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鬼鄕

[영화산책 ]

겹겹이 쌓인 원한을 푸는 날, 고향으로 돌아가자!



*천지에 가득 찬 여자의 한(恨)

선천은 억음존양(抑陰尊陽)의 세상이라. 여자의 원한이 천지에 가득 차서 천지운로를 가로막고 그 화액이 장차 터져 나와 마침내 인간 세상을 멸망하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이 원한을 풀어 주지 않으면 비록 성신(聖神)과 문무(文武)의 덕을 함께 갖춘 위인이 나온다 하더라도 세상을 구할 수가 없느니라. (도전 2편 52장 1절~3절)


*정음정양의 남녀동권 세계를 개벽하심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때는 해원시대라. 몇 천 년 동안 깊이깊이 갇혀 남자의 완롱(玩弄)거리와 사역(使役)거리에 지나지 못하던 여자의 원(寃)을 풀어 정음정양(正陰正陽)으로 건곤(乾坤)을 짓게 하려니와 이 뒤로는 예법을 다시 꾸며 여자의 말을 듣지 않고는 함부로 남자의 권리를 행치 못하게 하리라.” 하시니라. (도전 4편 59장 1절~3절)


*호연의 천지 마음에 붙인 일본 내모는 대공사

기유년 어천하실 무렵에 상제님께서 호연에게 “공부해야지, 저놈들을 싹 쓸어 보내야지!” 하시거늘 호연이 “어떤 놈?” 하니 “아, 까만 놈 말여.” 하시고


“호연아! 이제부터는 앉으나 누우나 붓으로 점을 찍으며 ‘일본놈 씨도 없이 해 주십시오. 이 땅에서 개가 핥은 듯이 없애 주십시오. 우리 조선을 찾게 해 주십시오.’ 하고 항시 입에 달고 다녀라.” 하시니라.


이후로 호연이 틈만 나면 먹을 갈아 가르침대로 행하니 불을 때면서도 부지깽이로 땅에 점을 찍으며 읽고, 뒷간에 가서도 막대기로 두드리며 외우는데 기유년 섣달까지는 구릿골에서 머무르며 행하고 그 이듬해인 경술(庚戌 : 道紀 40, 1910)년부터는 전주 본집으로 돌아가 명하신 대로 하거늘 을유(乙酉 : 道紀 75, 1945)년에 해방이 되매 과연 일본 사람들이 모두 개가 핥은 듯이 깨끗하게 물러가니라. (도전 5편 404장)


*일본 사람이 제 선령신을 찾아가게 하심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은 천지도수(天地度數)가 정리되어 각 신명의 자리가 잡히는 때라. 일본 사람이 효(孝)줄을 띠고 조선에 건너와서 임진란 때에 각 오지(奧地)에 들어가 죽은 저의 선령신들을 찾아가려 하므로 이제 조선의 의병들이 그 일을 이루어 주려고 산중 깊숙한 곳까지 그들을 이끌고 들어가느니라.” 하시니라. (도전 5편 287장)


*수부님께 내리신 일등 무당 도수

상제님께서 친히 장고를 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천지굿이라. 나는 천하 일등 재인(才人)이요,너는 천하 일등 무당(巫堂)이니 우리 굿 한 석 해 보세. 이 당(黨) 저 당(黨) 다 버리고 무당 집에 가서 빌어야 살리라.” 하시고 장고를 두둥 울리실 때 수부님께서 장단에 맞춰 노래하시니 이러하니라.
세상 나온 굿 한 석에
세계 원한 다 끄르고
세계 해원 다 된다네.
상제님께서 칭찬하시고 장고를 끌러 수부님께 주시며 “그대가 굿 한 석 하였으니 나도 굿 한 석 해 보세.” 하시거늘 수부님께서 장고를 받아 메시고 두둥둥 울리시니 상제님께서 소리 높여 노래하시기를
“단주수명(丹朱受命)이라.
단주를 머리로 하여
세계 원한 다 끄르니
세계 해원 다 되었다네.” 하시고
수부님께 일등 무당 도수를 붙이시니라. (도전 6편 93장 4절~9절)


귀향, 통한의 역사에 묻힌 외마디 절규


누구에게나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 온 터전은 세상 그 어디보다 안락하고 포근한 곳이다. 한 조각의 기억과 그리움마저도 싱그러운 옛적의 분신이 되어 너무도 소중하다 못해 애잔하기조차 한 소회를 던져주는 것이 바로 고향이다. 그렇게 자신 존재의 본거이자 상념의 원천과도 같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우리는 귀향歸鄕이라 부른다. 가진 것이 비록 넉넉치 않더라도 무조건 나를 포용하고 위로해 줄 것만 같은 고향은 그래서 꼭 되돌아가고픈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것일 게다.

하지만 되돌아 가야 할 그곳에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통한의 굴레에 갇혀 잊혀져가는 수많은 어린 소녀의 영혼들이 또 다른 귀향을 청하고 있다. 우리에게 가슴 아픈 역사의 참담한 속살을 드러내며 “이제 집에 가자”는 간절한 절규를 수없이 되뇌이던 소녀들을 지금 우리 곁으로, 시리도록 그리운 고향으로 인도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귀향鬼鄕’이라 불러도 무슨 여한이 있으랴. 영화 <귀향>은 그렇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태워지는 처녀들’이 만든 국민들의 영화


이 영화는 한 장의 그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영화를 만든 조정래(43) 감독은 2002년 생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후원시설인 나눔의 집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처음 만났다. 그곳에서 강일출 할머니가 미술 심리 치료 중 그린 ‘태워지는 처녀들’이란 그림을 보게 되었다. 위안부 소녀들의 시신이 산속 구덩이에서 불태워지는 현장을 본 할머니의 기억이 담겨 있는 그림이었다. 조 감독은 그때 충격을 받고 일제 치하 위안부 피해자들의 비극을 영화를 만들어 문화적 증거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시나리오를 완성하게 되었다. 위안부慰安婦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치욕과 잔혹의 상흔을 남긴 역사의 비극 속에 존재하는 말이다. 철저히 일본 정부와 일본군 위주의 어휘로서 이를 일본군 성노예라고 하는 게 적절할 것이지만 이 글에서는 이미 널리 쓰이고 있는 이 단어를 쓰기로 한다.

조정래 감독은 역사의 수렁에서 청춘의 꿈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짓밟히고 죽음을 당한 그들의 혼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의미로 영화의 타이틀을 일반적인 의미인 귀향歸鄕이 아닌 귀신 귀鬼, 고향 향鄕으로 정했다. 그는 ‘태워지는 처녀들’ 그림을 본 직후 불타 죽은 소녀들이 흰 옷을 입고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조 감독은 2008년 완성된 시나리오를 가지고 투자자를 물색했다. 하지만 투자 유치는 쉽지 않았다. 민감하고 암울한 주제에 세간의 흥행 코드와 어울리지 않는 영화 제작에 손을 내미는 곳은 없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7만 5270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크라우드펀딩crowdfunding(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이용해 소규모 후원이나 투자 등의 목적으로 인터넷과 같은 플랫폼을 통해 다수의 개인들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행위로서 주로 자선활동, 이벤트 개최, 상품 개발 등을 목적으로 자금을 모집하는 것)으로 총 제작비 25억 중 절반가량을 조달하였고, 여러 배우들과 제작진의 재능기부 등이 모아져 14년의 제작 기간을 거친 끝에 완성된 작품으로 우리 앞에 오게 된 것이다.

다른 상업 영화와 같은 기준을 이 영화에 들이댈 필요는 없다. 다소 지루하고 부족한 연출은 한 많고 지난했던 할머니들의 삶을 되새겨 보는 의미로 넉넉히 상쇄가 되는 일이고, 다소 풋풋한 배우들의 연기는 진정성과 영화를 보는 우리들의 마음으로 충분히 자리매김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를 애국심에 호소하는 마케팅이라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독일의 2차대전 때 만행을 담은 영화를 할리우드를 통해 끊임없이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이제야 그러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고마운 일이며, 한편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필요한 영화로 의미를 부여해도 결코 어색하지 않을 내공이 이 작품에 깃들어 있는 점에 한번쯤 주목해 보기 바란다.

<귀향>포스터가 전하는 메시지


<귀향>의 포스터는 영화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슴을 울리는 두 개의 카피 문구와 함께 두 소녀가 손을 잡은 채 웃음을 머금은 모습이 담겨 있다. 그 웃음이 밝고 아름다운 의미의 미소라면 더 바랄 게 뭐가 있을까. 어느 순간 그 웃음이 슬픔과 원통함이 깊게 배인 희미하고도 아픈 미소라는 것을 알아채면서 가슴이 너무도 뜨겁고 먹먹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혼자만의 감상이 아니라 관객들이 같이 공감하는 공통된 감성의 파장이라는 것도 함께 경험하게 된다. 그러한 다수의 느낌들이 <귀향>을 ‘공감의 영화’로 만든 것이다.

‘무엇이 소녀들을 지옥으로 보냈나’
이 문구는 극 전반을 아우르는 문제의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강제로 점령당한 후 우리 민족은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과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1938년 전쟁의 광기에 치달았던 일제는 소위 ‘국가 총동원법’을 발표하면서 ‘일본군 위안부’가 생겨나게 되었다. 대대적인 조선 처녀 사냥이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1945년 8월 광복이 되기까지 약 20만 명의 조선 여성이 일본군의 성 노예가 되었다. 이는 공식기록이 없어 추산한 인원으로,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여성이 일제의 마수에 희생되는 고통을 겪었다.

아무도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들은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능욕을 당해야 했다. 그들 옆에는 부모 형제도 없었고, 조국도 없었다. 그들을 위해 우는 사람도 없었다. 현지에서 일찍 죽은 이들이 오히려 행복할 정도로 육신과 영혼은 갈가리 찢겨져 나갔다.

하지만 그들을 지옥보다 못한 그곳으로 몰아넣은 것이 과연 일본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정작 죽음보다 더한 치욕과 고통을 안겨준 것은 그들을 외면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이었다. 이제야 꺼내기 쉽지 않은 작은 기억 하나를 꺼내 놓았을 뿐인데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진실과 아픔을 외면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는 영화 제작 과정에서 겪은 지난함과 우리 정부의 태도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들이다.

‘언니야 이제 집에 가자’
이 문구는 이 영화가 지향하고자 하는 바를 나타내는 카피이다.

영화 속의 한 장면을 가져와 보자. 패전에 임박한 1945년 8월, 일본군은 위안부 여성들(조선 사람만이 아니라 일본군이 점령했던 지역의 여러 여성들) 70~80명을 한곳에 모았다. 수로처럼 긴 구덩이가 이미 파여져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도망가지 못했다. 그들은 그 수로 언덕에 세워졌고 앞에는 일본군 트럭이 서 있었다. 엄습하는 두려움에 떠는 그들에게 뒤로 돌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연이어 요란한 총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그들은 낙엽처럼 구덩이로 떨어졌다. 일본군은 시체 위에 기름을 부었고, 불을 질렀다.

지옥 같은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었으리라. 따뜻한 봄날 감시병으로부터 잠깐의 허락을 얻어 다 같이 나란히 앉아 ‘가시리’ 노래 한 자락으로 시름을 잊던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10대 소녀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희망은 꺾였고, 이역만리 타국에서 한 많은 생들이 툭 떨어져 버렸다. 그 외로운 혼들이 이제야 긴 시간을 돌아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마지막 순간 전투가 벌어진 틈을 타 죽음의 현장에서 피해 나온 14살 소녀 정민은 “이제 고마 우리, 집에 가자.”고 한 살 많은 언니 영희에게 말한다. 하지만 정민은 “언니야 잘 가라.”는 외마디를 영희에게 남겼을 뿐 결국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영희는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혼자 왔다는 죄책감을 짊어지고서 집을 잊은 채, 세월을 잊은 채 살아야 했다. 이 이야기가 실화이기에 우리는 더 마음이 아프다. 켜켜이 쌓인 원한의 무게가 한층 무겁게 다가온다.

괴불노리개와 모시나비


영화에는 두 개의 상징 소품이 등장한다. 바로 괴불노리개와 모시나비이다.

괴불노리개는 우리 어머니들이 즐겨 쓰던 장신구다. 괴불은 본래 연뿌리에 생기는 끝이 뾰족하고 날카로운 열매를 말한다. 괴불노리개는 삼재와 액厄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오방색을 주로 쓰고 부녀자와 어린아이가 주머니 끈에 차고 다니는데 대개 아이들의 생일에 만들어 채워 주었다. 이 괴불노리개는 영화의 또 다른 주역이었다. 주인공 정민이 일본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갈 때 어머니가 손에 쥐어준 게 괴불노리개였다. 이는 정민과 영희를 이어주었고, 다른 소녀들도 함께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했다. 그 어떤 것도 소녀들의 슬픈 운명을 지켜주지 못할 때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었던 건 괴불노리개 덕이었다.

소녀들을 괴불노리개가 이어주었다면, 우리와 소녀들을 연결시켜 준 것은 모시나비였다. 영화에 등장하는 15살 옥분이는 정민이에게 “나 죽으면 나비가 될 텨. 집에 돌아갈 때 나가 앞장서 갈텡께 나만 따라오면 된다, 알긋냐”라고 말한다. 차라리 나비가 되겠다는 옥분이의 슬픈 희망이 나타난 것일까. 조 감독은 ‘태워지는 처녀들’ 그림을 재현하는 장면을 촬영 중 있었던 가슴 뭉클한 일화를 전했다. 구덩이에서 소녀들이 불에 타는 장면을 찍기 전에 그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간단한 제를 올렸다. 이어 카메라 초점을 소녀들(‘더미’라 불리는 배우들의 실물 모형)을 쌓아놓은 구덩이에 맞추고 있을 때 갑자기 진짜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나비는 더 잘 태우려고 소녀들 사이에 끼워둔 나뭇가지에 한 번 앉았다가 날아가더니 이윽고 다시 날아와 구덩이에 쓰러져 있는 소녀의 상처 난 다리와 몸을 몇 차례 더듬고 날아갔다. 험하고 아픈 장면을 재현하면서 심적으로 두렵고 힘들었던 감독과 모든 스태프들은 그 광경을 보고서 펑펑 울음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육신으로 찾을 수 없는 고향을 수많은 나비가 되어 날아가 찾는 마지막 부분의 영상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이유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에서는 소녀들이 무자비하게 유린당하는 위안소의 충격적인 부감俯瞰 장면이 나온다. 영화를 보는 내내 소녀들에 대한 학대 장면에서 가슴 아프고 분노했던 마음은 이 부분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사실 묘사된 장면은 증언집 사례들에 비하면 100분의 1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는 더욱 잔인하고 참혹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피해자들 앞에 드리워진 운명의 무게는 커다란 원한으로 화해서 가슴에 응어리졌을 것이다. 그 원혼들이 나비로 변해 귀향하는 장면은 깊게 맺힌 한들이 풀려나가는 상징이다. 자유롭게 훨훨 가고 싶은 그곳으로, 고향으로 향하는 외로운 넋들의 모습을 한국의 토종 나비인 모시나비를 통해 표현한 것이다.

해원解寃의 귀향 굿


영화 <귀향>은 정치적인 부분을 배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황군(일본군)을 위한 암캐’라는 모멸적 언사로 능욕한 일제의 만행에 대해 애써 규탄하기보다는, 일단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의 외로운 울부짖음과 아픔을 치유하는 데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서로 다른 듯 비슷한 아픔을 겪은 과거와 현재의 소녀를 병치시키며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불행한 사고를 당하며 무녀의 길을 걷고 있는 은경과 현재의 영희가 함께 손녀와 할머니처럼 서로의 아픔을 알아가면서, 끔찍한 고통과 아픔의 기억도 함께 드러내게 된다. 이를 풀어가는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 우리 본래의 신교神敎문화 양식의 한 갈래인 굿이었다.

신교 문화에서는 본래 하늘에 계신 상제님께 천제를 올림으로써 믿음과 공경을 표현했다. 이런 제사문화는 공동체 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푸는 제전의 장으로 발전하였다. 비단 인간들 사이뿐만 아니라 인간과 신명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원한 맺힌 신명들의 한恨을 풀어주는 제의의 형태가 바로 굿인 것이다.

일제의 폭압에 의해 초경도 지나지 않은 소녀는 여성으로서 가장 모멸적인 폭력을 당해야 했고, 그 사실을 드러내는 데에도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감내해야 했다. 마음대로 유린하고 쓸데없다고 여겨지면 흔적을 없애기 위해 죽여버리는 일본군의 야만적 폭압 앞에 제대로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차가운 현실을 감당해온 그들에게는 망한 나라와 민족의 슬픈 운명 이전에 인간 존엄성 상실의 문제가 있었다. 그렇기에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원한을 푸는 과정으로 해원解寃의 굿 한 판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영화에서 귀향 굿을 벌인 장소가 두물머리다. 서로 다른 두 갈래에서 오는 물줄기가 만나 오롯이 하나의 물줄기로 화하여 바다로 향하는 그 곳, 외로운 혼들이 살아있는 이들과 만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곳으로 가장 좋은 장소가 아니었을까.

영화에서는 한 판의 굿으로 겹겹이 쌓인 소녀들의 한이 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깊은 한恨에 비해 그 제의는 너무 쉬운 치유와 해결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가질 법도 하다. 그렇지만 이제부터 우리는 이를 기억해야 할 역사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 아직은 진행 중인 역사의 문제가 이제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외로운 영혼들이 온전하게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필자에게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다.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아리랑.
적막 속에서 두 주인공이 포옹하고 있다.
그러면서 어느덧 민정은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부모는 마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던 중이었다.
‘인제 왔나’
천천히 다가가 꼬옥 안은 민정의 등 뒤에서
한 줄기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가 말을 했다.
‘맞나’
민정은 더없이 환하게 웃으며 답한다.
바라보던 아버지는 ‘밥 묵었나?’라는 한 마디를 던지고
민정은 ‘묵자’ 하며 세 식구가 다정하게 밥을 먹는다.
언제나처럼 행복하게 둘러앉은 가족의 모습 위로
노을 진 하늘 너머, 흰 모시나비들이 훨훨 날았다.


제발 그것이 꿈이 아니었으면... 마지막 장면을 보다가 움켜쥔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오열하는 관객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꼭 그러했다.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부모와 자식의 그 모습이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이며 근본임을 공감했기 때문이리라.

이 영화는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날의 일을, 그들의 이야기를 결코 잊지 말기를!

가해국인 일본이 전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임은 맞다. 하지만 자신들의 선조가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 제대로 인정하고, 이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와 적절한 배상 등이 없다면 그들은 절대 지도적인 국가의 지위를 영속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인간의 기본 도리인 어짐(仁)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비단 우리와 일본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여성과 인권에 대해 중대한 메시지를 던지는 문제작이 될 것이다.

마지막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오면서 후원해 준 75,270분들의 명단이 오르며 위안부 할머님들이 그린 그림들도 같이 올라왔다. 깊은 묵상 속에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며 그림들을 바라보던 관중들은 끝없는 눈물과 감동에 기립 박수를 보냈다.
이 영화가 제작되고 상영될 수 있도록 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 드리고 싶다. 조정래 감독의 말처럼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한 분, 한 분의 넋이 돌아오리라는 마음을 함께 지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