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무극대도 | 주역 스무 번째 하느님의 신교神敎로 자신을 성찰해 보는 풍지관괘 ䷓

[기고]

대지에 바람이 부니


위에는 바람괘(風,☴) 아래는 땅괘(地,☷)가 있는 풍지관괘風地觀卦(䷓)입니다. ‘바람[風]’이 ‘땅[地]’에서 불고 있는 ‘풍지風地’가 본다는 ‘관觀’입니다. 왜 대지에 바람이 부는 것을 ‘본다[觀]’고 했을까요? 그것은 바람이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바람이 불면 만물은 흔들립니다. 가지에 붙어 있는 나뭇잎도 호숫가의 물결도 심지어 마음까지도 흔들리죠. 이렇게 보이지 않는 바람으로 인해 물건이 흔들리는 것을 ‘볼 수[觀]’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바람에 의해 움직이므로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참고로 본다는 관觀 자는 1) ‘艸(풀숲에서)+ㅁㅁ(두 눈)+焦(새)+見(자세히 봄)’의 합성자로 풀숲에서 새가 무언가를 자세히 본다는 뜻이며, 2) ‘雚(황새 관: 두 개의 도가머리와 두 눈이 강조된 모습)+見’으로 풀어 보면 황새처럼 높은 데서 자세히 내려다보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입니다. 그래서 ‘관觀’ 자가 들어가는 관찰觀察(Observation)이란 말도 ‘사물이나 현상을 주의 깊게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죠.

그렇다고 관이란 게 유형의 물건만을 보는 것은 아니며, 보이지 않는 무형의 마음자리까지 보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풍지관괘의 ‘관觀’은 형이상학적 색채가 더 강합니다. ‘관觀’을 심법 다스리는 차원까지 승화시킨 불교의 사례로 설명드리면, ‘관觀’은 불교의 명상 수행법의 하나로 산스크리트 비파사나Vipasyana를 의역意譯한 말로 ‘마음을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하여 심안心眼으로 관찰함으로써 통찰력을 얻는 수행법’을 말합니다.

물론 유교에서도 ‘관觀 공부工夫’라는 것이 있는데 이 공부법이 바로 풍지관괘의 관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일체의 잡념 없이 경문經文을 외우며 정신을 집중하여 관통하는 공부법으로 다른 말로는 경敬 공부工夫라고도 합니다.

요즘은 서양에서도 ‘명상冥想(Meditation)’을 통해 마음을 관찰하고 다스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자아 성찰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확산되고 있습니다. 눈(目, 見)의 부수가 들어가는 어휘들 예컨대, 보다(視), 바라보다(看), 살펴보다(觀)의 차이점은 아래 표와 같습니다.

정성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 괘사
觀(관)은 盥而不遷(관이불천)이면 有孚(유부)하야 顒若(옹약)하리라
觀은 (제사 올리기 전에) 손을 씻고 정성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믿음이 있어 우러러 보리라.


☞ 손을 씻고 정성이 흐트러지지 않으면(盥而不遷): 관괘觀卦는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修行과 제례祭禮에 대한 괘입니다. 마음자리를 닦는 수행과 천지와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은 ‘정성을 들이다’라는 의미에서 서로 일맥상통합니다.

‘盥(대야 관)’은 씻다, 깨끗이 하다, 강신제降神祭의 뜻으로 관수盥手(제사 때 손 씻는 것), 관분盥盆(나라 제사 때 제관이 손 씻는 그릇) 등 제례와 관련된 단어입니다. 여기서 관盥은 제례 시 손을 씻고 땅에 술을 부어 예를 올리는 행위로 제사를 올리기 전에 손을 씻을 때가 가장 정성스러운 때입니다.

비슷한 의미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하는 ‘재계齋戒’ 또는 ‘목욕재계沐浴齋戒’라는 말이 있는데요. 조선 시대 왕실의 신주를 모신 종묘宗廟에 가면 어목욕청御沐浴廳이 있는데, 여기는 임금이 제례를 올리기 3일 전부터 매일 목욕재계를 하던 곳입니다.

그리고 ‘불천不遷’이란 의미는 제사 지낼 때 지극한 정성을 다른 곳에 옮기지 않는다는 뜻으로 잡념 등으로 정성이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원래 불천不遷은 ‘불천위不遷位’에서 나온 말로 영원토록 사당에서 옮기지 않는 조상님의 신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나라에 큰 공을 세우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분에 대해 4대代를 넘긴 신주神主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모시면서 제사를 올리도록 임금이 허락해 준 신위神位입니다.

주자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 시대는 충효를 중시하는 사회적 풍토와 함께 예학禮學을 강조하는 사회였습니다. 나라님으로부터 불천위를 하사받으면 5대조가 되어도 위패를 땅에 묻지 않고 자손 대대로 제사를 올릴 수 있도록 허락받으니 얼마나 가문의 영광이었겠습니까? 불천위는 다른 말로 ‘불조위不祧位’라고 불렀으며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는 영원히 사당에서 제사를 올릴 수 있도록 ‘불조지전不祧之典’이란 특전을 임금이 허락해 주었습니다. 참고로 불천위 제사에서는 일반 기제사와 달리 제물로 익힌 음식을 쓰지 않고 ‘날것’을 쓰는데 이를 ‘혈식血食’이라고 합니다.

혈식천추 도덕군자


이와 관련된 표현으로 혈식천추血食千秋 도덕군자道德君子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상제님의 천하사 핵심 일꾼, 1만 2천 명의 도통군자道通君子를 일컫는 말로서 혈심血心으로 일하여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공경받는 인류의 위대한 스승을 말합니다.

* 이 일은 남조선 배질이라. 혈식천추(血食千秋) 도덕군자(道德君子)의 신명이 배질을 하고 전명숙이 도사공이 되었느니라. 이제 그 신명들에게 ‘어떻게 하여 만인으로부터 추앙을 받으며 천추에 혈식(血食)을 끊임없이 받아 오게 되었는가.’를 물은즉 모두 ‘일심에 있다’고 대답하니 그러므로 일심(一心)을 가진 자가 아니면 이 배를 타지 못하리라. (도전 6:83:4~6)

* 이제 성인이 나오시는데 도덕군자(道德君子)도 따라 나오느니라. (도전 11:361:2)

* 궁을가에 ‘조선강산 명산이라 도통군자(道通君子) 다시 난다.’는 말은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니라. (도전 2:94:8)


개벽장이신 상제님께서는 천하사 핵심 일꾼 1만 2천 명의 도덕군자가 출세하는 공사를 금강산의 1만 2천 봉의 정기에 응해서 인사로 집행하셨습니다.

* 금강산의 정기에 응해 일만 이천 명의 도통군자(道通君子)가 출세하리라. (도전 1:10:10)


☞ 믿음이 있어 우러러 보리라(有孚顒若): 제사를 지내기 전 손을 씻을 때의 마음가짐으로 사람을 대하면 혹은 그런 마음으로 정치를 한다면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서 우러러본다는 뜻입니다.

신묘한 도道로써 가르침을 베푸니


☯ 단사

彖曰(단왈) 大觀(대관)으로 在上(재상)하야 順而巽(순이손)하고 中正(중정)으로 以觀天下(이관천하)니
단전에 이르길 “크게 봄이 위에 있어 순하고 공손하며 중정으로써 천하에 보여줌이니

觀盥而不遷有孚顒若(관관이불천유부옹약)은 下(하) 觀而化也(관이화야)라
‘관은 손을 씻고 정성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믿음이 있어 우러러보리라’는 것은 아랫사람이 이를 보고 감화를 받는 것이다.

觀天之神道而四時(관천지신도이사시) 不忒(불특) 하니 聖人(성인)이 以(이신도설교이천하(神道說敎而天下) 服矣(복의)라
하늘의 신묘한 도를 보면 사시의 운행이 조금도 어긋남이 없으니 성인이 이를 본받아서 신묘한 도로써 가르침을 베풂에 천하가 감복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 크게 봄이 위에 있어 순하고 공손하며 중정으로써 천하에 보여줌이니(大觀在上順而巽中正以觀天下): 풍지관괘는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修行에 대한 괘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살펴 주는 군왕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크게 봄(大觀)은 풍지관괘에서 2양(구오, 상구)를 말하며, 특히 구오(군왕)는 가운데[中]에 위치하고 제 자리[正]에 있으므로 중정中正하여 아래에 있는 가난한 4음(백성)의 어려움을 보살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관괘의 덕성이 순順하다고 한 것은 아래 땅괘(☷)를 말하며, 공손恭遜하다는 것은 위의 바람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늘의 명[天命]을 밖으로는 공손하고 안으로는 순종해서 따른다는 뜻입니다. 군자가 공손한 마음으로 겸손하고 백성을 중히 여기면 백성들은 감화를 받아 따르게 됩니다. 이같이 중도의 심법으로써 선정을 펼치는 군왕은 온 세상에 덕치를 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죠.

☞ ‘관은 손을 씻고 정성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믿음이 있어 우러러본다’는 것은 아랫사람이 보고 감화를 받는 것이다(觀盥而不遷有孚顒若下觀而化也): 군왕이 제례를 올릴 때처럼 손을 씻고 정성을 들이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정치를 한다면 선정을 펼칠 것이기에 백성들이 감화됩니다.

☞ 하늘의 신묘한 도를 보면 사시의 운행이 조금도 어긋남이 없으니(觀天之神道而四時不忒): 하늘에는 천도天道가 있고 땅에는 지도地道가 있으며 사람에게는 인도人道가 있습니다. 천도는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순환 이치’를 말하며 그 성정은 중천건괘에서 보듯 ‘스스로 굳세어 쉼이 없습니다’[自彊不息].

그러므로 하늘의 신묘한 도라는 것은 ‘낳고(生)-길러서(長)-성숙하여(廉)-휴식(藏)’하는 순환 과정을 굳세게 쉼 없이 운행함으로써 한 치의 오차가 없다는 것이죠.

* 하늘이 이치(理致)를 벗어나면 아무것도 있을 수 없느니라. 천지개벽도 음양(陰陽)이 사시(四時)로 순환하는 이치를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니 (도전 2:20:3~4)


☞ 성인이 이를 본받아서 신도로써 가르침을 베풂에 천하가 모두 감복하느니라(聖人以神道設敎而天下服矣): 하늘의 이치에 도통한 성인만이 생장염장하는 천도의 이법을 본받아서 하느님의 가르침(神敎)을 베푸니 온 천하의 창생이 이에 감복합니다. 복희씨나 문왕, 주공 같은 성인들은 하늘의 이치를 깨달아 역도易道를 정립하였습니다. 상제님께서도 “천도의 운행이 쉼이 없는 것은 천지의 대덕이고, 공덕을 만세에 미침은 성인의 대업”(도전 2:49)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하가 감복하여


인류 창세 시대는 하느님의 가르침인 신교神敎로 창생들을 다스렸습니다. 즉 환국, 배달, 조선의 삼성조 시대의 인류 원형문화 중심 주제는 신교였습니다. 신교는 신의 가르침으로 만물과 세상을 다스렸던 한민족의 태고 신앙이자 인류의 원형문화입니다.

신교의 어원은 다양하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풍지관괘에 나오는 “이신도설교以神道設敎”입니다. ‘신교’가 나오는 출처를 살펴보면 아래 표와 같습니다.

* 동방의 조선은 본래 신교(神敎)의 종주국으로 상제님과 천지신명을 함께 받들어 온, 인류 제사 문화의 본고향이니라. (도전 1:1:6)

* 신교(神敎)는 본래 뭇 종교의 뿌리로 동방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 속에 그 도맥(道脈)이 면면히 이어져 왔나니 (도전 1:8:1)


그리고 신교를 정의한 사서史書 중에서 풍지관괘의 신교와 유사한 대목이 단군세기에 나옵니다. ‘이신설교以神施敎 지아구독知我求獨’(단군세기: 신도로써 가르침을 베풀어 나를 알아 자립을 구하며) 삼신하느님의 가르침이 베풀어져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천지의 중심, 역사의 중심, 우주의 주체라는 것을 자각한다는 것입니다.

‘이신도설교以神道設敎 관아생觀我生’(주역 단전, 육삼: 신도로써 가르침을 베풂에 나의 생을 보도다)은 삼신하느님의 신도가 베풀어져서 나란 존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본다, 즉 자신을 알고 자신의 본모습을 본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교문화는 천제天祭문화로 나타나며 그 상징성은 하늘은 원만하고 땅은 반듯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천원지방의 정신은 주역의 머리 괘이자 천지부모괘인 중천건괘와 중지곤괘에 담겨져 있습니다.

☯ 대상전

象曰(상왈) 風行地上(풍행지상)이 觀(관)이니 先王(선왕)이 以(이)하야 省方觀民(성방관민)하야 設敎(설교)하니라
대상전에 이르길 “바람이 땅 위를 행하는 것이 관이니 선왕이 이를 본받아 방소를 둘러보고 백성을 살펴서 가르침을 베푸느니라.”고 하였습니다.


☞ 바람이 땅 위를 행하는 것이 관(風行地上觀): 바람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바람이 불면 물건이 흔들리니 바람이 행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람에 의해 만물이 움직이듯 정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관괘에서 위의 손괘(☴)는 바람으로 하늘의 명(天命) 또는 임금의 명이며 아래의 곤괘(☷)는 땅으로 유순한 백성에 해당됩니다. 하늘의 법도가 바람이 되어 온 대지를 감싸듯 높은 자리에 있는 임금이 아래에 있는 백성을 두루 굽어살펴 보는 것이 관觀입니다.

☞ 선왕이 이로써 방소를 둘러보고 백성을 살펴서 가르침을 베푸느니라(先王以省方觀民設敎): 하늘의 명(天命)이 바람을 타고 만물에 퍼지듯 정치를 하는 선왕은 풍지관괘의 괘상을 보고 정치에 접목시킵니다. 그래서 선왕이 선정善政을 하고 있는지를 알려면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보면 알 수가 있다는 것이죠. 백성을 다스리는 제왕은 하느님의 가르침[神敎]으로써 정치를 해야 선정을 펼칠 수 있습니다. 풍지관괘를 비롯하여 여러 괘에서 선왕先王이나 후后로 하여금 덕치를 펼치라는 내용이 많은데 이런 이유로 주역을 제왕학帝王學이라고 부릅니다. 아울러 백성을 다스리는 덕치의 근본은 바로 신교神敎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생김새를 보아서


☯ 육효사
初六(초육)은 童觀(동관)이니 小人(소인)은 无咎(무구)리오 君子(군자)는 吝(인)이니라
초육은 아이의 봄이니 소인은 허물이 없고 군자는 인색하니라.

象曰(상왈) 初六童觀(초육동관)은 小人道也(소인도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초육의 아이의 봄이란 소인의 도道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초육은 관괘의 처음 나온 음효라서 여자아이의 봄(觀)이라 하였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듯 초육은 어린애라서 아직 아무것도 모릅니다. 세상을 봐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요. 어린아이야 몰라도 허물이 안 되겠지만 군자가 이렇다면 인색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초육(어린아이)의 봄은 소인의 도라고 하였습니다.

☞ 수행의 1단계[童觀]: 본다(觀)는 풍지관괘는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는 수행 괘입니다. 그래서 관괘의 초육부터 상구까지 여섯 효는 수행의 단계로 보기도 합니다. 아이의 봄(童觀)은 수행의 초보 단계입니다. 수행이 아직 몸에 배지 않아서 익숙하지도 않고 수행의 맛도 모릅니다, 몸이 근질거려 가만히 수행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죠.

六二(육이)는 闚觀(규관)이니 利女貞(이여정)하니라
육이는 엿보는 것이니 여자의 바름이 이로우니라.

象曰(상왈) 闚觀女貞(규관여정)이 亦可醜也(역가추야)니라
소상전에 이르길 “엿보는 것이 여자의 바름이라 하더라도 또한 추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육이는 이젠 좀 커서 철없는 아이에서 어느덧 처녀로 성숙했습니다. 비록 내괘에서 중을 얻었고 외괘의 구오 양효하고 바르게 응하고 있지만, 떳떳하게 보는 게 아니라 문틈으로 엿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틈으로 엿보는 것이 여자 입장에서는 바르다고 할지라도 추한 모습이라고 하였습니다.


☞ 수행의 2단계[闚觀]: 육이는 수행의 두 번째 단계로 이제 뭔가 약간 느낌이 와서 눈을 찡긋거리고 있습니다. 예컨대 눈앞의 광명 체험이라든지, 눈썹 사이의 미간眉間이 간지러울 정도의 체험입니다.

六三(육삼)은 觀我生(관아생)하야 進退(진퇴)로다
육삼은 나의 생김새를 보아서 나아가고 물러나도다.

象曰(상왈) 觀我生進退(관아생진퇴)하니 未失道也(미실도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나의 생김새를 보고 나아가고 물러남이 도를 잃지 아니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육삼은 내괘의 끝자리로 관觀 공부의 극치인 구오와 가까워져 자신의 모습까지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본인이 더 수양을 해야 할지 아니면 그만해도 될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진퇴를 결정한다는 것은 도리를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수행의 3단계[觀我生]: 육삼은 수행의 세 번째 단계로 수행의 묘미를 느끼는 단계입니다. 자신의 전생과 마음자리를 볼 수 있으니까요. 도고십장道高十丈이면 마고십장魔高十丈이라 하였듯이 수행을 하면서 주화입마走火入魔 같은 병폐가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나라의 빛을 보니


六四(육사)는 觀國之光(관국지광)이니 利用賓于王(이용빈우왕)하니라
육사는 나라의 빛을 보는 것이니 왕의 손님 대접을 받는 것이 이로우니라.

象曰(상왈) 觀國之光(관국지광)은 尙賓也(상빈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나라의 빛을 보는 것은 국빈으로 숭상해 주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 나라의 빛을 보는 것이니 왕의 손님 대접을 받는 것이 이로우니라(觀國之光利用賓于王): 육사는 내괘에서 외괘로 건너온 자리로 개인 차원의 관觀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관觀입니다. 나라의 빛을 본다는 것은 그 나라의 정치가 올바로 행하여져 빛이 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빛이 안 난다고 합니다. 나라의 정치가 잘되어 빛이 나는 것을 줄여서 관광觀光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관광이란 원래 ‘나라의 빛을 본다(觀國之光)’는 것입니다. 왕의 손님 대접은 임금에게 녹봉을 받아먹는 벼슬을 말하고 있습니다.

☞ 나라의 빛을 보는 것은 국빈으로 숭상해 주기 때문(觀國之光尙賓也): 나라의 빛을 본다는 것은 정치를 잘하는지를 보기 위한 것이며, 나라의 빛이 밝아야 정치가 잘된다는 뜻이니 덕치를 베푸는 임금 밑으로 가야 제대로 신하 대접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 수행의 4단계[觀國之光]: 육사는 외괘로 진입해서 형이상학의 수준 높은 단계의 관觀 공부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수행의 덕화德化를 베풀 수 있는 경지의 단계입니다.

중통인의中通人義의 경지에


九五(구오)는 觀我生(관아생)호대 君子(군자)면 无咎(무구)니라
구오는 나의 생을 보되 군자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象曰(상왈) 觀我生(관아생)은 觀民也(관민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나의 생을 본다는 것은 백성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 나의 생을 보되 군자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觀我生君子无咎): 구오는 관괘의 주효主爻로 중정하며 임금의 자리입니다. 세속적으로도 권력과 덕성을 두루 갖춘 군왕으로서 모든 것을 알아보는 자리입니다. 수행으로는 도통道通의 경지에 이른 자리입니다. 이런 완벽한 자리인지라 군자 정도가 되어야 허물없이 그 자리를 지켜 낼 수 있지 속인들은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죠.

☞ 나의 생을 본다는 것은 백성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觀我生觀民也): 나(임금)의 본모습을 본다는 것은 내가 정치를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의 여부가 백성들에게 그대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백성을 본다는 관민觀民은 임금이 선정을 펼치는지 폭정을 행하는지 민심을 보고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 수행의 5 단계[觀我生]: 육오는 도통한 자리입니다. 관 공부의 6단계 중 최고 단계로 뭇 중생들을 교화敎化시키는 자리입니다. 상제님 진리로 말하자면 바로 ‘중통인의中通人義’로 인간이 지닌 모든 가능성의 궁극을 통하는 도통 자리입니다.

* 예로부터 상통천문(上通天文)과 하찰지리(下察地理)는 있었으나 중통인의(中通人義)는 없었나니 내가 비로소 인의(人義)를 통하였노라. (도전 2:22:3~4)


종도사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올바른 생명의 길에 대한 궁극적인 깨달음”(2:22 측주)이라고 하셨습니다. 상제님께서 중통인의라는 최고의 도통 문화를 열어 주신 것에 대해, 우리 일꾼들은 천지부모의 은혜에 보은하고 무극대도 진리에 활연관통하여야 합니다.

* 도통천지보은(道通天地報恩)이니라. (도전 6:128:6)


이 말은 ‘도통은 천지보은天地報恩에 있다’는 의미로, 천지보은은 천지부모에 대한 은혜를 갚는다는 뜻입니다. 하늘땅은 만유 생명의 근원으로서 부모님과 같습니다. 인간은 천지의 열매로서 우주 가을철에 천지의 거룩한 사명을 성취해야 합니다. 그 사명이 천지부모님께 보은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도통道通’ 즉 도를 통하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 새로운 도통 문화를 열어 주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천지부모에게 보은하라는 것이며, 이는 천지부모이신 상제님과 태모님의 진리 공부에 집중하여 파고 또 파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도통줄은 상제님의 종통맥의 계승자이신 대두목을 통해 전해집니다.

* 도통줄은 대두목에게 주어 보내리라. 도통시킬 때에는 유불선 각 도통신들이 모여들어 각기 그 닦은 근기(根機)에 따라서 도를 통케 하리라. (도전 6:129:3,5)


上九(상구)는 觀其生(관기생)호대 君子(군자)면 无咎(무구)니라
상구는 그 생을 보되 군자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象曰(상왈) 觀其生(관기생)은 志未平也(지미평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그 생을 본다는 것은 뜻이 편안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 그 생을 보되 군자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觀其生君子无咎): 상구는 구오(임금)의 왕사王師 자리입니다. 구오(觀我生)와 상구(觀其生)의 차이는 ‘아我’와 ‘기其’입니다. 즉 구오는 임금인 자기 자신을 본다는 것이고, 상구는 그 임금(구오)을 본다는 것입니다. 상구는 왕사로서 구오가 선정을 펼치도록 곁에서 잘 도와줘야 하는데 군자 정도가 되어야 구오를 잘 이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도 허물이 되지 않습니다.

☞ 그 생을 본다는 것은 뜻이 편안하지 않기 때문이다(觀其生志未平也): 구오(임금)가 정치를 잘하지 못하면 왕사인 상구 입장에서는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도道를 통한 상구라 할지라도 구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 수행의 6단계[觀其生]: 도를 통한 자리이기는 하지만 구오를 보좌하듯이 중생들을 이끌 만한 능력은 되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