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06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

    [STB하이라이트]

    〈STB콜로키움〉광개토태왕 비문을 통해 본 우리 고대의 역사

    1강 광개토태왕 비문의 발견과 한국의 근현대사



    최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국의 역사학 현황, 동북공정이라든가 고구려, 대진국, 발해사까지 편입하려는 시도에 대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 『도전』에도“ 조선국 상계신 중계신 하계신이 무의무탁하니 불가불 문자계어인이니라”(5:347:16)라고 역사의 혼을 망각한 동방 한민족에게 상제님께서 상당히 준엄한 경책의 말씀을 해주고 계십니다.

    물론 편협한 국수주의도 큰 문제지만 역사의 혼을 잃어버리는 일은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자리는 상당히 의미있고 뜻깊은 자리라고 생각됩니다. 류승국 교수님을 모시고「 광개토태왕 비문을 통해서 본 한국 고대사상의 원형 탐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듣겠습니다. -STB


    고대 기록의 문제


    광개토대왕1) 비문은 전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한국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어요. 중국 사람도 놀라고 일본 사람도 놀라고 또 프랑스의 학자들도 와서 모두 놀라고, 전세계가 놀라는 대(大)문자예요. 1600년 전의 기록이거든요. 그런 기록은 없어요. 책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말할 때 반만년 역사라 하는데, 그 기록이 어디 있냐하면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 이런 것을 말합니다. 그 연대가 얼마나 올라가는 거냐. 세종실록2)은 불과 500년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고 삼국유사3)를 말하면 13세기 이상 올라가지 못하거든요.

    반만년인데 1300년전 가지고 얼마만큼 신빙성이 있냐.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부정하거든요. 당시의 기록이 아닌데 후대 기록 갖고 어떻게 논쟁을 하느냐. 또 김부식의 삼국사기4)라고 하는데 13세기에서 12세기 올라갈까, 대략 1200년 갖고 4천년전 얘기를 하려니까 어렵지 않느냐, 이런 것이죠.

    물론 남아 있는 기록으로 종이 위에 쓴 개인의 문집, 원효문집이라든가 최치원 문집이 있어요. 그것은 신라통일기로 올라간다든지 신라말이나 고려초로 올라가지만 역사 기록이 아니라서 직접 논술한 게 못 되거든요.

    고전의 가치란 어떤 것인가


    그럼 중국의 기록으로 보면 어떻게 되나. 꽤 올라가죠. 중국에서도 우리역사하고 거의 같은 반만년 역사라고 하는데, 실제 기록으로 보면 사마천의 사기5)라는 책이 있어요. 사기, 한서, 후한서, 위지동이전, 진서, 수서, 당서, 해서, 25사6)가 쭉 있어요.

    왕조가 바뀌어지면 다음 세대에서 전(前) 세대 역사를 써요. 왕조가 여러번 바뀌었거든요. 고대에서부터 춘추전국시대, 그 이전 하, 은, 주, 그리고 진시황의 통일기, 그리고 한나라(전한, 후한), 위진남북조, 수나라, 당나라. 그런 다음에 5호16국, 송나라(북송, 남송), 그 다음에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중화민국의 현대화. 반만년 역사라고 하더라도 왕조가 여러 번 바뀌었는데 바뀔 적마다 역사를 쓰죠. 원래 통치하면서 자기가 역사를 쓴 것은 인정 안해요. 자기 역사를 자기가 평가 못해요. 자기는 역사적인 사실만 기록해놓는 거예요.7)

    그러니까 중국의 역사가 반만년으로 올라가지 못해요. 기원전 2세기까지는 올라갑니다. 그것도 많이 올라가는 거죠. 그런데 그조차 오래된 옛날 것을 그때 기록했다면 자료는 되겠지만 신빙성에 문제가 돼요. 어쨌든 중국에서는 기원전 2세기, 1세기, 기원 초기에 쓴 것이 있어요. 다시 말하면 사기, 한서8)라는 중국 책 속에 「조선전」이라는 게 있거든요. 조선에 관한 걸 썼어요.

    한서 지리지나 위지 동이전을 썼는데 예맥, 삼한, 마한, 변한, 진한, 고구려, 신라, 백제를 써놨어요. 굉장히 귀한 거죠. 그러나 우리 한국역사를 타민족이 썼으니 일차자료라고는 볼 수 없어요. 참고는 하지만 우리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당시 기록이 있다면 좋은데 없으니까 뭐 한 5백년 전으로 올라가면 그건 무가지보예요. 1593년 임진왜란 이전 기록이라도 있다면 그게 귀본인데, 1천년 전이나 옛날 것이라면 굉장하죠. 책 한권 가치가 굉장히 비쌉니다. 고전이란 그런 겁니다.

    가장 오래된 한국의 역사기록, 비문


    한반도에서 역사기록으로 제일 오래된 것은 종이 위에 쓴 게 아니라 돌에다 쓴 비문입니다. 돌에다 썼기 때문에 썩지를 않죠. 가령 종이는 아무리 잘 보존했다 해도 한 500년 이상 가기 어려워요.

    원래 우리는 조선반도에만 살지 않았어요. 고대의 산동반도, 발해지역, 요동반도, 남만주, 서북조선, 거기가 우리 고조선의 거주지9)예요. 우리 조상들이 거기 살았다고요. 한반도로 내려온 건 훨씬 후기예요.

    그 옛날 거주지에서 나오는 유물과 유적, 지하에서 나오는 출토물은 문화가 전부 우리꺼예요. 그렇게 되면 고구려의 땅, 부여의 땅, 옛날 만주지역이 지금 전부 다 중국지역이라고요. 그러니까 한반도에만 있는 비문, 석문으로 오래된 게 뭐냐면 신라 때 진흥왕순수비10)입니다. 신라의 국경을 순수하고 순행한 국경지대에다 기념비를 세웠어요. 이것이 오래됐어요. 진흥왕이라는 왕이 신라를 벌떡 일으킨 분인데 삼국통일 이전의 왕이죠.

    AD로 말하면 552년이예요. 지금 2004년이니까 1500년 가깝지 않습니까. 1400년 전의 글씨를 직접 본다는 것은 굉장히 귀한 무가지보예요. 그런데 이것이 네 개나 있어요. 경상남도 창녕비는 자연석이예요. 큰 바위에다가 새겼어요. 뚜렷하게 보입니다. 또 하나는 서울 북한산 진흥왕비. 금석학을 한 김정희가 조사해서 이조시대 무학의 비가 아니라 진흥왕순수비라는 걸 발견했죠. 거기 쓴 문구(文句), 고유명사, 관직, 지역, 지명, 이런 것을 따져본 거죠. 그리고 함경북도 마운령비, 황초령비가 있어요. 거기까지 신라의 경계였어요. 네 개가 있어 사산비문이라 하고 석문으로서는 오래된 것인데, 이거보다 더 오래된 것이 있다면 뭔가? 그게 바로 광개토대왕비입니다.

    광개토대왕비가 가장 오래되었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廣開土境平安好太王)11), 호태왕비라고도 하는데 원 이름은 이렇게 길어요. <널리 국토의 경계를 넓힌 평안한 좋은 태왕의 비>라는 뜻이죠.

    저 비석의 글자 하나가 커요. 이렇게 큰 글자는 없거든요. 금속에는 조그맣잖아요. 이렇게 큰 게 무려 1800자입니다. 비문이라면 그저 200자 미만입니다. 이렇게 큰 자로 뚜렷하게, 고구려 중창의 역사뿐 아니라 중국과의 관계, 일본과의 관계, 숙신과의 관계, 백제 신라의 관계 등 국제관계가 다 여기 들어 있어요. 그리고 철학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 가지 기본적인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내용입니다.

    어떤 철학가도, 경제학자도, 언어학자도, 글씨를 쓰는 사람이라면 이 광개토대왕비가 최고예요. 우리나라에 추사가 글씨 잘 쓴다고 해도 여기는 못 따라와요. 중국사람도 못 따라와요. 깜짝 놀래요. 크기도 그렇지, 내용도 그렇지, 글씨도 좋지. 그리고 웅장해서 전세계를 놀라게 해버렸거든요. 중국도 일본도 꼼짝 못해요. 이렇게 웅장한 비가 서 있는데. 여기 일본에 관한 기록이 있으니까 일본이 본국으로 가져가려고 했어요. 그것도 자기들이 유리하게 해석해 가지고 <고대의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증거가 광개토대왕비에 있다> 이렇게 선전했죠. 그런데 워낙 크고 무거우니까 가져갈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지금 어디 있냐 하면 압록강 건너 만포진 건너편, 집안현 통구라는 옛날 국내성(고구려의 서울)근처에 있어요. 거기에 광개토대왕릉이 있고 떨어져서 이 비가 커다랗게 서 있어요. 이렇게 귀한 것을 갖고 있는데, 우리 역사교육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습니다.

    남북조시대의 기념비, 광개토태왕비문


    고구려가 망한 후에 고구려 후손들이 다시 나라를 세운 것이 발해(渤海)죠. 발해 역사가 300년 가까이 되거든요. 그러면 고구려 700년에 발해 300년 더하면 근 1천년입니다. 발해 남쪽에는 신라가 있었고 나중에 통일했죠. 통일신라가 200여년 정도되니까 신라도 한 900년 됩니다. 이렇게 우리 한민족 북쪽에는 고구려, 발해가 있고 남쪽에는 신라, 백제가 있었어요. 그러면 남북조시대라 이렇게 불러야 되는데, 지금 신라통일기12)라고 가르치고 있거든요. 잘못된 겁니다. 수정해야 돼요.

    그리고 발해문화라는 게 굉장히 좋습니다. 거기도 왕들이 전부 연호가 있어요. 독립국가가 아니면 연호라는 게 없죠. 조선조 500년 동안 28대 왕이 있었는데 연호가 없잖아요. 일본에는 뭐 소화, 대정, 명치, 평성, 이런 것이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발해에는 다 있거든요. 독립국가였지 예속국가가 아니죠. 최근 동북공정이니 뭐니하는 건 엉터리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저건 나중에 역사적인 치욕을 받을 겁니다. 그런 억설로 되는게 아니거든요.

    남북조시대에 우리 민족에게 가장 뚜렷하고 최상의 것으로 중국에서도 인정하는 것이 바로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예요. 414년에 선 고비(古碑)입니다. 한두 글자도 아니라 판독할 수 있는 것만 무려 1700여자예요. 일본인들이 불리한 부분은 많이 깼어요. 그렇게 위대한 비가, 고구려가 망하고 발해가 망한 후에 땅속에 묻혔어요. 그 후에 재발견된 것이 강화도 병자수호조약을 한 1876년입니다.

    일본이 최초 발견한 배경_서세동점기 한반도 현실


    한국역사가 굉장히 기구합니다. 구한말에 18세기 전부터 서세동점이라고, 서양의 세력이 동쪽으로 오죠. 서양사람들이 프랑스혁명, 산업혁명 후에 점점 세력을 갖고 세계적으로 식민지 개척에 나섭니다. 중동지방, 아프리카 지역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남쪽으로 들어와요. 동남아시아라는 건 전부 서양 세력권에 들어가요. 인도는 400년 동안 영국 식민지가 되었잖아요? 월남도 프랑스령 지배를 받고. 그리고 중국으로 올라와요.

    중국은 말이죠. 천하의 중심국이고 다른 민족은 다 야만이라고 해서 큰 소리를 하지만 서양 세력을 당해낼 수가 없단 말이죠. 서양사람들은 벌써 과학적으로 군함을 가졌지, 대포를 가졌지, 그리고 여러 가지 자본도 많이 축적돼 있죠. 힘이 있다 말입니다. 중국에 와서 뭘 하냐면 아편을 파는 겁니다. 동남아에다 아편을 심어서 중국에 갖다 팔아먹어요. 그럼 중국사람들이 이걸 사다가 늙은이고 젊은이고 다 그걸 피우면 정신이 썩어버려요. 그러면 나라를 점령하는데 문제가 없죠. 애국심이고 자주성이고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강경정책으로 차단을 합니다. 그러니까 영국사람들이 대포를 끌어다 놓고 전쟁을 일으켰어요. 이 아편전쟁에서 1842년 중국이 항복했어요. 남경조약을 맺죠. 어떡합니까. 홍콩 내놔라, 마카오 내놔라, 샹하이 내놔라, 서반아고 불란서고 영국이고 전체가 들어와서 안 줄 수도 없고 중국이 절단 났다 말입니다. 이것이 식민지 쟁탈이죠.

    중국만 그런 게 아니라 또 한국으로 들어오거든요? 러시아 군대는 내려오고, 중국은 지배하려 하고, 미국은 밑으로 오고…. 영국이 오고 독일도 오고. 한반도의 구한말이라고 하는 것은, 서양사람들의 사냥꾼 놀이터와 같아요. 우린 국방력도 없고 경제력도 없고 다 없어요. 그런데 한반도를 뺏어먹으려고 서로 싸우는 거에요. 세계전쟁13)이라는 게 여기서 다난 것입니다. 1차 대전의 근원이 되고. 이렇게 세계전쟁의 단서가 한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한국은 제쳐놓고 저희들끼리 싸우는 거예요. 일본과 중국이 먼저 싸워요. 청일전쟁. 중국이 졌죠. 또 러시아하고 일본하고 싸움이 나는데 러시아가 지죠. 그러니까 일본이 <더 이상 아무도 손대지 마라> 하고 운양호라는 함대가 한반도로 오죠. 이때 미국의 샤만호가 옵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하게 외교하자고 왔어요. 또 서학을 가지고 오죠. 서학이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서양의 과학입니다. 천문, 지리, 측량, 역사, 수학, 다 가지고 와요. 그건 좋거든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종교가 들어와요. 천주교.

    처음에는 실학파14)들이 좋아했어요. 그런데 자꾸 들어가보니까 종교가 있거든요. 종교인데 가치관이라는 게 전혀 우리하고 다르다 말입니다. 우리 종래의 믿던 신앙하고. 가령 관혼상제에 대해 조상숭배라는 건 우상숭배다, 장사 지낼 때 제청을 놓는 건 우상이다, 이런 식이에요. 신주를 갖다가 불을 놓고 말이죠. 우리 전통적 가치에 대해 도전을 해오니까, 처음에는 환영하다가 나중에 배척했어요. 중국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죠. 그때 여기서 척사(斥邪)라는 말을 썼어요, 간사한 걸 배척한다. 그리고 정당한 우리 정통을 호위한다. 해서 척사위정15)이라고 그래요. 우리것을 잘 보호하고 간사한 외국의 사교(邪敎)를 배척한다.

    그리고 나니까 천주교에서는 이건 박해다, 종교에 대한 박해다, 해서 천주교 박해사라고 썼습니다. 그럼 척사위정이 옳으냐, 박해사가 옳으냐. 아직 해결 안 됐어요. 종교간의 대립은 지금도 싸우잖아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이건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과제예요. 처음엔 척사라는 말을 썼지만 나중엔 척양, 척왜다 했어요. 왜냐하면 서양 세력이 군함, 대포를 끌고와서 공격을 하니까 서양사람 배척한다, 일본 군국주의를 배척한다, 했는데 그래도 오거든요. 대원군이 1787년에 쇄국(鎖國)을 했죠. 못 들어온다, 관계 안한다, 문을 막았거든요. 그리고 전국 거리마다 척화비16)를 세웠어요. 절대로 서양이나 일본사람하고는 화해할 수 없다, 배척한다.

    헌데 대포를 가지고 와서 막 쏘아대고 하니까 문을 안 열 수가 없죠. 1875년 일본의 운양호 사건으로 한국이 굴복했어요. 그때 병자 강화도 조약을 맺는데 이게 수호조약17)이에요. 불평등조약입니다. 이 해에 척화비를 다 철거했어요.

    조약이나 계약이란 평등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인정돼요. 불평등계약이라는 건 원래 무효예요. 그건 현재도 마찬가지죠. 병자수호조약을 보면 우리에게 불리한 것만 썼어요. 일본사람은 부산만 올 수 있는 게 아니라 어디든지 군함이 정박할 수 있다. 또는 일본사람에게 잘못된 사건이 생기면 일본재판소에서 하지 한국재판소에서는 못한다. 쭉 조항이 있는데 전부 불리한 조건만 해서 조약한 거예요. 그러나 일본사람들한테 꼼짝 못하죠. 그렇게 되는 때니까 말이죠. (중략) 이러한 소용돌이가 바로 한국근현대사라고요.

    일본의 광개토대왕비 연구 5년


    그러니까 1876년인가 병자수호조약 후에, 일본의 공군대위인가 사까와라는 사람이 일행을 데리고 만주를 시찰했어요. 정보를 수집해 그쪽으로 세력을 뻗치려고 하는 거죠. 그때 만주를 돌아다니다가 집안현에 가요. 소문을 들어보니까 <옛날 고비가 여기 있다.> 그래 쫓아가보니 흙속에서 일부는 겉이 드러나 보이는데 딱 보니까 이게 고구려 광개토왕비였죠.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니 일본에 유리한 얘기가 있거든요. <일본사람들이 백제와 신라를 공격해서 신민을 삼아가지고 지배했다.> 기록이 그런게 나온단 말이죠. <야, 이거 참 좋다. 아, 옛날에 1500, 1600년 전부터 지배한 사실이 여기 있구만. 야, 이거 됐다.> 그래가지고 몰래 사람을 사서 탁본18)을 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모를 때 일본이 그걸 가지고 가서 한 5년 연구를 했어요. 해서 회여록19)이라는 책에 그걸 발표했어요. <일본 사람이 한국을 점령한 사실이 광개토 큰 대(大)문자 속에 있더라.>

    한중일 삼국의 논쟁, 120년


    아, 이걸 한국사람들이 들어보니 보통 문제가 아니거든요. <아, 이게 어떻게 된건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연구하게 되었단 말이에요. 최남선, 독립운동하던 신채호, 정인보, 유명한 사람이 다 그 책을 봤어요. <역사적으로 일본사람이 한국을 지배한 일이 없는데 어째서 그 비에 그렇게 써 있냐.> 역사적으로 일본사람이 한국에 식민지를 두고 지배한 일이 없거든요. 가만히 보니까 비를 잘못 해석했다 말입니다. 자기들에게 유리한 해석을 내놓은 거죠. <아, 이건 해석이 틀렸다.> 그래가지고 정인보씨가 1930년에 한문으로도 쓰고 한글 겸해서도 썼고, 1955년에는 순한문으로 백낙송 선생 회갑기념논문집에 썼어요. 한글로 쓴 거로 1930년에 연희전문학교『 조선문학』20)이라는 논문집에 쓴 반박논문이 유명해요.

    한국사람들이 쓴 글이 정인보씨 설을 넘어가지는 못해요. 정인보씨 설안에서 약간 차이가 있는 거지. 그런데 이걸 반박한 사람이 누구냐? 중국학자예요. 중국사람은 일본사람의 설도 거론하고 한국의 정인보 선생설도 반박하는 거예요. <제3자가 그렇게 타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어법과 논법이 아니다>며 전부 들어서 설명했어요. 중국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정인보설을 부정해요. 권위있는 최고 권위로 생각했는데 그걸 부정하거든요. 일본사람이 주창한 걸 반박한 이론인데 그걸 부정하니까 어떻게 돼요? 그럼 중국사람이 말하는 걸 다시 이론으로 전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이때부터 내려온 게 120여년 됐잖아요. 그 싸움이 말이죠. 중국의 한문 대가들, 일본의 최고 학자들 해서 광개토대왕비에 대해 쓴 것이 여기 지금 쭉~ 목록이 나왔는데 이렇게 많아요. 한국에도 최남선 이하 최고 학자만 쓰는 거예요. 결론이 안 나요. 특히 중국사람이 공격한 걸 설파해낼 수 있는 이론이 안 나왔어요.

    광개토대왕비문을 통해서 본 한국고대사상의 원형탐구


    저는 한국철학을 하는 사람인데, 광개토대왕비에 철학사상이 많은데 연구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네 안했네, 정치군사적 얘기만 하지 여기에 들어 있는 기막힌 철학에 대해 누구도 전혀 접근을 안한단 말예요. 한국철학사를 정리하는데 광개토대왕비만한 좋은 자료가 없고, 이런 대(大)문자가 없고, 금석에 써 있으니까 이런 확실한 게 없는데, <이걸 해야겠다>고 보니까 중국사람 주장, 일본사람 주장, 한국사람 주장, 내가 전체를 쭉 놓고 보니 알겠더라구요.

    그러면 여기서 기본적인 문제가 뭐냐. 무엇이 문제가 되느냐. 제가 쓴 제목이 말이죠.「 광개토대왕비문을 통해서 본 한국고대사상의 원형탐구」
    - 광개토대왕 비문 자체만 연구한 게 아니라 비문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한국고대사상의 원형(元型=Archetype, 현상을 발생시키는 근본유형)이 뭐냐? 한국사상이라고 하는, 중국사상이나 일본사상이나 서양사상과 다른 특징이 있다면 그것이 뭐냐? 그걸 탐구하겠다는 얘기입니다. 한국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과 가치관, 사유방식의 특징이 뭐냐 하는 것이죠.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포인트가 있어요. 이 고비(古碑)를 둘러싼 싸움에 대한 견해와 또 하나는 이것을 통해 본 한국고대사상의 특징이 뭐냐하는 것.

    글씨를 놓고 보면 중국사람 글씨, 일본사람 글씨, 한국사람 글씨가 다 달라요. 옛날에 쓴 것 다르고 지금도 다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상도 중국적 사유, 일본적 사유, 한국인의 사유를 가를 수 있다고요. 고대에도 그렇고, 중세에도 그렇고, 현대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렇고, 한국사람의 사고다 하는 유사성이 있다고요. 그러니까 우리 한국적 사유의 원형을 <광개토대왕비라는 1600년 전에 기록한 걸 가지고 고대도 보고 현대도 보고 미래도 조망하겠다.> 그 소리입니다. 쉬운 얘기가 아니죠. 굉장히 의미있고 중요한 얘기죠.

    [마무리글]
    지금 우리한테 남북문제도 있고 세계문제도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가는게 옳은 거냐. 타당한 거냐. 그 향방이 어디로 가야만 정당한가. 이것을 시사하려는 거예요. 먼저 비문에 대한 지금까지의 오류, 잘못된 것, 어떻게 읽는것이 정당한 판독이냐 하는 문제를 얘기하고, 그 다음에 우리나라 고대사상의 기본문제를 얘기하겠습니다.



    1)광개토대왕비: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의 비석 호태왕비라고도 하며 광개토대왕의 위업을 기리고자 건립.
    2)세종실록: 조선 세종(재위 1418∼50) 재위기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책
    3)삼국유사: 고려 충렬왕 때 보각국사 일연(一然: 1206∼89)이 신라, 고구려, 백제 3국의 유사(遺事)를 모아서 지은 역사서
    4)삼국사기: 1145년(인종23) 경에 김부식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를 담은 역사서
    5)사기(史記): 사마천이 오제(五帝) 시대부터 한나라 무제 시기의 중국과 그 주변 민족의 역사를 포괄하여 저술한 역사서
    6)25사: 중국 역대 왕조(王朝)의 정사(正史)로 인정되는 24종류의 사서(史書)
    7)역사는 통치자가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서 평가되는 것이다.
    8)한서지리지: 후한의 반고가 편찬한 전한 왕조 1대 역사를 기록한 한서 중의 한 편
    9)고대 한민족의 활동영역은 한반도 이북지방인 산동성, 만주, 요동지방
    10)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신라 진흥왕이 국토확장과 국위선양을 목적으로 세운 기념비. 552년에 세웠으니까 1510년 전에 가까우며 창녕비 북한산비 마운령비 황초령비 등 4개가 있다.
    11)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널리 국토의 경계를 넓히고 백성을 편안케 하신 호태왕의 비라는 의미로 아들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비석으로 높이 6.3미터, 무게 37톤, 한문 1800자로 이루어져 있다. 고구려 역사 뿐만 아니라 당시 국제관계와 철학 등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담겨있다.
    12)통일신라시대는 남쪽은 통일신라, 북쪽은 발해가 지배하는 남북조시대로 표기해야 한다.
    13)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근원, 세계열강들의 싸움터가 된 한반도
    14)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국력배양을 주장하는 실학파 대두. 서양 학문과 함께 들어온 종교로 인해 동서양의 가치관 대립을 야기
    15)척사위정: 조선후기 외국의 세력 및 문물이 침투하자 이를 배척하고 우리 전통을 지킬 것을 주장하며 일어난 사회적 운동
    16)척화비: 조선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양인(洋人)을 배척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웠던 비석
    17)병자수호조약: 조선 고종13(1876)년에 일본과 맺은 수호조약으로 강화도조약이라고도 한다. 외국과 맺은 최초의 수호조약으로 불평등조약이었다.
    18)광개토대왕비를 발견한 사카와는 왜(일본)가 1600년전 백제와 신라를 공격해 신민(臣民)을 삼았다고 왜곡하기 위해 비문의 탁본을 일본으로 가져가 연구
    19)『회여록會余錄』: 1889년 육군 참모본부 소속 편찬과에서『 회여록』 5집 에 광개토 왕릉비문 내용을 날조하여 게재함으로써 일반에게 알려짐. 최남선, 신채호, 정인보 등 한국 학자들이 광개토대왕비문 해석에 오류를 발견.
    20)일본의 광개토대왕릉비 왜곡에 대해 정인보선생이『 조선문학』 논문집을 통해 반박했다. 그후 광개토대왕 비문 해석에 대한 한중일 삼국 학자들의 논쟁은 120여년 동안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대한 논쟁은 정치군사적 측면에서만 이뤄지고 철학적인 내용 연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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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06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