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봄을 꽃피운 체코

[세계지역문화탐방]

체코Czech Republic는 높은 산지로 둘러싸인 중부유럽의 내륙국이다. 동유럽 민주화 역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는 ‘프라하의 봄’과 평화로운 무혈시민혁명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벨벳혁명’으로 유명한 체코는 동유럽의 꽃으로 묘사될 만큼 유서 깊고 고풍스런 자취가 곳곳에 스며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유럽의 전통과 역사가 살아 숨쉬는, 유럽인들의 마음의 고향 체코를 찾아가 본다.



1.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체코공화국The Czech Republic은 유럽 중부에 위치한 국가로, 북쪽으로는 독일과 폴란드, 서쪽으로 독일, 남쪽으로 오스트리아, 동쪽으로 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또한 남동쪽으로 흑해, 북쪽으로는 북해와 발트해를 나누는 유럽의 경계선에 있으며 영토의 대부분이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체코는 크게 프라하Praha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의 체히Čechy 지방과 동남부의 모라바Morava 지방, 그리고 동북부의 슬레스코Slezsko 지방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체히는 보헤미아Bohemia(독일어: 뵈멘Böhmen), 모라바는 모라비아Moravia(독일어: 뫼렌Mähren), 슬레스코는 실레지아Silesia(독일어: 슐레지엔Schlesien)로 불리기도 한다. 북위 48°~51°, 동경 12°~19° 지역에 있는 내륙국 체코는 북부 유럽의 폴란드 평원에서 중부 유럽의 다뉴브 강 유역으로 통하는 관문인 ‘모라바’ 지역을 보유하고 있어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한 나라이기도 하다.

지형적인 특성으로 볼 때 체코는 수도인 프라하Praha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수데티Sudety산맥, 서북쪽으로는 에르츠Erzgebirge(체코어로 크루슈네호리Krušné hory)산맥, 서남쪽으로는 보헤미아Bohemia산맥, 동쪽으로는 베스키트Beskid산맥 등과 같은 1,000~1,600m의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산악국가에 속한다. 또한 프라하를 중심으로 북쪽의 체히 지방은 다시 해발 200~400m 높이의 분지와 해발 700~900m에 이르는 고원지대로 나뉘는데, 분지에는 엘베Elbe 강이 북쪽으로 흐르고 블타바Vltava 강, 사자바Sázava 강, 베로운카Berounka 강, 오흐르제Ohře 강 등의 지류가 엘베 강으로 흘러든다. 모라바 지방의 북동부와 서부는 산지 및 구릉지대가 대부분이나, 남부에는 도나우Donau 강의 지류인 모라바Morava 강이 남쪽으로 흐르면서 좁고 긴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다.

체코는 해안선이 전혀 없는 내륙국가이지만, 북부 유럽의 폴란드 평원에서 중부유럽의 다뉴브Danube(도나우Donau) 강 유역으로 통하는 관문이 모라바 지방에 놓여 있다. 전국토에서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이 38.82%, 순수 농경지는 3%, 산악 지역(기타 포함) 58.18%로 산림자원이 매우 풍부하다.

기후는 국토의 대부분이 해양성 기후에 속해 연평균기온 약 7~10℃로 온화한 편이다. 프라하의 경우 가장 추운 1월의 평균기온이 -1.9℃이고, 가장 더운 7월의 평균기온은 17.5℃를 오르내린다. 연평균 강수량은 500~700mm 정도이나, 여름철에 강수량이 많은 편이다. 봄과 가을은 한국 날씨와 비슷하며, 여름은 한국보다 습도와 온도가 낮고 겨울은 흐린 날씨가 계속되면서 눈과 비가 자주 내린다. 강수량이 많은 여름철에 홍수가 자주 발생한다. 2007년 1월 시속 140㎞ 이상의 태풍으로 철도가 끊기고 국경이 마비된 일이 있었으나, 대체로 자연재해로 인한 인명 피해가 많지 않은 나라이다.

체코의 역사
민족의 기원과 고대국가의 형성
체코의 고대 역사는 크게 세 단계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개되었다. 사모 왕국(623~658), 모라비아 왕국(830~907)과 마자르 족의 침입 이후의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옛날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에 최초로 거주한 민족은 켈트Celt인이며, CE(기원후) 1세기경부터 게르만German인과 로마Roma인들이 이 지역에 진출하여 켈트인을 축출하고 그곳의 주도권 쟁탈을 위한 분쟁이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이 지역에 체코의 주요 민족을 형성하고 있는 슬라브Slav인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CE 6세기경부터이며, 고대 체코인은 현재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고대 슬로바키아인은 현재의 슬로바키아에 정착하였다.

6세기경 아바르Avars 족이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의 슬라브 부족들을 침략하자 이에 대항하여 사모(프랑크 왕국의 상인으로 추정)가 몇몇 부족을 통합하여 623년 보헤미아를 중심으로 이 지역 최초의 슬라브족 국가인 사모Samo 왕국을 건설하였다. 사모 왕국은 658년 사모의 죽음과 함께 붕괴되었다.

9세기 초 모이미르 1세MojmirⅠ가 모라비아Moravia 왕국을 건립하였으며, 이 왕국은 계속하여 세력을 확장하여 보헤미아, 슬로바키아, 폴란드 남부, 헝가리 서부까지 통치하였다. 모라비아 왕국의 역사적 의의는 고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였다는 것에 있다. 이 시기에 모라비아 왕국의 요청으로 비잔틴 제국의 선교사 키릴Cyril과 그의 형 메토디우스Methodius가 863년부터 기독교 포교활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최초의 문자인 글라골Glagol 문자(후에 키릴Cyril 문자)를 창제하였다. 오늘날에도 러시아인, 불가리아인, 세르비아인들이 키릴Cyril 문자를 사용하고 있으며, 기독교는 게르만 선교사들에 의해 최초로 전파되었다.

907년 헝가리의 마자르Magyars 족이 모라비아 왕국을 침략하여 멸망시키고, 현재의 슬로바키아 지역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슬로바키아 지역은 체코와 분리된 채 1,000년 동안 헝가리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면서 동방 슬라브 문화가 라틴어와 라틴 기독교 및 문화로 대체되었고, 체코인들은 보헤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훗날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체코 왕국(10세기~1526년)
907년 대大모라비아 왕국 멸망 후 10세기경 프르셰미슬Premysl족이 체코 부족을 통합하여 보헤미아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적 체코 왕국을 건설하고, 1029년 모라비아 지역을 완전 병합하였다. 14세기 초부터 프르셰미슬 왕조가 단절되고, 룩셈부르크Luxemburg 왕조가 지배하였는데, 이 시기는 체코 역사상 황금 시기로 손꼽힌다. 1355년 카를 4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한 후, 프라하Prague(Praha)는 제국의 중심이 되었으며 ‘보헤미아의 왕관’으로 불렸다. 하지만 1415년 종교 개혁자이자 프라하 카렐대학교Univerzita Karlova v Praze 총장인 얀 후스Jan Hus가 부패한 교회제도를 비판하고 종교개혁을 추진하다가 독일 콘스탄츠에서 화형에 처해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1419년 구교와 신교 간의 종교전쟁(후스전쟁)이 촉발되었다. 후스파는 교황이 파견한 십자군을 5회에 걸쳐 격파하였으며, 1436년 후스파의 승리로 전쟁이 종결되고 후스파와 교황청간에 화약(이흘라바Jihlava 협약)이 성립됨으로써 신교를 공인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가 지배하의 체코(1526~1867)
1526년 모하치Mohacs 전투에서 체코와 헝가리의 야기에오Jagiello 왕가가 오스만제국에 패하고, 페르디난트 1세가 체코와 헝가리의 왕이 된 이후, 보헤미아와 슬로바키아는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의 통치를 받기 시작하였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체코를 지배한 결정적 계기는 ‘30년 전쟁’을 통해서였다. 가톨릭을 지지하는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의 왕이 되면서 프로테스탄트를 탄압하기 시작하자 보헤미아의 귀족들이 이에 저항하면서 발발한 것이 30년 전쟁(1618~1648)이었다. 1620년 체코 저항군이 빌라호라Bila hora 전투에서 대패하여 많은 저항 세력들이 처형되거나 국외로 추방당함으로써 체코는 독립을 상실하였다. 1627년에는 토지에 관한 수정 법령에 따라 합스부르크가의 체코 지배가 확고해지고, 체코 왕국의 자치권은 거의 박탈되었다. 결국 1648년 베스트팔렌Westfalen 조약 체결로 30년 전쟁은 종결되고, 체코 왕국은 합스부르크 왕가로 합병되었다.

18세기 계몽사상의 영향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및 요셉 2세는 중앙집권 및 관료주의를 근간으로 하여 체코 왕국을 합리적이며 효과적으로 통치하였다. 체코 왕국은 합스부르크가의 통치 아래 오스트리아제국의 1개 주로 편입되고 독일어가 공식 언어로 채택되었으며 사회 경제 교육의 개혁으로 섬유와 유리 등의 제조업이 발달했다. 이러한 계몽전제군주의 통치(1740~1790)는 체코 왕국의 존재를 위협했으나, 반면 체코의 민족적 부활 의지를 키우는 데 기여하였다. 이 시대의 정신을 체코인들은 흔히 민족부활 운동의 시기라 부른다.

체코의 민족 부흥운동은 J. Jungmann, F. Palacky와 같은 지식인과 인텔리겐챠에 의해 주도되었다. 1791년 찰스-페르디난트 대학에 체코어 및 체코 문화과가 설립되고, 1818년에는 체코 국립박물관이 설립되어 체코어 사전, 문법책, 신문, 잡지 등을 발간하는 등 민족 부흥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슬로바키아에서도 18세기 후반 안톤 베르놀라크Anton Bernolak 및 19세기 루도비트 슈투르Ludovit Stur 등이 슬로바키아 언어의 발전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고, 그 영향으로 슬로바키아 언어가 광범위하게 보급되었으며 슬로바키아인의 민족적 주체 의식도 고양되었다.

1848년 2월에 발생한 파리혁명은 유럽 지역의 정세에 큰 여파를 미쳤고, 이에 영향을 받은 오스트리아 제국은 제국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체코 왕국에서는 독일인과 체코인을 포함하는 민족위원회가 구성되어 체코의 전통적 권리의 반환과 왕국 내의 다양한 슬라브 집단의 통일을 요구하였고, 헝가리 왕국의 통치 아래 있는 슬로바키아인도 루도비트 슈투르Ludovit Stur를 중심으로 민족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1867~1918)
19세기 유럽에서 싹튼 민족주의의 바람은 오스트리아 제국을 계속 지탱하기를 원하는 합스부르크 왕가로 하여금 정치적 타협을 모색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1867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제국Dual Monarchy이다. 이 2중제국 체제하에서 오스트리아 황제는 헝가리와 보헤미아(체코)의 왕을 겸임하였고, 체코는 오스트리아에 의해 슬로바키아는 헝가리에 의해 각각 지배되었다. 1900년 체코의 토마스 마사리크Tomas Masaryk은 현실주의 정당(Realist Party)을 설립하여 의회정치와 보통선거를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슬로바키아에서는 슬로바키아 민족당이 결성되어 민족운동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4년 12월 마사리크는 독립투쟁을 위해 런던으로 망명, 1916년에 파리에 본부를 둔 체코슬로바키아 국민회의를 결성하였다. 1918년 10월 체코슬로바키아 국민회의는 임시정부로 재조직되었고 독립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어 프라하에서는 카렐 크라마르Karel Kramar를 대표로 하는 국민위원회가 공화국을 선포(프라하선언)하였고 슬로바키아 국민회의도 이에 동의하였다. 1918년 10월 31일 프라하 국민위원회의 카렐 크라마르Karel Kramar와 파리 체코슬로바키아 국민회의의 에드바르트 베네시Edvard Beneš가 제네바에서 회담을 갖고, 마사리크Masaryk를 대통령으로 크라마르Kramar를 수상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하였고, 11월 14일에는 국민의회(National Assembly)를 구성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1918~39) 시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며 해체되자 체코 지역과 슬로바키아 지역이 연합하여 1918년 11월 12일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Československá republika으로 독립을 하게 되었다. 공화국은 1920년 2월 29일 헌법을 제정하여 국민의회(양원제)를 최고의 권력기관으로 규정하고 국민의회에 대통령 선출권을 부여하였으며, 시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복수정당제를 도입하였다. 공화국 초기의 정책은 독일과의 접경 수데텐 지역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의 냉담한 반응과 독일인과 슬로바키아인들의 해묵은 적대감으로 원활히 추진되지 못하였으나, 1930년대 대공황 전까지 성공적인 경제정책을 통해 동구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번영을 누렸다. 1935년 소련과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여 국가안보를 견고히 하였고, 1935년 12월에는 에드바르트 베네시Edvard Beneš가 초대 대통령 마사리크Masaryk의 뒤를 이어 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문제의 수데텐 지역을 기반으로 한 ‘수데텐 독일당’이 1935년 선거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의회의 제2당으로 부상하고 수데텐 지방의 자치 요구에서 나아가 독일로의 편입을 부르짖으면서 정치적 마찰이 계속 확대되는 상황을 맞았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사태를 자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독일의 히틀러가 공공연히 수데텐 지역의 할양을 요구하며 위협하는 상황에서 조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이 문제는 1938년 9월 영국과 프랑스의 ‘대륙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을 상징하는 뮌헨조약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의 보헤미아 및 모라비아 영토의 38%가 독일에 병합되는 것으로 종결되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1939~45) 시기
체코슬로바키아의 참여가 배제된 상태에서 뮌헨협상이 관철된 후 베네시 대통령은 1938년 10월 독일의 압력으로 사임하였고 11월에 에밀 하하Emil Hácha가 후임 대통령이 되었다. 하하 정부는 농민당의 루돌프 베란Rudolf Beran을 수상으로 하는 신내각(제2공화국)을 구성하면서 사회민주당을 탄압하고 공산당을 해체하는 동시에 중도파와 우파정권을 민족통일당으로 재조직하는 등 독일의 허수아비 역할만 수행하였다. 대통령직을 사임한 베네시는 런던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으려 하였으나, 1941년 7월에 와서야 영국과 소련 등 동맹국들의 인정을 획득하였다.

1939년 3월 나치 독일은 결국 나머지 체코슬로바키아 영토를 합병하였다. 보헤미아, 모라비아는 독일보호령으로 두고 슬로바키아에는 요제프 티소Jozef Tiso를 대통령으로 하는 괴뢰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어 9월에는 독일이 폴란드를 전격 침공하면서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1943년 베네시는 모스크바에서 동맹 조약을 체결하고, 공산당 지도자인 클레멘트 고트발트Klement Gottwald와 회담을 개최하였다. 그 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독일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운동을 펼쳐 지하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향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공산정권의 수립(1945~68)
1945년 4월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당 등을 중심으로 한 민족전선 연합으로 제3공화국이 출범했다. 동년 5월 소련군이 프라하에 입성한 이후부터 체코슬로바키아는 서유럽과 대비되는 동유럽의 대표적인 공산국가의 하나가 되었다. 1938년 뮌헨조약과 관련하여 서구 동맹국들에 대해 배신감을 갖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은 공산당에 협조적 성향을 보여 공산당 세력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1945년 10월 체코슬로바키아 의회는 망명지에서 귀국한 에드바르트 베네시Edvard Beneš를 대통령으로 승인하였고, 1948년 2월에는 베네시 대통령과 클레멘트 고트발트Klement Gottwald 총리가 주도하는 공산당을 중심으로 신내각이 구성되었다. 하지만 그해 5월 공산당이 주도하는 의회에서 소련 헌법을 모방한 헌법의 제정이 이뤄지고 이 헌법에 대한 서명을 거부했던 베네시 대통령이 사임하는 사건이 이어지면서 공산당은 무혈공산혁명에 성공하였고, 후임 대통령에는 고트발트Gottwald가 취임하였다. 공산정권 수립 후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의 충실한 위성 국가로서 1949년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 및 1955년 바르샤바조약기구(WTO)의 창립국가로서 활약하였다. 1953년 고트발트 사후, 대통령에 안토닌 자포토츠키Antonin Zapotocky, 공산당 의장에 안토닌 노보트니Antonin Novotny가 취임하여 체코슬로바키아의 스탈린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체코의 개혁운동과 좌절(1968~89)
1956년 소련에서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움직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은 같은 해 5월 자유를 요구한 프라하Praha와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에서의 학생시위를 강경 진압하는 등 스탈린주의를 고수하였다. 또한 공산정권은 1960년 7월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 시행하면서 국호를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Československá socialistická republika으로 바꾸었다. 1960년대 초반에 체코슬로바키아는 심각한 경제 침체에 시달렸으며, 1965년 공산당은 이를 타개하고자 약간의 시장경제 원리를 도입한 신경제 모델을 승인하였고, 1965년 12월에는 정치적 개혁 요구에 대하여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에 약간의 제한을 가하고 국민의회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1968년 1월 5일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개혁에 미온적인 안토닌 노보트니Antonin Novotny를 실각시키고 알렉산드르 두브체크Alexander Dubcek를 공산당 제1서기로 선출했는데, 두브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표방하여 개혁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 운동에 당황한 소련은 1968년7월 체코슬로바키아를 제외한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들과 회의를 갖고 공산당 내 우익 세력 척결 등을 요구하는 최후 통첩장을 보냈으나, 두브체크는 이를 거부하고 소련과의 양자 회담을 요구하였다.

1968년 8월에 일어난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 운동(프라하의 봄)은 소련이 주도하는 바르샤바조약 5개국의 무력 간섭으로 좌절되었다. 이들의 무력 사용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 개혁 운동이 자기 나라로까지 확산될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같은 해 10월 27일 국민의회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연방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연방의회로 개칭하였다.

1969년 4월 구스타프 후사크Gustav Husak는 두브체크의 뒤를 이어 공산당 제1서기에 선출되어 개혁 운동 이후 이탈된 사회 분위기를 ‘정상화’하기 위한 활동의 일환으로 숙청 작업을 실시하였다. 1975년에는 후사크 당 서기장이 대통령을 겸임하였고, 1977년 1월 1일에는 체코 내 인권 부재를 항의하는 소위 ‘77헌장’이 서독 일간지에 발표되어 전 세계에 알려짐으로써, 이 헌장에 서명한 지식인 및 과거 정치인들이 체포 감금되고 이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와 서방 국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87년 12월 후사크 공산당 서기장 겸 대통령은 공산당 서기장직을 사임하고, 밀로시 야케시Milos Jakes가 당 서기장직에 취임하였다. 1988년 10월 체코슬로바키아 지도부는 라디슬라프 아다메츠Ladislav Adamec를 총리로 임명하는 등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 침공 이후 최대의 공산당 및 정부의 대폭 개편을 단행하였으나, 새 지도부는 소련에서와 같은 급진적 정치 및 경제개혁에 반대하였다.

체코의 자유화시대
고르바초프Gorbachyov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개혁 개방 정책의 영향으로 1989년1월 프라하에서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을 중심으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자, 공산당 정부는 이를 강경 진압하였다. 체코 의회는 시위 및 불온 유인물 유포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77헌장’ 그룹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반체제 활동을 저지하고자 노력하였다.

1989년 4월 인민의회 의원 보궐선거에서 공산당 정부는 1946년 이후 처음으로 복수 후보에 의한 경선을 실시하여 국민의 민주 개혁 욕구를 무마시키려 하였으나, 국민들의 본질적 개혁 요구에는 크게 미흡하여 국민의 불만이 누적되었다. 1989년 8월 이래 소련은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재평가하고, 이 개혁 운동을 부정해온 체코슬로바키아 지도층을 공격하는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11월 20일 20만 명의 체코슬로바키아 시민은 프라하의 바츨라프Vaclav 광장에 운집하여 11월 17일에 있었던 시위대에 대한 정부 당국의 발포 명령에 강력히 항의하고, 자유선거와 공산 지도자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공산 통치의 종식과 자유화를 외친 이 시위는 하벨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으며, 피를 흘리지 않은 무혈혁명으로 벨벳혁명Velvet Revolution으로 불린다. 1989년 11월 24일, 마침내 야케시 당 서기장이 사임했으며 12월 7일에는 아다메츠 총리가 사임했고 이어 12월 10일에는 후사크 대통령이 사임하였다. 12월 29일에는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이 대통령에 취임했고 ‘프라하의 봄’의 주역이었던 두브체크가 12월 28일 연방의회 의장에 취임함으로써 자유 민주 정부가 탄생하였다. 1990년 4월 체코는 국명을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공화국(CSSR, Czechoslovak Socialist Republic)에서 체코와 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CSFR, Czech and Slovak Federal Republic)으로 변경하였다.

1990년 6월 44년 만의 자유총선에서 체코의 시민포럼Civic Forum과 슬로바키아의 폭력반대 시민단체VPN가 각각 제1당이 되었다. 1991년 6월에는 체코 주둔 소련군이 철수를 완료했다. 하지만 곧 체코인들과 슬로바키아인들 사이에 국명 분쟁을 비롯한 일련의 알력이 빚어졌으며,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양측은 연방을 해체하고 서로 갈라지기로 합의하였고 1993년 1월 1일부로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완전히 별개의 국가로 분리되었다. 이를 ‘벨벳 이혼’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무혈의 벨벳 혁명처럼 아무런 군사적 마찰 없이 평화적으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1993년 1월 체코공화국이 탄생하면서 체코공화국 의회는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을 체코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하였고 동년 3월에는 NATO에 가입하였다. 1997년 바츨라프 클라우스Vaclav Klaus 총리가 퇴임하고 1998년에는 요세프 토소프스키Josef Tosovsky 과도정부가 수립되었다. 2002년에는 사회민주당 연정이 성립되었고, 2004년 5월에는 유럽 연합의 정회원국이 되었으며, 2006년에는 시민민주당ODS이 다수당으로 승리하였으나 정부 구성에는 실패하였다. 2007년 기독민주연합KDU과 녹색당SZ의 중도우파 연립정부가 수립되었다. 2010년 5월 제6차 총선이 실시되어 시민민주당이 전통책임번영당Top 09 및 공공당VV과 연립정부를 수립하였고, 2013년 1월 최초의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밀로시 제만Milos Zeman 후보가 당선되었다.

2013년 6월 총리실장, 시민민주당 전의원이 연루된 부정부패 및 공권력 남용 사건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네차스Necas 총리가 사임하고 내각이 총사퇴하였다. 2013년 8월 의회가 해산되고 10월에 조기총선이 실시되었으며, 2014년 1월 보후슬라프 소보트카Bohuslav Sobotka 총리 내각(사회민주당, 긍정의당, 기독민주연합 연정)이 출범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정치 및 행정


정치형태
체코의 정부 형태는 대통령제를 가미한 의원내각제로 의회는 정부 불신임권을 가지며 대통령은 의회 해산권을 지닌다. 행정부는 대통령이 아닌 의회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며 현실 정치에서는 다수당의 총재가 총리로 임명된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장으로서의 권한이 아닌 국가원수로서의 형식적인 권한만을 갖는다.

대통령
체코 대통령의 지위는 국가원수로 국민의 직선제로 선출된다. 대통령에 선출되면 하원의장에게 취임 선서를 하며 임기는 5년이고 1회에 한하여 연임이 가능하다. 대통령의 권한으로는 총리 및 각료 임면권, 의회 해산권, 대법원 헌법재판소 일반법원 판사 임명권, 법률안 거부권 등을 들 수 있다. 2015년 현재 체코의 대통령은 2013년 1월 최초의 직선제로 당선된 밀로시 제만Milos Zeman이다.

행정부
행정부인 내각은 총리 이하 16개 부처에 부총리 2명을 두고 있다. 각료는 총리를 포함하여 총 17명으로 구성된다. 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고 의회의 승인을 거치며, 각료는 총리의 제청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고 의회의 승인을 거친다. 총리는 정부의 활동을 관리하고 헌법 및 법률에 의해 부여된 행정권을 집행하는데, 2015년 현재 내각 총리는 보후슬라프 소보트카Bohuslav Sobotka이다. 행정부는 행정권의 최고기관이며 동일체로 의사를 결정하고 하원에 대해 책임을 진다. 의회는 대통령이 임명한 새 정부에 대해 30일 이내에 신임투표를 해야 하며, 2차에 걸친 신임 획득에 실패했을 때 대통령은 하원의장이 추천하는 인사를 총리로 재임명해야 한다. 총리는 대통령에게, 각료는 총리를 경유하여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한다. 대통령은 총리가 해임을 요청한 각료를 해임해야 한다. 헌법상으로는 대통령이 실제로 국정운영에 참여할 여지가 매우 제한되어 있으나(국무회의 참석권, 정부와의 업무협의 및 보고서 제출 요구권 정도), 현 밀로쉬 제만Milos Zeman 대통령은 국정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체코의 지방자치 행정구역은 13개의 주kraj와 1개의 특별시hlavni mesto(프라하)로 이루어져 있다.

입법부
입법부인 의회는 임기 4년의 하원 200석과 임기 6년(매 2년마다 1/3씩 개선)의 상원 81석으로 구성된다. 1996년 11월 선거를 실시하여 첫 상원을 구성하였다. 상원은 하원을 통과한 법률안의 심의 등 극히 제한된 기능만 수행한다. 1992년 헌법을 기초할 당시에 일반 여론은 상원이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이었으나, 해체되는 연방의회의 의원들에게 정치 참여의 기회를 준다는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서 상원 구성을 명시하게 되었다.

사법부와 감사원
체코의 사법부 체계는 법원과 헌법재판소로 구성된다. 법원은 최고법원, 고등법원, 지역법원, 지방법원이 있으며, 헌법재판소는 임기 10년의 판사 15명으로 구성되는데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의 동의를 받는다. 감사원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에 속하지 않는 ‘제4부’에 해당하는 독립 헌법 기관이다. 공산 정권 시절에는 행정부의 1개 부처로 존재하였으나, 1993년 1월 새 헌법에 따라 완전 독립성을 갖춘 기관으로 출범하였다. 감사원장 및 부원장은 국회의 제청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하며 임기는 9년이다. 체코의 감사원은 회계 감사만 수행하며 타 국가기관의 고유 업무 집행에 대해서는 감사권을 행사할 수 없다.

3. 경제


체코의 경제 개황
체코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공업 기반의 60% 이상을 전해 받아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세계 10대 공업국으로 발전하였다. 2차 세계대전의 전쟁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체코 경제는 공업을 중심으로 고품질의 기계류와 소비재를 수출하며 호황을 누렸다.

1948년 들어 체코 공산당KSC이 정권을 장악하자 소련식 계획경제 제도를 그대로 모방하는 개혁을 시도하여 1952년까지 거의 모든 분야를 국유화하였다. 1950년대 초부터는 금속 위주의 중공업을 정책적으로 육성하여 주변 공산 국가들에게 기계류와 무기를 공급하는 중요한 국가로 부상하였다. 이에 따라 전체 무역 중 공산권 내 무역이 1948년에는 48%에서 1973년에는 79%로 크게 늘어났다.

체코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무리한 계획으로 1960년대 초 공황을 맞았으나, 이후 1968년까지 약 3년간 개혁을 단행하여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그 결과 중공업과 광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와 이에 따른 불균형 성장으로 소비재가 부족해지고 실업률이 증가함으로써 1970년대 중반부터는 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자원의 비효율적인 이용, 투자의 비효율성 등의 내적 요인이 세계적인 경기 침체와 동서 관계 악화 등의 외적 요인과 겹치면서 성장이 정체되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경제개혁 정책을 제한적이나마 부분적으로 도입하였는데, 1987년 1월 기존의 대외무역기구FTO(Foreign Trade Organization) 제도를 수정하여 외국과의 직접 교역을 부분적으로 허용하였고, 1988년 7월 경제생산협회(Economic Production Association)를 국영기업으로 대체하여 국가 경제의 기본 단위를 이루게 하였다. 이러한 부분적인 경제개혁에도 불구하고 중앙 통제 방식의 경제정책은 경기 침체, 특히 소비재 부족을 초래하여 국민들 사이에 불만이 높아졌다.

1990년 6월 총선을 통해 집권한 민주정부는 법제 정비, 계획 수립 등 준비 과정을 거쳐 1991년부터 본격적인 경제구조 조정 등 시장경제로의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폴란드 헝가리 등과 비교할 때 관련 법규 및 제도 정비가 미흡하고 개혁 진전 속도가 상대적으로 완만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체코는 동유럽 국가 중 가장 산업화되고 안정된 국가였으며, 외채가 적고, 축적된 기술과 우수한 사회 간접자본을 기반으로 하여 바츨라프 클라우스Vaclav Klaus 총리 주도로 적극적인 경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1989년 시장 개방 이후 1990년~1993년 사이 체코 경제는 갑작스런 체제 변화에 따른 충격으로 -23%의 경제성장을 기록해 국민들이 많은 고통을 받았으나, 1994년 상반기부터는 개혁 성과가 가시화되기 시작하여 1996년까지 3~6%의 고도 성장을 기록하였다. 1997년 이후 아시아 금융 위기에 따른 세계적인 경제 불황의 영향으로 경제성장률이 다시 저조해져 1998년에는 -2.3%의 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1998년 6월 출범한 밀로시 제만Milos Zeman 행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및 해외 자본 유치, 유럽연합EU 가입 준비를 위한 각종 제도, 법령 정비 등 적극적인 경제개혁 정책, 그리고 세계경제의 호전에 힘입어 1999년 상반기부터 회복세로 돌아섰으며 2000년도에는 2.5%의 성장률을 보였다.

2001년 2월 체코 정부는 유럽연합 가입 준비를 가속화하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한 2650억 코루나 규모의 경제 활성화 2개년 계획을 발표하여 2001년에 4%, 2002년 5%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달성하였다. 2004년 5월 유럽연합 가입을 계기로 외국인 투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체코 성장률은 2005년 이후 수년간 6%대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2008년 말 미국에서 발생한 금융 위기로 인하여 2008년 경제성장률은 3% 수준으로 떨어졌고, 2011년 하반기 이후로는 유로존 경제위기 등의 영향으로 경기침체 국면으로 진입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하지만 2013년 2/4분기부터 회복세로 전환하여 2014년에는 2.4%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2015년에는 2.7%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주요산업 및 교역
체코의 산업은 전통적으로 지리적 입지조건과 잘 정비된 경제 하부구조 및 공산정권 이후 추진된 정책적 지원 등에 힘입어 공업 부문의 비중이 특히 높았다. 하지만 경제개혁이 본격화된 1991년을 기점으로 공업 부문의 비중이 감소하고 상업 및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증가하는 변화 추세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데, 주요 산업들로는 식료품공업, 기계공업, 화학공업, 관광업 등을 들 수 있다. 식료품공업 중에서 맥주 공업은 체코의 자랑거리 중 하나이다. UN 통계에 따르면 체코는 국민 1인당 연간 맥주 소비량이 세계 1위를 기록할 만큼 맥주를 애용하고 즐기는 나라로서, 투명한 황금색의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 맥주를 만드는 플젠스키 프라즈로이Plzensky Prazdroj 맥주 회사가 체코에 있다. 한편으로 체코는 AVAST, AVG와 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백신 보안업체들을 보유한 나라이기도 하다 특히 Avast는 외국 백신프로그램 중 가장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다.

2014년 체코의 대외 수출은 약 1,744억 2,9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7.5% 증가했으며 수입 또한 1,530억 1,4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6.0% 증가해 체코 경제가 전반적으로 정상궤도에 들어섰음을 시사하고 있다. 2014년 기준으로 체코의 주요 수출품목은 승용차, 자동차 부품, 자동자료처리기계, 무선통신기기 등이며, 수입품목으로는 자동차 부품, 원유 및 가스, 자동자료처리기계, 의약품, 컴퓨터 주변기기 등이다. 특히 레고(Lego) 제품을 중심으로 한 완구류는 체코의 대對한국 수출 1위 품목으로, 2011년 4,800만 달러에서 2014년 1억 1,500만 달러를 기록해 4년 사이 2배 이상 수출량이 증가하였다. 체코의 주요 교역대상국으로는 독일, 중국, 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이 있다.

경제정책과 법령정비
체코 경제정책의 기조는 경제의 서구화 및 EU 가입을 통한 선진화 추진, 외국자본 및 기업의 유치를 통한 체질강화 및 시장경제 체제 공고화, 시장경제원리 및 자유무역주의에 기초한 수출 증진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에 따른 주요 시책들로는 수출진흥 정책과 교역확대로 인한 개방 가속화, 교역대상국 확대, 금융기관과 산업부문의 민영화, 다양한 외국인 투자유인 정책의 집행 등을 들 수 있다. 아울러 체코 경제의 개선을 위해서는 높은 실업률과 낮은 경제성장률 문제의 해결 또한 주요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체코는 효율적인 경제 정책의 집행을 위해 경제 관련 분야의 법령들을 정비해 시행하고 있다. 2006년 기존의 기업파산법(Bankruptcy Act)을 ‘지급불능법(Insolvency Act)’으로 전면 개정하였으며, ‘경매법(Act on Public Auction)’도 개정하여 파산절차와 관계없이 은행이 기업의 담보재산을 처리할 권한을 부여하고 자발적 경매 절차를 간소화였다. 또한 근로관계 부문 개선과 복수노조 허용을 골자로 하는 ‘노동법’ 개정과 함께 외국인 투자에 대한 정부 지원과 대상 분야 확대 등을 명시한 ‘외국인투자인센티브법’도 개정한 바 있다.


4. 사회와 문화


민족의 구성
체코의 인구는 2014년 기준으로 1,062만 명이다. 민족 구성은 체코인이 95.9%, 우크라이나인 1.1%, 슬로바키아인 0.8%, 베트남인 0.6%, 러시아이 0.3%, 독일인 0.2%, 폴란드인 0.2% 등이다. 체코에서 모라비아인은 특히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모라비아인으로 생각하며 별개 집단으로 인식한다. 이들은 남南모라비아 지방에 주로 거주하는데 1989년 이후로는 모라비아인으로 생각하는 인구의 비율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언어
체코의 공용어는 서西슬라브어에 속하는 체코어(체크어)로, 인구의 대부분이 체코어를 사용한다. 이 외에 슬로바키아어, 폴란드어, 독일어, 헝가리어, 우크라이나어, 루테니아어 등도 사용된다. 비즈니스 언어로는 영어와 독일어가 주로 사용된다.

종교
체코는 공산당 정권 시절 종교가 사회주의 이념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교회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켜왔다. 그러나 체코는 역사적으로 기독교와 깊은 연관을 지녀온 전통으로 인해 상당한 신도 수가 존재해왔으며, 민주화 혁명 이후 1990년 1월 과거 종교 탄압용으로 제정된 종교법을 폐지하고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헌법으로 허용하였다.
체코는 독립 이래 교황청과 원만한 관계를 맺어오지 못했는데 이는 얀 후스Jan Hus의 종교개혁 등 역사적 전통에 기인하며, 1925년 및 1933년에는 체코 정부의 고위 인사들이 교황청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교황청 대사가 철수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1990년 4월 교황의 체코 방문을 계기로 교황청과 외교 관계를 재개하였는데, 이는 국민의 다수가 로마가톨릭임을 감안하여 개혁을 추진하는 정부가 개혁 정책에 관한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주변 국가에 비해서는 국민들의 종교적 성향이 약한 편이며, 전체 국민의 약 40% 내외만이 특정 종교를 갖고 있다. 종교 구성은 로마가톨릭이 39.2%이고, 프로테스탄트가 4.1%, 후스파 개신교 신자가 2% 내외이다.

문화예술
체코의 문화는 독특하고 그 역사가 매우 길다. 1348년에 설립된 프라하대학교는 중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당시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특히 요하네스 후스에 의해 다수의 문학 작품이 체크어語로 출판되기도 하였다. 또한 건축가인 페트르 파를레르시는 프라하의 명물인 성 비투스 대성당St. Vitus Cathedral과 카를교Charles Bridge(Karlv Most)를 설계하였다.

17세기 초반 체코 지역이 30년 전쟁으로 분열된 이후 약 150년 동안 체크어로 된 성경의 구독이 금지되어 다수의 신교도들이 자신의 의사와 달리 체코를 떠나야 하였다. 이때 교육개혁자인 아모스 코메니우스Jan Amos Comenius도 강제로 모라비아로 추방되었다. 당시 그는 일련의 교과서들을 편찬하였는데 이 책이 거의 2세기 동안이나 유럽 전역에서 사용되었다. 그가 쓴 《The Visible world in pictures》라는 교과서는 그림이 삽입된 최초의 교과서이다.

19세기 초의 국가 부흥기에는 체크어가 문화의 매개물로 재등장하였다. 19세기 후반의 체코 낭만주의는 이라세크의 역사소설로 대표된다. 그는 체코의 역사에서 작품의 소재를 주로 찾았는데 최고걸작으로 꼽히는 《어둠Temno》은 국가 소멸기의 체코를 다루고 있다. 한편, 극작가인 카렐 차페크는 인간성을 노예화시켜 버린 기계같은 사람이 등장하는 1920년의 연극에서 ‘로봇robot’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국제적인 언어로 통용시켰다.

20세기에 들어 와 유명한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가 체코의 이름을 떨쳤다. 그리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보후밀 흐라발Bohumil Hraval(1914∼1997)과 국내에도 잘 알려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인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1929~), 전前 대통령이자 극작가인 바츨라프 하벨 외에 요세프 호라, 프란티셰크 할라스, 비테슬라프 네즈발,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 등이 체코의 문학을 대표하고 있다.

체코의 음악성은 민속음악에 근원을 둔다. 보헤미아의 걸출한 바로크시대 작곡가인 젤렌카Jan Zelenka는 빈, 베네치아, 드레스덴 등지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동시대인인 바흐에 의해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최근에 와서야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체코 최고의 작곡가인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 Smetana와 안토닌 드보르자크Antonin Dvorjak의 작품에는 체코인 특유의 향수와 정서가 잘 표현되어 있는데 이들은 보헤미아의 민족음악을 진정한 예술 음악으로 발전시켰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는 낭만주의 음악가이지만 음악의 목적을 조국과 모국어에 두었다. 그는 대표적 작품인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을 통해 조국에 대한 그의 사랑과 기상을 표현하였고, 대표적 오페라인 《팔려간 신부The Bartered Bride》는 체크어로 작곡된 국민 오페라로서 체코 국민 음악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안토닌 드보르자크 또한 《슬라브 무곡》에서 보여지듯 작품 전반에 걸쳐 체코 민속음악의 요소를 도입하여 체코의 음악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레오슈 야나체크Leo Janacek는 드보르자크의 민속음악에 대한 열정을 함께 나누면서 체크어의 억양(활용)을 가진 민요의 멜로디와 음계를 조합한 체코 고유의 음악 양식을 창작하였다. 그의 《크리스마스 미사》는 크리스마스 때 체코의 교회에서 자주 불리고 있다.

체코 국민은 축구와 스키를 국민스포츠로 가장 많이 사랑하고, 아이스하키와 테니스도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축구는 유명 스포츠클럽으로 프라하에 스파르타와 보헤미안스Bohemians 등이 유명하며 월드컵축구대회 등 국제무대에서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1996년 유럽 선수권대회에서 독일에 아깝게 2―1로 패해 준우승에 머문 강호이며 유로2000(유럽 선수권대회) 본선에 진출한 적이 있다. 월드컵 본선에 8차례 출전해서 두 차례나 준우승(1934년, 1962년)을 했고 8강에도 두 차례(1938년, 1990년) 올랐다. 체코에는 산이 많고 겨울이 길어 스키에 적합하다. 또한 1998년 일본 나가노 동계 올림픽에서 체코가 1위를 차지하여 체코의 아이스하키 실력은 세계 정상급이다. 겨울에는 크로스컨트리스키도 널리 행해진다. 아이스하키클럽 중에는 프라하에 있는 스파르타Sparta와 한국의 상무격인 두클라Dukla클럽, 그리고 실업팀인 폴디Poldi 등이 있다.

5. 한국과 체코의 관계


외교 및 협력 관계
체코는 남·북한 동시수교국이다. 한국과 체코는 1990년 3월 외교관계를 수립, 같은 해 6월 13일 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관을 개설하였으나, 체코슬로바키아연방 해체에 따라 1993년 1월 1일 체코 정부와 새로운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양국간의 교류를 확대해오고 있다. 체코에서는 1992년 하벨Havel 연방 대통령, 1994년 클라우스Klaus 총리, 2001년 제만Zeman 총리, 2009년 클라우스Klaus 대통령에 이어 2015년 2월 소보트카Sobotka 총리가 한국을 공식 방문하였다. 우리나라는 1990년 3월 최호중 외무장관이 수교의정서에 서명하기 위해 체코를 방문한 이래 1992년 박준규 국회의장, 1995년 김영삼 대통령, 2002년 이만섭 국회의장, 2003년 고건 국무총리, 2009년 한승수 총리 등이 체코를 방문한 바 있다.

양국 간에는 체코-한국 의원친선협회(하원)와 체코-한국협회(The Czech-Korea Society)라는 친한단체와 함께 찰스대 한국어과(Seminar of Korean Studies, 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 체코 태권도협회, 체코 한류팬클럽(Czech Hallyu Wave), 체코-한국 문화포럼(Czech-Korea Cultural Forum) 등의 유관 단체들이 양국 문화 교류에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취업관광, 경제협력, 사회보장,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과학 및 기술협력, 문화협력, 사증면제, 조세, 투자 등에 관련된 다양한 조약 및 협정들이 양국 간에 체결되었다.

체코는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1953년 한국전쟁 휴전 후 40년간 한국휴전중립국감시위원단 위원국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1999년 2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Korean Peninsula Energy Development Organization)에 13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또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남북대화, 북핵 6자회담 등 한국 정부의 한반도 정책을 지지하며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긍정적인 역할 수행을 희망하고 있다. 아울러 유럽연합EU 회원국으로서 EU의 대북 정책과 상충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체코는 ASEM, OECD, UN 등 국제무대에서도 각종 사안별로 우리의 입장에 대해 지지와 협력 입장을 밝히고 있고, 국제기구 진출 시 상호 지지하기로 하는 등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경제 통상관계
한국과 체코 양국 간의 교역은 2007년 현대자동차의 체코 생산 투자에 힘입어 본격화됐으며, 2011년에 최초로 20억 달러를 돌파 후 2014년에는 역대 최고인 23억 7,000만 달러(전년 대비 5.8% 증가)를 기록하였다. 2014년 기준 우리나라의 대對체코 수출은 18억 1,000만 달러, 대對체코 수입은 5억 6천만 달러이다. 대對체코 주요 수출 품목은 체코의 수출산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자동차 부품 및 원동기, 합성수지 등으로 체코의 수출 증가는 한국산 부품에 대한 수요 증가로 연계될 수 있다. 대對체코 주요 수입품목 중에는 전자현미경(전자응용기기)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자동차 부품, 자동차, 합성수지, 기계류 순으로 나타나 있다.

한국-체코 사이에 본격적인 비즈니스 확대의 시발점은 현대자동차를 중심으로 관련 협력사 및 유관업체들이 현지에 진출하기 시작한 지난 2006년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체코가 지난 2004년 유럽연합EU에 가입한 이후 자동차 및 전자 등 다방면의 많은 글로벌 기업이 체코에 진출하였는 바, 체코는 이미 글로벌 기업들의 생산기지로서 위상을 확보함은 물론 체코 산업 또한 이들 기업의 글로벌 생산 공급 가치사슬에 편입돼 튼튼한 산업 기반을 갖추고 있다. 아울러 2015년 2월 한국은 체코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 협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는 체코 정부 입장에서 이스라엘과 프랑스에 이어 3번째로 성사시킨 중요 정책사안에 해당한다. 이에 따라 향후 국방, 과학기술, IT, 인프라 및 에너지 분야 등에서 양국 간에 전반적인 협력이 예상되므로 이들 분야로의 적극적인 진출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그밖에 한국-체코 양국은 문화 학술 분야의 교류도 활발한 편이다. 2013년 체코-한국 문화포럼(The Czech-Korea Cultural Forum)을 창설하였고, 상호 정부장학생 초청 등 한-체코 문화교류협정의 이행안이 집행되고 있다. 또한 ‘체코내 한국어 능력시험(TOPIK)’ 매년 실시, 양국간 학술 교류 증진 지원 사업 실시,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동문회 활성화 지원, 체코 내 한류 확산 활동 지원, 한-체코 방송사간 협력(KBS와 CT, MBC와 TV NOVA), 양국 영화 스튜디오 간 협력 등과 함께 국가 이미지 제고 및 한국 알리기를 위한 공공외교 강화도 문화 공연 행사들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다.

요즈음 한류붐을 타고 한국 여행객들이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물론 심지어 시골 구석구석까지 답사하며 체코를 동유럽의 꽃으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프라하의 카를교Charles Bridge 위에서 보헤미안 랩소디를 들어보라는 글이 인터넷에 떠 있을 정도로 카를 다리는 무척 유명하다. 또한 프라하성Praha Castle에서 카프카를 읽으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여행객의 고백 등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유서 깊고 운치가 있으며 서유럽의 색채가 짙은 체코의 독특한 문화는 우리의 고유한 한류문화와 매치가 되면서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수데텐Sudeten 귀속 문제
20세기 초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은 혼합국가로서 산업화된 체코 지역(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지아)과 농업 중심의 슬로바키아 지역으로 구분이 되었고, 민족 구성에 있어서는 다수인 체코인 외에도 독일인(게르만족)이 당시 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강력한 소수민족을 구성하고 있었다. 특히 독일과 국경을 이루는 북서부 수데텐Sudeten 지방, 이른바 수데텐란트Sudetenland에는 중세 이후 많은 독일인들이 이주하여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 수데텐 지역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가장 발달된 공업지대였으며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지역을 중시하여 여러 주요한 요새들을 구축하기도 했다. 수데텐 지역의 독일인들은 체코인, 슬로바키아인들과 민족이 달라 갈등 관계에 있기는 했으나 체코슬로바키아의 일원으로서 그런대로 큰 충돌 없이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웃 독일에서 1933년 히틀러 나치Nazi 정권이 등장을 한 이후 상황은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1935년 5월 체코슬로바키아 의회 선거에서 히틀러의 지원을 받는 수데텐 독일당Sudeten Deutsche Partei이 제2당으로 부상하였다. 이 당의 지도자 헨라인Konrad Henlein은 제1차 세계대전 말 수데텐 지방이 체코슬로바키아에 편입된 데 반발해 수데텐의 독일귀속운동을 전개하였고, 나치스 독일이 성립되자 1933년 10월 수데텐 독일인 조국전선Sudeten-Deutsche Heimatfront을 결성하였다. 그후 나치스의 원조를 얻어 1935년 ‘수데텐 독일당’으로 개조하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독일인의 자치를 요구하며 그해 선거에서 대승하게 된 것이다.

수데텐 독일당은 수데텐 지역을 독일에 합치는 데 기본 목표를 두고 적대적인 돌발사고와 선동적인 사건들을 일으켰으며, 1938년 히틀러의 수데텐 지방 할양요구에 호응하여 내부에서 수데텐 지방의 독일로의 병합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요청하여 크게 문제화시켰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극단적인 국면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분주히 노력을 기울였으나 조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이 문제는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독일이 참가한 1938년 9월의 뮌헨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에게 10월 10일까지 수데텐란트 지역을 양도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는 것으로 결말이 지어졌다. 이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수데텐의 핍박받는 독일인들을 독일 정부가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전쟁까지 불사할 움직임을 보이는 히틀러를 상대로 평화적인 해결을 모색하려는 영국과 프랑스의 ‘대륙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 조약에 따라 보헤미아 및 모라비아 영토의 38%가 독일에 의해 병합되는 수모를 당한 체코슬로바키아는 서부 산지를 잃어 국방상 불리해졌을 뿐만 아니라, 50%의 석탄 산지를 잃어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프라하의 봄과 벨벳혁명
체코 역사에 있어 자유화 민주화 개혁의 상징처럼 불리는 두 가지의 사건이 있다. 그것은 1968년에 있었던 ‘프라하의 봄’과 1989년에 일어난 ‘벨벳 혁명’이다.

1968년 프라하의 봄(체코어: Pražské jaro)
‘프라하의 봄’은 특정일의 사건이 아니라 자유 민주의 개혁을 위해 두브체크Dubcek라는 국가 지도자를 중심으로 진행되다가 결국은 외세에 의해 좌절된 일련의 과정을 뜻하는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영향 아래 있었던 1968년 1월, 슬로바키아의 개혁파 알렉산드르 두브체크Alexander Dubcek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로 선출됐다. 두브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라는 정치계획을 발표했는데, 그 바탕에는 ‘공산주의는 착취계급의 지배에서 노동 인민을 해방하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어떠한 민주주의 체제보다도 개인의 풍족한 삶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제공해야 한다’는 사고가 깔려있었다. 그 개혁정책들에는 정치 경제적 측면에서 다당제 체제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언론 보도 이동의 자유를 증진하며 소비재 생산을 강조하는 내용이 있었다. 또한 비밀경찰의 권력을 제한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공화국을 두 개의 동등한 나라(체코와 슬로바키아)로 연방화하도록 규정했고, 외교 정책면에서는 서방 국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함과 더불어 소련 및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과 협력하는 내용도 있었다.

자유화를 위한 정책적 변화에 대해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은 ‘프라하의 봄’이라 부르면서 공산체제로부터의 탈바꿈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체코사태가 냉전체제하의 동유럽 공산국가들에게 미칠 악영향을 우려한 소련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로부터의 이탈’이라고 비난하며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1968년 8월 20일 밤, 바르샤바 조약 4개국(소련, 불가리아, 폴란드, 헝가리)의 동구권 군대가 20만명의 병력과 2천대의 탱크로 체코슬로바키아에 진입했고, 8월 21일 아침 체코슬로바키아는 점령을 당했다. 바르샤바 조약군의 공격 당시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 72명이 사망하고 266명이 중상, 436명이 경상을 입었다. 체코슬로바키아 대중은 바르샤바 조약군의 침공에 맞서 비폭력 저항으로 들고 일어났다. 1969년 1월 19일에는 얀 팔라흐Jan Palach라는 대학생이 프라하의 바츨라프스케 광장에서 언론 자유를 다시 억압하는데 반발하며 분신 자살하기도 했다. 침공 직후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난 사람은 7만여명, 최종 탈주자 수는 30만명에 이르렀다.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후 두브체크를 서기장에서 강제 해임하고 공산당에서 제명한 후 산림 공무원으로 좌천시켰다. 두브체크 외의 다른 개혁파 지도자들도 체포되었고 이들을 추종한 약 50만명의 당원들은 제명 또는 숙청되었다. 후임 서기장으로 임명된 구스타프 후사크Gustav Husak는 두브체크의 모든 개혁을 무효로 돌렸다. 개혁 정책 가운데 유일하게 그대로 남은 것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연방화로, 1969년에 체코 사회주의 공화국과 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섰다.

1989년 벨벳혁명velvet revolution(체코어: sametová revoluce)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고 소련 고르바초프Gorbachyov의 개혁Perestroika 개방Glasnost 노선이 공표(1985년)되면서 체코를 포함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는 자유화 민주화의 거대한 물결이 밀려들었다. 이미 ‘프라하의 봄’ 사태를 겪은 바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개혁요구 시위가 줄을 잇는 가운데 1989년 11월 중순 학생들이 대규모로 참여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공산당 정부는 프라하의 나로드니 트리다Narodni Trida 광장에서 평화롭게 시위를 벌이고 있던 학생 시위대를 잔인하게 진압하였고, 이에 반발한 학생들과 예술가들이 주축이 되어 전국적인 시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 시민 봉기를 조직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민포럼Civic Forum인데, 이는 반체제 작가요 활동가로 명성이 높았던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이 주축이 되어 설립된 것이었다. 시민포럼의 세력은 급속히 팽창했고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이에 공산당 정권은 소련의 지원이 끊긴 상태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으며, 40년간 지속되던 공산 독재체제가 드디어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1989년 12월 29일 공산주의연방 의회는 시민포럼의 지도자인 하벨을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그는 40년 만에 비공산주의자로서는 처음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이 되었다. 시민혁명이 성공한 후 하벨은 한 연설에서 “우리는 평화적으로 혁명을 이뤄냈다. 이는 벨벳혁명이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에서 ‘벨벳혁명’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벨벳velvet은 부드러운 고급 비단으로 우단, 비로드로도 불리지만, 형용사로는 ‘조용한’, ‘부드러운’, ‘평화로운’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벨벳혁명’은 평화적으로 이룩한 혁명을 의미하며, 직접적으로 체코 시민혁명을 지칭하면서도 지금은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적으로 이룩한 모든 혁명’을 비유하는 보통명사로도 쓰이고 있다. 체코에서는 이 사건을 계속 ‘벨벳혁명’으로 부르지만, 슬로바키아에서는 이를 ‘신사혁명’(체코어: nežná revolúcia)이란 말로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