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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X파일]

    대한사관의 진실 | 主客顚倒의 억지 - 그들은 왜 환단고기를 두려워하는가?(2)


    우리 역사학에는 세 가지 병독病毒이 있다. 바로 왜독·중독·양독의 삼독三毒이다. 그러나 이 삼독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우리들 자신의 사대주의事大主義 정신이었다. 유교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주의 세계 질서에 안착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기자의 후손임을 자처했고, 우리의 역사를 수거하고 감추어 버렸다.

    일제는 여기에 더해 우리를 영원히 저들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의 사서를 멸절시키려 했다. 오랜 기간 축적된 역사 파괴의 결론이 ‘단군신화’라는 용어이다. 『환단고기』에 대해 부정을 위한 부정의 논리를 펼치는 일부 강단사학자들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알아보자.

    여섯째, 고고학적 및 과학적 증명의 문제


    역사학에는 문헌학文獻學과 고고학考古學이 있다. 서로 보완해 주는 관계이지만 이 중에서도 문헌학이 주主가 되고 고고학이 부副가 된다. 유물사학으로도 불리는 고고학은 발굴을 통해 문헌의 내용을 확인·증명·보완해 준다. 대표적인 예가 폼페이 발굴이다. 학자들이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서만 파악해 왔던 고대 로마의 문명상이 폼페이 발굴을 통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발굴 이전에도 폼페이는 기록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고학을 중시하여, 발굴되지 않았거나 증명되지 않은 역사 기록을 부정하는 행위는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어리석음이요 더 나아가 합리의 가면을 쓴 억지 또는 마타도어(흑색선전黑色宣傳)를 의심케 한다.

    『환단고기』와 『단기고사』에 설명된 거대한 제국으로서의 고조선의 유적(거주지나 무덤)이 전혀 없다?
    反論
    2001년 이후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약 10km 떨어진 하가점夏家店에서 BCE 2400~BCE 1500년대에 이르는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어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이 유적지는 대규모 분묘터, 제단, 무기 등을 갖추고 있어, 이 시기 왕국의 성립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 출토품은 고조선의 상징과도 같은 비파형 동검, 빗살무늬 토기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고고학상의 발굴 성과는 하가점하층문화가 서서히 싹트기 시작할 무렵에 ‘국가’라는 새로운 정치형태가 확립되거나 사회 기반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보여 준다.

    중국의 학자들은 유적에서 발견된 유골을 가지고 하가점하층문화인들의 유형을 추정하였다. 이들은 ‘고동북유형古東北類型’에 속한다고 하는데(朱泓 길림대 교수), 중화인인 ‘고화북유형古華北類型’과는 다른 인종이다. 그런데 능하문화凌河文化(=비파형동검문화=십이대영자문화十二臺營子文化)를 영위했던 문화인들도 ‘고동북유형’에 속한다는 것이다.

    고조선이나 부여 등 예맥계 종족은 ‘고동북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문화는 중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하가점하층문화의 시작 시점이 BCE 25세기~BCE 20세기라는 의미는 고조선의 개국 시점인 BCE 2333년과 무관하지는 않다. 하가점하층에서 출토된 비파형 청동검은 청동기 문화의 대표적 유물로서 만주와 한반도에서 발굴된 청동검과 동일한 것이다. 하가점하층문화는 고조선 문화이고, 하가점은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이 지역은 고조선 영역에 포함되는 곳으로 그 문화의 주역은 한민족일 수밖에 없다.

    또한 한반도에서도 청동기 유적인 강릉 교동 1호 거주지는 BCE 1878년경의 것으로 확인되었고, BCE 25세기 이전의 것으로 검증된 평양시 상원군 용곡리 고인돌 무덤에서는 비파형 창끝과 청동 단추가 출토되었다. 고조선 건국을 BCE 10세기경으로 한정하는 주장은 최근의 고고학 발굴 현황을 받아들이지 않는 지적 불성실과 오만의 소치이다.

    배달국의 유물로서 현재 출토된 것이 없다?
    反論
    배달국의 대표적인 고고학 유적은 요서 지역(발해 연안 지역)에서 발견된 홍산문화紅山文化이다. 연대 및 강역이 배달국의 시기와 일치한다. 20세기 초부터 프랑스인 에밀 리쌍 등이 발굴하기 시작해서 문화대혁명이 지난 1980년대부터 대대적인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우하량 유적에는 대형제단大型祭壇, 여신묘女神廟, 적석총군積石塚群이 나왔다. 총묘단塚廟壇이 함께 나왔다는 것과 최고 통치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묘를 주변의 작은 무덤들이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볼 때, 홍산문화는 이미 씨족사회를 넘어 계급이 분화된 국가 단계의 문명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직경이 100m가 넘는 돌로 쌓은 대형 피라미드도 발견되었다. 홍산문화의 출현 연대는 최고 8,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꼽히는 수메르 문명이 약 5천5백 년 전에 시작한 것에 비하면 홍산문화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이라 할 수 있다.
    1)
    그리고 그 유적에서 나온 돌무지무덤 양식 등은 중국 내륙에서 발견되지 않는 동이족 고유의 무덤 양식이다.

    우하량 여신전女神殿 터에서는 여신상과 함께, 이 지역 사람들의 토템 신앙을 보여 주는 곰 소조상과 새 소조상이 발굴되었다. 그들의 곰 토템은 우하량만이 아니라 인근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출토되는 ‘옥으로 만든 곰 형상물’에서도 보인다. 홍산문화의 다양한 유물들은 그 주인공이 동이족임을 말해 주고 있다.
    1) 팔레스타인의 예리코Jericho(구약 이름은 여리고) 유적에서 1만 년 전 유물로 추정이 되는 성벽 등이 출토가 되었으나, 토기 사용이 없는 원시적인 단계였고, BCE 4000년에 이르러서 도시 문화에 해당하는 문명이 나타났다.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환단고기』의 오성취합 기록에 대해서 전용훈 박사는 오성취합이 5세기경 중국의 천문 서적에서 계산 방법이 밝혀진 것임을 지적했다. 이는 후대에 하나라가 상나라로 교체되는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계산하여 기록한 것을 『환단고기』에서 사용한 것임을 지적하였다. 실제로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하나라의 마지막 걸왕 때의 오성착행五星錯行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시기도 『환단고기』와 근사하다?
    反論
    1993년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고조선 13세 흘달단군 때 일어난 ‘다섯 행성 결집[오성취루五星聚婁]’ 현상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확인했다. 박 교수는 오성취루 현상이 1년의 오차가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단군 원년을 정월 세수로 계산한 무진(BCE 2333)년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10월 세수로 따져 보면 원년은 정묘(BCE 2334)년이 되므로 천문학과 역사 기록의 오차는 거의 사라지게 된다.

    戊辰五十年(무진오십년)이라 五星(오성)이 聚婁(취루)하고 黃鶴(황학)이 來棲苑松(내서원송)하니라
    재위 50년 무진(단기 601, BCE 1733)년에 오성五星이 누성에 모이고, 황학이 날아와 금원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13세 흘달단군 조’)


    1900년대 초를 살았던 계연수가 어떻게 평균 250년에 한 번 나타나는 매우 드문 천문 현상을 인위적으로 계산해서 출현 시기를 정확하게 맞출 수 있었겠는가? 박창범 교수의 발표 이후 국내 사학자들 사이에서 『환단고기』에 대한 진지한 서지학적 검토의 필요성이 적극 제기되었다.

    이러한 기록은 일반인이 남겨서는 역사 기록으로 등재될 수 없다. 고도의 천문학적 지식을 가진, 인증認證된 기관이어야 가능하다. 바로 천문대天文臺(감성대監星臺)이다. 당시에 이미 천문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천문대가 존재했다는 것은 천문대를 조직하고 운영할 수 있는 더 상위의 조직이 있었음을 말하는데 바로 국가(왕조)가 존재했다는 반증이다. 3,000년 전에 만주 땅에서 천문대를 포함한 여러 조직을 운영할 수 있었던 나라, 바로 단군조선檀君朝鮮(고조선古朝鮮)이다. 한국천문연구원 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대한사랑 이사장을 맡고 있는 박석재는 자신의 저서 『개천기』에서 “오행 현상과 같은 천문 현상을 임의로 맞춘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은 천문 현상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조직과 문화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오성취루가 후대에 조작된 것이라면, 1979년 이전에 이미 BCE 1733년 오행결집 현상을 이유립 선생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제대로 된 컴퓨터도 없었고, 손으로 계산한다는 것은 지금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계산이 가능하다면 오성이 모인 위치가 정확히 루婁성 근처가 되어야 하지만, 시뮬레이션 결과 실제로는 루婁성에 모이지 않고, 정井의 위치에 모이고 있다. 이것은 수천 년 전의 기록이기 때문에 28방위 기준이 다르다는 등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작하려면 다른 방법도 많았을 텐데 굳이 어려운 천문 현상을 조작할 필요는 없다.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자유子遊’의 이름이 최초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23년 중국 낙양에서 발굴된 천남생 묘지를 통해서이다. 따라서 『환단고기』에 자유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은 『환단고기』가 1923년 이후에 쓰인 기록인 것을 보여 준다?
    反論
    이 주장 역시 문헌학과 고고학의 순서도 분별하지 못하는 주장이다. 고려 때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 무령왕의 휘가 사마이며, 서기 523(계묘년) 5월에 붕어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1971년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릉의 지석誌石에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과 동일한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것이 모순인가? 오히려 『삼국사기』 「백제본기」가 1971년 이후에 쓰였다고 주장한다면 바로 그 주장이 모순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는 연개소문 할아버지의 이름이 ‘자유子遊’, 증조부의 이름이 ‘광廣’이라는 것도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태백일사」 외에는 어느 사료에도 없는 내용이다.

    朝代記(조대기)에 曰(왈) 淵蓋蘇文(연개소문)은 一云蓋金(일운개금)이니 姓(성)은 淵氏(연씨)오 其先(기선)은 鳳城人也(봉성인야)라 父曰(부왈)
    太祚(태조)오 祖曰子遊(조왈자유)오 曾祖曰廣(증조왈광)이니 並爲莫離支(병위막리지)라
    『조대기朝代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淵氏이고, 선조는 봉성鳳城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태조太祚이고,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인데 모두 막리지를 지냈다. (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이름이 ‘자유’라는 사실은 1923년 발굴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 묘비에서 확인되었다.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이름이 ‘자유’라는 사실은 『환단고기』의 내용이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가 된다. (출처: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2012)

    『환단고기』가 말하는 장수왕의 연호 ‘건흥’은 1915년 충주에서 발견된 불상 광배에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환단고기』는 1915년 이후에 쓰인 책이다?
    反論
    역사 기록의 진실 여부는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입증되는 경우가 많다. 시기적으로 기록이 먼저 있고 그 기록의 사실 여부를 밝혀 주는 유물이 발견되면 그 기록의 진실성이 검증된다. 위서론자들의 이 주장은 오히려 역사 기록이 유물로 증명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환단고기』가 1915년 이전에 저술된 것임이 입증되는 것이다. 현재 중국 동북 지역에서 발굴되는 홍산문화 유적도 『환단고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좋은 예이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銘에 나타나고 있다. 이 고구려 불상에 ‘建興五年歲在丙辰’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때 백제 불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열제는 임자년인 412년에 붕어하였다. 즉위년 칭원법稱元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할 경우 장수왕 5년은 병진년이다. 따라서 불상 광배명과 「태백일사」를 통해 ‘건흥’이 장수왕 때의 연호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환단고기』의 사료적 신빙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다. (출처: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2012)

    그러나 관련 사서가 『환단고기』 이외에 없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불상에 나오는 건흥 5년, 병진년이 서기 몇 년도인지, 장수왕의 연호가 맞는지조차 확인을 못 하고 있는 현실이다.

    『환단고기』에는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믿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어떻게 3,301년 동안 7명의 환인이 통치를 할 수 있었는가?
    反論
    동양 의학서 고전인 『황제내경』 제1장에 나오는 황제와 기백의 대화에서도 먼 옛날에 누렸던 장수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옛 사람들은 어찌하여 백 세가 넘도록 건강하게 살았는가?’라는 황제의 질문에 기백이 ‘그들은 천지의 법칙을 지키며 살았기 때문’이라 답하였다. 『구약전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자손들도 노아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백 살의 장수를 누렸고,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175세를 살았다. 우리나라의 신선 계보를 적은 『청학집』에서 동방 선의 최고最古 조상으로 환인을 지목하는 것에서도 환국은 인간이 선仙의 경지에서 살았던 조화 시대였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 전에 『환단고기』 내용을 인용한 책이 없다. 이전 기록에 제목이 알려져 있는 경우는 있으나 비교 검증할 내용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反論
    『환단고기』를 비롯한 우리 민족의 고유 사서들은 한민족의 뿌리 역사와 고유의 정신문화를 밝혀 주고 있다. 불교, 유교 등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이전에 뿌리문화 속에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라는 합일 사상을 비롯하여, 불교 유교 등의 사상적 배경이 되는 내용 등이 담겨져 있다.

    중국과 일본은 그들보다 훨씬 장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고유 사서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러한 사서들은 수천 년 동안 무수한 전란 속에서 화재로 소실되거나 외적에게 탈취되었다.

    또한 고려 시대에는 국시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유가와 불가 사상에 벗어난 사서들이 대거 소각되었다. 특히 고려 중기 김부식의 대대적인 사료 수거와 소각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한민족사의 허리가 잘려 나간 결정적 이유 중의 하나로 꼽을 만큼 심각한 사건이다. 하지만 일부 사서들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면면히 전승되어 내려왔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 역시 ‘고기古記’라고 하여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 시대를 기록한 옛 기록의 존재를 인정했다.

    古記(고기)에 云(운) 昔有桓国(석유환국)하니
    『고기』에 이렇게 말했다.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
    ( 『삼국유사』 임신본)


    조선에서도 사서 소멸은 중앙 조정에 의해 계속되었다. 지금으로부터 6백 년 전, 조선 초기만 해도 『삼성기』를 비롯한 10여 종에 달하는 한민족의 도가사서들이 민간에 널리 실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조 때에 와서 성리학 중심의 통치 이념과 사관을 구축하기 위해 유교 문화에 부합되지 않는 전통 사서와 도서들을 조정에서 모조리 수거하였다. 그리하여 고유 사서들은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단지 책 이름과 저자 이름만이 기록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만약 수거에 응하지 않고 소장하고 있다 발각되면 참수를 당하는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조, 예종, 성종 당시 세 차례에 걸쳐 고조선비기, 대변설, 조대기,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삼성밀기, 삼성기 등을 강제로 수거한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국왕 3대에 걸쳐 지속성을 가지고 행했던 원칙적이고 장기적인 국가 정책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조선 시대의 어떤 학자도 한민족 고유의 사서들을 인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서수거령 이후에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양대 전란으로 말미암아 또 다시 우리 사서가 탈취, 소실되었다.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는 일제가 행한 조선사 말살 작전으로 총 51종 20여만 권의 서적이 소각 또는 인멸되었다. 사료가 부족하니까 교차 검증할 수 있는 책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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