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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인물탐구]

    창세역사 성인열전 | 배달의 聖王, 神農씨와 姜太公


    이해영 / 객원기자

    *신농씨(神農氏)가 농사짓는 법과 의술로 천하 만세를 윤택하게 하였고 태공(太公)이 병법과 정치로써 천하 만세에 은혜를 주었나니 이제 하늘과 땅이 성공하는 가을철을 당하여 천지의 모든 신명들이 그들을 높이 받느니라. (증산도 도전 2:29:3~5)


    탁록에서 큰 싸움이 끝나고



    14세 배달국 천자인 자오지환웅과 화하 세력을 결집한 공손헌원 사이의 10년 전투는 탁록에서 배달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길고 길었던 전쟁 끝에 공손헌원은 항복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에 치우천황은 고민 끝에 공손헌원의 사형을 면하게 하고, 황제黃帝라는 벼슬을 내렸습니다. 중국 한족의 원류가 되는 화하족 전체를 다스려 배달국의 충성스런 신하로 잘 처신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이로써 치우천황은 중원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동방의 신교문화를 비롯하여 정치 제도, 병법, 금속 제련 기술, 농사법, 음양론 등 선진문화가 중원에 전수되었습니다. 또한 치우천황의 명령을 충실히 받들고 총력을 기울인 남방의 묘족苗族은 통치계급의 일원으로 그 지위가 격상되었습니다.

    배달의 위대한 성인聖人 제왕들


    백두산 신시에서 출발한 배달국은 점차 동북아의 대국으로 성장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세 분의 성황聖皇이 문명사에 지대한 공덕을 남겼습니다. 바로 지금까지 살펴본 태호 복희씨, 치우천황 그리고 지금 살펴볼 염제 신농씨입니다. 태호 복희씨는 동양철학의 아버지요, 인류 문명의 창시자로 중국에서는 이분을 인문지조人文之祖로 받들고 있습니다. 치우천황은 무력과 전쟁의 신으로 동아시아에서 숭상을 받아 왔습니다. 복희씨가 중원 땅에 문명의 씨앗을 뿌렸다면(파종播種), 염제 신농씨는 이를 잘 가꾸는 이종移種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세 분의 성화 덕분에 인간을 교화시키는 역학易學, 천문天文, 의술醫術, 농업 분야가 크게 발전하여 인류 문명은 꽃피우고 인간의 삶은 편리하게 되었습니다.

    염제신농炎帝神農씨의 혈통으로 본 탁록대전의 원인



    염제 신농씨는 지금으로부터 5,200년 전 8세 안부련환웅(BCE 3240 ~ BCE 3078) 때 인물입니다. BCE 3218년에 태어나서 BCE 3078년에 140세로 승천하였습니다. 부친은 신시 배달의 혈통인 소전少典이고, 어머니는 유와씨의 딸인 여등女登입니다. 소전은 소호少昊 금천金天씨와 함께 모두 고시高矢씨의 방계 자손입니다. 고시씨는 초대 환웅천황 때 불을 발견하고 주곡主穀 임무를 맡았던 고시례高矢禮입니다. 소호 금천은 공자에게 동이족의 천자 제도를 전수한 담자郯子의 조상이며, 뻗어 나간 성씨로는 흉노족의 왕통인 김씨가 있습니다.

    안부련환웅의 명을 받은 소전은 산시성 강수姜水에 가서 군사를 감독하였습니다. 그곳 산시성 보계시寶鷄市 상양산尙羊山에서 낳은 맏아들이 석년石年입니다. 또는 북두칠성을 뜻하는 괴魁라고도 했습니다. 이분이 바로 염제 신농씨입니다. 둘째는 욱勖으로 공손公孫씨의 조상이 됩니다. 여기에 대해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에서는 소전에서 갈라진 파(별파別派)로 공손公孫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해 헌구軒丘에 귀양 가서 살았고, 헌원의 족속은 모두 그 후손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헌구는 공손헌원이 도읍한 곳입니다. 지금의 허난성 신정현新鄭縣입니다. 헌원은 욱의 10세손입니다. 즉 적통을 계승한 이는 염제 신농씨이고, 방계 혈통이 헌원씨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원씨 집단은 방계 혈족이라는 열등감과 자기 비하에서 세월을 보내며 절치부심하다가 염제 신농씨의 나라가 쇠망해지자 천자의 꿈을 품고 난을 일으킨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정통과 윤통은 역사에서 언제나 있어 왔던 갈등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지켜보던 동방 종주국 배달국의 치우천황께서 개입하고 이를 정리하는 과정이 탁록대전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동양의 프로메테우스, 신농神農씨


    문명의 신 염제 신농씨
    염제 신농씨는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에게 불을 전해 준 프로메테우스 같은 인물입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신들만 사용하던 불을 인류에게 전달해 준 고마운 존재입니다. 여기서 불은 단순한 불의 의미를 넘어서 문명을 상징합니다. 그만큼 신농씨는 인류를 위해 엄청 좋은 일들을 많이 베푼 자비로운 제왕입니다. 만주 지안集安에 있는 고구려 5회분묘五盔墳墓에는 오른손에 벼 이삭을 든 염제 신농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선농단은 염제 신농씨에게 제사를 지내던 장소입니다.

    염제 신농에 담긴 의미
    강수에서 살았던 염제 신농씨의 성은 강姜씨입니다. 강씨는 현존하는 성씨 중 가장 오랜 된 시원 성씨이며, 이는 부친인 소전이 강수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염제 신농씨를 열산씨烈山氏라고도 하는데 이는 열산에서 신농씨가 창업을 했기 때문입니다. 열산烈山은 도읍지 이름뿐 아니라, 산의 초목을 불태워 농토를 개간한다는 뜻입니다. 초기에 농토를 얻기 위해서는 근대의 화전처럼 불을 질러 지력을 얻어 농토를 개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화덕에 의해 임금이 되어 남방을 다스리는 불의 신으로 여겨 염제炎帝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농사법을 가르쳐 주었으므로 신령스런 농부란 뜻으로 신농神農이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경농耕農과 의학醫學의 신, 신농씨
    신농씨 이전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 원시 수렵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인구가 늘어나면서 수렵만으로는 먹고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에 염제씨는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해 대책을 마련하였습니다. 바로 농업의 시작이었습니다.

    신농씨는 쟁기와 보습 같은 농기구를 개발하였습니다. 땅에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고 채소를 재배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온갖 풀을 직접 먹어 보고 풀의 효능과 약성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때때로 독초에 중독되어 목숨이 위험하기도 했지만, 인류를 위하여 약초를 구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는 신농씨를 소의 머리를 한 인신우두人身牛頭의 모습에 약초를 입에 머금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소는 농사짓는 데 필수적인 가축이지요. 한마디로 신농씨는 경농의 시조요 동서의학사의 원조로 인류 문화의 복록과 수명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교역交易의 신, 염제
    염제 신농씨의 통치 아래 백성들은 정착하여 각기 생업에 종사하면서 점차 인구가 증가하였습니다. 곡식과 삼을 많이 생산하게 되어, 먹을거리와 옷가지가 풍족하게 되었으며, 각종 의약과 치료법을 점점 갖추게 되었습니다. 염제는 시장 제도를 처음으로 실시하였습니다. 태양신인 염제는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에 왔을 때를 시장을 여는 시각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때 일정한 장소에 모여 사람들이 편하게 물건을 바꾸고 자유롭게 만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천하의 백성과 재보財寶가 모여들어 교역이 이뤄지게 함으로써 도시 문명과 산업을 일으켰습니다(日中爲市하야 交易以退也라 - 「신시본기」). 농경의 시조, 의학의 시조, 교역 문화의 창시자 등으로 불리는 신농씨는 오늘날 서안西安 부근의 열산列山에 신농국을 세웠습니다. 열산은 지금의 후베이성 수주시隨州市 여산진厲山鎭입니다. 그 나라는 앞서 살펴본 대로 8세 유망에 이르기까지 약 530년 동안 중원에 존속하였습니다.

    동방 한민족의 신교神敎문화를 중원에 전파한 강태공



    다음 주제는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강태공입니다. 강태공 역시 치우천황의 후손입니다. 강태공의 조상이 우임금 때 치수에 공이 있어서 여呂 땅에 봉해졌기 때문에 여상呂尙 또는 여망呂望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강태공은 젊었을 때부터 학문에 정진하였으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몹시 불우한 삶을 보냈습니다. 밥벌이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글공부만 하는 무능한 강태공을 뒷바라지해 주던 아내 마씨는 결국 그의 나이 여든 가까이 된 어느 날 이혼을 선언하고 방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습니다.

    곧은 낚시를 드리운 강태공, 주군主君을 만나다

    혼자가 된 강태공은 위수渭水의 강가로 집을 옮겨 반계磻溪라는 곳에서 날마다 곧은 낚싯바늘을 물에 드리웠습니다. 그의 목적은 물고기를 잡는 데 있는 게 아니라 훌륭한 임금에게 등용되어 포부를 펴려는 데 있었습니다. 당시 상나라를 정벌하여 천하를 제패해 보려는 주周 문왕文王은 천제天帝가 나타나 현인을 보내 줄 것을 약속하는 꿈을 꾸고, 사방으로 현인을 찾다가 위수 근처에서 강태공을 만났습니다. 천하의 정세에 대해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강태공의 비상함에 감탄하여 그를 자신의 수레에 태운 뒤 대궐에 돌아와 중용하였습니다. 이때 강태공의 나이가 꼭 80세였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궁팔십窮八十 달팔십達八十이라는 단어가 생겨났습니다.

    은나라를 정벌하고 제나라 왕이 되다# >
    자신의 포부를 마음껏 펼 수 있게 된 강태공은 문왕의 국사國師 겸 재상이 되어 주의 내실을 굳건히 다졌습니다. 주 문왕이 죽고 아들 주 무왕武王이 즉위하자 지체하지 않고 상商(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명나라 때 소설 『봉신연의』에서 상나라와 주나라 사이 전쟁은 인간들 간의 전쟁이기도 하지만, 마치 트로이 전쟁처럼 양측을 지지하는 천상 신명계의 전쟁으로 묘사됩니다. 이 전쟁에서 강태공은 신통한 도술로 상나라의 장군과 신들을 굴복시켜 마침내 주나라를 승리로 이끌고, 그 공으로 제나라의 임금에 봉해집니다.

    이때 강태공을 떠난 전처가 소문을 듣고 그에게 찾아가 잘못을 뉘우치며 다시 합치기를 간청하였습니다. 하지만 강태공은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듯이, 우리 사이도 다시 합쳐지기 어렵다며 냉정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 후 강태공의 전처는 후회와 수치심으로 자살하였다는 슬픈 일화(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의 고사)가 전해집니다.

    <#팔신제八神祭를 지낸 강태공

    강태공은 제나라에 봉후를 받아 팔신八神께 제사를 올렸습니다. 이른바 팔신제八神祭입니다. 「진역유기震域留記」에서는 팔신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제나라 풍속에 팔신제가 있으니, 팔신은 천주天主, 지주地主, 병주兵主, 양주陽主, 음주陰主, 월주月主, 일주日主, 사시주四時主이다. 천주는 삼신께 제사를 지내고, 병주는 치우천황께 제사를 지내니, 삼신은 천지 만물의 조상이시고, 치우는 만고의 무신용강武神勇强의 비조이시다.


    이처럼 치우천황은 무신武神의 시조로서 추앙을 받았습니다. 강태공은 『음부경주陰符經註』를 지어 자부紫府 선생의 『삼황내문三皇內文』의 뜻을 이어받아 서술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나라를 다스릴 때 먼저 도술을 닦고 천제지天齊池에서 천제를 올렸습니다. 후에 그가 다스리는 제나라에는 도술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이 나왔는데 이는 강태공이 그 풍속을 장려하였기 때문입니다.

    『봉신연의』에서 보이듯 강태공의 인기는 대중적이었습니다. 지혜롭고 도술이 뛰어난 인물로 민중들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중국 도교 전파설을 부정하고 한국 도교의 독자 발생론을 주장한 이능화의 『조선도교사』를 보면 입춘에 집집마다 대문에 “강태공재차姜太公在此”, 즉 강태공이 여기에 있다는 글귀를 써 붙여 귀신이나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려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배달을 이은 단군조선



    치우천황 이후 배달국은 18세 거불단환웅을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때는 신시개천 1565년인 BCE 2333년 무진년이었습니다. 초대 환웅천황께서 신시를 개척하여 새 시대를 여시고 18세를 전하였고, 역년은 1,565년이었습니다.

    13세 사와라환웅 초기 웅족 여왕의 후예를 여黎라 하고 처음으로 단허檀墟에 봉함을 받아 왕검이 되었습니다. 그 후 신인神人왕검이 웅씨 비왕裨王으로 있다가, 웅씨 왕이 전쟁에서 죽자 그 자리를 계승하였습니다. 이후 신시배달을 대신하여 구환九桓을 통일하고, 강역을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습니다(三韓管境). 이분이 우리의 국조이신 단군왕검이십니다. 왕검께서는 신시 배달의 법도를 되살리고,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여 나라를 세우시고 그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부터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배달은 태평한 나라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에서는 신시배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찬탄하고 있습니다.

    아아! 배달의 천황께서 나라를 처음 세우실 때 이미 삼신상제님의 은총을 입어 무량한 큰 복을 열어 주시고, 웅족과 호족을 불러 어루만져 사해를 평안하게 하셨다. 위로 천신을 위해 홍익인간 이념을 내걸고, 아래로 인간 세상을 위해 무고한 원한을 풀어 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스스로 하늘의 뜻에 순종하므로 세상에는 거짓됨과 망령됨이 없고, 행위를 하지 않아도 나라가 저절로 다스려지고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교화되었다. 산천을 중시하여 서로 침범하거나 간섭하지 않으며, 서로 굽히는 것을 존귀하게 여기고 목숨을 던져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하였다. 이미 먹고사는 생활수준이 고르고, 또 권리를 평등하게 누리며, 모두 삼신상제님께 귀의하여 서로 사귀어 기뻐하고 소원을 빌었다. 화백和白으로 공의를 삼고, 책화責禍로 신의를 보존하였다. 모두 힘을 합하여 일을 처리하고 분업하여 서로 도왔다. 남녀가 모두 자기 직분을 다하고, 노소가 다 함께 복리를 누렸다. 사람끼리 서로 다투어 송사하지 않고, 나라끼리 서로 침탈하지 않았으니, 이때를 신시 태평 시대라 부른다.


    참으로 평화롭고 인류가 꿈꾸는 그런 이상 사회였음을 알 수 있으며 그 핵심에는 삼신상제님의 가르침이 있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또한 『대변경大辯經』에서는 배달과 단군조선의 통치 정신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신시씨神市氏(배달 초대 환웅)는 전佺의 도로써 계율을 닦아 사람들에게 제천祭天을 가르치셨다. 이른바 전佺이란 사람의 본래 온전한 바탕을 따라 능히 본성에 통해(通性) 참됨(眞)을 이루는 것이다.

    청구씨靑邱氏(14세 치우천황)는 선仙의 도로써 법을 세워 사람들에게 천하를 나누어 다스리는 법도(管境)를 가르치셨다. 선仙이란 사람이 본래 저마다 타고난 바를 따라서 자신의 참된 영원한 생명력을 깨달아(知命) 널리 선善을 베푸는 것이다.

    조선씨朝鮮氏(단군왕검)는 종倧의 도로써 왕을 세워 사람들에게 책화責禍를 가르치셨다. 종倧이란 사람이 (우주 안에서) 스스로 으뜸 되는 바에 따라 정기를 잘 보존하여(保精)하여, (대인이 되어) 아름다움(美)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佺은 텅 빈 자리로 천도天道에 근본을 두고, 선仙은 광명 자리로 지도地道에 근본을 두며, 종倧은 천지 도덕의 삶을 실현하는 강건한 자리로 인도人道에 근본을 둔다.


    신교의 3도 정신과 성명정과 진선미의 실현 문제를 다루고 있는 매우 깊은 통치 철학의 내용입니다.


    <참고문헌>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이것이 개벽이다 하』(안경전, 상생출판, 2014)
    『이야기 동양신화』(정재서, 황금부엉이,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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