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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X파일]

    대한사관의 진실 | 否定을 위한 否定의 논리 - 그들은 왜 환단고기를 두려워하는가?(2)


    우리 역사학에는 세 가지 병독病毒이 있다. 바로 왜독·중독·양독의 삼독三毒이다. 그러나 이 삼독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우리들 자신의 사대주의事大主義 정신이었다. 유교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주의 세계 질서에 안착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기자의 후손임을 자처했고, 우리의 역사를 수거하고 감추어 버렸다.

    일제는 여기에 더해 우리를 영원히 저들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의 사서를 멸절시키려 했다. 오랜 기간 축적된 역사 파괴의 결론이 ‘단군신화’라는 용어이다. 『환단고기』에 대해 부정을 위한 부정의 논리를 펼치는 일부 강단사학자들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알아보자.

    넷째, 다른 사서史書의 영향과 표절 의혹의 문제


    사서史書의 편찬이 희박했던 옛날에는 한정된 저본의 내용을 여러 사람들이 참고하여 인용할 수밖에 없었다. 『환단고기』의 내용 중 일부가 다른 사서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하지만 『환단고기』는 타 사서에서 부족한 부분이나 언급하지 못한 부분을 더 명확하게 밝혀 준다.

    이번 논리 또한 『환단고기』에 대한 악의적인 의도를 갖고, 『환단고기』의 가치를 부정하는 결론을 유도하기 위한 트집 잡기에 불과하다. 이들의 행위는 학문이 아닌 정치이자 모략에 더 가깝다.

    『환단고기』에는 현재 전하는 여러 역사서 및 위서僞書를 베껴 쓴 흔적이 많이 존재한다. 『규원사화』 및 『단기고사』와 문장 구조까지 일치하는 문장이 많이 발견된다?
    反論
    『환단고기』가 『규원사화』, 『단기고사』
    1)
    와 문장이 일치하는 곳이 많다고 하여 베껴 썼다고 하는 주장은 이들 사서들이 저본底本으로 삼았던 원전原典, 즉 전해 내려오던 다른 사서의 존재를 완전히 배제한 주장에 불과하다. 과거에는 역사서를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왕명에 의한 관찬官撰 사서이거나 소수의 특정 인물에 의해 쓰였을 뿐, 현대처럼 많은 사람에 의한 다양한 시각의 역사서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더욱이 전쟁과 같은 병화兵禍로 자체 기록이 대부분 사라진 우리나라에서 다양한 사서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따라서 고대사를 담은 사서가 한두 권 간신히 전해지면서 그 한정된 저본을 어렵게 접한 사람마다 자신이 보고 들은 내용과 다른 사서들을 재구성하여 새로운 사서를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내용이 같거나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기록을 굳이 바꿀 필요성을 못 느껴 그대로 전재全載하는 일은 한국과 중국 전적에서는 흔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여러 사서와 인용 문장이 같다는 구실로 위서라거나 베껴 썼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정否定을 위한 부정否定, 즉 옳지 않다고 예단하고 반대하기 위한 반사적이고 무조건적인 논리일 뿐이다.
    1)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아우 반안군왕般安郡王 대야발大野勃이 8세기경에 편찬한 역사서이다. 1959년에 출간된 국한문본과 1990년에 복원된 한문초략본(백산본)이 있다. 『단기고사』는 단군과 기자의 옛 역사라는 의미다. 전단군과 후단군으로 나뉜 47대 단군의 역사와 기자조선의 42대 1천여 년의 일을 시대순으로 기술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신채호가 주장한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해당 연도는 잘못된 연도이다?
    反論
    『환단고기』에 나오는 연개소문 사망 연도는 개화開化 16년, 즉 CE(서기; 기원후) 657년이다.

    時則開化十六年十月七日也(시즉개화십육년시월칠일야)오 墓(묘)는 在雲山之九峰山也(제운산지구봉산야)라.
    때는 개화 16년(28세 보장제, 단기 2990, 657) 10월 7일이었다. 묘는 운산의 구봉산에 있다. (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개화開化는 고구려의 마지막 황제인 제28대 보장제의 연호다. 시호는 개원현수대화보장황제開原賢秀大化寶臧皇帝이고, 묘호는 희종嬉宗이다. 시호는 요나라 태종인 야율광덕이 추존하였고, 묘호는 청나라 고종 건륭제가 추증하였다. 보장황제의 재위 기간은 CE 642~668년이다. 따라서 개화 16년은 CE 657년이다.

    그런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는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를 보장왕 25년인 CE 666년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중국의 『신·구당서』와 『자치통감』을 초록抄錄(필요한 대목만 뽑아 적음)한 것이다. 『신·구당서』와 『자치통감』에는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를 당 고종 건봉乾封 원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 고종 건봉 원년은 CE 666년이다. 김부식은 CE 666년을 고구려 연보로 환산하여 연개소문이 죽은 해(年)를 보장왕 25년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위 기록들(『신·구 당서』, 『자치통감』, 『삼국사기』)은 모두가 신빙성이 없다. 1923년 중국의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북망北邙에서 천남생泉男生(연남생淵男生, 연개소문의 큰아들)의 묘지墓誌(죽은 사람의 이름, 신분, 행적 따위를 기록한 글)가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남생의 묘지墓誌 내용은 다음과 같다.

    廿四兼授將軍餘官如故(입사겸수장군여관여고), 廿八任莫離支(입팔임막리지), 兼授三軍大將軍(겸수삼군대장군), 卅二加太莫離支(삽이가태막리지), 總錄(총록)
    軍國阿衡元首(군국아형원수), …… 以儀鳳四年正月廿九日(이의봉사년정월입구일), 遭疾薨於安東府之官舍(조질홍어안동부지관사), 春秋四十(춘추사십) 有六(유육)
    24세에 나머지 관직은 그대로 겸하면서 장군직을 제수받았다. 28세에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이 되었으며, 32세에 태막리지太莫離支로 추증되어 군국을 총괄하는 아형원수가 되었다. …… 의봉儀鳳 4년(679) 정월 29일 병을 얻어 안동부의 관사에서 세상을 떠나니, 나이 46세였다.


    의봉儀鳳은 당나라 고종의 연호다. 의봉 4년은 CE 679년이다. CE 679년에 남생이 46세로 죽었으므로 남생이 태어난 해는 CE 634년(영류왕 17년)이다. 연개소문이 죽은 해(年)는, 연개소문이 죽고 그 아들 남생이 막리지의 자리에 오른 해이거나, 부모가 죽으면 3년상을 치르던 고구려의 풍습에 따라 그 이전이라고 봐야 한다. 남생의 묘지에 남생은 28세에 막리지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였으므로, 남생이 막리지의 자리에 오른 해는 CE 661년이다. 연개소문이 죽은 해 역시 CE 661년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남생이 3년상을 치른 뒤에 막리지의 자리에 올랐다면 연개소문이 죽은 해는 CE 658년이다. 『환단고기』의 기록과는 1년 차이가 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연개소문의 죽음을 남생이 막리지에 올랐던 시점을 기준으로 CE 657년이라고 봤는데, 이는 선생이 당시에 묘지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남생이 24세에 막리지에 올랐다고 봤기 때문이다. 참고로 『일본서기』에서는 연개소문의 죽음을 664년 10월이라고 했다. 연개소문의 죽음은 아직 역사의 미궁 속에 갇혀 있는 셈이다.

    『환단고기』의 기록과 신채호 선생의 주장이 일치하지만 이는 선생의 착각으로 인한 결과이므로 정확하게는 일치하는 게 아니다. 『환단고기』의 내용 또한 더 검토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이화사李華史의 『언행록』에 수록된 시詩가 단기고사檀奇古史와 환단고기에 인용되었다?
    反論
    이화사는 화사華史 이관구李觀求
    2)

    를 말한다. 그의 부친은 이윤규李允珪이며, 부친의 스승은 유응두柳應斗이다. 유응두가 『단기고사』를 중국의 고서점에서 찾았다고 한다.
    3)
    유응두는 이윤규에게 『단기고사』 필사를 맡겼으며, 이것은 아들인 이관구에게 전해져서 1949년 해암 김두화와 함께 발행하였다. 위서론자들이 말하는 논점은 화사 이관구의 『언행록』에 유응두의 시가 나오는데, 『언행록』의 본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2) 이화사(1885~1952)는 대한광복회 황해도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국내를 비롯해 중국과 만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독립투사요 국학자이다. 저서로는 『만물언지萬物言志』, 『도통지전단』 등이 있다.
    3) 단재 신채호의 단기고사檀奇古史 중간서重刊序


    九月山馬韓村亦有古代石碑 大學柳應斗見此碑 爲時曰
    구월산 마한촌에 또한 고대의 석비가 있는데,
    대학 유응두가 이 석비를 보고 시를 지어 이르기를,

    村名稱馬韓 別有殊常石
    마을 이름 마한이라 하는데, 특별히 이상한 돌이 있네

    苔荒躑躅紅 字沒莓苔碧
    대는 황량하고 철쭉만 붉은데, 글자는 마멸되고 이끼만 푸르네

    生於剖別初 立了興亡夕
    천지가 갈라진 초기에 생겨서, 흥망시절에 서 있었구나

    文獻俱無跡 倘非箕氏跡
    글과 어진 사람이 모두 자취가 없으나, 아마 기씨의 자취는 아닐는지


    이 내용과 비슷한 문구가 『단기고사』와 『환단고기』 「단군세기」 에 나오는데, 『단기고사』에는 2세 단군 때 황해도 백악산 마한촌에 고대 석비가 있다고 나온다. 그리고 12세 아한단군이 사방四方 국경에 비를 세우게 하셨고, 지금의 황해도 구월산 마한촌에 비석이 있는데, 후면後面에 위의 시가 적혀 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환단고기』 「단군세기」 에는 12세 아한단군이 요하의 왼쪽에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웠고, 후에 이곳을 지나던 ‘창해역사 여홍성黎洪星이 그 비석을 보고 지은 시’라고 명시되어 있다.

    두 시의 차이점을 보면, 밑줄 친 부분이 「단군세기」 에는 변한弁韓, 단씨적檀氏跡이라고 나와 있고, 나머지는 같다.

    당시 요하의 왼쪽이라면, 지금의 난하灤河 왼쪽을 말한다. 즉, 번한이 있던 곳이다. 따라서 여홍성은 예로부터 변한이라 불렀다고 시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응두가 비석을 봤다는 장소는 구월산이다. 따라서 유응두의 시에는 마한으로 나오고 있는 듯하다.

    정리하면, 유응두는 독립운동을 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던 구한말의 학자이기 때문에 「단군세기」 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오히려 『환단고기』는 출처가 비교적 상세하다. 그러나 이에 비해 『단기고사』는 유응두 개인이 중국의 고서점에서 발견했다고 해서 출처가 한 명의 증언에 의존하고 있다.

    『단기고사』의 출처가 유응두인 점과 그 제자(이윤규)의 아들(이관구)을 통해 발행이 된 점을 유추해 볼 때, 『단기고사』가 오히려 당대에 있던 고대 사료들을 모아서 책을 만들어 냈을 가능성이 있다. 그 과정에서 「단군세기」 에 나오는 여홍성의 시를 모방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단군세기」 에는 아한단군이 순수관경비를 요하의 왼쪽에 세웠다고 나오지만, 『단기고사』의 기록처럼 마한 지역이었던 구월산에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비석의 뒷면에 누군가 여홍성의 시를 모방하여 새겨 넣었을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조선 시대는 기자를 숭상한 시대였으므로, 조선 시대 어떤 유학자가 「단군세기」류의 고대 사서를 읽고 기자조선의 후예로 바꾸기 위해 단씨檀氏를 기씨奇氏로 바꿔서 새겨 넣었다고 유추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환단고기』가 유응두의 시를 본떠서 집어넣었다는 것은 억지가 아닐 수 없다.

    『환단고기』는 기독교 교리와 유사한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말을 쓴다. 또 환단고기의 ‘영혼靈魂, 각혼覺魂, 생혼生魂’은 명나라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테오 리치가 기독교 교리를 중국어로 번역한 『천주실의天主實義』에서 성삼품설聖三品設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환단고기』는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에 위작된 것이다?
    反論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는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인데,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人格으로 계신다’는 뜻이고, 『환단고기』의 삼신일체는 ‘우주의 조물주는 본체에 있어서는 하나이지만 작용으로 보면 삼신이며, 삼신의 본체와 한 몸이 되어 우주 만유를 다스리시는 지존무상의 주재자 삼신상제님이 계신다’는 뜻이다. 삼신과 삼신일체 상제님은 삼성조 시대로부터 한민족이 사용해 오던 하느님의 명칭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환단고기』의 삼신일체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마테오 리치 신부가 사용한 영혼靈魂·각혼覺魂·생혼生魂이란 표현은 동북아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개념이다. 그는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명나라에 들어가 한자 및 동양 문화를 섭렵한 바탕 위에서 『천주실의』를 저술한 것이다. (출처: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2012)

    「단군세기」 21세 소태蘇台단군 조에 ‘은나라 왕 무정이 전쟁을 일으켜 귀방을 물리쳤다’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은 『주역』 63번째 괘인 ‘기제괘旣濟卦’에 나오는데, 『환단고기』가 이를 인용했다?
    反論
    『주역』에는 “고종이 귀방을 정벌하다(高宗伐鬼方)”라는 구절이 나온다. 고종(은나라 23대 왕 무정武丁)이 귀방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은나라의 유물인 갑골문에서도 확인되는 내용이다. 국내에서 갑골문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90년대 이후이다. 따라서 『환단고기』에 실린 ‘무정의 귀방 공격에 대한 내용’은 『주역』에서 끌어온 것도 아니고, 갑골문에서 차용한 것도 아니다. 『환단고기』의 편찬자인 계연수나 전수자인 이유립이 우리 상고사에 대해 관심과 열정이 남달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종횡무진 모르는 것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이다. (출처: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2012)

    『환단고기』에 나오는 단군조선과 삼조선三朝鮮설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1931)의 영향을 받아서 기술되었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1911년에 출간되었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反論
    『환단고기』와 『조선상고사』
    4)
    는 같은 내용의 삼조선설을 기록하고 있지만, 『환단고기』의 삼조선설은 보다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삼신 역사관의 원형을 피력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호태왕비문」에 있는 “북부여 천제의 17세손이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라는 기록에 대한 『환단고기』의 해석은 『조선상고사』의 해석보다 더욱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환단고기』가 『조선상고사』의 영향을 받아서 조작되었다는 위서론자들의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계연수 선생과 알고 지내던 독립운동가 단재가 『환단고기』를 읽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단재가 『조선상고사』에서 단군조선의 삼조선에 대한 기록을 다른 근거를 제기하지도 않으면서 확신에 찬 어조로 기술하는 것을 볼 때, 『환단고기』의 기록을 참조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조선일보>에 『조선사』를 기고하던 당시 상황을 볼 때, 민족의 정통 역사서인 『환단고기』의 안전한 후대 전수를 위해 그 출처를 감추었을 수도 있다.

    더욱이 ‘고구려 900년 유국설遺國說’과 관련된 내용을 볼 때 『환단고기』가 더욱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으므로 『조선상고사』가 『환단고기』의 기록을 참조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조선상고사』는 호태왕이 추모鄒牟왕의 13세손이라는 『삼국사기』 기록의 부정확성을 비판하고, 『삼국사기』에서 부정했던 『신당서』에 나오는 가언충의 고구려 900년 유국설을 수용해서 『삼국사기』의 ‘고구려 유국遺國 200년 삭감설’을 제기한다. 반면에 『환단고기』는 ‘제1세 해모수부터 제5세 주몽, 제17세 호태왕(주몽의 13세손)’으로 기록해서 「북부여기」 상과 「가섭원부여기」를 연결한다. 즉 『조선상고사』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단순히 불신하는 것으로 그친 데 비해 『환단고기』는 오히려 「호태왕비문」과 『삼국사기』 기록의 의문점을 명확하게 풀어 준다. 따라서 위서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오히려 『조선상고사』가 『환단고기』의 기록을 참조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출처: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2012)
    4) 단군 시대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 서술하고 있다. 전 1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931년에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되었고, 이후 1948년 종로서원에서 단행본으로 발행되었다.


    『환단고기』의 내용이 박은식의 『한국통사』와 같다. 『환단고기』는 『한국통사』를 베꼈다?
    反論
    가톨릭대학교 교수인 이순근은 「단군세기」 서문에 나오는 “국유형國猶形하고 사유혼史猶魂하니(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혼과 같으니)”라는 구절이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에 나오므로, 박은식의 책을 베낀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환단고기』는 1911년에 발간되었고, 박은식의 『한국통사』는 1915년에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구절은 「단군세기」 서문에서 역사관을 전개하기 위해 댓구 문장으로 표현한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베낀 것이란 말인가.

    오히려 『한국통사』의 문장이 ‘옛사람(古人)’의 말을 인용하면서 나라와 역사에 대해 언급하는 형식이므로 박은식이 다른 역사서를 인용한 것이다. 위서론자들은 원문 자체를 분석하지 않고, 글의 전체 논리 흐름도 파악하지 못하면서 유사한 한 구절을 떼어다가 억지 주장을 펴고 있다. 『한국통사』에는 아래와 같이 나온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라는 가히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가히 멸할 수 없으니, 대개 나라는 형形이요, 역사는 신神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라가 멸하였어도 역사(=神=魂)만 살아 있으면 나라(=形=魄)는 언제든지 부활할 수 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은 이런 다른 글을 인용했다는 뜻이다. 그 책이 무엇인가? 1911년에 발간된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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