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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인물탐구]

    창세역사 성인열전 |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北夫餘의 시조, 대해모수大解慕漱

    이해영 / 객원기자

    *「고기古記」에 이렇게 말하였다. 전한서에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BCE 59년) 4월 8일에 천제자天帝가 오룡거를 타고 흘승골성訖升骨城에 내려와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일컬으며 국호를 북부여라고 하였다. 스스로의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했는데, 해解를 씨로 삼았다. 왕은 이후에 상제上帝의 명에 따라 동부여東扶餘로 도읍을 옮겼다.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卒本扶餘라 했으니,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제일紀異第一 북부여北扶餘 조)


    대부여大夫餘에서 북부여北夫餘로


    단군조선의 삼한관경제가 붕괴되면서 대단군의 통치권이 약화되었습니다. 부단군과 지방 군장들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이렇게 혼란한 단군조선 말기에 한민족사에서 가장 중대한 새 역사가 개창되었습니다. 바로 해모수가 단군조선의 국통을 잇는 북부여北夫餘를 건국한 일입니다.

    해모수의 기병
    해모수解慕漱는 서압록西鴨綠에 위치한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리국 출신입니다. 서압록은 지금의 요하 상류에 위치한 지역입니다. 때는 단군조선 47세 고열가단군 재위 57년인 단기 2095년이었습니다. 기원전 239년인 이해에 혼란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해모수는 지금의 길림성 서란舒蘭 소성자小城子인 웅심산熊心山에서 기병하여 난빈蘭濱에 제실帝室을 지었습니다. 스스로 단군이라고 칭하였습니다. 북부여 시대에도 역대 임금들은 단군조선의 제도를 계승하여 스스로 단군이라 칭하였습니다. 단군조선의 진조선이 망하기 1년 전인 임술년 4월 8일의 일로, 이때 해모수는 23세였습니다.

    천왕랑 해모수
    당시 해모수는 머리에는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龍光劍을 찼으며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다니며 따르는 인원이 5백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해모수단군은 본래 타고난 기품이 영웅의 기상으로 씩씩하고, 신령한 자태는 사람을 압도하여 바라보면 마치 천왕랑天王郞 같았다고 합니다. 천왕랑은 배달국의 제세핵랑, 단군조선의 국자랑의 맥을 잇는, 한민족 역사 개척 정신인 낭가 사상을 계승한 핵심 일꾼입니다. 해모수를 따르는 인원들 역시도 문무를 겸전하고 삼신상제님의 도로 백성을 교화하고 형벌과 복을 주는 일을 맡은 천왕랑이었을 것입니다.

    나라 이름은 북부여

    해모수단군은 나라 이름을 ‘북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으로 북부여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단군조선은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었기 때문에 이를 계승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중 해모수단군은 대부여의 강역 중에서 북녘땅(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나라를 열었기 때문에 ‘대大’ 자를 ‘북北’ 자로 바꾸어 북부여라 한 것입니다. 이는 망해 가던 단군조선, 즉 대부여의 정통을 계승하여 한민족의 새 시대를 열겠다는 해모수단군의 의지 표명이었습니다.

    대해모수의 치적


    해모수는 북부여를 연 뒤 여러 가지 치적을 남겼습니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재위 2년인 계해년(기원전 238년) 3월 16일 대영절大迎節을 맞이하여 삼신상제님께 크게 제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연호법煙戶法을 만들어 백성을 살폈습니다. 연호는 밥 짓는 연기를 인가人家의 상징으로 삼은 말로, 호戶나 가家와 같은 뜻입니다. 이후 해모수 단군은 오가五加의 군대를 나누어 배치하고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국방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둔전은 각 지방 주둔병의 군량을 자급하고 각 관아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미간지를 개척해 경작하도록 한 전답을 말합니다. 이는 기본적인 행정력과 국방력을 재건하여 단군조선 말기 혼란한 상황을 수습한 것으로 보입니다.

    재위 8년인 기사년 기원전 232년에는 해모수단군이 무리를 거느리고 옛 수도에 갔습니다. 단군조선 말기에 시행된 오가에 의한 공화정을 철폐하고자 오가들을 설득하였습니다. 마침내 설득에 성공하고 해모수는 오가의 공화정共和政을 철폐하였습니다. 이때 나라 사람들의 신망을 얻어 단군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로써 명실공히 단군조선의 뒤를 잇는 나라는 북부여라는 점을 만천하에 공포한 것입니다.

    이해 겨울 10월에는 태아를 가진 임산부를 보호하는 법, 즉 공양태모지법公養胎母之法을 만들고, 사람들을 가르칠 때 반드시 태교부터 시작하게 하였습니다. 재위 20년인 신사년(기원전 220년)에는 백악산 아사달에서 천제를 지냈습니다. 이해 7월에는 궁궐 366칸을 새로 짓고 이름을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습니다.

    재위 45년에 위만이 번조선에 망명을 구하였을 때, 이를 막으려 하였지만 이미 병이 깊게 들어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이해 단기 2139년인 기원전 195년 겨울에 붕어하였고, 웅심산 동쪽 기슭에 장사 지냈습니다. 해모수의 뒤를 이어 태자인 모수리慕漱離단군이 즉위하였습니다.

    전前북부여 단군들의 치적


    북부여는 크게 해모수단군이 연 북부여가 있고, 후에 한 무제의 침입을 격퇴한 영웅 고두막한에 의해 열린 북부여가 있습니다. 그래서 해모수단군의 북부여를 전前북부여, 고두막한의 북부여를 후後북부여라고 하겠습니다.

    2세 모수리단군
    모수리단군은 25년 동안 재위하였으며 이때 번조선이 위만에게 패망하는 일대 사건이 있었습니다. 번조선은 중국과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으며 전국 칠웅과 겨루며 단군조선의 방패 노릇을 하였습니다. 훗날에는 진조선의 내정에도 개입하기도 하였으며,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하는 데 힘을 보태기도 하였습니다.

    북부여에서는 위만의 위험성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모수리단군은 상장上將 연타발延陀勃을 보내 평양(지금의 만주 요령성 해성 지역)에 성책을 세워 위만에 대비하게 하였습니다. 이듬해인 재위 3년에는 해성海城을 평양도平壤道에 부속시켜 동생인 고진高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때 요령성 해성 이남의 요동반도와 평안도 지역을 중부여中夫餘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방어에 필요한 군량 조달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겨울 10월에는 수도와 지방을 나누어 지키는 법을 제정하여 수도는 임금이 친히 군사를 거느려 방비를 총괄하게 하였고, 지방은 사방 네 개 구역으로 나누어 오가가 엄중히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윷놀이에서 말판 싸움을 보는 듯하였고, 하도로써 변화의 법칙을 알아내는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모수리단군은 재위 25년에 붕어하였고, 태자 고해사高奚斯께서 즉위하였습니다.

    3세 고해사단군
    고해사단군 재위 원년인 임신년(단기 2165년)에는 낙랑 왕 최숭이 해성에 곡식 3백 섬을 바쳤습니다. 최숭은 해모수단군 재위 45년 병오년 겨울에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에 이르러 지금의 평양인 백아강 왕검성에서 낙랑국을 세운 바 있습니다.

    북부여와 위만과의 대립은 일촉즉발이었습니다. 재위 42년에는 고해사단군이 친히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남려성南閭城에서 위만을 격퇴하고 관리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이후 재위 49년에 붕어하니 태자 고우루高于婁께서 즉위하였습니다.

    4세 고우루(일명 해우루)단군
    고우루단군 시절에는 북부여의 국력이 쇠잔해졌습니다. 재위 원년인 신유년(단기 2214년 기원전 120년)에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를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할아버지인 모수리단군의 아우인 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고진은 점차 병력을 증강시키고 성책을 많이 설치하여 우거의 침입에 대비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이에 고진을 고구려후高句麗候로 삼았습니다. 후에 고진의 증손자인 고주몽이 북부여의 대통을 이어 ‘고구려高句麗’라는 나라 이름을 정하였습니다. 후에 동북아의 강대국이 된 고구려는 한낱 제후국의 이름이 아니라 동북아를 호령하며 한민족 전체의 영도국으로서 위상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위만정권의 우거가 대거 침략해 왔고, 북부여의 군사가 대패하여 해성 이북 50리 땅이 전부 약탈당하고 점령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임금께서 친히 정예군 5천 명을 거느리고 해성을 격파하는 등 일진일퇴를 거듭하였습니다. 재위 13년인 계유년(기원전 108년)에는 한나라의 무제武帝 유철劉徹이 우거를 멸하면서 그곳에 4군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 사방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이때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군을 크게 격파하였습니다. 이후 재위 34년인 갑오년(기원전 87년)에 고두막한이 제위를 압박하자 고우루단군께서는 근심과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였습니다.

    아우 해부루解夫婁가 뒤를 이었고, 동명왕 고두막한의 위협에 도읍을 지금의 만주 헤이룽장성 통하현通河縣으로 옮겼습니다. 이곳은 차릉岔陵이라고도 하며 가섭원迦葉原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 이름을 가섭원부여, 혹은 북부여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부여東夫餘라고 하였습니다. 이 차릉에서 고주몽이 단기 2255년 임인년(기원전 79년) 5월 5일에 출생하였습니다.

    이로써 해모수단군을 시조로 하는 전기 북부여의 역사는 고두막한의 후기 북부여로 계승되었습니다.

    해모수단군에 대한 오해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해모수단군과 고구려 시조 고주몽과는 5대에 걸친 시간 차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 TV 드라마에서는 해모수단군이 고주몽의 아버지로 나오면서 북부여의 역사가 잘못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해모수단군의 후손 중에 해부루가 있는 것이지 직접적인 부자 관계도 아닙니다. 그리고 후기 북부여를 세운 고두막한을 동명성제라고 하며, 후에 고주몽 역시 동명왕이라고도 했는데 이를 동일한 인물로 아는 우를 범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여튼 이 북부여의 역사가 잘려 나가고 왜곡 날조되면서 국통맥이 심히 단절되었던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부여사의 전모를 간직한 『환단고기』 「북부여기」가 얼마나 중요한 사서인지를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여러 나라(열국列國) 시대의 개막


    북부여가 단군조선의 역사를 이어 가고 있을 때, 단군조선의 양팔인 번조선과 막조선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번조선 멸망과 위만정권 수립
    먼저 번조선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서방 진출의 교두보이자 외적의 침략을 막는 한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하던 번조선은 당시 전국시대와 진한秦漢 교체기의 혼란을 피해 넘어온 한족 난민들로 인해서 큰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해모수단군 재위 45년인 병오년에 한족 난민 중에서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한漢나라 유방과 동향인이자 같은 해 같은 날 태어난 죽마고우로 한나라 건국에 공헌하여 연나라 왕이 된 노관盧綰의 부하였습니다. 노관은 한 고조 유방과 여태후가 공신을 숙청하기 시작하자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였습니다. 흉노의 묵돌 선우는 그를 동호의 노왕으로 봉했고, 노관은 1년 후 죽게 됩니다. 그러자 그 일당인 위만도 한나라 조정으로부터 숙청당할 위기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옷을 입고, 상투를 틀고 부하 1천 명과 함께 번조선 준왕에게 투항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때 해모수단군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주인을 따르지 않은 그의 행태로 보아 배신할 인사로 여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번조선 준왕에게 ‘그놈을 받아주면 네가 반드시 배반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해모수단군이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번조선 왕 기준은 위만의 요청을 물리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놓치고 나서 마침내 위만을 박사博士로 삼고 서쪽 변방인 상하운장上下雲障을 지키는 장수로 임명하였습니다.

    상하운장은 지금의 난하 서쪽 지역으로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난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하이관山海關 근처를 흐르는 강으로, 이곳에는 많은 한족이 피신 와서 살고 있어 매우 혼란한 곳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 대한 수비는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위만은 그곳에서 몰래 세력을 길러 이듬해에 번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을 쳐서 한순간에 준왕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어 버렸습니다. 기원전 194년의 일입니다.

    위만은 참적僭賊
    『삼국유사』와 현 역사학계는 위만이 번조선을 탈취하여 세운 정권을 위만조선이라고 부릅니다. 단군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또 다른 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조선인 복장을 하고 상투를 틀고 있었다는 정도인데, 이는 위기에 처한 망명객으로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위만은 어려움에 처한 자신을 구원한 준왕을 배신한 도적일 뿐입니다. 따라서 위만조선이라는 것은 좋게 보아도 단군조선의 서쪽 영토인 번조선을 강탈하여 지배한 지방정권에 불과합니다. 자주적인 한국사를 구축하려 하였던 18세기 실학자 순암 안정복은 『동사문답東史問答』에서 위만을 가리켜 권력을 부당하게 탈취하고 분수에 넘치게 스스로 왕이라 이름으로써 참칭僭稱 행위를 한 도적, 즉 참적僭賊이라고 하였습니다. 단군조선의 법통을 계승한 정통 왕조는 오직 북부여뿐입니다.

    임금께서 바다를 건너 오셨다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준왕은 허겁지겁 황해를 건너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지역으로 도피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는데, 지금의 금강 하구 지역인 군산으로 왔다고도 합니다. 금강 하구에 있는 어래산御來山의 이름은 준왕의 도래 사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어래산 자체가 임금이 오신 산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조선 초에 쓰인 역사서 『둥국통감』에는 그의 이름을 딴 성벽인 기준성箕準城이 전북 익산의 미륵산에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준왕(기준)이 쌓은 산성’이라 불리는 성벽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 준왕은 우리나라에서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불리는 가장 오래된 성씨들 중 하나인 청주淸州 한韓씨, 행주幸州 기奇씨, 태원太原 선우鮮于씨의 시조가 됩니다.

    남삼한 시대가 열리다
    다음은 한반도 일대의 막조선의 상황입니다. 번조선의 기준왕이 떠돌이 도적 위만에게 패하고 왕위를 찬탈당할 때 오가五加의 무리가 상장上將 탁卓을 받들고 대규모 여정에 올랐습니다. 이들도 지금의 전북 익산으로 추정되는 월지月支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습니다. 월지는 탁이 태어난 곳으로 이를 일러 중마한中馬韓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은 북부여의 2세 모수리단군 때 일어난 일입니다. 이때 진조선과 막조선의 백성도 한강 아래로 남하하여 각기 ‘진한’과 ‘변한’을 세웠습니다. 마한은 전북 익산을, 진한은 경북 경주를, 변한은 경남 김해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삼한을 남삼한 또는 후삼한이라고 하며, 각각 백제, 신라, 가야로 발전하게 됩니다.

    단군조선의 중심세력이 만주 일대에 자리 잡던 북삼한 시절에는 진한이 삼한의 중심국이었지만, 한반도로 내려온 남삼한 시절에는 마한이 중심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한의 임금 탁이 진왕辰王 노릇을 하였습니다. 진왕은 대단군 또는 단군천황의 다른 말입니다. 단군조선 시대의 북삼한을 모르는 강단 사학계는 이 남삼한(후삼한)을 삼한 역사의 전부로 거론하고 있습니다.

    요서 부호 최숭의 낙랑국 건설
    한편 요서 지역 출신인 대부호 최숭崔崇은 바다를 건너 막조선의 왕검성 지역에 낙랑국을 세웠습니다. 지금의 평양 지역으로 기원전 195년의 일입니다. 이때는 강력한 한漢 제국의 출현으로 요서 지역에 전운이 감돌고 위기감이 팽배한 데다 위만을 비롯한 수많은 한족이 망명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이는 북부여의 3세 고해사단군 때 일입니다. 최숭은 허베이성 창려 지역의 낙랑산樂浪山 출신이었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자신의 고향 지명을 따서 지었습니다. 이 낙랑국은 훗날 한 무제가 번조선을 패망시키고 그곳에 설치하려 했던 소위 한사군漢四郡 중의 낙랑군과는 다릅니다. 이에 대한 오해가 수천 년을 지속해 왔습니다. 이 낙랑국이 고구려 3세 대무신열제의 아들 호동이 낙랑공주와 사랑을 나누고 자명고를 찢어 멸망시킨 바로 그 낙랑국입니다.

    단군조선이 여러 나라로 분열하다
    이처럼 북부여가 만주의 진조선을 대신할 때, 요서의 번조선은 망명객 위만이 차지하고, 막조선의 강역인 한반도 북쪽에는 낙랑국이 들어서고, 남쪽에는 남삼한이 들어섰습니다. 중원 지역은 진나라에서 한나라로 교체되면서 강력한 통일 제국이 성립되었습니다. 국력을 쌓은 한나라는 그 침략의 독니를 동쪽을 향해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로써 단군조선의 삼조선 시대는 완전히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역사는 여러 나라 시대로 접어들면서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참고문헌>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이것이 개벽이다 하』(안경전, 상생출판, 2014)
    『동명왕의 노래』(이규보 지음, 김상훈, 류희정 옮김, 보리, 2005)
    『삼국유사』(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을유문화사, 2002)


    되짚어 보는 단군조선의 문화 업적
    (이 내용은 단기 4348년 서기 2015년 9월 13일 일요일, 강화도 강화문예회관에서 있었던 <환단고기 북콘서트> 중 증산도 안경전 종도사님의 말씀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요약 정리한 것임)


    단군조선의 문화 업적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환국, 배달에서 내려온 홍익인간의 광명의 도를 만세홍범萬世洪範 사상으로, 생활수칙 문화로 정비해 주셨습니다.

    만세홍범 사상은 인류 동서고금의 법문화의 시작입니다. 그것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단군조선 초기에 8대 강령이 있었고, 22세 색불루단군 때 여덟 개의 법 조항이 있었으며, 44세 구물단군 때 구서지문九誓之文, 아홉 번 맹세를 하는 글이 있었습니다.

    둘째는 환국, 배달을 계승하여 완성한 역법曆法, 달력입니다. 지금은 달력을 365와 4분의 1일로 쓰고 있는데, 한민족 최초의 역법은 배달 시대에 이미 나왔습니다. 그것은 동방의 천자, 배달국 14세 치우천왕의 스승님인 자부선사紫府仙師가 완성한 칠회제신력七回祭神曆입니다. 칠회제신력은 7일에 걸쳐 일곱 신에게 제사를 올린 배달의 풍습에서 비롯된 책력입니다. 천신天神, 월신月神, 수신水神, 화신火神, 목신木神, 금신金神, 토신土神의 일곱 신에게 천제를 올렸습니다.

    서양 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근원인 지금 이라크 남부의 수메르 문명은 환국과 배달에서 넘어간 문명입니다. 그래서 이 수메르 문명에도 칠요七曜제도가 있었고, 이것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달력 시스템입니다.

    그다음에 배달 시대 자부선사의 후손 창기소蒼其蘇가 자부 선생의 환역 사상을 계승, 부연해서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만들었습니다. 단군왕검이 부루태자로 하여금 ‘오행치수법’과 「황제중경黃帝中經」을 하나라 우임금에게 전수하셔서 중국의 9년 대홍수 때 국가 붕괴 위기를 건져 준 것도 우주의 이런 역법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는 우주 이법을 바탕으로 해서, 한글의 근원이 되는 가림토 38자를 만든 것입니다. 『세종실록』에 있는 세종 25년과 28년 기록을 보면 ‘자방고전字倣古篆’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글자(훈민정음, 한글)는 옛 전자를 모방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3세 단군 때 만든 가림토 서른여덟 자와 훈민정음의 스물여덟 자를 비교해 보면 그 자형이 거의 비슷합니다. 그리고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는 우주 창세 이법을 상징하는 삼신오제三神五帝 사상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고 하나 될 수 있고 교감할 수 있는, 조물주 삼신의 진정한 자기현현自己顯現은 바로 하늘과 땅과 인간입니다. 이는 『천부경』의 가르침과 통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한글은 인류 문화사의 최초 경전, 제1의 경전인 『천부경』의 원리로 만든 문자인 것입니다. 훈민정음을 보면 ‘아래아(ㆍ)’는 하늘을 뜻합니다. 조화를 상징합니다. 대우주의 신성과 무궁한 생명, 시간과 공간을 점 하나로 상징한 것입니다. 그다음에 ‘ㅣ’ 이것은 바로 서 있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ㅡ’는 어머니 땅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과 인간, 살아있는 우주 조물주 삼신을 근거로 열한 개 모음을 만들었는데, 열한 개라고 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일태극一太極 십무극十無極 사상인데, 십일성도十一成道라고 해서 천지인 삼재 원리가 응축된 것입니다.

    이 한글에 대해서 세계적인 석학들이 “한글은 가장 독창적이고 훌륭한 음성문자다.”(영국의 서섹스대 제프리 샘슨 교수),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는 한글이다.”(미국의 제레드 다이어몬드 캘리포니아대 교수)라고 했습니다. 또 “한국의 전통 철학과 과학 이론이 결합된 세계 최고의 문자다.”라고 함부르크대학교와 한양대학교의 석좌교수였던 베르너 삿세 교수가 극찬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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