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 근대 영욕의 역사를 지켜본 덕수궁과 대한문

[사진으로보는역사]
사실은 순간순간 놓치기 쉽다. 기억으로 붙잡아도 망각의 강으로 스러져간다. 사진은 사실을 붙잡아 두는 훌륭한 도구다. 포착된 사진들은 찰나를 역사로 만들어 준다. 사진 속에서 진실을 찾아보자!



상제님 일행이 서울에 도착하니 때마침 큰 눈이 내려 걷기조차 쉽지 않더라.
상제님께서 덕수궁 대한문(大漢門)과 원구단(圓丘壇) 사이의 광장에 가시어 성도들 중 네 명을 뽑아 사방위로 둘러앉히시고 그 한가운데에 앉으시어 말씀하시기를 “이곳이 중앙 오십토(中央五十土) 바둑판이니라.” 하시니라. 이 때 상제님께서 공우에게 물으시기를 “공우야 쌀이 솥을 따르느냐, 솥이 쌀을 따르느냐?” 하시니 공우가 “쌀이 솥을 따르지요.” 하고 아뢰거늘 말씀하시기를 “네 말이 옳도다. 쌀은 미국이고 솥은 조선이니 밥을 하려면 쌀이 솥으로 올 것 아니냐.” 하시고 “장차 일본이 나가고 서양이 들어온 연후에 지천태 운이 열리느니라.” 하시니라. (도전 5편 336장)


상제님께서 무신년 섣달에 서울에 가셔서 대공사를 보셨다. 양력으로 1909년 1월경이다. 대한문과 원구단 사이의 광장이면 지금의 서울광장쯤이다. 이곳에서 상제님께서는 조선의 국운과 가을개벽기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의 대세를 심판하셨다. 그런데 왜 이 공사를 대한문 앞에서 보셨을까? 당시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이었고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이었다. 덕수궁은 원래 이름이 경운궁慶運宮이었다. ‘나라의 운을 기린다’는 의미다. 이름은 사물의 역사를 대변한다. 이름의 변천 과정, 그것이 곧 사물의 역사다. 경운궁이 이름을 덕수궁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 데에는 아픈 역사가 있다.

원래 경운궁은 임진왜란 이후 왕이 임시로 거처하던 행궁行宮(임금이 나들이 때에 머물던 별궁)으로 정식 이름이 없었다. 1608년,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한 후 왕의 어가御駕가 창덕궁으로 옮기면서(1611년)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정식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는 즉위식을 경운궁에서 거행했다. 이후 경운궁은 270여 년 동안 이궁離宮으로 역사의 변방에서 조용히 숨죽이며 지내 왔다. 그런 경운궁을 역사의 맨 앞자리로 다시 불러낸 사건은 1895년의 을미지변乙未之變이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이듬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옮긴다. 아관이어俄館移御 1주일 후 고종은 비밀리에 경운궁을 수리하라는 명을 내린다. 진작부터 경복궁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었던 셈이다. 경복궁에는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당한 중전의 선혈이 뚜렷하고 일본군이 여전히 궁을 에워싸고 있었다. 친일 관료들도 득실대고 있어 경복궁은 고종이 돌아갈려야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다시 돌아갈 궁으로 경운궁을 낙점한 데는 궁이 외국 공사관에 둘러싸여 있다는 지리적 이점이 주효했다.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그해 10월 환구단에 나아가 고천제告天祭를 올리며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한다. 그 이후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이었다. 1905년 11월 17일 밤에는 일본의 압력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1907년 7월 20일, 헤이그 밀사 파견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의 강압으로 고종 황제의 양위식이 이곳 중화전中和殿에서 거행되었다. 그해 11월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면서 경운궁의 이름을 덕수궁德壽宮으로 바꾸고 태황제궁太皇帝宮으로 삼았다. 덕수德壽라는 말에는 조선의 2대 임금 정종이 태종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덕수라는 호를 받은 것과 같이 자리를 물려주고 오랜 수를 누리라는 일제의 조롱이 담겨 있다.

대안문大安門은 덕수궁의 정문 역할을 했던 곳이다. 1904년의 대화재 이후 경운궁 중건이 마무리되어 가던 1906년 4월 25일, 대안문의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다. 원래 대안문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의 뜻으로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함’의 뜻을 가진 길상어吉祥語이다. 대한문大漢門의 한漢 자는 ‘부랑배, 악한, 괴한’이라는 조롱어이면서 ‘강물’이라는 의미다. 대한문의 대한大漢은 아무리 봐도 그 의미가 대안에 비해 후퇴했다. 당시는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된 시기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막 부임해 온 이후다. 이토는 조선의 얼과 궁궐의 신성함을 무너뜨리는 데 혈안이 된 인물이었다. 어쩌면 대안문은 그의 마수에 걸려 첫 번째로 희생된 우리의 자존심일 것이다.

망해 가는 나라의 임금이었지만 고종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라를 되찾기 위한 모색을 이리저리 해 나갔으니 헤이그 밀사 파견이나 의병 운동 개입이 대표적인 일이다. 일제의 눈에 가시와도 같았던 고종은 덕수궁에서 머물다 1919년 1월 그곳 함녕전에서 돌연 붕어하고 말았다. 고종의 죽음을 일제의 독살이라 의심했던 수많은 백성들에 의해 3.1운동의 거센 물결이 전국을 휩쓸었다. 그 결과로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게 되었다. 고종의 죽음이 한 역사의 종말이자 새로운 역사의 출발이 된 셈이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운명을 묵묵히 지켜본 덕수궁, 우리 민족 영욕의 근대사를 안고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덕수궁의 역사
- 1593년 월산대군月山大君 후손의 저택을 시어소時御所로 정하고, 행궁行宮으로 삼음
- 1608년 광해군 ‘정릉동 행궁’의 즉조당卽阼堂에서 즉위
- 1611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이어移御, 비로소 경운궁慶運宮이란 이름 가짐
- 1618년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서궁西宮으로 낮추어 부름
- 1623년 인조 경운궁 별당(즉조당 추정)에서 즉위
- 1897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어還御
- 1897년 10월 고종,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태극전(현 즉조당)에서 황제 즉위
- 1907년 7월 고종의 양위讓位로 선제先帝가 거처하는 궁이 되어 덕수궁이라 명함
- 1919년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 승하
- 1933년 일제는 덕수궁을 공원으로 개조하여 일반에 공개, 석조전(황제의 집무실)을 덕수궁미술관으로 개관함
- 1971년 대한문을 현재의 위치로 이동 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