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B다시보기 | 한국의 성씨 - 4회 제주 양梁씨,부夫씨

[STB하이라이트]

제주도의 대표 성씨 하면 고高, 양梁, 부夫 3성姓입니다. 이 세 개 성씨는 한라산 북쪽 삼성혈의 신화로 탄생한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라고 하는 삼신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번 시간에는 제주濟州 양梁씨와 부夫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25번째로 많은 성씨가 양씨입니다. 양씨는 제주 양씨, 남원 양씨, 충주 양씨 등이 있으며, 모두 양을나를 시조로 모시는 제주 양씨에서 분관이 된 것입니다. 양씨는 원래 어질 량良을 쓰다가 중시조 양탕이 신라에 입조하면서 들보 양梁 자로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후 고려 때까지 良과 梁을 함께 사용하다가 현재는 들보 양梁 자만 쓰고 있습니다. 제주 양씨는 어떤 성씨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양씨의 계통과 분파


양씨는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제주 양씨 14만 2천여 명, 남원 양씨 30만 7천여 명 해서 국내에 약 46만여 명이 살고 있습니다. 이 중 44%는 서울과 경기도에 거주하고 있고, 본향인 제주도에는 전체 양씨의 5%만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주 양씨의 본관별 계파를 보면 고려 태조 때 성주왕자를 봉작받은 양구미를 파조派祖로 하는 성주공파와 고려 명종 때 유격장군이 된 양보숭을 파조派祖로 하는 유격공파가 있습니다.


양씨의 집성촌


집성촌은 제주도뿐만 아니라 전국에 흩어져 있는데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는 조선 중종 14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뜻을 함께한 양팽손이 낙향하여 살던 곳으로 지금도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양팽손의 아들 양응정은 대사성을 지낸 후 처가妻家가 있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뫼 마을에 정착하여 살았는데 이곳 또한 제주 양씨의 집성촌입니다.

제주도에는 제주시 애월읍 상가리와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가 대표적인 집성촌입니다.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에는 600년 역사를 가진 제주 양씨 집성촌이 있습니다. 고려 말엽 중랑장을 지낸 양홍의 후손인 양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집성촌이 형성됐는데 마을 전체 가구 중 80%가 양윤의 후손입니다. 인근 150만 평 밀감밭은 대부분 양씨 문중 소유인데 이 마을은 우리나라 밀감 재배의 원산지이기도 합니다. 조선 영조 때 제주 목사 이형상이 쓴 탐라순력도를 보면 왕실에 감귤의 일종인 당유자를 진상하는 곳으로 신례리의 과원果園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양씨의 시조, 양을나


양씨 시조는 제주도 삼성혈三姓穴에서 나와 탐라국을 개국한 양을나良乙那이다. 중시조 남라국주 양탕이 신라 내물왕 때 입조하여 선린외교를 하였고, 그때부터 양良 성姓을 양梁 성姓으로 쓰게 되었다. … 이처럼 제주, 남원, 충주로 본관이 나누어졌으나 근원은 한 뿌리에서 내려온 혈족이다. - 뿌리공원 『제주 양씨 조형물』 中


우리나라 양씨의 시조는 탐라 개국신화에 등장하는 삼신인 중 한 사람인 양을나良乙那입니다. 양을나로부터 시작된 제주 양씨는 서기 685년 통일신라 신문왕 5년에 양순梁洵이 신라 국학에 수학하고 장원급제한 뒤에 한라군에 봉해지면서 ‘제주’를 본관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주 양씨의 역사 속 주요 인물


제주 양씨의 역사 속 인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조선 시대 인물로 학포 양팽손이 있습니다. 양팽손은 1510년 중종 5년 조광조와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0년 문과에 급제하게 됩니다. 하지만 1519년 10월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김정 등을 비롯한 신진파들을 숙청하는 기묘사화 때 관직을 잃고 고향인 전라도 화순군 쌍봉리로 낙향하게 됩니다. 고향에서 학포당을 짓고 은둔 생활을 하는데 고락을 함께한 조광조가 이곳에 유배 와서 사약을 받고 죽자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의 시신을 직접 나서서 수습하게 됩니다. 양팽손은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는데 안견의 화풍을 이은 산수도는 사림의 예술 세계를 보여 주는 몇 안 되는 그림 가운데 하나입니다. 양팽손은 사후 죽수서원에 배향되었고, 1818년에는 순천의 용강서원에 추향됩니다.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양한묵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하게 옥중 순국한 인물입니다. 1862년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영계리에서 출생하였는데 양팽손의 12대손입니다. 이 가문은 상당한 재력을 갖춘 명문가였으며, 선행을 많이 베풀어 해남에서 평판이 매우 좋았다고 합니다. 20대 초 지방의 세무관으로 일할 때는 참수당하는 위험에 처한 동학군들을 많이 구해 주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후 양한묵은 세계 정세를 살피기 위해 베이징과 일본 동경을 여행하게 되는데 이때 일본에서 망명 중이던 천도교의 교주 손병희를 만나 천도교에 입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입헌군주제의 실시를 위한 헌정연구회를 설립하고 계몽운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특히 헌정요의를 저술하여 1905년 7월 15일부터 8월 3일까지 황성신문에 연재하기도 합니다. 1919년 3.1운동을 일으킬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으며, 독립선언 직후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고 석 달 뒤 58세의 나이로 순국합니다. 현재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 마을에 있는 양한묵의 생가는 기념관이 세워져 독립운동의 교육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양기탁이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로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고 자라서는 영어 공부를 하며 일찍이 서학 문물에 눈을 뜨게 됩니다. 20대에는 미국인 게일 박사가 한국 최초의 한영자전을 편찬하는 데 참여했고, 만민공동회 간부로도 활동했습니다. 1904년 7월 영국인 기자 베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항일 의식 고취에도 앞장서게 됩니다. 또한 별도로 발행된 대한매일신보 영문판은 일제의 침략과 한국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데 획기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양기탁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1907년 안창호, 이회영 등과 함께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항일 운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이후 여러 차례 투옥되는 과정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독립운동을 이어 갔으며, 특히 만주의 3부인 참의부·정의부·신민부 통합을 이끌며 일제와의 무력 투쟁에도 앞장섭니다. 이후 1934년 국무령이 되어 임시정부의 활성화와 민족 대동단결을 위해 노력했으나, 오랜 망명 생활과 과로로 병을 얻어 1938년 중국 강소성江蘇省 율양栗陽에서 요양 중 6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부씨의 계통과 분파


다음은 고·양·부 삼성三姓 중 마지막으로 제주 부夫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탐라국을 세운 삼신인 중 ‘부을나夫乙那’를 시조로 모시고 있는 제주 부씨는 우리나라에서 인구 순위 111번째 성씨이며, 이 중 계통을 알 수 없는 소수의 부씨를 제외하면, 97%가 제주 부씨입니다. 2015년 실시한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제주 부씨는 10,222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고, 이 중 절반인 5,135명이 제주도에 살고 있습니다.


제주 부씨는 삼신인三神人 중 ‘부을나’를 시조로 모시고 있지만, 부을나 이후의 기록이 실전失傳되어 조선 초에 진용교위進勇校尉를 지낸 부언경夫彦景을 1세조一世祖로 하여 대代를 이어 오고 있습니다. 부언경의 현손 중에 어모장군禦侮將軍 부유렴夫有廉과 장사랑將仕郞 부유성夫有成 형제가 있는데, 형인 부유렴의 후손은 유렴공파, 동생인 부유성의 후손은 유성공파로 부릅니다. 부유성夫有成은 육지로 진출해 경기도京畿道 연천蓮川에 정착했기 때문에 연천漣川파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주도에 살고 있는 부씨의 대부분은 부유렴夫有廉의 후손인 유렴공파입니다. 또한 부유렴의 손자 여섯 명이 번성해서 각각 각공계恪公系·협공계協公系·열공계悅公系·신공계愼公系·핍공계愊公系·홍공계弘公系로 나누어집니다.

부씨의 집성촌


제주 부씨의 대표적인 집성촌은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와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인데, 특히 하도리는 마을 전체 대부분이 친족입니다. 이 마을은 고려 때부터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호소防護所인 별방진別坊鎭이 설치된 곳인데, 이곳에 조선 초 어모장군을 지낸 부유렴이 부임하면서 집성촌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인근 세화리, 평대리, 시흥리, 오조리, 한동리, 상도리 일대에도 후손들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부씨 집안 장군석의 전설


어모장군 부유렴이 부임한 하도리에는 전설처럼 전해지는 장군석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유렴의 묘에서 바다 쪽을 보면 해변에 솟아 있는 식산봉食山峰이 보이는데, 이 식산봉 정상에는 유난히 큰 바위 하나가 있습니다. 이 바위가 장군석인데, 이 장군석이 일직선으로 똑바로 부유렴의 묘를 비추기 때문에, 예로부터 부씨 집안에 천하를 호령할 대장군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군석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제주 목사는 탐라의 귀족인 부씨 집안에서 대장군이 나온다면 조정에 반기를 들고 민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 장군석의 머리 부분을 잘라 없애도록 명했는데 명을 받은 군장이 장군석을 자르자 피가 솟아 나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만약 장군석을 끊지 않았다면 부씨 집안에 대장군이 끊임없이 태어났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장군석을 끊었기 때문에 대장군은 나지 않았고 몇 대에 한 사람씩 ‘부대각夫大脚’ 같은 장사만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부씨의 시조, 부을나


부씨의 시조와 역대 인물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는 뿌리공원의 부씨 조형물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부夫씨 시조始祖는 제주도에 탐라국耽羅國을 세운 삼신인三神人중 한 분인 부을나夫乙那왕이다. 중시조中始祖는 통일신라統一新羅가 탐라왕자耽羅王子로 봉한 부계량夫繼良공이다 … 부씨 세보世譜는 조선朝鮮 초부터 시작되어, 1세 진용교위進勇校尉 언경彦景, 2세 적순부위迪順副尉 득시得時, 3세 수의부위修義副尉 상종尙宗, 4세 통훈대부通訓大夫 삼로三老공으로 세계世系가 이어진다. 삼로三老공의 장남은 5세 어모장군禦侮將軍 유렴有廉공이고, 차남 장사랑將仕郞 유성有成공은 경기도 양주楊州 연천漣川파의 파조派祖이다. - 뿌리공원 『제주 부씨 조형물』 中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에 있는 혼인지婚姻池는 삼신인이 벽랑국 삼공주를 만나 혼례를 올렸다고 전해지는 곳입니다. 혼인지 바로 옆에는 ‘삼공주추원비’가 있는데, 벽랑국에서 온 삼공주를 추모하고자 후손들이 세웠다고 합니다. 또한, 매년 6월 10일이면 혼인지 경내에 있는 ‘삼공주추원사’에서 세 성씨의 후손들이 함께 모여 ‘삼공주 추원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제주 부씨의 역사 속 주요 인물


다음은 제주 부씨의 역사 속 인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삼국시대 대표적인 인물은 중시조 부계량입니다. 부계량은 신라 무열왕 때 안무사按撫使로 신라를 예방하여, 탐라와의 평화 외교의 길을 트고 왕으로부터 왕자의 작위를 받은 인물입니다. 서귀포시 성산일출봉 앞에 있는 ‘부씨 중시조 추원단’에서 매년 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 인물로는 부유렴과 부종인이 있습니다. 세종 때의 인물인 부유렴은 제주 동부 지역을 지키는 어모장군禦侮將軍이 되는데, 그를 시작으로 대를 이어 10명의 어모장군과 11명의 절충장군折衝將軍을 배출하면서 탐라를 방어하는 무관의 가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부종인은 조선 후기의 인물로 서귀포시 토평동에서 태어났습니다. 1795년 정조 19년 29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대정현감大靜縣監·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예조정랑禮曹正郞 등을 역임하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이르게 됩니다. 또한 부종인은 평소 청렴결백한 생활을 하였으며, 선비들을 학문에 정진하도록 힘쓴 공덕으로 고을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조정에서는 흥학비興學碑를 세워 그 공을 기렸습니다.

오늘로 제주도의 대표 성씨인 고·양·부 삼성三姓에 대해 모두 알아보았습니다. 시조 탄생 신화를 세 성씨가 함께 공유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여서 더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한국 성씨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시간, <한국의 성씨> 많은 시청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