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B다시보기 | 한국의 성씨 - 1회 진주 강씨

[STB하이라이트]

나의 존재의 근원이자 근본 뿌리인 성씨姓氏에 대해 그 기원과 틀을 바르게 알아보고 자신의 뿌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시간 ‘한국의 성씨’ 첫 번째로 소개할 성씨인 진주 강씨姜氏는 현존하는 성씨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인류의 뿌리 성씨입니다. 그렇다면 제일 처음 강씨 성을 사용한 분은 누구일까요? 진주 강씨의 역사를 함께 거슬러 올라가 진주 강씨의 기원과 연맥의 틀을 알아봅니다. (※STB다시보기는 상생방송의 주요 프로그램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한국의 성씨 정보


연어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고향을 찾아가듯이 사람이 자신의 뿌리를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201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전체 성씨는 5,582개이고 본관별 성씨는 36,744개라 합니다. 2000년에는 전체 성씨가 430개였는데 10여 년 만에 무려 10배가 넘는 성씨가 새로 생겨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귀화인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성씨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자가 없는 성씨가 4,075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성씨 중 역사 속에서 첫 번째로 등장한 성씨는 어떤 성씨일까요? 그 내용이 증산도 도전에 나옵니다.

세상에 성(姓)으로 풍(風)가가 먼저 났으나 전하여 오지 못하고 다만 사람의 몸에 들어 체상(體相)의 칭호로 쓰이게 되어 풍신, 풍채, 풍골 등으로 일컫게 되었을 뿐이요 그 다음에 강(姜)가가 났나니 강가가 곧 성의 원시라. (道典 2:37)


지금부터 5,600년 전 고대의 제왕이었던 태호복희씨는 풍씨입니다. 풍씨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성씨이지만 지금은 전하여 오지 못합니다.

강씨의 시조


강씨는 현존하는 성씨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인류의 뿌리 성씨입니다. 또한 지금으로부터 151년 전 이 땅에 오신 참하나님 증산 상제님의 성씨이기도 합니다. 고구려 병마대원수 강이식 장군을 시조로 모시는 진주 강씨는 인헌공 강감찬, 은열공 강민첨, 국자감 박사 강계용, 사도소감 강위용, 관서대장군 강원로를 각각 중시조로 모시면서 5대파로 분파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강씨는 우리나라 10대 성씨 중에 하나로 1,176,847명이 살고 있으며, 개별 성씨 중에서 여섯 번째로 큽니다. 모두 단일본인 경상남도 진주를 본관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전에는 전국에서 하나밖에 없는 뿌리공원이 있습니다. 이곳에 가면 각 성씨의 뿌리를 밝혀주는 233개의 성씨 조형물이 있습니다. 강씨 조형물에 새겨진 내용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을 시조로 모신 진주 강씨는 천수백 년을 면면히 이어온 이 나라의 명문거족이다. 고구려 영양왕 때 중국의 수나라 문제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여러 차례 이 나라를 침범하매 고구려 강이식 장군은 도원수로서 육군에 을지문덕, 해군에 왕제건무 등 휘하의 장군들로 하여금 대적케 하여 임유관 및 살수대첩 등에서 승리함으로써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성웅이시다. - 뿌리공원 <진주강씨 조형물> 중


서기 597년 수나라 문제는 중국 대륙을 통일한 뒤 고구려를 침공하려는 야욕이 담긴 무례한 국서를 고구려에 보내옵니다. 이때 강이식 장군은 “이런 오만무례한 국서는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답해야 한다.”고 말하며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합니다. 그 이듬해 598년에 고구려 영양왕이 중국의 요서 지역인 임유관을 공략하자 수나라 문제는 같은 해에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이때 고구려 최고사령관이었던 병마도원수 강이식 장군은 정병 5만 명으로 수나라 30만 대군을 격파합니다. 이후 서기 612년 수나라 문제의 아들 양제는 철저한 준비 끝에 113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2차로 침략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에도 강이식 장군은 을지문덕을 휘하로 하여 수나라 100만 대군을 물리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살수대첩입니다.

경남 진주시 상봉서도에는 진주 강씨 시조이신 강이식 장군을 모신 사당인 봉산사가 있습니다. 이 봉산사는 130만 진주 강씨의 성지라 불리며, 강이식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있습니다. 봉산사는 서기 950년에 비봉산 자락에 사당을 짓고 춘하추동으로 시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천 년이 넘게 강이식 장군의 향례를 모시고 있습니다.

어느 성씨 어느 문중 어느 향교마다 봄철이 되면 향례를 모십니다. 저희 문중에서는 음력 3월 10일을 정해 향례를 모시고 있는데요. 봄철에 시조님을 추모하는 의미도 되겠지만 향례의 목적은 자기 존재의 발견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뿌리가 있기 때문에 줄기가 있고 가지가 있고 잎이 있고 열매가 있듯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가 향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 강호열 진주 강씨 대종회 사무국장


강이식 장군의 묘는 고구려의 땅이였던 만주 심양현 원수림에 있습니다. 이곳에는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원수림역 앞에 ‘병마원수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이라는 큰 비석이 있었지만 중국 문화혁명 때 파손되고 현재는 돌조각과 거북 좌대만 남아있습니다.

경남 진주 본관의 시작


고구려의 명문가였던 진주 강씨의 본관은 고구려 땅에서 멀리 떨어진 한반도 남쪽의 경상남도 진주입니다. 어떻게 관향을 진주로 삼게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본관을 진주로 하게 된 계기는 통일신라 헌강왕 때 태중대부를 역임한 강진이라는 분이 진주부로 벼슬을 받아 오심으로 인해 진주가 진주 강씨의 본관이 된 것입니다. 옛날에는 진향 강씨였습니다. 1995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인해서 진향이 진주시에 통합됨으로써 진향 강씨가 진주 강씨로 바뀐 것입니다. - 강호열 진주 강씨 대종회 사무국장


현재 우리나라에는 진주 강씨가 100만 명 이상 살고 있습니다. 진주 강씨 종문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조선 시대 인물로는 세종대왕을 도와 한글창제에 참여했던 강희안(1418~1464)과 대문장가 강희맹(1424~1483) 형제가 있습니다. 강희맹의 5대손 강항(1567~1618)은 선조 때 인물로 전남 영광 출신입니다. 모친상으로 고향에 낙향해 있다가 정유재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켜 싸웠는데 불행히도 가족과 함께 포로로 잡혀 일본에 끌려가게 됩니다. 포로로 끌려간 일본에서 학자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쳐주어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가 됩니다. 강항이 31세 때 지은 글들이 일본의 내각문고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영조 때 인물인 강세황(1713~1291)은 66세 때 장원급제하고 한성부 판윤을 역임한 사대부 화가로 유명합니다.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김홍도의 스승이 강세황입니다.

강씨의 원시조, 신농씨


그렇다면 제일 처음 강씨 성을 사용한 분이 누구인지 강씨의 원시조原始祖를 살펴보겠습니다.

중국은 하북성 탁록에 중화삼조당을 짓고 황제헌원, 염제신농, 치우천황을 조상으로 모셔놓고 있습니다. 이 중 염제신농씨는 약 5,300년 전 인물로 인류의 뿌리 성씨인 강씨의 원시조입니다.

염제신농은 황제헌원과 더불어 중국민족의 시조로 받들어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중국 측은 염황지자炎黃之子라고 해서 자기들이 황제와 신농의 자식들이라고 스스로 칭하고 있습니다. 신농씨가 강씨라는 것을 최초로 기록한 문헌으로는 좌구명의 국어라는 문헌의 진어 편에 보면 ‘신농은 강수에서 성장하였는데 강씨의 조상이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신농이 강씨 성의 시조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 김선주 상생문화연구소 박사


염제신농씨는 농업과 불을 사용하는 방법으로 백성들에게 많은 덕을 베풀었습니다. 신농씨는 나무로 쟁기, 호미를 만들었고 지력있는 땅에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고, 채소를 재배하는 법을 가르쳤으며, 수백 가지 약초를 맛보고 의학을 개발하여 사람들을 질병에서 구제하였기 때문에 의학의 시조로도 불립니다. 이렇게 경농과 의학의 시조인 염제신농씨는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이 크기 때문에 그 업적을 기린 흔적들이 우리 주변에 지금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서울 동대문구에 가면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는 신농씨와 후직씨를 주신으로 제사 지내던 선농단 유적이 있습니다. 조선의 왕들은 이곳에서 풍년을 기원하며 선농제를 올리고 친히 밭을 갈았다고 합니다. 선농단에 제사를 지낼 때는 소와 돼지를 잡아서 통째로 상에 올렸고, 제사가 끝나면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음식을 먹어야 했기에 큰 솥에 소고기를 넣고 국을 끓여 밥을 말아 먹었는데 이 국을 선농탕이라고 하였고, 이것이 지금의 설렁탕이 된 것입니다.

진주 강씨의 원시조인 염제신농씨를 중국에서는 자신들의 조상으로 모셔오고 있습니다. 이런 중국의 주장이 맞는지 신농씨의 혈통을 알 수 있는 역사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의 상고 역사가 상세하게 기록된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에 보면 신농씨의 혈통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雄氏之所分(웅씨지소분)을 曰少典(왈소전)이니
安夫連桓雄之末(안부련환웅지말)에 少典(소전)이 以命(이명)으로 監兵于姜水(감병우강수)하고
其子神農(기자신농)이 嘗百草制藥(상백초제약)하고
웅씨족에서 갈려 나간 후손 중에 소전이 있었다.
안부련환웅 말기에 소전이 명을 받고 강수에서 군병을
감독했다.
소전의 아들 신농은 온갖 풀을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
-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


신농씨의 혈통을 얘기하자면 배달국의 건국으로 소급해 올라가야 합니다. 환웅천황께서 문명개척단 3천 명을 거느리고 백두산으로 내려오시는데 백두산 주위에 웅족과 호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환웅천황께서는 두 부족을 교화하셨는데 웅족만이 그 교화를 받아들여서 이주해 온 환족과 웅족이 결합해서 우리 배달겨레가 시작하게 됩니다. 웅족의 후손 중에 소전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배달국 8세 안부련환웅 말기에 천황께서 소전을 강수에 감병관으로 보내게 되는데 강수는 지금의 섬서성 기산현을 흐르고 있는 기수입니다. 여기에서 소전의 아들로 신농씨가 태어나 강씨 성을 처음으로 쓰셨다고 환단고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윤창열 대전대학교 한의과대 교수


이렇게 기록을 보면 염제신농씨는 한민족 최초의 나라였던 배달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의 조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염제신농씨와 함께 강씨 문중에서 유명한 인물은 강상(BCE 1122~1249)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강태공으로 잘 알려진 강상은 주나라 문왕과 무왕을 도와 상나라를 멸한 뒤 그 공으로 제나라 제후가 됩니다. 제나라의 시조이며, 또한 정치와 병법의 중시조인 강태공은 신농씨의 후손입니다. 중국의 강씨는 천수 강씨, 광동 강씨, 산서 강씨, 니련 강씨, 유이 강씨 등이 있으며 모두 천수 강씨에서 분파되었습니다. 강태공이 이 천수 강씨입니다.

또한 강씨는 중국에서 100대 성씨에 포함이 되며, 성씨 순위로는 53위로 약 600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 특히 산동성에는 강태공이 제나라의 시조가 된 이후 현재까지 그 후손 강씨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신농씨 이후 강씨 성에서 많은 성씨가 분화되었습니다. 여呂, 최崔, 정丁, 노盧, 제齊를 비롯해서 102개의 성씨가 강씨에서 분화되었습니다.

소학에 보면 ‘이배기근以培其根이면 이달기지以達其枝라’ 뿌리를 북돋우면 그 가지는 번영하고 발달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뿌리를 밝히는 것은 자신의 뿌리를 북돋우는 소중한 일입니다. STB상생방송의 <한국의 성씨>를 통해 자신의 뿌리를 찾고 뿌리의 소중함을 느껴보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