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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한국의 성씨 | 평산 신申씨

    우리나라 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86년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277성으로 나와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에는 250성으로 조사되었고 1960년 조사에서는 258성이었다. 가장 최근의 조사인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286개의 성과 4179개의 본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 중에서 평산 신씨는 성씨 별 인구 순위에서 154,612가구, 496,874명으로 김녕 김씨에 이어 14위로 조사됐다.



    시조 장절공 신숭겸(?~927)


    왕건을 추대한 원훈공신 평산 신씨의 시조인 신숭겸申嵩謙의 원명은 능산能山이며, 원래 전남 곡성(현 곡성면 목사동현 구룡리, 용산재) 출신이다. 일찍부터 무예를 닦은 후, 강원도 광해주光海州(춘천)로 이거해 살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궁예에게 발탁되어 태봉泰封의 기장騎將(기병 장군)으로 있었다. 무예와 지략이 뛰어났고 특히 활쏘기 재주가 뛰어나 신궁이라 불렸다고 한다.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지 몇 년 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능산은 서기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더불어 당시 시중侍中이었던, 왕건에게 거사를 권하여 왕건을 고려 태조로 옹립하였다. 고려개국원훈高麗開國元勳으로, 대장군大將軍(종3품 무관)에 올라, 『고려사1』에는 ‘고려개국 4공신’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평산 신씨의 유래 역사에서는 능산이 평산 신씨를 하사받게 된 과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어느날 왕건이 평주平州(平山)로 사냥을 나가 삼탄三灘을 지날 때 마침 고공을 나는 기러기 떼를 보았다. 왕건이 수행하는 제장諸將에게 “누가 저 기러기를 쏘아 맞히겠는가?” 하고 묻자 그가 맞히겠다고 아뢰었다. 왕건이 그에게 궁시弓矢와 안마鞍馬를 내리며 쏘라고 하자 그는 “몇 번째 기러기를 쏘리까?” 하고 물었다. 왕건이 웃으며 “세 번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쏘라”고 하자 과연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명중시켜 떨어뜨렸다. 왕건이 탄복하고 기러기가 날던 땅 3백결을 하사하고 본관을 평산으로 삼는 신申 성을 사성하였다. 이때 하사받은 땅을 궁위전弓位田이라 하여 대대로 후손들이 지켜왔다.

    평산平山은 황해도 남동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 대곡군大谷郡 또는 다화실多和悉이었던 것을 신라 경덕왕이 영풍永豊으로 고쳤으며, 고려 초에 평주平州로 하였고 1272년(원종 13) 부흥군復興郡에 합쳤다가 충렬왕 때 다시 복구하였다.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평산平山으로 바꾸고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였으며, 고종 때 군郡이 되었다.

    위왕대사爲王代死와 왕건의 애도 고려태조 10년(927년) 10월, 견훤의 군대가 신라의 경주를 침입하여 경애왕을 살해한다. 급보를 받은 왕건이 직접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군사를 통솔하여 경주로 향하니 두 나라의 군대가 맞닥뜨린 곳이 공산公山 동수棟藪(현 대구 지묘동)지역이다. 처음에는 고려군의 매복공격으로 견훤군이 갈팡질팡하였으나 워낙 수가 많은 후백제군은 점차 수습되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왕건군이 포위되어 점점 형세가 위급하게 되었다.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포위망을 뚫을 수 없는 막다른 지경에 이르자 얼굴이 왕건과 흡사한 의제義弟 신숭겸이 왕건을 가장하고 대신 죽을 것을 자청하였다. 그는 태조의 수레(어거御車)에 갈아타고 태조와 갑옷을 바꿔 입고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견훤의 군사는 신숭겸을 태조로 여기고 그 머리를 잘라서 창에 꿰어 달아나니 포위했던 군사가 조금 풀려 태조는 겨우 단신單身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태조가 본진에 돌아와서 곧 신숭겸의 시신을 찾았으나 머리가 없어졌으므로 이를 분간할 수 없었더니 대장 유금필 등이 말하기를 “신장군의 왼발 아래에 사마귀의 무늬가 있었는데 북두칠성과 같았습니다” 하는지라 이를 근거로 과연 찾아내었다. 이에 얼굴을 목공을 시켜 다시 만들어 황금으로 본을 뜨게 하니 생시의 모습과 똑같았다.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히고 자리에 앉게 하여 태조가 친히 제례를 행하고 통곡하였다. 장지는 도선대사가 자신을 위해 잡아준 묘터를 내어주어 예장하게 하였다. 태조는 명을 내려 그가 죽은 자리에 단(순절단殉節壇)을 모으고 절(지묘사智妙寺)를 지어 명복을 빌게 하였다. 왕건은 그에게 ‘벽상호기위 태사 개국공 삼중대광 의경익대 광위이보지절지정공신壁上虎騎衛 太師 開國公 三重大匡 毅景翊戴 匡衛怡輔砥節底定功臣’에 추봉하고 장절裝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후 태조가 매양 팔관회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즐거워할 때 전사한 두 장수가 자리에 없음을 애통히 여겨 신숭겸과 김락의 상像을 짚으로 묶어 만들게 하여 조복을 입혀서 반열班列에 따라서 앉게 하였다. 임금이 술과 음식을 내리기를 명하니 술이 문득 닳아 마르고 가상假像(짚으로 만든 상)이 일어나서 춤을 추는 것이 마치 살아 있을 때와 같았다고 한다. 이로부터는 연회를 여는 행사에는 항상 이들의 자리를 만들어 두도록 하였다.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예종 15년(1120)에 왕이 서경에 행차하여 팔관회가 열렸을 때, 김낙과 신숭겸의 가상을 보고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두 장수의 공을 추도하였다.

    성씨의 변천과정


    19파로 갈라진 평산 신씨 그후 평산 신씨는 신숭겸의 15대손에서 19개파로 갈리는데, 그 중 문희공파文僖公派(30%), 사간공파思簡公派(30%), 제정공파齊靖公派(25%), 정언공파, 한성윤공파 등이 다수를 차지한다. 평산 신씨는 조선 후반기에 세를 떨친 명문으로 상신相臣(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8명, 대제학(홍문관과 예문관의 장) 5명, 판서 20명, 문과 급제자 302명을 배출했다. 특히 평산 신씨에는 묘정에 배향配享★된 인물이 5인이나 된다. 고려 태조 묘정에 배향된 장절공 신숭겸을 비롯하여 조선 세종 묘정에 배향된 15세손 문희공 신개申槩, 인조 묘정에 배향된 20세손 문정공文貞公 신흠申欽, 역시 인조 묘정에 배향된 21세손 중익공中翼公 신경진申景禛, 고종 묘정에 배향된 28세손 문경공文敬公 신응조申應朝 등이다.

    신씨 본관은 본관은 평산平山, 고령高靈, 아주鵝州, 영해寧海, 은풍殷豊, 천안天安, 이천利川, 신천信川, 곡성谷城, 삭녕朔寧, 창주昌州 등 10여 본이 있다. 그 중 대부분은 평산 신씨로 70%를 차지하며, 그 다음이 고령 신씨로 약 17%를 차지한다.

    ★배향配享 주신主神의 제사에 다른 신을 병행하여 제사함. 임금이 생전에 총애하던 신하나 공로가 있는 신하를 종묘宗廟에 부제祔祭하거나 학덕이 있는 사람을 문묘文廟나 서원에 부제하는 일.



    주요인물 신숭겸의 11세손인 신연申衍의 아들 신중명申仲明(병조참판에 추증), 신자명申自明(춘천부사 역임), 신헌주申憲周(상호군) 삼형제에서 가세가 크게 일어났다. 또 신중명의 첫째 아들 신집申輯은 전리판서와 수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둘째 신군평申君平은 공민왕 때 좌대언과 어사대부에 올랐고, 막내인 신현申賢은 대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신개申槩(문희공파 파조)는 신집의 손자로 조선 초기 문과에 급제한 뒤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이조판서와 좌찬성, 우의정을 지냈다. 우참찬으로 있을 때 ‘고려사’ 수찬에 참여했으며, 세종으로부터 궤장几杖(국가에 공이 있는 원로대신에게 하사하던 궤와 지팡이)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신개의 세 아들 신자준申自準(관찰사 역임), 신자승申自繩(대사성 역임), 신자형申自衡(집의 역임)도 모두 현달하였다. 신사임당은 여류문인이자 화가이며, 효와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신개의 현손녀玄孫女이자 진사進士 신명화申命和의 딸이다. 2009년 6월 23일 첫선을 보인 5만원권 화폐의 도안인물이 되어 아들 이율곡과 함께 화폐의 주인공이 되었다.

    신립申砬은 문희공파의 문절공文節公 신상申鏛의 손자이며 평원부원군 신국화申國華의 아들이다. 1567년(선조 즉위년)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선조 16년(1583) 북방에 쳐들어온 여진족 나탕개를 격퇴시키는 등 여진족의 계속되는 침입으로부터 6진을 지켰다. 이러한 공로로 1584년 함경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되었고, 159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청·전라·경상의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임명되었는데 아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대결하였으며 싸움에서 크게 패하자, 남한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죽은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로 평원부원군平山府院君으로 영의정에 오른 신경진申景禛, 부사府使를 지낸 신경희申景禧, 병마절도사를 지낸 신경유申景裕 등 부자父子 3형제가 이름을 날렸다. 신립의 세 아들은 모두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다.

    정언공파의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신립과 같은 항렬이다. 그는 인조 때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냈는데,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더불어 조선의 4대 문장가로 꼽힌다. 그의 아우 신감申鑑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왕조실록을 복간하는데 공이 컸고, 아들 신익성申翊聖은 인조 때 척화 5신斥和五臣의 한 사람으로 청淸나라에 잡혀갔다. 그는 아우 신익전申翊全과 함께 문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문정文貞의 시호를 받았으며 인조묘정에 배향되었다. 이 밖에 숙종 때 명인 신정申晸, 고종 때 좌의정을 지낸 신응조申應朝, 그리고 판서를 지낸 신응현申應顯도 정언공파의 후손들이다. 이렇듯 정언공파는 문희공파와 달리, 영의정 신흠 이후 문신집안의 길을 걸었다.

    사간공파에서는 어사대부 신군평의 손자로 세종 때 호조판서를 지낸 사간공 신호申浩를 파조로 하고 있다. 신호의 6대손 신점申點, 신암申黯 형제가 뛰어났는데, 신점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병을 끌어들이는 데 공을 세워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록되었고 예조와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하지만 그의 직계후손 신율申慄이 대북파大北派에 가담, 소북파小北派를 숙청하는 옥사에 관여하게 되어 인조반정 이후로는 쇠퇴하였다. 하지만 동생 신암의 후대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는데, 아들 신민일申敏一이 대사성, 현손 신사철申思喆은 중추부영사를 지냈다. 사철의 아들 신만申晩과 신회申晦 형제는 영조 때 번갈아 영의정을 지냈다. 이 밖에도 숙종 때 공조판서, 참찬을 지낸 신임申銋, 이조참의를 지낸 신심申鐔, 현종 때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낸 신재식申在植, 형조판서를 역임한 신사운申思運, 예조판서였던 신석우申錫愚, 신석희申錫禧 등도 사간공파의 후손들이다. 신점의 조카 신충일申忠一은 선조 때 조선과 만주와의 관계를 서술한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라는 지도부기를 작성했으며, 근세 인물로는 고종 때 참정대신을 지낸 신기선申箕善과 판소리 여섯마당을 체계화한 신재효申在孝가 있다.

    평산 신씨 근·현대 인물


    위왕대사爲王代死의 충절을 자랑으로 삼는 평산 신씨 가문에서는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칼을 들고 일어났다. 근·현대인물에서는 의병장으로 유명한 신돌석申乭錫이 있다. 그는 평민출신의 의병장으로는 가장 먼저 군사를 모아 막강한 의병세력으로 성장하여 1896∼1908년 영덕, 영양, 울진 등의 여러 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여 독립의병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원래 있던 생가는 일본 관헌들이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꺾기 위한 정략적 차원에서 불에 태워 없앴다고 하며 지금 있는 집은 1995년 복원한 것이다. 이외에도 경북의용단장이었던 신태식申泰植,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던 신팔균申八均이 있고, 신석구申錫九, 신우현申禹鉉, 신숙申肅, 신정백申正栢, 신현구申鉉九 등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독립투사, 건국 후에는 한국민주발전의 초석을 이루었으며 국회의장을 지내고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후보였던 신익희申翼熙선생(사간공파)도 평산 신씨가 배출한 거목이다.

    현대에는 한국경제발전과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고, 보사부 장관에 이어 전두환 신군부 등장 후 국무총리를 지낸 신현확申鉉碻 등 각계각층으로 국가 사회발전에 공헌한 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그 외 현대인물로는 정관계에서 신병현(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신두영(감사원장), 신직수(법무부장관), 신태영(국방부장관), 신현돈(내무부장관), 신상철(체신부장관), 신동원(외무부차관), 신태익(법제처장), 신응균(국방부차관), 신언한(법무부차관), 신상초, 신상식, 신경열, 신영국, 신옥철, 신하균, 신철균, 신옥철, 신윤창, 신동준, 신필균(이상 국회의원), 신정철(대법관), 신성철(대전지법천안지원장) 등이 있다. 또 학계에서는 신태환(서울대총장, 통일원장관, 건설부장관), 신석철(충남대의대학장), 신현천(경상대총장), 신태수(건국대총장), 신동훈(서울대의대학장), 신사훈(서울대교수), 신국주(동국대행정대학원장), 신석균(한국발명학회 회장), 신일철(고려대교수), 신동욱(연세대교수), 신영복(성공회대교수) 등이 있고, 재계에서는 신동관(태평양화학그룹부회장), 신덕균(동방유량회장), 신훈철(삼성항공사장), 신동호(조선일보대표이사) 등이 있으며, 기타 문화계에서는 신영균(영화배우), 신중현(가수), 신동우(만화가)씨 등이 있다. (전·현직 구분 없음) 주요 집성촌은 경북 칠곡군 약목면 복성동, 강원도 이천군 방우면 가려주리, 경남 밀양군 무안면 중산리,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성산리, 경남 남해군 서면 중현리, 충남 예산군 봉산면 대지리, 황해도 금천군 구이면 관문리, 전북 임실군 신덕면 수천리, 평북 영변군 남송면 봉지동 등이라 한다.

    평산 신씨 주요 유적지
    〈춘천묘소〉 신숭겸의 묘소에는 봉분이 셋이다. 그의 머리를 금으로 만들어 예장하면서 혹시 엿보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봉분을 셋으로 만들었다고도 하고, 또는 부인을 합장한 것이라고도 하나 어느 봉분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제향을 지낼 때 중앙의 봉분 앞에서 행하고 있다. 묘소는 도굴꾼들이 수차례 도굴을 시도하였으나 그 때마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모두 잡혔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장교가 말을 타고 묘소 앞을 지나자 말발굽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내려서 분향 후 지나갔다는 일화가 전한다. 묘역은 춘천 박사마을로 유명한 서면에 있으며 풍수지리학적으로도 우리나라 4대 명당지明堂地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좌우에 울창한 소나무가 마치 도열하고 있는 듯하다. 묘역을 비롯 장절사裝節祠, 신도비각, 기념관, 재실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享祀한다.

    〈표충사〉 태조는 신숭겸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그가 죽은 자리에 순절단을 쌓고, 지묘사智妙寺와, 미리사美理寺를 세워, 그의 영정을 모시어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후 조선 선조 40년(1607)에 경상도관찰사 유영순柳永詢이 폐사된 지묘사智妙寺 자리에 사당을 지어 공公을 모시도록 하였으며, 현종 11년(1670)에 유림이 허물어진 사당을 ‘충렬사忠烈祠’로 중수하였다가, 조정에서 그 명후년에 표충사表忠祠라 사액을 내리어 일명 ‘표충서원表忠書院’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종 8년(1871)에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표충서원이 훼철毁撤된 뒤로는 후손들이 순절단을 본거삼아 의지하고, 재사齋舍를 신축하여 제향을 모시며 지켜 왔다. 근래 표충사 중건사업重建事業을 일으켜, 1988년에 준공을 보아 1993년부터 공의 영정과 위패를 다시 모시고, 해마다 한식에 향사를 받들고 있다. 주변에 상절당尙節堂, 표충단表忠壇, 경의문景義門 등이 있다.

    〈영각유허비〉 신숭겸의 영정각影幀閣이 있던 곳에 영각유허비를 세웠다. 신숭겸의 영정이 원래 지묘사智妙寺에 봉안奉安되었더니 절이 헐린 뒤로는 이 곳 대비사大悲寺의 영정각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순조 19年(1819) 대구영사 김철득金喆得의 투장偸葬 흉계로 절과 영정이 모두 불타버렸다. 1832년(순조 32)에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로 있던 그의 후손 신정위申正緯가 비문碑文을 짓고 영각 유허비影閣 遺墟碑를 세웠으며 1848년(헌종 14)에 비를 보존하기 위하여 비각을 세웠다. 비각 아래 모영재慕影齋가 있다. 모영은 영각을 추모한다는 의미이다. [그림 모영재] #모영재#

    〈경백사〉 1926년 신상과 신항, 신건 등 3명이 힘을 합하여 창건하였다. 3동으로 되어 있으며 평산 신씨 보존회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신숭겸을 비롯하여 고려 말기의 학자인 신현, 성리학자 이색李穡, 은사隱士 원천석 등 4현을 모신 조두지소俎豆之所이다. 부속건물로는 장충문裝忠門과 영수정永洙亭, 호재당好在堂등이 있다. 사당에는 신숭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해마다 음력 3월 중정中丁에 평산 신씨 문중과 지방 유림에서 제례를 지낸다.

    〈율리사〉 신숭겸을 주벽으로 하여 신현申賢, 신흔申昕, 신연申演, 신기申淇, 신철申澈, 신오申澳 등 평산 신씨 7위를 배향한 사당이다. 원래는 문중사당으로서 1851년에 ‘세덕사世德祠’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다. 당시는 신숭겸, 신철, 신오 등 3위를 제향하였다. 평산 신씨가 비인지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려말 조선초기의 혼란기에 신용申龍이 이곳에 은둔하면서 비롯되었다. 신용은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두문동에 들어갔던 신기申淇의 아들이다. 그후 신철과 신오의 후손들이 함께 옮겨와 살게 되면서 그 문족들이 번창하게 되었다. 1900년(광무8) 위의 3위 외에 신혼申琿, 신연申演, 온수감溫水監을 지낸 신기申淇 등을 추배하는 ‘율리사栗里祠’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어 1918년에는 사당을 중건하고 1920년에는 고려시대의 학자였던 신현申賢을 마저 추배하여 모두 7위를 제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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