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희망의 나라 폴란드

[세계지역문화탐방]
폴란드는 참으로 혹독한 역사를 살아온 국가이다. 그러나 그 역사를 절망과 비극만으로 읽는다면 오독이다. 폴란드는 정치, 경제, 과학, 문화 전반에서 그들의 저력과 꿈과 희망을 읽을 수 있다. 외세에 의해 123년의 세월을 국가가 소멸된 채 지내오다 1918년 독립을 한 폴란드는 2차대전 중 겪은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 학살이라는 통한의 상처와 공산주의 정권을 무너뜨린 자유노조 ‘솔리다르노시치(연대連帶)’의 역사적 상징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나라이다. 유서 깊은 과학적 전통과 더불어 유럽의 심장부라는 위상에서 비롯된 ‘경계의 문화’ 특성을 민족적 자산으로 삼고 있는 폴란드를 찾아가 본다.


노종상 /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폴란드Poland의 정식 명칭은 폴란드 공화국(Republic of Poland)이다. 폴란드는 북위 49˚~54˚, 동경 14˚~24˚의 중유럽 대평원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동·서 유럽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반시계 방향으로 독일Germany, 체코Czech, 슬로바키아Slovakia, 우크라이나Ukraina, 벨라루시Belarus, 리투아니아Lithuania, 라트비아Latvia 등 7개국의 국경을 접하고 있어 이 나라의 운명이 예사롭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북으로는 유럽 대륙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사이에 있는 발트해Baltic Sea와 면하고 있고 북동쪽에는 러시아Russia연방이 위치해 있다. 국토는 동서로 400마일, 남북으로 440마일의 크기로 약간 일그러진 사각형 모양을 이루며 해안선의 길이는 491㎞이다. 영토 면적은 312,685㎢로서 유럽에서 8번째로 큰 나라이다. 국토 대부분이 북유럽 평야 지대에 위치해 있고 지형은 대체로 완만한 편이다. 남쪽 국경에 있는 수데티Sudety와 카르파티아Carpathian 산맥을 제외하고는 350피트(106m) 이상인 곳이 거의 없다. 폴란드 최고봉은 슬로바키아의 국경에 있는 해발 8,200피트(2,499m)인 리시Rysy 산이다. 폴란드에서 가장 긴 강은 비스툴라Vistula 강(비스와Wisła 강, 667마일)인데 국토 중앙을 가로질러 흘러 광대한 유역 평야를 이루고 하류 지역에 운하를 발달시켜 발트 해 여러 항구와 내륙 여러 시를 연결하는 교통상의 동맥을 이루고 있다. 또한 비스툴라 강과 함께 하천 수계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오데르Oder 강(오드라Odra 강, 530마일)은 서쪽 국경을 따라 흐르고 있다.

폴란드의 기후는 온대 기후에 속하는데, 습도가 높은 서유럽의 해양성 기후로부터 동유럽의 대륙성 기후로 옮아가는 점이지대漸移地帶에 위치하고 있다. 이 때문에 겨울에는 춥고 눈이 많으며, 여름에는 따뜻하다. 연평균 기온은 7℃~10℃로, 겨울 최저기온은 -21℃, 여름 최고기온은 34℃이다. 강수량은 남부 국경 산악지대가 연평균 1000㎜~1100㎜, 가장 적은 중부가 연평균 600㎜이며, 삼림이 국토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데 서유럽의 활엽수림에서 동유럽의 침엽수림으로 옮아가는 점이지대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폴란드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지형에 따라 6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지는데, 가장 북쪽이 발트 해 연안 지역이고, 그 아래가 많은 호수가 있는 빙하 평원 지대, 세 번째가 폴란드 중심부인 중앙 저지대이며, 네 번째가 구릉지대를 포함한 고지, 다섯 번째가 수데티Sudety 산맥(크루슈네 산맥 포함)으로 이루어진 남서부 지역, 마지막이 카르파티아Carpathian 산맥과 그 기슭이다.

폴란드의 역사
왕조국가 시대
폴란드 땅에는 원래 게르만 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10세기 경, 폴라니에족을 중심으로 나라가 형성되어 처음으로 민족과 국토의 명칭이 생겨났다. 966년 가톨릭을 받아들이며 미에슈코Mieszko 1세에 의해 폴란드 최초의 왕조인 피아스트Piast 왕조(966∼1385)가 성립하였다. 1039년 카지미에쥬Kazimierz 1세는 수도를 그니에즈노Gniezno에서 크라쿠프Krakow로 천도하였고, 카지미에쥬 3세(1333∼1370) 시기에는 영토 확장을 통해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1385년에는 피아스트 왕조가 막을 내리고 왕권계승자 야드비가Jadwiga 여왕이 리투아니아의 야기에오Jagiello 대공과 결혼함으로써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조 형태인 야기엘로니안Jagiellonian 왕조를 열었으며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파, 발트해로 통하는 길이 열렸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1569년에 양 왕조간 개인적인 유대관계를 항구적인 제도적 장치로 통합하는 일종의 국가연합을 결성함으로써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위계승자 부재 문제가 발생하여 1572년 야기엘로니안 왕조는 막을 내리고 귀족들이 국왕을 선출하는 일종의 귀족 공화정(Noble Republic)이 등장했으며 1596년 지그문트Zygmunt 3세는 수도를 남부 크라쿠프Krakow에서 중부 바르샤바Warsaw(폴란드어 Warszawa)로 천도하였다. 하지만 폴란드는 선거왕제選擧王制의 채용, 바르샤바 천도 후 강대해진 귀족계급 및 투르크, 스웨덴과의 전쟁 등의 요인으로 인해 국력이 쇠퇴하면서 국운이 기울어졌다. 18세기 후반에 폴란드는 왕권의 강화와 국가 개혁이 시도되기도 하였으나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프러시아(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3국이 폴란드를 자주 침입해 왔다. 이들 3개 국가는 1772년, 1793년과 1795년 3차에 걸쳐 폴란드 영토를 분할하여 통치했다. 나폴레옹에 의한 바르샤바 공국 시대(1807~1815) 외에는 1795년부터 1918년까지 폴란드는 3국의 지배를 받게 됨으로써 123년간 국가가 소멸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폴란드는 이에 맞서 1830년 독립을 위한 혁명 정부를 조직하고 여러 차례의 봉기를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독립투쟁은 실패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 1908년 오스트리아에 의한 보스니아 합병, 1912~1913년의 발칸 전쟁으로 유럽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당시 폴란드 민족운동 단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은 러시아의 보호 하에 폴란드 자치정부를 수립하는 방법과 독일에 협력하여 폴란드 자치권을 최대한 확대하는 방안,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지원 하에 폴란드 자치 국가를 오스트리아의 제국 내에 건설하는 방안 등 세 가지였다. 그러나 당시 어느 국가도 폴란드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선을 긋지 않았다.

제 1, 2차 세계대전기간
제1차 세계대전 중 미국 윌슨 대통령에 의해 제창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선언되면서 폴란드는 1918년 11월 11일 독립국가로 재등장하여 1939년까지 독립을 유지하였다. 19세기의 독립운동의 전통과 제1차 세계대전을 기회로 국가 재건을 수행한 것이다. 이 시기에 폴란드는 러시아와의 전쟁(1920~1921)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기도 하였으나 1926년 피우수트스키의 군사쿠데타 이후 기존의 프랑스가 아닌 독일과 협력관계를 맺게 되면서 정권의 성격도 파시스트화되어 갔다. 폴란드 정부는 1932년에 소련, 1934년에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1939년 8월 23일 소련은 나치 독일과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밀약을 맺어 동유럽을 독일과 소련이 각각 분할하기로 하는 비밀 의정서를 체결함으로써 폴란드는 다시 비극의 역사 속으로 빠져 들었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해 들어오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 소련도 뒤이어 9월 17일에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폴란드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서부 지역은 독일에, 동부 지역은 소련에 의해 양분되었고,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이후부터 1945년 연합국에 패망할 때까지는 독일의 단독 지배를 받았다. 나치 독일은 폴란드 점령 후 ‘죽음의 수용소’를 만들어 잔혹한 대량 학살을 자행함으로써 씻을 수 없는 역사의 오점을 남겼다. 1944년 8~10월에는 대 독일 항전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나 시민 24만 명이 사망하고, 63만 명이 오시비엥침Oświęcim(독일어로 아우슈비츠) 등의 수용소에서 학살되었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만이 아니라 소련 치하의 폴란드 동부지역 역시 참극을 피해갈 수 없었다. 최근 연합뉴스에서 「스탈린 시절 집단 학살된 1천명 유해 우크라서 발견 -피해자는 폴란드 병사·민간인… “새로운 카틴 학살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한 한 기사는 당시의 참상과 비극, 절망이 아직도 폴란드라는 나라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현주소임을 전하고 있다.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600만 명 이상의 인명피해와 국민 재산의 38%에 해당하는 재산피해를 입었다. 2차대전 전후 처리 결과로 폴란드가 다시 독립을 하게 되면서 폴란드 동부지역은 소련에 편입되었고 대신 독일 북동부 및 서부지역은 폴란드로 편입되는 영토 조정이 시행되었다.

공산주의 시대
1945년 폴란드는 해방되었다. 그 해 6월에 폴란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1947년 1월에 치러진 총선 결과 공산-사회당 양당 중심의 인민전선이 압승을 거둠으로써 공산당 정부가 수립되었다. 공산 정권은 이후 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소련의 영향력 아래 묶여 있었는데, 경제 실정과 지도층의 부패 등으로 인해 1980년 7~8월 노동자 파업이 단행되었고 자유화 운동이 확산되었다. 1980년 9월에는 ‘연대連帶(Solidarlity;솔리다르노시치)’라는 이름을 가진 자유노조가 동구권 최초의 합법적 독립노조로 법원에 등록이 완료되었다. 1981년에 접어들어 9월에 자유노조 전국회의가 개최되었고 레흐 바웬사Lech Walesa가 전국자유노조 의장으로 선출되었는데, 10월에 당 서기장에 취임한 야루젤스키Jaruzelski 장군은 12월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자유노조 활동 금지 및 바웬사 의장 등 반체제 지도자에 대한 구금 등의 강경조치를 단행하였다. 1988년 9월 실레지아 지방 광부, 슈체친, 그단스크 항구, 그단스크 조선소 노동자 1만 3천여 명이 자유노조 인정과 임금 인상 및 경제개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민주정부 체제 수립
1989년 공산당 정부와 자유노조측은 ‘원탁회의(Round Table)’라는 타협 방식을 통해 폴란드의 민주화를 이끌던 자유노조 ‘연대Solidarlity’의 합법화와 하원의 40%만 자유선거를 실시하는 단계적 민주화 추진에 합의하였고, 마침내 1989년 6월에 치러진 부분적 자유총선에서 자유노조가 승리하였다. 7월에 열린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야루젤스키Jaruzelski 공산당 서기장이 단독 출마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8월에는 야루젤스키 대통령과 자유노조 지도자 바웬사와의 회담에서 자유노조가 주도하는 연정 수립이 합의되고 차기 총리로서 마조비에츠키Mazowiecki가 지명되었다. 12월에는 폴란드 의회가 사회주의 관계조항 삭제 및 민주·자유경제 조항을 삽입한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부 유럽과 동유럽 최초로 비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1990년 1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공산당)이 자진 해산하였고, 이 해 12월 치러진 대선에서는 레흐 바웬사Lech Walesa가 첫 민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1년 1월 비엘레츠키Bielecki 내각이 성립되고 10월에 치러진 총선 결과 자유노조 계열 24개 정당이 하원에 진출하였다. 하지만 이후 자유노조 계열 정치세력의 내분으로 정국 혼란이 지속되자 1993년 9월 조기 총선이 시행되었고 그 결과 제1, 2당으로 각각 부상한 구 공산당인 민주좌파연합(SLD)과 농민당(PSL)이 연정을 구성하여 1997년 3월까지 지속되었다. 1995년 11월 대선에서는 민주좌파연합 총재 크바시니에프스키Kwasniewski가 바웬사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1997년에는 우파인 자유노조선거운동(AWS)이 총선에서 승리하였고, 2000년에는 크바시니에프스키Kwasniewski가 대통령에 재선되었으며 2001년에 민주좌파연합(SLD)이 총선에서 승리함으로써 다시 좌파가 집권을 하게 되었으나 2005년 9월 총선 및 10월 대선을 치르면서 좌파세력은 쇠퇴하였다.

2005년 9월 PiS(Law and Justice:법과 정의당) 후보로 출마한 레흐 카친스키Lech Kaczynski가 대통령 당선되었고, 11월 총선에서는 우파인 법과 정의당이 승리하면서 소수정부로서 마르친키에비츠Marcinkiewicz 내각이 성립하였고 2006년 5월에는 야로스와프 카친스키 내각(PiS-SO-LPR 연정)이 성립하였다. 하지만 집권한 법과정의당의 혼란한 정국운영으로 인해 2007년 10월 조기 총선이 실시되었고 중도우파인 시민연단(PO)이 승리하여 투스크Donald Tusk 내각(PO-PSL 연정)이 성립하였다. 2010년 4월 특별기 사고로 인해 카친스키 대통령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동년 7월에 치러진 조기 대선 결과 코모로프스키Bronisław Komorowski 하원 의장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11년 10월 총선 결과 시민연단(PO)이 집권 여당 사상 처음으로 연속하여 승리함으로써 투스크 내각(PO-PSL 연정)은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투스크 총리는 최근 유럽연합(EU) 정상회의를 이끌 차기 상임의장(2014년 12월 취임 예정)으로 선출되어 2014년 9월 11일 사임하였으며, 총리 후임자로는 시민연단 소속의 코파츠Ewa Kopacz 하원 의장이 지명되었다. 소아과 의사 출신인 코파츠 의장은 1989년 폴란드의 공산당 정권이 무너지고 나서 1990년대 초에 총리를 지낸 한나 수호츠카Hanna Suchocka에 이어 두 번째 여성 총리가 된다.

정치 및 행정


정치체제
폴란드는 대통령제가 가미된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입헌공화국이다. 직선제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임기 5년(1회 연임 가능)의 대통령은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이며, 예산안을 승인할 수 없거나 정부를 수립할 수 없을 때에 국회를 해산할 권리와 법률안 거부권, 대사 임명 및 소환권, 외국사절 접수 및 추방, 군 통수권(총사령관), 국방위원회 의장, 각료회의 의장(총리) 및 국립은행 총재 임면권, 사면권, 조약 비준 폐기권, 전쟁 상태 및 비상사태 선포권 등을 갖고 있다. 자유노조의 지도자로 유명한 레흐 바웬사Lech Walesa는 1990년 11월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95년 임기를 마쳤고, 현 대통령은 2010년 취임한 코모로프스키Bronisław Komorowski이다.

1989년 체제 전환 이후 폴란드는 2000년대 중후반까지 좌우파 정치세력이 교대로 집권하는 등 정치적 혼란을 겪었으나, 2007년 중도 실용주의 정당인 시민연단(PO) 집권 및 2011년 재집권으로 정치적 안정이 구현되었다. 2007년 10월 집권 후 2011년 10월 재집권에 성공한 시민연단-농민당 연정은 집권 경험을 바탕으로 2008년 경제위기 후에도 마이너스 성장 없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등 원만한 국정운영을 수행 중이나, 경제 위기에 따른 긴축재정과 정년연장, 연금제도 개혁 등 비인기성 개혁 정책 추진으로 최근 지지율이 하락 추세이다. 하지만 집권 시민연단의 지지율 하락세가 제1야당 법과정의당의 지지율 상승으로는 연결되지 않고 있으며, 시민연단 출신의 코모로프스키 대통령이 70%대의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면서 2015년 예정된 대선에서 재선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현 정부는 2015년 총선 및 대선을 염두에 두고 고속도로 건설, 외자 유치 등 가시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정책 추진에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외교정책에 있어 폴란드는 21세기 국가안보 및 경제 번영을 위한 국가적 전략목표로서 유럽연합EU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 역할의 증대를 추진하고 있다. 유럽연합 내 주요 정책결정 국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면서 유럽연합 동방 파트너쉽(Eastern Partnership) 추진 제안 등 유럽연합의 대 동방정책 및 대 동아시아 정책 수립에 적극 참여 중이다. 또한 2004년 유럽연합 가입 이후 아시아 등 역외 국가들과의 선린 협력관계 강화 정책을 강조하면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및 일본, 인도 등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증진, 특히 경제협력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행정부(내각)
국정을 맡은 내각은 일반적으로 하원 총선에서 승리한 정당의 당수가 총리로 선출되어 구성하게 된다. 여당이 의석의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할 경우 정권의 안정을 위해 연립내각을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2007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은 시민연단(PO)은 여당으로는 1989년 민주화 이후 사상 처음으로 2011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재집권에 성공하였으며 이후 농민당(PSL)과 연정을 구성하여 2014년 현재 7년째 집권 중이다.

각료회의(Council of Ministers)는 헌법상 국가권력의 최고 집행 및 행정기관으로 총리 및 각 부 장관, 각료급 위원회 위원장으로 구성된다. 대통령이 하원 다수당과 협의하여 총리 후보를 지명하고 총리 지명자가 내각을 구성 후 하원에 신임을 요청하며, 각부 장관은 총리 제청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한다. 형식적으로는 총리 및 각료를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대통령은 총리 해임권이 없으며, 실제로는 총리가 하원의 신임을 받고 하원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게 되어 있어 국가 권력의 집행상 실질적인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입법부(의회)
폴란드의 의회는 상하 양원제로 구성되어 있다. 하원Sejm은 의석수 460명에 임기 4년이고 41개 선거구에서 의원을 직접 선출하며 정당 및 후보자에 대한 이중 투표제로 운영한다. 하원은 헌법상 예산 심의 및 의결권, 대 정부 질의권, 전쟁상태 의결권, 총리 및 내각 인준권 등의 권한을 갖는다. 상원Senat은 의석수 100명에 임기 4년이며 40개 선거구에서 의원을 직접 선출하고 정당 및 후보자에 대한 이중 투표제로 운영되는데, 하원과 동시에 선거를 치른다. 상원은 하원이 의결한 국가, 사회, 재정 등 제반분야 법안 및 예산안에 대해 7일 이내에 하원에 대해 입장을 제시하며, 하원에 대한 법안 제출이 가능하다. 폴란드에는 다양한 복수 정당이 존재하며, 현재 시민연단PO, 농민당PSL, 민주좌파연합SLD, 팔리코트운동RP, 폴란드연대SP, 법과 정의당PiS, 대화를 위한 구상ID 등의 정당 및 정치적 연맹이 입법부에서 활동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5% 미만 득표 정당은 원내 진출이 불가하고 공석 발생시 하원은 해당 선거구 차석 득표자가 당선되며, 상원은 보궐선거를 실시한다. 일정 요건에 따라 하원이 해산되면 상원도 자동적으로 동시 해산된다.

지방정부
폴란드의 지방정부는 총 16개 주州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주에는 총리가 임명하는 주지사Voivode와 주의회에서 간접 선출되는 주총리Marshal가 병립한다. 주지사는 전반적인 국가 행정 관련 사항을 관장하고, 주총리는 지방정부 관련 사항을 관장한다. 기타 주·시의회 의원 및 시장 등 지방자치단체장은 주민이 직접 선거로 선출한다.

사법부
폴란드의 사법부는 대법원과 최고행정법원, 일반법원, 특별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법원(Supreme Court)은 형사재판부, 민사재판부, 행정재판부, 노동사회보장재판부, 군사재판부 등으로 나뉘고, 일반법원(Common Court)은 주 법원(Voivodeship Court)과 지방법원(District Court)으로 구분되며, 특별법원(Special Court)으로는 헌법재판소(Constitutional Tribunal)와 국무재판소(Tribunal of State, 탄핵재판 담당)가 있다. 법관은 국가사법위원회(National Council of the Judiciary)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고, 대법원장(First President of the Supreme Court)은 대법관 가운데 대통령 제청으로 하원이 임명하며, 대법관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경제


폴란드는 전체 유럽 국가들 중에서는 중간 크기의 국가이지만, 중앙 유럽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큰 국가이다. 폴란드는 중부유럽과 동유럽 국가들 중 경제 성장 분야에서 리더로 꼽힌다. 현재 폴란드는 근본적인 시스템 개혁을 계속 이루어 가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폴란드가 시장경제와 그 기반시설에 있어 극적인 위험 요소들이나 사회적인 불안 요소들이 거의 없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폴란드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서유럽과 동유럽 사이에서 중개자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동유럽과 서유럽에 대한 밀접한 협력관계는 폴란드의 민족 정체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폴란드의 이웃 국가 중 4개국은 유럽연합 회원이다. 폴란드 또한 2004년 5월 1일에 유럽연합EU에 가입하였다. 폴란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이기도 하다.

폴란드는 1989년 체제 전환 후 적극적인 친서방 정책과 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추진하면서 유럽연합EU 내 입지를 제고시켰다. 공산권 붕괴 후 동유럽국가 가운데 가장 신속한 성장(90년대 연평균 6%의 경제성장률 기록, 유럽 내 최고치)을 달성, 시장 경제 및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에 성공하였으며, 1998년 이후 전반적인 세계 및 유럽경제 침체의 영향으로 2000초까지 경제 성장이 둔화되었으나(2001년 1%, 2002년 1.3%), 2003년부터 수출 및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입 급증으로 다시 6%대의 경제성장률을 회복하였다. 폴란드 경제는 2005년 이후에도 꾸준한 성장을 거듭, 2007년에는 저 인플레이션 가운데에도 6.7%에 달하는 고성장을 실현하는 등 2004년 유럽연합EU 가입 후 유럽연합 자금 및 활발한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입 등으로 건실한 성장세를 나타내고 있다. 2013년 기준 무역규모는 4,092억 달러(수출 2,030억 달러, 수입 2,062억 달러)이고, 국내총생산GDP(명목기준)는 5,139억 달러(세계 23위), 1인당 GDP는 13,333 달러(세계 54위)를 기록하고 있다.

폴란드의 성장은 수출의 급증, 산업 생산의 증가 그리고 투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1990년 초반 이래로 폴란드에 대한 해외 투자는 840억 달러를 넘어섰다. 중·동부 유럽에서 선두로서의 위치와 과거 유럽 연합 가입국들에 영향을 줄 해외투자지로서 폴란드의 경제는 향후 더욱 큰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폴란드에서 가장 큰 투자자들은 전자통신 부문(France Telecom)과 금융 중개, 은행들이다. 자동차 분야의 투자자들이 폴란드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항공 산업과 가정용품 분야에서도 투자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한국은 2000년 이후 폴란드에 투자를 늘려왔다. 한국과 폴란드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양국 모두 외침을 당했다가 다시 독립을 되찾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지정학적으로 폴란드의 경우는 러시아와 독일의 사이에, 한국의 경우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풍부한 천연자원과 상대적으로 싼 고급 노동력 그리고 빠른 성장과 좋은 전망을 보이고 있는 경제성장 지표를 고려해 볼 때, 한국과의 협력 관계에서 폴란드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유럽연합에 폴란드가 가입한 것은 향후 더 많은 한국의 폴란드 사업 유치와 투자를 이끌어 낼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 폴란드 간의 경제 협력에 대한 전망은 매우 밝은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은 전자와 기계분야뿐만이 아니라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을 폴란드에 수출하고 있다. 한국의 무역은 앞으로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폴란드를 투자 국가로 선택하려는 한국 기업들의 관심이 크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폴란드에 있어 관광 산업은 1990년대 들어 꾸준한 신장세를 거듭하여, 현재 주요 외화 획득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012년 외국인 관광객 수는 1,484만 명이며 연간 관광 총수입은 약 65억 달러 규모에 달한다. 주요 관광지는 크라쿠프, 아우슈비츠, 그단스크, 브로츠와프, 자코파네 등이며, 국가별 관광객 수는 독일이 최다인데 한국인 관광객은 2012년 약 4만 명을 기록하였다.

사회와 문화


경계의 문화 특성
폴란드의 문화는 유럽의 심장부라는 지리적 위치에서 비롯된 ‘경계의 문화’로 지칭되고 있다. 동유럽과 고전 라틴문화의 전통에서 비롯된 신비주의, 유대교의 하시디즘(Hasidism, 18세기 폴란드에서 시작된 유대교의 한 유파) 전통에서 비롯된 성화 숭상, 민속 문화에서 비롯된 바로크 신화를 가진 유럽 서쪽 문화가 만나는 지점이 그것이다. 중앙유럽과 동유럽의 교차 지점에 위치한 폴란드에서는 많은 예술가들이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문화적 전통의 독특한 조합이 이루어져 왔다.

폴란드 문화는 유럽 통합의 시작과 함께 새롭게 주목을 받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폴란드 예술은 통합된 유럽에 중요한 교훈이 될 만한 역사적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폴란드 문학과 예술의 중요한 특징은 20세기 후반 품위를 빼앗긴 시대에 정신적인 독립을 지키려 했던 ‘시민혁명’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폴란드 예술가들은 인간의 근본 가치들에 대해 언급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회적 역할과 예술의 필요성에 관한 논쟁을 피하지 않는다. 폴란드 예술은 뭔가 의미를 갖길 원하고 자유라는 주제로 끊임없이 귀착한다.

폴란드의 문학
폴란드 문학은 중세 이래 독자적이고 우수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다수의 노벨문학상을 배출한 역사를 갖고 있다. 966년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의 수 세기 동안은 로마 가톨릭교회 문화의 영향으로 라틴어에 의한 문학이 발달했다. 이 시기의 초기 문학은 12~13세기에 속하는 연대기年代記·성인전들이다. 폴란드어에 의한 문헌은 13세기경부터 출현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신을 낳은 자’라는 뜻의 종교가宗敎歌인 보구로지차Bogurodzica이다.

15세기에 들어 폴란드 문화의 최초의 개화기가 시작되었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대인 16세기 후반은 폴란드 문화의 황금 시대라 불리는데 이 시기에 폴란드어 문학의 첫 거장은 미코와이 레이Mikołaj Rej이고 최고의 시인으로는 코하노프스키Jan Kochanowski를 꼽을 수 있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폴란드 문학은 주제와 표현 양식에 있어 지방색을 띠게 되고 장르도 다양화되었으며, 역사적 서사시가 새로운 장르로서 애호되었다. 18세기 후반계몽주의 시대에는 크라시츠키Ignacy Krasicki가 대표적 시인이며, 외세에 의해 120여 년간 나라를 잃었을 시기에는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고무하기 위한 낭만주의 문학이 크게 유행하여 A.미츠키에비치, J.스워바츠키, Z.크라신스키, C.노르비드와 같은 독특한 시인이 출현하였으나 이들은 모두 프랑스로 망명했고 망명지에서 예술적 절정을 이루었다.

19세기 후반의 실증주의 문학가로는 B.프루스, E.오르제슈코바, H.시엔키에비치가 유명한데, 시엔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는 <쿠오 바디스Quo Vadis>를 써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무렵에 성행하였던 모더니즘의 대표적 작가로는 S.비스피안스키, S.제롬스키 등을 손꼽을 수 있으며, <농민Chlopi>으로 알려진 레이몬트Wladysilaw Stanisilaw Rey´mont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제1·2차 세계대전 기간 중의 대표적 작가로는 Z.나우코프스카, M.돔브로프스카, S.I·비트케비치, W.곰브로비치, B.슐츠, J.이와슈케비치 등의 소설가와 투빔, 스워남스키 등의 시인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J.안제에프스키, 루드니츠키, T.루제비치 등이 알려져 있다. 이후에도 폴란드 작가 중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사람이 많은데, 폴란드 태생으로 이스라엘로 건너간 슈무엘 아그논Shmuel Agnon은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간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Isaac Bashevis Singer는 1976년, 체스와프 미워시Czeslaw Milosz는 1980년, 여류시인이자 비평가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는 1996년에 수상하였다.

폴란드의 음악과 미술
폴란드의 음악은 초기에 중부 유럽 음악의 영향을 받아 여러 민요와 무도들이 예술적 감성으로 승화되었다. 17세기부터 폴란드의 민속무용은 유럽의 예술음악(폴로네즈·마주르카) 속에 자리를 잡았으며, 폴란드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J. 에르스네르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제자인 쇼팽Fryderyk Franciszek Chopin(1810~1849)은 폴란드를 대표하는 음악가로서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주의 시대를 통해서 중앙 유럽 이외의 나라에서 대 작곡가는 탄생되지 않았으나, 19세기 중엽에 들어와서 쇼팽은 헝가리의 리스트Franz Liszt, 독일의 슈만Robert Schumann 등과 함께 낭만주의의 새로운 세계에 꽃을 피웠다. 19세기 후반의 작곡가로는 노스코프스키Sigismund Noskowski, 젤렌스키Wladyslaw Zelenski가 특히 유명하며,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파데레프스키Ignacy J. Paderewski와 루빈스타인Arthur Rubinstein도 19∼20세기에 걸쳐 활약하였다.

20세기 전반의 가장 뛰어난 작곡가로는 시마노프스키Karol Szymanowski가 널리 알려져 있고, 작곡가 헨리크 고레키Henryk Goreck는 수차례에 걸친 심포니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폴란드의 미술은 12세기 이후 고딕 시대에 활기를 띠었고, 16세기에는 역사화·초상화가 등장하였다. 특히 초상화는 17, 18세기에 이르러 전형적인 회화양식이 되었다. 근대 회화는 고전주의·낭만주의를 거쳐 리얼리즘 시대를 맞이하였으며, 19∼20세기에는 세계의 모든 작풍作風이 도입되었다. 현대에는 코바르스키 등의 사실파 이외에도 스타지에프스키, 야레사 등의 새로운 경향도 볼 수 있다.
오늘날 폴란드는 연극, 영화, 음악 등 분야에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지방 소도시에도 다수의 문화시설을 설립, 일반시민들이 문화생활을 항유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놓고 있다. 폴란드에는 국립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유명한 교향악단이 있고, 연간 연극 및 음악 공연 규모는 약 5만회에 달하며, 쇼팽 국제피아노 콩쿠르, ‘바르샤바의 가을’ 국제 현대음악제, 베토벤 페스티벌, 모차르트 페스티벌, 바르샤바 국제영화제, 국제 거리 연극제 등 다양한 국제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폴란드의 과학
폴란드의 과학적 전통은 유서가 깊다. 폴란드의 과학은 특히 천문학에서 빛나는 업적이 이루어졌다. 폴란드 천문학자들 중 역사적인 획을 그은 인물은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1473~1543)이다. 오늘날 인구에 회자되는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의 주인공이다. 그는 기존의 지구 중심 우주론(천동설)과 달리 지구가 자전축을 중심으로 자전하고 정지해 있는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근대과학의 출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코페르니쿠스의 뒤를 이어 대형 망원경으로 달을 관찰한 얀 헤벨리우스Jan Heweliusz와 태양의 코로나(corona, 태양 둘레의 둥근 빛)로부터의 편광 방출을 발견한 아담 프라즈몹스키Adam Prazmowski, 최초로 명왕성의 궤도를 계산해 낸 타데우스 바나히에비츠Tadeusz Banachiewicz 등도 폴란드 과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현대 폴란드 천문학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태양계 밖에 있는 행성들을 최초로 발견한 알렉산데르 볼스찬Aleksander Wolszczan이다. 1922년 그는 처녀 별자리에 있는 펄서(pulsar, 전파 천체의 하나) PSR B1257+12 중성자 별을 선회하는 세 개의 행성을 발견했다.

폴란드 과학이 천문학에서만 빛난 것은 아니다. 폴란드의 가장 유명한 여성 과학자인 마리아 스크워돕스카 퀴리Maria Skłodowska-Curie는 1903년 방사능 연구로 첫 번째 노벨화학상을 받았고, 1911년에는 폴로늄과 라듐의 발견으로 두 번째 노벨화학상을 받는 위업을 이루었다. 그밖에 현대 열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노벨상 후보에 두 번 오른 보이체크 쉬비엥토스왑스키Wojciech Świętoslawski와 초원자로 알려진 기초 미립자, 중성자neutron와 양자proton들을 포함하여 중핵자hyperon를 함유한 특별한 원자핵을 발견한 예지 프니에프스키Jerzy Pniewski와 마리안 다니쉬Marian Danysz는 화학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폴란드가 배출한 뛰어난 과학자들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이룬 과학적 업적은 조국 폴란드뿐만 아니라 인류역사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한국과 폴란드의 관계


폴란드의 종교
폴란드는 전 인구의 95%가 가톨릭Catholic(러시아정교 1.5%, 개신교 1%) 신자로서 폴란드 가톨릭 교회는 평신도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부에 대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가톨릭의 국민에 대한 영향력은 지대하며, 과거 폴란드의 탈공산화를 위해 자유노조와 긴밀하게 협조하기도 했다. 폴란드 정부는 1972년 가톨릭 교회와의 장기간 대립관계를 청산하고 교회의 신규건설 허가 등 바티칸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 중이며 1993년 7월에는 교황청과 정교화약Concordat 협정을 체결하였다. 폴란드내 외교단장직을 교황청 대사가 맡고 있으며, 1990년 가을부터는 공립학교에서 자발적인 종교교육이 부활되었다.

한국과 폴란드 양국은 1989년 수교 이래 비교적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가 빠른 속도로 심화 발전 중에 있다. 양국은 견고한 경제통상관계를 기반으로 고위인사 교류에 의한 돈독한 정무관계 및 학술문화관계로 확장 발전을 꾀하고 있다. 폴란드는 자국의 경제개혁 과정에서 한국을 주요 경제·통상 협력 대상국으로 간주하여 한국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진출을 기대하고 있으며, 우리 기업의 진출도 활발히 진행 중에 있다. 우리나라의 대對폴란드 수출은 2010년 43.8억 달러 이후 계속 감소하였으며, 2013년에는 36억 달러로 전년 대비 -2.1%를 기록하였다. 최근 대對폴란드 수출 부진은 유럽 경제위기로 인한 폴란드 내 우리 투자기업의 생산 원자재 및 부자재 수입 감소에 기인한 바가 크다. 반면 우리나라의 대對폴란드 수입은 2009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23.9%를 기록한 이후 계속 증가세인데, 2012년에는 42.2%가 늘어난 5.3억 달러, 2013년에는 7.8억 달러로 44.9% 증가하여 최근 수년간 증가추세를 지속하고 있다. 주요 수입품목으로는 피스톤식 내연기관, 돼지고기, 차량부품, 철강재 등이며 특히 돼지고기와 자동차 부품의 수입이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폴란드는 우리나라의 전통적 무역수지 흑자 대상국으로서 2012년 기준 대對폴란드 무역수지는 31.5억 달러를 기록했으나, 2013년에는 대對폴란드 수입이 큰 폭으로 증가함에 따라 28.3억 달러로 흑자폭이 감소했다. 흑자 규모 기준으로 폴란드는 전체 교역대상국 중 15위, 유럽연합 국가 중에서는 2위에 해당한다. 지난 1991년부터 시작된 우리의 대對폴란드 투자는 1990년대 중반 대우자동차와 협력 업체들이 진출하면서 급격히 증가하였으나, 1990년대 후반 대우자동차의 파산과 철수 등의 요인으로 2000년 초반까지 대對폴란드 투자는 부진하였다. 그러다가 2004년 폴란드의 유럽연합EU 가입에 따른 여건 호전과 전자, 가전을 중심으로 우리 기업의 대형 투자 프로젝트가 재개되었다. 2013년 말 기준 우리나라의 대對폴란드 투자누적총액은 14.2억 달러이며, 투자누적총액 기준으로 유럽연합 국가 중 영국, 네덜란드, 독일, 아일랜드, 노르웨이에 이어 6위를 기록하는 등 우리나라의 대對유럽 투자 주요국으로 부상하였다. 한국 수출의 많은 부분은 현지 투자 기업의 생산활동을 위한 원부자재 또는 기계장비 반출이 차지하지만 현지 진출 한국 제조업체들이 현지 생산품을 서유럽 등지로 수출함으로써 폴란드 경제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화관계에 있어서도 한-폴 양측은 각종 공연과 문화 행사 교류를 하고 있으며, 2010년 1월 27일에는 중동부유럽 한국 소개의 거점인 한국문화원을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중심가에 개원하였다. 또한 지자체 간의 자매결연도 서울시와 바르샤바시(1996)를 필두로 경상남도와 포모르스키에주(1997), 충청남도와 비엘코폴스키에주(2002), 경상북도와 마조비에츠키에주(2009) 등으로 확대되었다.

폴란드는 북한과 1948년 외교 관계를 수립한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1989년 폴란드에 비공산계 연립정부가 출범하고 같은 해 11월 한국과 폴란드 사이에 수교가 이루어지자 1995년 4월 북한은 주駐폴란드 박상암 대사를 조기 소환하고 북한의 중립국 감독위원회(NNSC, Neutral Nations Supervisory Commission) 폴란드 대표단을 강제 추방했다. 이에 폴란드도 주駐북한 대사를 소환하고 외교 관계를 대리대사급으로 격하시켜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1995년 11월 폴란드 좌파 정권 집권을 계기로 양측은 다시 관계 정상화를 모색하였지만 양측 정부 차원의 실질적인 주요 인사 교류는 저조한 상황을 보이고 있다. 양측 간의 교역규모는 2008년도 9,497만 달러를 기록한 이후 감소 추세로 돌아서 2010년 1,773만 달러, 2011년 1,144만 달러, 2012년 676만 달러(대북 수출 20만 달러, 수입 650만 달러)를 기록중이다.



폴란드 망명정부
폴란드 망명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망명한 정부를 가리킨다. 1939년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두었다가 1940년의 프랑스 공방전으로 파리를 떠나 영국 런던으로 옮겼다. 국내 게릴라 활동단체로는 망명정부 지휘하의 국내군과 폴란드 노동자당이 편성한 인민군 등이 있었다. 망국의 폴란드인들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놓여 있었다. 첫 번째는 동맹국인 영국이나 프랑스로 망명해서 독일과 싸우는 방법, 두 번째는 조국에 남아 지하활동을 벌여 독일과 싸우는 방법, 세 번째는 앞의 두 방법과는 달리 3~4년 후에야 이루어지는데 독일과 싸우게 되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독일과 싸우는 길이었다.

폴란드 공화국이 독일과 소련에게 유린당할 때 파리에 체류 중이던 상원의장 라츠키에비츠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세워진 정부가 임시 정부(provisional government)가 아닌 망명 정부(government in exile)였던 것은 제2공화국의 법통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1935년 헌법 개정에 따라서 폴란드 망명 정부는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개정 헌법에는 전쟁 중에는 대통령직의 임기가 전쟁 종료 3개월 후까지 연장되고, 그런 상황에서 공화국 대통령은 전쟁 종료 전에 대통령직이 궐위될 경우에 대비해 후계자를 지명하며, 지명된 후계자가 승계할 경우 그 임기는 전쟁 종료 후 3개월까지로 한정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 헌법 덕분에 4년 뒤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파리로 피난하여 바르샤바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정부를 세울 수 있었다.

폴란드 대통령 라츠키에비츠가 파리에 망명해 있던 58세의 전직 총사령관 라디슬라스 시콜스키Ladislas Sikolski 장군에게 망명정부를 결성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시콜스키는 1921년에 폴란드군 참모총장, 1922년에 수상 겸 군사장관을 역임했다. 1924~1925년에는 국방장관을 맡았으며 피우수트스키 반대파의 수장이 되었다. 1925년에 피우수트스키의 쿠데타로 인해 감금되었던 시콜스키는 1928년에 풀려나 다음해 대장으로 퇴역하고 프랑스로 망명해 있었다.

1939년 9월 30일, 파리에서 시콜스키와 소슨코프스키 장군, 농민당의 미콜와이치크 등이 중심이 되어 폴란드 망명정부가 결성되었다. 망명지에서 조국의 정부와 군을 맡은 시콜스키는 탁월한 능력으로 폴란드의 지도자로 자리를 굳혔다. 그는 망명정부의 수상과 군 사령관을 겸임하였다. 피우수트스키의 부하였던 마리안 쿠겔은 국방장관을 맡았다. 폴란드 정부의 법적인 계승자였으므로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주요 서방국가들은 이 정부를 승인했다. 영토는 없었지만 이 정부에 10만 명이 넘는 폴란드인들이 합류하여 ‘폴란드군’을 구성하게 되었다.

폴란드 망명군의 첫 부대는 제1산악여단이었다. 1940년 봄까지 4개 보병사단과 1개 기계화여단이 편성되어 훈련에 들어갔다. 공군 조종사들은 리용에서 프랑스 전투기를 타고 적응훈련에 들어갔다. 시콜스키 사령관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본국에 지하정부와 지하군을 조직했다. 비록 외국에게 점령당했다지만 폴란드라는 국가와 국민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폴란드 지하군은 게릴라전으로 독일군의 후방을 괴롭혔다. 조국에 남아 싸우기로 한 사람들은 ‘낫과 망치’, ‘해방투쟁연맹’, ‘인민 폴란드’ 등 지하 저항조직들을 결성하였다. 일부는 카르파티아 산맥이나 숲으로 숨어들어가 게릴라가 되었다. 상당수는 바르샤바나 크라쿠프 같은 대도시의 도시 게릴라가 되어 독일군의 식당, 카페, 극장을 습격하기도 했다. 폴란드 망명정부는 곳곳에서 활약을 하였으나 그 ‘정체’는 문자 그대로 ‘망명정부’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인에게 폴란드 망명정부는 중국대륙 상해와 중경을 떠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편리할 것이다. 그렇게 폴란드와 한국은 공통점이 있었다.

한국이 극악을 향해 줄달음치던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신음하던 암울한 1930년대, 모더니스트 김광균金光均 시인의 시 <추일서정秋日抒情〉 첫 머리에는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당시 폴란드 망명정부에서 발행하는 지폐의 가치가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망국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한 시인의 눈에는 가을날, 망국의 거리에 흩날리는 한 잎 낙엽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슬프게 보였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