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 순흥順興 안安씨

[한국의 성씨]
우리나라 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86년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277성으로 나와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에는 250성으로 조사되었고 1960년 조사에서는 258성이었다. 가장 최근의 조사인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286개의 성과 4179개의 본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 중에서 순흥 안씨는 성씨 별 인구 순위에서 14만 5254가구에 46만 8827명으로 평산 신씨에 이어 15위로 조사됐다.


우리나라의 안씨


안씨의 연원
문헌에 전하는 안씨는 모두 109본이다. 이 중 현존하는 주요 본관은 순흥順興, 죽산竹山, 광주廣州, 강진康津, 탐진耽津, 신죽산新竹山, 경주慶州, 안동安東, 수원水源, 평안平安, 순천順天, 공산公山, 태원太原 등 41개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순흥, 죽산, 광주, 탐진 안씨이다. 안씨의 뿌리에 대해 순흥, 광주, 죽산 안씨 측에서 각각 다른 주장을 펴고 있다. 당나라의 농서 이씨가 동쪽으로 건너와 안씨가 되었다는 설과 고려 조에서 사성賜姓받은 우리나라의 토성土姓이 안씨라는 설이 그것이다. 광주廣州 안씨의 시조는 고려 태조 때 광주지방의 관리였던 안방걸安邦傑이다. 광주의 어떤 사람이 지방수령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 대장군에 올라 광주군에 봉해져, 광주를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성씨를 갖게 된 유래는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지방 호족들에게 성씨를 갖게 하는 정책에 따라 안씨 성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순흥 안씨에서 신죽산 안씨와 탐진 안씨가 분관되었다. 신죽산新竹山 안씨는 순흥 안씨 안자미安子美의 7세손 안원형安元衡이 시조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면서 나라에 공을 세워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 죽산(죽성)은 현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이다. 안씨는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19만 7668가구에 총 63만 778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 중 순흥 안씨는 전체 안씨의 73.5%에 달한다.

시조 안자미
순흥 안씨의 시조는 휘가 자미子美이다. 고려 신종神宗(1197-1204) 때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역임하고 신호위 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추봉되었으며 순흥현順興縣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여 관향貫鄕을 순흥으로 삼게 되었다. 부인에 대한 기록은 실전하여 알지 못한다. 묘소는 소백산小白山에 있었다고 전해지나, 비석이 없어 찾지 못하고 있다. 1654년에 후손 순원군順原君 응창應昌이 의성현감義城縣監에 부임하였다가, 시조의 제사가 단절되고 선조들의 유적이 민멸된 것을 보고 경향의 종친들의 협력을 받아, 순흥 평리촌坪里村[현 석교리石橋里 203번지]을 고택유지古宅遺址로 추정하고, 시조공과 아들 태사공(太師公=휘 부孚)의 제단을 만들고 해마다 제사를 올렸다. 이후 1988년에 순흥 읍내리 비봉산 아래에 새로이 추원단追遠壇을 조성하여 이설하고 해마다 음력 10월 1일 전국의 후손 2천여 명이 참배하고 세사를 올린다.

순흥의 역사
순흥은 한때는 남순북송(南順北松 남쪽에 순흥, 북쪽에 송도)이란 명예를 누렸던 번성했던 곳이었다. 기름진 평야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소수서원^벽화고분^사찰^성지 등 수많은 문화유산과 유적들을 보존·전승해 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또 ‘원단촌院壇村’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원단은 소수서원의 원院과 만고충절의 상징처인 성인단成仁壇(금성단의 단소 이름)의 단을 합친 이름으로 문충文忠의 고장이라는 뜻이다. 순흥은 고구려 시대에는 급벌산군及伐山郡이라 했다. 신라 27대 선덕여왕(632~646) 때 좌대야성 도독하장 죽죽左大野城 都督下將 竹竹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소백산 중턱을 넘는 도로를 개통하고 고개이름을 죽령竹領이라 하고 소백산에서 순흥, 풍기豊基로 흐르는 물을 죽계竹溪라 하였는데 여기서 순흥의 별호를 죽계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라가 점령한 후 35대 경덕왕 때(742~746)에는 급산군岌山郡이라고 고쳤다. 고려초에는 흥주興州라고 불렀다. 조선조 3대 태종 13년(1413)에는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로 승격시키고 별호別號를 순정順政이라 하였다. 조선조 7대 세조 3년(1457)에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모의사건 이후 부를 폐하여 풍기군豊基郡에 소속시키고 각 면面을 마아령馬兒嶺과 문주산文珠山에서 흐르는 냇물을 경계로 나눠 봉화奉化와 영주榮州에 분할시켜 놓았다. 조선조 19대 숙종 9년(1683)에 순흥부順興府로 복원되었고 조선조 28대 고종 32년(1895)에는 순흥군郡이 되었다. 1914년에 군을 폐하고 화천면花川面, 수민단면壽民丹面, 수식면水息面은 봉화군奉化郡에 속하고 그 나머지는 영주군榮州郡으로 들어갔다. 그 후 영주가 시市로 승격됨에 따라 시에서 제외된 지역과 풍기군을 합하여 영풍군榮豊郡이 되므로 여기에 순흥면이 속해졌다. 현재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주시 순흥면이 되었다.

성씨의 변천과정


3파로 분파된 순흥 안씨
시조 안자미는 아들 3형제를 두었으니 영유永儒, 영린永麟, 영화永和이며 이를 각각 1파 추밀공파樞密公派, 2파 별장공파別將公派, 3파 교서공파校書公派라 부른다. 다시 영유의 후손에 14개파, 영린의 후손에 4개파, 영화의 후손에 4개파가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 생활근거지가 파주 금촌으로 옮겨졌는데, 여러 사화를 겪으면서 전국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종가는 서울 도동에 있다가 다시 이북 연백으로 옮겨졌다. 특히 관향지 순흥에 살던 종족들은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1파인 추밀공파 순흥 안씨는 시조의 증손인 안향安珦이 크게 현달하여 가문이 번창했다. 안향은 경기 부곡에 ‘안자묘’安子廟가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 주자학의 태두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아들 안우기安于器는 찬성贊成을 지냈고, 손자 안목安牧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또 안목의 후손에서 탐진 안씨와 신죽산 안씨가 분관되어 나갔다.

제2파인 별장공파 순흥 안씨는 안영린의 후손으로 안문개安文凱가 유명하다. 그는 충숙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충절을 바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첨의참리가 되고 순흥부원군이라는 호를 받았다. 충혜왕 때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송천봉宋天鳳 등 33인과 함께 옥대玉帶를 하사받았다.

3파인 교서공파 순흥 안씨는 안영화의 후손으로 충숙왕 때 원나라의 제과에 급제한 근재謹齋 안축安軸이 유명하다. 충혜왕 때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고,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지었으며 「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을 남겼다.

주요 인물들
순흥 안씨는 시조 안자미의 증손인 안향安珦 이후 크게 일어나 11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하고 20명이 봉군封君되었으며, 17명에 달하는 문형(대제학)을 배출하였다. 그래서 조선조에서는 김, 이, 박씨 등과 함께 6대 성씨의 하나로 인정되는 성씨였다. 11대에 걸쳐 과거급제를 한 사람은 안향安珦-안우기安于器-안목安牧-안원숭安元崇-안원安瑗-안종약安從約-안구安玖-안지귀安知歸-안호安瑚-안처선安處善-안정安珽이 그들이다. 또 6세 안축安軸, 7세 안종원, 8세 안경공, 9세 안순安純, 10세 안숭선安崇善 등 5대에 걸쳐 대제학을 지내기도 했다.

안향은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교서랑校書郞과 감찰어사監察御史, 상주판관尙州判官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충렬왕 복위 때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을 설치하고 후진 양성에 진력하여 유학의 학풍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문하에서 백이정白頤正과 우탁寓倬 등 훌륭한 유학자가 배출되었으며, 이제현李齊賢과 이색李穡으로 이어졌다. 또 이색의 문하에서 권근權近이 나와 조선조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주자학의 태두로 추앙되고 있으며,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과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 곡성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안향의 아들 안우기는 찬성을 지냈고, 손자 안목은 정당문학을 지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안침安琛, 안당安瑭과 안위安瑋, 안현安玹, 안상安瑺 등이 유명하다.

안침安琛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전라도 관찰사와 한성부윤, 대사헌, 경상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고 공조판서를 거쳐 지돈령부사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5형제도 모두 현달하였다. 안당安瑭은 성종 때 친시문과에 급제한 뒤 중종 때 형조·공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으나,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아들 안처겸安處謙이 처형당할 때 사사賜死되었다. 안위安瑋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수하고 호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냈다. 또 안현安玹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명종 때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안상安瑺은 음악에 조예가 깊어 선조 때 거문고, 비파, 장고의 악보를 망라하여 「금합자보琴合字譜」를 발간하였다.

교서공파에서는 고려 말의 명신 안축安軸, 안보安輔, 안집安輯의 3형제가 유명하다. 안축安軸은 충숙왕 때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고, 충목왕 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춘추관감사春秋館監事가 되어 충렬, 충선, 충숙왕조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안보安輔는 공민왕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안집安輯은 밀직密直을 지냈는데, 3형제 중 안축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안축의 아들 안종원安宗源은 조선 개국 후 삼사영사三司領事에 오르고, 안종원의 아들 안경공安景恭은 조선 개국공신으로 태종 때 집현전 대제학이 되었다. 안경공의 아들 안순安純과 손자 안숭선安崇善, 안숭효安崇孝도 명신으로 유명하며, 안숭선의 현손으로 안자유安自裕, 안명세安名世 등이 뛰어났다.

안천보安天保는 시조공(안자미)의 7세이고 양정공의 차남으로서, 자는 정지이고, 시호는 소의공昭懿公이다. 1365년(공민왕 때) 별장이 된 후 전객부령 등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전서에 올랐으며 고려가 망하자 16년 동안 독서와 거문고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1408년 조선조 태종의 부름을 받아 검교 한성윤, 검교찬성을 지내고, 1425년(세종 7년)에는 광록대부 좌의정 자리에 올랐다. 공은 본래 마음가짐이 곧고 충성스러웠으며 왕실의 인척이 됨에 이르러서는 더욱 행동과 처신을 삼가시어 교만한 빛이 전혀 없었다. 병환에 계실 때 아드님이 약 탕관을 올리니 “인생 80이 세상에 흔히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약을 먹어 무엇하겠는가” 하고 소연히 87세에 돌아가셨다. 이 소식을 듣고 궁중에서는 3일간 궁중사무를 폐하고 시호를 용모와 의표가 공손하고 아름답다 하여 소昭라 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현명하고 착한 것을 의懿라 하여 소의공昭懿公으로 내렸다.

그 외 시호를 받은 선조가 32명에 이르며, 그중 문文자 시호를 받은 이가 17명이다. 순흥 안씨에서 배출된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641명이나 된다. 문과에 121명이며, 무과에 91명, 사마시에 327명, 역과에 42명, 의과에 24명, 음양과에 26명, 율과에 9명, 주학에 1명이다.

순흥 안씨 근·현대 인물


순흥 안씨에서는 근·현대 인물로 독립운동가와 정치가 등이 특히 많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는 안중근安重根, 안병찬安秉瓚(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대궐에 들어가 통곡함), 안승우安承禹(충주의 황강 싸움에서 전사),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안익태安益泰(애국가 작곡), 백산 안희제安熙濟, 안재홍安在鴻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도산 안창호安昌浩는 독립협회에 가입한 뒤 평양에 대성학교,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1912년 미국으로 망명해 흥사단을 설립했다. 59년 일생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우고 끝내 침략자의 형벌에 순국했다.

안중근安重根은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후 뤼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선천에서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안명근安明根이 그의 사촌동생이다. 안중근, 안명근 사건으로 일제가 순흥 안씨 집안에 가한 탄압 역시 순흥 안씨의 수난사 중 일부라 할 수 있다. 안중근의 순흥 안씨 가문은 백범 김구와 깊이 얽혀 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백범 김구를 숨겨주었고, 안중근의 친척인 안미생은 김구의 며느리이다. 하지만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도 순흥 안씨 가문이다.

현대 인물로는 종교계에 증산도의 2변과 3변을 개창하신 안운산安雲山 태상종도사太上宗道師가 계신다.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은 1922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유소 시절부터 보천교普天敎를 신앙하시던 부친의 영향으로 증산 상제님의 진리를 접하게 되었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아 태상종도사님은 혈혈단신 세상에 증산 상제님의 진리를 선포하셨다. 이때 전국을 누비며 초인적인 열정으로 수십만을 포교하시어 증산도 제2변의 부흥을 열어놓으셨다. 1950년 6.25 동란이 터지면서 전쟁의 참화로 교단 운영이 어려운 상황이라 대휴계기大休契期를 선포하시고, 대전에서 은신하셨다. 그후 1974년 아드님이신 안경전 현現 증산도 종도사와 함께 대전에서 증산도 제3변의 서막을 여셨다. 현재 전세계의 일꾼들이 증산도에 모여들어 후천 5만년 새 역사의 장을 크게 열고 있다. 태상종도사님은 지구촌 통일경전인 『도전』편찬, 전국 도장 순방, 태을궁 건축, 상생방송 개국 등 일꾼 양육과 증산도 세계화의 기틀을 놓으시고 2012년 등천登天하셨다.

정관계의 인물로는 안경모(교통부장관), 안응모(내무부장관), 안동혁(상공부장관), 안동일, 안동준, 안동선, 안갑준, 안종열, 안교덕, 안상수, 안철수(이상 국회의원), 안춘생, 안필준(예비역육군중장), 안철호(육군소장), 안우만(서울지법 부장판사)이 있으며, 학계에서는 안세희(연세대총장), 안병욱(숭전대교수), 안상원(건국대교육대학원장), 안림(성균관대교수), 안인희(이화여대교수) 등이 있다. 또 재계에서는 안영모(한일은행장), 안철환(대한통운대표이사사장), 안상국(동서증권㈜대표이사회장), 안정식(세방기업㈜사장), 안영철(한국화학사장), 안영승(정우개발대표), 안원종(동진산업회장), 안인혁(한국바이엘약품회장), 안세영(대전일보사장) 등이 있다(무순, 전·현직 구분 없음). 이 외 영화배우 안성기, 가수 토니안(본명 안승호), 러시아에 귀화한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선수인 빅토르 안(한국명 안현수) 등도 순흥 안씨이다.



안씨의 연원
죽산 안씨들은 1999년 발간한 죽산 안씨 대동보를 통해 광주, 순흥, 죽산 안씨가 한 뿌리라고 주장한다. 당나라 농서인 이원이 동래함으로서 우리나라의 안씨가 출발했다고 한다. 족보의 내용을 보면 ‘죽산 안씨 동원보에 이르기를 휘 이원李瑗 공은 중국 농서인隴西人으로 당헌종 원화元和 2년 신라 애장왕 8년 정해에 동생 이황 공과 같이 우리나라의 개성에 있는 송악산 아래에 정착하였다. 이 때 광주인廣州人이 그 성주를 죽이는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평할 때 형제분이 몸을 던져 이들과 맞서 용감히 싸워 이를 평정하였다. 이에 국왕이 두 형제분의 혁혁한 전공을 높이 치하하시며 나라를 평안히 하였다고 안국지신安國之臣이라 말씀하시고 형인 원공에게 안씨 성을 내리시고 동생 황에게는 본성을 지키라고 하시며 이씨 성을 그대로 하고 고성군固城郡에 봉하시었다(고성 이씨 시조-편집자 주). 원 공에게 세 아들, 맏이 지춘枝春, 둘째 엽춘葉春, 셋째 화춘花春 공이 계시니 신라 경문왕 4년(서기 864) 갑신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전기 삼형제 분들이 출정하여 이를 평난하시었다. 이에 국왕이 나라를 편안히 하였다고 기뻐하시며 삼형제를 가리켜 안국지신이라 칭찬하시고 이름을 바꾸어 주시며 아울러 봉군封君 하시니 맏이 지춘 공을 방준邦俊으로 죽산군에 봉하시고 둘째 엽춘 공을 방걸邦傑로 광주군에 봉하시고, 셋째 화춘 공을 방협邦俠으로 죽성군에 봉하시니 이로부터 우리나라의 안씨가 시작되었다.’ 죽산 안씨 측에서는 방걸의 11세손이 순흥 안씨의 시조 안자미라고 주장한다. 또 고성 이씨와 안씨는 동근同根 이성異姓의 한 종족이 된다. 이러한 죽산 안씨 측의 주장을 순흥 안씨와 광주 안씨에서는 속설俗說이라며 공식적으로는 인정치 않고 있다. 지난 2011년 죽산 안씨는 도시조都始祖 이원의 선계先系에 대해 ‘이원이 당나라 종실 이기李錡의 동생이며 이국정李國貞의 아들’이라는 종래의 주장을 파기하고 미확인 상태로 두었다. 당나라 종실 세계표에는 이국정의 아들로 이원이나 이황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당나라를 세운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은 북방 선비족 출신이다. 선비족의 발상지는 대선비산(대흥안령 산맥) 일대로 이들은 고조선의 후예들이다. 만약 이원이 선비족의 이李씨였다면 동방 한민족의 정통 혈통이라 볼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역사에서 처음으로 이씨 성을 쓴 사람은 노자老子이다. ‘동방의 아들’임을 내세우기 위해 목자木子인 이씨 성을 썼다고 한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노자 이이李耳의 아버지는 성이 한韓, 이름이 건乾이고 그 선조는 풍이족風夷族 사람(耳父의 姓은 韓이오 名은 乾이니 其先은 風人)’이라고 한다. 안씨의 연원이 이씨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 한씨, 풍씨에서 나왔음을 추론해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참고로 태호 복희씨가 성을 풍으로 하여 인류 최초로 성씨를 가졌고 후에 풍씨는 패佩, 관觀, 임任, 기己, 포庖, 이理, 사姒, 팽彭의 여덟 성씨로 갈라졌다 한다. 안씨의 뿌리는 앞으로 더 밝히고 연구해야 할 과제라고 본다.

순흥 안씨 수난사
정축지변丁丑之變(단종 복위운동)
1457년 6월 21일 단종이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오자 이때 영남의 순흥도호부에서는 이미 귀양 와 있던 세종대왕의 여섯째 왕자인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이보흠李甫欽 부사府使가 뜻있는 동지들을 모아 단종 복위 모의를 하게 된다. 그러나 거사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금성대군은 안동도호부의 감옥으로 이송되고, 이 부사는 박천으로 유배되어 후일 모두 죽었다. 이 사건으로 토호 안씨安氏를 위시하여 수백의 부민들이 참살되었다고 전한다. 순흥도호부는 8월 2일에 혁파革罷되어 관아는 불타 폐허화되었다. 이때 죽계수竹溪水가 혈루血淚로 변하여 영천의 제민루濟民樓까지 흘러내렸다고 한다. 순흥부는 풍기, 영천, 단양, 봉화, 영월 등에 분할 귀속되었다. 이 정축년의 변란으로 11세世~12세世의 수많은 안씨들이 관향에 살다가 무참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거나 살육당하였고 남은 자손들은 뿔뿔히 흩어져야 했다. 순흥 거사 이후 숙종 37년(1711)에 순흥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왕의 윤허를 얻어 순흥에 제단을 설치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금성대군과 이보흠 부사 그리고 당시 순절한 이름 없는 모든 충의열사들을 함께 모시게 된 지금의 금성단이다.

신사무옥辛巳誣獄 의 변
기묘사화가 있은 지 2년 뒤인 1521년(중종 16년)에 소위 신사무옥辛巳誣獄이 일어났다. 안당安瑭의 아들 처겸處謙은 이정숙李正淑, 권전權磌 등과 함께 기묘사화로 득세한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사림士林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 하여 이들을 제거하기로 모의하였다. 이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송사련宋祀連은 처형뻘이 되는 정상鄭鏛과 이러한 사실을 고변할 것을 모의한 후, 안처겸의 모상母喪 때의 조객록弔客錄을 증거로 삼아 고변하였다. 이에 따라 처겸^처근處謹 형제 외에 권전, 이충건, 이약수 등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피해를 입은 안씨를 보면 안정安珽, 안찬安瓚, 안경우安景祐, 안숭복安崇福, 안처순安處順 등이다. 신사무옥으로 순흥 안씨는 금성대군사건 다음가는 큰 수난을 겪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안씨들이 낙향 또는 은거隱居의 길을 밟게 되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의 변
을사사화 이래 5~6년간 비명횡사한 이들은 100여 명에 달하였다. 안명세安名世(14세손)는 사관으로서 을사사화의 자세한 전말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시정기時政記(당대 정무 행정의 실상과 잘잘못을 기록한 1차적 역사 기록물로서 실록을 편찬하는 기본 자료)에 적어 넣었는데, 여기에는 인종의 장례식 전에 윤임 등 3대신이 살해당한 것은 크나큰 불행이라는 지적과 함께 이기와 정순붕의 농간으로 무고한 많은 선비들이 처형당한 사실과 이를 찬반贊反하던 선비들의 명단 등이 담겨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기는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찬집했는데, 그 때 안명세와 함께 사관으로 있었던 한지원韓智源이 안명세가 쓴 시정기의 내용을 이기에게 밀고함으로써 체포되었다. ‘역적들의 편을 들어 사초史草를 바로 쓰지 않았다.’ 며 국문을 당하는 중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이기, 정순붕의 죄악을 폭로하였고,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모습을 남겼다. 이 사건으로 많은 순흥 안씨들이 낙향하여 몸을 숨기게 되었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진우, 『한국인의 역사』, 춘추필법, 2009
〈참고사이트〉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http://blog.naver.com/tlfdksro7)
순흥 안씨 대종회(http://www.shah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