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 郞 우주선에 탑승하며 (조양희)

[입도수기]
조양희 / 서울광화문도장 / 도기 147년 음력 4월 입도


나는 북두칠성에서 온 상제님의 딸이라 카이


소설가이셨던 엄마는 돌아가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년의 딸과 같이 담소를 했다. 누가 들으면 어처구니없겠지만 우리만의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나는 실성하여 아득히 먼 별들을 내 가슴으로 광속 초대하여 보듬어 안곤 했다. 우리가 주고받던 말은 이랬다.

“양희야, 엄만 오리온성좌에서 온 공주야. 니 알제?” 하면 나도 대뜸

“그니까요. 내가 별에서 온 공주님의 이쁜 딸이잖어여.” 하고서.

일단 나부터 예쁘다고 추키고 목젖이 보일 만큼 마주 보며 우리는 행복하게 낄낄 웃곤 했다.

“야들이, 뭐라카노. 나는 북두칠성에서 온 상제님의 딸이라 카이.”

한술을 더 뜨시는 외할머니셨다.

“아이고, 못 살아. 그랍시더이. 우주가족이다 고마.” 엄마의 결론이었다.

지금은 두 분이 나를 남겨 두고서 은하계로 왔다리 갔다리 하신다고 믿는다.

그런데 행복했던 그 추억들이 실제로 후천세계 문화로 펼쳐져 더욱 행복할지도 모르는 충격의 대 사건이 생겼다. 입도 공부를 하면서 21일 새벽수행을 하는 동안 우리 공주님들의 이야기를 자주 떠올렸다. 나는 기도문에 태을천, 구천, 천지, 천하, 천상, 신천지를 달달 외우면서 “와, 이 기도들은 내 묵기默記이다” 하며 기뻐했다.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양희야, 은하계까지 안 가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 같대이.’라는 속삭임이 툭하면 들려왔다.

새벽길 머리 위에 유난히 쟁반같이 둥근 노란 만월을 눈에 맞추고, 누가 뭐라 말하지 않아도 달만 바라보면 왜 눈물이 주룩 흐르는지.

“저 달빛, 엄마 맞지? 오리온에 잘 계시죠? 거긴 오늘 안 추워? 어두운 새벽길에 비쳐 줘서 고마워. 엄마.” 하며 눈물을 닦았다.

초겨울 동지冬至를 앞세운 새벽의 만월로부터 흐무러지는 영롱한 그믐달로 이어지는 긴 밤, 여명의 길목에서 날 보호해 주셨다고 믿는다.

나에겐 입도의 대궐문이 버거운 큰 산이었다. 이 곤륜산을 넘고 가기에는 내장이 틀어지고 세포들이 뭉쳐 으스러지며 흐트러져 결국 누가 이기나 하더니 터져 버렸다.

인간은 영원히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살지 못하고 벌레와 똑같이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엄마의 임종을 통해 체험하고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자존심과 신앙심으로도 내 한탄을 막지 못했다. 어디서 어떻게 이 혼동을 막아야 좋을지 몰랐다.

개벽의 두 글자에 신선함을 느껴


어느 날 필연적으로 다가온 개벽의 두 글자 앞에서 나는 꼼짝없이 이것 봐라, 신선함을 느꼈다. 그런 나를, 나는 바라보고, 던져 보고, 묻고, 싸우고, 물어뜯고 벗겨 보고 하면서 방자 무례하고 무식한 내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기를 쓰고 다가오는 기적을 막으려 했지만 아, 막을 수 없는 필연적인 은혜의 기적은 일어나고 말았다. 이렇게.
그 상상의 북두칠성과 오리온성좌의 별들을 가까운 지상에서도 만날 수 있는 마당을 찾은 것이다. 천상옥경천존신장天上玉京天尊神將, 천상옥경태을신장天上玉京太乙神將... 이것을 지르밟고서 엄마와 할머니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내 운명처럼 받들어 믿게 되었다.

6.25 전쟁은 민족에게 가난과 대 혼란기였지만 나는 오히려 그때가 내 생애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가족의 훈풍 속에서 지내는 동안 외할머니에게 감사를 전한다. 나는 불과 얼마 전에야 할머니가 보천교를 신앙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의 많은 이야기 중에 할머니 이야기를 꺼내게 되는 이유는 이분의 생활 자체가 신문화였기에 후일 돌이켜 보니 가슴에 사무친다.

자연을 존경한 할머니의 보천교 정신세계는 생활 자체가 하늘과 신을 섬기며 자기 본래의 문화로 일상에 부드럽게 자리매김하였다. 누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해야 한다가 아닌 절로 몸이 당기고 마음에 심어 둔 봉오리가 피어나는 꽃처럼 수행과 단련을 하셨다.

나의 외할머니는 고려 말 충신인 정몽주鄭夢周의 16세 외손녀 정복희鄭福嬉이시다. 할아버지의 올곧은 성품을 물려받아 외할머니는 꼼꼼하고 최선을 다하는 성품이라 어린 내 의식의 잔뼈 속으로 등불을 심어 주고 밝혀 주신 분이다.

일제 때, 할머니의 장남인 큰 외삼촌(동경제대)은 21살에 학병으로 잡혀서 아세아 전쟁터로 끌려갔다. 만주로 떠나기 전에 발진 티푸스에 걸려 한 줌의 재로 모국의 어머니 품, 할머니에게 돌아왔다. 평생 큰아들을 가슴에 묻고 원수 나라 일본을 용서해 주는 기도를 끊임없이 드렸을 것이다.

엄마와 아빠는 일 하느라 분주한 때라 대신 할머니가 집안의 빈자리를 채웠다. 어린 나를 돌보며 야무지게 살림을 정리 정돈하셨을 거라 여겨진다. 유년의 장독대가 그림 동산으로 기억되는 것은 햇살에 반들거리는 항아리들이 졸망졸망 키 재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소나기가 내려 칠 양이면, 화들짝 놀란 할머니는 장독 뚜껑을 찾으셨으리라. 또 뒷마당 빨랫줄에는 풀 먹인 하얀 이불 홑청들이 널려 있었고 그 속으로 파고드는 계란빛 햇살들... 구구단은 잊어도 여전히 유년은 잊지 못한다. 그리고 이불 홑청의 밥풀 냄새도 잊을 수 없다. 암탉, 병아리, 고양이, 토끼, 사나운 개, 감이 안 열리는 감나무, 분꽃, 봉숭아, 채송화, 무궁화나무들, 빨간 나팔꽃, 방울 넝쿨, 수세미, 소나기, 밤하늘의 별들, 북두칠성, 창호지를 흔들던 바람, 아버지의 큰 신발, 마당에 앉은 기러기들, 수돗가, 정겨운 집 구조, 햇살과 담 위에 꽂힌 오색 사금파리 등등이 내 가슴 속에 여전히 살아 있는 유년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께 받은 영성 수업


할머니는 나를 지문이 짓무르도록 사랑해 주었다. 그 사랑이 어린 나의 뇌리에 아롱다롱 새겨졌고 그것은 유년의 특별한 나의 인생 수업 시간이 되었다. 할머니의 수업은 이랬다. 음식 먹을 땐 꼭꼭 100번, 길 걸을 땐 앞으로 똑바로, 물을 보면 상제님께 감사, 밥알은 농부의 눈물, 단오가 되는 날에는 창포를 끓여 그 초록의 물로 머리를 감겨 주셨고 내 이마 한 가운데 붉은 도장을 찍으시고

“이곳에 높은 어른이 계신대이.” 하며 엄지로 꾹 눌렀다.

빠지는 머리카락은 장판지에다 모아 꽃잎 같은 바늘꽂이를 만들었고, 부모가 물리신 손발톱은 한곳에 모아 아궁이 불에 감사히 태웠다. 하얀 고무신도 주문을 외우며 정갈하게 벗어 놓았다. 천지에 귀히 여기지 않는 것 없고 개미 한 마리를 만나면 “안녕하신가.” 하며 미물 하나를 그냥 넘기시지 않았다. 담에 부끄럽게 피어나는 풀꽃에도

“애쓰십니더. 무당벌레 쉬고 가시네요.”라며 수고한 풀꽃들에게 시를 읊어 주었다.

나는 백일해로 고생을 했는데, 기침이 나면 백 번 해야 멈추는 것을 가련히 보신 할머니는 한동안 과일 배 속에다 꿀을 넣어 한지로 바르고 황토로 덧바른 것을 아궁이에 구워 냈다. 익은 배를 모시에 부어 밥 수저로 비틀어 짠 배 물을 나에게 먹이시며

“우리 상제님 입으로 들어가십니더이.” 나는 상제님이 약이며 맛난 음식이라고 알았다.

이렇게 소소한 것에 빌고 함께 살고 있는 미물의 존재를 순수하게 일러 주신 방법은 내가 어른이 되어서 놀라운 영성수업을 받았음을 깨닫게 만들었다. 모든 생명의 존재 가치는 정확한 타당성과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할머니는 믿었다.

뿐인가. 틈만 생기면 상고사를 비롯하여 심청전 홍길동전 임꺽정 등을 읽고 한지 책이 나달거릴 때까지 읽는 문학소녀였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보천교는 공부 벌레다.

해마다 12월 동지가 되면 달력에 찜해 두셨다가 정성껏 팥죽을 끓였다. 종지에 기름을 붓고 심지로 불을 댕기어 종짓불을 받쳐 들고 부엌은 물론이고 방들과 집안의 안팎은 물론, 화장실의 벽에도 붉은 팥물을 굵게 뿌렸다. 일 년 내내 붉은 팥물의 흔적을 바라보며 부정적인 기운을 막아 준다고 믿었다. 나는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놓칠세라 꼭 붙들고 따라다녔던 기억이 새삼스레 난다. 할머니가 버선을 기우면 어린 나인데도 옆에서 버선을 기웠던 나는 지금도 만들기와 바느질하기를 좋아한다.

할머니의 손은 약손이자 의술의 손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디들이 길이요 음과 양이요 달도 보이고 해도 보이는 숫자의 달력이었다. 지금 딱히 표현을 하자면 이야기보따리를 가진 로봇 같으셨다!

설에는 세배를 한 다음 가족들을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놓고 토정비결을 봐 주셨다. 손가락 마디를 엄지로 다박다박 짚으며 띠와 시를 암산했다. 사람마다 성품을 미리 짐작하시고 조심할 것들과 덕담을 챙겼다. 방바닥에 한지를 펴고 성냥개비를 수십 개 꺼냈다. 생각하니, 바로 성냥개비들이 음양오행을 의미하고 정역팔괘, 하도낙서 등을 익히었으며 우주의 순환, 그리고 24절기를 훤히 꿰차고 박식하셨다.

때문에 장 담고 음식과 김치를 장만하려면, 오이김치는 입하를 맞이할 무렵에, 이른 봄날 고추장을 담글 때는 손이 없는 말날에, 김장은 소설 대설 사이에 행사를 하셨다. 장 담그기 전엔 정화수 그릇 떠 놓고 음식이 맛나게 돼 달라고 천지조화 풍운신장께 비시는지, 부엌에 계시는 조왕신에게도 비셨을 것으로 짐작된다.

“할무니, 눈에 누가 보여?” 하고 내가 물으면 자애어린 시선으로 내려다 보며

“하모 많이 보이제, 어르신들이 웃으시는 기라, 조상님들이 다 오셨지 그리.” 하셨다.

천하영웅들과 악귀잡귀 금란장군들께서 찾아오시는가 보았다.

솥에서 밥 푸실 때도 부엌에 숨어 사는 미물들을 생각에 두고 밥 한 숟갈을 대접 물에 말아 던지시며 “잘 묵거래이.” 했다.

또 머리쪽에 찌르던 노리개를 뽑아 뒷머리를 긁으며 낼 누가 올 낀데

“옷매무시를 단정하게 해야제” 하면, 누군가 찾아와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셨으리라.

성당 활동과 나눔포럼 봉사


내가 13살 되던 해, 내 뜻과는 상관없이 서울 명동에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설립한 계성 여자 중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졸업을 하는 동안 영세와 견진을 비롯하여 천주님의 기사로서 남모르게 봉사하는 방법을 익혔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의 모범적인 집안이 되기 위해 가족 모두를 전교시켰다. 친척들까지도 입문을 시켰고 포교 활동은 나의 모토이었다.

내가 할머니에게 천주님께서요 하고 여쭈면 그분이 바로 옥황에 계시는 상제님이시며 대우주의 으뜸 주인이신 분이시다고 대답하였다. 할머니에겐 내 힘으로 허물 수 없는 부드러운 빛 향기의 오라를 지닌 분이시라 나는 할머니만은 천주교 입교를 위한 운동에서 너그러이 뺐다.

대학 시절 신앙생활 그룹 봉사와 성모 기사로서 활동을 했다. 예수회나 성심회에 제삼회 회원으로 수도회 회칙을 뼛골에 사무치게 넣고 박애 정신 실천을 비밀리에 활동하여 상부로 보고했다.

성 프란치스코회나 아우스비치 감옥에서 신혼을 맞는 청년 대신 자신이 스스로 죽음을 청했던 성 골베 신부의 수도회 후원자로 월간 기사 잡지를 담당하며 원고를 위해 바삐 쏘다녔다.

성당 활동은 밑바닥부터 봉사 직에 참여하여 결국 간부로 여성 회장에 자리매김을 하는 등 활동의 살림살이까지, 또 미사 전례를 돕고 성서낭송 방송은 물론 신부와 수녀들의 생활사도 관여하여 보살피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영적 수련을 위해 수련소를 다니며 특별한 삶을 봉헌하는 거룩한 독서 그룹을 나누고 피정 센터에서 나눔 포럼을 꾸준히 했다. 또 이태리 로마에 본부를 가진 훠콜라레(일곱 가지로 나누는 삶) 회원이기도 하다.

믿음으로 영적 성장한 나에게 성직자들은 가톨릭대학 동창회장직을 맡겼고 국제 이태리 제노아에서 열렸던 여성포럼대회에 참가했다. 주제는 성서에 나타나는 Vocation과 Passion(소명과 도전)으로 오늘날 종교를 가진 여성이 어떻게 주변 사회를 변화시키는가 하는 문제였다. 32개국 나라별로 자기 구역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하여 포럼을 열고 문제점들을 나눴다. 미래의 여성은 어머니의 창조 사랑으로 세상의 한계점을 타파하고 더 나은 세상으로 변화시킬 것과 남성 사회에서 누려야 할 여성의 조화로운 생활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매듭지었다. 가톨릭여성 국제모임은 돌아와 보고하고 구역에서 나눔에 보탬이 되어 훗날까지 영향을 준다.

이렇게 지나온 발자취를 더듬게 되는 이유는 나는 가톨릭적 경향이 매우 짙은 여성이기 때문이다. 과연 내가 가톨릭 배경을 벗어난 문화적 변화의 색다른 도전과 그에 맞는 과정을 통과해 나갈 수 있을까를 짐작해 보았다. 부수적인 일들에 따라올 변화가 귀찮고 일단 두려웠다. 수면이 고요한 물가에 돌을 이리저리 던져 물고기를 죽이지 말자는 식의 안일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방향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주기적으로 몸살처럼 앓는 물음이 있다. 과연 맞게 사는 것일까, 이게 진정한 내 심연의 깊이 묻힌 뿌리일까 하고 양심에 정직하게 묻는 것이다.

할머니의 훔치 자장가와 내 도시락편지


나는 1988년도에 소설 <겨울외출>로 문학상을 받고 소설가로 문단에 등단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가톨릭 TV방송과 평화방송 라디오 프로, 불교라디오 방송 오전 10시 음악프로 진행자였고 KBS 아침마당의 고정 패널이었으며, 평화 TV방송 진행은 신부와 같이 감동의 명화 진행을 했다. 또한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회, 가톨릭 문우회 회원으로 매주마다 출간하는 서울대교구 서울주보(매주 독자 30만 부)에 최인호, 박완서와 함께 ‘말씀의 이삭’란에 1년 동안 기고를 했다.

이렇게 작품 생활을 하면서도 일상생활 속에서 유년의 할머니의 교육이 문학에 묻어나 새롭게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도 보천교의 할머니와 똑같은 내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할머니께서는 나에게

“오늘은 상제님께서 너의 나무를 정해 줄 꺼구마, 니 살펴보그라이.”

하시며 분꽃으로 내 입에 꽂아 주었다. 나도 내 아이들에게

“오늘 너의 나무를 정했니? 사랑한다고 안아 주고 오너라.”

이렇게 쪽지를 도시락에 넣어 학교로 보냈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훔치, 훔치, 우리 양희 잘도 잔다.” 하고 할머니의 훔치 자장가가 울리면 나는

“옳지, 옳지, 꼬꼬. 멍멍.” 하고 옹알거리다가 잠들었다고 들었다.

나는 훔치 자장가를 나의 아이들에게 “옳지 자장가”로 들려주며 내 아이들도 그렇게 잠을 재웠다.

그런가 하면 <도시락편지> 쓰는 작업은 나의 업보라 여겼다. 가족 사랑과 엄마의 짝사랑을 반찬 삼아 먹고 크라고 10년간 보냈는데 2천여 통이 넘은 쪽지 메모들이었다.

이 편지글은 조선일보에 다섯 쪽지 글이 소개된 다음 호응도가 좋아서 곧바로 <도시락 편지>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되었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돌고 아이들에게 사랑의 메모 쓰기로 표현하기와 쪽지 글로 사랑을 연결하기를 전국 대회까지 열어 100만 부 이상 판매되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내 생애 가장 감동을 준 책”이라고 신문에 추천해 주셨다. 그 당시 ‘엄마 사랑을 아이에게 편지로 전하세요’는 전국 돌풍을 몰고 와서 편지쓰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원조가 되었다. 전국 도시마다 불려 다녔는데 KBS, EBS TV는 물론 제주도 MBS까지 강의를 했다.

<도시락 편지>는 2002년부터 초등학교 5학년 읽기 교과서에 수록되었고 여전히 우리 초립동들의 감성 교육에 도움을 준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비교적 독서를 하지 않고 손전화나 게임 등 놀이 기계물에 더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책을 잘 읽는 초립동들에게는 솜 인형을 만들어 하나씩 선물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했다.

그 이유는 어린 아이들에게 여린 감성을 일깨워 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아이들에게 선물한 인형을 헤아려 보니 98개나 되었다. 지금 생각을 모아 보면 그 뿌리는 내 할머니가 만들어 준 목화솜 인형 덕이고 그 잔상이 내 가슴에서 여전히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려오는 집안의 전통이 자연적으로 교육이 되지 싶다. 할머니는 보천교의 주문들을 암송하며 나를 잠재우셨고 또 솜 인형을 만들었고 그것을 나에게 주셨으리라.

그 후 내무장관으로부터 훌륭한 부모상 감사패를 받았으며 여성의 해에 프랑스 파리 언론계에서 선정을 한 〈지구를 빛낸 33인의 여성> 친환경 부분에 뽑혔다. 살펴보면 할머니의 친환경 실천을 옮긴 것뿐인데.

중년에 맞이한 용서의 문제


중년이 되자 처음부터 결혼 반대로 시부모의 시선에서 사랑받는 며느리가 되지 못했다. 섬세한 나에게는 심적으로 부담이었고 사랑받지 못하는 며느리는 내 삶의 중심 부분을 차지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깊숙이 괴롭혔다. 시어른은 다른 친척들과 의논 없이 맏종부인 나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조상으로부터 의례히 물려받아야 할 모든 물리적인 조건을 차단시켰다. 당연히 받아야 하는 나의 몫이 다른 이에게 물리도록 하는 일종의 테러는 나의 자식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 아픔을 보고 쾌락을 느낄는지는 모르지만 물려받은 조상의 제사는 지금까지 내가 올린다. 3대에 걸친 조상의 사진들을 모셔 두기 때문에 21일 수행 시작부터 복록수를 매일 올려 드린다. 집안의 불공평한 사연은 종교심과는 다르다. 열심히 믿는 신자의 의미가 내 삶에 무슨 영향을 주고 있는지 모르겠으며 과연 외부와 내부가 다른 두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

용서의 문제는 아이들이 성장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나에게는 무거운 고인돌 같은 문제로 남아 있다. 미움의 두께는 내 신선한 영적 영토까지도 짓눌렀다. 세월이 쓰다듬어 마음의 병도 나을 법한데, 곰팡이 균 같은 상처들은 다시 곪고, 툭하면 계절병이자 고질적인 만성질환으로 깊게 파였다.

미사 때마다 예수의 몸인 빵, 성체를 향하여 “내 천주요, 내 천주님이십니다”라고 읊조린다. 분명 예수님의 빵인데 천주님이라고 한다는 것도 자꾸 걸렸다. 아들인 예수님을 “아버지이십니다.” 하는 것은 찝찝하다.

개벽 아니면 이뤄질 수 없는 삶


개벽이 아니면 이뤄질 수 없는 나의 삶이다. 몸은 부서지듯 아팠고 나는 진리 앞에서 솔직하지 못했다. 용서하기 싫은데 강제로 용서하라니 구겨진 삶에 대해 이유를 진실하게 알려고 하지 않고 그럼에도 영원불멸의 아버지로부터 창조된 나는 언젠가는 사랑의 젖줄 같은 빛이 다가오리라 막연히 바라고 있었다.

그때 즈음에 우리네 덕담들이 새삼스럽게 마음에 쏙 와닿았다. 중동의 과월절(유월절)은 잘 몰라도 우리나라의 솟대 문화 이야기, 도깨비 빗자루나 혹은 지역 전설, 속담들은 거부감 없이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차츰 우리 고유의 민족 뿌리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가 더불어 생겨났다. 우리 한韓민족의 역사는 어떻게 이뤄지고 오늘에 여기까지 내려온 것일까 하는 막연했지만 강열한 열정이 뭉쳤다.

고구려보다 더 넓은 몽고의 드넓은 평야인 대지도 우리 한민족의 영토라는 말을 들어보긴 했지만 과연 사실일까. 우리의 얼굴을 가진 민족의식과 한국적 토속 신앙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혹도 점점 커져 갔다. 만 년보다 더 오래 된 고인돌은 왜 우리 영토에 그리도 많은 것이며,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뿌리 신앙은 불교, 유교, 도교, 혹은 동학일까? 나는 왜 스스로에게 지나간 우리 역사의 상고사와 환단고기에 대해 묻거나 생각지도 않았을까. 그 이전을 거슬러 부족국가들의 하늘을 숭배하는 믿음을 왜 알려고 하질 않았을까 하는 여러 가지 물음을 가지게 되었다.

환단고기를 통해서 천부경은 성서보다 더 오래전부터 내려 온 모든 기도의 열쇠이며 또 우리 민족에게 거의 일만 년 역사를 통하여 하늘을 섬긴 상제문화가 있었던 사실은 놀랍고도 자랑스럽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무수한 고인돌이 과연 우리 땅에 당연히 놓여 있어야 하고, 이미 만 년 전에 가장 먼저 신문화, 상제님을 모셨다는 사실 역사를 보고 기쁨은 물론이고 공부를 지속적으로 해도 모자라겠다는 마음이 솟구쳤다.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후회가 마음의 북을 둥둥 쳐 댄다. 살펴보면 인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어 과연 누구를 섣불리 사랑하고 미워할 시간조차도 결코 모자란다.

나는 입도를 위한 공부를 하면서 부스러진 수많은 우리 민족의 역사 장벽이 사라지고 숨겨져 버린 현실을 아프게 목격했다. 만방에 외침으로써 우리의 무수한 조상들처럼 드넓은 대지인 축복의 땅을 우리가 맞이해 축복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 멈추질 않는다.

예비 공부를 하면서 우주 구천을 휘돌아 무한한 은하수 별들에게 이르는 주문들을 받았다. 특별히 기도문들 속에서 보석 같은 자가 치유의 열쇠 태을주를 알았다. 도공 속에 기가 있는 파장과 우리 몸 내장들의 역할을 튼튼하게 해 주는 소리 도공과 우주 역시 소리라는 놀라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한 시루에 든 공동운명체


현대 문명이 부르는 각종 질병과 사방에서 일어나는 테러와 크고 작은 전쟁에서 도망칠 수 없는 질곡의 운명에 놓인 우리 인류는 전 세계의 예언대로라면 개벽이 올 터인데, 선천 세계로부터 살아날 방법과 개벽 때에 견딜 수 있는 힘은 태을주라는 것을 믿고 있다. 태을주는 오래전 우리 조상들로부터 전해 온 상제 문화의 꽃이기 때문에 태을주 없이 믿음 길을 간다는 생각은 보물섬 지도 없이 보물을 찾으러 떠나는 여정과 같다는 의미다. 후천 세계의 문화를 누리고 싶기에 태을주의 보물섬 지도를 받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확고해졌다.

그래야 엄마나 할머니를 재회할 수 있을 것이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많은 조상들을 그려 볼 때 입도의 결심은 두말할 여지 없이 나를 점점 조여 왔다.

할머니의 음성이 들린다.

“원망 말고 용서하거라, 따지지 말고 용서하라, 용서하고 또 용서하그라, 용서 못하면 조상 쳐다볼 낯이 없지 그리. 시어머니도 네게 큰 덕을 베풀러 오신 분이다. 그 역할을 다한 것뿐이니 원망 말거라. 용서해야 네 자식들에게 복이 간다. 나도 큰아들을 죽인 일본을 용서했구마. 그래야 너희에게 복 가라고.”

이렇게 들려오는 할머니 목소리이다.

당장 시어머니의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뽑아 왔다 갔다 눈앞에 잘 보이는 데 세워 두고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용서합니다. 오늘도 용서해요.”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저변의 깊고 비탈진 나의 고정 의식의 벽이 산산조각 나면서 개벽이 시작되었다는 걸 나만은 느낄 수 있다.

전엔 한 번도 미움을 치유하려고 주체적인 방법을 사용한 적이 없었으니까. 고질적으로 굳어진 내 신앙 습관도 배신이라는 극한 단어들도 슬그머니 꼬리를 감췄다. 단지 아들의 방에서 아버지가 계시는 안방으로 옮기는 것뿐이다. 우리는 떡시루, 한 솥에 든 하나의 운명 공동체이며 한 지붕 한 살림이라고 여겨졌다.

태을 郞 우주선에 탑승하며


입도의 결심은 이것이다 저것이다 분명한 원인으로 결론지을 수는 없지만 다양한 현실 경험을 통해 내려지는 순수한 마음이다. 구체적인 영원불멸의 삶은 어찌 살아 내야 하는가에 대한 즐거운 탐험대 조직이다. 그것은 태을 랑이며 세부적인 포교의 도안을 그려서 내 두 뼈다구 어깨에 메야 할 것이고 세포 6임조직 태을랑 동체에 탑승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내 개인의 생각으로, 스스로의 태을이 되겠다는 뜨거운 피와 남모르게 먼저 솔선수범한 숨겨진 땀방울이다. 꾸준한 수행을 닦은 투명한 수정체의 인격을 갖춘 태을 인이다. 고통을 견뎌 낸 진주 눈빛 같은 태을 랑郞으로 진화하기 위해 서둘러 입도를 결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힘겨운 입도 결심의 7년의 과정은 이제 끝, 태을 郞 우주선에 탑승한다.

증산 상제님의 신비한 눈빛 속에서 입도식을 올려 드렸고 엄마와 할머니도 만났다. 우리는 무언으로 서로 알아보고 눈물을 글썽이었다. 영적 세계와 연결되는 현실 세계는 뭐라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신비하다.

꾸준히 공부를 시켜 주신 광화문도장 수호사님의 수고에 머리 숙여 감사 인사를 드린다. 그동안 한국 문단에서 활동한 내 작품들과 경험들을 토대로 포교 활동에 조금이라도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쁨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