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것이 바로 증산도였구나 외 (신명화, 이금 영, 김찬주, 박승직)

[입도수기]

아, 그것이 바로 증산도였구나


신명화(여, 50) / 안산상록수도장 / 150년 음력 11월 입도

강요나 구속하는 믿음이 싫어서


저는 1972년 강원도 철원에서 아버지 신동국과 어머니 유순님의 사이에서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가정이 많이 어려웠던 부모님은 누에를 치며 4남매를 키우셨습니다. 사는 것이 넉넉지 않아 부모님께서는 경기도 부천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곳에서 맞벌이를 하시며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가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7살, 제가 11살 되던 해 어머니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고, 아버지 홀로 직장 생활을 하시며 저희 4남매를 키우고 힘든 가정을 어렵게 꾸려 나가셨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도와 집안일과 동생을 돌보는 일을 했고, 주말이 되면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노래부르고 교회에서 나누어 주는 사탕과 과자 간식들을 받아먹으며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어린 맘에 교회라는 곳은 간식 먹으며 친구들과 놀러 가는 곳이라고 철없이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헌금이라는 것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어렵게 살던 우리 집 형편에서 주말마다 내야 하는 헌금이 어린 저에겐 부담스러웠고, 간식을 받아먹는 것도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강요하며 돈을 걷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종교와 신앙, 믿음이라는 것은 어떠한 물질적인 보상이나 강요가 없는 순수하고 진실된 맘으로부터 우러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에게 그런 맘을 우러나오게 할 만큼 교회라는 곳은 그리 깊은 신뢰를 줄 수 없었답니다.

저는 그 후 무종교 상태로 30년 이상을 살아왔습니다. 삶을 살아가며 힘들 땐 저도 모르게 “하느님 아버지” 하고 조용히 불러 보기도 했지만, 일상에서 접하는 기독교나 불교 기타 종교들은 저의 눈에는 그냥 이기적인 종교 집단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는 쭈욱 부를 축적하고 이익을 챙겨 가며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나 신앙을 거부해 온 것입니다. 저는 믿음이나 신앙은 강요나 구속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과 함께 상생방송을 보다


그런 저에게 신뢰를 느끼게 해 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지금 저의 신랑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남편만큼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있는 듯 없는 듯, 늘 저의 곁에서 울타리가 되어 주는 사람. 늘 대화가 되고 이상이 넓고 깊은 사람이었으니까요.

어느 날 남편이 상생방송을 보더군요. 저도 자연스럽게 방송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시청을 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도복 입은 도생들이 아침 수행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증산도가 뭔지도 모르고 저런 사이비 종교 단체들도 TV에 나오는구나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아침마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주문을 귀로 들으며, 아침을 맞이하는 어느 날부터 맘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원래 몸이 안 좋으면 가위에 잘 눌리는 편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이 증산도를 접하고 나서부터 가위에 눌려 귀신에게 밤새 시달리는 일이 없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편이 아침마다 주문수행을 하더군요.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습니다. 그냥 존중해 주었습니다. 남편이 어떤 믿음이 생겼구나 하고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보기 좋더군요. 수행을 하면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길래, 저 또한 맘이 편안하고 좋았습니다. 남편이 입도를 하고 천도식을 올리고 행복해하며 편안해지는 것을 보니, 맘이 너무 좋았습니다. 남편은 저에게 말했습니다. 저에게 믿음을 강요하거나 설득하지는 않겠다고, 스스로 믿음이 생기고 신뢰할 수 있을 때 시작하라고.

조상 봉경하는 증산도가 가져다준 믿음


그런데 증산도라는 곳은 저에게 신뢰를 주더군요, 저는 어려서부터 웃어른을 공경하고,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서로 양보하며 두 개가 있으면 하나씩 나누고, 하나가 있으면 반으로 나누며, 베풀고 살자라는 인생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조상숭배, “제사를 잘 모시자”였습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인지 어려서부터 제사를 지내 왔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동생과 다락방에서 잠을 자다 연탄가스에 중독이 되어 죽음을 맞이할 뻔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 꿈에는 나타나지 않으셨지만 제 동생 꿈에 어머니께서 나타나셔서 “어서 일어나라”라고 나무라며 깨웠습니다. 동생이 의식을 찾으며 다락방 밑으로 굴러떨어지자 식구들이 놀라 깨어났고 의식이 없던 저를 들쳐 업고 병원으로 향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안 깨우셨다면 동생과 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때부터 무언가 있긴 있구나 하고 생각을 하며 제사를 더 잘 모시게 되었습니다. 기일에 제사를 안 모시면 굶고 계실 것 같아서 맘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증산도라는 곳은 너무나도 지극한 공경과 정성으로 조상님을 받드는 것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종교나 단체들은 명절이나 기일이 되면 간단히 예만 갖추고 해외여행이나 놀러 가기 바쁘지만 증산도는 많은 정성과 공경으로 치성을 올리는 것을 보고 놀라웠습니다. 증산도란 과연 뭘 하는 곳일까 하고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잘 모릅니다. 앞으로 조금씩 알아 가고 싶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니 옛날 할머니께서 정화수 떠놓고 기도하는 모습이 떠오르며 아! 그것이 바로 증산도였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얼마 전 안산에서 38년을 살다가 포천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나이를 먹으니 땅을 밟고 텃밭을 가꾸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그곳에서 남편은 가가도장을 열었습니다. 매일매일 청수를 올리며 증산 상제님, 태모 고수부님, 태을천 상원군님, 태상종도사님, 종도사님,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한 조상 선령신을 부르며 기도드리고 있답니다. 부부는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한곳을 바라보며 인생 동반자로 살아가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남편이 바라보는 그곳을 저도 같이 바라보며 믿고 살아가려 합니다.

입도식을 올리는 양력 12월 26일은 저의 49번째 생일입니다. 제 생일인 이날에 증산도 입도식을 올린다는 것은 제겐 아주 의미가 큽니다. 이생에서의 생일과 입도식 일자가 겹치는 아주 희귀하고 영광스러운 날이 되는 것이죠! 증산도 입도식을 통하여 다시 태어났다는 각오로 증산도인의 길을 가 보려 합니다. 안산상록수도장 수호사님을 비롯한 여러 도생님들께 인사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

내 인생에 희망을 심어 준 진리


이금영(여, 81) / 평택합정도장 / 150년 음력 11월 입도

내가 증산도인이 된 이유


누가 뭐라 해도 저는 증산도 사람입니다. 누가 물었습니다. 어디를 그렇게 정성 들여 다니느냐구요. 저는 말했습니다. 증산도에 진리 공부하러 다닌다구요. 그러니까 그분이 하는 말이 “이 세상에는 진리를 가르치는 데가 아주 많은데 왜 하필이면~”

“증산도는 지구 대변혁의 개벽철에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 살리는 진리의 길입니다. 살아야지요, 증산도를 믿으면 살아남을 희망이 있다구요~.” 저는 제가 증산도에 오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 그 어떤 운명이 미리 예비해 놓은 꼭 가야 할 길이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증산 상제님을 만나게 된 계기는 『생존의 비밀』이라는 위대한 책을 만나면서부터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 때문에 항상 기분이 찌뿌둥해 있었습니다. 『생존의 비밀』을 읽자마자 병란개벽이 진짜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살아남으려면 증산도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하는 생각이 들어 제가 『생존의 비밀』을 만난 것이 천만다행이고 제 인생에서 새 삶을 만나는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이 아프도록 시청한 상생방송


저는 기독교 성경도 많이 읽고 불교 지장경도 오랫동안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러나 『생존의 비밀』을 읽는 순간 머릿속에서 말할 수 없는 희열과 삶에 대한 긍정적 희망이 벅차오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도전 속의 진리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날부터 STB 상생방송을 갈급한 마음으로 열심히 시청했습니다. 증산도 종도사님을 TV로 만나게 되어 기뻤습니다. 그분이 상제님을 따라 후천선경으로 증산도의 일꾼들을 이끌고 앞장서서 새 세상을 열어 나가실, 내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바로 그 사명자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와 제 가족, 그리고 저와 인연이 있거나 인연이 닿았던 사람들 모두를 널리 구원해 주실 거라고 믿고 그분을 따라 상제님 태모님께로 가겠다고 굳게 다짐하면서, 날마다 STB 상생방송을 눈이 아프도록 봤습니다. 상생방송을 통해 기독교, 불교에서 몰랐던 진리 세계가 막 쏟아져 나와 저의 부족한 가슴속을 채우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내가 증산도에 참 잘 왔구나~, 이곳이 내가 알고 싶었던 참진리의 길이구나, 내신앙의 종착지는 여기구나 하고 감탄을 하면서 끝까지 증산도와 함께 가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저는 증산도에 와서부터 무엇인가 신비한 삶의 희망을 느꼈습니다.

한 달 반 만에 체험한 치유와 기적


저는 무엇보다 태을주를 알게 된 것이 제일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을주에는 천하의 복록과 수명이 들어 있고, 이 주문으로 자기 자신도 살고 또한 가족과 이웃도 살릴 수 있다. 더구나 개벽철에는 태을주를 읽어야 살길을 찾을 수 있으며, 태을주 수도를 안 하면 개벽철에 낙엽이 되어 살아남을 수 없다, 태을주를 읽으면 읽는 만큼 자기 몸과 영혼 속에 생명의 뿌리 기운이 축적된다라는 상제님, 태모님의 말씀들은 읽을수록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을주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심령과 혼백을 안정케 하여 성령을 접하게 하고 신도를 통하게 한다는 태모님의 가르침에 따라 증산도를 알자마자 제일 먼저 태을주를 금방 외워서 모든 것을 제쳐 놓고 밤낮으로 태을주를 읽었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수년간 고생해 왔던 좌골신경통이 신기하게도 70% 정도 나아졌습니다.

그리고 제 남편은 당뇨합병증으로 몇 차례나 119에 실려 중환자실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었는데, 지난 12월 5일에 급작스레 엎어져서 온몸을 떨면서 말도 못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저는 남편이 죽는 줄 알고 울며불며 급히 119를 불러 병원에 입원시켜 검사를 받은 결과 뇌경색 판정을 받았습니다. 오른쪽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한 채 꼬집어도 모르고 말도 못 하는 상태였습니다. 의사들은 수술을 해서 막힌 혈관을 뚫어야 하니 자식들에게 알리라면서 중환자실에 입원시켰습니다.

저는 남편이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될까 봐 미친 듯이 상제님께 살려 달라고 기도하면서 쉬지 않고 태을주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12월 6일 남편은 정신이 돌아왔으며 말도 하게 되고 팔다리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혈관으로 뇌신경에 관한 약을 쓰면서 태을주를 계속 읽었습니다.

또한 하루에 물을 3리터 넘게 마시면서 밥도 하루 다섯 끼에 간식까지 더 먹고 종일 화장실을 드나들며 괴롭힘을 받던 남편의 당뇨병 치료에 있어서도 금방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결국 뇌경색으로 입원한 지 8일 만에 퇴원해서 지금은 집에서 약만 드시고 정상적인 식사를 하면서 매일같이 걷기 운동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기적 같은 사실은 제가 증산도를 만나서 한 달 반 만에 체험한 사실입니다. 그때마다 내가 증산도에 참 잘 왔구나, 여기가 내가 알고 싶었던 참진리의 길이구나, 내 신앙의 종착점이 여기구나 하고 감탄하면서 끝까지 증산도와 함께 가려고 결심했습니다. 제가 상생방송을 시청하면서 보니까 어떤 분은 2년이 지나서야 참진리를 깨달았다고 하는데, 저는 증산도가 이런 곳이구나, 증산도의 기도와 주문은 치료 효과를 빠르게 하고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구나 하는 생각을 이렇게 빨리 갖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쓸모 있는 사람으로 바뀐 나의 삶


제가 『생존의 비밀』이라는 책을 만나게 된 그날부터 저의 인생에 새로운 희망을 심어 주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 황 포감님께 잊을 수 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생존의 비밀』을 보고 나서 바로 코로나가 가을개벽기의 징조인 느낌이 들어 증산도에 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일심으로 저를 개벽으로부터 건져 내려고 증산도의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또 태을주 단주를 팔목에 MP3를 앞가슴에 걸어 주시면서 태을주를 날마다 읽게 하신 증산도의 훌륭한 일꾼들, 포정님, 한 법사님, 정 포감님, 황 포감님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증산도의 진리를 알게 하려고 책을 주고 말로도 인도해 주시며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증산도를 닦을 수 있게끔 도와주신 황 포감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이 나이에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인데요.”라고 했더니, 포정님께서는 예전에 어느 조상님이 지극정성으로 조상님께 효도하신 공덕을 닦았을 거라고 말씀하시며 제게 긍정적인 힘을 심어 주셨습니다. 청수 정성껏 모시고 열심히 기도하시라고 당부하면서 상제님의 진리로 이끌어 주신 포정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쉼 없이 상제님 진리를 포교하시고 억조창생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종도사님께서 길이길이 빛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상제님이시여 태모님이시여 태을천 상원군님이시여 태상종도사님이시여 종도사님이시여 저에게도 천지조화 도공을 크게 내려 주셔서 사람 살리는 일에 일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보은! ◎

불변의 신앙을 찾아 준 상생방송


김찬주(여, 68) / 인천주안도장 / 150년 음력 11월 입도

화병으로 인해 온몸이 아팠던 세월


저희 아버지는 아홉 살 때, 어머니는 여덟 살 때 각기 할머니, 할아버지를 따라 조선에서 중국으로 오셨습니다. 저는 흑룡강성 연수시延壽市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집에서는 한국말을 하였는데 학교에 가니까 중국말을 하여서 저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부를 못해서 학교에서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스물한 살이 되어서야 고등학교를 마쳤습니다.

결혼을 해서 남편, 그리고 시어머니와 대련에 가서 김치 장사를 했습니다. 남편은 원래 노는 걸 좋아했는데, 장사가 잘되니까 도박을 했습니다. 그로 인한 화병으로 손과 발, 온몸이 오그라들어 너무너무 아팠습니다. 그래도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니까 남편이 나가서 장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장사를 하면서 지나는 사람한테마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빵을 파는 아줌마가 “기공氣功하는 데 가면 뿌리까지 캐서 낫는다.”고 하였습니다. 그곳에 찾아가서 저녁 시간을 이용해 두 시간씩 이틀을 하니 조금 나아졌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처음엔 병든 닭 같았는데, 많이 나아졌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기공하는 데서 불교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 후로 아프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도 모르면서도 기공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다들 나았다고 밥을 사 준다고 하며 고마워했습니다. 휴일 어느 날 아침 같은 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이 아팠습니다. 전날 저녁에 계란하고 부추를 볶아 먹고 탈이 난 것입니다. 이번에는 부적이 없어서 손으로 했습니다. 누우라고 해서 손으로 했더니, 손이 지나가면 시원하니 좋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손을 털어 내야 되는 줄 모르고, 다 나았다고 하니 그냥 끝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손에 그 사람의 독이 옮아서 마치 고춧가루 만진 듯이 화끈거리고 따갑고 아팠습니다. 기공하러 다닌다고 남의 병을 고쳐 주었는데 그 병이 나에게 오니까 더 이상 할 수가 없어서 그만두고 절에 다녔습니다.

불교의 경전도 읽어 보았지만


대련大連 기차 정거장 옆에 절이 있어 그곳에 갔더니 여든이 넘으신 시종하는 할머님이 계셨습니다. 그분과 이야기도 나누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도와주다 보니 어느새 저의 손과 발의 통증이 사라져 갔습니다. 절에서 금강경 외 다른 경전들도 천 번씩 읽으면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생각하기를 나중에 늙어서 시간이 나면 외워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불교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불교에 귀의했습니다.

그런데 시누이가 한국의 대구에 시집을 간다고 하여 남편이 한국에 가기 위해 수속을 밞았습니다. 저는 더 이상 대련에서 장사할 수가 없어서 목단강 집으로 와서 절에 다녔습니다. 스님한테 설법도 들었습니다. 절에 일이 있으면 일하러 가고 하면서 금강경 등 다수의 경전을 천 번씩 읽는다고 다짐했는데, 언제 하겠나 싶어서 절에 안 나가고 그것을 외웠습니다.

남편은 그 전에 한국에서 4년 만에 돌아왔고, 2016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들이 먼저 한국에 일하러 혼자 가 있었기 때문에 아들을 도와주러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에 와서는 잔디 심는 일을 했습니다.

상생방송을 보고 진리를 찾아 나서다


그러다 지난해(2019년)에 잔디 심는 일을 하던 도중 무 뽑는 일을 하다가 넘어져서 다리를 다치는 일이 생겼습니다. 침을 맞고 일을 못 나가서 불교방송을 시청했는데, 채널을 돌리다가 보니 상생방송에서 주역周易 강의가 나오는 걸 보았습니다. 주역은 중국에 있을 때부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방송을 보면서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프로그램보다도 더 상생방송에서 나오는 증산도 진리 말씀이 좋고 재미있었습니다. 그 후로 불교방송은 안 보고 상생방송만 봤습니다.

대전, 서울, 부산 어디 어디에서 콘서트를 한다는 말이 계속 나왔습니다. 저는 한국말이 서툴러서 무슨 소리인지는 몰랐지만, 가고 싶었습니다. 작년 동짓날 대전에 가 보고 싶은데 어떻게 가는지를 몰라서 인천 고속버스 터미널에 가서 물어보았습니다. “대전 터미널에 내리면 어떻게 해야 상생방송에 갈 수 있느냐”고 했더니 모른다는 겁니다. 가고 싶은데 아는 사람이 없어서 못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상생방송에서 중국어 도전이 나왔습니다. 올 2월에 중국어 도전을 사고 싶어서 부평에 있는 서점에 가서 물어보니 없다고 해서 중국어로 된 증산도 도전을 주문하였습니다. 며칠 후 가 보았지만 나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도서관에 갔더니 증산도 도전이 한 권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자로 된 주문을 찾아서 베꼈습니다. 며칠을 베껴 공원에 가서 날이 깜깜하게 어두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문을 외웠습니다.

변함없는 신앙을 결심하며


8월 15일이 되면 대전에 모임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상생방송 안내 전화번호에 전화를 했습니다. 대전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지금은 가도 못 들어간다고 했고, 중국어 도전을 보내 달라고 했더니 없다고 하면서 대신 인천주안도장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다리가 아파서 침을 맞고 물어물어 주안도장에 찾아갔습니다.

11월 하순부터 주안도장 수호사님과 면담을 하였습니다. 상담을 마친 후 곧 입도 공부를 하자고 하셨고, 며칠 후에 전화를 받고 도장에 갔더니 한 분이 더 있어 함께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수호사님과 포감님께서 번갈아 가면서 교육을 해 주셨는데, 공부를 하니까 방송에서 본 생각이 나서 이해가 빨리 되었습니다. 제가 사고 싶었던 중국어 도전과 심고문이 나오는 라디오를 수호사님이 사다 주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수호사님이 작은 책도 2권 주셨습니다. 그래서 공부 끝나고 집 근처 버스 정거장에 가서 의자 위에 책 3권을 나란히 놓고 앉았습니다. 어떤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와서 옆에 앉았는데, 증산도 책이라고 설명해 줘도 시큰둥하니 반응이 없었습니다.

아침 6시와 저녁 8시에 수행을 함께 합니다. 주문을 외우려고 자꾸 봤습니다. 어느 날은 상생방송을 보니 어떤 분이 나와서 말하는데, 청수를 모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날 당장 청수를 모셨습니다. 유리병에 청수를 떠다가 TV 앞에 모시고 있습니다.

전에는 아침마다 누런 콧물이 엄청나게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계속 TV에서 수행하는 걸 따라서 하다 보니 지금은 나오지 않습니다. 또 피곤하고 힘들면 혀가 쪼그라들어서 침을 맞곤 했었는데, 작년 10월 매일 TV를 보면서 태을주를 따라 하다 보니 혀가 편안해졌습니다.

가족들은 신앙에 관심이 없어서 진리를 어떻게 전해 줘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큰동생은 당뇨병이 있고 둘째 동생은 다리가 아프다 하여 두 동생에게 태을주를 읽어 보라고 권했지만 읽지를 않아 속상했습니다. 우선, 제가 열심히 공부하여 가족들을 입도시키고 우주 가을개벽기에 사람을 많이 살리겠습니다. 멀리 중국 땅에서 서럽게 살아오면서 우연한 기회에 대한민국에 와서 증산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변함없는 신앙을 하겠습니다. ◎

영혼의 한을 풀어 준 상제님 진리


박승직(남, 76) / 안양만안도장 / 150년 음력 11월 입도

병란 콘서트 방송에 감동을 받고


저는 코로나19로 부득이 교정 치료를 하는 사업장 문을 닫고 임시휴원 기간 중 무료하여 TV 채널을 돌리다 평소 시청하지 않던 상생방송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화면 영상에 때마침 “태을주는 만병통치~(도전 7:75)”라는 말씀과 동의보감에도 처방 기록이 있다는 내용들이 담긴 안경전 종도사님의 <개벽문화 북콘서트 특집 병란 편>이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저의 직업이 한의학 계열 건강관리 업종인지라 왠지 귀가 솔깃하여 채널을 고정한 채 끝까지 시청을 하였습니다.

방영 내내 현재 지구촌에서 일어나고 있는 환경과 변화의 문제, 그리고 도처에서 일고 있는 역사적 상황들이 일목요연하게 꾸밈없는 실제 상황 사실 그대로 보여져, 눈을 떼지 못하고 매우 흥미롭게 감동을 받으며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증산도는 종교가 아니다. 무극대도다’라는 말씀을 이해하면서도 저와 온 가족 모두 기독교 신앙으로 뿌리를 이어 온지라, 아직 직접 받아들이기에는 타 종교에 대한 선입견과 이질감, 그리고 거부감과 부정스런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지우려 하는데도 왠지 모르게 코로나와 맞물려 병란 콘서트 장면이 계속 떠오르고 언제 외웠는지 태을주가 저도 모르게 입에서 맴도는 듯하였습니다. 궁금한 나머지 종로의 대형 서점에 일부러 나가서 『도전』과 『생존의 비밀』, 『이것이 개벽이다』 등의 서적 몇 권을 구입했고, 혹시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 봐 식구들 눈에 안 띄는 사무실에 나와서 읽었습니다. 읽다 보니 보기도 편하고 내용도 흥미로운 데다가 재미가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읽었습니다. 군데군데 궁금한 부분들이 있어 체크하고 더 깊이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인근 도장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근처엔 없고 그나마 가장 가까운 안양만안도장이 있어 전화를 하고 방문 약속을 잡았습니다.

어디 가서 뿌리를 찾을 것인가


찾아간 도장에선 송영대 수호사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셨고, 이해되지 않고 궁금했던 질문들에 대해서는 시간을 내서 친절하고 시원 명쾌하게 상담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조심스러웠습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이고 섬기는 교회에서도 상당한 직분(은퇴 장로)이 있는 터라, 주변에 잘못 알려지게 되면 파장이 커질 수 있으니 신중하게 조심하고 판단을 잘하자고 생각했습니다.

그중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조상 선령에 대한 제사였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제사는 마귀 사탄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우상숭배입니다. 기독교인 모두 제사를 안 드리고 설날과 추석, 가족 행사와 기일 등에도 상차림 없이 부모나 조상이 아닌 하나님 앞으로 추모 또는 예배만 드릴 뿐입니다.

하지만 증산도에서의 제사는 첫째가 상제님께, 그리고 우리 부모 조상 선령님께 드리는 당연한 보은 의식으로 말합니다. 그동안 예배만 잠시 드리면서 제 속에 간직한 채 풀지 못했던 부모님에 대한 못다 한 공경과 불효에 아쉬움을 달랬고 채워 줌이 없는 안타까움이 항상 남았습니다. 그런데 “조상은 아니 위하고 나를 위한다 함은 부당하나니 조상의 제사를 극진히 받들라.(도전 2:26:9)” 하신 상제님 말씀에 번뜩 정신이 들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이를 속히 해원하고 회복하기 위해 단계 절차를 생략하고 우선 저 혼자라도 먼저 부모님 산소에 올라가 약소하나마 제물을 차려 놓고 부모님께 절을 하고 자주 찾을 것을 약속드리며 천도식도 올려드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습니다. 또 입도식도 지체하지 않고 빨리 해야 하는 등 급한 마음이 앞섰지만 실행하자니 제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막상 직계 관련 족보가 없어 제 가족과 조상이 누구인지 잘 모르고, 그리 많았던 친척들도 부모님 돌아가신 이후부터 모두 흩어져 생사도 모르다 보니 흔적조차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어디에 가서 뿌리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함을 수호사님께 호소하자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적등본을 떼 보면 어느 정도 윗대의 윤곽이 나오니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동사무소에서 제적등본을 발부받아 보니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몰랐던 부모님의 출생사와 제 어머니가 두 분이나 나란히 기재되어 있어 너무 놀랐습니다. 나를 낳고 또 나를 기르신 분이 두 분이었다니...

제가 갓난아이 시절 일이라 기억을 할 수 없으니 이를 확인하고 증명할 방법이란 등본 외엔 더 자세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상생방송 시청을 계기로 송 수호사님을 만나 상담과 지도를 받은 후, 가족 모르게 한 주에 일만 독 정도의 태을주 수행을 했고, 상생방송의 아침 저녁 수행을 어설프게나마 따라 했습니다. 그 덕분이었는지 이후 우연하게도 제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부모님들끼리 같은 고향 동네에서 한 식구처럼 이웃사촌으로 살아왔던 고향 선배를 만났습니다. 저희 집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최수창 형님의 연락처를 알게 되어 고향을 떠난 지 50여 년 만에 만나 가족사에 대해 아는 대로 알려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형님은 80세가 넘었음에도 신이 나서 바로 엊그제 일같이 전해 주시는데,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 사실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얘기들을 듣는 순간 믿기지 않던 수수께끼 같은 궁금증이 바로 해소가 되고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여정의 원인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족의 비밀을 찾고 한의 응어리를 풀다


어린 시절 제 위로 형과 누나가 병으로 일찍 죽은 일, 친어머니가 계속 집안에 있으면 허약한 저까지도 죽는다며 어머니를 친정으로 돌려보낸 일, 세 살 때 새어머니가 들어와 동생들을 낳은 뒤 자라면서 동생들과 차별을 심하게 하신 일, 동생들이 친형도 아니라고 말했던 일, 모두 장성해 결혼한 후 무슨 사업을 한다고 걸핏하면 찾아와 집을 담보로 대출받고서는 이자는커녕 원금조차 갚지 않아 은행 경매로 동생들 빚을 다 떠안고 살아온 점, 아내가 당신 어머니는 친엄마가 아닌 것 같다며 친엄마라면 이럴 수가 없다고 누차 말을 꺼내도 별 뚱딴지같은 소릴 한다며 아내를 나무랐던 일 등등.. 이제 생각하니 그렇게 차별을 당했던 일들과 아내의 우스갯소리 같은 말들이 설마 사실일 줄이야!

본래 병약하게 태어나기도 했고 순박한 심성이라 영악스럽지 못하고 눈치가 없다는 소리를 수없이 들어 가면서도 주어진 삶을 남과 시비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몸이 허약하여 1년 휴학을 하고 나니 친구들에게 후배라고 왕따와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사춘기 청년기에는 당시 난치병이던 중증 폐결핵으로 목과 입에서 피를 토했지만, 어른들은 안타까워만 하셨을 뿐 약은커녕 보신도 못 하며 살았습니다. 군대에서도 고된 군 생활로 1년 6개월 만에 지병이 탄로가 나 결국 병가사 제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괴로움이나 고난의 시달림을 견뎌 왔던 것은 고통도 감사하게 생각하며 제게 주어진 복으로 여기는 기독교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좀처럼 환경이 나아지지 않아 여전히 힘든 삶에 지쳐 가고 있을 때 상제님 진리를 접하게 되면서부터 제 가슴과 영혼 속에 깊이 박힌 한의 응어리를 풀게 된 것입니다.

선령을 해원시키고 가가도장을 이루고 싶어


‘태을주를 읽어야 뿌리를 찾느니라.’ (도전 7:74:5)
‘태을주는 뿌리 찾는 주문이요 선령 해원 주문이니라.’ (도전 9:199:7)


상제님 진리 말씀인 도전을 통하여 가족의 숨겨진 비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응어리지고 원과 한이 많았던 선령들의 얽혀 있는 문제가 있다면 풀 수 있도록 모든 절차를 순차적으로 이뤄 나가겠습니다.

끝으로 간절히 원하는 바람이 있다면 사랑하는 가족 모두가 가슴이 열려 자연스럽게 상제님 진리를 맞이하고 입도하여 가가도장을 이루는 것입니다.

저 또한 오랜 기독교 신앙의 흔적으로 다소 제약 요소가 있지만, 속히 어깨에 걸려 있는 무거운 옷을 벗고 상제님께서 주시는 깃털 옷을 입고 마음껏 상제님 천지공사 대열에도 참여하고 싶습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지도해 주신 송영대 수호사님, 그리고 상생방송과 온 우주의 주인이신 상제님 은광에 감사드립니다. 태을주를 읽어야 뿌리를 찾느니라! 제 뿌리를 찾도록 이끌어 주신 조상님들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