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문명사의 시원은 환국문명

[특집]
안경전 종도사님의『 환단고기桓檀古記』 이야기〈4〉

“서양문명의 근원인 수메르문명과 배달 동이의 동방문명은 모두 환국에서 나왔다.”


동이는 곧 배달민족


◎ 우리 민족을 배달민족이라고도 하는데 과연 배달과 동이는 같은 민족입니까?
▶배달倍達은 순 우리말 ‘밝달(박달)’에서 온 것입니다. 밝달을 한자로 표기해 배달이 된 것입니다. 밝음을 뜻하는 ‘배’와 땅을 뜻하는 ‘달’이 합쳐진 말입니다. 풀어보면 ‘광명의 동방 땅’이 됩니다. 한민족의 역사는 ‘배달의 역사’가 되는 것이고, 한민족은 바로 배달민족입니다.

그런데 『환단고기』에서 전하는 배달의 역사는 중국 역사서에 동이의 역사로 기록되어 전합니다. 치우천황이 큰 활을 만들어 쓴 이래 중국인들이 동방 배달민족을 동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동이는 배달동이로 불러야 맞습니다.
홍산유적과 유물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국내 학자들은 홍산지역이 일찍이 곰 토템을 지닌 웅족과 청동기시대 이전 한민족의 원류 중 하나인 배달국이 자리했던 곳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홍산문화의 유적과 유물은 바로 동이족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동이는 바로 배달민족입니다. [지도]

◎ 그러면 배달동이족의 활동무대는 어떠했습니까.
▶인류문명은 중앙아시아 일대의 환국문명에서 시작되어 한편으로는 동방으로 확산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방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동방으로 와서 문명을 세운 주체가 동이입니다. 홍산문화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동이는 동북아 일대로 그 영역이 확대되었는데 고대 황하문명의 중심지들도 모두 이 동이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동이의 일부는 요령성 서부에 와서 한 갈래는 동북으로 다른 한 갈래는 발해를 따라 내려와 산동반도로 진출하였습니다. 즉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동이족들은 회하 유역과 산동반도에 걸치는 중국 동해안 일대, 남만주, 발해만 일대, 한반도 북부에 걸쳐 거주하였는데 이들이 세운 나라가 배달에서 단군조선으로 이어졌습니다. 단군조선은 동이문화권의 중심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황하 유역의 동이는 은나라를 세워 중국 고대문명의 기초를 놓았는데 그 문화가 대부분 주나라를 비롯한 한족에 의해 계승되어 화하문명으로 꽃피게 된 것입니다. [지도]


◎ 흔히 동이라 하면 남만, 북적, 서융과 함께 중국 주변의 오랑캐다, 그렇게들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이는 동쪽 오랑캐다, 그런 뜻이 들어 있기는 있습니까.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동이는 오랑캐란 뜻이 아닙니다. 이는 후대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높이고 주변을 낮추기 위해 만들어 놓은 개념일 뿐입니다. 중국인들은 처음에는 동이를 오랑캐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뛰어난 문명을 가진 사람들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동東이란 글자는 태양이 떠오르는 광명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동방은 생명·탄생·시작을 의미합니다. 광명사상은 동방 한민족 사상의 원형이며, 동방의 뿌리시대에 건립된 국가도 광명사상을 배경으로 하였습니다.

중국 후한 때의 경학자요 문자학자인 허신許愼이 편찬한 중국 최초의 종합 자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이夷 자에 대해 “동방지인야東方之人也. 종대종궁從大從弓”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는 ‘큰 활을 쏘는 동쪽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夷’ 자는 또한 ‘신을 대신하는 사람’과 ‘어진 사람’을 뜻합니다. [그림]

은나라 갑골문에서 이夷는 시尸, 인人과 똑같이 ‘사람이 똑바로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시尸는 제사 때 신이 응감하도록 세워놓은 신상으로 ‘신의 대리인’을 뜻합니다. 이렇게 ‘이夷’ 자를 ‘신의 대리인’을 뜻하는 말로 사용한 것은 당시 동이족이 신성한 종족으로 간주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夷’ 자를 어진 사람으로 해석한 것은 “이夷는 뿌리이니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하여”라고 한 『후한서』「동이열전」에서 분명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중국인의 눈에 비춰진 동이족은 하늘의 이치에 따라 사는 어진 민족이었습니다.

◎ 그런데 어쩌다 ‘동쪽 오랑캐’라는 못된 말꼬리가 붙었을까요.
▶중국의 『사서석지四書釋地』라는 책에는 “3대 이후에는 화華와 이夷가 정해진 구분이 있지만 삼대 이상에는 화와 이가 정해진 구분이 없었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서 3대는 하·은·주 시대를 말합니다. 즉 중화와 동이를 구분하여 존화양이를 내세운 것은 후기의 일이며 본래는 중국에 화와 이의 구분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서주西周 세력이 이족을 몰아내고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화이개념을 만들어내 춘추시대 공자에 의해 그것이 본격화된 것이며 본래는 고정된 화나 고정된 이가 따로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이’가 변방의 오랑캐로 폄하된 것은 중국의 의도적인 공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동이는 원래 국한된 한 지역이 아니라 전 중국에 걸쳐 사방에 골고루 분포되어 살았는데 나중에 화하華夏족이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동방에 사는 이夷를 동이東夷, 서방에 사는 이夷를 서융西戎, 남방에 사는 이夷를 남만南蠻, 북방에 사는 이夷를 북적北狄이라 폄하하여 부르게 되었습니다. 특히 한무제 때 사마천이 중국 최초의 정사인 『사기』를 저술하면서 동이족 역사의 뿌리부터 왜곡하였습니다.

동이의 진면목을 찾아내어 세상에 처음 알린 것은 역시 동이에 속해 있는 만주족의 청나라였습니다. 청나라는 중국을 통치한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데다가 동이의 일원인 만주족이 다스리는 국가이다 보니 중국인의 해묵은 동이관에 대해 각종 문헌을 통해 객관적 입장에서 면밀히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청나라는 스스로를 동이라고 당당하게 내세우고 주장하였습니다. 청나라는 한족의 거센 반청사상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 ‘사고전서四庫全書’라는 대규모의 국가적 편찬사업을 추진, 완성하였습니다.

이 ‘사고전서’의 동이 기사를 보면 중국의 동이관에는 대내용 동이 문헌과 대외용 동이 문헌이 있으며 이에 따라 두 종류의 동이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고전서’의 동이 기사에 따르면 중국의 친화적 대외용 동이관이 있었는데도 배타적인 대내용 동이관이 현재 우리 사회에 깊숙이 박혀 있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우리 선인들이 중국 동이관의 이중성을 알지 못하고 공자의 춘추관, 즉 배타적인 동이관에 안주하여 ‘소중화의식’에 사로잡힌 데에 근본적인 책임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 앞서 동이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중국 쪽 기록들을 통해 말씀하셨는데… 정작 우리에게는 동이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은 반면 중국의 사서나 옛 기록에는 동이에 대한 내용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쉽지만 그렇습니다. 동이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중국 사서를 보아야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 대륙을 지배한 민족이 동이족이니만큼 중국인들은 동이에 대해 잘 알 것이고 그러니 기록도 자연스러운 것이겠지요. 우선 『후한서』, 『삼국지』, 『구당서』, 『신당서』 등 중국의 정사들에는 동이전東夷傳이 들어 있기 때문에 동이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가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특히 3세기말 서진의 역사가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의 「위서魏書」의 동이전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예, 삼한 사회에 대한 귀중한 기록들이 많아 역사학과 인류학의 보고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150여년 뒤에 나온 『후한서』는 위진남북조 시대 범엽范曄이라는 남조의 송나라 역사가가 편찬한 책인데 이 책의 동이전 서문에 요순시대와 하·은·주 시대의 동이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습니다. 동이에 구이九夷가 있었다는 기록이나 동이족의 영웅이자 인자한 왕으로 이름이 높았던 서언왕에 대한 기록도 여기에 나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학자 심백강沈伯綱 선생은 선진先秦시대부터 청대淸代 전기前期에 이르기까지의 동양의 주요 고서를 모은 청대의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조사하여 그 가운데 동이에 관한 자료들을 집성한 분인데, 그에 따르면 경부經部에서는 총491권에 걸쳐 736곳, 사부史部에서는 563권 915곳, 제자백가서들을 모은 자부子不에서는 497권 689곳, 문집인 집부集部에서는 278권 308곳에서 동이에 관한 기록이 확인되었습니다. (『사고전서 중의 동이사료 해제』)

이렇게 우리 조상에 관련된 많은 귀중한 자료들을 중국 고서에서 발견할 수 있으나, 우리 학계는 지금까지도 다른 나라의 기록으로 치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 동이족의 역사가 그렇게 오래 되었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이름이 알려진 동이족 옛 인물들이 있을 텐데요.
▶배달국의 태호복희씨, 염제신농씨, 치우천황 이 세 분 제왕은 배달시대의 문화영웅입니다. 중국인들이 이 세 분을 자신의 조상으로 만들어 버렸는데 이는 분명한 역사왜곡입니다.

예를 들어 현재 탁록이라는 곳에 삼조당三祖堂이 있습니다. 여기에 한민족의 조상인 염제신농씨와 치우천황이 중국 역사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황제 헌원과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오래 전부터 우리 배달겨레의 조상인 태호복희씨와 염제신농씨를 자기네 조상으로 모셔왔는데 삼조당을 지으면서 마침내 치우천황까지 자기네 조상으로 모신 것입니다.

한술 더 떠서 중국은 치우천황 후반기의 주 활동무대였던 탁록을 ‘중국 5천년 문명사의 요람’이자 ‘중화민족의 주요 발상지 중의 하나’로 치켜 세웠습니다. 한민족의 조상을 삼조당에 모셔 그들의 조상으로 만들더니, 이제 한민족의 고토인 탁록까지 그들의 시원역사 무대로 만들었습니다.

중국이 자기들 조상이라 우기는 복희씨는 5천여년 전 배달시대에 인간의 생활문명을 크게 진작시켰던 문명의 창시자입니다. 또한 팔괘의 창시자로서 대한민국의 태극기는 바로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복희씨를 모신 사당이 중국 내 도처에 있습니다. 그 가운데 최근에 크게 증축된 하남성 회양현의 복희묘가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하여 그곳에는 수많은 방문객이 늘 장사진을 치고 있습니다. 중국이 이곳에 복희 사당을 내세운 것은 복희씨의 이동 경로를 변조하여 그를 중국 본토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에서 살다 간 완벽한 중국인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왜 복희씨가 완벽한 중국인이 되어야 했는지, 그에 대한 답을 우리는 고풍스럽게 장식한 회양현 사당의 정면에 걸린 현판, ‘인문시조人文始祖’(인류문명의 첫 조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복희씨를 온 인류의 큰 조상으로 내세워, 복희씨의 후손인 현 중국을 전세계 사람들의 어버이 나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중국 농업·의약·경제의 조신祖神이며, 중국문화의 원천으로 알려져 있는 신농씨도 배달 동이족입니다. 약 5200년전 8세 배달국 안부련환웅 때의 인물인 신농씨는 배달 동이족의 강씨 성의 시조입니다. 그는 고시씨의 방계 자손이며, 웅씨족 출신인 소전少典의 아들입니다. 신농씨의 아버지 소전少典은 안부련환웅의 신하이자, 유웅국有熊國의 군주였습니다. 『태백일사太白逸史』 「삼한관경본기」에 “웅씨족에서 갈려나간 후손 중에 소전이 있었다. 안부련환웅 말기에 소전이 명을 받고 강수에서 군병을 감독했다.”(熊氏之所分曰少典, 安夫連桓雄之末, 少典以命監兵于姜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중국 정부는 동이족의 조상인 복희씨, 신농씨, 치우천황을 자기네 조상으로 모시는 것에 대해 ‘한족과 55개 소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인 중국에서 소수 민족의 조상들은 모두 중국의 조상이다’라는 억지 논리로 정당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들 배달국의 성인 제왕들 외에 우리가 동이족인 줄 알지 못했던 역대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족의 시조로 알려진 황제 헌원을 비롯하여 오제로 손꼽히는 요임금, 순임금도 본래의 혈통이 동이족입니다.

◎ 중국의 상징적인 태평성대로 알려진 요순시절도 동이족 왕들의 치세였다는 말씀인가요?
▶물론입니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는 헌원의 호가 유웅씨라고 했는데, 유웅씨는 환웅의 배달 건국 때 통합, 흡수된 웅족 계열로서 동방문화 개척의 주역입니다. 따라서 헌원은 동이 웅족계열의 배달국 사람이었습니다. 송대宋代 4대 사서 중의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 “요堯는 북적지인北狄之人”이라 나와 있고 “순舜은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는 맹자孟子의 말이 실려 있습니다. 맹자가 근거 없이 그런 소리를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중국인들이 이상적인 군주로 떠받드는 요, 순 임금도 동이족 출신이었습니다.

즉 중국의 고대사는 바로 우리 배달 조선민족이 직접 현지에서 나라를 건설한 창업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결론이 나오는지 알겠죠? 그래요. 우리가 그동안 중국인中國人으로 알고 있었던 중국의 지도자들이 모두 중국의 화하족華夏族이 아닌 동북東北의 이적夷狄출신이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동양東洋의 사상과 문화의 핵심은 중화사상·중국문화가 아니라 동이족東夷族에 의해 형성된 동이사상東夷思想·동이문화東夷文化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수메르문명의 뿌리는 한국


◎ 종도사님은 『환단고기』 완역본 해제에 일찍이 환국에서 동이의 동방문명뿐 아니라 서양문명의 근원이 된 수메르문명도 그로부터 나왔다고 하셨습니다. 이 과감한(?) 대목은 저 뿐만 아니라 누구도 그냥 넘어갈 수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우리의 상식으로 옛 역사, 그것도 수천년 전의 역사를 재단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이 우주는 말할 것도 없고 인류의 역사도 우리의 평범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놀라운 사실들이 많습니다. 아마 지금으로부터 8,9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환국이 있었다고 하면 코웃음을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당시는 인류가 원시적 생활단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석기시대인데 무슨 국가냐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는 편견에 불과합니다. 한반도에서도 1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볍씨가 발견되었습니다.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출토된 것인데 과학적 연대측정을 해보니 그렇게 나왔어요. 탄화미는 탄소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연대측정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즉 1만년 전에 한반도에서 쌀농사가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그림]

또 하나 예를 들어보면 수메르문명이 탄생한 중동지역은 문명의 발전이 아주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지역으로 유명한데 이스라엘 땅에 여리고(영어로는 제리코)라는 도시가 있어요. 지금은 팔레스타인 자치구에 속하는 이곳에서 고고학자들은 BCE 1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도시 유적을 발견했죠. 명백히 여리고 지역에 문명이 존재했던 겁니다.

고대인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컴퓨터나 자동차, 스마트폰은 없었지만 오늘날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오지에 살고 있는 원시부족들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역사적, 과학적 증거에 어긋나는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중앙아시아 일대에는 기원전 7,8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던 시기에 상당한 수준의 문명이 존재했으며 이러한 문명권에서 동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배달 동이가 되었고 서남쪽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수메르문명을 열었다는 이야기죠. 『환단고기』에서 환국의 환웅이 3천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동방으로 와서 신시 배달국을 열었다는 이야기는 그냥 신화로 치부해서는 안됩니다. 그 속에는 인류의 시원문명이라 할 수 있는 환국문명과 환국 사람들의 이주를 통한 문명의 확산이라는 역사적 진실이 숨어 있었던 거죠.

◎ 그렇다면 인류 시원문명이라는 환국문명의 수준이랄까, 시대상황이 어떠했는지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환국지도]
▶중앙아시아 일대에 있었던 환국은 하나의 국가라기보다는 여러 국가들로 이루어진 연방과 비슷한 조직이었습니다. 모두 12개의 나라였는데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일운국, 우루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 사납아국, 선비국, 수밀이국입니다. 중앙아시아 일대는 지금은 건조한 지대가 많지만 예전에는 강우량도 넉넉하고 사람 살기가 좋은 곳이었습니다. 현재 아프리카의 가장 큰 사막인 사하라 사막도 수천년 전에는 초목이 우거진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기후의 변화로 사막화가 일어나 결국은 그곳의 사람들이 더 이상 살 수 없어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사하라 사막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암각화에는 사하라가 예전에는 수목이 풍부한 곳이었음을 보여주는 그림들이 발견됩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러한 장기적 기후변동의 원인은 지축의 변동입니다. 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사하라 지역도 지금으로부터 15,000년 정도 지나면 다시 수목이 우거진 지역으로 변할 것이라고 합니다. 지축은 주기가 수만년에 걸친 주기적 변동을 하며 기후의 장기적 변화에 절대적 영향을 준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도의 하라파 문명도 몬순의 약화로 인해 BCE 3000년경에 사라졌는데 이 경우도 기후변동이 역사와 문명에 미치는 영향을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라 할 것입니다. 하라파 인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처럼 건조화에 대응하여 관개농업을 발전시키는 대신 다른 곳으로 이주해 버렸습니다. 주변 히말라야 산지로 올라가면 비가 많이 오는 지역들이 있으니 아마 거기로 이주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이 하라파 문명의 발전된 생활방식을 포기하고 산악지역으로 들어감으로써 문명이 사라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중앙아시아도 비슷한 상황에 직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는 강수량도 풍부하고 수목도 많은 곳이었습니다. 현재 알타이 산맥 부근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곳곳의 초원지대는 살기 좋았던 예전의 환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알타이 초원지대에 가본 사람들 말로는 그곳은 여름에는 거의 지상천국이라 합니다. 많은 유목민들이 그곳을 중시한 것은 그 때문이었겠죠.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일어난 건조화의 원인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곳에 살던 인류의 생활환경에 큰 변화가 초래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 결과 환국 사람들의 일부는 동북아시아로 이주하였으며 또 다른 일부는 남쪽으로 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쪽으로 온 사람들은 신시 배달국을 세워 동이의 조상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남쪽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거쳐 일부는 인도로, 또 일부는 이란고원을 넘어 메소포타미아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 수메르문명이 본래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동방 사람들이 ‘그쪽’으로 건너가 정착하면서 그곳에서 문명을 이루었다, 그런 말씀인가요?
▶BCE 4500년경에 갑자기 메소포타미아 하부 지역에 나타나 도시국가를 세우고 뛰어난 고대문명을 이룩한 수메르인들이 이렇게 중앙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대 바빌론 문명은 바로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이 ‘안샨’으로부터 왔다고 그들이 남긴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메르 말로 ‘안’은 하늘, ‘샨’은 산을 의미하는데 즉 안샨은 천산이라는 뜻입니다. 중앙아시아에 있는 천산 산맥이 이들이 출발한 곳으로 보입니다.

한사상을 연구한 김상일 박사는 수메르인이 동북아시아의 몽골족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2환국 가운데 하나인 수밀이국이 수메르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수메르인은 여러 도시 국가를 세웠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우르입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고향이 바로 갈데아 우르인데 이 우르국은 20세기 고고학자들의 발굴로 그 존재가 증명되었습니다. 12환국 가운데에는 우루국이 있는데 이 우루국이 수메르의 우르가 아니라고 누가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 수메르문명이 환국에서 발원한 것이라면 역시 환국에서 발원한 배달-동이문화와 유사한 점들이 적지 않겠지요? [표]
▶우선 수메르인들의 언어가 우리 말과 같은 교착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세계적으로 볼 때 주어나 목적어 같은 체언 다음에 조사가 붙는 교착어는 한국어를 비롯한 일본어, 터키어 등의 알타이어가 그러한데, 수메르어도 그렇다는 것은 수메르인들이 중앙아시아 쪽에서 이동했음을 드러내주는 증거입니다. 수메르어와 한국어는 어순도 거의 같고 단어도 비슷한 것이 많다고 하니 두 말 사이의 친연관계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또 수메르인들은 우주를 ‘안키’라고 부르고 우주를 둥근 하늘과 평평한 땅으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동양의 천원지방 사상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또 수메르인들은 왕권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천명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동양의 천명사상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 외에도 순장의 관습이 있었다든지 상투를 틀었다든지 여인들이 머리에 물건을 이고 다녔다든지 고대 한국의 관습과 유사한 관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앞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잠깐 했는데 동이족 문명은 수메르는 물론 히브리, 나아가 기독교문화와도 연결돼 있습니다.

◎ 히브리문화, 기독교문화라니요? [지도]
▶유태인들 즉 히브리인들은 유일신 사상과 그 유일신 사상에 바탕을 둔 종교를 만들어낸 민족입니다. 고대에는 다신신앙이 일반적이었는데 이들의 야훼 신앙은 야훼를 제외한 다른 모든 신들을 부정하는 신앙으로서 고대 세계에서는 매우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야훼 유일신 신앙이 유태교로 발전되고 유태교에서 기독교가 나오고 또 이슬람도 유태교와 기독교를 모태로 해서 태동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고대 히브리인들의 유일신 신앙은 종교사적으로나 문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배타적 일신교 신앙이 다른 신과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독선적인 모습을 보였던 터라 세상에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준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겁니다. 이단들을 많이 불태워 죽이고 이교도들에 대한 전쟁을 성전으로 미화한 서양 기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신앙의 적들에 대한 무자비한 테러를 거리낌 없이 행하는 일부 과격 이슬람주의자들이 그러한 부정적인 예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야훼 신앙의 출발점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보면 야훼가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였는데 아브라함이 이 명령을 좇아서 가나안 땅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가나안으로 이주하려고 한 것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데라 때부터였습니다. 데라가 자기 아들들과 그 며느리들 즉 일가를 거느리고 가나안 땅으로 향하던 중 오늘날의 터키 국경지역에 위치한 하란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러자 야훼가 그 아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우상숭배가 지배하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말고 가나안으로 가라고 한 것입니다.

이때 야훼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고 축복을 내려줄 것이라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아브라함은 오던 길을 돌아가지 않고 무작정 가나안으로 갔던 것인데 이 때문에 이스라엘인들은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 아브라함이 수메르와 연결돼 있다는 말씀이지요. [지도]
▶그런데 바로 이 아브라함 그리고 그 아버지 데라가 떠나온 고향이 바로 수메르 땅이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수메르 도시국가들 가운데 하나인 갈데아 우르였습니다.

갈데아는 아브라함보다 훨씬 후대의 사람들인 갈데아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한 이후로 붙은 이름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당시에 맞도록 부르자면 ‘갈데아 우르’가 아니라 ‘수메르 우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바이블에서는 야훼가 아브라함을 다신신앙이 지배하는 수메르로부터 이끌어내어 오로지 야훼 한 신만을 숭배하는 새로운 신앙을 세우도록 한 것처럼 말하지만 아브라함 일가가 수메르로부터 이주하게 된 정확한 경위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는 역사가들이 말하는 ‘우르 제3왕조 시대’로서 수메르인들이 지배한 마지막 시대였습니다. 이 왕조는 동쪽 이란지역에서 내려온 엘람인들의 침략을 받아 BCE 2004년경에 멸망하게 되었는데 아마 그러한 정치적 혼란이 아브라함 일족의 가나안 이주를 촉진한 배경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떠한 동기로 수메르의 우르를 떠났든지 그가 수메르인이었으며 수메르문화의 여러 요소들을 갖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 아브라함 집안이 수메르 출신이라면, 고대 히브리 문화와 수메르문화 사이에는 당연히 유사한 점들이 있을 텐데요.
▶유대교는 야훼 신만을 숭배하는 독특한 종교입니다. 야훼는 아브라함을 다신숭배가 지배하던 수메르 땅에서 이끌어내 가나안으로 오도록 하였지만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흉년으로 인해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그곳에 그만 정착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수백년을 이집트에서 보내다보니 자연스럽게 이집트인들의 노예로 전락하였는데 이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것이 모세라는 영웅이었습니다. 물론 바이블에는 야훼가 모세에게 명하여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가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순탄하지 못했는데 근 40년을 방황하다가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광야에서 방황하던 중에 야훼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계명을 내렸는데 유명한 영화 『십계』는 바로 이를 주제로 한 것이죠. 야훼가 광야에서 내린 계명을 유태인들을 신성한 법으로 지키게 됩니다.

유태교는 야훼가 내렸다는 율법에 기초를 두고 있는 종교입니다. 바이블에 나와 있는 계명은 600개가 넘는데 이 계명들이 기록된 책이 유태인들이 ‘토라’라고 부르는 『구약성서』의 앞 다섯 권,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입니다.

그런데 야훼 일신신앙은 쉽게 확립되지 못합니다. 주변 족속들이 모두 다신신앙을 하고 있는데 히브리인들만 유일신 신앙을 고수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었겠죠. 바이블에는 히브리인들이 이방 신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제사를 드린 기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즉 야훼 일신교인 유태교가 확립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역사가들은 그 시기를 바빌론에서 귀환한 BCE 6세기 이후로 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는 주변 이민족들의 신앙관습이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많이 행해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알 신 숭배입니다. 바알은 농사와 자연을 주관하는 신으로 가나안에서 아주 인기가 높은 신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니까 말이죠. 야훼가 큰 질투를 느낄 정도로 히브리인들 역시 바알 신을 숭배했습니다.

그런데 바알신은 가나안과 수메르의 최고신인 엘 신의 아들로서 엘을 대신하여 신단의 우두머리가 된 신이니 수메르 출신의 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알 신과 더불어 인기가 높았던 여신이 있는데 바알의 배우자인 아세라 여신입니다. 아세라 여신 역시 수메르의 이쉬타르 여신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리스의 비너스 여신처럼 성과 사랑, 전쟁의 여신이었죠. 그러니 히브리인들도 야훼 일신교가 확립되기 전에는 수메르신들을 섬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림수메르의 신들]

◎ 그밖에 일상에서 히브리-수메르-동이족 문화의 유사성은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그림 지구라트]
▶이스라엘인들은 높은 산 위에 신들을 모신 신전을 지었는데 이는 지구라트라는 높은 탑을 세우고 그 위에서 신에게 제사를 지낸 수메르인들의 관습과 일치합니다. 또 이스라엘인들이 야훼 신에게 바친 제사들 가운데 희생짐승을 통째로 불에 태워 바치는 번제燔祭 역시 수메르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옛 이스라엘인들도 조상숭배를 했다는 점입니다. 이들에게는 조상의 무덤에 구멍을 뚫어두고 음식을 바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는 수메르인들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관습이었습니다. 죽은 조상에 대한 제사는 동이족의 관습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 환국에서 나간 수메르문명이 서양문명의 근원이 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는 어떻게 해서 그런 겁니까?
▶일반적으로 서양문명은 그리스·로마의 고전문명으로부터 나왔다고 합니다. 후대에 로마인들이 지중해 일대를 무력으로 정복하는데 그 가운데에는 그리스 문명권 즉 지중해 동부지역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그들을 스승으로 여겨 그로부터 열심히 배웠습니다. 로마인들은 건축이나 토목에는 능했지만 학문에는 썩 능하지 못했습니다. 모두 그리스인들로부터 배웠죠. 실제로 로마의 상류층은 아들을 그리스 학교로 보내 공부를 시키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문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로마 문명이 된 것이죠. 다른 말로 하자면 그리스는 서양인들의 학교가 된 겁니다.

이들은 BCE 8~7세기 전후부터 폴리스라는 독특한 도시국가를 세워 그것을 생활의 틀로 삼았는데 무척 높은 수준의 문명과 국가를 이룩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의 학문과 예술, 도시건축 등은 오랫동안 유럽인들이 따라잡지 못했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습니다. 중세기에는 그리스의 학문과 예술에 대해 제대로 평가할 역량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르네상스 시대와 와서야 그 진면목을 깨닫게 되었던 거죠.

그런데 그리스문명이 갑자기 땅에서 솟아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리스인들도 선진문명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스 주변에는 바빌로니아, 이집트, 페니키아 등이 있었는데 이들 문명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들 문명은 모두 수메르문명의 계승자이자 후계자들입니다. [함무라비법전]

특히 바빌로니아문명이 그렇습니다. BCE 2000년 이후 수메르인들의 도시국가는 아카드인들을 비롯한 셈족들의 지배로 넘어가는데 이들은 수메르문명을 그대로 계승하였습니다.

문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문자입니다. 수메르인들이 발명한 설형문자가 이들에 의해 계승되어 널리 퍼져나가 중동일대의 공통적 문자로 사용되었습니다. 문자와 더불어 그 문자로 기록된 학문도 전파되었던 것은 물론입니다. 그리스인들의 뛰어난 천문학도 수메르에서 왔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12궁도는 바로 수메르인들이 고안한 것이며 수학에서 각도와 시간을 재는데 사용되었던 60진법도 수메르에서 온 것입니다. 12궁도는 동양에도 있는데 아마 환국시대부터 존재했을 겁니다.

그리스인들이 바빌로니아문명을 열심히 배웠다는 것은 일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견된 점토판 가운데서 한 면에서는 설형문자가, 다른 한 면에는 그리스문자가 기록된 점토판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입증됩니다.

이처럼 그리스문명이 수메르문명을 계승한 바빌로니아, 이집트, 페니키아 등의 선진문명에서 배웠다는 것은 그리스문명이 수메르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에서 볼 수 있듯이 선진문명으로부터 열심히 배우는 것은 열등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지혜로움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20세기 한국도 그렇게 해서 성공한 경우입니다.

◎ 세세한 이야기가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해 주십시오.
▶한민족의 조상인 배달 동이, 그리고 동이와 같은 문화를 가진 수메르 등이 모두 환국에서 나왔다는 것은 환국을 정통으로 계승한 우리 한민족이 세계 문명사의 시원민족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글의 바탕이 가림토 문자이고 이는 이미 수천년 전부터 우리 민족이 사용해오던 글자입니다. 그리고 상투나 윷놀이, 댕기머리 등도 상고시대로부터 내려온 소중한 의미를 간직한 문화유산들입니다. 『환단고기』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모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그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으려 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지금 한류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데 그것 또한 우연히 일어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수천년 이어온 문명의 종주국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우리 모두는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우리 문화와 우리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고 배우고 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