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서 본 우리 역사 | 가야사 복원을 기원하며(3) 가야 설화와 대외 교류

[역사X파일]
김용호 / 역사 스토리텔러


가야사 복원을 기원하며 쓰는 세 번째 가야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가야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들을 둘러보면 예상하지 못한 유물들을 만나게 됩니다. 함안박물관 전시실에 들어서면 멋진 조명 아래 굽다리 등잔이 그중 하나입니다. 7개 등잔에 불을 붙인다면 7개의 불꽃이 어둠을 밝힐 것입니다. 고조선 시대 수많은 고인돌에 새겨진 북두칠성처럼 망자가 돌아갈 천상계 별자리로 인도하는 일곱 등잔이었을까요? 2천 년 전 가야인들의 속 시원한 설명이 없어 아쉬울 뿐입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제외하면 가야를 중심 주제로 다룬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야 사람들이 어떤 종교 철학 사상을 가졌는지 알기 어렵지만, 가야 설화에 남아 있는 자취를 더듬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가야인들의 대외무역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견모주正見母主와 이비가夷毗訶


■해인사 국사단의 주인
합천에 가면 가야면에 가야산이 있습니다. 산 이름이 가야산입니다. 왠지 가야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올 것 같지 않습니까? 실제로 가야산은 가야 건국자 탄생에 얽힌 설화를 품고 있습니다. 가야산에는 ‘해인사海印寺’라는 유명한 사찰이 있는데, 해인사 안에는 “국사단局司壇”이란 사당이 있습니다. 국사단은 산신과 토지신을 모시는 사당입니다. 이 사당 안에는 탱화가 하나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 여인이 두 아이가 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고, 그 모습을 구름 탄 이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그림 속 여인이 누구일까요? 조선 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해인사 경내에 조선 시대 정견모주正見母主를 모시는 사당인 정견천왕사正見天王祠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전해지고 있지 않는데, 정견천왕의 다른 이름이 정견모주입니다. 정견천왕 혹은 정견모주는 바로 가야산 산신입니다. 그런데 이 산신은 건국 설화 속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진아시왕(대가야 건국 왕)의 어머니이자 김수로왕의 어머니가 바로 정견모주입니다.

국사단 탱화 말고도, 가야산에는 천신天神과 지신地神이 결합했다는 전설이 얽힌 바위가 있습니다. 가야산 백운리에서 칠불봉으로 올라가는 길 서성재 남쪽에 넓적한 바위가 걸쳐 있는데, 가야산 국립공원에서 부르는 공식적인 이름은 ‘서장대’입니다. 현지에서는 ‘가마바위’ 또는 ‘상아덤’이라 불리는 이 바위는 정견모주가 천신인 “이비가夷毗訶”를 맞이할 때에 탔던 가마라고 전승되고 있습니다.

■탄생설화 건국설화
가야 왕들이 태어난 이야기에는 천신 ‘이비가’와 지신 ‘정견모주’가 등장합니다. 이비가와 정견모주 사이에 두 아이가 태어납니다. 한 아이는 커서 대가야 건국자 이진아시왕이 되고 다른 아이는 김수로왕이 됩니다. 고령읍 장기리에 소재한 ‘알터마을’에는 정견모주가 이곳에서 두 개의 알을 낳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옵니다. 그 전설에서 알 하나는 낙동강 줄기로 따라 흘려보내고, 남은 하나에서 이진아시왕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낙동강 줄기로 흘려보낸 알에서 수로왕이 태어나 가락국을 건국합니다. 이 이야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 편’에서 최치원의 「석리정전釋利貞傳」을 인용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가야 이진아시왕과 정견모주 이야기에는 불교 색이 많이 입혀졌습니다. 불교 관념 ‘정견’을 이름에 붙인 것을 볼 때, 해인사를 중건한 대가야 후손들에 의해 불교 색을 입은 설화로 재탄생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설화 원형에서 정견모주는 가야 ‘성모聖母’ 또는 ‘국모國母’가 아니었을까요? 불교 색깔을 덜어내고 보면,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사상”이 설화 중심에 있습니다. 가야의 김수로와 이진아시 두 제왕은 하늘 아버지(天父·天一)와 땅 어머니(地母·地二) 사이에 태어난 자녀(太一·人三) 입니다. 천지 부모의 자녀는 어떤 의미일까요? 천지 부모의 자녀란 곧 “천자天子”, “천손天孫”을 의미합니다. 환인 천제께서 환국을 건국한 이래로, 오랫동안 한민족 역사 속에 도도히 흐르는 “태일太一 사상”이 이렇게 가야 건국 설화에 담겨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정견모주’에 비하여 ‘이비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덜합니다. 모계사회 전통 때문일까요? 이비가에 대해서는 얽힌 지명이나 설화조차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설화 속에서 ‘이비가’는 천신이지만 이진아시와 김수로의 아버지입니다. 다만 ‘이비가’라는 호칭 속에 남은 이夷라는 글자로 한민족과의 연관성을 유추해 볼 뿐입니다. 김수로왕의 흉노계 혈통, 가야 유물들이 가진 대륙 부여의 문화적 특질을 볼 때, ‘이비가’도 그런 맥락에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비가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도 밝혀져 풍부한 가야 역사로 복원되길 희망해 봅니다.

구지봉龜旨峰에 얽힌 설화


■김수로왕은 9간干(칸)의 이름을 바꿨다
앞서 같이 살펴봤던 정견모주 설화에서 강으로 흘려보낸 알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이야기는 구지봉 설화(김수로왕의 건국 설화)에서 등장합니다. 금함(금빛 상자)에서 알이 나와 김수로왕이 되는 설화는 비교적 유명해서 독자들께서는 많은 부분을 기억할 것입니다. 삼국유사에 남겨진 설화 전체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구지봉에 이상한 소리가 있어 9칸과 백성들이 모여듭니다. 형체 없는 존재가 소리로 황천상제皇天上帝(원문에서는 상제란 단어가 생략되어 있으나 허왕후 내용에서는 황천상제로 기록되어 있다)의 명으로 이곳의 왕이 되려 한다고 말합니다. 9칸과 백성들에게 땅을 파면서 구지가龜旨歌를 부르고 뛰면서 춤추게 합니다. 결국 하늘에서 자줏빛 줄이 내려오고 그 줄 아래에 보니 하늘에서 내려온 6개 알이 담긴 붉은 함을 발견합니다. 첫 번째 알에서 나온 이가 김수로로 가락국왕이 됩니다.

설화는 후대로 전승되면서 많은 이야기가 덧붙기도 하고 생략되거나 변형되기도 합니다. 김수로왕 탄생 건국 설화가 실제 사실로부터 얼마나 변형됐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김수로왕 집단과 9칸 집단이 성공적으로 연합하여 나라를 건국했음은 사실로 보입니다. 9칸의 세력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김수로왕과 함께 가락국을 시작했던 9칸과 그 백성들, 「삼국유사」에는 산과 들에서 농사짓고 살았던 사람들처럼 적혀 있습니다. 지난번 글에서 살펴봤듯이 그 당시에 김해평야는 바다였습니다. 9칸의 이름을 보면 1아도我刀ㆍ2여도汝刀ㆍ3피도彼刀ㆍ4오도五刀ㆍ5유수留水ㆍ6유천留天ㆍ7신천神天ㆍ8오천五天ㆍ9신귀神鬼입니다. 평범한 농사꾼들 이름이 아닙니다. 그 지역을 주름잡던 무력 집단이 아닐까 싶은 이름입니다. 9칸과 그 백성들은 단순한 토착 농경 집단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나중에 김수로왕이 관제를 정비하면서 이들 이름을 고상하게 바꿔줍니다. 이유는 소인宵人(이익만을 좇는 사람), 야부野夫(야인) 같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김수로왕을 중심으로 한 유입 세력은 북방에서 내려온 부여 흉노 연합세력으로 기마유목민 성격이 농후합니다. 가야가 해양 세력으로 발전해 나갔던 사실을 가지고 역으로 유추하면 9칸 세력은 김수로왕 세력과는 전혀 다른 바다에 익숙한 해상 무장 세력이 아니었을까 하고 필자는 추측합니다. 이러한 가설이 사실로 밝혀질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김수로왕의 혈통
합천 박물관 전시실에는 옥전고분 하나를 재현해 놨습니다. 그 재현한 무덤실 안에는 다른 고분에서 흔히 보지 못했던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큰 뿔 사슴이 한편에 놓여 있습니다. 흉노 등 기마유목 민족 무덤에서는 큰 사슴이나, 뿔 염소 혹은 염소 뿔을 씌운 말 들이 같이 매장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옥전 고분에서도 이렇게 큰 뿔 사슴이 같이 매장됐습니다. 북방 기마민족의 매장 문화가 가야 고분에서 나타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김수로왕 혈통에서 이러한 매장 문화의 단서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김金씨를 처음 썼다는 흉노 김일제金日磾 이야기부터 들여다보겠습니다. 흉노 선우(황제)의 번왕 휴도왕休屠王이 한漢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태자인 일제와 동생 윤倫이 포로가 됩니다. 김일제는 극적으로 한나라 왕의 신임을 받아 김씨 성을 하사받게 됩니다. 그리고 투후秺候(제후국 왕으로 산동, 섬서, 화북 일부 지역을 다스림)까지 됩니다. 이때부터 휴도왕 아들 일제는 “김일제”로 불리게 됩니다. 김일제의 후손은 대대로 투후를 계승하는데, 서한 말 왕망王莽이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신新’나라를 건설합니다. 이 당시 왕망과 김일제 집안은 친척 관계였습니다.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 ‘김당金當’의 이모부입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김씨 일가가 신나라 건국에 많은 공헌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신나라는 개국 15년 만에 유수劉秀(후한의 왕, 광무제)에게 패망당하고, 이 과정에서 김일제의 후손들은 성까지 바꾸고 멀리 도주하여 흩어지게 됩니다.

신나라가 망하고 후한이 일어설 때 우리 민족은 어떤 상황이었을까요? 고구려 대무신 태왕(3대 태왕)이 대륙을 호령하던 시기입니다. 김일제가 포로로 잡히던 시기부터 신나라가 망할 때까지 우리 민족에게도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한나라의 도발을 분쇄시킨 동명제 고두막한이 북부여를 계승하면서 본래 북부여의 지도층과 일단의 무리들이 가섭원으로 밀려나 (동)부여를 이어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큰 전쟁은 없었지만, 현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준 내전 상황이 아니었을까 추측됩니다. 고두막한이 계승한 북부여(졸본부여)는 다시 추모태왕(고주몽)이 고구려로 계승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추모태왕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안착하기까지도 평탄치 않았습니다. 고조선이 쇠락하고 나서 본래 고조선 강역을 두고 잦은 주도권 경쟁이 반복되게 됩니다. 이 와중에서 고구려는 점점 더 강력하게 동북아 중심 국가로 자리매김해 나갑니다. 열국 어디에도 합류하지 못하고 고구려와 같은 강국들과 경쟁하기 어려운 고조선 유민들과 흉노계 집단들은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한반도 남부로 흘러들어 갑니다.(김일제의 5세손은 신라의 김알지가, 김일제 동생 윤의 5세손 탕湯은 김수로가 된다) 이러한 내용은 <문무대왕릉비>에 실린 “투후제천지윤秺候祭天之胤(하늘에 제사 지내던 투후(김일제)의 후예)”이란 여섯 글자에 나타나 있는데, 이는 흉노계 김씨 집단의 한반도 유입을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흉노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야만적이고 저열한 미개 종족 또는 오랑캐 정도로 생각해서인지, 흉노의 신라·가야 김씨 기원설에 과민하게 반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족이 세운 나라는 문화 대국이고 그 주변 민족들은 야만적이라는 중화 사상에 젖어 온 사대주의 관념이 빚은 오해입니다. 흉노는 결코 한나라보다 미개하거나 야만적인 종족이 아닙니다. 중요한 사실은 흉노는 우리 한민족과 아주 가까운 관계였다는 점입니다. 흉노 일부는 혈통적으로 우리와 같은 동이족東夷族이기도 했습니다. 기마유목민들 사이에는 현대적인 국경선 개념이 없었습니다. 한민족과 흉노는 드넓은 초원을 공유했습니다. 또한 한민족과 흉노는 동일한 종교 철학 사상을 공유했으며 경제적 문화적 교류도 아주 빈번했습니다. 가야 고분군에서 발견된 오르도스형 동복, 청동대야, 말 장식, 장식 허리띠 고리는 길림성 중심으로 생활했던 부여의 유물과도 거의 동일합니다. 서부여가 살았던 라마동에서 발견된 유물과도 유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흉노 지역이었던 동시대 몽골 고분에서 발견된 여러 유물이 거의 같은 디자인과 상징을 사용했습니다.(지난 최씨낙랑국에 대한 월간개벽 내용 참고)

가야인들은 상업 전문가(유리 기술과 무역)


■가야 무덤에서 나온 로만글라스
가야에 금은金銀 유행이 시작되기 전에는 유리옥이 대표적인 귀중품이었습니다. 김해 양동리 유적은 넓이만 3만여 평(미터법으로 환산)에 이르는 대규모 가야 유적 단지입니다. 양동리에서는 여러 가지 색깔의 크고 작은 유리옥과 금박을 입힌 유리옥들이 다량 발견되었습니다. 이 유물들이 김해박물관의 한편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먼저, 가야의 ‘글로벌Global’ 대외 교역을 드러내 주는 ‘로만글라스’부터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2013년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로만글라스(로마 양식의 유리 용기)’의 일부분(파편)이 김해시에서 출토됐습니다. 대성동 91호분(4세기로 추정)에서 발견된 로만글라스 파편은 도굴 갱에서 발견됐습니다. ‘도굴 갱’이란 도굴꾼들이 무덤 속 유물을 가져가기 위해 파 놓은 굴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온전한 로만글라스가 발견됐다면 경주에서 발견된 것보다 최소 70년 앞선 유물이었을 텐데. 이후에 다시 합천에 있는 옥전고분(M1호분)에서 온전한 로만글라스가 발견됩니다.

로만글라스가 무엇인지부터 설명이 필요하겠습니다. 로만글라스ROMAN GLASS는 2~5세기까지 로마 제국의 속지인 서아시아 지역에서 생산되고 로마 통치권역에서 사용된 유리 제품입니다. 가야 고분에서 발견된 로만글라스는 중동과 아시아를 거쳐서 아주 먼 거리를 넘어왔습니다. 육상 실크로드 혹은 해상 교역로 중 어떤 길로 들어왔는지 세세히 알 수 없지만, 가야와 신라 강역에서 발견된 고품질 로만글라스는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교역품입니다.

중국은 당시 위(위촉오 삼국 시대), 진, 남북조 시대를 거치는 시기입니다. 위진 시대는 우리가 잘 알듯이 내전상태였고, 남북조 시대는 북방 기마민족과 남방 한족이 장강을 두고 남북으로 대치하던 시기입니다. 로만글라스는 이 시기에 중국을 거치지 않고 한반도 남부까지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가야와 신라만의 교역 루트가 있었음을 추정케 합니다. 가야나 신라 상인들 입장에서 중간 상인을 안 거치고 직접 교역을 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으로 이득입니다. 물론, 그만한 능력이 필요합니다. 북방 실크로드나 초원길을 거치면서 값비싼 통행세를 지불하거나 수많은 도적들을 회피(혹은 제압)하고 가져오거나, 해상으로 악천후와 거친 바다를 넘어 섬들 사이에 도사린 해적들을 피해서(혹은 제압하고) 가져올 능력이 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가야와 신라인들은 그런 능력을 가졌다는 증거가 바로 로만글라스입니다.

■한민족의 독자적인 유리 기술
그런데 로만글라스 이야기를 하고 나면, 가끔 ‘유리’는 전부 수입해 온 귀중품으로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집트나 서아시아보다는 유리 사용이 늦었지만 동아시아에서는 가장 먼저 유리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2500년 전 고조선 후기에 만든 유리옥이 충남 보령 평라리 선사 유적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성분을 연구한 결과 그 당시 한족漢族이 갖지 못한 ‘산화납’을 사용하는 유리 제조 기술이 적용됐다는 사실이 밝혀져 한동안 주목을 받았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독자적인 유리 기술을 보유했다는 증거는 전국 각지에서 발견되는 ‘유리 거푸집’과 제작 흔적들입니다.

유리는 성분 차이에 따라 다양한 빛깔을 갖게 됩니다. 가야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유리들은 다양한 소재와 기법이 동원된 귀중품들입니다. 가야 고분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리에 대한 연구 결과를 보면 한반도에서 제작된 것뿐만 아니라 인도 남부, 스리랑카,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제작된 것들이 다수 포함 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소재와 기법이 사용된 유리들이 한 고분에서 같이 발견되는 것은 세계적으로 드문 사례라고 합니다. 가야인들은 지역마다 유리 특성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에 서아시아(로마 제국), 인도, 동남아 등 각지와 활발하게 유리 교역을 한 게 아닐까요.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파사석탑


■아유타국에서 배 타고 시집온 허왕후
가야의 해양성 특징을 부여했을 가능성은 또 다른 설화에서도 엿보입니다. 「가락국기」에는 김수로왕의 부인이 된 ‘허황옥’이라는 여인의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설화 내용은 이렇습니다. 허왕후 부모님은 꿈에서 황천상제皇天上帝를 직접 뵙게 됩니다. 꿈에서 본 이야기를 자신의 딸 허황옥(허왕후의 이름)에게 전해 주는데, 그 내용은 가락국에 김수로왕이 있으니 허황옥이 그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서 아유타국 왕은 딸을 배 한 척에 태워 가락국으로 바로 보냅니다. 하지만 큰 풍랑을 만나 되돌아옵니다. 그러자 아유타국 왕은 파신波神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파사석탑婆娑石塔’을 배에 실어 주고 허황옥은 무사히 항해를 하게 됩니다. 신앙심이 이런 무모한 행동의 이유가 될까요? 결혼할 사람을 찾아 바다를 건너온 멋진 로맨스 같지만, 보기에 따라 아주 황당한 이야기로 느껴집니다.

아유타국 왕과 왕비 그리고 공주는 황천상제에 대한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는 김수로가 상제의 천명으로 왕이 되었다는 천자 사상도 투여되어 있습니다. 성스럽고 신비로운 설화이지만, 살짝 비현실적입니다. 그리고 김수로왕을 신성시하는 관점을 내려놓고 보면, 김수로왕(혹은 그 아버지 이비가)과 아유타국 왕과 왕비는 이전부터 교류하지 않았을까요? 김수로왕과 그 아버지 이비가가 인도 민족들과 교류했을 가능성이 전혀 없을까요? 특히 한국어와 유사성이 높은 언어를 가진 타밀인들과 교류하지 않았을까요?

제가 허황옥 부모라면 얼굴도 모르는 남자를 만나라고 배 한 척에 딸을 태워 험한 바다로 파사석탑을 실어 보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더 재미있는 내용은 김수로왕이 허왕후가 올 것임과 도착할 시점에 대해 예측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고대인들은 신통력이 있어 미리 알았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아유타국과 소식을 교환하고 있었다면 허황옥이 결혼을 위해 오고 있음을 미리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아유타국은 이미 동남아와 중국 남부까지 확보된 교역로나 기반 거점을 갖춘 집단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배경을 믿고 배 한 척에 딸을 보내지 않았을까요? 필자의 상상력에 현대적인 시각에서 설화를 비틀어 봤습니다.

■김해 예안리 고분에 묻힌 사람들
지금은 작고한 소설가 최인호 씨가 출연했던 ‘역사추적’이라는 KBS 다큐멘터리가 있었습니다. 그중 2008년도 봄에 방영된 “제4의 제국 가야(2부 파형동기의 비밀)”에는 대성동 고분에서 발견된 파형동기巴形銅器 유물을 국제적으로 추적해 나가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다큐 말미에 놀라운 사실이 언급됩니다. 바로 예안리 고분에서 발견된 인골 유전자 분석 결과 인도계가 확인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 다큐멘터리를 보고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보도 자료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가야 건국 설화에 불현듯 등장하는 허왕후의 아유타국이 아주 특이합니다. 낙동강 유역 김해 근방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던 이야기 무대가 엄청나게 확장됩니다. 인도 이름 같기도 하고 동남아 국가 이름 같은 아유타국. 그래서인지 아유타국에 대해서 수많은 설이 제기되었습니다.

예안리 고분에서 나온 인도계 인골들은 허왕후 이야기가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음을 반증합니다. 그리고 파사석탑 재질이 인도 중동부 연안 지역에서 발견되는 암석이라는 사실은 허왕후 인도 도래설이 사실적으로 느껴지게 합니다. 하지만, 한국 사학자들은 허왕후의 인도 도래설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싶어 합니다. 그 학자들을 직접 인터뷰해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주장이 담긴 논문과 서적들을 살펴보면 나름 몇 가지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첫 번째 가야의 역량보다 외세 영향력을 크게 부각합니다. 두 번째 가야의 해외(인도-동남아-남중국 연안-발해연안-한반도 연안-열도) 활동에 대해서 부정하거나 축소하려 합니다. 세 번째 왜에 대한 가야의 영향력을 단순 ‘교류’ 차원으로 제한하고자 합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의 연장선인지, 아니면 한사군 영향력을 부각시키려는 것인지, 아니면 임나일본부를 위한 개연성 확보를 위한 것인지 숨은 의도가 의심스럽습니다. 로만글라스나 유리옥을 보면 가야는 한漢족이 세운 왕조나 북방 민족이 세운 왕조들과 무관하게 서아시아, 인도, 동남아와 교류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한 왕조의 영향력(특히, 평양에 있었다는 낙랑군) 아래 묶어 두고 가야의 성쇠를 같이 엮으려는 해석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낙랑 대방과 교역하면 가야가 발전하고, 교역하지 못하면 쇠퇴한다는 논리입니다. 마치, 중국 왕조가 가야의 숨통을 쥐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그러나 활발한 해외 교역 같은 가야 실체를 직시하면, ‘임나일본부’와 같은 왜 지배설이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식민사학자들이 가야사에 걸어 놓은 색안경과 프레임은 왜倭 한반도 남부 지배설이 위축되는 것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전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대외 교류를 가능하게 했던 저력


■가야의 힘, 배
남해안 일대에 살았던 선조들께서 남긴 몇몇 유물들은 많은 정보를 말해 줍니다. 8천 년 전 비봉리 통나무형 목선과 죽변리 판재형 목선과 반구대 고래잡이 암각화에 그려진 수많은 배들을 보면 상고 시대부터 배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음을, 남해안 일대에서 발견되는 흑요석黑曜石들은 선조들께서 대한 해협을 건너 대마도와 규슈(九州)지역까지 오고 갔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검은 빛깔에 윤기가 반질반질한 이 돌이 대한 해협을 건너는 항해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궁금해하실 텐데요, 흑요석은 화산 지대에서 생성되는 암석입니다. 한반도에서는 백두산 근방에서만 채취할 수 있는데, 남해안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만 건너면 규슈(九州) 지역에서 이 흑요석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차돌같이 단단한 돌을 깨서 얇고 날카로운 돌칼처럼 다듬으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흑요석은 암석의 독특한 성질 덕분에 결대로 깨면 돌칼이나 송곳 같은 날카로운 도구를 만들기 쉽습니다. 돌의 특성을 살리면서, 돌칼이나 돌화살촉으로 가공하기 쉬운 암석이 흑요석이었습니다. 청동 기술이 출현하기 전에는 더할 나위 없는 돌 도구 재료였던 셈입니다. 그래서 흑요석은 대한 해협을 넘나들던 용감한 상고 시대의 항해 기술을 말없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박 건조 기술과 활발한 바닷길 개척 활동은 수천 년이 넘는 시간과 함께 한반도 남부에 자리 잡았던 가야에도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앞서 김해 봉황동 유적을 통해서 김해가 항구였다는 내용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함안 아라가야나 고령 대가야를 봐도 지리적 입지 조건상 육로와 함께 하천과 바다를 이용한 교통과 운송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천 년 선박 건조 기술과 활발한 해양 활동으로 축적된 노하우는 가야 성장과 발달에 큰 장점으로 작용했으리라 추측됩니다.

앞서 살펴본 허왕후 설화를 보면 인도와 동남아로부터 바닷길로 김해에 이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삼국유사 기록으로 보면 허왕후가 타고 온 배에는 대략 40~50명이 승선한 것으로 보입니다. 가야 사람들은 이런 항해를 할 수 없었을까요? 그 궁금증에 대한 길을 열어준 유물이 2012년에 김해 봉황동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유물은 배 일부분(이후 ‘선박 부재’로 명칭)입니다. 이 선박 부재는 길이 390cm, 폭 32~60cm, 두께 2~3cm인 꽤 큰 크기입니다. 온전한 배 전체 모습으로 발견됐으면 좋겠지만 천 년이 넘는 시간을 뛰어넘어 이 정도 크기로 남아 있는 것도 기적일지 모르겠습니다.

이 선박 부재는 현재 김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쐐기 및 쐐기 홈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배를 만들 때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만들어졌으며, 이런 부분들을 조립해 배를 완성시켰음을 의미합니다. 4미터짜리 선박 부재를 최소 4조각 이상 이어 붙여야 배 한쪽 상단부 구성이 가능합니다. 그렇다고 보면 선박의 대략적인 길이는 구조상 15m 이상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가장 작은 크기로 추정하더라도 대략 25명~35명 정도 탑승 가능한 크기가 나옵니다.

이 선박 부재가 알려주는 흥미로운 사실은 이제부터입니다. 2014년도에 선박 부재에 대한 분석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녹나무와 삼나무 두 종류입니다. 녹나무는 난대성 수종으로 중국과 일본에서 많이 자라며 한반도에서는 남해안 일부 지방과 제주도에서 자생합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선박을 건조할 정도로 크게 자라지 않는답니다. 그럼 당연히 남南 중국이나 열도로 좁혀집니다. 더불어 ‘쐐기’에 사용된 나무는 일본 열도에서만 자생하는 수종이면서 고대 일본에서 선박 건조에 흔히 사용된 삼나무입니다. 결론은 열도에서 생산되는 재료로 만든 배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말로만 들었던 가야의 대외 무역의 결과물을 보고 있는 셈입니다.

■무역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군사력
우리는 지금 자유 무역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가마다 비교적 안정된 치안과 신용도를 바탕으로 물품을 인도하고 대금을 지급받습니다. 물론 소말리아 해적 같은 부류들이 있어 위협을 받기도 하지만 전 세계가 총칼 같은 무력 없이도 상거래에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편한 무역이 불과 수백 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다면 믿겠습니까? 특히 운송 중인 무역품은 약탈 대상 1호였습니다. 수백 년 전 대항해 시대에 유럽 국가들은 ‘사략선’이라는 배를 운용했습니다. 국가가 용인한 해적선입니다. 적국 상선이 실은 화물이란 사략선의 좋은 먹잇감입니다. 사략선이 아니더라도 상고 시대부터 최근까지 무력을 갖춘 세력은 언제든지 바다 위의 해적이나 지상의 약탈자가 될 수 있습니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무역을 하려면 거기에 걸맞는 무력을 보유해야만 가능한 경제 행위입니다. 상선이라고 해도 배의 안위를 위해 일정 인원 이상의 전투 병력을 보유해야 했으며, 모든 선원들은 최소한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무장을 해야 했습니다.

가야 경쟁자들은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가까이에는 다른 가야 제국들이 경쟁 관계였으며, 신라와는 5백 년 동안 적대적인 시간이 더 길었습니다. 열도 왜 세력 중에도 적대적인 세력이 있었습니다(친 신라계, 친 고구려계 왜 소국들). 가야로부터 철을 수입했던 최씨 낙랑국이나 발해, 황해 연안의 세력들도 언제나 우호적이진 않았을 것입니다. 한나라 같은 한족漢族 왕조들도 그들의 이해타산에 따라 얼마든지 긴장 관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가야는 수백 년 동안 주변국들과 무역을 했습니다. 오랜 무역 활동만으로도 가야의 군사적 역량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운남, 광주(한나라 남부 영역), 하북성 낙랑과 대방 지역(서백제 혹은 대륙백제), 요동과 평안도 지역(최씨낙랑국), 동 백제와 열도까지 여러 국가 세력들과 교역을 지속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분명히 영리한 외교와 적절한 상술 그리고 대등한 군사력(특히 해군력)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됩니다.

3편에 걸쳐서 가야에 대한 여러 주제를 살펴봤습니다. 짧은 글 몇 편으로 가야의 진면목을 인식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만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가야는 힘없는 작은 농경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저 멀리 인도와 동남아, 중국 연안, 발해 연안, 한반도와 왜 열도를 잇는 무역 네트워크를 가진 무역 국가였습니다. 가야 왕들은 스스로 천자임을 자부했던 남부의 강자였습니다. 고조선 문화를 계승했으며 독자적인 세력을 5백여 년간 지속했던 국가였습니다. 가야는 중요한 우리 선조들의 역사입니다.

가야사는 사료가 제한되고 부족한 유물 연구로 명료한 설명보다는 추측과 가설이 더 많아 아쉬움이 큽니다. 하지만,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과 전승되는 가야 설화에서 우리 전통 사상과 철학 그리고 종교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가야사 복원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야사 복원은 일제 식민사학을 극복해야 하며, 무관심 속에 묻혀 있는 부여와 북방기마민족 간의 긴밀한 역사가 조명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본 열도를 지배 혹은 경영했던 백제와 가야, 신라의 역사가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가야사 복원은 단순한 영호남 지역색 극복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라 한민족의 고대사가 복원되어야 완성될 수 있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역사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서 한민족 가야사가 정립되기를 기원하면서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고령현 편’
최치원崔致遠의 중[釋] 이정利貞의 전기(석리정전釋利貞傳)를 살펴보면,
“가야 산신 정견모주는 천신 이비가에 응감한바 되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라 하였다.”(번역: 한국고전번역원. 김종오1969)

원문:伽倻山神正見母主 乃爲天神夷毗訶之所感 生大伽倻王惱窒朱日金官國王惱窒靑裔 二人則惱窒朱日爲 伊珍阿豉王王之別稱 靑裔爲首露王之別

「삼국유사」권2 ‘기이 가락국기’
又曰 “皇天所以命我者御是處惟新家邦為君后,
為兹故降矣, 你等湏掘峯頂撮土歌之云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以之蹈舞. 則是迎大王歡喜踴躍之也.”

“황천(상제)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여 이런 이유로 여기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고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게 될 것이다.”

로만글라스Roman glass
로마제국 시대 망간 함량이 높은 유리 제작 기술이 발전하게 되는데,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제작되어 지중해 연안과 흑해연안, 유럽 전역에 걸치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된 유리(기원전 1C~ 기원후 5세기)를 로만글라스라고 한다.(출처:[네이버 지식백과](고고학사전, 2001. 12. 국립문화재연구소)

평라리 유리구슬(환옥環玉)(기원전 5세기)
1995년 국립중앙과학관 정동찬 박사팀이 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선사 유적지에서 발굴해 낸 것으로 당시에는 기껏해야 3천 년 전의 평범한 구슬로 여겼었다. 그러나 유리구슬을 통과한 헬륨 이온은 묘한 모양으로 스펙트럼을 형성했다. 유리구슬에 산화납(PbO)이 1.7% 함유되어 있음이 금속공학자 최주崔炷 박사에 의해 증명됐다. 산화납은 낮은 온도에서 유리를 만들 수 있게 하면서 유리의 내구성을 높여 주는 첨가 물질. 따라서 산화납의 존재는 유리 제조 기술이 매우 앞서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원전 5세기경의 유리구슬에서도 산화납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실험 결과로 유리 제조 기술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독창적으로 개발되었다는 ‘새로운 역사’를 밝혀낸 것이다.[출처:<동아일보> 1997.04.12.]

파사석의 의미 추정
가야의 허왕후가 부모로부터 받은 파사석탑婆娑石塔의 파사석婆娑石, 즉 파사돌은 고대 타밀어로 똑같이 Paasadol로 불렸다. Paasadol은 ‘Paasa’(부모나 스승, 성직자 등의 사랑, affection)에다 ‘dol’(고대 타밀어로 ‘돌’, stone)이 합쳐진 합성어이다. ‘돌’은 우리말과 고대 타밀어가 그 발음과 뜻에서 완전히 일치하는데 현대 타밀어에서는 칼(kkal)로 바뀌었다. 그래서 현대 타밀어에서 Paasadol은 Paasakkal로 일컬어지고 있다.
타밀 사회에서는 자녀들이 멀리 떠날 때 부모나 성직자들이 평안과 신의 가호를 빌고 악을 물리치도록 하기 위해 몸에 지니는 부적과 같은 Paasadol을 주었다. 현재는 ‘돌’ 대신 ‘금(Gold)’으로 만든 목걸이 등을 준다. (출처: 토론토 소재 한국타밀연구회 회장 김정남씨가 타밀 전문가들과 인터뷰하며 밝혀낸 내용, 2009)

“김수로왕 부인 인도서 왔다는 기록 후손 유골 DNA 보니 진짜 같네”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후가 인도에서 건너왔다는 ‘인도 도래설’이 사실일 수 있다는 과학적 증거가 제시됐다. 서울대 의대 서정선 교수와 한림대 의대 김종일 교수는 지난 17일 춘천 두산리조트에서 열린 한국유전체 학회에서 이 같은 내용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날 발표자로 나선 김 교수는 “허황후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김해 예안리 고분 등의 왕족 유골을 분석한 결과 우리 민족의 기원으로 분류되는 몽골의 북방계가 아닌 인도의 남방계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이 유골에서 미토콘드리아 유전물질(DNA)을 추출해 전체 염기서열을 분석하는 방법을 썼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 내에서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기관으로, 자체적으로 유전되는 DNA를 갖고 있다. 특히 이 DNA는 인간의 경우 어머니 쪽을 통해 유전되는 것으로, 과학계에서는 이를 가계도와 진화 연구에 주로 활용한다. (출처: 중앙일보 2004.08.19 보도)

허왕후의 고향, 비밀의 왕국 “아유타”의 여러 설
①열도설
일본에 있던 삼한 삼국의 분국分國과 연계하여 일본 규슈(九州) 동북방에 있던 가락국 분국설 - 김석형 1966

②중국설
“한사잡물漢肆雜物(한나라의 여러 가지 사치스러운 물건)”이라는 단어, 시종한 인물들 관직이 중국계 명칭이 많다는 점, 중국 선진 문물을 가지고 해상으로 들어온 집단 혹은 낙랑樂浪에서 온 유이민 혹은 상인 집단- 김태식 1998

중국 사천 안악 지역에 고대에는 보주普州라는 지명이 있었다는 점, 사천성 안악에서 발견된 금석문 「신정기神井記」에서 ‘보주허여황옥普州許女黃玉’이 새겨진 명문,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馱國에서 살다가 사천 지방으로 이주한 허씨 성을 가진 집성촌 존재 등 - 김병모 1994

③태국설
인도 중부 갠지스강 유역에 있던 아유디아ayudia국이 1세기 전에 태국 메남강변에 이주하여 건국한 국가로 파악 - 이종기 1977

④인도설
‘승만경’이란 불교 경전 중에 언급되는 승만부인이 아유타국의 왕비였다는 점과 아유타를 대당서역기 제5에 언급되는 인도 중부 지역에 있던 고대 왕국으로 보는 설

사략선私掠船(privateer)
근세 초기 유럽 국가들은 상비 해군력을 보충하기 위해 세금을 쓰지 않고 무장한 선박과 선원을 동원하여 ‘교전 자격’을 부여하여 사략선으로 활용했다. 사략선은 적국 상업을 교란시키고, 적국으로 하여금 더 많은 전함을 배치하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했다. 사략선은 해적선과 유사하지만, 국가로부터 권한을 받아 합법적 습격과 약탈 활동을 했다. 1907년 헤이그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국제법으로 폐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