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 실패로 끝난 최익현의 거의擧義

[사진으로보는역사]
사실은 순간순간 놓치기 쉽다. 기억으로 붙잡아도 망각의 강으로 스러져간다. 사진은 사실을 붙잡아 두는 훌륭한 도구다. 포착된 사진들은 찰나를 역사로 만들어 준다. 사진 속에서 진실을 찾아보자!



상제님께서 최익현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만경을 떠나 익산 만중리(益山 萬中里)로 가시며 말씀하시기를 “이번에 최익현의 동함으로 인하여 천지신명이 크게 동(動)하였나니 이는 그 혈성에 감동된 까닭이니라. 그러나 그 재질이 부족하여 대사(大事)를 감당치 못할 것이요 일찍 진정시키지 않으면 온 나라가 참화를 입어 무고한 창생만 사멸에 빠뜨릴 따름이라. 더욱이 이번 한해(旱害)를 물리치지 않아 기근까지 겹치면 생민을 구제할 방책이 전무하여 실로 양전(兩全)치 못하리니 내 어찌 차마 볼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내가 공사로써 진압하였노라.” 하시니라. (도전 5편 138장)

“익현은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러 국은(國恩)을 많이 입었으니 이제 국난을 당하여 마땅히 죽음으로써 갚는 것이 의리상 옳으니라. 익현이 또한 이러한 뜻을 가져 나라를 위해 한 목숨 바치고자 하니 나는 그 뜻을 가상하게 여기노라. 그러나 그 뜻을 행동으로 옮김이 천운(天運)을 거스르고 천하대세를 역행하는 일이라. 일본에 항거하는 격문을 날렸으니 이는 자기 한 몸의 죽음으로써 만백성의 목숨을 해치려는 것이로다. 그러므로 나는 익현으로 하여금 신하의 절개를 지켜 죽게 하고 그 세력을 거두려 하노라.” 하시고 “이는 최익현의 만장(輓章)이니라.” 하시며 글을 써 주시니 이러하니라.

讀書崔益鉉(독서최익현)이 義氣束劍戟(의기속검극)이라 十月對馬島(시월대마도)에 曳曳山河橇(예예산하교)라
글을 읽던 최익현이 의기로써 창검을 잡았도다. 시월이면 대마도에서 고국 산하로 썰매 자국 길게 뻗치리라. (5편 139장)


최익현崔益鉉(1834년 1월 생, 이하 양력)은 대한제국 말기를 풍미한 정치인이자 강직한 선비였다. 1855년 과거에 급제한 뒤 관직에 올라 처음에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반대했고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개혁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하지만 대원군의 권력이 강화되고 경복궁 중건, 서원철폐령 등의 정책이 실시되자 대원군의 정책을 실정失政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1873년(고종 10년) 10월에는 계유상소癸酉上疏를 올려 고종이 성년이며 대원군이 섭정攝政할 이유가 없음을 간하였다.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의 10년 집권이 무너지고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1895년 12월 30일 단발령이 시행되자 그는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될 당시 그는 72세의 노구였다. 최익현은 을사늑약을 나라의 멸망으로 간주, 조약 체결 당사자 5명의 처단을 주장하는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와 불법 조약의 폐기, 취소와 의병항일전을 천명하는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렸다. 또한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발표하여 항일 투쟁을 호소하였으며, 포고문과 신문을 통해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 상품 불매 운동 등을 촉구하였다. 이듬해 1906년 1월에 충청남도 노성 궐리사闕里祠에서 원근의 유림을 모아 강연을 열고 시국의 절박함을 알리며 일치단결해서 국권 회복에 동참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1906년 2월에는 자신의 문하생으로 전북 태인의 종석산鍾石山 밑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임병찬林炳瓚을 찾아가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수립하였다. 거사 장소는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으로 정한 뒤, 최익현은 담양의 용추사龍湫寺로 내려가 기우만, 이항선, 장제세, 조안국 등 호남의 명유지사名儒志士 50여 명을 소집, 이들과 회동하여 항전 방책을 논의하고 113명에 달하는 지사들의 연명부인 ‘동맹록同盟錄’을 작성하였다. 한편으로, 순천, 낙안, 흥양, 여수, 돌산, 광양, 장흥, 보성, 강진, 해남, 완도 등 호남 고을마다 격문을 보내 외세를 척결하고 부패한 관료들을 처단할 목적으로 거병함을 밝히고 양심적인 지사들은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1906년 6월 4일 아침 최익현은 최제학, 고석진 등 문인 수십 명을 거느리고 무성서원에 도착, 강회를 연 뒤 거사를 일으켰다. 그때 그는 비통한 눈물을 흘리면서 사생死生을 맹세하였다.

“왜적이 국권을 빼앗고, 적신이 죄약罪約을 빚어냈다. 구신舊臣인 나는 이를 차마 그대로 둘 수 없어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이제 대의를 만천하에 펴고자 한다. 승패는 예측할 수 없으나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죽음을 무릅쓴다면 반드시 하늘이 도울 것이다.”

당일 태인 본읍으로 진군하면서 그는 〈기일본정부서奇日本政府書〉를 발표하여 강화도조약 체결 이래 조선에 대해 ‘기의배신棄義背信’한 일제의 죄상 16가지를 조목조목 논술하였다. 그의 거병에 제자 문인들과 이날 모인 모든 회중會衆이 흔연히 사생을 맹세하니, 최익현은 죽음으로써 국가의 은혜를 갚을 것을 천명하였다. 그 즉시로 80여 명이 대오를 편성한 뒤 태인 본읍을 향해 행군을 개시하였다.

6월 초순 최익현의 의병진은 태인 본읍에 무혈 입성하였다. 그날 하오에는 정읍에 당도하여 정읍 관군과 대결하여 항복을 받았다. 의병진은 이곳에서 소총 등의 무기류와 병력을 확보한 다음 다시 행군하여 내장사內藏寺로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내장사 뜰에서 잠시 군사를 조련한 다음 30여 리를 행군, 지세가 험해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던 구암사龜岩寺로 들어갔다. 구암사에서 그날 밤을 지낸 의병진은 다음 날 첫새벽에 빗속을 행군, 정오경에 순창읍으로 들어갔다. 많은 주민들과 이속들이 나와 의병들을 환영하였으며, 군수 이건용은 최익현 앞에 나아가 항복했다. 이를 전후해서 채영찬, 황균창, 김갑술, 양윤숙 등이 인근 각지에서 포군을 거느리고 합류해 와 의병진의 전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 후 의병진은 그곳 순창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인 6월 8일 남원으로 진출코자 행군, 정오 무렵 50여 리 떨어진 곡성에 당도하여 일제 관공서를 철거하고 세전稅錢, 양곡 등을 접수하였다. 최익현 의병진은 거의擧義 후 태인, 정읍, 순창, 곡성 등 호남 각지를 행군하면서 무기와 군사를 모아 거의 초기에 80여 명에 지나지 않던 병력이 이때에 와서는 9백여 명에 달했고, 그중 상당수가 소총 등의 화기를 소지하게 되어 전력이 크게 증강되었다. 최익현의 뜨거운 일심으로 호남 일대의 의기가 크게 진작되어 주위의 호응이 크게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6월 11일(음력 윤 4월 20일) 아침, 광주관찰사 이도재는 의병 해산을 명하는 광무황제의 선유宣諭 조칙詔勅과 관찰사 고시문告示文을 최익현에게 보내와 의병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최익현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정부는 전라북도관찰사 한진창에게 전북 지방 진위대를 동원해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훈령을 내렸다. 한진창은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를 출동시켜 순창 외곽을 봉쇄하고 읍의 북쪽인 금산錦山에는 전주진위대가, 동쪽인 대동산에는 남원진위대가 각각 포진하여 읍내 관아에 있던 의병진을 압박해 왔다. 최익현은 척후병의 보고로 진위대 군사가 와 있음을 알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하기 위해 전투를 회피하려 했다. 진위대는 오히려 의병진의 피전避戰 자세를 역이용하여 맹공을 퍼부었다. 이 전투로 의병측은 중군장中軍長 정시해가 전사하는 등 일시에 진영이 와해되었다. 최익현은 주위를 돌아보며 “이곳이 내가 죽을 땅이다. 제군은 모두 떠나라.”고 하며 지휘부가 있던 순창 객관 연청椽廳에 그대로 눌러 앉았는데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은 자가 22명이었다. 진위대는 의병 측으로부터 아무런 저항이 없자 사격을 중지하고 지휘소를 에워싼 채 그대로 밤을 지냈다. 드디어 6월 14일, 끝까지 남아 있던 최익현 이하 임병찬, 고석진, 김기술 등 13인의 의사들은 전주로 압송되었다. 이로써 최익현의 의병 항전은 종말을 고하였다.

6월 말 최익현은 이들과 함께 다시 경성부로 압송되어 경성 주재 일본군사령부에 감금당하였다. 2개월간 일본군사령부에 감금된 끝에 최익현과 임병찬은 그해 8월 하순 일본의 쓰시마섬 엄원嚴原 위수영衛戍營으로 압송되어 감금되었다.

유배 당일, 대마도주의 일본식 단발 요구에 대한 항의의 단식을 시작하였다. 일본인들은 강제로 그의 입에 음식을 넣었으나 모두 뱉거나 입을 열지 않고 저항하였다. 이후 대마도주의 사과 및 왕명으로 단식을 중단하였다. 하지만, 3개월 뒤의 발병(풍증)으로 인해 1907년 1월 1일 75세의 나이로 쓰시마섬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최익현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임병찬에게 〈유소遺疏〉를 구술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신의 나이 75살이오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다시 찾지 못하여 4천 년 화하정도華夏正道가 더럽혀져도 부지하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 선왕의 적자가 어육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더라고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최익현의 유해는 1월 5일 쓰시마에서 배편으로 경상남도 동래부 초량草梁에 닿았다. ‘춘추대의春秋大義 일월고충日月孤忠’ 8자의 만장輓章을 앞세운 그의 영구靈柩는 연도에 수많은 인파가 늘어서 애도하는 가운데 청양의 본가로 운구됐다.

상제님은 “최익현이 고종 부자의 천륜을 끊어 그 대죄大罪가 그의 몸에 붙어 있다.”(5편 137장)고 하셨다. 최익현의 계유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어 고종 부자가 10년 동안 상면하지 못한 일을 말씀하신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적법한 정치행위일 수 있지만, 상제님은 이것을 ‘남의 천륜을 끊게 한 대죄’라고 밝혀 주셨다. 또 ‘재질이 부족하여 대사를 감당치 못한다’고 하셨다. 이런 이유로 그의 기운을 거두시게 되는데 의병진이 무너진 6월 11일의 상황을 적은 임병찬의 「돈헌문집遯軒文集」을 보면 “윤 4월 20일 해 질 무렵 청천 하늘에 홀연히 바람이 거세지고 갑자기 비가 오고 번개와 함께 큰 우레가 쳤다. 이에 진위대가 경악하여 모두 총을 버리고 땅에 엎드리는 바람에 비로소 포성이 멎었다.”고 되어 있다. 당시 날이 가물어 인심이 흉흉하여 의병에 가입하는 자가 날로 늘어나자 상제님께서 한해旱害를 물리치는 큰비를 내리심으로써 생민을 구제하시고 의병의 기세를 크게 약화시킨 것이다(5편 137장). 그러나 상제님은 최익현의 기운을 거두시면서도 그의 충의를 인정하시어 표증을 내려 주셨다. ‘대마도에서 일본 기선으로 운구되어 온 최익현의 관이 고국에 하륙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배로 옮겨지자, 청명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더니 운구되는 곳까지 쌍무지개가 떴다’(임병찬의 「대마도일기對馬島日記」, 최제학의 「반구일기返柩日記」)고 한다. 민영환의 충의에 혈죽을 내려 주신 것과 같은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