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역사 성인열전 | 해상제국 대백제의 어하라於瑕羅 이야기

[역사인물탐구]

이해영 / 객원기자

* 요서 땅에 백제의 영지가 있었는데, 곧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이고, 강남에는 월주越州가 있었으니, 여기에 소속된 현은 첫째 산음山陰, 둘째 산월山越, 셋째 좌월左越이다. (『환단고기』 「고구려본기」)

* 고구려 21세 문자제 명치 12년에 신라 백성을 천주泉州로 옮겨 그곳을 채웠다. 이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므로 군대를 보내어 요서, 진평 등의 군을 쳐서 빼앗으니 백제군이 없어지고 말았다. (『환단고기』 「고구려본기」)


두 제국의 창업자, 어하라於瑕羅 소서노召西奴


고추모성제와 소서노召西奴

고추모성제가 고구려를 건국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은 소서노召西奴입니다. 소서노는 북부여의 마지막 단군 6세 고무서의 둘째 따님으로 당찬 여걸이었습니다. 고추모 자신이 북부여의 시조인 해모수단군의 후손이고, 그 배우자인 소서노는 황실의 공주 출신이니, 당시 단군조선 이후 혼란한 열국 시대의 혼란을 극복하는 데 큰 명분과 힘이 되었습니다. 북부여 황실의 정통성과 함께 막강한 재력으로 고구려를 창업하고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추모성제는 동부여에서 크다가 예씨禮氏 부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하나 낳았습니다. 바로 유리琉璃 태자로서 일찍부터 고추모성제는 “만약 적자嫡子 유리가 오면 마땅히 태자로 봉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유리 태자가 찾아오고, 그는 고구려 2세 황제가 됩니다. 그렇게 되자 이미 두 아들을 낳은 소서노는 이롭지 못할 것을 염려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따로 나라를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단기 2292년 기원전 42년 경인庚寅년 소서노는 사람들에게서 패대浿帶 지역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달려가 옛 진한과 번한 사이에 있는 바다에서 가까운 외진 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패대 지역은 패수와 대수 지역이라는 뜻입니다. 지금의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난하灤河 유역입니다. 이곳을 대방의 옛 땅, 즉 대방고지帶方故地라고 합니다. 소서노의 나라는 처음부터 중국 허베이성 난하 부근에 있다가, 온조왕 때 한반도로 옮겨 와 백제를 다시 건국하게 된 것입니다. 백제는 대륙과 한반도, 일본 열도를 아우르며 발해와 황해 그리고 남해를 내해內海로 삼은 해상 제국이었습니다.

소서노 일행이 그곳에 산 지 10년 만에 밭을 사서 장원을 두고, 재산을 모아 수만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따르는 자가 많았습니다. 남으로 대수帶水에 이르고 동으로 큰 바다에 닿는, 5백 리 되는 땅이 모두 그의 소유였습니다. 이때 고구려를 섬기기를 원하자, 고추모성제는 매우 기뻐서 칭찬하며 어하라於瑕羅라는 칭호를 내렸습니다.

어하라於瑕羅 소서노

고구려는 그 뒤에도 계속 백제왕을 어하라라 부르며 고구려가 백제를 제후국으로 거느린 제국임을 내외에 과시하였습니다. 『주서周書』 「백제전」을 보면 “백제 왕의 성은 부여씨이고, 왕호는 어라하於羅瑕인데, 백성들은 건길지鞬吉支라고 불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소서노 어하라는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여성 중에서 가장 진취적이고 대담한 인물이었습니다. 고추모성제와 함께 고구려를 세운 주역일 뿐 아니라, 해상제국 백제를 건국한 불세출의 여인인 까닭입니다. 일반 사람은 건국에 참여하기도 힘든 일인데, 소서노는 나라를 그것도 천 년에 가까운 제국을 두 번이나 일으켰으니 가히 영웅이라 할 만합니다.

소서노의 죽음에 대해서 삼국사기에서는 “온조왕 13년(BCE 6) 봄 2월에 서울에서 늙은 할미(老嫗)가 남자로 둔갑했고, 호랑이 다섯 마리가 도성 안으로 들어오더니 왕의 어머니가 61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왕의 어머니가 소서노라면 그는 이때 죽은 셈이 됩니다. 기원전 2년 4월에 온조왕은 묘사廟社를 세우고 국모를 제사 지냈다고 합니다.

백제 시조 온조대왕



소서노가 돌아가시고 큰 아들 비류沸流가 나라를 계승하였습니다. 하지만 따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마려馬黎 등이 온조溫祚에게 이르기를 “신이 듣기로 마한의 쇠망이 임박하였다 하니 가서 도읍을 세울 때라 생각하옵니다.”라고 하니, 온조가 “좋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먼저 마한의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사방을 돌아다녀 보았으나,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미추홀은 지금 인천 문학산 쪽으로 습하여 다른 곳을 찾게 되었습니다.

도읍 하남 위례성
오랜 뒤에 드디어 지금의 서울 지방인 한산漢山에 이르러 지금의 경복궁 뒤편의 백악산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때 마려, 오간烏干 등 신하 열 명이 간하였습니다.

“오직 이곳 하남河南 땅은 북으로 한수漢水(지금의 한강)를 끼고, 동으로 높은 산(검단산이나 남한산으로 추정)이 자리 잡고, 남쪽으로 기름진 평야가 열리고, 서쪽은 큰 바다(황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처럼 천연적으로 험준한 지형과 지리적인 이로움은 얻기가 쉽지 않은 형세이오니, 마땅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다른 곳을 더 찾지 마옵소서.”

이에 온조가 신하 열 명의 의견을 좇아 드디어 하남 위지성慰支城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百濟로 하였습니다. 하남 위지성은 하남 위례성慰禮城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위례성의 위치는 고대사에서 오랫동안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습니다. 1,500여 년 동안 잊혔던 위례성은 최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서울 송파구의 풍납토성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백제라는 국호의 의미
백제라는 국호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먼저 중국의 사서인 『북사北史』와 『수서隋書』 「백제전」에 따르면, ‘백제라는 이름은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넜다(濟海)고 하여 붙여졌다’고 합니다. 우리 측 사서인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온조가 처음 위례성에 도읍할 때 10인의 신하가 왔으므로 처음에 국호를 십제十濟로 하였다가 뒤에 온조의 형 비류가 죽고 그 백성이 온조에 귀복하고 나서 백제百濟로 고쳤다’고 합니다. 또한 백제를 건국한 온조의 이름을 따서 백제라 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온’은 백百이란 뜻의 고유어입니다. 또는 광명을 상징하는 말로 ‘밝지’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삼한관경본기」에서 살펴보았듯이, 단군조선 번한의 초대 임금인 치두남이 단기 33년, 기원전 2301년 경자년에 요수遼水 주위에 쌓은 12성 가운데 ‘백제’라는 성이 있습니다.

蚩頭男(치두남)은 蚩尤天王之後也(치우천왕지후야)라
以勇智(이용지)로 著聞於世(저문어세)러니 檀君(단군)이 乃召見而奇之(내소견이기지)하사
卽拜爲番韓(즉배위번한)하시고 兼帶監虞之政(겸대감우지정)하시니라
庚子(경자)에 築遼中十二城(축요중십이성)하니
險瀆(험독)·令支(영지)·湯池(탕지)·桶道(용도)·渠鄘(거용)·汗城(한성)·蓋平(개평)·帶方(대방)·百濟(백제)·長嶺(장령)·碣山(갈산)·黎城(여성)이 是也(시야)라.
치두남蚩頭男은 치우천황의 후손이다. 용맹과 지혜로 세상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단군께서 불러 만나 보시고 기특하게 여겨 곧 번한 왕으로 임명하고 아울러 우순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셨다. 경자(단기 33, BCE 2301)년에, 요수遼水 주위에 12성을 쌓으니 험독險瀆·영지令支·탕지湯池·용도桶道·거용渠鄘·한성汗城·개평蓋平·대방帶方·백제百濟·장령長嶺·갈산碣山·여성黎城이 그것이다.


여기서 요수는 허베이성 난하입니다. 훗날 소서노가 대방고지의 백제 땅에 정착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백제가 건국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백제의 통치 정신
온조왕은 아버지인 고추모성제의 역사 통치 정신인 ‘다물주의’를 계승하였습니다. 그래서 후세의 백제 왕들은 단군조선의 영역을 다시 복원하면서 중국 동부 지역의 위로부터 아래까지의 번조선 땅을 거의 다 지배하였습니다. 이를 토대로 동아시아 바닷길도 장악하였습니다. 온조왕은 한성백제 시대를 열었으며, 봄가을에 천지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삼신문화를 정치제도로 구현한 좌보, 우보 제도를 운영하였습니다.

백제 역사의 대세와 역대 어하라


소서노 어하라 이후 백제의 역대 왕은 온조로부터 8세 고이왕古爾王을 거쳐서 역사의 강건한 모습을 보인 13세 근초고왕近肖古王으로 이어집니다. 전회에서 이야기했듯이 근초고왕은 태자 근구수를 앞세워 고구려 평양성에 쳐들어가서 고구려 16세 고국원제를 전사시켜 버렸습니다. 그렇게 고구려의 태왕을 죽임으로써 양국 간에는 극단의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고, 고구려 광개토태왕 때에 이르러 백제의 17세 아신왕阿莘王은 전쟁에서 패하고 영원한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맹세를 하며 항복을 하였습니다. 이후 백제는 근초고왕 때의 전성기를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을 이은 20세 장수왕은 한성 백제를 멸망시키고 개로왕蓋鹵王은 아차산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이후 22세 문주왕文周王은 웅진으로 도읍을 옮겨 웅진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25세 무령왕武寧王과 사비 백제 시대를 연 그의 아들 성왕聖王, 서동요의 주인공 30세 무왕武王과 마지막 31세 의자왕義慈王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제 그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고대 국가 기틀을 마련하고 번조선 땅 회복에 나선 8세 고이왕

8세 고이왕古爾王은 4세 개루왕蓋婁王의 둘째 아들이며, 5세 초고왕肖古王의 동생입니다. 국가 체제 정비와 중앙 집권력을 강화하여 국가 기틀을 다져 놓았습니다. 즉위 후 좌장을 설치하여 내외병마권을 관장케 함으로써, 지방의 군사력을 약화시켰고, 중앙관등제인 6좌평, 16관등제를 마련하였습니다.

고구려가 요동, 낙랑을 공격하자 요서를 점유하여 진평군을 설치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하였습니다. 이로써 백제는 단군조선 때의 번조선 땅을 회복해 들어갔습니다.

백제 전성기를 이끈 13세 근초고왕
13세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백제의 정치, 경제, 문화적 기틀을 세우고, 왕권을 강화하여 백제 최전성기를 열었습니다. 마한의 잔여 세력을 복속시키고,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에도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남으로는 왜국과의 무역을 하였고, 북으로는 북진정책을 통한 영토 확장을 시도하여 371년 겨울에 태자와 함께 정예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고구려의 고국원제를 전사시키고, 백제의 발원지인 대방고지帶方故地까지 차지하는 개가를 올렸습니다.

요서遼西 지역으로 진출한 후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여, 요동 지역으로 진출해 오는 고구려를 견제함과 동시에 황해 일대를 세력권으로 두는 무역 기지 확보라는 두 가지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이와 함께 일본 열도에 진출하여 왜의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고,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를 일본에 파견하여 논어와 천자문을 전수해 주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활발한 교류 활동으로 높은 문화의 질을 향유하였습니다. 지배 영역의 확대와 통치 조직의 정비를 통해 왕권이 확립되고 문화가 발전하게 되자, 박사博士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서기書記라는 국사 책을 편찬하게 하였습니다.

웅진 시대와 25세 무령왕

하지만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고국원제가 백제에게 전사한 것에 대해서 칼을 갈고 있던 고구려였습니다. 고국원제의 손자인 담덕(광개토태왕)이 즉위하면서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는 새롭게 재편되었습니다. 광개토태왕의 남하로 백제 17세 아신왕阿莘王은 항복을 해 버렸습니다. 이후 백제와 왜 연합군이 고구려에 대항하였지만, 광개토태왕이 친정하면서 백제는 대패하고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으며, 가야 연맹도 휘청거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후 개로왕은 장수태왕 때 도읍인 한성을 빼앗기고 사실상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백제의 22세 문주왕文周王은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겨 웅진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후 백제는 여러 반란과 실정들에 의해 크게 어려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왕권은 약화되고 귀족들이 자기들의 기득권에만 신경 쓰다 보니 국가 위기 상황에서도 전혀 단합이 되지 못했습니다. 근초고왕 이후 24세 동성왕東城王 때까지 정변으로 시해되거나, 시해로 추정되는 의문스러운 최후를 맞았습니다. 특히 21세 개로왕은 고구려 장수태왕의 침공으로 피살되었고, 26세 성왕은 신라 진흥왕 때에 전장에서 참수를 당했습니다. 겨우 24세 동성왕東城王, 25세 무령왕武寧王과 26세 성왕聖王으로 이어지는 시기에서야 정권이 안정되고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고, 중국 남조와 국교를 재개하는 등 중흥의 발판을 삼게 되었습니다.

백제 어하라 일대기2


사비 시대를 연 26세 성왕

26세 성왕聖王(재위 523년~554년)은 무령왕의 아들로 538년 봄에 도읍을 지금의 부여인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쳤습니다. 이로써 세 번째 수도 사비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성왕은 왕권 강화와 수도 방어력 강화를 꾀하였습니다. 551년 신라 진흥왕과 협력하여 한강 하류 유역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강 하류 지역 세력의 반발과 고구려 및 신라의 군사적 압박으로 철군을 하고 마는데, 이에 신라는 무주공산이 된 한강 유역을 접수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성왕은 귀족 세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라와의 동맹을 깨고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사로잡혀 참수당하는 비운을 겪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백제군은 좌평 4명을 비롯해 3만 명의 군사가 전멸하는 참패를 당하였습니다. 왕권은 더욱 땅에 떨어진 상태였고, 백제의 실권을 잡은 대성팔족大姓八族(사씨沙氏, 진씨眞氏, 연씨燕氏, 여씨餘氏, 해씨解氏, 정씨貞氏, 국씨國氏, 목씨木氏, 백씨苩氏) 귀족 가문들이 실권을 행사하였습니다.

미륵사를 건립한 30세 무왕

이런 상황 속에서 즉위한 30세 무왕武王은 백제 역사에서 손에 꼽을 만한 호전적 군주였습니다. 무왕은 서동요薯童謠로 유명한 인물로 끊임없이 신라를 공격하였습니다. 하지만 김유신이 활약한 신라와 일진일퇴의 소모적인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무왕은 신라 흥륭사의 2배 크기로 동양 최대 사찰인 미륵사를 36년에 걸쳐 지금의 익산 지역에 건립하였습니다. 이 미륵사는 우주의 주재자 상제님이자 천지불인 미륵부처님께서 3회 설법으로 중생을 모두 제도한다는 용화삼회설龍華三會說에 따라 전殿과 탑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웠습니다. 현재 절터만 남은 이곳은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인 서동과 선화공주와의 설화가 깃든 곳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임금 31세 의자왕

백제의 31세 마지막 왕은 의자왕義慈王(재위 641~660년)입니다. 의자왕은 아버지 무왕보다 더 자주 전쟁을 일으켰지만 성과는 아버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전쟁은 수많은 인명 피해와 함께 국가 재정에 엄청난 부담을 줍니다. 의자왕은 역대 첫손에 꼽힐 정도로 많은 전쟁을 일으킨 왕입니다. 빈번하게 전쟁을 일으키지만 그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자 조바심을 느낀 의자왕은 반대 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친위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656년 숙청을 통해 반대 세력을 제거하였으며 태자를 부여융扶餘隆에서 부여효扶餘孝로 교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충신인 성충成忠과 흥수興首 등도 제거하자 민심과 귀족 세력의 지지를 크게 잃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660년 백제는 과거와는 다른 대규모 나당 연합군의 수륙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에 맞서 계백 장군과 5천 결사대의 충혼이 빛나는 황산벌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 밖에 수많은 병사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분전했지만 결국 웅진성 성주 예식진禰寔進이 의자왕을 당나라에 바치고 항복하면서 백제는 패망하였습니다. 의자왕은 소정방에 의해 당나라로 끌려가 거기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백제의 멸망과 부흥 운동


백제 멸망 후 즉각적으로 부흥 운동이 일어났으며, 왜국에서도 국력을 들여 지원하였습니다. 부흥 운동의 중심 지역은 주로 금강 서부 지대였으나 이후 확대가 되면서 백제의 전 영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초기에 부흥 운동은 복신과 도침 등이 세력을 규합하고 왜에 있던 백제의 왕족 부여풍扶餘豊을 왕으로 추대하며 전개되었습니다.

백제 부흥군은 당군을 웅진과 사비 등지에서 거의 고사 일보 적전까지 몰아붙였습니다. 이에 당나라가 약조를 깨고 백제에 도독부를 설치하자, 신라는 직접 연합 작전을 펴기보다는 주로 변경 지대에서 독자적인 군사 활동으로 해당 지역을 신라의 직할 영토로 삼으며 실리를 챙겼습니다.

이때 고구려는 당나라와의 제2차 전쟁이 벌어져 백제를 지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부흥군 내에서 부여풍과 복신과 도침 등 지도자 간에 내분이 벌어졌습니다.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마저 죽이려 하였으나, 오히려 발각되어 복신이 처형되었습니다. 이후 신라군이 대전 유성구와 서구 일대에서 웅진성으로의 보급을 방해하던 백제군 요새를 모조리 함락시키면서 지금의 대전광역시 전체를 장악해 버렸습니다. 이는 당군의 보급에 방해될 요소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뜻합니다.

이후 풍은 왜의 구원군과 함께 나당 연합군과의 백강 전투를 치르게 됩니다. 백강은 지금의 금강 하구 군산과 장항 앞을 말합니다. 이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과 왜의 구원군은 나당 연합군에 대패를 합니다. 이후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주류성과 임존성이 함락되면서 부흥 운동도 허무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663년, 이때 비로소 백제는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해양제국 백제, 동아시아 바닷길을 제패



백제는 한반도와 중국의 동부 지역 그리고 일본 열도에 걸쳐 영토를 차지한 해양 제국이었습니다. 단군조선의 영역을 다시 복원한다는 강건한 역사 통치 정신이 역대 백제 왕들에게 그대로 지속되었습니다. ‘우리는 부여다. 우리의 근원은 북부여다’라는 역사 정신으로 26세 성왕 때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바꾸기도 하였습니다.

백제의 전체적인 역사 과정에서 보면, 245년에서 580년대까지 대략 350년 정도의 기간 동안 중국 동쪽에 있었던 배달국과 단군조선 때의 영토를 복원했습니다. 중국의 『남제서』 「백제전」을 보면 ‘매라왕, 벽증왕, 불증후, 면중후’ 같은 왕과 제후, 즉 백제의 천자가 임명한 왕후王侯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삼국사기』 「열전」 ‘최치원 조’에 보면, 당나라에서 상관에게 올린 글에 ‘고구려, 백제는 강성할 때 백만 대군을 가지고 남쪽으로는 오월 지방을 침략하고 북쪽으로는 유주, 연나라, 제나라, 노나라를 소란하게 해서 중국의 큰 좀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백제 담로제
이런 대륙 백제, 해양 제국의 면모를 보여 주는 것이 바로 담로제檐魯制입니다. 담檐은 ‘담당하다, 떠맡다(擔)’는 뜻이고, 로魯는 ‘늙을 로老, 노나라 로魯’ 자를 쓰는데 이는 우리말을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6세기 중국 양梁나라 때 제작된 사신도인 「양직공도梁職貢圖」에는 ‘국가를 통치하는 큰 성은 고마固麻라 하고, 읍邑을 담로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으며 22담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고마는 곰나루, 즉 공주와 연결되고 있으며, 제후국 격이 부용국附庸國으로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 지미, 마련, 상기문, 하침라’ 등이 있다고 전합니다. 24세 동성왕과 그 아들 25세 무령왕 때인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까지 중국 대륙을 비롯해서 동아시아 전역에 백제 왕이 임명한 국가 통치 지방 행정 조직이 있었는데, 그 구체적인 호칭이 바로 담로입니다.

이 담로는 중국 땅에 광양태수, 오서군, 진평군, 청하태수, 서하태수, 성양태수, 광릉태수가 있고, 광시성廣西省에도 담로(백제허)가 있었습니다. 일본에는 담로도, 인도네시아에는 담수항, 담수장 등이 있었고 말레이시아와 필리핀 같은 곳에도 담로 문화가 있었습니다. 백제는 국제 무역으로 동아시아를 제패한 해양 대제국이었습니다.

백제 담로제의 기원

이 담로제의 기원은 『환단고기』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단군조선 6세 달문단군 때 구월산 상춘常春(장춘長春)에서 당대의 대국, 소국, 읍락의 모든 제후들이 모여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린 기록이 있습니다. 그때 폐백을 바친 자는 대국이 둘, 소국이 스물, 읍락이 3,624곳이었습니다. 크고 작은 나라 22개국이 와서 문화 종주 단군조에 조공을 바치고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같이 올렸습니다. 그래서 22개 담로의 기원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백제, 신라는 매년 두 번씩 단군조에 천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조선 시대 사서에도 있습니다(『승정원일기』 74책, 영조 47년 10월 7일 기사 참조).

결론적으로 대백제국의 실제 영토를 담로제를 통해서 살펴보면 중국 동부와 중부 일부 지역, 남부 지역, 그리고 동아시아 전체를 통관하는 대국이었습니다. 대백제의 통치 방식은 단군조선 때 중앙에 진조선, 좌우에 번조선과 막조선이 있던 삼신문화, 삼한문화를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중국에는 한반도보다 몇 배 더 큰 대륙 백제에 우현왕을 두고, 일본에는 야마토 정권 당시 나라奈良 지역에 좌현왕을 보내어 통치했습니다. 좌현왕, 우현왕에 대한 기록은 중국 사서 『송서』에서, 22담로에 대한 기록은 『양서』 「백제열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이덕일의 한국통사』(이덕일, 다산북스, 2019)



백제가 일본에 전수한 신교 광명문화
백제가 일본에 동방 신교문화를 전수한 과정
잘 알려져 있듯이 백제는 일본에 문화를 전수하였습니다. 사실 일본 고대사의 실체는 단순한 문화 전수 차원이 아니라 ‘백제 사람, 한반도 한국인들의 이민사’라는 점입니다.

우선 일본 열도는 백제 출신 좌현왕이 통치했습니다. 일본 50세 간무桓武왕 때 편찬한 『속일본기續日本記』를 보면, ‘일본 기내畿內 지역 인구의 8할에서 9할이 백제인’이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기내 지역은 당시 일본 조정이 있던 나라와 오사카, 교토 등입니다.

일본의 34세 서명舒明왕은 백제 궁과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짓고 9층탑을 세웠습니다. 37세 제명齊明왕은 백제가 멸망당할 때, 백강구白江口 전투에 군사 2만 7천 명, 선박 4백 척을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패하고 주류성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왜의 사람들은 ‘어찌할꼬 어찌할꼬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어졌네 조상의 무덤들을 모신 곳 어찌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 ( 『일본서기日本書紀』 천지天智왕 2년, 663년 기록) 하며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미륵반가사유상
일본 교토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목재로 된 미륵반가사유상彌勒半跏思惟像은 일본 국보 제1호입니다. 우리의 국보 제78호,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쌍둥이처럼 같은 걸작입니다. 독일의 실존철학자 칼 야스퍼스(1883~1969)는 “반가사유상은 진실로 완벽한 인간 실존의 최고 경지를 조금의 미혹도 없이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고 말했습니다.

왼쪽 다리를 내리고 오른쪽 다리를 얹은 일종의 반가부좌 자세로 왼손으로 오른쪽 다리의 발목을 잡고, 오른쪽 팔꿈치는 무릎 위에 붙인 채 손가락을 뺨에 살짝 대고 창생을 건져 내기 위해 깊은 생각에 빠진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미륵반가사유상은 신라의 진평왕이 전했다고 하지만, 그 기술은 백제 기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황룡사 9층 목탑을 만든 장인이 백제 장인 아비지阿非知인 점에서 그렇게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광류사의 미륵반가사유상을 넋을 놓고 보던 교토대 학생이 불상을 끌어안으면서 오른쪽 새끼손가락이 부러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손가락 ‘접합수술’을 위해 재질을 조사하던 중 그 나무가 강원도 태백산에서 나는 홍송紅松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자기 나라에서 나는 나무이고, 자기들 기술로 만든 것이라고 거짓말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수된 칠지도와 사무라이 문화
백제 18세 전지왕腆支王이 왜왕에게 하사下賜한 칠지도七支刀가 있습니다. ‘선세先世 이래 이와 같은 무기가 없었다’고 하면서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의 명문銘文 서식은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내리는 하행下行의 문서 형식(전시후세傳示後世, 즉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는 문구가 있음)이라는 점은 백제와 일본의 종속 관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칠지도는 홍산문화에서 나온 옥검玉劍과 그 형상이 유사합니다. 칠지도는 칠성문화를 근거로 해서 나온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일본의 문화에서 크게 깨우쳐야 하는 게 ‘사무라이 문화’입니다.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 신라의 화랑花郞, 백제의 무절武節과 같은 삼국의 신교 무사 집단이 일본에 들어갔습니다. 일본 나라현 요시노산吉野山 금봉산사金峯山寺는 수험도修驗道의 본부인데, 이 수험도 수행자들이 고구려 조의선인처럼 검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동방 기사단으로 일본에서 각자의 고유한 기사騎士 문화를 열어 나가, 그들의 사무라이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