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B다시보기 | 역사대담 1회 - 한-일의 과거와 현재의 대화 (2부)

[STB하이라이트]

사회자: 김철수 중원대학교 종교문화학과 교수
대담자: 남창희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지금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의 문제를 넘어서 경제보복까지 진행되고 있는데요. 어떻게 한일관계의 갈등을 극복하고 바람직한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 역사의 참모습을 탐구하는 역사대담에서는 한일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해법을 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 찾아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정한론의 뿌리는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설


Q 김철수 교수: 고대사의 문제가 한일 양국의 갈등 문제로 비화되는 과정에서 근대 메이지 정부에서 ‘정한론’과 연결되지 않습니까? 정한론에 대한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A 남창희 교수: ‘정한론’은 한국을 정벌하자는 주장을 말합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 전후를 살펴보면 그 당시 사쓰마를 비롯한 4개의 번藩이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게 됩니다.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시기만 다를 뿐 모두 한국을 발판으로 만주, 시베리아, 중국을 일본의 독무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게 만든 사람이 일본 국수주의 학자이자, 사상가였던 요시다 쇼인입니다.

이 사람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우리가 잘 아는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한론의 뿌리가 사실은 『일본서기』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편에 보면 4세기 말부터 6세기 말, 대략 200년간 신공황후가 신라를 굴복시키고 가라7국을 점령한 후에 임나일본부라는 식민통치기구를 경남지역에 설치했다고 나옵니다. 고대의 임나일본부를 통해서 신라와 백제는 일본에게 고개를 숙이는 제후국가였으며, 당시 일본 야마토는 강대국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본서기의 기록을 복원하는 것이 메이지 유신 당시 주역들의 꿈이었던 것입니다.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쓰여진 책인데요, 1,2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고대 『일본서기』의 기록이 유령처럼 살아나서 사무라이 출신 메이지 유신 주역들의 꿈을 부풀려서 행동에 옮기게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번(藩): 제후가 통치하는 영지(領地). 일본사에서는 에도시대[江戸時代] 당시 1만석 이상의 영토를 보유했던 봉건영주인 다이묘[大名]가 지배했던 영역


Q 김철수 교수: 교수님께서는 ‘정한론’의 뿌리를 임나일본부에서 찾고 계신데요 그렇다면 임나일본부의 진실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A 남창희 교수: 임나일본부 얘기를 끄집어내면 고구마 줄기를 끄집어내듯이 어마어마한 얘기가 나온다고 봅니다. 24시간을 얘기해도 다 끝내지 못할 얘기들이 있습니다. 임나일본부설은 우리 한민족에게 패배주의를 심어주려고 한 일본의 고도의 정보공작입니다.

제가 2006년에 와세다대를 비롯해서 여러 대학의 교환교수로 있을 때마다 박물관과 유적지를 다니는 데 바빴거든요. 그렇게 다녀보니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흥미롭고 놀라운 얘기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중 한 가지를 말씀드리면 『일본서기』에 보면 한반도 남부에 가라7국이 있었는데 신공황후가 가라7국을 정벌하고 임나일본부라는 식민통치기구를 세웠다라고 나옵니다. 이 내용을 근거로 기존 일본학자와 국내학자들 대부분이 가라7국을 경상도에서 찾고 있습니다. 문제는 큐슈에 가서 조사를 해보면 큐슈 맞은편에 다라라는 지명이 남아있습니다. 가라7국 중에 하나라고 하는 다라국에 대한 명칭이 일본에서 나왔는데 이곳을 조사하지 않고 엉뚱하게 한반도 남부에서 찾고 있거든요.

이런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참모본부가 만들었고, 일본 관학자들이 부풀린 것을 일부 국내 학자들이 추종하면서 확대재생산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임나일본부설을 국내 학계와 교과서 및 국립박물관에서조차 국민들의 세금으로 임나를 홍보하고 있다는 현실이 너무도 황당하고 비정상적이라 생각합니다. 임나일본부설은 한일관계에 어둠을 드리우고 있는 암적 존재인 것입니다.

Q 김철수 교수: 메이지 시대 ‘정한론’을 기반으로 일본이 제국주의로 나가게 되었는데요. ‘정한론’ 이전에도 일본은 우리 한반도를 침략한 사실이 있지 않습니까?

A 남창희 교수: 모두 잘 아시는 것처럼 1592년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있었습니다. 저는 임진왜란과 ‘정한론’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봅니다. 임진왜란이 실패로 돌아가고 일본은 왜 실패했는지에 대해 엄청난 반성을 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는 조선통신사를 통해 관계를 개선하는데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훗날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주 세력들은 서남웅번이라고 해서 에도(도쿄)와 멀리 떨어진 곳의 세력들이었습니다. 또 이 사람들의 일부는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인물들의 후손이었습니다. 일본은 임진왜란에 실패하고 나서 250년 동안 국력을 배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250년 동안 배양되고 응축된 힘으로 서남웅번의 지도자들이 정한론을 실행에 옮겼고 결국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게 된 것입니다.

Q 김철수 교수: 한일관계를 풀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고대사의 문제인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텐데요. 이 임나일본부설과 관련된 쟁점들에 대한 교수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A 남창희 교수: 스에마쓰 야스카즈라고 하는 일본의 학자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학자는 일제 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에서 교수를 하기도 했는데요. 임나일본부설을 마치 종교처럼 맹신한 사람이었습니다.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동안 경상남도의 고분들을 마구잡이로 파헤쳤습니다. 하지만 결국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고분들을 파헤칠수록 일본보다 앞선 유물이 출토되고 훨씬 세련되고 발전된 유물들만 발굴이 되었던 겁니다. 일제 강점기 30년 동안 아무런 제약도 없이 임나일본부설을 밝혀내고자 애를 썼지만 증거를 찾지 못하자 결국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1949년에 이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임나흥망사」란 책을 쓰게 되는데, 이 책에서는 황당하게도 임나일본부의 영역을 전라도 지역까지 넓혀놨습니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책을 통해 황당한 주장을 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이런 말도 안되는 주장이 학계에 이목을 끌지 못하다가 ‘가야=임나’라고 하는 주장으로 임나일본부설이 다시 학계에 재등장하게 됩니다. 이 학설이 임나일본부설의 유령을 다시 불러내는 주문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제가 가장 아쉬운 것은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일본학자들은 그렇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내 학자들이 ‘가야는 임나’라는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일본학자와 같은 의견으로 연구하고 있다는 것은 아쉬운 것을 넘어 괴이하다라고 생각합니다.

금년 2020년 3월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가야본성’이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했습니다. 시민단체의 제보에 의하면 임나일본부설에서 주장하는 가라7국의 지명들을 우리 한반도 남부지역에 지명을 넣은 지도를 전시장 입구에 게시를 해놓았다는 겁니다. 이렇게 비중있는 전시회에 버젓이 임나일본부설의 지명들을 한반도 남부에 넣었다는 것은 ‘가야=임나’라는 주장에 동조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도와주고 있는 것이기에 현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고 봅니다.

Q 김철수 교수: 학계에서 가야 역사의 복원이 다시 얘기가 나왔을 때 참 기대가 많이 되었었는데요. 학계에서 내놓은 결과가 임나일본부설의 동조라는 것이 너무 참담한 현실이라 생각합니다. 문화사의 흐름이란 것이 높은데서 낮은 데로 물처럼 흘러가지 않습니까? 고구려 백제 신라가 문화의 선진국이었는데 그 당시 일본인 야마토 왜에게 머리를 조아렸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당시 백제와 일본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남창희 교수: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살펴보는 게 근본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국내 최근 임나에 대해 연구하신 분들은 임나일본부는 없었지만 ‘임나’가 있었고 백제의 영향권 내에 있었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덕일 박사는 이런 주장에 대해 결국 백제가 일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는 임나일본부설의 큰 틀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비판을 했습니다. 또 저는 ‘임나=가야’라는 전제가 분명 어리숙한 논리 비약이 많음에도 무비판적으로 이런 일본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백제와 일본의 관계에 대해 3가지로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일본 도쿄대에서 백제의 칠지도에 대해 깊이 연구하셨던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님은 제발 칠지도에 대해 잘못된 해석을 하지 말라고 후세 학자들에게 일침을 가한 바 있습니다. 칠지도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보내는 하사품이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드리는 헌정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칠지도를 보면 백제가 명백히 상국이고 왜가 제후국이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일본 규슈의 에타후나야마 고분에서 백제식 관모冠帽가 발굴되었는데 백제 왕이 쓰던 관모와는 형태적으로 급수가 낮은 관모였습니다. 일본에서 백제의 영향력을 받은 지역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 고베와 시코구 지역 사이에 섬이 하나 있는데, 이 섬을 한글로 읽으면 ‘담로’라고 읽습니다. 에타후나야마 고분 근처에 있는 강과 지역이름이 ‘다마나’입니다. 이런 점을 비추어봤을 때 에타후나야마 고분의 금동관모는 일본에 백제의 담로가 있었다고 볼 수 있고, 또 백제가 일본 왜보다 우월했던 지위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일본의 나라, 아스카, 오사카 지역에서 발굴된 부장품의 성격이나 편년 등 여러 가지를 종합해보면 백제로부터 문화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점은 일본에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 칠지도에 보면 ‘후왕候王에게 베푼다’는 명문이 있습니다. 백제가 왜보다 상국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인 것입니다.

Q 김철수 교수: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단시간에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발전을 하게 되었는데요.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했다고 보시는지요?

A 남창희 교수: 일본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중화중심주의에서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우리는 중화중심주의에 몰입되어 있었고, 중국 외에는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또 해금 정책을 통해 해상무역도 제한했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조선은 농업국가에 주저앉아 버렸지만 일본은 ‘데지마’라고 하는 작은 항구를 통해 적극적으로 난학蘭學이라 부르는 서양 학문들을 수입했습니다. 이렇게 실력을 차곡차곡 배양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중국과 조선이 세계정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일본은 ‘서남웅번’이라 불리우는 4개의 번을 중심으로 근대화에 필요한 지식들을 쌓아갔고 동시에 내부역량을 축적해 갔습니다. 또 서구열강이 중국에 가한 개항의 압력과 일본의 가한 개항 압력에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일본은 중국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개항의 압력을 받았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일본의 근대화가 빠르게 이뤄진 이유는 일본 내부에서 축적된 실력이 있었고, 적당한 외부 압력이 가해진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일본이 미국이나 서구열강들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 계기가 규슈에 있는 도자기들이 서양 귀족들에게 대인기였거든요. 동양의 신비한 나라인데 기술이 뛰어난 나라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도자기를 만든 사람들이 임진왜란 당시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이었다는 것은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