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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인물탐구]

    창세역사 성인열전 | 『환단고기』로 살펴보는 대고구려 제국 태왕기太王紀


    이해영 / 객원기자

    흔히 창업의 어려움보다는 수성이 더 고단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창업 당시에는 창업자를 중심으로 하여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 새롭게 어떤 일을 열기 때문에 돌파력이 중시됩니다. 하지만 일단 창업 후에는 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일과 함께, 창업 당시의 공신들을 제대로 제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창업자의 뒤를 잇는 이에게는 어떤 능력보다 뛰어난 정치 감각이 필요합니다. 동방의 종주국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대고구려 제국도 고추모성제高鄒牟聖帝 이후 뛰어난 태왕太王들에 의해 성장 발전해 나갔습니다. 고구려의 역대 통치자에 대해서는 ‘위대한 임금’이라는 뜻을 지닌 열제烈帝라는 공식 호칭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환단고기』를 통해서 여러 고구려 태왕·열제들의 업적과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낭만적인 영웅, 2세 유리명열제琉璃明烈帝


    황조가의 주인공 유리명열제
    고추모성제의 뒤를 이은 2세 유리명열제琉璃明烈帝는 낭만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바로 우리 국문학사에서 최초의 서정적인 한시로 꼽히는 황조가黃鳥歌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한나라 여인 치희稚嬉에 대한 애틋한 사랑 노래인 황조가는 유리명제에 대한 이미지를 애틋하고 조금은 소심한 분위기로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리명제의 삶은 매우 치열하고 복잡하였습니다.

    뛰어난 자질 때문에 부여의 여러 인물로부터 시기, 질투를 받고 있던 추모를 어머니인 유화 부인은 예씨 낭자와 얼른 혼인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훗날 추모성제가 부여를 떠나고, 모친 밑에서 자란 유리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놀림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 추모성제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듣게 되고, 일곱 모난 돌 위 소나무 밑에 감춘 아버지의 유물을 찾게 됩니다. 소나무를 찾아 산을 뒤지던 유리는 자기 집 주춧돌이 일곱 모로 되어 있고, 기둥이 소나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아래에서, 부러진 검 조각을 찾은 후 세 명의 부하를 데리고 주몽을 만나게 됩니다.

    영웅적인 서사시의 주인공, 유리명열제
    유리명열제가 주몽을 만났을 당시 고추모성제 옆에는 북부여 황실의 따님인 소서노와 배다른 형제인 비류와 온조가 있었습니다. 아마 이들과 모종의 갈등이 있었고, 그 투쟁에서 고추모성제는 유리명열제를 지지하였고, 유리명열제가 데리고 온 세력이 상대적으로 힘의 우위를 점했던 것 같습니다.

    유리명열제의 이야기는 영웅적인 탄생과 출생의 신이성, 그리고 비밀의 징표를 찾아서 여행에 오르고 왕위에 오르는 인물로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한 테세우스 이야기와 유사합니다.

    분노한 소서노는 그의 세력을 데리고 남하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회에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그 뒤 유리명열제는 다물국의 송양의 딸과 결혼하고, 아들 무휼을 낳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슬슬 위협을 가하기 시작한 한나라 세력을 의식한 정략결혼으로 치희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나무 아래 꾀꼬리를 보며 치희를 그리워하는 유리명열제의 애처로운 모습은 사랑의 연가라기보다는 고독한 정치적 입지의 표현으로 보입니다.

    초기 고구려를 안정화시키다
    유리명열제는 탁월한 정치 감각으로 재위 10년 만에 강력한 선비족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수준으로 고구려를 안정시켰습니다. 명장 부분노의 활약으로 선비족은 항복하고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이에 자극받은 동부여 대소帶素왕의 공격은 운 좋게도 큰 눈과 추위로 물리쳤습니다.

    그 뒤 한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재위 21년인 임술년 기원전 2년에 눌현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이를 황성皇城이라고 하였습니다. 내부에 환도산丸都山이 있어 산 위에 성을 쌓아 두고 일이 있을 때는 그곳에 거주하였다고 합니다.

    바람의 나라, 3세 대무신열제大武神烈帝


    동부여를 공격하다
    2세 유리명열제의 뒤를 이은 이는 태자 무휼無恤이었습니다. 무휼은 조부인 고추모성제를 닮은 듯 전사의 자질과 용기, 모험심이 있었습니다. 기원후 13년 11월에 동부여군이 고구려를 침략하였습니다. 고구려 유리명열제는 셋째 아들 무휼을 지휘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고구려는 동부여군의 진군을 막지 않고 수도 근처까지 유도하였습니다. 국내성 부근에 병력을 집중하여 대비한 것입니다. 마음 놓고 들어오는 동부여군을 학반령鶴盤嶺에서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후 18년 유리명열제가 붕어하고, 태자인 무휼이 즉위하니 바로 3세 대무신열제大武神烈帝입니다.

    대무신열제가 처음으로 행한 일은 동부여 정복이었습니다. 22년의 일입니다. 군세를 정비하고 군량을 담당할 부정負鼎이라는 인물과 괴유怪由와 마로麻盧라는 용사를 합류시킵니다. 괴유는 대소에게 원한이 있었는지, 대소를 죽이겠다고 종군을 자원한 9척에 얼굴이 희고 눈에서는 광채가 나는 장수였습니다. 대무신열제는 이물림利勿林이라는 곳에서 금으로 만든 도장과 병기를 얻었습니다. 도장(印)은 권력의 상징이며 하늘이 승리를 점지해 주었다는 의미로, 사기 진작을 위한 이벤트였을 수도 있습니다.

    동부여 대소왕을 죽이다
    대무신열제는 장기전보다는 속도전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최소의 정예 군사를 이끌고 농사철에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을 시작하는 시기는 농한기인 음력 9월에서 1월 사이입니다. 그래서 동부여군은 항상 11월에 고구려 국경에 등장했었습니다. 그런데 대무신열제는 재위 4년인 21년 12월에 출발하고 이듬해인 2월에 동부여군 국경에 도착하였습니다.

    고구려의 내습 소식을 들은 대소왕은 신속하게 반응하여, 총동원령을 내려 대규모 병력을 끌어모았습니다. 강력한 기병대로 순식간에 고구려군을 포위하여 일제히 진군했습니다. 하지만 음력 2월, 초봄의 대지는 눈이 녹고 얼음이 풀리면서 진창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만주의 토양은 곱게 갈아 놓은 듯한 흑토로 농사짓기에 최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물을 만나면 진창으로 변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기병대의 최고 약점은 진창입니다. 말은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통발굽으로 진창에 박히면 사발을 진창에 박은 꼴이 되어 버립니다. 동부여군 전체가 진창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전체의 전진 속도가 제각각으로 뭉그적거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리 마른땅에 자리를 잡은 고구려는 기다리면서 주변 지형을 정찰하고, 마른 길과 이동 루트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동부여군의 발이 묶이고 혼란에 빠진 순간, 고구려군의 한 부대가 동부여군 진영으로 질풍같이 돌격을 시작했습니다. 선두에 선 장수는 괴유였습니다. 최정예 부대로 꾸려진 이들은 맹렬한 기세로 대소왕을 향해서 돌진했습니다. 동부여군 진영은 붕괴되었고, 대소왕은 빠져나갈 틈조차 얻지 못했습니다.

    괴유는 대소왕帶素王을 사로잡아 현장에서 칼로 쳐 죽였습니다. 적국의 왕을 포로로 잡지 않고 현장에서 즉결 처분했다는 사실은 대무신열제의 사전 허락을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대소왕이 죽은 뒤에 동부여군은 장기적인 포위전을 펼쳤지만, 큰 안개가 발생하여 커다란 이불처럼 대지를 덮어 버려서 고구려군은 밤에 탈출하여 큰 위기를 벗어났습니다.

    이후 동부여는 내분에 휩싸여, 대소왕의 종제從弟는 만여 호를 이끌고 고구려로 투항하였으니, 이를 연나부여椽那夫餘(서부여西夫餘)라고 합니다. 열제는 대소왕 종제의 등에 띠 같은 무늬가 있다 하여 낙씨絡氏 성을 내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대소왕의 아우는 추종자 수백 명과 더불어 길을 떠나 갈사수曷思水(동만주 지방의 강으로 생각되고, 이유립 선생은 우수리강으로 추정) 지역에 나라를 세우니 바로 갈사부여曷思夫餘입니다.

    연나부여는 고구려 21세 문자열제 때 완전히 고구려에 굴복하여 멸망하였습니다(484년). 갈사부여는 고구려 태조무열제 때인 68년 8월에 항복하면서 3세 역년 47년 만에 나라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후한 광무제의 공격을 막아 내다
    이 무렵 중원에서는 한漢 왕조의 후예인 유수가 28장의 도움을 받아 왕망의 신나라를 멸망시키고 25년에 광무제光武帝로 등극하게 됩니다. 후한 광무제는 고구려의 팽창에 위협을 느끼고 28년 7월 한의 요동 태수로 하여금 선제 공격을 감행하게 하였습니다. 대무신열제는 좌보 을두지乙豆智의 대책을 받아들여 수성전에 돌입하였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을두지를 비롯하여 고구려에는 을乙씨 명재상들이 많습니다. 유리명열제 당시의 을소乙素와 고국천열제 때의 을파소乙巴素, 안장열제 때의 을밀乙密, 그리고 백제 온조대왕 때의 재상 을음乙音이라는 인물도 고구려 출신입니다. 아마도 을씨 집안은 제왕을 보좌하는 조의선인의 맥을 이으며, 대대로 재상을 역임한 집안이 아닐까 싶습니다.

    수도인 집안集安 근처에 있는 지금의 환도산성丸都山城으로 비정하는 위나암성尉那巖城에서 농성에 들어간 고구려군을 한나라군은 겹겹이 에워쌌습니다. 장기적인 공성전에 고구려군은 난처해져 갔습니다. 이때 을두지는 적군이 암벽성인 위나암성 안의 물이 고갈되기를 기다린다고 판단하고,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수초에 싸서 적장에게 보냈습니다. 고구려 산성의 장점은 산 정상부에도 연못을 만들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환도산성 안쪽에는 지금도 수초가 자라는 연못지가 남아 있습니다. 적장은 수초에 쌓인 잉어를 보고, 성안에 물이 풍부하니 장기전을 펴도 소용없겠다고 판단하고 화친을 맺고 철군하였습니다. 이후 고구려는 후한의 광무제에게 사신을 보내 화평을 구하였습니다.

    낙랑국을 멸망시키다
    이후 대무신열제는 재위 20년인 37년 잘생긴 아들 호동을 앞세워 최리崔理의 낙랑국을 기습하여 멸망시켰습니다. 낙랑국은 지금의 대동강 평양에 있었고, 한사군의 하나로 설치됐다는 낙랑군樂浪郡은 중국 하북성 창려 일대에 있었습니다. 바로 자명고를 부순 낙랑공주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담긴 그 사건입니다. 고구려군이 성 밑에 닥쳐서야 자명고가 파괴된 것을 안 최리는 딸을 죽인 후 항복하였습니다. 이후 지금의 압록강 이남이 모두 고구려에 복속하게 되었습니다. 동부여를 멸망시키고 후한의 공세를 막아낸 이후, 고구려는 위태롭던 정착기를 무사히 넘기고 영토는 더욱 넓어졌으며 사회적으로도 부유해져 갔습니다.

    고구려를 반석 위에, 6세 태조무열제太祖武烈帝


    역사상 가장 장수한 태왕
    대무신열제 이후 6세 태조무열제 시기에 고구려는 제국의 위용을 드러냈습니다. 당시 중원은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흉노의 왕자인 김일제의 외증손자인 왕망이 민생 혁신의 기치를 내걸고 쿠데타를 일으켜 신新나라를 건국했습니다.

    하지만 이상주의에 집착하면서 한 고조 유방의 방계 후손인 유수에 의해서 후한後漢이 건국되었습니다. 후한은 광무제(유수) 이후 명제明帝와 장제章帝로 이어지면서 수성에 성공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4세 화제和帝부터는 어린 황제들이 즉위하며 환관이 득세하고, 외척이 발호하면서 국력이 쇠잔해져 갔습니다.

    당시 고구려 5세 모본열제慕本烈帝는 한나라를 제압하여 막대한 세폐를 공납받는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공으로 교만해진 모본열제의 폭정에 신하들이 정변을 일으켰고, 당시 7살인 궁宮을 태왕에 올리니 바로 6세 태조무열제太祖武烈帝입니다. 태조무열제는 53년에 즉위할 당시 생모인 태후가 섭정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146년에 차대열제次大烈帝에게 선위할 때는 100세로 94년간 통치했습니다. 태조무열제는 119세에 붕어하였습니다.

    조의선인 제도를 정비하다
    태조무열제는 국가 제도를 정비하면서 ‘선배’, 즉 조의선인 제도를 조직화하였습니다. 조의皂衣는 삼신상제님의 진리, 즉 한민족의 신교 낭가사상으로 무장한 종교적 무사 집단으로 문무를 겸전하였습니다. 이들은 개인적인 완성이 아니라, 항상 공도公道와 민족의 안녕과 국가의 번영을 위해 헌신하는 역사 개창의 주역들이었습니다. 조의선인의 맥은 환국 시대에서 시작하여 배달의 제세핵랑, 단군조선의 국자랑, 북부여의 천왕랑으로 이어지고, 백제의 무절, 신라의 화랑 그리고 고려의 재가화상과 조선의 선비 사상으로 계승되었습니다.

    태조무열제는 이 조의선인을 중심으로 한 정예병으로 요동을 넘어 지금의 황하 인근 요서 지역까지 그 영역을 확대하였습니다. 이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요서에 10개 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입에 대비했다고만 전하고 있습니다. 이에 식민사학자들은 이 요서를 지금의 요하 서쪽으로 보지만 이는 잘못입니다.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조대기에서 말하였다. 태조 융무 3년에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셨다. 그 10성은 이러하다. 첫째는 안시성이니, 개평 동북쪽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둘째는 석성이니, 건안성에서 서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셋째는 건안성이니, 안시성에서 남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넷째는 건흥성이니, 난하의 서쪽에 있고, 다섯째는 요동성이니, 창려의 서남쪽 경계에 있고, 여섯째는 풍성이니, 안시성에서 서북쪽으로 1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일곱째는 한성이니, 풍성에서 남쪽으로 2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여덟째는 옥전보이니, 옛날의 요동국으로 한성에서 서남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아홉째는 택성이니, 요택성에서 서남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열째는 요택성이니, 황하 북류의 왼쪽 언덕에 있다.


    위에서 보듯이 당시 요서는 난하灤河의 서쪽 지역입니다. 이곳은 한나라와 흉노 그리고 고구려 사이의 완충지대로 세 나라 사이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축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태조무열제는 비록 창업 군주는 아니지만, 단군조선의 옛 영역을 회복한 업적으로 나라를 개국한 임금에게 붙이는 태조太祖라는 묘호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이 태조라는 호칭은 중원에서는 송나라 때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이전에는 고조高祖 또는 그저 제帝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태조라는 호칭은 고구려 태조무열제가 처음입니다. 이후 10세 산상열제 원년인 단기 2530년 197년에는 열제의 아우인 계수罽須를 보내 공손탁公孫度을 쳐부수고, 현도와 낙랑을 쳐서 멸함으로써 요동 지역을 모두 평정하였습니다.

    단군이라 불린, 11세 동천열제東川烈帝


    혼란한 삼국지 시대를 맞이하여
    착실하게 동아시아의 패자로 위치를 잡고 있던 고구려와 달리 중원은 광무제 유수의 후한이 약화되면서 위·촉·오 세 나라가 각축하는 이른바 삼국시대(220~280)에 접어들었습니다.

    당시 요동 지역은 단군 고토 회복을 꿈꾸는 고구려와 조조의 위나라, 그리고 독립 왕국을 만들려는 공손씨 일가 사이에서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여기에 북방 선비족의 모용씨慕容氏와 탁발씨拓跋氏 등이 새롭게 흥기하였습니다. 선비족은 동호東胡의 후예로서 단씨段氏, 모용씨, 탁발씨, 독발씨禿發氏, 걸복씨乞伏氏, 우문씨宇文氏 등의 부족으로 구성되었는데, 거란과 몽골의 선조들입니다.

    단군 동천제
    공손씨의 요동 장악을 용납할 수 없었던 고구려 11세 동천열제東川烈帝는 재위 12년에 위나라와 손잡고 공손씨를 협공해 무너뜨렸습니다. 동천열제는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였을 뿐 아니라, 힘이 세고 용감하며 사냥과 활쏘기도 잘했다고 합니다. 『조대기』에서는 “동천제東川帝를 단군이라고도 하였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해마다 한맹寒盟(동맹東盟) 때가 되면 평양에서 삼신상제님을 맞이하는 천제를 올렸다.”는 기록도 전합니다.

    재위 16년에 동천제는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였습니다. 『요사』 「지리지」에 따르면 요동 서안평은 지금의 내몽골 파림좌기이고, 지금도 거대한 고구려 토성터가 남아 있습니다. 이에 위나라는 244년 북경 지역을 다스리는 유주자사 관구검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초기에는 고구려가 승기를 가졌지만, 이후 전세가 역전되어 수도 환도성이 함락되고 동천제는 남옥저로 퇴각하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고구려는 밀우密友와 뉴유紐由의 분전으로 관구검의 위군을 겨우 쫓아냈고, 관구검은 요동의 낙랑으로 물러갔습니다.

    전란을 겪은 후 동천제는 환도성이 전란으로 다시 도읍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평양성을 쌓고, 종묘 사직과 백성을 옮겼습니다(築平壤城 移民及廟社 - 『삼국사기』 ‘동천왕 21년 조’ 기사). 이때 평양은 고구려 수도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만주의 평양입니다. 설령 이때의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즉 강단사학계에서는 미천열제 때인 313년 축출됐다고 하는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이라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보다 100여 년 전인 동천제 때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말입니다.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에 낙랑군이 그때까지 남아 있었다는 것일까요?

    재위 22년에 동천제가 세상을 떠나자 근신近臣들 중에 따라 죽으려는 이들이 너무 많아 새로 즉위한 중천제中川帝는 순장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럼에도 장례일에 많은 이들이 순장을 택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는 고구려 열제와 이를 따르는 조의선인을 비롯한 지배층이 생사를 함께 하는 전사戰士 집단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혼란의 중원과 고구려
    이러는 사이, 촉나라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 내면서 위나라의 권신 사마의司馬懿는 세력을 키웠습니다. 그 후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 때에는 위의 국정을 완전히 장악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마소司馬昭의 아들 사마염司馬炎 때에 이르러서는 위나라를 차지하여 새로 진晉나라를 세우고 촉과 위를 멸망시켜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진나라의 통일 천하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사마씨 일족의 골육상잔인 「팔왕八王의 난」으로 망하게 된 것입니다. 혼란한 중원에 북방 기마민족들이 내려오면서, 진나라의 잔존 세력은 양자강 이남으로 내려가 동진東晉을 세우게 됩니다. 이렇게 중원 북방에는 흉노, 갈羯, 선비, 강羌, 저氐 등 다섯 민족의 열여섯 나라들이 흥기하는 5호 16국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이들 중 고구려와 고대 요동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한 세력은 선비족입니다. 고구려는 선비족 중에서 우문씨와는 대체로 사이가 좋았고, 모용씨와는 여러 차례 충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용씨와 고구려는 서로 언어가 통했다는 중국 「방언方言」
    *
    의 기록처럼 같은 민족이었을 수 있습니다.
    * 양웅揚雄(BCE 53 ~ CE 18)의 저서로 전한前漢 시기 각 지역의 언어 기록을 알려 준다.


    위기에 빠진 고구려, 16세 고국원열제故國原烈帝


    아버지 미천열제美川烈帝
    당시 고구려는 을불乙弗이 제위에 오릅니다. 바로 고구려 15세 미천열제美川烈帝입니다. 미천열제의 큰아버지인 봉상제는 동생인 돌고를 반역 혐의로 죽이고 폭정을 일삼았습니다. 돌고의 아들 을불은 숨어 지내면서 남의 집 머슴살이와 소금 장수를 하며 세상을 알아 갔습니다. 이때 국상 창조리倉助利가 흉년임에도 궁궐을 중축하고 간언을 듣지 않는 봉상제를 폐하고, 세상을 떠돌던 을불을 제왕에 올립니다.

    어려웠던 시절을 겪은 미천열제는 내정을 잘 다스리고 서진 및 선비족과 전역에서 큰 전과를 거둔 중흥 군주입니다. 재위 3년에 현도군을 공격하고, 재위 12년인 311년에는 요동 서안평을 공격해 차지했습니다. 이후 요동의 낙랑군을 공격하는 등 활발한 정복 사업을 펼쳤습니다. 재위 32년인 331년 2월 붕어하고 미천지원美川之原에 장사를 지낸 후, 태자 사유斯由가 즉위하였습니다. 바로 눈물의 태왕이라고 할 수 있는 16세 고국원열제故國原烈帝입니다.

    눈물의 태왕
    고구려는 지형상 중원 왕조나 북방민족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듭된 전란으로 인해 국력이 쇠잔하기 쉬웠습니다. 미천열제의 뒤를 이은 고국원열제 당시 고구려는 쇠약해진 모습을 극명히 보여 주게 됩니다.

    이웃한 선비족의 모용씨 내에서는 그들 최고의 영웅 모용황이 전연前燕을 세우며 고구려를 압박하였습니다. 단군조선의 영토를 회복하자는 ‘다물’을 국시로 내세운 고구려는 이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북부여의 정통성 계승을 주장하는 백제도 근초고왕近肖古王이라는 걸출한 제왕이 다스리던 시절로 최고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고국원열제는 전연과 백제라는 두 강국과 상대해야만 했습니다.

    재위 4년에 평양성을 증축해 백제에 대비하고, 이듬해에는 북쪽에 신성新城을 쌓아 전연에 대비했습니다. 고국원열제는 화친을 하려고 했지만, 지금의 하북성 난하 유역의 요동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고구려와 전연의 대립은 어느 한쪽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전쟁은 불가피했습니다.

    고구려의 최대 위기
    모용황은 고국원열제 12년인 342년 고구려를 침공하였습니다. 정예병을 남쪽으로 또 다른 군대를 북쪽 길로 보내 고구려를 압박하자, 고구려는 5만 강군을 황제皇弟 고무高武에게 주어 북쪽을 막게 하고, 태왕은 약한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 길을 막았습니다. 북쪽에서는 이겼으나, 남쪽에서 패한 고구려는 고국원제 혼자 말을 타고 단웅곡斷熊谷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전연의 장군 모여니慕輿埿는 고국원열제의 모후 주씨周氏와 왕비를 사로잡아 돌아갔습니다. 모용황은 미천열제의 능을 파서 그 시신을 탈취하고, 국고의 여러 보물을 약탈하고, 궁실과 환도성을 불태운 후 남녀 5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습니다. 고구려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고구려는 태왕인 고국원제와 북쪽 길을 들어간 주력부대가 건재하였기 때문에 더 상황이 나빠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13년 동안 전연과의 형식적인 조공 책봉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평양성에서 스러지다
    전연에 대한 유화책으로 부친 미천열제의 시신과 모후 주씨를 돌려받은 고국원제는 재위 39년인 369년 2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진정한 비극의 시작이 되어 버렸습니다. 백제의 근초고대왕은 태자 근구수를 보내 치양雉壤에서 고구려군을 습격해 패퇴시켰습니다. 당시 중원에서는 저족氐族이 세운 전진前秦이 새롭게 부상하면서 전연이 약화되었습니다. 고구려는 전진과 우호 관계를 맺었고, 전진은 요동보다는 중원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북방 정세에 한숨을 돌렸습니다.

    이때 백제의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고국원제 41년인 371년 근초고대왕의 군대는 평양성을 공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공격을 막던 고국원제는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간신히 공격을 막아 내긴 했지만 그 상처는 심했고, 영토도 잃고 왕권도 상실하게 되는 진정한 고구려의 위기 상황이 되었습니다. 훗날의 일이지만 이 원한은 증손자 대인 장수열제 때 한성 백제가 무너지고 개로왕을 처형하면서 풀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죽고 죽이는 골육상잔을 계속하게 됩니다.

    북방 유목민족과 남방의 강국 백제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던 고구려의 상황은 그만큼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상무 정신이 아니면 존속조차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고구려는 단군조선의 강토를 되찾는 다물 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참고문헌>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이것이 개벽이다 하』(안경전, 상생출판, 2014)
    『이덕일의 한국통사』(이덕일, 다산초당, 2020)
    『삼국유사』(일연 지음, 이민수 옮김, 을유문화사, 1998)
    『삼국사기』(김부식 등 지음, 이병도 역주, 을유문화사, 1997)
    『한국고대전쟁사1 전쟁의 파도』(임용한, 혜안, 2011)




    고구려의 제천의식 한맹제寒盟祭(동맹東盟)
    단군조선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에는 공통적으로 신교의 제천의식이 있습니다. 부여의 영고迎鼓, 예맥의 무천舞天, 삼한(중삼한)의 10월 상달제, 거란 요나라의 요천繞天 등이 있습니다. 고구려에도 10월에 신교의 제천의식이 행해졌습니다. 바로 한맹제寒盟祭, 일명 동맹東盟 또는 동명東明이라는 것입니다.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에 “그 나라의 동쪽에 큰 동굴이 있는데, 이름을 수혈隧穴이라 한다. 10월에 나라 안에 대회를 열고 수신隧神을 맞아 나라의 동쪽으로 돌아와서 제사를 지내는데, 신좌에 나무 수신을 모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수신은 천신天神 즉 삼신상제님으로, 민족적인 신앙의 대상입니다. 이 국중대회國中大會는 일종의 추수감사제와 같은 성격으로 다 같이 먹고 마시며, 한 해의 수고로움을 풀고 내년을 기약하는 대동, 해원의 놀이마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제烈帝인가 태왕太王인가?
    고구려 역대 제왕에 대한 공식 호칭은 ‘위대한 황제’라는 뜻인 열제입니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고구려 조에는 고주몽을 ‘시조始祖 동명성제東明聖帝’라 하여 고구려가 건국 초기부터 통치자를 황제라 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와 천하를 건 전쟁을 벌인 수나라의 역사서 『수서隋書』 「고구려전」을 보면 “위궁位宮(10세 산상열제)의 현손의 아들 즉 16세 고국원제故國原帝는 소열제昭烈帝”라 전하고 있습니다.

    『위서魏書』 권100 고구려 조에도 “열제烈帝”라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조’를 보면, 고구려의 역대 왕이 정복 또는 투항한 지역의 왕이나 우두머리를 왕으로 봉하는 ‘왕봉위왕王封爲王’의 기록들이 보입니다. 이와 같은 기록들을 통해 보았을 때도 고구려는 건국 당시부터 칭제한 황제 국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태왕太王’은 오직 5세기의 금석문에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태왕이 확인되는 금석문은 보통 광개토태왕릉비(414년), 호우총 출토 광개토왕호우(415년), 모두루 묘지명(5세기 초), 중원고구려비(5세기) 등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대왕이나 성왕聖王과 같이 군주에 대한 미칭 혹은 존칭으로 쓰이다가 장수태왕 때 비로소 군주의 칭호로 정착되었다고 합니다. 태왕이 처음 쓰인 시기는 의견이 다르지만 미천제, 고국원제, 고국양제와 광개토태왕 등으로 갈립니다. 아무튼 미천제를 기점으로 해서 이후 고구려의 열제들에 대한 호칭을 태왕이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밖에 신라에서도 6세기 법흥제와 진흥대제 때의 금석문에 비슷한 용례가 있습니다.

    고구려 태왕의 연호年號
    연호는 전제군주 제도 아래에서 임금이 재위한 해의 치세에 연차를 붙여서 햇수를 세던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 연호는 종주국, 황제국만이 사용하고,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나 제후국은 종주국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천자국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환단고기』 기록에 의한 연호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1세 고주몽성제의 다물多勿과 평락平樂이 있고, 6세 태조무열제의 융무隆武, 20세 장수제의 건흥建興이 있습니다. 특히 이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銘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불상에는 ‘建興五年歲在丙辰’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때는 백제 불상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광개토태왕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열제는 임자년인 412년에 붕어하였습니다.

    즉위년 칭원법稱元法에 따라 광개토열제가 붕어한 이 해를 장수열제의 즉위 원년으로 할 경우 장수열제 5년은 병진년이 됩니다. 이를 통해서 『환단고기』의 사료적 신빙성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수제의 손자인 21세 문자명제 때 사용한 명치明治,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사랑 이야기로 알려진 25세 평원제의 대덕大德,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26세 영양제의 홍무弘武, 마지막 태왕인 28세 보장제의 개화開化 연호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잘 알려진 대로 광개토태왕의 영락永樂 연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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