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 안동 권權씨

[한국의 성씨]
우리나라 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86년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277성으로 나와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에는 250성으로 조사되었고 1960년 조사에서는 258성이었다. 가장 최근의 조사인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286개의 성과 4179개의 본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 중에서 안동 권씨는 성씨 별 인구 순위에서 422,735명으로 청주 한씨에 이어 12위로 조사됐다.


안동 권씨, 어떻게 시작됐나


시조 권행權幸 그는 본래 신라의 종성宗姓인 경주 김씨여서 김행金幸이었다. 김행은 신라말 고창古昌(안동)의 호족豪族으로 지내고 있었는데, 927년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입해 포석정에서 이궁離宮로 피신한 경애왕景哀王을 자결케 하고 왕비를 몸소 능욕하는 일이 있었다. 다시 929년(경순왕敬順王 3년) 12월에 견훤은 영남 동북의 요충지로서 주변 여러 고을이 모두 고려의 영향하에 있는 고창군을 공략하기 위해 대군을 몰고 나왔다. 당시 영남지역은 왕도王都 서라벌 일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고을이 신라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고 성주城主의 향배에 따라 고려나 후백제에 항복 또는 부용附庸하여 각기 그 지배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고창 고을만은 요지부동으로 신라 종국宗國에 충성하면서 3천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견훤 입장에서는 이곳만 공략하면 주변 일대가 평정될 것이므로 이를 노린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태조 왕건이 고창을 견훤에게 함락당해서는 조만간 신라 전체가 후백제에 병탄倂呑되고 후백제가 더 막강해질 것이므로 급히 대군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나섰다. 당시 고창의 성주城主는 김선평金宣平(안동 김씨의 시조)인데 이때 이곳의 병마兵馬를 기르면서 함께 수호하는 이가 김행과 또 한 사람 고을의 명망있는 존장尊丈인 장길張吉(안동 장씨의 시조이며 정필貞弼이라고도 함)이었다. 견훤의 대군은 고창을 에워싸고 있고 왕건은 예안진禮安鎭에 이르러 여러 장수와 싸움에서 불리할 경우의 회군 대책을 의논하였다. 2년 전에 공산公山(대구 팔공산) 싸움에서 참패했는데 이번에도 후백제군이 강성한데다 만약 패하면 죽령竹嶺(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에 사이에 있는 고개)의 산맥을 넘는 길이 백제군에게 막혀 퇴로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이같은 형세를 보고 김행이 분연히 일어나 ‘훤의 부도不道함은 의리로 보아 우리가 더불어 하늘을 이고 살 수가 없는 바인데 지금 우리는 병력이 적은 지라 힘으로 능히 보복할 수가 없는데다 또한 필쟁지지必爭之地에 근거하고 있은 즉 종당에는 어육魚肉이 되고 말 것이니 어찌 왕공王公(고려 태조)에게 투귀投歸하여 저 역적 견훤을 섬멸하여 위로는 군부君父의 치욕을 씻고 아래로 민명民命을 살려 우리의 통분을 씻지 않으리오’ 하고는 마침내 김선평 성주와 장길을 설득하여 왕건에게 귀부歸附하였다. 고창의 요충에서 결사항전하던 신라군을 얻게 된 고려군은 의기가 치솟아 병산甁山에서 후백제군과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회전會戰을 벌여 크게 이기게 된다. 싸움의 결과 순식간에 일대의 30여 고을이 고려로 넘어오면서 대세가 고려 쪽으로 기울어 이후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 공적을 의논하고 포상을 행하면서 왕건은 김행을 보고 ‘능히 기미幾微를 밝혀 귀순하였으니 권도權道의 적절함에 통달한지라 권도가 있다 할 것이다(能炳幾達權)’하고 권씨로 성을 내리고 고창군을 승격시켜 안동부安東府(동쪽을 안정시킨다는 뜻)로 하며 벼슬을 주어 대상大相(고려 초기 재상급 벼슬의 넷째 등급)을 삼았다. 뒤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나서 김행에게 삼한벽상三韓壁上 삼중대광三重大匡 아부공신亞父功神의 호를 내리고 작위를 태사太師로 승차하였으며 안동고을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이에 권행은 태사공太師公으로 불리게 되었고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되면서 안동 고을의 실제 영주가 되었다.

권權 자의 의미 왕건이 권행에게 성을 내리면서 한 말 ‘능병기달권能炳幾達權’은 다분히 철학적이다. 먼저 권權 자는 원래 ‘저울 권자’이다. 저울은 무게를 헤아리고 사물을 가늠하는 기준이다. 그래서 저울을 권형權衡이라 한다. 또 권 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먼저 나무 목자가 있다. 다음에 초두艸頭가 있으니 이는 온갖 풀이다. 그리고 입구(口) 자가 둘 나오는데 이는 여러 사람과 그들의 말이다. 마지막에 남는 것이 새 추隹자이다. 이것은 여러 날짐승이다. 이를 조합하면 기준이 되는 큰 나무에 온갖 식물과 사람과 금수가 모여 직분에 따른 질서를 이루는 모양이다. 이것은 또한 여러 글자가 형편에 따라 모였다가 분리될 수도 있어서인지 ‘일시적’ 또는 ‘임시적’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어 권설權設이라 하면 임시로 베푸는 것이 되고 권지權知라 하면 어떤 일을 시보試補로서 맡아본다는 뜻이다. 그래서 권도權道라 하면 임시적 개념의 임기응변臨機應變과 저울질한다는 개념의 권형이 대경대법大經大法에 합치된 것을 지칭한다. 권도를 달리 반경합도反經合道라고도 한다. 풀이하면 경법經法, 곧 대경대법大經大法으로 돌아와 도리에 합치된다는 뜻이다. 권도란 어디까지나 크고 곧은 길과 같은 대경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항상 크고 곧은 길로만 걸을 수는 없는 것처럼 세상에서는 권도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맹자는 일찍이 권도에 대해서 말하기를 ‘수嫂(형제의 아내)가 물에 빠졌을 때는 손을 뻗어 건지는 게 권權인데 무릇 권이 도道가 되는 것은 변사變事(변고의 사태)를 이로써 구제하는 바이며, 때에 따라서는 그렇게 하고 때에 따라서는 그렇게 하지 않기도 해야 하거니와 [사후에는 반드시] 경법經法으로 돌아와야 선善이 되는 것이니 이를 일컬어 권도權道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반경反經에 대해서는 『사기史記』에서 사마천司馬遷은 ‘발연勃然히 반경反經하여 권에 합치되고 상도常道로 돌아온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권도를 쓰는 것은 지극한 도리를 아는 성현聖賢이나 가능한 것이지 아무나 함부로 쓰면 혼란과 반역이 속출하여 세도世道가 망하게 된다. 이것의 어려움에 대해서 공자는 ‘뜻을 세우는 것은 가하여도 도道에 나가는 것은 가하지 못하고 도에 나가는 것이 가하여도 권權을 행하는 것은 가하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왕건이 권행의 귀순 행위에 대해 ‘능병기달권’ 다섯 글자로 정의해주고 권씨 성을 사성賜姓한 것은 다분히 사상적이고 철학적 배경이 깔려있는 셈이다

안동 권씨는 어떻게 변천해왔나



10세 15파와 주요 세거지 안동 권씨는 시조 이전부터 안동에 세거해온 토착 성씨였다. 세계에 의하면 권행의 아들인 권인행權仁幸은 낭중郎中을 지냈고, 3세조인 권책權冊 이후 10세조인 권수평이 중앙관직에 진출하기 이전에는 호장戶長, 부호장副戶長과 같은 향리직에 종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안동 권씨 최초의 족보인 성화보成化譜에 의하면 권책이 안동의 이吏가 된 이후 계속 이직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권행은 고려 개국공신이 된 후 중앙정부의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것 같다. 그는 고창군 성주로 가지고 있던 종래의 세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안동부의 실질적 지배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10세조인 권수평 이후로 중앙관직에 진출하기도 하고, 일부는 그대로 안동의 세력으로 남기도 하였다. 안동 권씨를 흔히 15파라고 한다. 시조 권행 이후로 10세에 이르러 15개의 큰 파로 갈라졌다. 10세에 이르러 후손이 15인뿐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서 후손을 이어 번창시킨 파조派祖가 15인이다. 이를 종지순宗支順, 즉 종계宗系와 지차支次의 순서에 따라 권수중權守中의 수중공파守中公派, 권시중權時中의 부호장공파副戶長公派, 권수평權守平의 추밀공파樞密公派, 권수홍權守洪의 복사공파僕射公派, 권채달權採達의 동정공파同正公派, 권지정權至正의 좌윤공파佐尹公派, 권영정權英正의 별장공파別將公派, 권통의權通義의 부정공파副正公派, 권인가權仁可의 시중공파侍中公派, 권형윤權衡允의 급사중공파給事中公派, 권숙원權叔元의 중윤공파中允公派, 권사발權思拔의 군기감공파軍器監公派, 권대의權大宜의 정조공파正朝公派[광석공파廣石公派], 권추權樞의 호장공파戶長公派, 권척權倜의 검교공파檢校公派가 형성되었다. 주요 세거지는 경북 영주시 영중동, 강원도 평강군 일원, 경북 봉화군 봉화면 유곡리, 경북 안동시 법상동, 경북 예천군 용문면 저곡동 등지다.

주요 인물들 권수평權守平(추밀공파 10세, ? ~ 1250)은 청렴한 관리의 표상으로 ‘고려사’에 입전된 인물이다. 대정隊正(중앙군 하위부대의 장)이었을 때 집안이 가난하여 낭중郎中 복장한卜章漢이 유배를 간 동안 그의 토지를 경작하며 살았다. 그가 석방되어 돌아오자 토지와 함께 임대료까지 셈하여 주어, 재산 쟁탈이 다반사로 행하여지던 때에 아름다운 미풍을 남겼다. 또한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견용牽龍 벼슬이 있어 부귀자제들이 서로 하고자 했는데, 권수평은 그 직에 임명되자 가난하다는 이유로 마다했다. 친구가 부가富家에 장가들고 이 벼슬에 나아갈 것을 권했으나, 부를 구해서 어찌 20년 조강지처를 버리겠느냐고 반문하면서 거절하였다. 관직이 추밀원부사樞密院(고려 시대 왕명 출납과 궁중의 숙위 및 군기를 담당했던 추밀원의 정3품 벼슬)에 이르렀다.

권보權溥(추밀공파 13세)는 수평의 증손자로 충렬왕 5년 18세로 등제하였다. 충선왕 즉위 후 사림원학사詞林院學士로서 박전지朴全之 등과 함께 총애를 받았다. 충선왕 복립 후 찬성사贊成事, 판총부사判摠部事에 올랐다. 충숙왕 때는 첨의정승僉議政丞, 판총부사判摠部事에 올라 영도검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가 가직加職되었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 추성익조동덕보리공신推誠翊祚同德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성품이 충성스럽고 친척들에게 화목하였다. 늙어서도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주자사서집주朱子四書集註」를 간행하도록 건의하여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소개했다. 아들 준準과 사위인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역대의 효자 64인을 뽑아 「효행록孝行錄」을 저술해 유포시켰다. 준準, 종정宗頂, 고皐, 후煦, 겸謙의 다섯 아들과 사위인 이제현李齊賢, 왕숙王璹·왕순王珣이 모두 봉군封君(임금의 적자를 대군大君으로, 후궁에서 태어난 왕자나 왕비의 아버지 또는 2품 이상의 종친과 공신 등을 군君으로 봉하던 일)받아 1가家 9봉군封君으로 당대 최고의 가세를 떨쳤다.

권왕후權王煦(추밀공파 14세)는 권보의 넷째 아들이며 처음 이름은 권재權載였다. 충선왕이 총애하여 양자로 삼고 왕후王煦라고 성명을 하사하였다. 충숙왕 때 계림부원대군鷄林府院大君에 봉해졌고, 충선왕이 원에 알리어 계림군공鷄林君公에 봉함을 받았다. 충선왕이 토번에 귀양갈 때 자신이 대신하고자 했고, 심왕瀋王(고려 후기 심주瀋州·요양遼陽의 고려인들을 통치하기 위해 원元에서 고려의 왕족에게 수여한 봉호封號)이 고려왕위를 빼앗고자 할 때도 전혀 거기에 동조하지 않았다. 충목왕대에 설치되었던 정치도감政治都監의 정승이 되어 당시 권귀나 부원세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탈점된 토지를 과감히 개혁하고자 했다. 이 개혁에 불만을 가졌던 기황후족과 노항盧項 등의 책동으로 정치도감의 개혁사업은 실패하고 죽은 후 장례도 관에서 치르지 못하게 되었으나, 공민왕이 즉위한 후 정헌貞軒으로 증익增益되고 공민왕묘정에 배향되었다. 평생에 망언을 하지 않았으며, 성품이 장중했다 한다. 대의에 통했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에도 반드시 예를 다했다고 한다. 왕후의 후손은 조선에 들어온 후 그의 손자인 권숙權肅과 권근權近의 노력에 의해 권씨로 복성復姓했다.

권근權近은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서 크게 활약한 대학자이며 문학가이다. 공민왕 원년(1352)에 검교정승 권희權僖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권진權晋이었으며 자는 가원可遠 또는 사숙思叔. 호는 양촌楊村이다. 고려 말 충주로 유배되어 양촌에 살았으므로 이를 호로 삼았다. 그는 이색과 정몽주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고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고려 우왕 때 성균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 사병폐지를 주장하여 왕권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예문관 대제학, 의정부 찬성사 등을 역임하였다. 왕명으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하고, 입학도설을 편찬했는데, 이는 후에 이황, 장현광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 밖에 「양촌집陽村集」, 「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 등이 있다.

권제權踶(1387~1445)는 권근의 둘째 아들인데, 태종 14년 알성문과에 급제했다. 집현전부제학, 한성부윤을 지내고, 세종 때 경기도 관찰사, 이조판서를 지내고, 「동국역대가東國歷代歌」를 편찬했다. 「고려사」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정인지, 안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세종에게 바쳤다. 벼슬은 지중추원사, 우찬성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권람이 수양대군에게 한명회를 추천하고 함께 쿠데타를 모의하여 계유정난 성공 후 1등 정난공신에 오른다.

권철權轍(추밀공파 21세, 1503~1578)은 권율의 아버지이다. 그는 중종 때 급제하고, 사관史官 등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1544년 선공감부정으로 경상도경착관이 되었다. 경기도어사 우승지 등을 거쳐 1552년 도승지가 되고, 경상도 전라도의 관찰사, 형조·병조 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으며 1565년 우의정이 되고, 그 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충성심이 강하고 사무 처리에 사려가 깊어 오랜 기간 정권에 있었으나 아무도 그의 허물을 말하는 이가 없었고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덕 많은 거공鉅公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의 아들이 권율이다.

권율權慄은 바다에는 이순신이 있고, 육지엔 권율이 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웠다. 광주 목사로 있으면서 금산군 이산사, 수원 독왕산성에서 적을 대파하고, 행주산성에서 적의 3만 대군을 격파하는 행주대첩을 치렀다. 그 공으로 도원수에 올랐으며, 이후 정유재란에서도 수많은 공을 세웠다.

권상하權尙夏(시중공파 27세, 1641~1721)는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수제자이다. 송시열이 제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되자, 의복과 책을 유품으로 받았다. 숙종이 총애하여 우의정, 좌의정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송시열을 계승한 기호학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권일신權日身(?~1791)은 실학자인 안정복의 사위로 양명학을 연구하다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승훈에게 영세를 받고, 명례방明禮坊(지금의 명동성당 부근)에서 이승훈, 정약전丁若銓 등과 함께 조선천주교회를 창립하고 주교가 되었다. 하지만 신해박해 때 이승훈과 함께 제주도로 귀양을 갔으나, 노모로 인해 신앙에 동요가 생겨 배교背敎하였다.

이렇게 고려, 조선시대 주요 문벌 중의 하나인 안동권씨에서는 조선시대 증직贈職(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죽은 뒤에 품계·관직을 올려주는 일)된 사람을 포함하여 상신相臣이 40명, 경신輕臣이 116명, 초시初試 이상이 1085명, 봉군封君이 70명, 호당戶當이 6명이고 시호諡號를 받은 인물이 59명, 공신功臣이 86명이나 된다. 또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1398명인데, 그중 문과가 367명, 무과가 99명, 사마시가 913명, 역과가 9명, 의과가 4명, 음양과가 1명, 율과가 5명이다. 이 중 문과 급제자 367명은 조선의 종성이었던 전주 이씨 다음으로 많은 숫자이다.

또다른 권씨, 예천 권씨
예천 권씨의 본래 성씨는 흔昕씨였다. 흔씨는 대대로 예천醴泉지역의 호장戶長(고려시대 향직의 우두머리)을 세습해왔다. 예천권씨 시조 흔적신昕迪臣은 고려시대 중엽에 보승별장保勝別將(별장:고려 때 2군 6위 중 6위에 속한 정 7품 부지휘관격이며, 2군은 응양군 용호군으로 왕의 친위대였음)을 지냈으며 안동 권씨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고, 아울러 그의 3세손과 5세손 흔수창昕壽昌·승단昇旦도 안동 권씨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그의 6세손 흔섬昕暹 대에 이르러 고려 29대 충목왕忠穆王이 등극하게 되었는데 충목왕의 이름이 흔이어서 왕 이외는 같은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는 봉권왕제의 관례에 따라 성씨를 바꿔야 했다. 흔섬은 흔적신의 처가 성이자 3세와 5세의 처가 성이기도 한 권씨를 새로운 성으로 정하여, 권성이라 하고, 본관은 시조가 살고 있던 예천으로 하게 되었다. 권섬의 4세손 권맹손權孟孫은 고려 공민왕 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당시의 문장가로 「대동시림大東詩林」을 남겨 가문을 빛냈으며 5세손 권섬權善은 오행五行, 오기五紀, 오복五福, 오륜五倫, 오상五常 5형제를 두었는데,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에 올라 예천 권씨 집안을 오복문五福門이라 불렀다. 권오복은 조선 성종 17년 사관에 뽑혔다. 8세손 권문해權文海는 대구목사大邱牧使로 있을 때 단군조 이래 선조조까지의 우리 역사와 문화예술 풍속 등을 총망라하여 1백 7가지 운韻으로 분류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군부운옥大東韻府群玉」을 저술하였다. 예천권씨와 안동권씨는 내외손內外孫 관계를 800년 동안 지속한 성본이라 한다. 동성이본同姓異本이므로 지금까지 통혼通婚을 하고 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예천권씨는 총 1512가구에 487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안동권씨 근·현대 인물


안동 권씨는 1가 9봉군과 사시四始를 자랑으로 여기는 대표적 양반가문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3대에 걸쳐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한 권인규仁圭, 권종해鍾海, 권기수基洙의 집안이 유명하다. 권인규는 호는 소은巢隱으로 강원도 강릉 출신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비록 나이 먹고 병들었으나 목숨 바쳐 일본을 물리칠 것을 맹세하고 의병투쟁에 참여했다. 선생은 1895년(양력 1896년) 평창 방림에서 격문을 발표하고 강릉으로 들어온 민병호 의병에 참여하여 격문 또는 포고문등의 문서를 작성하여 의병의 당위성을 피력하며 의병참여를 호소했다. 이 같은 내용은 아들 권종해가 편찬한 의병록 『소은창의록巢隱倡義錄』에 수록되어 있는데 「예안禮安 창의소倡義所에 답한 통문通文」, 「창의포고문倡義布告文」, 「창의통문倡義通文」, 「광동창의소포유문關東倡義所布諭文」, 「서고문誓告文」등이 있다. 특히 「창의포고문」에서는 일본은 임진왜란의 원수이며, 국모를 시해한 ‘섬 오랑캐’라면서 우리가 원수를 갚지도 못했는데 또 고개를 숙이고 단발령과 같은 그들의 정책을 따를 수 없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있다.

그리고 초대 동국대 총장을 역임한 철학자 권상로相老가 있다. 그는 『팔만대장경』을 번역했고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와 같은 대작을 남겼다. 또 문학박사로 한국 최초의 영한사전을 펴낸 전 서울대 총장 권중휘重輝(문학박사)씨도 유명하다. 그 외 학자로는 권이혁(전 보사부 장관, 전 서울대 총장), 권영찬(전 건국대 총장), 권오익(경제학 박사, 전 성균관대 총장), 권영대(전 서울대문리대 학장), 권영우(민송학원 이사장)씨 등이 학계의 거목이다.

정관계에서는 권승열(전 법무부 장관), 권중돈(전 국방장관, 전 국회의원), 권오병(법학박사, 전 법무·문교부 장관), 권중동(전 노동부 장관), 권숙일(전 과학기술처 장관), 권영해(전 안기부장), 권영각(전 건설부 장관), 권오기(전 통일원 장관), 권오규(전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 권진호(청와대 안보보좌관), 권정달(전 민정당 사무총장), 권익현(전 민정당 전국구의원), 권일, 권병노, 권태희, 권태욱, 권복인, 권오종, 권오석, 권오훈, 권성기, 권오태, 권영우, 권오을, 권영세, 권영길, 권선택(이상 국회의원), 권용식(전 제주지사) 등이 있다.

재계 및 언론계에서는 권오기(신문편집인협회장), 권혁승(서울경제신문 사장), 권효섭(전 MBC 전무이사, 유정회 국회의원), 권용식(전 농협 회장), 권태을(아동문학가), 권덕규(국어학자, 사학자), 권구현(시인)이 있으며, 배우 권상우와 가수 보아(권보아)도 안동권씨이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진우, 『한국인의 역사』, 춘추필법, 2009
〈참고사이트〉
안동 권씨 대종회(http://www.andongkwon.or.kr), 안동 권씨 대종원(http://www.andongkwon.org)



안동 권씨의 사시四始
사시四始란 조선왕조에서 안동권씨가 다른 성姓보다 앞서 시작했다는 네 가지를 의미하며, 세상에 내놓을 권씨 가문의 자랑으로 일컬어 온 것을 말한다.

기로지시耆老之始 : 기로소耆老所에 최초로 입소
기로소耆老所란 조선 초기부터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기구이다. 원칙적으로는 문과 출신의 정2품 이상인 전ㆍ현직의 고관 출신으로 70세 이상의 원로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들을 ‘기로소 당상’이라고 하였으며 인원 제한은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를 통틀어 여기에 들어간 사람은 7백여 명에 불과했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것을 더할 수 없는 영예로 여기게 되었다. 권문權門에서는 기로소에 가장 먼저 입소한 사람들이 바로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이자 서예가이셨던 권문權門의 14세손인 권중화權仲和공을 비롯해서 15세손인 권희權僖, 17세손 권진權軫, 20세손 권홍權弘, 21세손 권철權轍, 24세손 권대운權大運 등 총 21명이었다.

문형지시文衡之始 : 대제학에 최초로 임명되다
대제학大提學은 조선시대 때 홍문관, 예문관의 수장首長인 정2품 벼슬이다. 달리 문형文衡이라고도 한다. 조선 건국 이전에는 없었으나, 조선 초기에 이르러 문물과 관직을 정비하고 보완할 목적으로, 예문관에만 대제학을 두었는데, 1420년(세종 2년)에 이르러서는 집현전集賢殿에도 대제학을 두었으며, 1456년(세조 2년)에는 집현전을 홍문관으로 고쳐 대제학을 두었다. 이러한 대제학이 되려면, 전임 대제학이 조정의 공론을 모아서 학식과 경륜이 가장 높은 당대 최고의 석학碩學을 선발하여 추천하면, 전ㆍ현임 정승과 이조판서 등이 투표로 가부可否를 결정해서 왕의 재가를 얻어 임명했다. 대제학은 대개 한 번 임명되면 본인이 사임하지 않는 한 종신토록 그 직책을 지켰다. 이와 같이 당대 최고의 학식과 경륜으로 상징되던 대제학에 가장 먼저 오르신 분이 바로 16세손 양촌陽村 권근權近 선생이라 한다.

호당지시湖當之始 : 호당湖堂(독서당)에 최초로 입소
호당湖堂이란 조선시대에 국가의 인재를 길러 내기 위해 건립한 전문 독서 연구기구를 말하며, 일명 ‘독서호당’ 이라고도 하였다. 이와 같은 호당이 처음 설치된 것은 1426년(세종 8년)인데, 그 뒤에 성종은 서거정徐居正의 청을 받아들여 1492년(성종 23)에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을 개설하여 인재를 길러 내었다. 1504년 갑자사화의 여파로 잠시 폐쇄되었다가 1507년에 다시 부활되었으며, 중종은 1517년에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동호독서당은 75년 동안 인재 양성과 더불어 학문 연구와 도서열람의 도서관적 기능을 함께 수행하였다. 호당, 즉 독서당은 학문과 국정에 대한 연구기관으로서 역대 제왕들로부터 많은 총애를 받았는데, 호당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입소자의 자격과 규정을 엄격히 심사하여 입소하는 인원을 소수로 줄여서 선발하기도 했다. 1426년부터 1773년까지 약 350년 동안 총 48차례에 걸쳐서 선발된 인원은 겨우 320명에 불과했는데, 권문權門에서는 권채權採를 비롯해서 권건權健, 권경유權景裕, 권달수權達手, 권운權雲, 권중경權重經 등 6명이나 호당湖堂에서 재직하였다.

족보지시族譜之始 : 우리 나라 최초의 족보族譜 편찬
부계를 중심으로 종족의 혈연관계를 도표식으로 나타낸 계보를 족보族譜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이 안동 권씨의 족보인 『성화보(成化譜)』이다. 조선조 초기인 성종 7년 1476년에 창간하였으며 권제가 가보소첩家譜小牒을 편수編修한데서 비롯하여 제의 아들 권람이 선지를 널리 수소문하여 많은 자료를 수집 그 역시 끝을 맺지 못하였던 것을 그의 내종 서거정徐居正이 상주판관尙州判官 박원창朴元昌과 부사府使 최호원崔灝元과 더불어 보완하여 도보2권을 만들었다. 이것을 더 보완하여 3질秩로 편찬한 것을 외손 경상감사 윤호尹濠에게 부탁하여 안동부安東府에서 1476년 병신丙申(성종 7) 3월에 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