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무극대도 | 주역 쉰일곱 번째 선경삼일先庚三日 후경삼일後庚三日의 비밀이 담긴 중풍손괘 ䷸

[기고]

한태일(인천구월도장 교무도군자)

신神은 바람으로 온다.


위아래로 거듭하여(重) 바람(風)을 뜻하는 손巽(☴)괘가 있다 하여 중풍손괘重風巽卦(䷸)입니다.

손괘(☴)는 두 양(⚌) 밑에 음(⚋) 하나가 얌전히 엎드려 있는 모습으로 ‘공손하다’와 ‘겸손하다’의 뜻이며, 「잡괘전」에서도 ‘손괘는 엎드려 있는 것(巽伏也)’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손괘(☴)는 맨 아래 끊어진 음효(⚋) 사이로 바깥에서 안으로 파고드는 바람을 형상한 괘로 바람은 빈틈만 있으면 그 틈새로 다 들어가므로 성정은 ‘들어간다(入)’라고 합니다.

‘신神은 빛과 바람으로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천지 안에 꽉 찬 것이 신神이며 온 만물을 움직이는 것은 바람(風)입니다. 천리天理의 지극함인 신神은 바람으로 옵니다. 그래서 바람은 신神, 신명神明, 신도神道를 상징합니다. 일찍이 최치원 선생은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는데 이를 풍류風流라고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동방 문화의 원류가 인간의 밝은 본성을 열어 주는 신명의 도입니다. 이처럼 바람 괘가 거듭된 중풍손괘에는 무도巫道와 관련한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원시 신성문화를 간직한 무당 문화, 특히 대무大巫로서 선천의 겁기를 풀어 버리는 ‘무당도수巫堂度數’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손괘는 동물로는 흙을 후비고 안쪽으로 파고드는 버릇을 가진 닭[鷄]이며, 아버지를 뜻하는 건괘(☰)에서 가장 먼저 나온 음이라서 장녀長女에 해당하고, 방위로는 동남방[巽方]이며 절기로는 입하立夏를 나타냅니다.

☯ 괘사
巽(손)은 小亨(소형)하니 利有攸往(이유유왕)하며 利見大人(이견대인)하니라
손巽은 조금 형통하니 가는 바가 이로우며 대인을 봄이 이로우니라.


☞ 손巽은 조금 형통하니(巽小亨): 중풍손괘는 음 하나가 두 양 밑에서 공손하게 엎드리고 있는 손괘(☴)가 거듭된 모습입니다. 대성괘(6효)에서는 소수의 음효나 양효가 괘를 주도하는데 중풍손괘 경우는 4양 2음으로 음효가 주主가 되며, 또한 음효는 소小, 양효는 대大를 나타내므로 소형小亨입니다. 너무 앞서면 화禍를 당할 수도 있지만 뒤로 물러나 자신을 낮추고 있으면 크게 형통할 수는 없겠지만 나름대로 조금은 형통할 수 있겠죠. 세상을 살아가는 데 공손하게 처신한다면 어려운 지경은 조금 피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지산겸괘에서 ‘겸손하면 복을 받는다(福謙)’와 ‘낮춤으로써 자신을 키울 수 있다(卑以自牧也)’와 같은 의미입니다.

☞ 가는 바가 이로우며 대인을 봄이 이로우니라(利有攸往利見大人): 스스로 낮추고 공손한 마음을 가진 음소인陰小人(초육과 육사)들은 누구와도 잘 어울려 손해 보는 일이 없습니다. 겸손한 초육 소인은 구이 대인을, 공순한 육사 소인은 구오 대인을 만나 보기가 이롭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은 대인의 큰 뜻을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손하여 뜻이 행해지며


☯ 단 전
彖曰(단왈) 重巽(중손)으로 以申命(이신명)하나니
剛(강)이 巽乎中正而志行(손호중정이지행)하며 柔皆順乎剛(유개순호강)이라
단전에 이르길 “거듭한 손巽으로 명을 펼치니 강이 중정에 공손해서 뜻이 행해지며 유순한 것이 모두 강한 것에 순하게 하니라.

是以小亨(시이소형)하니 利有攸往(이유유왕)하며 利見大人(이견대인)하니라
이로써 조금 형통하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우며 대인을 봄이 이로우리라.“고 하였습니다.


☞ 거듭한 손巽으로 명을 펼치니(重巽以申命): 중풍손괘는 공손하다는 손괘가 위아래 거듭 있는 괘상입니다. ‘중손重巽’은 공손함이 거듭 있으니 아주 공손하다는 뜻이며 이러한 마음으로 명을 펼친다(申命)고 하였습니다. 신명申命의 신申은 ‘되풀이하다, 거듭하다’의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신伸 자로 봐서 ‘펼치다, 알리다’의 뜻이며 바람을 통해서 만물의 기운氣運이 운반되듯 하늘의 천명과 임금의 어명이나 장군의 군령이 바람처럼 공손하게 아래로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 강이 중정에 공손해서 뜻이 행해지며 유순한 것이 모두 강한 것에 순하게 하니라(剛巽乎中正而志行柔皆順乎剛): 강이 중정에 있다는 말은 구오를 말하는 것으로 군왕 자리에 있으면서 상괘의 가운데(中)에서 양이 양 자리에 바르게(正) 있습니다. 아무리 군왕이라도 겸손하고 올바로 처신해야 군왕의 영令이 제대로 행하여지며, 아래 있는 백성(초육)과 신하(육사) 모두 구오(군왕)에게 공손히 복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이로써 조금 형통하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우며 대인을 봄이 이로우리라(是以小亨利有攸往利見大人): 이와 같이 상하괘에 있는 각각의 음 하나가 두 양 밑에서 공손하고 겸손하게 행함으로써 비록 큰 것을 이루기는 어렵지만 조금이나마 형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공손함으로써 처신하면 하는 일에 도움이 되어 이로우며, 하나씩 배워 나가면서 경륜을 쌓은 다음에 대인에게 찾아가서 그로부터 큰 배움을 구하는 것이 이롭다는 것입니다.

군자는 덕화로써 명을 펼쳐야


☯ 대 상
象曰(상왈) 隨風(수풍)이 巽(손)이니 君子(군자) 以(이)하여 申命行事(신명행사)하니라
대상전에 이르길 “바람이 바람을 따라 부는 것이 손巽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명을 펴서 일을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 바람이 바람을 따라 부는 것이 손巽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隨風巽君子以): 중풍손괘는 위아래에 바람을 뜻하는 손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람이란 한번 불고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이어 바람을 따라 부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군자와 바람’에 대한 공자의 유명한 명언이 있습니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로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눕게 마련이다(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 - 『논어』 「안연편」

군자의 덕(君德)을 바람에 비유하여 큰 바람이 전체 풀의 방향을 바꾸니 그 파급 효과가 크다는 것입니다. 세운으로 봐도 군자는 위정자, 소인은 백성으로 국가를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의 자질과 마인드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운으로도 군자의 덕화德化로 창생들을 감화시킬 수 있으니 군자의 풍모風貌가 끼치는 영향은 참으로 크다 할 수 있습니다.

* 사람은 본을 받아서 깨쳐야 한다. (道典 8:10:2)


이처럼 군자는 중풍손괘에 담긴 바람의 덕성을 본받아 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 명을 펴서 일을 행한다(申命行事): 중풍손괘에는 선도仙道와 관련된 단어들이 나오는데 그중의 하나가 ‘신명행사申命行事’입니다. 신명申命이란 말은 ‘명을 거듭한다[重]’는 뜻과 ‘명을 펼친다[伸]’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요. 먼저 거듭한다는 뜻으로 쓰인 예는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거듭 말씀[명]하신 것을 적은 글’이란 뜻의 신명기申命記가 있습니다. 그리고 ‘펼친다’는 뜻으로 쓰인 예는 바로 중풍손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신명申命을 바람 괘와 결부시켰느냐 하면, 바람은 천지 안에 가득 차서 아무런 거침이 없고 막힘도 없는 신명神明과 같아서 온 만물을 움직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듯이 인간사에서도 바람처럼 명을 펼치라는 것입니다. 지나온 선천은 인위적인 강압에 의한 명의 집행이었지만 다가올 후천은 온화한 바람처럼 인신합덕으로 자연스레 명이 펼쳐집니다.

참고로 신申을 귀신[神]으로도 풀이하는데요, 이 경우는 ‘신난다’, ‘신바람 난다’, 또는 ‘신명神明난다’라는 말이 그런 예입니다. 신명난다고 할 때의 ‘신명神明’은 천지신명天地神明의 준말이며 하늘과 땅에 가득 찬 삼라만상에 있는 신성神性이 내재된 초자연적인 존재를 말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Ecstasy(빙의)나 Orgiastic state(난장 상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상용어로서의 신명은 예컨대 ‘신명나게 놀자’처럼 신령과 사람이 일체감을 느끼는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심리적, 감정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다른 말로는 ‘흥興’이라고도 합니다. 신령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접신接神 상태를 ‘신 지핌’, ‘신 실림’, ‘신 오름’이라 하는데 이때 영적, 감정적 상태가 곧 신명인 것이죠.

참고로 전기電氣, 전화電話, 전보電報라는 글자에 ‘번개 전電’ 자를 쓰는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電’ 자는 ‘雨 + 申’인데 여기서 申은 원래 ‘电(번개 전)’으로 번개가 번쩍하고 칠 때 구부러지는 모양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번갯불처럼 빨리’ 소식을 전달하거나 소통하는 데 쓰는 전화나 전보 등에 ‘번개 전電’ 자를 쓰는 것입니다.

무인의 바름이 이로우니라


☯ 육효사
初六(초육)은 進退(진퇴)이니 利武人之貞(이무인지정)이니라
초육은 나아갔다 물러남이니 무인의 바름이 이로우니라.

象曰(상왈) 進退(진퇴)는 志疑也(지의야)오 利武人之貞(이무인지정)은 志治也(지치야)이라
소상전에 이르길 “나아갔다 물러남은 뜻이 의심스러움이요, 무인의 바름이 이롭다는 것은 뜻이다스려짐이라.”고 하였습니다.'


중풍손괘는 양들 밑에 음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공손한 괘입니다. 특히 초육은 공순恭順한 손괘의 가장 밑자리에 있고 유약한 음효(⚋)로서 의지意志 또한 굳건하지 못해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進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은 마치 『햄릿Hamlet』에 나오는 햄릿의 독백, ‘To be or Not to be!’(죽느냐 사느냐)의 심적 갈등과 유사하네요.

초육의 이런 우유부단한 행동은 가슴에 품은 뜻이 확고하지 못해 의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志疑也). 하지만 이런 초육일지라도 무인처럼 뜻을 굳건히 하고 자신을 잘 다스려 올바르게 행동하면 이롭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상제님 대도진리의 입장에서 해석해 보겠습니다. 유약한 초육이 강건한 무인으로 변하는 것은 괘상을 보더라도 초육이 변하면 공손한 바람괘(☴)는 강건한 하늘괘(☰)로 변함을 알 수 있으며, 하늘의 명[天命]을 받거나 하느님으로부터 감화통感化通을 받게 되면 앞가림도 못하는 범부凡夫(초육)일지라도 강력한 초인(무인)으로 변하게 됩니다.

* 너희들은 하늘을 이고 행세하느니라. 너희들이 지금은 한 마을의 일도 감당하지 못하나 때가 오면 천하의 준걸들이 너희들에게 와서 선생으로 받들게 될 것이니라. (2:112:9~10)


또한 이름 없는 한 구도자가 상제님으로부터 천명을 받아 시천주侍天主 시대를 선언한 최수운 대신사의 경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 천주님의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말씀하시길 “두려워 말고 겁내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上帝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하시고 “너에게 무궁무궁한 도법을 주노니 닦고 다듬어 수련하여 글을 지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법을 정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케 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 하시니라. (1:8:13~14)


천명을 받았다고 정도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상제님께서도 “하늘이 이치理致를 벗어나면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2:20:3)고 하셨으며 “모든 일에 마음을 바로 하여 정리正理대로 행하여야 큰일을 이룬다.”(8:77:1)고 말씀하셨습니다.

점치고 굿하는 것을 어지러운 듯하면


九二(구이)는 巽在牀下(손재상하)이니 用史巫紛若(용사무분약)하면 吉(길)하고 无咎(무구)하리라
구이는 공손함이 평상 아래에 있으니 점치고 굿하는 것을 어지러운 듯하면 길하고 허물이 없으리라.

象曰(상왈) 紛若之吉(분약지길)은 得中也(득중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어지러운 듯하면 길하다는 것은 중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 공손함이 평상 아래에 있으니(巽在牀下): 공손함이 평상 아래에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일반적으로 평상은 위에 앉는 것인데 상 아래 내려가 있다는 것은 제사를 모시는 것을 말합니다. 제상 위에는 정성스레 준비한 제물을 진설하고, 제주祭主는 상 아래에 공손히 꿇어앉아 예를 다하여 정성을 올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성을 다해 제물을 준비하고 공손하게 제사를 모셔야 신명의 감응感應을 받아서 길吉하게 되는 것이고 허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 점치고 굿하는 것을 어지러운 듯하면(用史巫紛若): 점(占, 史)치는 점쟁이와 굿(巫)을 하는 무당은 신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영적 매개자입니다. 글자에도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점占(=卜+口)’이란 글자는 ‘하늘과 땅에 가득 찬(丨) 신의 뜻을 꼭 집어(丶) 물어본 것을 점쟁이의 입(口)을 통해서 점괘로 말한다’는 뜻입니다. ‘사史’는 제사를 주관하는 사관을 말하며, 史=中(점칠 때 쓰는 주술 도구)+又(손에 듦)로 제사를 지내거나 점을 칠 때 주술 도구를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무당(巫=二+丨+ㅆ)’이란 글자는 ‘하늘과 땅(二)을 이어 주는 영적 매개체(神木, 宇宙木)을 사이에 두고 한 사람은 묻고 또 한 사람은 답하는 모습’으로 하늘과 인간을 이어 주는 영적 중매자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점쟁이와 무당이 신의 뜻을 잘 받아 내려면 ‘어지러운 듯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당은 방울과 신칼 등을 들고 격렬하게 몸을 흔들어 무아의 경지에 돌입해야 신과 접하게 되고, 점쟁이 또한 신대[神대, 내림대]를 잡은 손과 몸을 흔들어야 접신接神이 되어 제대로 점괘가 나오는 것이죠.

이 부분을 상제님 진리로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점쟁이와 무당을 샤먼shamam이라고 합니다. 샤먼은 접신의 경지에 들기 위해 ‘어지럽게(격렬한 몸짓: 노래를 부르거나 주문을 읊조리거나 북 등을 두들기며 춤을 춤)’ 해야 합니다. 중풍손괘의 샤먼은 개인의 피흉취길避凶趣吉을 찾아 주는 블랙샤먼blackshaman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신성을 가진 대광명의 무巫인 화이트샤먼whiteshaman을 말합니다.

도전道典에는 이와 관련해 상제님께서 보신 ‘무당 도수’ 공사가 있습니다. 상제님께서는 창생들에게 영원한 복록을 주시기 위해 선천 오만 년 동안 쌓인 상극의 겁기를 제거하고 인류의 원과 한을 풀어 주시기 위해 친히 천지굿판을 차리셨습니다.

* 상제님께서 친히 장고를 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천지굿이라. 나는 천하 일등 재인(才人)이요,너는 천하 일등 무당(巫堂)이니 우리 굿 한 석 해 보세. 이 당(黨) 저 당(黨) 다 버리고 무당 집에 가서 빌어야 살리라.” 하시고 ····(중략)···· 상제님께서 소리 높여 노래하시기를 “단주수명(丹朱受命)이라. 단주를 머리로 하여 세계 원한 다 끄르니 세계 해원 다 되었다네” 하시고 수부님께 일등 무당 도수를 붙이시니라. (6:93:4~10)

“선천 시원문화인 신교의 실체는 우주적 영성을 가진 무당문화라 할 수 있다. 태고의 황금시대에 화이트샤먼(White Shaman, 천지조화의 광명을 받는 태초의 무당)이라 불린 존재들은 몸을 가지고 대우주를 날아다닐 정도로 우주적인 영성을 가진 대무大巫로서 문명의 창시자였다. 상제님께서는 이 같은 원시의 신성 문화를 회복하는 문을 열어 놓으셨으며 그것을 성취하신 분이 천지 무당 도수를 맡으신 태모님이시다.” (6:93:10 측주)


그리고 상고시대 예濊의 무천舞天(하늘 춤)이나 부여의 영고迎鼓(북을 두들기며 맞이함) 등 고대 한민족의 제천의식에서도 그 원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신과 하나 되는 신인합일神人合一 혹은 인신합덕人神合德이 되어야만 신의 뜻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어 길하고 허물을 지을 일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신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몸짓뿐만 아니라 우주의 생명의 소리에 동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몸을 움직이는 동공動功 수행은 특별하고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종도사님께서는 “우주의 본성은 움직임(movement)이다. 천지를 가득 채운 기氣의 움직임, 그것은 진동vibration이다. 그리고 만물의 본성, 곧 생명의 움직임인 진동은 소리(sound)로써 드러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샤먼은 소리로써 우주의 신성을 내려 받는 주문呪文을 읽으면서 신인합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조화주 상제님께서는 몸을 움직이면서 수행하는 ‘동공動功’ 수행법을 몸소 알려 주셨습니다.

* 상제님께서 성도들에게 태을주를 시작으로 시천주주와 개벽주 등 주문을 읽게 하시니 좌중에 점점 흥이 더해 가고 신신이 내리매 모두들 몸을 들썩들썩하며 ····(중략)···· 이윽고 상제님과 수부님께서 시천주주(侍天主呪)를 읽으시며 “나나나나~” 하고 몸을 격렬히 흔드시다가 갑자기 앉으신 채 공중으로 뛰어오르시거늘 성도들도 따라서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응아야 응아야~” 하다가 기운이 솟구쳐 펄쩍펄쩍 뛰어 오르는데 (5:307:2~10)

* 이때 성도들은 태을주(太乙呪)와 진액주(津液呪)를 읽으며 몸을 흔들다가 구르기도 하니라. (5:379:10)
곧 닥칠 추살 개벽기에는 누구나 ‘태을주太乙呪 수행’과 ‘동공動功 수행’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 태을주로 천하 사람을 살리느니라. (2:140:3)

* 태을주는 천지 어머니 젖줄이니 태을주를 읽지 않으면 다 죽으리라. (2:140:9)


그리고 선후천이 바뀌는 개벽 원리와 상제님이 오시는 이치를 밝힌 정역正易을 완성한 김일부 대성사의 영가무도詠歌舞蹈(‘음아어이우’의 오음을 음률에 맞추어 부르면서 춤을 추는 수행법) 또한 ‘어지럽게’ 하는 수행법의 한 종류입니다.

☞ 중을 얻었기 때문이라(得中也): 샤먼이 좋은 점괘를 얻고 접신이 잘되는 것은 득중得中을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득중得中의 ‘中’은 천지의 마음 한가운데를 관통한 것으로 일심의 경지에서 천심天心에 통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얻은 것입니다.

* 일심(一心)이면 천하를 돌리는데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느냐? (8:81:3)


九三(구삼)은 頻巽(빈손)이니 吝(인)하니라
구삼은 자주 공손함이니 인색하니라.


象曰(상왈) 頻巽之吝(빈손지인)은 志窮也(지궁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자주 공손함이 인색하다는 것은 뜻이 궁함이다.”고 하였습니다. #]

구삼은 양자리에 강한 양이 오고, 중中도 얻지 못해 태생적으로 강할 수밖에 없는 성격이라 공손할 수가 없습니다. 자주 공손하다(頻巽)는 것은 겉으로 공손한 척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겉으로는 미소를 띠며 공손한 척하지만 속마음은 그러하지 않으니 인색한 것입니다. 이렇게 가식으로 공손한 척하는 것은 궁색해진다고 소상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 사람이 몸가짐과 처사와 어습(語習)을 제 본성대로 할 것이요, 억지로 꾸며서 점잔과 교식을 내는 것은 삿된 일이니라. (8:74:11)


참고로 지뢰복괘地雷復卦(䷗) 육삼효에도 ‘빈복頻復이니 려厲하나 무구无咎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나마 복괘는 회복하는 때라서 비록 변덕을 부려(頻復) 약간 위태롭기는 하지만 허물은 없다고 했습니다.

六四(육사)는 悔亡(희망)하니 田獲三品(전획삼품)이로다
육사는 후회가 없어지니 사냥을 하여 삼품을 얻도다.


象曰(상왈) 田獲三品(전획삼품)은 有功也(유공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사냥을 하여 삼품을 얻는다는 것은 공이 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 후회가 없어지니 사냥을 하여(悔亡田): 육사는 중풍손괘의 상괘에서 두 양 아래 공손하게 무릎 꿇고 있으니 후회할 일을 하지 않아 당연히 회한이 생길 것도 없습니다. 초육이 무인武人이듯이 그와 응하는 육사 또한 같은 무인이라서 사냥(佃)을 하네요.

☞ 삼품을 얻도다(田獲三品): 사냥해서 얻은 것이 삼품이라고 한 것은 품品 자에 입 구口 자가 3개 붙어 있어 그렇습니다. 참고로 64괘 중에서 품品 자가 나오는 것은 중천건괘의 ‘품물유형品物流形’, 중지곤괘의 ‘품물함형品物咸亨’ 그리고 천풍구괘의 ‘품물함장品物咸章’의 3품인데, 이는 강건한 하늘 기운으로 품물이 모양을 갖추게 되며(流形), 후덕한 땅의 기운으로 품물이 모두 형통하게 되며(咸亨), 그리고 하늘과 바람 기운이 서로 만나 품물이 모두 빛나게 되었습니다(咸章). 이같이 품品 자에는 천지인의 삼재三才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귀중한 삼재의 전리품을 획득했으니 육사는 큰 공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처음은 없으되 마침은 있느니라


九五(구오)는 貞(정)이면 吉(길)하여 悔亡(희망)이니 无不利(무불리)니 无初有終(무초유종)이라
구오는 바르면 길하여 후회가 없으니 이롭지 않음이 없으니 처음은 없으되 마침은 있느니라.

先庚三日(선경삼일)하며 後庚三日(후경삼일)이면 吉(길)하리라
경庚에 앞서 삼일하며 경庚의 뒤에 삼일하면 길吉하리라.

象曰(상왈) 九五之吉(구오지길)은 位正中也(위정중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구오의 길함은 자리가 바르고 가운데 하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구오에는 후천개벽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중풍손괘 구오 효사는 384개 효 중에서 난해한 효 가운데 하나입니다. 구오 효사를 제대로 풀이하기 위해서는 선후천 개벽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구오는 양이 양 자리에 와서 바르고 중을 얻어서 중정中正한 자리입니다.

☞ 바르면 길하여 후회가 없으니(貞吉悔亡): 중정한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효사들은 길吉하다는 표현을 쓰는데 여기서는 왜 ‘바르게[貞]’ 해야 길하다는 단서를 달았을까요? 그것은 중풍손괘가 대변국을 의미하며, 그중에서 구오는 변국의 핵심 자리이기 때문에 근신하라는 경계사를 붙였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천추千秋의 한恨을 남기지 않아서 이롭지 않음이 없게 되니까요.

☞ 처음은 없으되 마침은 있느니라(無初有終): 무초유종은 ‘선천과 후천의 상징어’입니다.

‘선천先天은 무초無初’입니다. 사람도 처음 태어났을 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해 놓은 것도 없는 그야말로 천둥벌거숭이죠. 이처럼 아무것도 없던 사람이 철이 들고 어른이 되면 사람 노릇을 해서 유종有終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 년 농사로 치면 선천인 봄과 여름에는 씨를 뿌리고 기르는 때라 결실을 못해서 아무것도 없지만(無初), 가을인 후천에는 열매를 거두어 수확을 하니 유종有終이 됩니다.

큰 틀로 보면, 우주 일 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 겨울인 빙하기가 끝나고 선천개벽으로 열린 우주의 봄철에 인류가 출현해 원시 문명이 싹터서 여름철 뜨거운 열기로 오늘날과 같은 최첨단 문명의 꽃을 피웠지만 사실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현대사회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한계와 위기, 끝없이 추락하는 인간성의 타락, 날로 심각해져 가는 온난화와 기상이변, 신종 전염병의 출현 등 각종 절망적인 소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천의 구조적인 한계입니다.

선천의 봄여름은 천지의 운행 질서가 비뚤어져 있는 ‘윤역閏曆’과 ‘주역周易’의 시대라서 그 틀 안에 갇혀 사는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는 살벌한 상극相克 기운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어린애들이 싸우면서 크듯 봄여름의 생生‧장長 시대는 상극의 틀에 짜여 있어 선善보다는 악惡으로 먹고 살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착하게 살려고 다짐하건만 돌아서면 금세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선천 인류의 본질이며 한계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어느 때보다 지식 수준도 높으며 삶의 질 또한 풍족해졌지만, 그와 반대로 범죄율의 증가와 흉포화는 더욱 기승을 부리니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천지의 틀 자체가 삐뚤어져 있는데 똑바로 서 있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지경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갯벌에 사는 꽃게가 새끼들에게 모로 가지 말고 똑바로 가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후천後天은 유종有終’입니다. 가을철이 되면 산과 들에 수많은 초목들이 저절로 누렇게 익어 갑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철들기 전엔 인간이 될 것 같지 않더니만 결혼해서 자식 낳고 살다 보면 자기 살길은 스스로 헤쳐 나가게 마련입니다. 인생의 후천인 중년에 접어들면 나름대로 유종의 성과가 나타납니다(有終). 이것이 바로 후천의 본질입니다. 우주 가을철인 후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후천이 열리면 닦은 바에 따라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다 열매[도통道通]를 맺게 되며 상생相生의 시대가 펼쳐집니다.

후천은 기울어진 천축天軸의 정립正立으로 1년 360일의 ‘정역正曆’과 건북곤남乾北坤南의 ‘정역正易’ 시대가 열립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성인聖人의 심법心法으로 살아가니 선善으로 먹고사는 시대가 됩니다. 선천 5만 년 동안 나름대로 도통道通을 해 보려고 무던히도 애썼지만 우주의 봄·여름의 속성상 제대로 여물 수가 없습니다. 봄여름에 여물지 못했던 결실의 꿈은 후천 가을개벽을 맞이해서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즉, 무수한 육신의 옷을 더 이상 갈아입을 필요가 없는, 삶이란 여정의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더 이상 윤회輪廻가 필요 없는 ‘인간열매’로 여무는 때인 것입니다.

☞ 선경삼일 후경삼일(先庚三日後庚三日): 그러면 무초가 유종이 되는 때는 언제일까요? 바로 그 해답이 경庚에 앞서 삼일하며 경庚의 뒤에 삼일한다는 ‘선경삼일先庚三日 후경삼일後庚三日’에 있습니다. 천간天干의 순서를 살펴보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선경삼일’은 ‘丁‧戊‧己’이고 ‘후경삼일’은 ‘辛‧壬‧癸’입니다.

‘경庚’ 자는 ‘뜯어고친다’는 의미로 경을 전후로 고친다고 하니 경庚은 곧 ‘후천개벽’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丁부터 癸까지가 ‘7일’이 됩니다. 이는 회복한다는 지뢰복괘地雷復卦에서 말한 ‘칠일七日에 래복來復’한다는 구절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럼 7일이라는 7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7은 ‘하늘의 수 3’과 ‘지상의 수 4’가 합해진 수數입니다. 7은 ‘큰 변화의 한 주기’입니다.

또 중풍손괘(䷸)의 구오가 변하면 산풍고괘山風蠱卦(䷑)로 바뀝니다. 산풍고괘는 산(山,☶)속에 바람(風,☳)이 들어 병들었다(蠱)는 괘로 여기에도 신기하게 ‘선갑삼일先甲三日하며 후갑삼일後甲三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천간의 순서를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갑삼일’은 ‘辛‧壬‧癸’이며 ‘후갑삼일’은 ‘乙‧丙‧丁’입니다. 즉, 경庚에서 갑甲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오행에서 갑甲은 목木이며, 경庚은 금金이므로 ‘금극목金克木’이라는 상극이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경庚[후천]의 시대가 오려면 갑甲[선천]을 극복[金克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선갑甲삼일 후갑甲삼일’이 ‘선경庚삼일 후경庚삼일’로 바뀌는 것에 ‘후천개벽의 비결’이 담겨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깊이 궁구窮究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역 중풍손괘에서는 선후천이 바뀌는 비결을 ‘천간天干’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도전道典을 보면 상제님께서는 다가오는 후천개벽의 대세에 대해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 이 때 최덕겸(崔德兼)이 “천하사는 어떻게 되옵니까?” 하고 여쭈니 상제님께서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라 가로로 쓰신 후에 말씀하시기를 “이러하니라.” 하시니라. 이에 자현이 여쭈기를 “그 뜻을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십이지(十二支)로 천하사가 장차 어느 때에 이루어질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니 상제님께서 다시 그 위에 ‘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라 쓰시고 경석에게 “네가 알겠느냐?” 하고 물으시니 경석이 “알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거늘 상제님께서 “대나무같이 속이 통통 비어 있는 도통자라야 안단 말이다.”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베 짜는 바디와 머리 빗는 빗과 같으니 알겠느냐?” 하시니 경석이 “알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니라. (10:35:3~10)


그리고 상제님께서는 후천개벽의 시간대로 들어서는 것을 ‘풍류주風流酒’로도 말씀하셨습니다.

* 風流酒洗百年塵(풍류주세백년진)이라
온 세상의 백년 티끌 내 무극대도의 풍류주로 씻어 내니 (5:155:8)


“풍류는 ‘신바람, 상제님의 조화신권’을 상징한 것이다. 백 년은 천지공사 보신 해로부터 백 년간의 해원의 여정을 말한다. 즉 지난 백 년의 시간 동안 상제님의 도로 일체의 묵은 기운을 씻어 내어 선천 역사를 마무리 짓고, 새 우주를 개벽하는 실제 개벽의 시간대로 들어가는 것이다.” (8:44:12 측주)


上九(상구)는 巽在牀下(손재상하)하여 喪其資斧(상기자부)니 貞(정)에 凶(흉)하니라
상구는 공손한 것이 평상 아래에 있어서 그 재물과 도끼를 잃으니 고집을 부리면 흉하니라.

象曰(상왈) 巽在狀下(손재상하)는 上窮也(상궁야)오 喪其資斧(상기자부)는
正乎(정호)아 凶也(흉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공손한 것이 평상 아래에 있다는 것은 위가 궁하다는 것이요, 그 재물과 도끼를 잃어버린 것은 바른 것인가? 흉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상구는 구이와 같이 ‘손재상하巽在牀下’입니다. 구이는 제사를 모시는 제주祭主 입장에서 공손하게 제사상(초육) 아래에 있는 것이고, 상구는 손괘의 끝자리로 육사 아래에 있어 비굴할 정도로 지나치게 공손함으로써 재물과 권력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오히려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 하였습니다. 그렇게 비굴하게 공손한 것은 흉하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