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산문화는 동이배달문화

[특집]
9천년 한민족사의 위대한 증언
안경전 종도사님의 『환단고기桓檀古記』 이야기 〈5〉

“홍산문화 발굴로 한국사와 세계사는 결국 다시 쓰이게 될 겁니다”


“당장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사실史實은
홍산인이 곰을 귀하게 여기고 받드는 곰(熊) 토템족이란 것입니다.
홍산 유적지에서는 특히 옥기 장식물이나 가면 등에 곰의 형상이
투영된 유물들이 대거 나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일대가 한민족의 원류인 신석기시대 배달국의 터전이었다, 동시에 곰 토템을 생활화하던 웅족熊族의 생활터였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홍산문화는 곧 동이배달문화였고 그것이
청동기시대 단군조선의 생활문화로 죽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추정은 ‘곰 토템의 웅족이 환국의 후손인 환웅족에 의해 문명화됐다’는 『환단고기』의 『삼성기』기록과도 일치합니다.
홍산문화의 주인공은 하늘과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중시하고,
동방의 전통인 3수 사상을 반영한 제단을 쌓았습니다.
단군조선 때 장례법과 동일한 형태인 석묘계石墓系의 묘장법墓葬法도
홍산인들이 동이족임을 드러내 줍니다.”


홍산문화는 고조선 유적


◎ 홍산문화라는 단어가 아주 낯섭니다.
▶홍산紅山은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의 동북방에 위치한 산 이름입니다. 토양에 철 성분이 많아 멀리서 보면 산이 붉게 보이거든요. 홍산문화라는 이름도 거기서 나왔습니다. 이전까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아주 오래된 문명의 자취를 보여주는 유적, 유물들이 이곳 홍산에서 대거 발견, 발굴됐습니다.

1908년 처음 홍산 일대 유적과 유물을 발견한 이는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입니다. 이어 1919년 프랑스 고고학자 에밀 리쌍E. Licent도 이 일대에서 신석기시대 유적 여러 곳을 찾아냈습니다. 1935년 일본인들이 동아시아 고적조사단을 만들어 홍산 일대를 본격 발굴하면서 여기서 출토된 것들을 통틀어 ‘홍산후紅山後 유적’이라 명명했습니다.

중국 역사학계가 이곳을 조사한 것은 한참 뒤인 1980년대입니다. 이때 중국학자들에 의해 홍산문화 유적이 발견된 곳은 중국 내몽골자치구 동남부, 요령성 서부와 하북성 북부, 길림성 서부 등인데 계속되는 발굴을 통해 그 범위가 넓어지고 있습니다.

홍산문화가 세계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은 1983년 요령성 건평현建平縣 우하량牛河樑 유적지가 발견된 이후입니다. 여기서는 신전과 제단, 돌무덤 등이 한꺼번에 발굴됐습니다. 또 홍산인의 신앙생활을 보여주는 여신상, 곰과 새의 소조상塑造像을 비롯, 다양한 옥기들이 나왔습니다. 우하량 유적은 중국 고고학에서 가장 중대한 발견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 새로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적지다, 그렇게 말하면 되겠네요.
▶신석기 유적들만 나온 게 아닙니다. 적봉시에서도 하가점夏家店이라는 마을에서 청동기 유물들이 나왔습니다. 특히 단군조선의 지표指標 유물이라 할 수 있는 비파형琵琶形 동검銅劍[그림]도 발견됐습니다. 홍산문화가 고조선과 연관됐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죠. 이곳에서는 상층과 하층, 2개로 구분돼 유물들이 발견됐는데 하층下層 유물의 연도는 기원전 2000∼1500년으로 추산됩니다. 상층으로 올라올수록 더욱 발전된 청동기 문화의 자취들이 등장합니다.



지난 20세기 초 이래 한민족의 고토인 요서(요하의 서쪽) 지역에서 BCE 7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신석기 문화와 청동기 문화(도표의 ①~⑧)가 발굴되고 있다. 요서 일대의 이 고대 문명은 내몽골자치구 적봉시의‘붉은 산’인 홍산紅山에서 이름을 따서 넓은 의미의 홍산문화로 불린다. 좁은 의미의 홍산문화는 요령성의 건평현과 능원현 경계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는 신석기 말기 문명을 가리킨다.

BCE 3500년을 기점으로 만리장성 밖의 홍산문화와 북방 초원문화가 황하 중류 만곡부인 오르도스 지역과 태항산 사이의 노선을 따라 중원으로 전파되었다. 이 문화 전수 경로를 중국 학자 쑤빙치蘇秉琦가 ‘Y 벨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Y벨트를 따라 동방 신교의 제천문화와 삼족오, 용봉, 칠성과 같은 천자문화의 상징이 중원에 흘러들어 갔으며, 이것은 중국을 대표하는 신석기 문화인 앙소문화 발전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한마디로 홍산문화는 황하문명의 원류인 것이다.


천원지방 사상과 곰토템의 옥기들


◎ 홍산문화의 유적, 유물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홍산문화는 ([도표]에서 보는 것처럼) 소하서 문화에서 하가점의 하층문화까지 포괄합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적석총積石塚, 제천단祭天壇, 여신묘女神廟와 다양한 옥기玉器들을 들 수 있습니다.

먼저 적석총(돌널무덤)부터 보면, 홍산에서 발견된 적석총이 놀랍게도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구조나 축조 방식이 같습니다. 다른 유물들은 놔두고 이 적석총 하나만 보아도 홍산문화는 동이족 문명이다, 그리고 이들의 후예가 나중에 한반도에 진입했다, 그런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단 역시 그 형태가 우리 한민족과 깊은 연관을 갖습니다. 중국학자들은 우하량 제2지점에서 발견된 원형圓形 제단과 방형方形 적석총 유적[그림]이 동방의 전통적인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또 그 구조가 저 북경에 있는 천단天壇의 원형이다,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대한제국 때 만들어진 원구단도 그와 같은 형태입니다.

세 번째로 주목되는 것은 우하량의 여신묘 유적에서 발견된 실물 크기의 여신상[그림]입니다. 진흙으로 만든 소조상인데 그 크기나 모습이 오늘날 실제 사람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여신을 숭배했다는 것은 이미 당시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 나아가 우리 고대사의 웅녀, 웅족과의 어떤 연관성을 유추할 수 있게 합니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 옥으로 만든 수많은 물건들이 출토됐다는 점입니다. 아예 옥기만 잔뜩 부장副葬한 무덤이 발견됐습니다. 홍산 사람들이 무덤에 옥을 많이 묻었다는 것은 그만큼 옥을 신성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홍산 일대에서 발굴된 무덤 가운데는 토기나 석기는 전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옥기들만 발굴된 무덤도 많습니다. 옥기만 수장한 무덤은 특히 홍산문화에서만 보이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홍산문화는 황하문명의 원류


◎ 일반적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은 중국, 특히 황하문명이라고 알려져 왔습니다. 홍산문화와 황하문명은 어떤 관계입니까.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로 꼽히는 중국의 황하문명黃河文明은 황하 중하류 지역에 성립한 옛 문명의 총칭입니다. 일반적으로 중국뿐 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문명의 시발점이 황하문명이다, 그렇게 중국인들은 주장해 왔고 또 사람들에게는 대개 그렇게 인식돼 왔습니다.

그런데 1973년 양자강 하류에서 하모도문화河姆渡文化라고 명명된 신석기 유적이 발견됐습니다. 황하문명의 중심지라 할 앙소문화권이 기원전 4500~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하모도문화는 그것보다 최소 500~1000년 앞서는 것으로 밝혀졌어요. 중국에서는 이를 장강長江(양자강)문명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이후 중화문명이 황하에서 출발했다는 단일 기원론이 아니라, 황하와 장강 두 곳에서 시작됐다는 다多기원론을 내놓았습니다.

그런 터에 다시 1980년대 이후 만리장성 북쪽 요서지방 일대에서 어마어마한 신석기 및 청동기 유적이 발견되고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 겁니다. 바로 홍산문화죠. 일부 학자들은 홍산 지역에서 발견된 것과같은 성격의 유물들이 발해연안 요서, 요동지역에서도 널리 발견되고 있다고 해서 요하문명이라고도 합니다.

선문대 이형구 교수는 ‘홍산문화는 우리 동이 한민족 문화의 원형’이라고 말합니다.“ 지중해 문명이 서양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 동이족이 발해연안(발해를 둘러싸고 있는 산동반도, 요동반도, 한반도)에서 창조한 문명은 중국은 물론 만주, 한반도, 일본의 고대 문명을 일궈내는 젖줄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홍산문화를‘발해연안문명’으로 불러야 한다”고 합니다.

분명히 홍산문명은 연대적으로 보아 황하문명보다 앞선 문명입니다. 그것이 중국으로 유입된 겁니다. 저 만리장성 바깥의 동방 홍산문화 그리고 북방 초원문화가 황하 중류의 만곡부彎曲部인 오르도스 지역과 태항산 사이 루트를 따라 중국 중원으로 들어간겁니다. 중국의 고고학자 소병기는 이 문화전달 경로를‘ Y벨트’라고 이름붙였습니다. [지도] 즉 홍산문화는 황하문화의 원류인 것입니다.

홍산인은 바로 동이족


◎ 그렇다면 홍산문화는 한국사 차원의 문제를 넘어 세계사, 인류문명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세계사에서는 서양문명의 원류를 수메르문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홍산문화는 바로 그 수메르문명과 비슷한 시기의 것입니다. 수메르문명 역시 기원전 4500년경 이뤄진 것이거든요.

일반적으로 문명이 이루어졌다 할 때 그 요소로 도시의 형성과 문자의 발명, 국가의 등장 등을 꼽습니다. 이런 문명의 등장에는 신석기 혁명이 전제가 되어 있고요. 신석기 시대 말에 농업이 시작돼서 식량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부가 축적될 물적 기반이 형성돼야 한다, 그런 이야기죠. 홍산문화의 경우에는 그런 물질적 요소만이 아니라 정신문화의 요소가 두드러집니다.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나온 제단(壇), 신전(廟), 무덤(塚), 옥기玉器 등은 모두 홍산인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우리는 이 유물들을 통해 이들의 정신세계를 약간 엿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 개의 원이 나란히 연결된 삼련벽三聯璧[그림]이나 우하량 유적지의 3단으로 된 원형제단은 홍산인들이 3을 신성한 수로 여겼음을 드러내 줍니다. 이는 바로 우리 옛 조상들의 3수三數사상과 통하는 것입니다. 아마 환단시대의 삼신三神사상 내지 삼신문화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환국桓國시대 이래 우리 조상들은 하나의 신이 조화신造化神, 교화신敎化神, 치화신治化神의 삼신으로 역할을 한다고 보았는데 이것이 삼신사상입니다.


◎ 홍산문화가 동방 동이족, 그러니까 우리 한민족 조상들이 이룬 문명이라면 오래 전부터 황하문명이 최고最古라고 주장해 온 중국 쪽에서는 홍산유적, 유물이 발견된 게 반가운 일만은 아닐 텐데요.
▶아무래도 곤혹스럽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지요. 그 전까지 중국은 황하 유역의 하夏나라에서 중국 문명이 시작돼서 상商(=은)나라, 주周나라로 역사가 이어졌다, 이렇게 고대사를 설정했습니다. 그런데 홍산문화, 특히 우하량 유적이 발견되면서 이런 정설이 무너지게 된 겁니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스스로 동방문명의 종주국임을 자부해 왔습니다. 그런데 동이족의 영역이던 요령성에서 중원中原보다 1000∼1500년이나 앞선 문명이, 그것도 고대국가의 성립 요소를 제대로 갖춘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중국 학자들도 발굴 결과를 토대로 홍산문화가 황하문명보다 먼저 이루어졌다, 홍산문화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요하 지역은 주변보다 훨씬 앞서 국가성립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다, 결론을 내렸습니다. 눈앞에 드러난 유적, 유물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죠.

결국 홍산문화가 알려지면서 중국은 황하 중심의 문명전파론을 철회하고 대신 ‘다중심多中心 문화발전론’을 내놓게 됐습니다. 하지만 홍산문명이 동이족의 것이라는 사실은 감추고 ‘중국의 요하문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중국의 고대문화가 세계 최고最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서북공정이니 동북공정이니 하는 역사왜곡 정책처럼 중국은 홍산문화에 대해서는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이란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습니다. 요하문명이 황화문명과는 애초 이질적인데도 그것을 중화문명의 시발점으로 만들어서 홍산문화든 북방 고대민족의 고대사든 모두 중국사로 쓸어 넣겠다는 의도인 것입니다.

◎ 홍산문화의 주인공 즉 홍산인들은 바로 동이족이었다, 그런 사실이 유적과 유물을 통해서도 구체적으로 드러난다는 말씀이지요?
▶당장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사실史實은 홍산인이 곰을 귀하게 여기고 받드는 곰(熊) 토템족이란 것입니다. 홍산 유적지에서는 특히 옥기 장식물이나 가면 등에 곰의 형상이 투영된 유물들이 대거 나옵니다.[그림]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이 일대가 한민족의 원류인 신석기시대 배달국의 터전이었다, 동시에 곰 토템을 생활화하던 웅족熊族의 생활터였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홍산문화는 곧 동이배달문화였고 그것이 청동기시대 단군조선의 생활문화로 죽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추정은 ‘곰 토템의 웅족이 환국의 후손인 환웅족에 의해 문명화됐다’는 『환단고기』의 『삼성기』기록과도 일치합니다. 홍산문화의 주인공은 하늘과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중시하고, 동방의 전통인 3수 사상을 반영한 제단을 쌓았습니다. 단군조선 때 장례법과 동일한 형태인 석묘계石墓系의 묘장법墓葬法도 홍산인들이 동이족임을 드러내 줍니다.


홍산문화의 연원은 환족


◎ 홍산문화가 환웅족, 곧 환족桓族으로 그 연원이 이어져 있다는 것입니까.
▶환족과 동방 여러 민족에 대한 이야기는 차후 보다 자세히 나눌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일단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엄밀히 말하면 예맥족과 한족韓族이었다, 그것만 이야기하겠습니다. 물론 둘다 우리 한민족을 형성한 주류 조상입니다. 한韓족이라는 명칭도 환桓족에서 나왔는데 이 모두가 ‘광명光明’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맥족 역시 넓은 의미에서 동이족에 포함되는데 여러 부족들 가운데 가장 먼저 요령 일대에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예맥족은 발달된 농경문화로 경제적 기반을 쌓고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했습니다. 나중에 환족이 저 중앙아시아에서 동방으로 이동하면서 우월한 힘과 문명으로 예맥족을 통합해 단군조선을 형성한 것입니다.

◎ 홍산 유적이 보여주는 당시 경제활동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요서 지역은 지리적으로 유목과 농경의 교착지대입니다. 홍산 유물에서 토기가 많이 보이는데 그것으로 보아 홍산문화는 농업 위주의 문화였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목축과 고기잡이, 사냥 등 다양한 경제활동이 있었던 것으로도 추정됩니다. 당시 생활도구[그림]를 보면 정교하게 가공된 돌촉이나 긁개, 돌칼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도구들은 당연히 사냥할 때 또는 육류를 가공할 때 사용된 것입니다.

특히 앞서 말했던 하가점 상층 문화권의 연도는 기원전 1000~300년경입니다. 우리 단군조선 시기죠. 그런데 거기서 출토되는 유물들 가운데는 청동 마구馬具나 말이 그려진 뼛조각 등 유목문화의 요소를 가리키는 것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모아보면 홍산문화는 농경을 중심으로 다양한 경제활동이 어우러졌던 복합문화였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홍산인들도 그렇고, 오늘 말씀을 듣다 보니 종도사님께서도 옥玉 또는 옥기문화玉器文化에 대해 적지 않은 의미를 부여하는 느낌입니다.
▶홍산 사람들은 옥에 신성神性이 깃들어 있다, 그렇게 생각해서 옥을 아주 귀한 대상, 귀한 물건으로 대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두가 경건하게 치르는 죽음의 의식-홍산 사람들의 무덤에 수많은 옥기가 함께 묻힌 것이 무엇보다 그런 사실을 입증합니다.

사실 그동안 홍산에서 출토된 옥기나 옥물은 실로 다양합니다. 동물형 옥기와 옥고玉箍, 구름형 옥패玉佩, 방원형 옥벽玉璧[그림]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동물형태에는 웅룡熊龍·저룡猪龍·호랑이·봉황·부엉이·물고기·거북이·곤충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또 여러가지 모습과 자세의 인물상(심지어 남녀의 교합상交合像까지)에 옥도장과 옥검 등이 발견됐습니다. 대부분 옥기는 정교하게 제작됐는데 당시 사람들의 손재주도 그렇지만 옥을 세밀히 가공할 수 있는 도구도 갖고 있었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원체 다양하고 많은 옥기들이 발굴되다 보니 어떤 학자들은 이제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사이에 옥기시대를 설정해 넣어야 한다는 제안도 내놓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홍산인들이 신성시한 이 옥기들이, 거리가 꽤 떨어진 우리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옥기들과 여러 측면에서 친연성親緣性을 갖고 있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가령 강원도 고성의 문암리나 전남 여수 안도리의 선사 유적지에서도 옥결(옥 귀고리)이 나왔거든요. 한쪽 귀퉁이가 붙지 않고 열린 고리 모양의 옥물인데, 놀랍게도 그 생김새가 홍산문화권에서 나온것과 거의 같습니다.

◎ 오늘 말씀을 듣고 보니 세계 사학계가, 아니 당장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저 홍산문화를 공부하고 알리고 하는 일에 달려들어야 마땅하겠는데요.
▶홍산이 있는 내몽골, 요서 일대는 과거 단군조선의 영역이었습니다. 물론 그곳을 활동무대로 삼은 역사의 주인공은 한민족의 조상, 배달동이였고요. 이제까지 발견된 유적과 유물만으로도 홍산문화는 한민족의 시원역사는 물론 인류의 원형문화를 파악하는 데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다름 아닌 우리 한민족이, 한국인이 저 홍산문화를 그냥 남의 일처럼 강 건너 바라보고만 있으면 안 됩니다. 학계나 민간 관계자들은 물론 국가와 정부 차원에서 열정적인 관심과 치열한 연구가 반드시 있어야 하겠지요. 어떤 역사든, 그것을 찾아내 기록하고 기억하는 자가 그 역사의 진짜 주인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