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의 꽃 태국 : : 자유와 불교와 국왕의 나라

[세계지역문화탐방]
태국泰國은 불교의 나라이자 유럽인들이 최고의 관광지로 손꼽는 나라이다. 인도와 중국이라는 두 거대 문명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태국은 오래 전부터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 왔으며, 외래의 지배를 거의 받지 않고 지금까지 자유와 독립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민족주의의 성향이 강한 나라이기도 하다. 이번 호에는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와 달리 국왕·불교·민족이란 세 가지 제도 이념을 근간으로 하고 민족 특유의 낙천적 기질 등을 바탕으로 성립된 태국의 개성적인 문화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태국泰國은 동남아시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로, 정식 국명은 타이 왕국(Kingdom of Thailand)이다. 국왕을 국가의 수반으로 하는 입헌군주제 국가이자 불교의 나라이며, 인도차이나와 미얀마와 중국의 남부지역을 잇는 지리적인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태국은 북서쪽으로 미얀마Myanmar와 국경을 접하고 있고, 북동쪽으로 라오스Laos, 동쪽으로 캄보디아Cambodia, 남쪽으로는 말레이시아Malaysia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총면적은 한반도의 2.3배, 남한의 5배에 달하는 513,120㎢로 프랑스와 비슷하다.

태국의 지형은 코끼리 머리 또는 자루 달린 도끼의 모습이다. 태국은 형태와 지형에 따라 크게 네 지역으로 구분된다. 북부 산악지대와 광활한 농경지인 중부 평원지대, 북동부 고원지대, 열대 섬과 긴 해안의 남부 밀림지대 등 4개 지역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북부 산악지대는 삼림지대로서 평균고도가 1,200m 정도의 여러 산맥들이 솟아 있다. 남부 밀림지대는 좁다란 크라Kra 반도가 2,500㎞의 긴 해안선을 자랑한다. 중부 지역은 타이 문명의 요람지이자 비옥한 쌀이 생산되는 중앙 평원지대가 자리잡고 있다. 차오프라야Chao Phraya 강은 삼각주의 평평하고 습지가 많은 평야이기 때문에 곡창지대이다. 북동부에는 건조한 코라트Khorat 고원이 있는데, 메마른 토양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태국에서 가장 궁핍한 지역이다. 동쪽의 메콩Mekong 강은 라오스와의 국경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태국의 국립지리학회는 공식적으로 태국의 지형을 북부, 중앙부, 동북부, 동남부, 서부, 남부의 6개 지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태국은 고온다습한 열대성 기후 지역에 속하며 기상조건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열대몬순 기류이다. 태국의 기후는 세 계절로 뚜렷이 구별된다. 3월부터 5월까지는 평균 기온이 섭씨 34도 정도까지 올라가는 매우 무더운 계절이다. 6월에서 10월까지는 평균 29도 정도의 날씨로 우기에 해당한다. 세 계절 중 가장 시원한 11월에서 2월은 가을에 해당한다. 낮에는 32도까지 올라가지만 아침과 저녁에는 20도 정도까지 내려가 선선한 날씨를 보인다. 연평균 강우량은 1,600㎜, 연평균 습도는 79%(최고 94%, 최저 60%)를 기록하고 있다.

태국의 역사
민족의 기원과 이주
타이 민족의 기원과 발상지에 관해서는 중국 기원설, 인도네시아 기원설, 토착민족 기원설 등 여러 가지 학설이 존재하여 아직도 확고한 결론이 도출되고 있지 않다. 태국의 역사는 한 나라의 역사로 한정되지 않으며, 동남아시아 지역의 역사와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태국이란 지역에는 수많은 민족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타이족의 조상이 태국 땅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은 약 1천년 이전일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태국 국민들은 이들의 후손이다.

그렇다면 기원후 1000년 이전의 태국 땅에는 누가 살고 있었던 것일까? 태국에서 발굴된 유적지 가운데 유물이 가장 많이 발굴된 지역은 동북부의 우돈타니Udon Thani 주에 있는 반치앙Ban Chiang 마을의 유적지다.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했는데, 이 유적지에서 약 5천년 전의 토기가 발굴되었다. 가장 오래된 청동기는 기원전 5백년 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반치앙의 문화를 이룬 종족은 자신들의 종족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채 역사 속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졌다.

기원후 6세기 경 태국 중부 지역에 여러 성읍 국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불교문화를 중심으로 하나의 왕국을 이루었다. ‘드바라바티Dvaravati’라고 불리는 이 왕국의 주인공은 몬Mon족이다. 몬족은 타이족과는 다른 민족이었다. 드라바비티 왕국은 태국 중부의 평원지대를 중심으로 살았다. 8세기에는 치앙마이와 람푼 땅에 ‘하리푼자야Haripunjaya’라는 이름을 지닌 또 다른 몬족 왕국이 건설되었다. 하리푼자야 왕국은 태국 중부의 드바라바티 왕국과 정치와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불교라는 종교적 측면에서도 매우 긴밀한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었다.

수코타이Sukhothai 시대(1238~1378)
타이족은 기원전에는 중국 귀주성, 운남성, 광서성 등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후에도 수백년 동안 중국 남부와 서남부 일대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세기 초, 타이족은 북쪽의 란나Lanna, 파야오Phayao, 롭부리Lopburi, 수코타이Sukhothai 등에 조그만 성읍국가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1238년에 타이족 일파의 수장 프라 루앙Phra Ruang이 크메르 왕국의 북서부 거점인 수코타이를 정복하여 최초의 독립 왕국인 수코타이Sukhothai를 세웠다. 수코타이는 ‘행복의 시작(dawn of happiness)’을 의미하는데, 현재 태국에서는 수코타이를 태국 역사의 기점으로 삼고 있다.

수코타이 왕국은 3대 왕인 람캄행Ramkhamhaeng (Rama The Great) 왕의 재위(1277~1317) 시에 최대의 번영을 구가하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중국에 조공을 하기는 했으나, 영토는 라오스와 미얀마 및 말레이 북부까지 확대되었고, 스리랑카로부터 남방 불교인 상좌부 불교를 받아들였으며, 크메르 문자를 변형시켜 타이 문자(산스크리트어 계통)를 창제하여 타이왕국의 기초를 다졌다. 또한 미술, 조각, 건축과 문학 등 태국 예술문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 ‘시암Siam’이란 태국의 또 다른 명칭이 생겨난 것도 수코타이 시대였다. 타이족을 캄보디아 사람들은 시암이라 불렀고, 16세기 포루투칼 사람들은 태국을 시암이라 호칭하였다. 수코타이 왕국은 람캄행 왕이 죽은 뒤에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1320년경에 쇠퇴일로를 걸으면서 성읍국가의 수준으로 다시 전락하게 된다. 결국에는 1378년 신흥 왕국인 아유타야Ayutthaya의 종속국이 되었다.

아유타야Ayutthaya 시대(1350~1767)
아유타야Ayutthaya 왕국은 1350년 몬 왕국 지배 하의 타이계 우통Uthong국 왕자 라마 티보디Rama Thibodi가 전염병을 피해 방콕의 북쪽 짜오프라야Chao Phraya 강 하류에 위치한 아유타야Ayutthaya를 수도로 건립한 왕국이다. 아유타야 시대에 태국은 불교를 공인(1360년)하고 법전을 공포하였으며, 왕실 용어와 의전 등을 크메르에서 도입하여 채택하였다. 아유타야 왕국은 14세기 말 수코타이 왕국 등 주변 국가를 복속시켜 왕국의 기반을 조성하였으며, 1431년에는 수 세기 동안 강력한 제국을 유지하여 오던 앙코르Angkor 왕국(크메르Khmer 제국)을 정복하였다. 9대 왕인 뜨라이록Trailok 왕 재위(1448~1488) 시에는 왕위계승 원칙을 확립하고 행정관료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말레이Malay반도와 벵갈Bengal만까지 통치 지역을 확대하였다. 1569년에는 3년간의 전쟁 끝에 버마 군이 아유타야를 정복하여 담마라자Dhammaraja(재위 1569~1590)를 왕으로 하는 속국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담마라자 왕의 뒤를 이은 나레수안Naresuan(재위 1590~1605) 왕은 1600년까지 버마 군을 완전히 축출하여, 독립을 쟁취하고 아유타야 왕국을 재건하였다.

아유타야 왕조는 중국과 일본 이외에도 서양과의 접촉이 활발하였다. 특히 나라이Narai(재위 1657~1688) 왕 재위기간에 서양과 빈번한 접촉을 하였으며, 일본 상인, 네덜란드 상인, 영국 상인에게 무역을 허용하였다. 하지만 1765년 아유타야 왕조의 내부 혼란을 틈타 버마 군이 침공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아유타야 왕조는 1767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417년간 33명의 왕이 통치한 아유타야 왕국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탄생시켰다. 아유타야 왕조가 멸망한 후 타이는 상당 기간 동안 정치적 분열 및 혼란기를 맞이하였다.

톤부리Thon Buri 시대(1767~1782)
아유타야 왕조에서 지방장관이었던 프라야 탁신Phraya Taksin 장군은 폐허가 된 아유타야를 버리고 짜오프라야Chao Phraya 강 하구 서안의 톤부리Thon Buri에 도읍하여 톤부리Thon Buri 왕조(1767-1782)를 세웠다. 탁신 왕은 1768년 말까지 버마를 몰아내고 아유타야의 과거 영토를 회복하였다. 1776년까지 탁신 장군은 타이Thai 왕국을 재통일하고 치앙마이Chiang Mai를 정복하는 등 타이 제국의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중국인 아버지와 태국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탁신은 부친의 고향 사람들인 중국인들에게 특혜를 베풀고 그들을 고위관직에 중용하였으며 불교의 신비주의적 명상체험을 중시하는 정책을 폈는데 이로 인해 기존 관료사회의 반발이 일어났다. 말년에 정신착란증을 보이기도 한 탁신은 결국 1782년 반란을 일으킨 부하들에 의해 처형을 당했다. 탁신의 폐위 이후 그의 부하 장수인 짜끄리Chakri가 왕으로 추대되어 짜끄리 왕조 시대를 열었다.

짜끄리Chakri 시대(1782~현재)
탁신의 뒤를 이은 짜끄리Chakri(본명: 프라 붓다 요드파 출라로께Phraphutthayotfa Chulalok, 별칭: 짜오 프라야 짜끄리Cao Phraya Chakri)는 수도를 톤부리에서 방콕Bangkok으로 옮기고 타이의 네 번째 왕국인 짜끄리Chakri(랏따나꼬신Rattanakosin) 왕조를 창건하여 라마Rama 1세(재위 1782~1809)로 등극함으로써 현재 태국이란 나라의 굳건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라마 1세는 강력한 개혁정책을 시도했다. 그는 도덕적 부패가 아유타야 왕조의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보았다. 불교 교단을 정비하였으며 삼인법전三印法典(Kotmai Tra Sam Duang)을 만들어 새로운 왕조의 법 체제와 관제 및 지방조직을 정비했다. 또한 캄보디아의 바탐방Battambang 지역을 병합하고 1785년에는 버마의 침공을 격퇴하였다. 짜끄리 왕조는 라마 1세 때에 확고한 왕권을 바탕으로 국가의 부흥을 이루었다.

짜끄리 왕조의 역대 국왕 중 라마 4세 몽꿋 국왕과 그의 아들 라마 5세 출라롱꼰 국왕은 탁월한 외교술과 선별적 현대화를 통해 태국의 근대화를 본 궤도에 올려놓았고, 서구 제국 열강의 식민지화 공세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라마 4세 몽꿋Mongku(재위 1851~1868) 국왕은 영국인 가정교사 애나 레오노웬스Anna Leonowens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한 영화 <왕과 나Anna and the King>의 주인공으로, 39명의 부인과 82명의 자녀를 두었다. 라마 4세는 국내 정치 경제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1855년에 영국과 일명 보링Bowring 조약이라고 불리는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는 태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으로, 1856년에 이 조약을 비준할 때 최초로 ‘시암Siam’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이후 1856년에 미국 프랑스, 1858년에 덴마크, 1862년에 벨기에 이탈리아 스웨덴 노르웨이, 1869년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와 각각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라마 5세 출라롱꼰Chulalongkorn(재위 1868~1910)은 ‘국가-종교(불교)-왕’ 이념을 확립한 태국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는 유럽의 문물제도를 도입하고 학교 설립, 불교 개혁, 사원 교육기능 강화, 법률 체제 및 조세 제도 개편, 자유민의 강제노역 폐지 등 근대지향의 여러 개혁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함으로써 태국 근대사의 기점을 이룩한 업적으로 인해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는 군주이기도 하다. 1882년에는 영국과 프랑스에 상주공사를 파견하였고, 1885년에는 부왕제를 폐지하고 왕세자제를 도입하였으며, 1887년에는 12개 부로 구성되는 새로운 내각제도를 도입하였다. 1893년에는 프랑스의 무력에 굴복하여, 메콩Mekong 강 좌안을 프랑스에 양도하는 조약을 체결하였고, 1896년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선언으로 태국(Siam)의 중립지대화(Buffer Zone)에 합의하였다. 1902년에는 국민개병제를 실시하고, 1905년에는 현금 인두세제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1907년에 프랑스의 재침입으로 캄보디아 지역을 상실하고, 1909년에는 말레이Malay 북부 4개 주를 영국에 양도하였다.

이후 라마 6세 와찌라우트Vajiravudh(재위 1910~1925) 시대에는 타이 민족주의가 대두되었으며, 이는 반중국(Anti-Chinese) 운동으로 귀결되었다. 태국은 1917년 4월에 연합군의 일원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전승국의 일원으로서 국제연맹의 창설 회원국이 되었다.

라마 7세 쁘라자티폭Prajadhipok(재위 1925~1935)은 라마 6세의 동생으로 태국 최후의 절대군주이다. 1932년 6월 출라롱콘 대학의 법학 교수인 쁘리디 빠놈용Pridi Panomyong과 총리이자 육군원수인 피분 쏭크람Phibun Songkram 등 청년장교 및 관료 등이 중심이 된 민주개혁 무혈쿠데타가 발생하여, 태국은 입헌 군주제 국가(다섯번 째 왕조인 오늘날의 타이Thai 왕국)가 되었고 국왕의 권한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피분 쏭크람이 입헌제를 채택한 이래 태국은 점차 국수주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피분 정권은 1939년 태국의 공식 명칭이었던 시암Siam을 ‘자유의 나라’라는 뜻을 지닌 타일랜드Thailand로 변경하고, 주변부의 소수민족들에게 타이어 학습을 강요할 뿐만 아니라 불교를 존숭할 것을 강요하였다. 피분 정권은 또한 태국 안의 중국인의 경제적 활동을 제한하는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는 민족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시도된 것이다. 라마 7세는 1935년 3월에 신병 치료차 영국에 체류하던 중 공식적으로 퇴위 선언을 하였다. 그 뒤를 이은 라마 8세 아난다 마히돈Ananda Mahidol(재위 1935~1946)은 라마 7세의 조카로 스위스에서 유학 중이던 10세에 즉위하였다. 그는 1945년 12월에 귀국하였으나 1946년 6월에 궁중에서 피살되었다.

이어 즉위한 라마 9세는 현재 태국의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1946~현재)이다. 라마 9세는 1946년에 국왕으로 즉위하였고, 1950년 5월에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2006년 즉위 60주년을 맞이하여 태국 역사상 가장 장수하는 국왕이 되었으며, 태국 정부와 국민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라마 9세는 1967년 이래 외국 방문을 중단하고 농촌복지사업 등 국민의 후생·복지 향상에 전념하였고 늘 검소하고 근면한 모습을 보여 국민적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나, 2009년 9월 이후 여러 질환에 시달리면서 건강 악화로 병원 입·퇴원을 반복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과 태국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1년 12월에 일본군이 태국에 상륙하였다. 일본은 영국과의 전쟁을 위해 일본군의 무상 주둔과 통행을 요구하였고, 민족주의자로서 일본 세력을 업고 태국의 세력권을 확장하고자 하는 ‘대大태국주의’를 추구한 피분 쏭크람Phibun Songkram 총리는 이를 수락하였다. 1942년에는 태국의 주권과 독립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일본과 공수동맹을 체결하고,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세니 프라못Seni Pramoj 주미 태국대사는 미국에 대한 태국의 선전포고문 전달을 거부하고 미국 정부의 지원하에 항일 ‘자유태국운동(Free Thai Movement)’을 결성하였다. 1943년 이후 전황이 일본에게 불리해지면서 미국 내 태국인들이 피분 총리의 암묵적인 양해하에 ‘자유 태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군과 합동으로 태국 내에서 반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4년 8월에는 일본과의 전시협정을 파기하였다. 1945년 8월에 태국은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일본의 무력강압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태국 내의 친일파를 제거하였으며, ‘자유태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태국은 영국과 프랑스에 자진해서 손해배상을 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패전국 대우를 면하고 1946년 12월 유엔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1950년에 한국전이 벌어지자 연합국임을 입증할 목적으로 유엔 결의에 따라 즉시 파병하였다.

정치 및 행정


정치체제: 입헌군주국 - 내각책임제
태국의 현대정치는 피분 쏭크람이 쿠데타로 입헌군주제를 세운 1932년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 해는 절대군주제가 무너진 해로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참정권을 얻게 되었고, 군부가 정치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때라는 의미에서 태국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태국은 총리가 정부를 이끄는 의원 내각제를 택하고 있고 서구화된 민주주의 체제를 본받아 상·하원의 양원제 의회가 입법권을 갖고 있지만, 군부의 세력이 지나치게 큰데다가 빈번한 쿠테타의 발생으로 인해 제대로 된 민주주의의 정치체제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 태국의 정치체제는 전통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이 혼합된 독특한 정치 문화를 보여준다. 수코타이와 아유타야 시대의 전제 군주제와 엄격한 신분의식으로 인해 일반 국민들 사이에 정치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다.

태국은 2006년 9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이후 과도정부가 설치한 헌법기초의회의 개정안을 놓고 2007년 8월 19일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60%의 지지로 개정안이 통과되었으며, 제17차 개정헌법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2011년에 제18차 헌법 개정을 통해 중선거구제를 소선거구제로 변경하고, 하원의원 수를 480명에서 500명으로 증원하였다. 개정 헌법에는 특히 총리의 연임 제한, 부정부패 방지, 총리탄핵제도 등 총리의 권한을 견제하는 내용이 다수 포함되었다. 그 후 2014년 5월에 태국 역사상 19번째의 군부쿠데타가 발생하여 헌정이 중단되었으며, 군부는 2014년 7월 22일 임시헌법을 공포하고 8월 31일에 과도내각을 출범시켰다. 과도정부는 2015년 8월까지 신헌법 제정을 약속한 바 있어, 현재 태국의 정국은 새 헌법의 제정과 관련된 사안들이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다.

국가원수-국왕
태국의 국가원수는 국왕이다. 태국 국왕은 의회, 행정부, 사법부를 통하여 각각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을 행사하며, 국군의 최고 통수권자이다. 그리고 내각 및 18명 이내의 추밀원(Privy Council) 위원, 각급 판사, 헌법재판소 재판관, 선거관리위원회 위원, 인권위원회 위원, 반부패위원회 위원 등을 임명하는 기능을 한다. 2015년 7월 현재 태국의 국왕은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이며, 현 짜끄리(Chakri) 왕조의 제9대 왕(라마 9세)이다.

행정부: 내각(구헌법)
태국의 행정부 형태는 내각책임제이다. 태국의 내각은 총리 1명 및 35명 이하의 각료(국왕이 임명)로 구성되는 체제였으나, 2014년 5월 군부쿠데타 이후 들어선 과도내각이 현재 태국의 정치를 이끌고 있다. 태국의 총리는 헌법상 국왕이 임명하고 국회의장이 부서하며, 임기는 4년이다. 하원의원만 총리에 임명 가능하며, 임명 후 의원직을 사퇴해야 한다. 신헌법 규정상 총선 후 첫 소집된 하원에서 소집 후 30일 이내에 하원 과반수 찬성으로 선출된 총리 지명자를 국회의장이 국왕에게 임명 제청한다. 헌법상 국회는 총리 임명에 대한 승인 표결권은 없으며, 임명 후 불신임 표결만 가능하다.

2011년 8월에 태국 최초의 여성 총리인 잉락 친나왓Yingluck Shinawatra 총리 내각이 출범하였다. 잉락 정부는 정권 초기에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정국을 운영했으나, 자신의 오빠인 탁신Thaksin Shinawatra 전前 총리의 사면 추진을 둘러싼 정치적 소용돌이로 인해 2013년 12월 의회를 해산하고, 2014년 2월 총선을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야당인 민주당의 불참 및 반정부 시위대(PDRC)의 방해로 선거가 완료되지 못한 상태에서 2014년 3월 헌법재판소가 선거무효 판결을 내렸다. 헌법재판소는 2014년 5월 과거 잉락 총리가 타윈 국가안보위(NSC) 사무총장을 인사 조치한 것이 헌법에 위반된다고 판시, 잉락 총리 포함 10명의 내각 구성원을 해임(소위 ‘사법쿠데타’)하였다.

그러자 쁘라윳 찬오차Prayuth Chan-ocha 육군 총사령관은 계엄령을 선포한 후, 7개 정파 대표의 합의 실패를 이유로 2014년 5월 22일 쿠데타를 선언했다. 2014년 6월 쁘라윳 총사령관은 3단계 정치일정 로드맵을 발표하였는데, 임시정부 출범(1단계), 신헌법 제정 및 개혁 추진(2단계), 신新헌법 확정, 총선 및 2015년 말 신정부 출범(3단계)의 시간 계획을 공표했다. 2014년 7월 22일에는 임시헌법이 공포되었고, 8월에는 입법의회 개원 및 33명의 임시 내각이 왕실 승인을 받았는데 쁘라윳 총사령관이 임시 내각 총리를 겸임하였다. 이어 2014년 8월에는 입법의회(NLA)를 개원하고 쁘라윳 육군총사령관 겸 국가평화질서위원회(NCPO, 군정통치기구) 의장을 과도정부 임시 총리로 선출하였다. 과도정부는 2015년 말 총선에 의한 신정부 출범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일각에서는 2016년 상반기 또는 2~3년 민정 이양 연기 가능성도 전망되고 있다.

향후 군부 주도로 선거법을 반反탁신파에게 유리하게 개정하려고 할 경우, 탁신파의 반발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으며, 또한 국민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푸미폰 국왕(1927년생) 타계 시 정국 혼란의 가능성도 상존하는 상황이다. 마하 와치라롱껀Maha Vajiralongkorn 왕세자(1952년생)가 왕위승계권을 가지고 있으나 국민의 신망을 잃은 것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태국 내 정치 갈등의 근본 요인으로 대두되어 온 기득권층과 소외계층 간의 이분화 현상을 극복하고 어떻게 국민화합을 이끌어 나가느냐가 향후 태국의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좌우할 수 있는 관건이라 할 수 있다.

입법부: 양원제 의회(구헌법)
태국의 의회는 구헌법상 상하 양원제(임기 6년의 상원의원 150명, 임기 4년의 하원의원 500명)였으나, 군부쿠데타 이후 현재 의회 부재 상태에 있다(2013년 12월 하원 해산, 2014년 5월 상원 해산). 2014년 8월 개원한 200명 정원의 입법의회NLA(National Legislative Assembly)가 국회를 대행하고 있으며, 향후 신新헌법 제정시 상·하원 규모 및 선출 방식을 규정할 예정이다.

태국의 주요정당으로는 쁘아 타이 당Puea Thai Party, 민주당Democrat Party, 붐 짜이 타이 당Bhum Jai Thai Party 등 여러 정당들이 있으나, 2014년 5월 군부쿠데타로 의회가 해산되면서 현재는 정당 활동 금지 상태에 있다.

사법부
태국은 1907년 근대 사법제도가 확립되고 1932년 헌법상 사법권 독립이 명문화되어 3심제도를 사법부 체계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제1심은 민사재판소, 형사재판소, 간이재판소, 중앙소년재판소, 노동재판소, 조세재판소 등 중앙 14개소와 지방재판소, 간이재판소, 지방소년재판소 등 지방 119개소가 운영되고 있으며, 제2심은 중앙항소재판소와 각 지역을 분장하는 제1~제3 지방항소재판소 등 4개소가 있다. 최종심은 최고재판소 1개소를 두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재판소장을 포함한 재판관 9명으로 구성되는데, 임기는 9년(재임 불가)이다. 주요 권한으로는 각종 조직 관련 법령의 합헌성 여부 판정, 상·하원 의원과 각료 및 선거위원회 위원 등 주요 정치인들이 제출하는 재산 등록의 적합성 여부 판단, 헌법 기관의 권한 및 의무에 관한 쟁의 판정 등을 들 수 있다.

행정구역
태국의 지방행정은 1개 특별시인 방콕Bangkok시, 1개 직할시인 빠타야Pattaya시, 주州에 해당하는 창왓Changwat 76개, 군郡에 해당하는 암뻰Amper 795개, 면面에 해당하는 땀본Tambon 7,255개로 구성되어 있다. 지방의회 및 지방자치행정 관리는 헌법에 의해 민선民選으로 선출하며 임기는 4년이다.

경제


태국은 지난 1960년대 초부터 적극적인 산업화 정책을 추진해 온 이래 고도의 경제성장을 달성하였다. 태국은 방대한 국토, 풍부한 자원 및 노동력, 건실한 농업 생산기반, 동남아국가연합(ASEAN, Association of South East Asian Nations) 및 중국 등 역내 국가와의 교역 확대, 외자 유치를 통한 경제 개발 추진 등으로 경제가 급속히 신장하여 아시아의 새로운 신흥공업국 중 하나로 성장하였다.

태국은 수출이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의 약 70%를 차지하는, 수출지향 경제의 중진개도국이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무역수지 적자가 확대되고, 과도한 외자가 유입되며, 태국경제의 대외신인도가 하락함에 따라 단기 해외자금이 급속히 유출되면서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하였다. 이에 태국 정부는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172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차입해 경제구조 개혁을 적극 추진한 결과 1999년부터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해 2002년부터는 5% 이상의 성장률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2003년에는 중증급성 호흡기 증후군(SARS)이 유행하고, 2004년에는 쓰나미가 발생하였으며 동년부터 고유가에 시달렸다. 2006년에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경제에도 부담을 주었다. 태국은 2007년 4.8%, 2008년 2.6% 성장에 그쳤고 2009년에는 세계경제 침체여파의 지속으로 -2.3%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2010년에는 다시 7.8% 성장했으나, 2011년 10~11월에 발생한 대홍수의 파장으로 0.1% 성장에 그쳤다. 2012년 태국 경제는 홍수피해 복구 및 정부의 경기진작 조치에 힘입어 6.5% 성장률을 기록했으나, 2013년에는 경기진작책 효과 소진, 글로벌 경기회복 지연 및 반정부 시위, 의회 해산 등 정치 불안이 지속됨에 따라 2.9% 성장에 그쳤다. 2014년에는 계속된 정치적 교착 상태가 5·22 군부쿠데타를 계기로 안정을 찾으면서 정치·경제적 불확실성이 해소됨에 따라 1.2%의 성장을 기록했다. 태국 경제는 2014년도 소비 부진에 따른 기저효과를 이유로 2015년에는 반등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지만, GDP의 85%에 가까운 가계부채 규모와 소득 증가가 정체되고 있어 어느 정도 회복할지는 미지수이다.

태국의 주요산업은 외국인투자가 주축을 이루는 제조업, 노동인구의 절반이 종사하는 농업, 그리고 관광산업이 주축이 되는 서비스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태국의 GDP에서 농림·수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축소되어 온 반면, 제조업·서비스업의 비중은 확대되는 추세에 있다. 한편 태국은 2015년 12월 예정인 아세안 경제공동체(Asean Economic Community, AEC) 출범에 대비, 주요 전략산업을 육성하여 아세안 내 허브화를 추진해 왔으나 원천기술 미확보, 숙련인력 부족 및 기술개발 등 혁신능력 한계로 애로를 겪고 있다.

태국 상무부의 발표에 의하면 2014년 태국의 무역액은 수출이 전년 대비 0.4% 감소한 2275.7억 달러, 수입은 9% 감소한 2279.5억 달러로 무역 수지는 3.8억 달러 적자였다. 주요 수출품목으로는 전자제품, 전기제품, 자동차, 플라스틱, 쌀, 천연고무, 식품, 보석 귀금속 등이고, 수출국 규모별로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중국, 미국, 일본, 유럽연합(EU) 15개국 순이며, 한국은 12위권의 수출 대상국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원유, 기계 및 부품, 귀금속, 전기기기 및 부품, 철강제품, 화학제품, 자동차부품 등이고, 주요 수입국은 일본, 중국, 아랍에미리트, 미국 순이며, 한국은 태국의 7위권 수입국에 올라 있다.

태국 경제의 경쟁력으로는 먼저 개방성을 들 수 있는데, 미소의 나라 이미지로 연간 외국인 관광객 2천만명을 유치하고 외국인 투자의 적극적 유치를 통해 국내 산업 발전을 추진하고 있다. 두 번째는 동남아 중심의 전략적 위치로서, 인근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가 태국과의 국경무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 태국 진출 외국인기업에게 동남아 시장공략에 유리한 기회를 제공하는 시책을 펴고 있다. 세 번째는 발달된 사회간접자본인데, 도로 항만 전력공급 통신 등과 같은 기초적 사회간접자본이 확립되어 있어 기업활동에 수반되는 비용이 감소하는 효과가 있다. 네 번째는 안정된 사업환경을 들 수 있는데, 국내의 정치 격변에도 불구하고 친기업적 정책을 일관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점이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반면 태국의 한계성으로는 주요 산업분야에서 국내기업이 자생하지 못하고 외국인투자기업들에 의존하는 정도가 심하다는 점과 군부의 정치에 대한 영향력 지속과 그로 인한 국론 분열 등 정치 불안정의 불씨가 여전하다는 점, 그리고 과거의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이제는 부가가치산업으로 전환하여야 하는데 이에 필요한 노동자본이 부족한 ‘중진국 함정’의 한계와 함께 매년 극심한 홍수 등 자연재해를 경험하면서도 마땅한 대비책 부재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사회와 문화


민족성과 사회 관습
태국은 입헌군주국으로 국왕은 직접 정치에 나서지는 않으나 국민들이 국왕을 존경하고 있다. 특히 현재 푸미폰 국왕은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와 존경을 바탕으로 국가 통합의 구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태국은 주변국의 침략 속에서도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립을 지켜낸 나라라는 자부심이 강하며, 국가와 자국민에 대한 강한 사랑과 애착이 특징이다.

태국은 불교의 자비심 및 관용이 일상생활에 반영되어 있다. 두 손을 이마에 올려 사례하는 태국식 인사(와이wai: 합장)는 불교의식이 생활화된 것이다. 태국은 왕실에 대한 믿음과 존경이 대단하여 외국인이라도 왕실을 모욕하는 말이나 행동은 엄금하며, 극장 등에서 국왕 찬가가 연주될 때는 기립하여 예의를 표하는 것이 관행이다. 태국은 왼손 사용을 부정하게 여기며, 어린이라도 머리를 쓰다듬는 것은 금물이다. 태국은 불교의 영향으로 20세기 초반까지 성씨 제도가 없었으며, 1913년에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현재도 사람을 부를 때 성보다는 이름을 부른다. 예를 들어 쁘라윳 짠오차Prayut Chan-o-cha 총리의 경우 쁘라윳 총리로 호칭한다.

종족과 언어
태국의 인구는 2014년 기준으로 6,774만명이다. 타이어를 사용하는 타이족과 라오족 등이 태국 전체인구 중 5분의 4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소수 종족으로는 중국인, 크메르인, 말레이인, 인도인, 미얀마인, 베트남인 및 고산족 등이 있다. 태국은 속지주의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화교와 소수종족들은 귀화하여 태국의 국적을 갖고 있다.

태국은 현재 타이어語를 공용어로 지정하고 있다. 타이어는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한 중-타이오파로 중국 제방언과 타이 제방언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학자에 따라서는 다른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타이 문자는 수코타이시대 람캄행Ramkhamhaeng 왕이 고대 크메르Khmer 문자를 모방하여 만들었다. 타이어의 특징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문법적으로 고립어이다. 모든 단어는 어형의 변화가 없이 어근이 그대로 사용된다. 단어는 단음절이 기본을 이룬다. 둘째, 성조를 가지고 있다. 태국 문자는 32개 기본모음과 44개의 자음문자로 이루어진 표음문자로서 5성과 고저 장단음이 있다. 이를 근거로 4성이 있는 중국어와의 관련성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한 태국어는 10개의 태국 고유 숫자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종교
태국에서 종교 문화는 곧 생활문화이며, 세계관과 가치관 및 생활양식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태국은 자유의 나라라는 국호에 걸맞게 자유를 중요시하여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에, 국민의 대다수는 불교를 믿으나 이슬람교와 힌두교와 기독교를 믿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종교의 자유는 인정하나 불교 외 종교의 교세 확장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이다. 특히 남부 3개 주의 이슬람Islam 분리운동에 대해서는 국가적 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불교가 자리를 잡기 전부터 믿어 온 민간 신앙의 영향력도 커 영험하다는 귀신을 모신 사당이나 건물 앞의 지령을 모시는 신당이 있다. 이 신당을 ‘싼자오’라 한다.

태국의 불교는 3세기 말경에 말레이 반도와 인도차이나 반도 등지를 왕래하던 브라만들에 의해 전래되었다. 이들로부터 불교를 전수받은 사람들이 인도에 유학하여 불도를 닦은 후 돌아와 흔히 소승 불교라 불리는 상좌부 불교(테라바다Theravada)를 전파하면서 새로운 승려집단을 형성하고 태국 전역에 불교가 퍼져 나갔다. 상좌부上座部 불교는 철저하게 자신의 깨달음에 의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보는 ‘자력의 종교’다. 반면에 대승불교는 타자의 구원을 강조함과 동시에 아미타불에 의지함으로써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측면에서 ‘타력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태국 왕권은 그 이념적 바탕을 불교에 두고 있다. 태국에서 왕권과 불교는 상호 보완적 관계에 있었다. 국왕은 불교를 물질적으로 후원하고 제도적으로 보호했고, 불교는 국왕의 통치권력을 정당화하고 지지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불교와 국왕의 관계가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는 타이 민족의 정체성 확립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이다.

문화
태국 문화정책의 기조는 문화유산 보존, 예술창작 및 진흥, 민족문화에 대한 자긍심 고취에 있다. 태국 문화는 인도·버마·크메르 문화가 융합된 것이며, 불교 문화는 스리랑카에서 도입된 것이다. 태국은 인구의 95%를 차지하고 있는 불교가 사회 및 생활 문화의 저변을 형성하고 있다. 태국의 각종 건축·사원·미술·무용 등은 모두 불교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교는 태국 사회에 수천 년에 걸쳐 영향을 끼쳐왔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불교문화가 융성하게 발전하고 있다. 태국 불교는 남방불교(Theravada Buddhism)로 규율이 매우 엄격하며, 일상화된 불교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 태국에서는 개인의 공덕을 쌓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며, 태국 남자는 일생에 한 번 승적을 보유(원칙적으로는 최소 3개월)하는 것이 관행이다. 이 독특한 전통을 부엇낫Buat Nhat(출가의식)이라 부른다. 태국에는 전국에 3만여 곳의 사원과 18만명 이상의 승려가 있으며, 사원·가정·사무실·상점에까지 불상을 모셔 놓을 정도로 신심이 독실하다. 태국에서는 불상과 승려가 신성한 존재로서 경의와 숭앙을 받으며, 불상 모독은 금물이다. 태국 사회 전반에 흐르는 권위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은 불교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다. 태국의 종교와 신앙은 매우 다양하다. 불교를 중심으로 여러 종교와 신앙이 공존하면서 태국인의 신앙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태국인과 태국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태국의 종교와 신앙을 폭넓게 이해해야 한다. 또한 태국은 불력佛曆을 사용(서기+543년)하고 있다. 태국에는 문화 및 관광·스포츠 업무 등을 관장하는 문화부(Ministry of Culture), 관광·스포츠부(Ministry of Tourism and Sports)등을 두고 있으며, 태국 방콕에 있는 주요 문화관계 국제기구로는 유네스코UNESCO 아시아·태평양 지역 본부와 동남아시아 교육장관기구(SEAMEO)가 있다.

언론
태국은 일부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사를 정부에서 소유 또는 관리하는 등 텔레비전, 라디오 등 방송매체를 정부에서 직·간접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그러나 신문, 잡지 등 기타 언론매체의 운영은 비교적 자유로운 실정이다. 태국에는 2014년 1월을 기준으로, 중앙 일간지 16종(태국어 14종, 영어 2종)과 지방 일간지 8종을 포함하여 총 24종의 일간지가 발간되고 있다. 잡지는 주간지·격주간지·월간지 등을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50여 종이 발간되고 있다. 태국의 통신사로는 태국국영통신사(Thai National News Agency, TNA)가 있고 지상파TV 방송으로 채널 3, 채널 5, 채널 7, 채널 9(MCOT), 채널 11(NBT) 및 Thai PBS 등 6개사가 있다. 케이블TV 방송으로는 100여 개의 공급업체가 있고, 라디오 방송으로는 전국 방송을 실시하는 국영 라디오 태국(Radio Thailand) 등 중앙과 지방에 523개 방송국과 지국이 설치되어 있다.

한국과 태국의 관계


정치·외교 관계
태국과 한국의 관계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인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국의 옛 이름인 시암 왕조는 1391년과 1393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에 교역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해로에 나타나는 해적 때문에 교류가 중단되었다. 태국은 1949년 10월에 대한민국을 정식 승인하였고, 1950년 11월에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1958년 10월에는 한국의 9번째 수교국이 되어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1960년 2월에 상주대사관 설치에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1960년 3월에 주태국 한국대사관이 설치되었고, 1961년 7월에 주한 태국대사관이 설치되었다.

태국은 한국과 오랜 우방 관계를 지속해 온 국가로 1958년 수교 이래 양국간 우호·협력관계를 지속 발전시켜 왔으며, 2012년 11월 정상회담시 한·태 전략적 동반자 관계 MOU(양해각서)를 체결하였다. 태국은 특히 한반도 평화, 북핵문제 등 주요 사안에 대해 한국 정부의 입장을 지속해서 지지하였다. 한편 태국은 1975년 5월에 북한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 되었다. 태국은 양자관계는 물론 동남아국가연합(ASEAN, Association of South East Asian Nations),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Asia Europe Meeting),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Asia Pacific Economic Cooperation) 등 다자관계에서도 한국과 밀접한 우호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과 태국은 양국 간 고위인사 교류를 꾸준히 해오고 있다. 1966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이 태국을 공식방문하였고, 1981년 7월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태국을 공식방문하였다. 1996년 3월에는 김영삼 대통령, 2003년 10월에는 노무현 대통령, 2009년 4월과 2009년 10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태국을 방문하였다. 최근 들어 2014년 11월 13일에는 미얀마 네피도에서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East Asia Summit, EAS)에서 쁘라윳 총리와 박근혜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가졌고, 2014년 12월 11일에는 한-ASEAN 특별정상회의(부산) 참석차 방한한 쁘라윳 총리와 박근혜 대통령이 두 번째 정상회담을 갖기도 했다.

한편 태국측에서는 1967년 4월 타놈 끼띠카촌Thanom Kittikachorn 총리가 한국을 방문한 이래, 1977년 9월 타닌 끄라이위치안Thanin Kraiwichien 총리, 1981년 11월 쁘렘 띤술라논Prem Tinsulanond 총리, 1994년 6월과 1999년 4월 및 2000년 10월에는 추안 릭파이Chuan Leekpai 총리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어 2005년 5월과 2005년 10월에는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총리, 2009년 6월에는 아피싯 웨차치와Abhisit Vejjajiva 총리, 2012년 3월과 2013년 2월에는 잉락 친나왓Yingluck Shinawatra 총리가 방한하였다. 2013년 4월에는 마하 짜끄리 씨린톤Maha Chakri Sirindhorn 공주의 방한이 있었고, 2014년 12월에는 앞서 언급한 쁘라윳 찬오차Prayut Chan-o-cha 총리가 방한해 정상회담을 가졌다.

경제·통상 관계
한국과 태국 양국은 양국 간의 경제협력을 위해 무역협정, 이중과세방지협정, 투자보장협정 체결 및 과학기술·항공·해운 분야 협력협정(또는 약정) 체결 등 경제협력 증진의 제도적 기반을 확충하였다. 특히 태국은 한국을 주요 경제협력 파트너로 인식하고, 무역과 투자 확대 등 경제·통상 관계 증진을 적극 희망하고 있다.

2014년 기준 한국과 태국 간의 교역은 129.44억 달러(대對태국 수출 75.99억 달러, 대對태국 수입 53.45억 달러)로서 태국은 우리의 22위 교역 대상국(수출 17위, 수입 21위)이다. 양국은 2009년 세계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침체로 무역량이 감소했으나, 2010년 세계 경기회복 및 한·태국 FTA 발효(2010.1)로 인해 무역량이 급증하였다. 주요 수출 품목(한국 기준)은 철강금속제품, 화학공업제품, 전자전기제품 순이고, 수입 품목은 농림수산물, 전자전기제품, 화학제품 순이다.

태국에 대한 우리 기업의 투자는 1988~1991년간 크게 증가했으나, 중국·베트남 등 새로운 투자대상국이 등장하면서 증가세가 둔화되었다. 2014년 말 기준 태국에 대한 해외직접투자는 총 2,250건, 누적액 28.5억 달러로 태국은 우리나라의 제46위 투자대상국(한국수출입은행, 신고 기준)이다. 태국의 한국에 대한 투자는 총 281건에 9,815만 3,000달러(2014년 말 누계, 신고 기준)를 기록하고 있다.

태국은 동남아 한류의 거점으로서 한국 TV 드라마, 영화, 음반 및 게임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으며, 민간 차원에서 이 분야 시장 진출이 매우 활발하다. 2002년 월드컵 등을 계기로 한국의 인지도가 급격히 상승하여 한국 문화와 한국어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등 한류가 확산 중이다. 태국에는 2012년에 한국교육원이 개설되었고, 2013년에는 한국문화원도 개원되었다. 양국 간에는 국제문화제 참가, 영화 등 영상물 사업 협력, 태권도 등 스포츠 교류, 학술행사 및 문화예술인 초청 등 다양한 분야에서 문화교류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또한 태국은 중국 등에 이은 한국의 주요 해외여행 대상국으로 양국 국민의 상호 방문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2014년 기준 양국 상호 방문 관광객 규모는 약 157만 명으로, 태국 방문 한국인 수는 약 110만 명이고 한국 방문 태국인 수는 약 47만 명이다. 태국인 한국방문객 수는 6위이며, ASEAN 10개국 중 1위, 한국인 태국방문객 수는 5위를 기록하고 있다. 현재 방콕·치앙마이·푸켓 등 태국 주요 도시와 인천(서울)·부산 등 한국 도시 간에 정기 항공 노선이 1주에 276회 운행 중이다.

2014년 12월 기준으로 태국에 거주 및 체류하는 한국인 재외동포 수는 약 19,700명으로 추정된다. 시민권 또는 영주권 소지자가 약 200여명, 일반체류자 약 16,500여명, 유학생이 약 3,000여명이다. 상당수 교민들은 관광관련업종(여행사, 식당, 골프 등)에 종사하고 있으며, 한·태 비자면제협정에 따라 3개월간 무비자로 체류가 가능하다. 태국 내에 있는 한국 동포단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재태국 한인회(Korean Association in Thailand)이며, 이외에 태국 각지에 한인회 지회가 있는데, 촌부리지회(파타야 포함), 푸켓 한인회, 치앙마이 한인회, 치앙라이 한인회 등이 있다. 태국에 거주하는 한국 동포들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교민 자녀들을 위한 한국 교민학교의 필요성도 증대되었다. 이에 따라 2001년 3월 30일에 방콕한국국제학교를 개교하였다. 이 학교는 2002년 2월 18일에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정식인가를 획득하였고 2003년 9월 8일에는 주재국 교육부로부터의 인가도 획득하였다. 이 밖에도 토요 한글학교로는 방콕, 푸켓, 치앙마이, 촌부리에덴, 유니온 한글학교가 운영되고 있는데, 정부는 매년 상기 한글학교에 대해 운영지원금 및 교과서를 지원하고 있다.

태국-북한 관계
북한과 태국은 1975년 5월에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후 왕실·군부 인사를 중심으로 상호 교류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최근 북한의 핵개발 및 미얀마와의 군사협력 등으로 태국 정부 및 국민의 북한에 대한 인식이 악화된 상태이다. 태국은 그간 북한의 홍수 피해 등에 대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현금 및 쌀 등을 지원하였으나, 2013년 2월 북핵 실험이 있은 후에 지원 보류를 선언하였다가 2013년 8월에는 대북 쌀 지원 결정을 백지화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태국과 북한 간 교역은 2013년 기준 8,500만 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태국의 왕권王權
수코타이 시대부터 700년 동안 이어져 온 전제 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체제가 바뀐 이후 태국 국왕의 권한은 대폭 축소되었으나 국왕은 ‘차크라바틴Chakravatin’, 즉 ‘생명의 주인’으로 불리며 존경받고 있다. 국왕은 입헌군주제에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국왕은 국가권력의 정당성의 근원이고, 국민 일체감의 상징이며, 민족주의를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이다.

태국 왕권은 몇 가지 뚜렷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먼저 수코타이 시대로부터 지속된 특성으로 ‘탐마라차Dhammaraja’ 왕권이 있다. ‘탐마라차’는 불교에서 비롯되는 이상적 국왕을 가리키는 것이다. 태국의 국왕들은 탐마라차가 되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해왔고, 국민들은 이런 국왕을 존경하는 것이다. 태국의 고대법전인 프라탐마Phra Thammasat에 따르면, 국왕이 준수해야 할 열 가지 덕목이 있다. 보시, 지계, 희생, 공정, 온화, 노력, 불노不怒, 불해不害, 인내, 불역不逆 등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덕목에 따라 다스리는 왕을 이상적 왕으로 여기고 그를 탐마라차라 부른 것이다. 따라서 국왕은 탐마라차를 준수함으로써 국가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아유타야 시대에서는 탐마라차 왕권과 더불어 ‘테와라차Devaraja’라는 새로운 왕권이 등장한다. ‘테라와차 왕권’은 왕의 신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유타야 왕국은 인도문화의 영향을 받아 국왕을 시바나 비시누와 같은 신적 존재로 여기고 신의 세속적 화신으로 절대적 통치권을 행사하는 경외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람도 왕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 무서운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아유타야 시대 이래로 태국의 국왕들은 신성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법을 실행하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테라와차의 절대적 왕권은 탐마라차 왕권에 의해 견제를 받았다. 법을 시행하는 정도에 따라 국왕에 대한 정당성의 평가가 달라졌다. 아유타야 왕국의 왕들 가운데 몇 왕들은 법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 반란군들에 의해 폐위되거나 처형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테라와차의 왕권은 짜끄리 왕조의 라마 4세와 5세의 통치기에 들어서 급격히 쇠퇴하였다. 왕권은 가부장적 성격을 지닌 탐마라차 왕권으로 변화되었다. 아유타야 시대의 신성한 왕권의 이미지에서 불교사원의 인간적 수호자로 이미지를 변신시켰다. 그리하여 국왕들은 백성들을 위해 다양한 법을 시행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친근한 군주가 되려고 하였다.

1946년에 당시 19세로 즉위하였던 라마 9세 푸미폰 국왕은 태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하고 있다. 그는 1986년 60회 생일에 입헌군주로서는 최초로 대왕이 되는 영광을 얻었다. 오늘날 재위 반세기를 넘긴 푸미폰 국왕은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하면서 태국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로 숭앙을 받고 있다. 푸미폰 국왕은 국왕을 종교의 수호자로 규정한 헌법에 따라 한때 출가 생활을 하였고, 현재도 다양한 불교 행사에 참가하며 국민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 푸미폰 국왕은 정치적 실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1992년 민주화 사태 때 군부와 군중의 대립, 2006년 군부의 쿠데타 등을 조율하고 해결하는 데 국왕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 『태국개황』(외교부, 2014)
- 『태국의 이해』(한국태국학회, 서울: 외국어대학교, 2005)
- 『태국: 불교와 국왕의 나라』(조흥국, 서울: 소나무, 2007)
- 주한 태국 대사관 홈페이지
- 주태국 대한민국 대사관 홈페이지
- Naver 지식백과(동남아시아, 태국)
- KOTRA 국가정보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2013.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