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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인물탐구]

    창세역사 성인열전 | 북부여 구국의 영웅, 동명왕 고두막한

    이해영 / 객원기자

    癸酉十三年(계유십삼년)이라
    漢劉徹(한유철)이 寇平那(구평나)하야 滅右渠(멸우거)러니
    仍欲易置四郡(잉욕역치사군)하야 盛以兵(성이병)으로 四侵(사침)이라.
    於是(어시)에 高豆莫汗(고두막한)이 倡義起兵(창의기병)하야
    所至(소지)에 連破漢寇(연파한구)할새
    遺民(유민)이 四應(사응)하야 以助戰(이조전)하니 軍報大振(군보대진)하니라.

    재위 13년 계유(단기 2226, BCE 108)년에 한漢나라 유철劉徹(무제)이 평나平那를 침범하여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四郡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 사방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고두막한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이르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을 격파하였다. 이때 유민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전쟁을 지원하니 군세를 크게 떨쳤다. ( 『환단고기』 「북부여기」)


    열국시대列國時代 개막


    기원전 239년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하여 만주 대륙의 대부여, 즉 진조선을 대신하여 국통을 이어 갔습니다. 이때 요서에 위치한 번조선은 망명객 위만이 은혜를 배신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나라를 차지하여 위만정권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막조선의 강역인 한반도에는 최씨 낙랑국과 남삼한이 들어서면서 우리 역사는 서서히 여러 나라 즉, 열국列國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열국 시대라는 개념은 고대 제국 질서가 무너지고 그에 예속되었던 작은 나라들이 제각기 독립적인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는 시기를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단군조선 붕괴 이후 시기를 열국시대라고 부릅니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열국기列國紀」란 항목을 설정하고 동부여, 북부여, 비류국, 신라, 고구려, 남옥저, 북옥저, 예맥 등이 등장하는 시기를 일러 열국기라고 하였습니다. 이 열국시대라는 시대 구분은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와 윤내현 교수의 『한국열국사연구』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전국戰國시대의 진秦이 지속적인 개혁과 부국강병책으로 천하를 통일하는 주역으로 성장하듯이 이러한 임무를 우리나라에서는 북부여가 맡았습니다.

    한 무제의 위만정권 침공
    북부여는 4세 단군 때에 이르러 역사적인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한나라의 창업자 유방의 7세손으로 중국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한 무제 유철劉徹이 동방으로 군대를 일으킨 것입니다. 한나라는 당시 통일 제국인 단군조선 붕괴 이후 여러 나라로 갈려 있던 동방을 향하여 탐욕스런 침략의 독니를 드러낸 것입니다. 우선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번조선의 위만정권을 무너트리고 이어 북부여로 쳐들어왔던 것입니다.

    한 무제 유철
    전한前漢의 세종世宗 효무황제孝武皇帝. 줄여서 한 무제는 할아버지 문제文帝와 아버지 경제景帝가 잘 다스려 틀 잡힌 한나라를 이어받았습니다. 그는 유학을 바탕으로 국가를 통치하였습니다.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활발하게 해외 원정을 펼쳐 한족 역사상 두 번째로 넓은 영토를 확보해 한나라의 전성기를 연 인물입니다. 한 무제는 처남인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 그리고 이광李廣 등의 명장으로 북쪽의 흉노를 토벌하여 기원전 110년대를 기점으로 하여서는 흉노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한나라에게 내밀린 흉노는 서쪽으로 이동해 가 버렸습니다. 이 승리는 중국 역사상 유목 민족에게 거둔 최대 승리였습니다. 그리고 남방으로는 민월과 동월 두 왕국을 병탄 흡수하고 남월국을 멸망시키는 등 남방을 정복하였습니다.

    한 무제는 사방으로 겁 없이 영토 확장을 추구하였습니다. 기원전 109년 한나라 사신 섭하가 마중 나온 장長이라는 번조선의 고위 인사를 베어 버리고 싸움을 거는 등 한나라의 흉포함은 이런 군사적 자신감에서 나온 것입니다. 영웅심 넘치고 언제나 공격적인 한 무제는 섭하의 무도한 행위를 질책하기는커녕 칭찬하고 벼슬을 내려 주었습니다.

    당대 최강의 군대 한나라군
    그러나 한 무제나 섭하는 번조선의 힘을 과소평가했습니다. 번조선의 위만정권은 한나라를 공격하여 섭하를 죽였습니다. 이에 놀란 한 무제는 거국적인 침공군을 편성하였습니다. 기원전 2세기의 한나라 군대는 최고의 무장武裝과 전술, 그리고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와 다년간 전투로 다져진 경험을 지닌 세계 최강의 군대였습니다. 한 무제의 꿈은 진정한 동북아 대통일을 이룬 진명眞命 천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한 무제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대군이 동방으로 출진하였습니다.

    위만정권과 한나라의 전쟁 - 왕검성 전투


    위만이 정권을 찬탈한 번조선은 단군조선 본국이 해체되자 북쪽에 있는 북부여의 정통성에 정면으로 도전하였습니다. 위만정권은 요동과 황하로 이어지는 길목을 장악하고 있는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병력과 재물을 얻고, 주변에 있는 지역을 장악하면서 단군조선의 계승국임을 자처하였습니다.

    당시 북방의 흉노 제국과 대립하던 한나라는 위만정권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특별히 대접하였습니다. 하지만 위만정권은 흉노와 함께 한나라에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이에 한 무제는 기원전 112년부터 위만정권에 대한 침략을 단행하였습니다.

    전쟁의 이유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이 전쟁의 계기가 번조선의 우거왕이 조선 동쪽의 여러 부족과 한반도의 국가가 한漢나라와 교통하는 것을 차단하여 한나라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 위주의 천하관과 전쟁관에 의한 왜곡입니다. 한나라의 위만정권 침공은 한나라의 주체할 수 없는 팽창욕과 위만조선의 성장이 빚어낸 충돌의 결과였습니다. 여기에 훗날 흉노가 다시 팽창하게 되면, 흉노와 위만정권이 손을 잡아 한나라를 침략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선전하는 위만정권
    당시 위만정권의 통치자는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이었습니다. 기원전 109년 한나라는 섭하를 사신으로 보내 협박하고 협상하려 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오히려 섭하가 공격을 받고 죽어 버렸습니다. 이에 한 무제는 수륙 양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공격하였습니다. 이 전쟁은 기원전 109년 가을에 시작하여 기원전 108년 여름에 끝이 났습니다.

    한 무제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에게 수군 7천 명을, 좌장군 순체荀彘에게 5만 명을 주어 위만정권을 침공하였습니다. 하지만 번조선의 위만정권은 국경선인 패수를 중심으로 하여 수비 전략과 공격 전략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1차 전투에서 좌장군의 졸정卒正인 다多의 군대와 누선장군 양복의 수군을 격파하였습니다. 이에 한나라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다를 처형하였습니다.

    생각보다 강력한 위만정권의 군사력에 당황한 한 무제는 강화 회담을 하기 위해 사신으로 위산衛山을 보냈습니다. 위만정권이 사과를 하면 군대를 돌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우거는 주화파의 의견에 따라 전쟁 협상에 응하였습니다. 잘 싸우고 잘 버티고는 있었지만, 장기전은 부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거왕은 태자를 한나라 조정에 보내기로 하고, 화해의 조건으로 말 5천 필과 군량까지 준비했습니다. 당시 강화 협정 장소까지 태자를 호위한 군대의 수가 1만 명이었습니다. 위만정권 군대의 위용을 본 위산은 위장 협상일지 모른다는 걱정에 겁이 나서 무장해제를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위만정권의 군대는 한나라의 계략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어 강화를 취소하고 철군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협상은 결렬되고, 화가 난 무제는 위산을 처형해 버렸습니다.

    고전하는 한 무제군
    또다시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우거의 왕검성을 함락하지 못했습니다.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여기에 맹공을 주장하는 좌장군과 이에 반대하는 누선장군 사이에 불화가 생기자, 한 무제는 제남태수齊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파견하였습니다. 하지만 공손수는 임의대로 군사 체제를 바꾸는 등 무제의 심기를 건드려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에 이미 사신 섭하, 사신 위산, 제남태수 공손수가 죽는 등 한나라군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위만정권의 붕괴


    대군을 동원하여 동방을 침공한 한나라는 위만정권의 굳센 수비에 막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한나라는 위만정권에 이간책을 써 내부 분열을 조장하였습니다. 즉 조선상 로인, 조선상 한음, 니계상尼谿相 삼參, 좌장군 왕협 등으로 하여금 우거왕을 살해하게 하였습니다. 우거가 죽은 뒤에도 대신 성기를 중심으로 저항이 계속되자, 좌장군 왕협이 우거왕의 아들 장강長降과 재상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를 꼬드겨 성기를 죽이고, 백성들을 회유하게 하고 난 뒤에야 힘겹게 허베이성 창려에 있던 위만정권의 수도 왕검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이때가 기원전 108년입니다. 1년에 걸친 전쟁은 결국 내부 반란으로 위만정권의 번조선이 멸망하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한 무제로서는 실로 어렵게 이룬 상처뿐인 승리였습니다.

    위기에 처한 북부여


    겨우 위만정권을 무너트린 한 무제는 이곳에 4개의 군을 설치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한사군漢四郡입니다. 하지만 이 한사군은 설치하려고 마음만 먹었을 뿐이지 실제 설치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상술하겠습니다.

    아무튼 동방 진명 천자의 꿈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간 한 무제는 그 여세를 몰아 북부여로 쳐들어갔습니다. 서방의 그 누구도 꿈꿔 보지 못했던 동방 종주국에 대한 전쟁을 감행한 것입니다. 이때 북부여는 고우루단군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유약한 고우루단군은 한나라 대군을 제대로 막아 내지 못했습니다.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가 무너지고, 이어서 우리 민족이 사라질 수 있는 한민족 고대사 최대의 위기가 발생한 것입니다.

    고두막한, 의로운 병사를 일으키다
    이때 서압록 사람인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등장하였습니다. 서압록은 지금의 서요하로 지금의 압록강과는 다릅니다.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두막한은 단군조선의 마지막 단군인 고열가의 후손으로 일명 두막루豆莫婁라고 합니다. 고두막한은 사람됨이 호방하고 영민하고 준수하며 용병을 잘하였습니다. 그는 한나라군의 침략에 분개하여 세상을 구하려는 뜻을 세웠습니다.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돌렸습니다. 한 달이 채 되지 않아서 의로운 군사들이 5천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아마도 북부여의 천왕랑 집단이 대거 고두막한과 뜻을 함께하며 한나라 군대에 맞선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고두막한은 졸본卒本에서 나라를 세우고 즉위하였습니다. 이 졸본은 고구려 시조 고주몽이 도읍한 곳으로, 광개토태왕 비문에 나타난 홀본忽本과 같은 말입니다. 고두막한은 스스로 호를 동명東明이라 하였습니다. 동명왕이란 칭호는 ‘동방東의 광명明을 부활시킨다’는 뜻이 있습니다. 한 무제의 강군을 물리쳐 단군조선의 위엄과 영광을 되찾고자 한 구국의 의지가 나타나 있습니다. 이를 동명국 또는 졸본부여라고 합니다. 후대 삼국사기에는 동명과 고구려의 고주몽을 같은 인물로 기록해 놓았지만, 이는 잘못입니다. 동명왕은 북부여의 고두막한이고,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과는 다른 인물입니다. 동명왕 고두막한에 관련된 내용은 한민족사 국통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국 왕실의 뿌리는 북부여
    여담으로 이 고두막한의 따님이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파소婆蘇입니다. 그리고 북부여의 초대 해모수단군의 5세손이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이고, 고두막한의 뒤를 이은 고무서단군의 따님인 소서노召西奴와 고주몽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온조가 백제의 시조입니다. 즉 북부여 단군의 후손들이 모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조들임을 오직 『환단고기』에서만 명백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계속 상술하도록 하겠습니다.

    한나라군을 격퇴하다


    드디어 고두막한이 이끄는 의병들과 한나라 군대가 맞서 싸웠습니다. 배달국 치우천황과 서방의 황제 헌원의 탁록대전 이후 다시 불붙게 된 동방 한민족과 서방 한족 사이에 벌어진 일대 결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한 무제가 위만정권을 침공할 때처럼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용병에 능한 고두막한이 지휘하는 의병들에게 한나라 군대는 속절없이 무너져 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북부여기 하』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싸울 때마다 한나라 도적[漢寇]들이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여도[望風] 스스로 무너졌다(每與戰 漢寇 望風而潰).”

    고두막한의 의병들은 도망가는 한나라군을 구려하九黎河를 건너 계속 추격하였습니다. 구려하는 현 요하의 옛 이름입니다. 추격하는 고두막한의 군대는 요동 서안평西安平 지역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은 지금의 임동林東 또는 파림좌기巴林左旗라 부르는 곳입니다.

    북부여 5세 단군이 된 고두막한


    승기를 잡은 고두막한은 장수를 보내 배천裵川의 한나라군을 격파하고, 유민과 합세하여 가는 곳마다 연전연승하였습니다. 이렇게 한나라군을 격파하고 민심을 얻게 되자, 당시 북부여 단군인 고우루단군은 성읍을 바치고 항복하였습니다. 이에 고두막단군은 북부여의 후계자인 해부루解夫婁의 봉작을 낮추어 제후로 삼아 차릉岔陵으로 이주해 살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부여로 차릉을 가섭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차릉에서 고구려 시조 고주몽이 태어났습니다.

    북부여를 계승하다
    동명국의 왕으로 북부여의 뒤를 이은 고두막한은 북 치고 나팔 부는 악대를 앞세우고 수만 명의 무리를 이끌며 도성에 입성하였습니다. 나라의 이름은 그대로 북부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북부여 제5대 단군에 즉위하였습니다. 이때가 단기 2248년, 기원전 86년이었습니다. 이해 가을 8월에 한나라군과 여러 번 서압록하西鴨綠河 강가에서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고두막단군은 졸본부여 즉 동명왕으로 재위 22년을, 북부여 단군으로 재위 27년을 지냈습니다. 총 49년간 재위에 있으면서 한 무제의 강력한 군대를 이겨 내며 북부여 사직을 보존하였습니다.
    이렇게 환국 배달 단군조선의 한민족 역사가 북부여로 해서 면면히 이어져 가게 되었습니다. 환기 7138년 신시개천 3838년, 단기 2274년인 기원전 60년에 고두막단군은 붕어하고 태자인 고무서高無胥께서 즉위하였습니다. 장지는 유명遺命에 따라 졸본천卒本川에 모셔졌습니다.

    @북부여의 마지막 단군 고무서


    고무서단군은 고두막단군의 뒤를 이어 임술년인 기원전 59년에 졸본천에서 즉위하였습니다. 부로父老들과 함께 백악산에 모여 규약을 정하고 천제를 지냈습니다. 고무서단군은 태어날 때부터 신령스러운 덕을 갖추었고, 도술로 바람을 부르고 비를 내리게 하였습니다. 자주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휼하는 등 민심을 크게 얻어 소해모수小解慕漱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도 한나라군은 끊임없이 요하 동쪽에서 분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고무서단군은 여러 번 싸워서 매번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고무서단군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근심하였습니다. 이때 고주몽高朱蒙이 비범한 인물임을 알고 공주와 맺어 대를 잇게 하였습니다.

    재위 2년인 계해년인 기원전 58년 겨울 10월에 붕어하였고 고주몽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단군조선 말기인 기원전 239년 신인 대해모수가 건국하여, 위기에 처한 민족사를 굳건하게 지켜 온 북부여는 기원전 58년 고두막단군의 아들 6세 고무서단군에 이르러 짧은 역사를 끝내고, 국통은 고주몽의 고구려高句麗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북부여가 지닌 한민족사의 의미


    ‘북부여가 단군조선을 계승하였다’는 사실은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맥을 바로잡는 핵심 요체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의 강단사학계는 일제 식민사학의 각본대로 위만정권을 단군조선의 계승자로 앉혔을 뿐만 아니라, 위만정권이 망한 후에 그 땅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지역도 한반도 북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북부여는 온데간데없고, 도적 위만이 번조선을 빼앗아 세운 이른바 위만조선과 중국의 식민지인 한사군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시원 역사는 중국의 식민지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 강단사학자들은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근거로 북부여 시조 해모수를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아버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즉 ‘해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에 고주몽이 태어나 고구려를 열었다’고 하여, 해모수와 주몽을 부자지간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왜곡은 180여 년에 걸친 북부여 6대 단군의 역사를 완전히 증발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실제로 해모수는 고주몽의 고조부가 됩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기록으로 인한 역사 왜곡과 날조로 뿌리가 없는 역사를 배운 우리 대한민국의 동량들이 어떻게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세계 무대에서 어깨를 겨룰 수 있겠습니까? 북부여의 국통은 고구려를 통해 면면하게 이어져 왔습니다. 이제는 이 단절된 뿌리 역사를 온전히 복원하여 역사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할 때입니다.


    <참고문헌>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이것이 개벽이다 하』(안경전, 상생출판, 2014)
    『단숨에 읽는 한국사』(오정윤, 베이직 북스, 2013)


    부여사 왜곡 문제의 핵심
    부여夫餘는 우리 역사에서 단군조선의 붕괴와 열국 시대로 넘어가는 중간 고리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존 국내와 중국의 기록은 앞뒤 시대의 내용이 명확하지 못하고 부여사가 서로 얽혀 있어 그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그 문제의 핵심은 북부여와 동부여, 서부여가 시기와 공간이 서로 다른데도 하나의 이야기로 얽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북부여 건국자인 해모수와 고구려 고주몽의 시대가 180년 이상 차이가 나지만, 부자父子 관계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모 방송국에서 방영된 드라마에서 이 점이 특히 부각되어 버렸습니다.

    부여 역사 개관
    부여 역사 전체를 보면, 부여가 일곱 개 정도가 있습니다. 먼저 단군조선이 국호를 개칭한 대부여大夫餘(단군조선 말기 국호, 기원전 425년부터 기원전 238년까지 188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계승한 해모수단군의 북부여北夫餘(기원전 239년부터 기원전 58년까지 182년)가 있었습니다.

    그 후 한나라 무제가 쳐들어올 때 북부여 4세 고우루高于婁단군이 동생 해부루解夫婁에게 보위를 전했지만, 그 동생이 제대로 앉아 보지도 못하고 고두막한高豆莫汗에게 쫓겨났습니다. 그 뒤 해부루는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에 이주해서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기원전 86년부터 22년까지 108년)를 세웠습니다.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동부여東夫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동명왕인 고두막한이 북부여를 계승하여 5세 단군이 되는데, 이 고두막한이 북부여를 계승할 때까지 부르던 국호가 졸본부여卒本夫餘(기원전 108년부터 86년까지 23년) 또는 동명부여東明夫餘입니다.

    북부여의 본래 주인이던 해부루단군은 가섭원으로 옮겨 가서 동부여를 세웠습니다. 이 해부루의 아들은 금개구리, 즉 금와金蛙이고 손자는 대소帶素입니다. 이 3세 대소왕은 고구려의 3세 대무신열제의 공격으로 고구려 장군 괴유에게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동부여가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동부여 대소 왕의 동생인 갈사왕과 종제從弟가 각각 부여를 세웠습니다. 그것이 갈사부여曷思夫餘(22년부터 68년, 47년)와 연나부부여椽那部夫餘(낙씨부여絡氏夫餘 또는 서부여西夫餘로 22년부터 494년까지 473년)입니다.

    연나부부여는 저 서쪽으로 가서 북경 위에 있는 정주正州라는 곳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부여사는 모두 이 서부여의 역사입니다. 서부여사는 부여의 끝자락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마지막 왕인 7세 의라依羅와 그 아들 의려依慮에 대한 기록이 『환단고기』에 나옵니다. 의라왕이 일본에 갔다는 기록도 있으며, 아들 의려가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가서 응신왕應神王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연대가 잘 안 맞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 뒤 고구려 20세 장수태왕의 남진 정책으로 한성을 뺏기고 남쪽으로 이주한 백제百濟가 26세 성왕聖王 16년 때 도읍을 공주에서 부여로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고 했습니다(538년부터 554년까지 17년). 이렇게 해서 부여는 북부여, 동부여, 서부여, 남부여가 있습니다. 그리고 중부여中夫餘라고 하여 부여의 중심이라는 개념으로 한반도 중부를 일컫기도 합니다.

    그리고 후기 북부여의 동명왕 고두막한과 고주몽이 전혀 다른 인물임에도 같은 인물로 기록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역사 왜곡이 일어난 이유는 북부여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중간 역사 기록이 사라지고 핵심 내용만 전해진 것을 다시 기록하는 과정에서 착오를 많이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오직 『환단고기』 「북부여기」에서만 부여사의 전모를 명확하고 총체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위만조선과 소위 한사군漢四郡설

    우리 한국 고대사에서 가장 큰 쟁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위 한사군漢四郡 문제입니다. 본문에서도 한 무제가 위만정권을 무너트리고 한사군을 설치하려 했다는 언급을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는 이와 다릅니다.

    번조선 위만정권의 내분으로 어렵게 왕검성을 함락시킨 한 무제의 논공행상 내용을 보면 한나라가 승리한 전쟁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한나라의 좌장군 순체는 기시형棄市刑이라는 극형을 받았습니다. 이는 처형 후 시체를 길거리에 버려두고 사람들이 보도록 전시하는 것으로 제일 모욕적인 형벌입니다. 누선장군 양복은 속전贖錢을 바치고서야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여생을 평민으로 살았습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두 장수들 모두가 포상을 받은 장수는 단 한 명도 없고, 전쟁 중이나 전쟁 후에 중벌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번조선의 신하들은 오늘날 허베이성과 산둥성 지역의 제후로 봉해지는 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니계상尼谿相 삼參은 홰청澅淸 지역의 제후로, 재상인 한음韓陰은 적저荻苴의 제후로, 장군 왕겹王唊은 평주平州의 제후로, 죽은 우거왕의 아들 장강長降은 기幾 지역의 제후로, 재상인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는 죽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온양溫陽의 제후로 봉해졌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전쟁의 결과 한나라 장수는 모두 처벌을 받았는데, 적국인 번조선 위만정권의 신하들은 제후가 되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이 전쟁에서 한나라는 실질적으로 패배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 무제가 단군조선을 평정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는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은 결코 진실이 될 수 없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한나라가 어떻게 번조선, 즉 단군조선의 요동과 요서 지역을 지배할 수 있으며, 그곳에 식민지를 설치할 수 있겠습니까?

    이 한사군에 대해서 한 무제 당대의 사관인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간단하게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을 삼았다[爲四郡].’이라는 기록이 전부입니다. 한나라와 위만정권 사이에 2년에 걸친 전쟁에 대해서는 그 시작에서 마무리까지 상세하게 전하고 있는 반면, 전쟁의 결과로 설치되었다는 사군에 대해서는 그 기록이 너무나 허술합니다. 지나간 역사 기록도 현장 답사를 통해 꼼꼼하게 확인하여 동양의 사성史聖이라 추앙받는 사마천이 당대사의 기록을 이렇게 허술하게 기록하다니요. 심지어 한사군의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소위 한사군에 대한 일관성 없는 중국 측 기록
    우리가 아는 4군의 구체적 명칭은 사마천이 죽고 백 년 정도가 지난 후한 시대의 사가인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한서에서도 한사군에 소속된 군의 개수가 일관되게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기의 주석서도 한사군에 대한 기록이 상이합니다. 우리는 이 한사군의 진실을 『환단고기』 「북부여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나라 무제가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이에 동명왕 고두막한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를 격파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 한사군은 한나라의 희망 사항이었을 뿐 결코 실현된 적이 없습니다. 한사군이 설치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마천은 한사군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못한 것입니다. 심지어 단 몇 글자에 그치는 짤막한 사기의 기록조차도 과연 사마천의 서술인지 후대 사가의 의도적 삽입인지 의문이 들게 합니다.

    이렇게 실존 사실조차 의심스러운 한사군을 소위 한국의 주류 강단사학계는 확고부동한 역사적 사실로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위치조차도 한반도 내로 못 박고 있습니다. 중국 사서들은 4군의 위치를 지금의 요령성과 허베이성 일대로 기록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설사 한사군이 있다 하여도 그 위치는 지금의 대릉하 이남 지역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제는 우리의 국권을 피탈한 뒤에 우리 역사를 중국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 한사군의 위치를 평양 대동강 유역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유물 유적을 조작하기도 하였습니다. 지난날 중국 사가들과 일제 어용 사학자, 그리고 이 땅의 반민족 사가들까지 한사군 문제를 왜곡하여 우리 고대사를 중국 한나라의 식민지 역사로 만들어 버린 게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통 사서 『환단고기』와 「북부여기」의 값어치는 천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광명의 사서를 통해서 우리 역사를 그늘지게 했던 식민사학의 반도 사관이 드리운 어둠의 장막이 걷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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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02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