 28일 회동에서 단군학회(회장 김상일)와 북측 조선역사학회(회장 허종호)는 학술회담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 학술회담에 참석했던 김상일 교수는 상생방송이 주최한 콜로키움(2014년 3월 25일)에서 북한 학계에서는 『환단고기』를 역사서로서 인정을 하고 있음을 증언한 바가 있다.

    1)
    Mark E. Byington(Series editor), 2013, 『The Han commanderies in early korean history』, Early Korea project occasional series.


    2)
    주요 논문 및 책자들은 다음과 같다.
    박병섭, 「고조선 누구의 나라
    인가」, 「고구려의 역년은 몇 년인가」, 『고조선을 딛고서 포스트 고조선으로』, 2008년,
    박병섭, 「삼성기전상하 편에 숨겨진 사실들」, 『선도문화』, 제6집, 2009년,
    박병섭, 박병훈, 「『환단고기』의 역사적 전승과정」, 한배달, 2009년 후반기 학술회 의 자료집,2009년,
    박성수, 「재야사서 어떻게 볼 것인가」, 『민족지성』, 1986년 11월호,
    송호수,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환단고기』의 사료적 검토」, 단군학회 1999년 전반기학술회의 자료집, 1999년,
    임승국, 「『환단고기』, 『규원사화』에 위작 많다에 반박한다」, 『자유』, 1990년 11월.
    이승호, 「한국 선도문헌의 연구사소고」, 『선도문화』, 제6집, 2009년.
    박창범·나대일,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 『한국상고사학보』14호, 1993년,
    신원봉, 「『환단고기』의 고유사상문화론」, 『한국고유사상문화론』, 2004년,
    이상시,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 『고려원』, 1990년,
    민영현, 「철학사상으로 본 『환단고기』의 가치」, 『2009년 후반기 한배달 학술자료집』, 2009년,
    박정학, 「치우의 기록으로 본 『환단고기』의 역사성」, 『2009년 후반기 한배달 학술자료집』, 2009년.


    일제 시대 일본이 우리나라 상고사上古史를 비롯한 고유 사서 20만 권을 분서焚書하였다는 사실은 문정창文定昌이 조작해 낸 가짜이다. 총독부 관보를 보면 그때 당시 불태운 서적은 초등교육 교과서와 ‘미국독립사’, ‘을지문덕전’과 같은 근대 역사서와 위인전 등이다?
    反論
    조선일보에 실린 자료에 의하면, 1923년~1937년까지 15년 동안 일제에 의해 차입된 사료가 무려 4,850종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제에 의해 또한 1910년 11월에서 그다음 해 12월 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1차 전국 서적 색출 작업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수거된 서적이 51종에 20여만 권, 그 뒤 15년 동안 차입한 사료가 4,950종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우리 서적을 압수하고 불태웠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일제의 우리 고사서古史書 인멸은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왜곡하고 말살하기 위한 전초 작업이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 관보 제69호에 나와 있는 것은 초등 교육 과정에서 쓰는 교과서와 근대 사상서들, 위인전 등이다. 하지만 일제가 20만 권을 분서하였다 하더라도 그 기록을 구체적으로 남길 리가 없다. 동서고금을 통해 침략자들은 그들의 죄악을 숨기거나 합리화하는 궤변을 늘어놓기 마련이다. 당연히 중요한 고서古書들은 누락시키고 감추었을 것이다.

    위 주장에는 다분히 의도가 깔려 있다. 1차적으로는 일제의 만행을 숨기고 정당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 속에 감춰진 진짜 의도는 뭘까? 분명한 것은 제정신 놓친 사람이라는 거다.

    일본 사학자이자 평론가 하라타카에루原田榮의 저서를
    3)
    보면 “1923년 7월 조선총독부 조선사 편수위원회 구로다가찌미黑板勝美 고문이 대마도에 사료탐방을 하였을 때 한국과 관계있는 문서, 고기록 등 다수가 대주구 번주藩主(영주) 종백작가宗伯爵家에 있음을 알고 고문서 66,469매, 고기록류 3,567책, 고지도 34매 등을 은폐 또는 분서焚書했다.”고 밝히고 있다.

    앞서 본지 2021년 3월호에서 언급했듯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1852~1919)는 조선의 왕실도서관 규장각을 제 안방처럼 드나들면서 고문헌들을 통째로 도둑질해 갔는데 자그마치 18,000점 이상이다. 이 18,000이라는 숫자는 당시의 인쇄술을 고려하면 엄청난 숫자
    4)
    다. 훔쳐간 문화재로 자기의 고향 야마구치시에 ‘데라우치문고’라는 도서관을 만들었을 정도다. 한 개인만 해도 이 정도다. 만주와 한반도 전역을 다니면서 사서와 사료를 수거했던 일제라면 전체 20만 권이라는 것도 적게 잡은 숫자일 것이다.

    일제강점기 일본 궁내성 왕실도서관에서 12년 동안 근무했던 박창화朴昌和( 1895~1962)의 증언에 따르면, 조선총독부가 수탈해 간 우리 고대사 역사서 상당수가 일본 왕실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일본인 동료에게서 “조선의 고서古書는 다 가져왔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들은 조선에는 없는 것들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사서史書 빼돌리기는 일본의 고질적인 버릇이다. 조선 서지학書誌學의 권위자인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65) 도야마富山대 교수는 일본으로 유출된 11세기~19세기에 걸친 고려와 조선의 고서 5만 권의 목록을 35년에 걸친 추적과 조사 끝에 집대성했다. 그는 그 성과물인 ‘일본 현존 조선본 연구’ 1권을 올해 발간했다.

    다음은 당시 조선에 머무르며 일제의 사서 수거를 목격했던 미국인 기자의 증언이다.

    “한국의 역사는 절대로 엄금이다. 합병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일본인은 즉시 한국의 국사國史란 국사國史는 전부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다. (생략) 한국의 문화를 한 자, 한 획이라도 기록한 문자는 철저히 수색하여 폐기시켜 버렸다. 그리고 이런 문자는 가지고만 있어도 그 소유자는 감옥에 수감됨을 면치 못하였다. (생략) 한국 국사는 가지고만 있어도 범죄가 된다. 나도 달포 전에 자기 조국의 역사를 본 죄로 구타를 당한 후 15일 이상 30일 이하의 구류를 당한 한국인을 목격하였다.” - 나다니엘 페퍼Nathaniel Peffer(1890~1964) 「한국 독립운동의 진상」


    침소봉대針小棒大는 악의적인 역사학자들이 잘 쓰는 기법이다. ‘20만 권의 사서 분서焚書는 (총독부 관보에 따르면) 없었다’가 ‘일제에 의한 역사 강탈은 없었다’로 이어지고 ‘일제는 우리 역사를 왜곡하지 않았다’는 엉뚱한 결론으로 끝난다. 그리고 다시 일관되게 환단고기 역사관에 대한 공격과 왜곡, 부정이 이어진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역사관을 가진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해 모략, 꼼수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것으로 보면 그들은 역사의 진실을 찾는 학자들이 아니다. 학문을 가장한 모리배들인가? 아니면 자신의 도그마에 매몰된 ‘바보 지식인’인가?
    3)
    『역사와 현대기』(1981년 4월 25일 발행)
    4)
    「잃어버린 조선 문화유산」 (일본 신오쿠보 고려박물관 圖錄, 2009년 8월)

    신채호도 천부경을 위서로 보았다?
    反論
    신채호가 천부경을 위서로 보았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은 것은 1931년 <조선일보>에 실린 글이다.

    아국我國은 고대古代의 진서眞書를 분기焚棄한 때(이조태종李朝太宗의 분서焚書 같은)는 있었으나 위서僞書를 조작造作한 일은 없었다. 근일近日에 와서 천부경天符經, 삼일신지三一神誌 등이 처음 출현出現하였으나 누구의 변박辨駁이 없이 고서古書로 신인信認하는 이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국서적我國書籍은 각씨各氏의 족보族譜 중 그 선조先祖의 사事를 혹 위조僞造한 것이 있는 이외에는 그리 진위眞僞의 판별辨別에 애쓸 것이 없거니와, 다음 접양接壤된 인국隣國인 지나支那, 일본日本 양국兩國은 종고從古로 교제交際가 빈번頻繁함을 따라서 우리 역사歷史에 참고參考될 서적書籍이 적지 않다. 그러나 위서僞書 많기로는 지나支那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다. 위서僞書를 변인辨因치 못하면 인증認證치 않을 기록記錄을 아사我史에 인정認定하는 오誤가 있다.
    5)


    신채호는 이 글을 통해,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위서僞書를 조작한 적이 없었는데 『천부경』, 『삼일신고』에 대해서 고서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회 분위기를 지적하면서, 위서로 말하자면 오히려 중국과 일본 같은 나라도 없을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1925년 <동아일보>에서 『천부경』이 후인위조後人僞造라고 했던 처음의 주장을 뒤집어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고대의 경전이라고 인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학계에서는 신채호 글의 전체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아국我國은 고대古代의 진서眞書를 분기焚棄한 때(이조태종李朝太宗의 분서焚書 같은)는 있었으나 위서僞書를 조작造作한 일은 없었다. 근일近日에 와서 천부경天符經, 삼일신지三一神誌 등이 처음 출현出現하였으나 누구의 변박辨駁이 없이 고서古書로 신인信認하는 이가 없게 된 것이다.”라는 부분만 발췌하여 신채호가 『천부경』을 위서로 비판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신채호는 우리가 비록 진서眞書를 태운 적은 있어도 위서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천부경』과 『삼일신고』 역시 변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라고 했던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서로 몰고 있는 사회 분위기를 개탄한 것이다.
    6)

    5)
    <조선일보>, 1931년 6월 18일. 조선사 8. 이 글이 <조선일보>에 연재될 당시 신채호는 ‘무정부주의 동방 연맹 북경 회의’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당해 여순 감옥에 갇혀 있던 때이다. 그러므로 신채호의 천부경 인식이 바뀐 것은 1931년이 아니라 그 전에 일어난 것이다. 이 글이 조선일보에 실리게 된 것은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던 안재홍이 어렵게 사는 단재 부인을 위해 반대를 무릅쓰고 연재했던 것이다.


    6)
    이숙화, 2008.2,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석사 학위 논문, 『일제강점기의 천부경 연구』 中


    ‘단군의 건국 이야기’는 일연一然이 『삼국유사』에서 처음 만든 것이다. 아직까지 역사적으로 증명된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신화의 영역을 벗어났다고 볼 수 없다?
    反論
    아마도 이러한 주장이 우리 역사학계의 공식 입장일 것이다. 먼저 ‘단군신화檀君神話’라는 용어 자체가 일제가 만든 거짓 도그마Dogma일 뿐이다. 이것은 일제가 우리 역사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이전, 대한제국 시기의 우리나라 학교 교과서를 보면 명백히 드러난다.

    만약 일제강점기 때 학교에서 가르친 역사와 구한말 교과서의 역사 내용이 큰 줄거리에서 일치한다면, 이건 문제가 없다. 일제의 역사교육이 한국 본래의 역사교육을 계승한 것이기에. 하지만 일제가 만든 역사 교과서의 내용과 구한말의 역사 교과서 내용이 그 근본에서부터 일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명백하다. 이건 거짓 역사이다. 일제의 행위는 역사 사기, 역사 범죄행위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일제가 조작하기 이전의 역사, 남이 만들어 준 역사가 아닌 우리 자신의 역사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가장 기초일 터이다.

    먼저 대한제국 시기에 초등학생들에게 가르쳤던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자.

    《중등교과 동국사략東國史略 (상上)》 1906년 발행
    태자太子 부루扶婁 지나支那의 하우씨夏禹氏 도산회塗山會에 견遣야 각국各國과 옥백玉帛으로 상견相見고


    《대동청사大東靑史 1책》 1909~1910년 중학생을 위한 한국사
    일백구년一百九年에 태자太子 부루扶屢를 지나支那의 하우씨夏禹氏 도산만국회塗山萬國會에 견遣야 외교外交에 착수着手고


    《초등대한역사》 1908년 옥호서림 간행 초등용 교과서
    태자太子、부루扶婁 도산塗山에 견遣야 하夏、【지나支那】 우시禹氏의 만국회萬國會에 참參고 왕자王子、삼인三人을 강화江華、전등산傳燈山에 견遣야 삼랑성三郞城을 축築다


    국조 단군에 대한 기록이 아주 구체적이다. 오히려 지금의 국사 교과서의 기술 내용보다 더 사실적이지 않은가? 이미 그 시기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한국인들의 마음속에는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다’, ‘단군은 우리의 국조다’라는 인식이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에 들어온 일본 침략자들은 이러한 한국인들의 역사의식에 적잖이 당황했다. 한국을 영원히 지배하기 위해서는 한국인들의 ‘한 뿌리 의식’과 공동체 의식을 파괴해야 하는데, 그 중심에 단군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이후 그들은 단군 죽이기, 단군 파괴에 온 심혈을 기울인다. 우리의 고대사를 밝히는 귀중한 사서들을 수거하고 소각하고 빼돌린 것도 그런 작업의 일환이다. 그와 함께 1925년 조선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해 『조선사』 편찬에 나서게 된다. 13년이라는 기간 동안 방대한 조직과 인원을 동원한 결과 1937년 드디어 『조선사』 35권을 완간하게 된다. 일제가 조선사를 만든 이유는 자명하다. 한국인들의 역사의식을 말살하고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더욱 공고히 굳히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의 일환이다.

    일제는 이에 앞서서 우리의 초등학교에서부터 그들이 만든 교과서를 통해 식민지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물론 그 중심 내용은 단군조선을 왜곡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심상소학국사 보충교재 아동용과 같은 책의 교수참고서 1권을 보자.

    일제가 만든 교과서에는 단군이나 단군조선은 아예 없다. 대신 일제는 대외적으로 ‘단군신화’라는 기묘한 용어를 만들어 내고 유행시켰다. 단군과 환웅의 건국 이야기는 정식 역사의 영역이 아니라 신화의 영역이고 허구라는 논리다. 더불어 일제는 조선사를 타율성他律性과 정체성停滯性으로 규정했다. 또한 조선사의 시공간을 축소해 일본사보다 짧은 조선사, 한반도 속에 갇힌 조선사로 재단했다. 일제가 만든 이 프레임이 불행하게도 해방 이후에도 우리 역사학계를 그대로 지배하고 있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서, ‘단군의 건국 이야기’가 일연의 『삼국유사』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것일까? 미안하지만 이런 주장 자체가 일제에 의해 부각되고 강조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삼국유사』 원문을 살펴보면 일연 자신도 ‘위서魏書’와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단군의 조선 건국을 언급하고 있다. 간략하지만 마치 육하六何원칙에 의거한 것처럼 누가, 언제, 어디서 나라를 건국했는지를 분명히 밝혀 준다.

    魏書(위서)에 云(운) 乃往二千載(내왕이천재)에 有壇君王儉(유단군왕검)이
    立都阿斯達(입도아사달)하시고
    開國(개국) 號朝鮮(호조선)하시니 與高同時(여고동시)니라
    『위서魏書』에 이렇게 말했다. 지난 2,000년 전에 단군왕검께서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시고 나라를 세워 이름을 조선이라 하시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였다.

    古記(고기)에 云(운) 昔有桓国(석유환국)하니 庶子桓雄(서자환웅)이 數意天下(삭의천하)하야
    貪求人世(탐구인세)어늘 父知子意(부지자의)하고 下視三危太伯(하시삼위태백)하니
    可以弘益人間(가이홍익인간)이라
    『고기』에 이렇게 말했다.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 서자부의 환웅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거늘, 환국을 다스리시는 아버지 환인께서 아들의 이런 뜻을 아시고 아래로 삼위산과 태백산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로 볼 때 고려 당시에도 단군조선과 그 이전의 뿌리 역사를 기록한 사서史書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지 않지만 대진국大震國 때 「단기고사檀奇古史」(대야발), 신라 때 「표훈천사表訓天詞」(표훈), 「선사仙史」(최치원), 「국사國史」(거칠부) 그리고 고려 때 「조대기朝代記」, 「고조선비기古朝鮮秘記」, 「삼성밀기三聖密記」, 「도증기道證記」, 「지공기誌公記」, 「삼한습유기三韓拾遺記」, 「대변설大辯說」, 「동천록動天錄」, 「지화록地華錄」, 「통천록通天錄」, 「진역유기震域留記」 등의 책이 편찬되었다. 사서史書가 편찬되었다는 것은 이미 그전부터 역사가 구전口傳으로 전수되어 왔다는 방증이다.

    사서의 편찬은 그것을 인정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이다. 따라서 단군의 건국 이야기나 그 이전 환웅천황의 동방 개척과 배달 건국 이야기는 동방의 백성들에게는 고려 시대 이전부터 전수되어 내려온 이야기였다. 고려의 학자 백문보白文寶(1303~1374)가 1374년에 공민왕에게 올린 상소문에는 “우리 동방은 단군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미 3,600년이 지나[吾東方, 自檀君至今, 已三千六百年]”(『고려사절요』 권29, 공민왕 23년 12월 조)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당시에 단군조선을 명백한 실존 역사로 인정하였음을 보여 준다. 백문보의 이러한 역사 인식과 이에 대한 공감대가 『삼국유사』 책 한 권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유치幼稚한 학문적 몰지각이다.

    이미 고조선 3세 가륵단군 때는 「배달유기倍達留記」라는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6세 달문단군 때는 ‘서효사誓効詞’가 당시의 문자로 기록되어 전수되었다. ‘서효사’에는 환인천제, 환웅천황, 치우천황 그리고 단군왕검에 대한 감사함과 환국에서 배달, 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 종통宗統에 대한 주권 선언이 담겨 있다. ‘서효사’의 내용은 고려 때에도 당대 지식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었다. 고려 숙종 때 김위제金謂磾는 숙종 1년(1097년)에 ‘서효사’(일명 「신지비사神誌祕詞」)를 근거로 하여 왕에게 남경南京 천도를 건의했는데 이 내용이 ‘서효사’의 일부와 함께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다.

    又神誌秘詞曰, ‘如秤錘·極器·秤幹·扶疎·樑錘者五德地, 極器百牙岡. 朝降七十國, 賴德護神. 精首尾, 均平位, 興邦保太平, 若廢三諭地, 王業有衰傾.’ 此以秤諭三京也. 極器者首也, 錘者尾也, 秤幹者提綱之處也. 松嶽爲扶疎, 以諭秤幹, 西京爲白牙岡, 以諭秤首, 三角山南爲五德丘, 以諭秤錘. 五德者, 中有面嶽爲圓形, 土德也, 北有紺嶽爲曲形, 水德也, 南有冠嶽尖銳, 火德也, 東有楊州南行山直形, 木德也, 西有樹州北嶽方形, 金德也. 此亦合於道詵三京之意也. 今國家有中京·西京, 而南京闕焉. 伏望, 於三角山南木覓北平, 建立都城, 以時巡駐. 此實關社稷興衰, 臣干冒忌諱, 謹錄申奏.” 於是, 日者文象從而和之. 睿宗時, 殷元中亦以道詵說, 上書言之.

    또 「신지비사神誌秘詞」에서 말하기를, ‘저울추[秤錘]와 저울접시[極器]에 비유하자면 저울대[秤幹]는 부소扶疎이며, 저울추는 오덕五德을 갖춘 땅이고, 저울머리는 백아강百牙岡이다. 70개 나라가 항복하여 조공을 바칠 것이며 〈땅의〉 덕에 힘입어 신기神氣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다. 〈저울의〉 머리와 꼬리를 정밀하게 하여 수평을 잘 잡을 수만 있다면 나라를 융성하게 하고 태평성대를 보장받을 것이고, 만약 비유로 들은 세 곳의 땅을 버린다면 왕업은 쇠퇴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저울을 가지고 3경三京을 비유한 것입니다. 저울접시는 머리이며, 저울추는 꼬리이고, 저울대라는 것은 〈균형을 잡기 위해〉 끌어당겨 총괄하는 곳입니다. 송악松嶽은 부소이니 비유하자면 저울대이며, 서경西京은 백아강이니 비유하자면 저울머리이며, 삼각산의 남쪽은 오덕을 갖춘 언덕으로 비유하자면 저울추입니다. 오덕이라는 것은, 중앙에는 면악面嶽이 있는데 둥근 형태로 토덕土德이며, 북쪽에는 감악紺嶽이 있는데 구부러진 형태로 수덕水德이며, 남쪽에는 관악冠嶽이 있는데 뾰족한 형태로 화덕火德이며, 동쪽에는 양주楊州의 남행산南行山이 있는데 직선 모양으로 목덕木德이며, 서쪽에는 수주樹州의 북악北嶽이 있는데 네모난 모양으로 금덕金德입니다. 이 또한 도선이 말한 3경의 뜻에 부합합니다. 지금 국가에 중경과 서경은 있지만 남경은 빠져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삼각산 남쪽 목멱의 북쪽 평야 지대에 도성을 건립하여 때때로 돌아보시고 거주하십시오. 이것은 실로 사직社稷의 흥망성쇠와 관련된 것이오니, 신은 꺼리고 피하는 것을 무릅쓰고 삼가 기록하여 아뢰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일자日者 문상文象이 그 말을 좇아서 화답하였다. 예종睿宗 때의 은원중殷元中 역시 도선의 설에 따라 상소하여 〈같은 내용을〉 말하였다.


    이상으로 볼 때 단군조선의 나라 통치제도인 삼한관경제三韓官境制가 고려 중기까지 식자층識者層에 회자膾炙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군이 우리의 뿌리라는 인식은 『삼국유사』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직도 단군을 신화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일제의 잘못된 역사교육의 오물汚物이 정신 속에 남아 있는 사례이다. 하루빨리 정통 대한사관大韓史觀의 참교육을 통해 잘못된 역사의식을 정화해야 할 것이다. 이제 ‘단군신화’라는 말은 역사의 쓰레기통에 던져 버려야 할 때다.



    심상소학국사 보충교재 아동용
    1. 교사는 이 책의 교수敎授 참고서에 게재되어 있는 교수 요지要旨와 설명 요령에 준거하여 가르쳐야 하며, 쓸데없이 많은 사항을 부연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서언 중에서)


    목차 1. 상고시대의 조선반도
    기자조선: 옛날에 반도의 북부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으며, 중국에서 기자箕子가 와서 그 땅에서 왕이 되었다고 한다.

    위만조선 : 그 후 위만衛滿이라는 자가 이 지방에 와서, 기자의 후계자인 준準을 쫓아내고 나라를 빼앗았다.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 시기에, 한나라의 무제武帝가 이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에 사군四郡을 설치했다.

    한사군 : 이로부터 수백 년 동안 반도의 대부분은 중국의 영지領地가 되었다. 한漢이라는 것은 그때의 중국 국명國名으로서, 무제가 조선을 취한 것은 우리의 가이쿠와開化 천황【제9대】 때이다.


    교수요지敎授要旨
    본 과課에서 조선반도의 연혁은 북부와 남부가 크게 다르다. 북부는 예로부터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 통치했으며 따라서 중국의 속국屬國 또는 영토였다는 사실을, 남부는 곧 조선인의 조상인 한족韓族의 거주지로서 이 지방은 일찍부터 일본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교수참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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