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확실한 신교의 진리 외 (주윤배, 김영경, 이승희, 이그나티예바 아미나)

[입도수기]

너무도 확실한 신교의 진리!


주윤배(남, 61) / 부천도장 / 149년 음력 11월 입도

성경 공부를 미련 없이 버린 이유


4대째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에서 태어나 습관처럼 믿던 천주교를 2006년에 버리고 나서 이듬해 홍콩에 있는 침례교회를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열성적인 성경 공부 자세에 궁금증을 느껴 침례교에 나가 소위 ‘구원’이란 것을 받고 정말 열심히 천주교식이 아닌 기독교식의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파면 팔수록 모순만 나오고 그 모순이 나올 때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논리를 펴는 것에 역시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2011년에 귀국하여 다시 연극배우로 활동을 하던 저는 중국 생활 당시에는 자주 쓰던 한문을 등한시하는 것이 아쉬워 한문 공부를 지속하고자 「도덕경」, 「반야심경」 등등과 여러 불경 공부를 했으나 늘 허전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2013년 9월 중순, 저는 가벼운 풍을 맞게 되었고 홍콩 거주 당시부터 늘 마음속으로 최고의 치료법이라 느끼고 있던 ‘자연정혈’ 치료로 풍을 고치리라 마음을 먹었습니다. 몇 곳에 전화를 했으나 신뢰가 가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전화를 한 곳이 바로 저를 증산도로 인도해 주신 김명성 원장님이었습니다. 치료를 받으러 센터에 들어가자마자 여기저기에 『도전』, 『이것이 개벽이다』, 『환단고기』, 『춘생추살』 등등의 책이 있는 것을 보고 바로 이분이 증산도 신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증산도는 편안히 다가왔으나


<환단고기 북콘서트>를 통해서 ‘안경전’이란 분의 이름에 경외심과 존경심을 갖고 있었기에 궁금증이 솟구쳐서 치료를 받으며 이런저런 질문을 했는데 정말 열심히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만 ‘다시는 종교를 갖지 않으리라’ 마음을 먹었기에 그저 정보로서만 들었을 뿐 증산도와 연결시키지는 않았으며 그렇게 띄엄띄엄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 2018년 4월 초, 군 복무차 한국에 들어왔던 큰아들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고, 그 충격에 방황하던 저는 두문불출 주로 집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오직 컴퓨터 앞에만 앉아 시간을 보내던 차에 여러 불교 관련 자료와 우리 역사 공부 자료만 찾아 읽으니 당연히 다시 <환단고기 북콘서트>를 자주 보게 되었고 상생방송도 자주 보게 되었는데, 이것저것 보다 보니 ‘개벽’이란 제목의 방송과 다른 여러 자료들(나중에 보니 증산도 관련 자료들)도 더불어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없는 정신에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공부를 했다는 편이 맞겠네요.

그러다가 「천부경」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서 그동안 막혔던 여러 경들이 신기하게도 술술 풀리게 됨을 알았고 심지어는 성경이 왜 막히게 되었나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편안하게 증산도는 제게 다가왔으나 역시 무신론자가 되리라 작심한 제게는 오직 『환단고기』 관련 내용들만 들리더군요.

거부하기에는 벅찬 진리, 이것은 신교다!


2019년 올해 가을, 크게 건강에 이상이 생겨 정말 오랜만에 다시 자연정혈 치료를 받기 위해 센터를 찾았습니다. 역시 이런저런 권유를 해 주셨는데 나중에 ‘태을주를 외워 보라. 굳이 증산도를 믿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건강을 위해서라도 태을주를 외워 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집에 가서 태을주太乙呪를 한문으로 찾아 외우기 시작했는데, ‘훔치’라는 그 한마디가 어찌나 구슬프고 애달프던지 걸으면서도 계속 외우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천안에서 벌였던 식당이 동업자와 이상이 생겨 천안에서 서울로 다시 이사를 왔고 급작스런 상황에 치료비가 부담이 되어 더 이상 치료를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왠지 이번에는 꼭 치료를 받아야만 할 것 같아 “돈이 없는데 나중에 드릴 테니 치료를 받게 해 달라.” 했더니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치료나 잘 받으시라.”는 말씀에 정말로 간절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치료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태을주에 대한 이런저런 궁금증을 질문하던 중 “도장에 한 번 방문하시라.”는 말씀에 바로 그 주 일요일 도장을 방문했습니다. 마침 천도제를 지내는 날인지라 꽤 긴 시간 앉아서 참여를 했는데, 속으로 ‘이것이 바로 우리 신교神敎의 모습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주교와 기독교를 버리고 나서 종교는 모두 허구라는 생각에 다시는 종교를 찾지 않겠다 다짐했으나, 『환단고기』 공부를 하면서 마음 한편에 ‘만약 신교가 지금까지 있다면 차라리 신교는 믿을 수 있겠다’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어,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점심을 마친 후, 김명성 원장님은 제게 여러 가지 얘기를 해 주셨는데 많이 듣던 얘기들이었고 이전에 인류의 상고사에 관심이 있어 공부하던 여러 내용들과 같은 내용들이 있어 편하게 들었습니다.

성경 공부와 불경, 도덕경 등의 공부가 모두 녹아 있어 미리 예습을 했구나 하는 마음에 다행이란 생각도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도저히 개벽과 상제님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내용들은 허구로 가득찬 성경에 비할 수 없는 진리로 다가와 거부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내용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상제님인데 뭐가 두려우랴


이후 지속적으로 일요일마다 공부를 했고 『도전』을 읽으며 이런저런 증산도 관련 공부도 하고 상생방송을 매일 보게 되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수행을 하는 시간에 따라서 하다가 ‘나도 수행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원장님에게 수행법을 묻고는 아침저녁 수행도 하게 되었습니다. 제 삶을 통해서 다양한 공부를 한 것이 기독교 신앙에서는 필요로 하지 않았고 그들은 부정을 했었는데, 증산도에서는 그 내용으로 진리의 길을 알려 주니 기쁘기도 했고 진리를 찾은 것에 큰 환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요즘 고민은, ‘내가 맺은 수많은 죄악과 척들을 어찌하면 풀 수 있을까, 우리 조상님들을 어떻게 해원시켜 드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연은 없기에 긴 시간, 이 나라 저 나라를 돌고 돌아 이런저런 공부를 시키시고 도저히 더 이상 외면할 방법이 없을 때에 맞춰 저에게 참진리를 알게 해 주신 상제님! 저와 같은 인간도 과연 쓸 곳이 있을는지는 정말로 모르겠으나 확실한 것은 참진리가 이 안에 있다는 것을 제가 확실하게 알고 말았다는 겁니다.

환부역조를 하였기에 그렇게도 불편했던 유사 종교들, 이제 원시반본하여 참종교 안에서 참진리를 알게 되니 청수와 함께 바치는 서투르고 부족한 수행이지만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지금 제게는 일자리가 가장 시급한 일이지만, 동지 대천제에 입도식을 갖게 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일이란 생각에 모든 일을 뒤로 미루었습니다. 마음이 편한 것이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아버지가 상제님인데 뭐가 두려우랴’ 하는 생각에 그리합니다. ◎

진리로 찾은 나의 연원


이승희(여, 44) / 계룡도장 / 149년 음력 11월 입도

고난과 시련 속에서 만난 진리 인연


제 기억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부터 저는 항상 성당과 함께였습니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을 다녔고 주말은 항상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비신자와 결혼하며 가톨릭에서 요구하는 예식을 다했고 자녀들 역시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이사를 할 때는 고상과 십자가는 고이 싸서 직접 운반했고 항상 먼저 모시며 기도도 먼저 올렸습니다. 자녀를 위해 부모를 위해 매일 묵주기도를 했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아버지 하느님을 먼저 찾았습니다.

2012년 우리 가족은 가족과 살던 터전을 뒤로하고 세종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가족에게 상처받는 게 싫었고 재생불량성빈혈과 뇌동맥류 진단으로 광주에서 서울을 매달 왕복하는 것도 지쳤던 터라 쉽게 이사를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낯선 이곳에서 운명처럼 바이올린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악기를 가르쳐 주는 선생님으로 때로는 친언니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 갔습니다. 우리는 공동운명체처럼 기쁨도 함께했지만 모든 것을 잃을 때에도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너무 예민한 저 때문인가 싶어 죄책감에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저는 도망을 갈 수도 선생님을 도울 수도 없었습니다.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있나 싶을 때 선생님은 증산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고 스스로 이겨 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련을 함께 이겨 낸 우리는 가족 같은 관계가 되어 있었습니다.

배례로 찾은 건강과 조상의 연맥


증산도를 알게 된 것은 선생님을 통해서였지만 선생님은 한 번도 저에게 포교 활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저 역시도 제 스스로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라 생각했기에 증산도가 어떤 곳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제가 어느 날 갑자기 선생님에게 주문은 어떻게 하는 거냐고 알려 달라고 먼저 요청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주문 책을 받아 들고 칠성경만 외우다 어느 순간 다른 것도 궁금해져서 상생방송을 찾아보았습니다. 배례가 눈에 띄었고 무작정 105배를 따라 했습니다. 배례를 시작하며 찾아온 첫 번째 변화는 따뜻해진 손과 발입니다.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손과 발이 차가워 제 몸에 닿는 것조차 싫을 정도였는데 주문을 외울 때 따뜻해진 손과 발은 항상 온기를 내뿜었습니다.

또 다른 변화는 저의 뿌리를 찾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께서 선조 이야기를 꺼내면 어머니는 근본도 없는 이씨라는 말씀으로 선조 이야기를 막았습니다. 작은할아버지께서 제사를 모신 후 몇 대손인지 말씀해 주시며 요즘은 여자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도 어머니는 쓸모없는 조상 이야기라며 격하했습니다. 한 번도 선조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한 저는 정말 중국 난민이 조선에 들어와 정착했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누가 어디 이씨냐고 물으면 청해라는 말을 꺼내기도 부끄러웠습니다. 제 선조는 중국 어디에서 오셨을까 과연 인터넷에 검색되기나 할까 하는 마음으로 구글 검색을 했습니다. 저의 시조는 이지란이시며 여진족 출신으로 조선의 개국공신이셨습니다. 이지란은 중국에서 구국 영웅으로 추대된 악비 장군의 5세손 여진의 아라부카阿羅不花 금패천호金牌千戶의 아들로 본인도 천호에 추대되었으나 공민왕 시절에 많은 부하를 이끌고 고려로 귀화하셨다고 합니다. 이후 이성계와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어 왜군을 무찌르기도 하고 조선 개국도 함께 하였다고 합니다. 너무 혼란스러워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찾은 게 맞다며 이방원이 숙부라고 부를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무장이셨는지 야사를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힘이 느껴졌습니다. 악비 장군의 후손이기 때문에 시제를 모시는 날에는 중국 사람들이 함께 지내러 온다고 하였습니다.

믿음과 신뢰로 함께 걸어가는 길


증조할아버지 살아 계실 때는 증조할아버지께서 시제에 참여하셨으나 돌아가신 이후로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연락을 하지 않아 시제를 어디서 모시는지는 모른다고 하시는데 온몸에 전율이 흘렀습니다. 통화 마지막 즈음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비난이 선명하게 들려왔습니다. 이날 저는 105배를 마치지도 못하고 오열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아버지에 대한 애잔함이 한꺼번에 몰려왔습니다. 올 여름 건강검진을 받을 때 재생불량성빈혈인데 수혈만 몇 번 받고 지금은 정상수치라 말하니 거짓말하지 말라던 의사의 말과 죽음의 문턱에서 조상님들이 너를 살려냈다는 말이 교차하며 진짜 그랬나 보다 하는 마음까지 더해져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혼자 수행을 하는 약 한 달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입도 직전에 조상을 찾은 것까지 저는 아직도 어리둥절합니다. 새 집으로 이사할 때마다 신부님 모시고 가정 축복 기도를 하라는 어머니의 권유에는 한 번도 응답하지 않았는데 수호사님께서 두 번씩이나 방문해 주시니 이 역시도 감사하면서도 어리둥절합니다. 과연 저는 옳은 길로 가고 있는지 혼란스럽습니다. 하지만 입도를 결심하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신 수호사님과 선생님을 믿고 이 길을 가고자 합니다. ◎

종교 이상의 것을 담고 있는 증산도


이그나티예바 아미나(여, 23) / 부산온천도장 / 149년 음력 11월 입도

우주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진리


For the first time I came to Pusan National University I felt a sort of excitement because it was the time to start my study abroad, join to different clubs and meet new friends from all over the world. I wanted to know more about South Korea: it’s traditions, music, food, sport and religions. Therefore, I decided to join a club of Korean martial arts and a meditation club Jeung San Do.
처음으로 저는 부산대학교에 기대감을 가지고 왔습니다. 왜냐하면 해외에서 공부를 하면서 전 세계에서 온 새로운 친구들과 만나며 다른 동아리에 가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한국에서 한국의 전통음악, 음식, 스포츠와 종교 등에 대해 더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무술 동아리와 증산도 수행 동아리에 가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At first I felt and considered it only as an aspect of South Korea. I thought it was one of the Korean traditional religion an nothing more. Still, I was interested in it even though my true religion is Christianity. However, time by time I studied it deeper and deeper, and eventually understood that Jeung San Do is something more than just religion, that is the idea how all the universe works.
먼저 저는 증산도가 한국 전통 종교 중 하나라고 생각했고, 오직 한국의 한 측면만 고려한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저의 종교인 기독교에 대해 아직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저는 점점 더 깊이 고찰하였고 마침내 증산도가 단지 종교 그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것은 전 우주적인 일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천지공사)에 대한 것들입니다.

영혼의 조화와 몸의 평화를 찾다


Now, I found not only friends in Jeung San Do but also the support and hope that Jeung San Do gives me every time. During the meditation I feel harmony in soul and peace in body. I can highly grateful to all the people who help me to understand and learn Jeung San Do.
이제 저는 증산도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증산도가 저에게 모든 순간을 지지해 주고 희망을 주고 있다는 것을 찾았습니다. 수행을 하는 동안 저는 제 영혼의 조화와 제 몸의 평화를 찾았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증산도를 배우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The most interesting part for me is studying cosmology. Before practising Jeung San Do I had a large amount of questions about our world and universe. Step by step, my friends here helped me to understand this system, and then all my questions found their answers. I admire a lot how deep and meaningful studying Jeung San Do is.
저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우주론 공부입니다. 증산도를 실천적으로 하기 전에 저는 우리 세상과 우주에 대해 많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제 친구들이 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고, 저의 질문들은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증산도를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깊이 있고 의미가 있는지 증산도에 존경과 감탄을 표합니다.

조국에서 진리를 실천해 나갈 것


Next week I will go back to my motherland, Russia. Still, I will try to practise Jeung San Do there. One of my plan is telling my sister who has cancer about Jeung San Do because I heard that reading the Tae Eul Ju mantra can boost the process of recovering the disease. Also, I am going to tell about Jeung San Do to my family and friends. I am sure that they will find it great too.
다음 주 저는 조국 러시아로 돌아갑니다. 저는 계속해서 증산도 진리를 저의 모국에서 직접 실천해 갈 겁니다. 저의 한 가지 계획은 암에 걸린 내 여동생에게 증산도를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태을주 주문은 병을 치유하는 힘을 지니고 있고 기운을 북돋아 준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저는 증산도를 제 가족과 친구들에게 알릴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도 이 진리를 찾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

25년 만에 복원된 조상 모시기


김영경(여, 47) / 제천중앙도장 / 149년 음력 11월 입도

어느 날부터 사라진 집안의 제사


아주 오래된 지워지지 않은 기억이 하나 생각납니다. 어머니께서는 가을 추수가 끝난 날에는 시루떡을 꼭 하셨습니다. 시루떡을 접시에 옮겨 담으시고는 언니와 저와 동생에게 장독대, 화장실, 마당, 몽당, 다락방, 부엌, 아궁이, 과수원 초입에 한 접시씩 놓고 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던 날들이 떠오릅니다. 깜깜한 밤에 시루떡을 돌리는 우리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라고 말하는 그 일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날 하루 어머니께서는 저희들에게 뛰지도 말고 시끄럽게 하지도 마라고 하셨는데요. 그 이유를 물으면 신들은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신다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고작 열 살 안팎이던 저희는 하기 싫은 마음에 미신이라고 툴툴거리기조차 하였으니...... 그러나 떡을 돌린 뒤 먹는 떡 맛이 어찌나 맛나던지 참 즐거운 기억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장독대에서 기도하시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엄마가 기도하는 모습은 아직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습니다. 세월이 지나 각자 성장하여 학교를 졸업할 때쯤 어머니는 시루떡 돌리는 일을 더 이상 시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가톨릭으로, 언니와 저는 기독교로 종교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부터 저희집에서 제사라는 것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문상을 하러 장례식장을 가도 절도 하지 않았거니와 음식조차 먹지 않았으니 조상에 대한 감사함이 사라지고 유별난 신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릇된 신념의 틀을 깨다


근 25년 동안 저희 집에서의 제사 풍경은 추석, 설날에만 조상 모시기의 일환인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일로 치부되었습니다. 종교를 갖지 않고 있는 사람은 절을 하고 종교가 있는 사람은 목례로 간단히 마무리하였지만 아버지는 정성스레 차례를 올리셨습니다.

“신은 유일신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은 모시지 말라, 귀신에게 절하면 사탄 마귀에게 속는 것이다.”와 같이 다른 종교에서 25년 동안 무의식으로 만들어진 신념이라는 것이 깨지기가 참으로 어렵더군요. 여러 가지 인연의 실타래로 2017년 봄에 저는 증산도에 입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포감님과 인도자분에게 “저는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드린 뒤 다니던 교회를 마무리하고 개인적으로 증산도 도전 말씀을 웹으로 다운받아 읽으며 상생방송을 보고, 또 그 당시에 주신 책으로 증산도에 대한 선입견과 조상신이 무엇인지 조상님이 또한 무엇인지, 증산도에서 중요시하는 조상 모시기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이 또한 나의 조상님이 되시니


그즈음인 그해 가을에 제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갑작스레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제사 모시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들지 않았습니다. 살아생전에 내 아버지였으며 돌아가셨으면 이 또한 나의 조상님이 되시니 아버지께서 더 좋은 곳으로 가시길 기도하고 꼬박꼬박 절을 올리고 향을 피워 드렸습니다. 제사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나 할 정도로 자연스런 행위가 되었습니다. 돌아가신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꿈에 보이셨는데 아무 말씀 없이 저를 바라보곤 가신 아버지는 측은해 보이기까지 하여서 저는 마음이 슬펐습니다.

2019년 올해 봄과 가을에 다시 꿈에 보이신 아버지께 공부를 하겠다는 다짐을 드리고 올 겨울 제천중앙도장에 찾아왔습니다. 시간이 두 해나 지났음에도 반갑게 맞아 주신 수석포감님과 직장동료이자 증산도에 대해 끊임없이 말씀해 주신 박지연 도생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바른 심법을 갖고 참다운 씨앗으로 쓰임을 받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