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의, 미완의 책사

[이달의프로그램]
사마의는 제갈량의 숙적이자 조조가 경계한 책사이며, 난세를 평정하고 삼국을 통일한 서진西晋 건국의 기초를 세운 위나라의 군사전략가입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사마의가 조조의 부름을 받아 관직에 오르지만 정작 군주인 조조의 경계로 중책을 맡지 못하다가 조조의 아들 조비를 조조의 후계자로 올리는 데 큰 공을 세운 후 조비의 깊은 신임을 얻으며 진정한 책사가 되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대본 완성에만 4년이 걸렸으며, 탄탄한 내용 구성뿐만 아니라 뛰어난 영상미, 실감나는 전쟁 장면으로 중국 현지에서 큰 화제를 모은 작품입니다. 연출을 맡은 장영신 감독은 철저한 고증을 위해 삼국지 서적을 무려 2년간 탐독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670억원이라는 역대급 제작비를 투입한 명품 사극 드라마입니다.


증산도 도전 5편 356장, 천하통일의 사마소 도수

삼국시절三國時節이 수지지어사마소誰知止於司馬昭리오
삼국시절이 사마소에서 대세가 그칠 줄을 그 누가 알았으리오.
이어 말씀하시기를 “삼국시절이 돌아갈 곳을 안 사람은 사마소 한 사람뿐이었느니라.” 하시니라.


삼국통일의 사마司馬씨 가문


제갈량의 북벌 계획은 한고조 유방의 참모인 장량의 계책과 유사했다. 관중을 장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 것인데 이를 저지한 인물로 알려진 게 바로 사마의司馬懿(179~251)이다. 사마중달司馬仲達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는 사마의는 명문세가에서 태어났다. 사마의의 조부는 사마준으로 영천태수를 지냈고, 부친 사마방은 경조윤 낙양령을 지냈는데, 지금으로 치면 서울시장에 해당한다. 그의 형인 사마랑은 22세에 조조 아래에서 관직에 나아가 신임을 받았다.

사마의에 대해서 당대 사람인 최염은 총량명윤總亮明允, 강단영특剛斷英特이라고 평했다. 총은 지혜를, 양은 성실, 명은 고명, 윤은 공정, 강은 굳건, 단은 결단, 영은 탁월, 특은 독특하다는 뜻이다. 이 평이 바로 조조의 주목을 받게 되어 조조가 여러 번 출사를 종용해 30세에 조조 휘하의 관직에 나갔다. 이후 73세에 죽기까지 40여년간 조조, 조비, 조예, 조상 등을 보좌한 위나라의 원로였다. 이후 사마의는 그 아들들과 함께 위나라의 실권자인 조상 형제에 대항하여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성공하였다. 이후 사마의 아들인 사마사와 사마소가 조씨 정권을 탈취하여 허수아비로 만들고 서진 제국 창업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중 차남인 사마소司馬昭(211-265)는 자는 자상子上 또는 자상子尙으로 형인 사마사司馬師가 죽은 뒤 정권을 장악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폐제廢帝 조모曹髦는 사병 300명을 동원하여 사마소司馬昭를 제거할 계략을 펼치나 이를 눈치챈 사마소에 의해 계략이 무산되고 폐위되고 만다. 이후 사마소는 위나라 마지막 황제인 원제元帝 조환曹奐을 옹립하면서 사실상 모든 전권을 갖게 된다. 이후 53세 되는 263년에 사마소는 등애鄧艾와 종회鍾會에게 촉한蜀漢 정벌을 명했고, 그해에 촉한을 멸망시켰다.

이로 인해 삼국정립이 붕괴되어 천하 통일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인 264년 촉한 정벌의 공으로 진왕晉王에 올라 제위 찬탈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265년 사망했다. 그 뒤
사마소의 장자 사마염司馬炎이 진왕의 지위를 이어받은 뒤 280년 오나라를 멸망시킴으로 해서 60년에 걸친 삼국시대의 종언을 고하게 했다. 진나라를 세운 사마염은 자신의 부친인 사마소를 묘호는 진태조晉太祖, 시호는 문황제文皇帝로 추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