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이 이어온 나라들

[특집]
안경전 종도사님의『 환단고기桓檀古記』 이야기〈 3〉

한민족의 국통은 환국-배달-단군조선에서 북부여-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사국시대-대진국과 통일신라의 남북국시대를 거쳐 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면면한 아홉 굽이, 9천년을 흘러왔다.


“이번에 말씀하실 주제가 ‘한민족이 이어온 나라들’이어서, 부끄럽지만 아주 오랜만에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들을 다시 보았습니다.‘ 구석기, 신석기의 선사시대를 거쳐 청동기시대에 고조선이 건국되고 그것이 위만조선 이후 부여, 동예, 옥저, 고구려 등 부족국가시대를 거쳐 삼국시대-통일신라-후삼국-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이어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위만조선은 철저히 왜곡된 것이다’라고 지금까지 자세히 말씀해 주셨으니 그것은 제쳐놓더라도, 그동안 종도사님 말씀을 듣고 새삼 눈여겨보니 고대국가를 다룬 전체 내용이 실제로 아주 부실합니다. 당장 고조선에서 삼국시대 이전까지는 연대도 분명치 않고, 각 국가가 어떻게 경영됐는지, 백성들 생활은 어떠했는지 별 내용이 없습니다.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간 느낌입니다. 우리 한민족사를 ‘유구한 반만년 역사다’ 흔히 말하는데 어떻게 해서 오늘까지 왔기에 그렇게들 말하는지 사실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단군신화로 시작해서 대한민국까지, 지금 교과서에 쓰인 내용 그대로 대충 그렇게만 알고 넘어가면 되는 것입니까?”

“그걸 이른바 국사교과서라고 내놓고는 여기저기 한 자리씩 틀어박혀‘ 진짜 역사’는 발도 못 붙이게 막고 있는 게 지금 이 나라 강단 주류사학자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 대한민/국까지 왔습니까?”

“한민족의 정통성이 이어진 나라들, 그것을 국통맥國統脈이라 하는데 우리 국통맥은 최초 환국桓國에서 지금의 대한민국까지 아홉 번 굽이쳐왔습니다. ▶환국 ▶배달 ▶단군조선(고조선)▶북부여 ▶고구려 등 사국시대 ▶대진국(발해)과 통일신라의 남북국시대 ▶고려 ▶조선 ▶대한민국이 그것입니다.”

◎국사교과서에는 고조선이라 서술됐는데 종도사님께서는 단군조선이라 하십니다. 어떤 것이 맞습니까.
"가장 정확한 표기는 ‘조선朝鮮’입니다. 환국, 배달, 조선이라는 나라이름 모두 두 글자씩으로 이루어졌고 ‘광명’이라는 의미가 다 들어 있습니다. 일제 때 밑도 끝도 없이 고古 자가 붙었는데 옳지 않습니다. 굳이 구별하려면 단군조선, 고대조선 또는 옛 조선이라고 하면 됩니다."

◎단군조선이라 하면 뜻이 가장 선명할 것 같습니다. 내년부터 쓰일 우리 고교 교과서 3종에‘ 단군조선 성립 연대가 기원 전 2333년인데 그 근거가 삼국유사’라고 해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반면 교육부는‘ 1485년(성종 16년) 나온 우리 역사서 동국통감이 그 근거’라고 합니다. 이 대목부터 정리해주십시오. [표]

“단군의 건국연도를 전하는 기록들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전해 요임금 즉위 후 50년인 경인년으로 기록됐습니다. 조선시대 사서 『동국통감』에는 요임금 때의 무진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고려시대 이승휴가 쓴『제왕운기』는 ‘단군이 요임금과 같은 해인 무진년에 나라를 세웠다고 합니다.

단군에 대해 가장 자세한 기록을 전하는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는 ‘단군왕검이 갑진년에 대읍국의 비왕裨王으로 봉해졌고 25년 후인 무진년에 온 백성의 추대로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고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웅씨왕을 보좌해 작은 나라 하나를 다스리는 총독 같은 존재였는데 이를 ‘보조왕’이라는 의미로 비왕이라 한 것입니다. 단군이 아사달에서 단군조선을 건국한 것이 무진년이라 되어 있으니 요임금 25년에 해당합니다.

이를 토대로 중국 역대왕조들의 연도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요임금 25년은 BCE 2333년으로 계산이 됩니다. 『삼국유사』와 『동국통감』보다 『환단고기』가 믿을 만하다는 것이 여기서도 입증이 되는데 역사교과서 저자들이나 교육부 관료들 모두 이번 기회에『 환단고기』를 한번 읽어보기 바랍니다.

이런 까닭에 2333년에 서기 2013년을 더해서 우리가 말하는 단기檀紀, 그러니까 단군조선이 세워진 해를 기점으로 올해가 4346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민족사를 ‘유구한 반만년 역사다’ 그렇게들 이야기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그보다 앞서 5천년 가까이 건재했던 환국桓國과 배달국倍達國을 모르고들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지금의 우리 국사교과서는 환국-배달-단군조선을 합쳐 7천여년 간의 장대한 민족사를 전혀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통탄할 노릇이지요.”

기원전 7197년의 환국桓國 (3,301년간 존속)


◎아무래도 오늘은 우리 국통맥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환단고기』의 내용에 따라 순차적으로 살펴보는 게 맞을것 같습니다. 단군조선 이전 환국과 배달국이 있었다고 하셨는데, 우선 환국이 어떻게 건국됐는지 또 어떤 나라였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부터 9천여년 전 동북아시아에 하나의 문명집단이 형성됐습니다. 『환단고기』는 그 집단을 한민족과 인류의 뿌리인 환족桓族이 세운 나라, 곧 환국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 중 『삼성기(상)』의 첫 줄에 쓰인 ‘우리 환족의 나라 세움이 가장 오래 되었다’(吾桓建國 最古)라는 기록이 그것입니다. 『삼국유사』도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昔有桓國) 하여 환국이 실재했음을 뒷받침합니다.

중앙아시아의 천산(天山, 일명 파내류산)[그림]을 중심으로 자리잡은 환국은 아홉족속(=九桓)이 세운 열두 나라로 이뤄졌습니다. 이를 12분국分國이라 합니다. 지금 저 미국을 표현하는 식으로 한다면,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환국이라 할까요? 그 강토가 중앙아시아에서 시베리아, 만주까지 동서로 2만여리, 남북으로 5만리에 달했습니다. 이 12분국의 이름들 중 일부는 나중에 단군조선 때까지도 단군조선의 제후국 명칭으로 사용됐습니다. 또 『진서晉書』와 『당서唐書』 등 중국문헌에서도 이 나라들의 이름이 발견됩니다.

이 환국을 다스린 통치자들이 바로 환인桓因입니다. 초대初代 안파견 환 인부터 시작해서 7 명의 환 인이 다스리는 동안 환국은 기원전 7197년부터 기원전 3897년까지 무려 3,301년 동안 존속했습니다.”

◎그러면『 환단고기』에는 그 시대의 특징이나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도 기록되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먼저 환국의 ‘환’은 밝을 환桓자입니다. 그것은 광명, 특히 하늘에서 내려오는 환한 빛인 천광명天光明을 상징합니다. 우리 옛 조상들은 그 빛을 신(=三神)의 모습, 신의 덕성으로 이해했습니다. 환은 빛이요 빛은 곧 신이었던 것이지요. 한마디로 환국은 삼신의 덕성이 발현된 나라요 천상에 펼쳐진 삼신상제님의 나라가 인간 세상에 이식移植된 첫 나라다, 그런 뜻입니다.

환은 나라이름에 그치지 않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늘의 광명과 하나 된 자신들을 일러 역시 환이라 했습니다. 나아가 신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린 통치자를 환인이라 불렀습니다. 백성의 추대를 받은 환인은 환국을 이루었던 9환족과 12분국이 단결해 한마음이 되게 이끌었습니다. 정성과 믿음[誠信不僞], 공경과 근면[敬勤不怠], 효도와 순종[孝順不違], 청렴과 의리[廉義不淫], 겸손과 화평[謙和不鬪]이라는 오훈五訓으로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이 시기, 그러니까 인류역사 초기를 서양의 고대문명 연구가들은 ‘황금시대’(The Golden Age)라 부릅니다. 이때는 전쟁이 없고 사람들이 행복과 평화 속에, 고통과 질병 없이 살았다고 합니다. 지구촌 태고문명 답사자들은 6천년 이전의 무덤을 열면 일절 무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자아폭발』(원제 : The Fall 타락)의 저자 스티브 테일러는 지금으로부터 6천년 전 무렵에 중앙아시아와 중동에 큰 기후변화로 사막화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지구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충만한 시대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이 황금시대의 삶이 『환단고기』가 전하는 환국 사람들의 삶과 일치합니다.

환국시대 사람들은 대자연과 한마음이 되어 천지의 조화신성造化神性 속에 살았습니다. 조화신성이란 말이 좀 어려운데 신의 조화력, 신의 본성本性을 내려받아 대자연과 교감하며 살았다, 일단 그렇게 이해하면 될 겁니다. 사람들은 천지가 내려주는 광명한 기운을 받아 무병장수의 삶을 누렸습니다.”

◎앞서 7명의 환인들이 3천여년 동안 환국을 다스렸다, 하셨는데 그러면 환인 한 사람이 수백년씩 장수했다는 말씀인가요.
“7명의 환인이 3,301년에 걸쳐 나라를 다스렸다는 역사와 관련해 역년歷年이 너무 길다, 그러면서 7명의 환인이 다스린 것이 아니라 그 3천여년은 7대 왕조사였다, 그렇게 보는 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신의 경지, 곧 조화신성 문명 속에 살았습니다. 또 ‘오래도록 사시며 항상 즐거움을 누리셨다’[長生久視, 恒得快樂]는 『삼성기(상)』의 기록이나 ‘도를 깨쳐 장생하시니 온몸에 병이 없었다’[得道長生, 擧身無病]는『 삼성기(하)』의 기록 등에 비추어 환인은 얼마든지 장생했을 것입니다.

동양의학서의 고전인 『황제내경黃帝內經』[그림]에 나오는 ‘황제와 기백의 대화’에서도 고대 장수문화의 실체를 알 수 있습니다.‘ 선인들이 어떻게 1백세가 넘도록 건강하게 살았는가’ 황제의 질문에 기백은 ‘그들이 천지의 법칙을 지키며 살았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구약전서』의「 창세기」를 보아도 노아 이전, 아담의 자손들이 수백년씩 살지 않았습니까.

『장자莊子』에도 보면 ‘상고上古의 혁서赫胥 제왕시대에 백성은 편안해서 집에 있어도 무엇을 해야 좋을지 그 할 바를 알지 못했다. 먹을 것을 입에 물고 즐기고 배불리 먹고는 배를 두드려 가며 그저 근심 걱정이 없는 평화로운 생활을 했을 뿐’이라고 전합니다. 여기서 혁서 제왕은 환국의 2세 통치자인 혁서 환인과 이름이 일치합니다. 장자가 그냥 그 이름을 지어낸 것이 아니지요.”

기원전 3897년의 배달倍達 (1,500년간 존속)


◎환국에서 배달국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어떠했습니까.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그렇겠지만 환국시대 말기에도 인구가 늘고 물자가 부족해지면서 백성들의 삶이 아주 어려워졌습니다. 말하자면 새로운 도약이랄까, 제2의 건국이 필요하게 된 것이지요. 때마침 환국의 여러 부족 가운데 서자부庶子部라는 부족의 통치자인 환웅桓雄이 새로운 터전 개척을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환국의 마지막 통치자가 된) 지위리智爲利 환인께서 환웅에게 새 나라 개척을 맡겼습니다. 지위리 환인은 환국의 동쪽에 자리잡은 백두산이야말로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라 하고 환웅을 그곳으로 보냅니다.

『삼성기(하)』와 『태백일사』에 보면 새 터전을 개척하기 위해 떠나는 환웅에게 환인은 국통 계승의 상징으로 천부天符와 인印을 내려줍니다. 문명개척단이라 해서 3천명의 백성도 붙여주었습니다. 백두산에 도착한 환웅은 도읍을 신시神市에 정하고 백두산 신단수에서 삼신상제님께 천제天祭를 올려 새로이 나라를 세운다는 사실을 고하였습니다. 이 분이 바로 배달국을 연 초대 환웅, 거발환居發桓 환웅입니다. 이렇게해서 기원전 3897년, 배달의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배달 또는 배달민족이란 말은 제게 아주 익숙합니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 대다수에게도 그럴 텐데요.
“피자, 치킨 등 음식을 배달해주는 배달配達 시스템이 한국만큼 발전한 곳이 없다고 해서 배달민족이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만 배달倍達은 순 우리말 ‘밝달’(박달)에서 온 것입니다. 밝은 땅이라는 뜻이죠. 밝달을 한자로 표기하다보니 배달이 된 것입니다. 앞서 ‘환’이 광명을 뜻한다고 했는데 ‘배달’ 역시 ‘광명의 땅’을 말합니다. 우리 한민족을 ‘배달겨레’라 하는 것은 여기서 연유합니다. 그러므로 한민족의 역사는‘ 배달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배달국의 역사는 얼마나 지속됐습니까.
“백두산 신시에서 출발한 배달국은 점차 도시국가의 틀을 벗고 동북아 대국으로 성장합니다. 그리고는 앞서 본 것처럼 기원전 2333년 단군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1,500여년 동안 나라의 위세와 영광을 지속합니다. 특히 배달시대에는 인간을 보다 더 교화敎化하고 편리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문명이 활짝 꽃피게 됩니다. 역학, 천문, 의술, 농경술 등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이지요. 그 과정에는 특히 위대한 세 분 성인聖人 제왕의 공덕이 있었습니다. 태호복희씨, 염제신농씨, 치우천황이 그분들입니다.

배달국이 어떤 이유로 막을 내리게 되는지는『 환단고기』에도 자세한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단군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이 구환족을 통일했다는 말이 『단군세기』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배달국은 말기에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혼란에 빠졌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배달국 말기에 단군왕검이 아사달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교과서에 나오는 단군조선입니다. 환국을 다스린 환인들이 7세를 계승한 반면 배달국을 다스린 환웅은 거발환 환웅에서 거불단 환웅까지 모두 18세에 걸쳐 계승됐습니다.”

◎배달국과 관련, 2002 월드컵 때 붉은악마 응원단 깃발에 무시무시한 치우의 얼굴(=鬼面)이 등장합니다. 바로 앞에서 종도사님께서도 치우천황이 배달국을 융성케 한 인물이 라 하셨는데, 이번 기회에 그가 어떤 인물인지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월드컵 때 전국에서 치우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보고 정말 반가웠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학교에서는 한 글자도 배운 적 없는 치우를 어디선가 알아내서는 민족 에너지의 원천으로, 한민족의 상징으로 내세우는 걸 보면서 고맙기도 했습니다.‘ 바로 저것이야말로 한민족 역사 콘텐츠의 세계적인 게양이고 진정한 한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치우는 배달국의 제14세 자오지천황을 가리킵니다. 지금부터 약 4,700년 전 백두산에서 현재의 중국 땅인 요서遼西를 넘어 산동성과 주변, 서쪽으로는 탁록까지 진출해 배달국의 광활한 영토를 개척한 성웅聖雄입니다. 또한 동북아를 지배하며 제후들을 거느린 천자天子의 지위에 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탁록대전으로 수천년 지난 오늘까지도 그 위명威名을 떨치고 있습니다.

탁록대전은 치우천황이 중국의 헌원을 굴복시킨 사건입니다. 서토西土 지역의 일개 제후였던 헌원이 동북아의 천자가 되겠다며 난을 일으킵니다. 치우천황은 그와 10년에 걸친 대전을 벌여 마침내 그를 굴복시켰습니다.

이는 관련된 여러 기록들이 밝히고 있는 엄연한 사실史實입니다.『 환단고기』 역시 탁록대전은 헌원이 치우에 대항해 벌어졌으며 전쟁의 승리자는 치우임을 명백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나라 때 역사가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이를 뒤집어 버렸습니다.‘ 당시 유웅씨 헌원이 황제였는데 치우가 난을 일으켰다 잡혀 죽었다’(금살치우禽殺蚩尤)*고 왜곡한 것입니다.

영토를 넓혀가던 치우는 점점 커지는 강역을 다스리기 위해 배달국의 도읍을 백두산 신시에서 서토에 가까운 청구(靑邱, 현재의 대릉하 유역)로 옮겨 배달의 새시대를 열었습니다. 이후 당대는 물론 배달국과 그 이후 오늘까지 한민족과 중국인들에게도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 돼 왔습니다. 특히 진한秦漢시대 중국인들은 해마다 10월이면 치우천황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때마다 ‘그의 능에서 하늘로 붉은 기운이 뻗쳤다’고 합니다. 초한지에 나오는 한고조 유방은 치우천황의 전각을 지어 제사를 지낸 뒤 싸움에 나갔습니다. 그가 진나라 땅을 평정하고나서 장안長安에 치우천황의 사당을 지어 공경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우리 역사교과서에 전혀 없는 내용이고 또 현재 역사학자들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런 환국과 배달국의 역사가 실제 유적이나 유물로 입증되는 것인가요.

“단군조선의 유적, 유물도 그리 많지 않은 터에 그 이전 시대를 보여주는 ‘물증’들을 확보하기는 쉽지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20세기초 중국 땅인 만리장성 이북 요하유역에서 홍산문화라는 새로운 유적이 발굴되고 그곳에서 지금까지 세계 고고학계와 역사학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사상 최초의, 가장 오래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한 국과 중국의 역사학계가 놀라고 있는데, 그 유적과 유물이 바로 한민족의 뿌리문화인 동이족의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이 자랑하는 고대 황하문명은 물론 세계 어떤 문명보다도 더 오래 전 연대의 것들입니다. 짧게 잡아도 5,500년전~6,000년전의 것입니다. 단군조선 시대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죠.

이를 통해 단군조선보다 훨씬 이전, 동북아에 하늘의 상제上帝를 받들면서 고도의 문명을 이룬 이들이 있었으며 그 주인공은 바로 동이족이란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사실이 드러나면서 중국이 홍산유적과 유물의 공개를 꺼리고 자꾸 가리려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중국은 홍산문명이 동이족의 것이 아니라 중화문명의 시발점이라는 쪽으로 뒤틀어 동북아의 상고사와 고대사까지 자기들 역사로 편입시키려 합니다.”

◎가령 어떤 유적 혹은 유물이 출토되고 또 그것이 어떻게 동이족과 연결된다는 것인지 예를 들어 주실 수 있습니까.
“중국 적봉시의 한 후미진 마을, 우하량이란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3층으로 이루어진 원형圓形 제단과 방형(方形, 사각형) 돌무지무덤이 발굴됐습니다. 모두 돌을 쌓아올려 만든 적석총積石塚입니다. 이 적석총은 단군조선을 건국한 주류 세력인 동이족이 창출한 독특한 대표적인 문화양식입니다.

이 적석총 유적에서 석관묘石棺墓도 발견됐습니다. 이 석관묘는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동이족의 그것과 동일합니다. 문헌 기록들을 살펴보아도 이 같은 석묘石墓 계통의 묘장법墓葬法을 쓰는 나라가 단군조선입니다. 홍산문화가 단군조선 문화의 전 단계라는 점에서, 마땅히 홍산문화는 동북아에서 강대국을 이루었던 단군조선의 선조들이 형성했던 문화 또는 문명으로 인정돼야 할 것입니다. [그림]

또 1984년에는 역시 우하량 북쪽 산 중턱에서 거대한 신전 터가 발굴됐고, 이곳에서 황토질 점토로 만든 가부좌 자세의 여신상이 출토되었습니다. 실제 사람 크기 그대로 말입니다. 그리고 인물 조상 파편 즉 머리, 어깨, 손 등 여성으로 보이는 각 부분의 파편이 같이 발견되었습니다. 나아가 이 신전 터에서는 곰의 아래턱뼈라든지 대퇴부, 그리고 곰 발톱 모양의 진흙 토기 등도 나왔습니다. 한마디로 홍산문화의 주도 세력이 곰(=熊)을 토템으로 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물증입니다.

『삼성기』의 기록을 보면, 배달시대 초기 배달국 주변의 호족虎族과 웅족熊族이 당시 나라를 다스리던 환웅을 찾아와 ‘우리도 환족桓族처럼 광명한 부족이 되도록 교화敎化시켜 달라’ 간청했습니다. 당시 호족은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남권男權 중심 부족이었고 웅족은 곰을 토템으로 하는 여권女權 중심 부족이었습니다. 환웅이 이를 받아들여 수행에 들어간 두 부족 가운데, 웅족이 굶주림과 추위 속에 무사히 수도생활을 마치고 환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삼국유사에서는 곰과 호랑이가 마늘을 먹고, 운운하는 신화로 변질된 것입니다). 이 같은 기록은 곰 토템을 갖고 있던 부족이 누구냐, 바로 환족, 즉 동이족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홍산유적과 유물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국내 학자들은 홍산 지역이 일찍이 곰 토템을 지닌 웅족과 청동기 시대 이전 한민족의 원류 중 하나인 배달국이 자리했던 곳이라고 주장합니다. 배달문화가 곧 홍산문화라는 것이죠. 이러한 홍산유적과 유물을 통해 자연스럽게 환국에서 배달국, 그리고 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한민족 고대국가의 실상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2333년의 단군조선朝鮮 (47대 단군이 2,096년간 통치)


◎배달 이후 단군조선은 어떻게 역사에 등장하며 그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나요. 우리 국사교과서에는 단군조선에 대한 이야기가 원체 적게 실려 있어서….
“단군조선은 배달국 말기 웅씨 부족의 비왕이던 단군왕검이 당시의 혼란을 잠재우고 아홉 환족을 통일해 건국했습니다. 그 강역은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내몽골을 포함하고 산동성, 안휘성, 강소성, 하북성 일대까지 아울렀습니다.

단군조선에 대해 특기할 것은 처음부터 영토를 커다란 세 구역으로 나누어 다스렸다는 점입니다. 진한, 마한, 번한이 그것인데 이 같은 국가경영 방식이 이른바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라는 것입니다. 삼한관경제는 단군조선뿐만 아니라 그 영향을 받아 흉노, 선비, 투르크 등 북방 유목민족들의 통치방식으로도 확산됐습니다.

단군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대단히 강성한 나라였습니다. 중국의 하夏나라는 왕조가 끝날 때까지 단군조선을 상국上國으로 섬겼습니다. 하에서 상商(은나라)으로 중국의 왕조가 교체되는 데에도 동방의 천자국 조선의 영향력이 작용했습니다. 조선의 힘을 얻어 건국된 상나라는 줄곧 조선에 조공을 바쳤습니다. 그러다 제12세 하단갑왕 이후 조공을 거부하더니 급기야 제22세 무정 때는 감히 단군조선을 침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막강한 조선의 역공을 받아 결국 나라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상나라를 이은 주周 역시 나라를 열 때 조선의 도움을 받았고 이후 조선에 조공을 바쳤습니다. 주나라를 건국한 문왕과 무왕은 그 시조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동이족이었을 뿐 아니라 상나라 군대를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던 주나라가 창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인 대군사전략가 강태공은 동이족이었습니다. 후에 그가 제齊나라에 봉해진 것은 제나라가 동이족이 많이 살던 산동성 지역이어서 동이족을 통치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위만조선은 왜곡된 것이다, 계속 말씀해 주셨는데 마침 단군조선 역사를 다루는 이번 기회에 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십시오. [도표]

“중국의 연나라 사람 위만이 한 고조 12년, 기원전 195년 단군조선으로 망명해 들어옵니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위만은 혼자가 아니라 1천명 무리를 거느리고 왔습니다. 중국의 진수가 지은 『삼국지』 「위서」의 ‘동이전’에 의하면 망명한 위만이 당시 단군조선의 준왕에게 항복하자 준왕은 무리를 이끌고 들어온 그에게 서쪽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맡깁니다. 은혜를 베푼 겁니다.

그런데 위만은 같이 망명한 이들을 모아 작당作黨을 하고는 준왕을 내쫓고 자신이 왕이 되겠다는 마음을 품습니다. 그러다 마침 한나라 군대가 단군조선에 쳐들어오자 자신이 준왕을 보위하겠다며, 준왕의 왕검성으로 무리를 끌고 들어갔습니다. 곧바로 준왕을 내쫓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고는 나라 이름을 그대로 조선이다,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말 그대로 배은망덕입니다.

어쨌든 준왕은 단군조선의 마지막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군조선이 멸망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위만이 차지했던 땅은 단군조선의 일부인 번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당시 북부여 등 단군조선을 이루고, 또한 나중에 단군조선의 국통을 계승한 여러 나라들이 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나중에 우리나라 식민사학자들은 ‘위만이 단군조선을 계승하고 위만조선은 이내 한사군에 의해 끝났다’면서 그것을 기정사실화해서 교과서에 갖다 박아버렸습니다. 이병도는 위만이 상투를 틀고 흰옷을 입고 망명했다는 한나라 때 반고가 지은 『한서漢書』 「조선전」의 기록을 토대로 위만이 조선인이었다고 보고 위만정권을 위만조선이라 하였는데 『한서』의 기록에는 분명히 위만이 중국의 연燕나라 사람이라고 나옵니다. 위만의 정체를 잘못 파악한 것이죠. 위만은 어디까지나 옛 조선의 일부로 중국과 접하고 있던 서쪽의 번조선만을 차지했을 따름입니다. 조선을 계승한 나라들이 위만정권의 동쪽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북부여는 그 가운데 가장 큰 나라였습니다. 『한서』 「조선전」에는 ‘위만조선의 동쪽에 진번과 진국이 있으나 위만이 방해하여 중국의 천자와 교통할 수 없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땅 한반도에 조선을 계승한 여러 나라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나중에 한나라가 쳐들어와 위만조선이 문닫을 때까지 계속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단군조선이 위만에 의해 망했다거나 위만이 단군조선을 계승했다는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환단고기』는 단군조선 역사의 뒷부분을 어떻게 전해주고 있습니까. [그림]
“그 어떤 역사기록보다 『환단고기』는 훨씬 상세하고 사실적인 이야기를 전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단군조선은 안팎의 우환에 시달리다 결국 제47세 고열가단군 때 해모수에 의해 문을 닫습니다.

단군조선 후기에 가면 공동체 질서가 약화되고 빈부격차와 계급분화가 빠르게 진행돼 사회갈등이 심해집니다. 그러면서 지도층에서는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아래서는 반란이 빈발합니다. 나라를 붙잡으려는 노력도 물론 있었습니다. 제22세 색불루 단군 때 진한, 마한, 번한의 삼한을 삼조선三朝鮮이라 이름 바꾸고 혼란을 수습해보려 했지만 실패합니다.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돼 43세 물리 단군 때 우화충이란 자가 큰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때 반란을 진압한 인물이 욕살(지금의 도지사격) 구물이었습니다. 구물은 반란을 진압하고 제44세 단군으로 즉위해 국정쇄신을 도모했습니다.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고 도읍도 장당경으로 옮겼습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단군조선을 지탱해주던 삼한관경제가 이미 흔들린 상황이었습니다. 앞서 삼한에서 삼조선으로 바뀐 세 구역이 합심하지 않고 각기 독립된 나라처럼 움직였습니다. 중앙권력 즉 단군의 통치권이 약화된 겁니다. 그런 가운데 중국의 전국시대 7웅 가운데 하나인 연나라가 단군조선을 계속 침략하며 괴롭혔습니다. 이래저래 나라가 우환에 시달리다 앞서 말한 것처럼 47세 단군 때 해모수가 들고 일어나 단군조선을 계승합니다. 해모수가 망한 단군조선을 계승하는 과정은 다시 자세히 이야기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단군이라 하면 대개 우리나라를 건국하고 다스린 한 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군이 과연 어떤 인물 혹은 지위를 가리키는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단군조선과 관련해 이런저런 오해들이 있는데 그 중 두드러진 하나가 바로 단군을 ‘고유명사’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삼국유사』에서조차 ‘단군이 1,908년 동안이나 살았다’면서 마치 한분 단군이 줄곧 단군조선을 다스린 것처럼 잘못된 인식을 확산, 고착시켰습니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그 잘못을 분명하게 바로잡아 줍니다.

『환단고기』중에는 『단군세기』라는 역사서가 들어 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단군조선 연대기입니다. 바로 여기에 단군조선의 처음과 끝이 상세히 기록돼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단군조선은 한 사람이 아니라 ‘단군’이라는 칭호를 가진 통치자가, 그것도 47명의 단군들이 대代를 이어 다스렸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본 것처럼 배달국의 마지막 환웅(거불단 환웅)이 세상을 떠나고 제1세 단군이 38세 때 백성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됩니다. 그 해가 바로 기원전 2333년이고 나라 이름은 조선朝鮮이었습니다. 나중에 근세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역사가들이 단군조선으로 부르게 된것이죠. 그러나 고조선보다 단군조선이라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참고로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왕검이 세운 나라라고 해서‘ 왕검조선’이라고도 했습니다.

제1세 단군왕검은 조선의 개국시조로서 지금의 송화강 유역으로 추정되는 아사달에 도읍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뒤인 제22세 색불루 단군 때 그보다 남서쪽의 백악산 아사달(지금의 길림성 장춘으로 추정)로, 다시 제44세 구물 단군 때는 더 남쪽으로 내려와 장당경 아사달(지금의 요령성 개원시로 추정)로 천도했습니다. 이렇게 두번 도읍을 옮겨가며 단군조선은 마흔일곱분 단군이 2,096년간 다스렸습니다.

이 같은 역대 47명 단군들이 하나의 왕조를 이루었던 것도 아닙니다. 일부 단군은 쿠데타로 집권하고 또 일부 단군은 당시 부족장들의 회의체인 오가五加의 추대를 받아 단군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굳이 그 숫자를 구분하면 47명 가운데 34명이 혈연으로 왕위를 계승했고 나머지 13명 단군이 추대 또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습니다.『 환단고기』가 이처럼 명확하게 단군시대를 전하는 것과 달리 『삼국유사』는 어이없게도 한분 단군이 1,908세를 살았다고 잘못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원전 232년 부여의 시작 (전기 고구려)


◎아마 독자들도 이 대목을 가장 궁금해할 것 같은데요. 과연 단군조선 이후 우리 국통은 어디로 이어지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단군세기』는 조선의 제47세 고열가 단군 때 ‘고리국 사람 해모수가 군사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면서 조선의 멸망과정을 전합니다. 고리국은 단군조선 북방의 대흥안령산맥 부근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기원전 239년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군사를 일으켜 북부여를 세우자 고열가 단군은 제위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지금 표현으로 해모수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지요. 당시 해모수의 쿠데타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수유국이 후원했고, 그 덕으로 수유국의 우두머리는 나중에 번조선(예전의 번한)의 왕으로 임명됐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고열가 단군이 제위에서 물러난 후에도 당시 권력층을 형성하고 있던 다섯 부족의 대표자들, 곧 오가五加가 권력을 내어놓으려 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해모수가 일을 벌인 뒤에도 무려 6년간이나 오가가 공동으로 국사를 집행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오가의 공화정시대’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도 백성들은 해모수를 더 따랐습니다. 이윽고 민심을 업은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운지 8년째 되던 기원전 232년, 군사를 이끌고 오가의 공화정을 철폐합니다. 그렇게 되고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해모수를 단군으로 추대했고 본격적인 북부여 시대가 개막됐습니다. 중요한 것은 북부여에서도 지도자의 호칭은 여전히 단군을 썼다는 것입니다. 북부여라는 나라 이름은 앞서 단군조선의 제44세 구물단군이 바꾼 나라 이름, 대부여를 계승한 것입니다.

이처럼 옛 조선은 위만에 의해 계승되거나 한사군에 의해 멸망하거나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고리국 사람 해모수의 군사정변에 의해, 북부여라는 한민족의 나라로 그 국통이 계승됐습니다. 북부여는 환국-배달-단군조선을 뒤에 나오는 고구려, 고려, 대진 등과 연결하는 실로 중요한 역사의 징검다리이자 한민족 국통맥에서 빠져서는 안될 혈穴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국사교과서에는 북부여가 제대로 다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 역사의 국통의 계승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국통의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로 남아 있는 북부여사의 복원이 대단히 시급합니다.”

◎북부여가 단군조선에서 열국시대로 넘어가는 고리라는 것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면 역사에서 남부여다, 동부여다, 서부여다 하는 이야기들도 있던데 그것과 북부여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동부여, 서부여, 남부여 등을 알기 위해서는 해모수의 북부여 역사를 차분히 짚어봐야 합니다. 북부여는 제4세 고우루 단군 때 국가경영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기원전 109년 한나라 무제가 위만정권을 침략해 온 것이 그 계기였습니다. 당시 위만정권은 위만의 손자인 우거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한 무제는 우거를 무너뜨린 뒤 요동 땅 넘어 북부여까지 침공해 왔습니다.

위기의 순간, 북부여의 장수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했습니다. 그러고는 기원전 108년 졸본卒本에서 나라를 열어 졸본부여라 하고 자신을 동명왕東明王이라 칭했습니다. 이후 그는 백성들로부터 구국영웅으로 추앙받아 기원전 86년 북부여의 제5세 단군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이처럼 동명왕이 제5세 단군에 즉위하면서 그 여파로 동부여가 생겨났습니다.

동명왕이 제5세 단군에 즉위하기 전 북부여는 제4세 고우루 단군의 동생인 해부루가 형의 자리를 계승해 잠시 보위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명왕에 밀려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지금의 흑룡강성 통하 부근인 가섭원으로 옮겨가 독자적으로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동부여 또는 가섭원부여입니다. 해부루 이 후 동부여는 제2세 금와왕을 거쳐 제3세 대소왕 때 멸망합니다. 대소왕이 사망하자 그의 종제從弟가 22년에 백성들을 거느리고 고구려 대무신왕에 항복한 것입니다.

그러자 대무신왕은 그를 장당경 서북쪽의 연나부椽那部라는 곳의 제후로 봉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제후로서 다스린 이 지역은 연나부부여, 혹은 부여의 서쪽에 있다 해서 서부여라 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서부여는 동부여의 패망 후 요서 땅에 세워진 ‘망명 부여’라할 수 있습니다. 훗날『 후한서』,『 삼국지』 등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부여사라는 것도 바로 이 서부여의 역사를 기술한 것입니다.

동부여나 서부여가 북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것과 달리 남부여는 그로부터 한참 뒤인 백제 때 잠시 세워진 나라였습니다. 6세기 백제 중흥을 꿈꾸던 성왕이 538년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하면서‘옛 부여의 전통을 계승한다’며 국호를 남부여로 바꾼 것이 그것입니다. 북쪽에 있던 옛 부여와 달리 남쪽에 있는 부여라 해서 남부여라 했습니다.”

◎과거 한 TV 드라마에서 해모수가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아버지라고 설정하는 바람에 마치 그것이 역사 사실인 것처럼 적잖이 인식되고 있습니다. 실제 해모수와 주몽은 어떤 관계입니까.
“해모수란 이름이 대중에 알려진 것은 국사교과서보다는 몇년 전 방영된 역사드라마 ‘주몽’이 계기였을 겁니다. 앞서 본 것처럼 해모수는 우리 역사, 우리 국통맥을 이어오는 데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인식이 아주 잘못 돼 있습니다. 다른 문제를 떠나 그 드라마에서 ‘해모수는 주몽의 아버지’라고 설정하는 바람에 우리네 바른 역사를 인식하는 데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앞에서 단군조선을 계승한 나라가 북부여라고 하였습니다. 북부여는 비록 단군조선의 국통을 계승했지만 단군조선이 다스렸던 영토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북부여의 지배에서 벗어난 나머지 영토를 기반으로 이른바 ‘열국列國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북부여 영토 외곽의 동부여, 낙랑국, 남삼한, 예맥, 옥저, 동예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여러 나라는 이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4국 시대를 거쳐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으로 통합됩니다.

열국 중 북부여의 국통은 고주몽의 고구려로 계승됐습니다. 주몽은 결혼을 통해 북부여의 통치자가 되었고 그 인연으로 국통을 잇게 됐습니다.

북부여의 제6세 고무서 단군은 우연히 알게 된 주몽을 범상치 않은 인물로 보고 자기 딸과 결혼시켜 사위로 삼았습니다. 아들이 없던 그가 재위 2년 만인 기원전 58년 세상을 뜨면서 통치권은 자연스럽게 사위인 주몽에게 넘어갔습니다.『 북부여기』의 이 같은 기록에 따르면 주몽은 결코 자신보다 200년 전 인물인 해모수의 아들이 될 수는 없습니다.”


기원전 58년의 고구려 & 사국시대


◎『 환단고기』가 전하는 주몽은 어떤 인물인가요.
“『환단고기』 중 『북부여기』를 보면 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 아니라 5세손孫입니다. 해모수의 증손자인 불리지와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유화 부인이 나들이 나갔다 불리지와 정을 통합니다. 그리고는 임신한 사실이 발각되어 집에서 쫓겨나 송화강 강가의 한 장소에 감금됩니다. 마침 앞서 살펴보았던 동부여의 해부루 왕이 순행巡行을 나왔다가 유화부인을 만나 그녀를 왕궁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그왕궁에서 주몽이 태어납니다.

‘주몽’은 부여어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활을 잘 쏘는 주몽을 동부여 사람들이 시기해 해치려 합니다. 이에 어머니 유화부인이 제 고향인 북부여로 주몽을 도망가게 합니다. 북부여로 돌아온 주몽은 앞서 본 것처럼 고무서 단군의 눈에 띄어 그의 사위가 됩니다. 이내 고무서의 뒤를 이어 북부여의 통치자가 되고 기원전 37년에 나라 이름을 고구려로 바꿉니다.”

◎주몽이 그냥 북부여를 이끌어가면 될 터인데 왜 나라이름을 고구려라 했을까요.
“고구려라는 나라 이름은 주몽의 출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몽의 증조부 고진은 북부여의 제후였습니다. 다름 아닌 고구려후侯 즉 고구려 지역의 제후였습니다. 다른 칭호로는 고리군?離郡왕으로도 불렸습니다. 더듬어 올라가면 일찍이 해모수 그리고 북부여의 제5세 고두막 단군도 모두 고리국 출신입니다. 주몽은 그런 자기 뿌리를 살려 북부여의 지도자가 되자 나라이름을 고구려라고 한 것입니다.

고주몽의 탄생과 관련해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고구려가 과연 얼마나 지속됐는가, 그 역년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국사교과서를 보면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건국돼 668년 나당 연합군에 패망할 때까지 700년 조금 넘게 지속됐습니다. 이 같은 역년의 근거는『 삼국사기』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중국 사서인 『신당서新唐書』를 보면 눈에 탁 띄는 대목이 나옵니다. 당唐의 시어사侍御史인 가언충賈言忠이라는 사람이 당 고종에게“고구려 비기秘記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900년을 넘지 못하고 팔십 먹은 장수에게 망한다 하였습니다”라는 보고를 올립니다. 실제 당에 유학한 최치원도‘고구려 900년 설’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 같은 이야기, 즉 고구려의 역년이 900년이란 이야기가 나오게 됐을까요. 『삼성기(상)』의 한 줄 기록에 그 해답의 결정적인 실마리가 있는데, ‘고주몽이 해모수를 태조로 하여 제사를 모셨다’(祠解慕漱 爲太祖)는 구절입니다.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가 오가의 공화정을 철폐하고 단군으로 추대된 것이 BCE 232년인데 이때로부터 고구려의 역년을 계산하면 고구려의 역년은 딱 900년이 됩니다. 당에서는 고구려가 북부여의 연장선상에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알고는 고구려의 역년을 그렇게 계산하였던 겁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환단고기』의 기록이 얼마나 귀중한 기록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환단고기』는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고구려라는 명칭도 또한 북부여와 관련이 있습니다. 고구려는 북부여의 북쪽에 위치한 고리군?離郡에서 나온 말로 해모수는 바로 이곳 출신이었습니다. 북부여는 원고구려인 셈이죠. 『태백일사』는 고구려가 망한 뒤 대조영의 부친인 대중상이 대진국을 세울 때도 처음에는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료와 사실들을 모아보면, 북부여와 고구려와 대진(발해)은 한 뿌리에서 나온, 같은 줄기로 이어져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 나라와 나라를 이어주는 국통의 중요한 고리를 해모수와 고주몽이 잡고 있는 것입니다.”

◎고구려뿐 아니라 백제와 신라도 북부여로부터 나왔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경주에 선도산仙挑山이 있습니다. 과거 신라인들은 이 산을 더없이 존숭하게 여겼습니다. 산 정상 바로 아래에는 선도산 ‘성모聖母’의 유적지와 함께 그 위패를 모신 성모사聖母社가 있습니다. 신라 때 창건된 성모사에는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10일이면 박혁거세의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드립니다. 그렇다면 선도산 성모가 누구냐, 바로 박혁거세를 낳은 북부여의 파소婆蘇 공주입니다. 당장 신라의 국조國祖인 박혁거세의 혈통이 이처럼 북부여와 이어져 있습니다.

한반도 북쪽에서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가 약화되는 동안 한반도 남쪽에도 삼한이 생겨납니다. 소위 ‘남삼한’입니다. 이 남삼한에 형성됐던 소국가 연맹체들이 각기 신라, 백제, 가야로 발전합니다.

먼저 신라를 볼까요? 중국 사서인 『양서梁書』에 보면, 신라인의 조상은 본래 진한辰韓 종족이다,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물론 진한이란 단군조선 때 진한을 말합니다. 바로 이 진한이 남삼한에서는 신라로 발전합니다. 박혁거세가 진한 땅에 사로국(신라의 옛 이름)을 세우고 점차 주변 소국들을 통합한 것이지요.

또 『태백일사』는 북부여 황실의 딸 파소가 지아비 없이 잉태해 남의 의심을 사게 되자 진한 땅으로 도피, 그곳에서 박혁거세를 낳았다고 합니다. 박혁거세가 13세 때 진한의 6부가 그를 받들어 거세간居世干으로 삼았다는데, 거세간은 초기 신라 왕의 칭호입니다. 북방민족들이 왕호로 사용하던 ‘칸’ 및 ‘한’과 유사합니다.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의 칭호를 ‘거서간居西干’으로 표기했는데 우리말을 한자로 옮기다보니 사람마다 약간 차이가 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환단고기』가 20세기의 위작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훌륭한 증거의 하나입니다. 20세기의 인물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옛 사서들을 보고 위작을 만들었다면 ‘거서간’을 굳이 ‘거세간’이라 적을 이유가 없었겠죠. 약간 주제에서 벗어났는데 좌우간 진한의 6부가 박혁거세를 거세간, 즉 거서간으로 받든 것은 그가 바로 북부여 황실의 혈통이기 때문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삼성기(상)』의 ‘고두막한이 부여의 옛 도읍을 차지하여 국호를 동명이라 부르니 이것이 곧 신라의 옛 땅’이라는 기록도 박혁거세의 뿌리가 북부여라는 점을 인식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백제는 어떻습니까. 결론부터 말해 백제의 뿌리 역시 북부여에 닿아 있습니다. 주몽 그리고 졸본의 소서노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 중 온조가 마한 땅에 백제를 세우고(기원전 18년) 주변 소국가들을 통합합니다. 주몽에게는 일찍이 동부여에서 맞은 첫째 부인 예씨가 낳은 유리라는 맏아들이 있었습니다. 주몽은 평소 ‘적자嫡子인 유리가 오면 마땅히 태자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주몽의 말에 소서노는 자신이 낳은 두 아들과 함께 패대(浿帶, 현재 중국 하북성의 난하 유역으로 추정) 지역으로 이주하고 주몽으로부터 어하라於瑕羅라는 지위를 책봉받습니다.

어하라는 중국 사서인『 주서』「 백제전」에 백제왕의 칭호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 소서노는 패대 지역의 초대 백제왕이 된 셈입니다. 그 뒤 소서노가 죽자 온조가 다시 사람들을 이끌고 지금의 서울 지역, 곧 위례성을 도읍으로 나라를 세웁니다. ‘백가의 무리가 바다를 건너’[百家濟海] 한반도로 왔다 하여 그 이름을 백제라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라와 백제 또한 단군조선 그리고 북부여로 이어지는 국통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국통맥을 말할 때 가야도 포함됩니까.
“북부여가 고구려를 세운 주몽에 의해 계승되었다는 것과 백제와 신라 역시 북부여로부터 나왔음은 앞에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기원전 1세기 후반부터 7세기 중반까지를 흔히 삼국시대라 부르고 삼국시대가 통일신라시대로 이어진다고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삼국 외에도 가야가 있었습니다. 가야가 세워진 것은 삼국과 비슷한 시기였습니다. 가야의 멸망이 6세기 중반이었으니 순전히 삼국만이 정립한 것은 한 세기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이전의 500~600년간을 사국시대라 불러야지 삼국시대라 부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가야는 금관가야를 비롯한 6가야국의 연맹이기는 했지만 당시의 첨단산업이었던 제철기술이 뛰어나 철을 여러 나라로 수출했습니다. 가야가 결국 신라에 의해 합병되었지만 가야가 남긴 유적이나 유물을 볼 때 결코 후진적인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금관가야의 시조 왕 김수로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난생설화를 전하고 있는데 난생설화는 북방민족의 신화입니다. 김해 김씨나 신라 김씨 모두 자신들이 소호 금천少昊 金天씨의 후예라고 믿었습니다. 이는 『삼국사기』의 「김유신전」에 나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김수로나 김알지나 같은 계통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신라 문무왕비에는 김씨 왕가가 한무제 때 잡혀왔다가 한무제의 측근이 되었던 흉노 왕자 김일제金日?의 후손이었다고 말합니다. 김일제는 무제로부터 김씨성을 하사받았는데 왕망이 망한 후 왕망의 인척이었던 김씨들이 한반도로 망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 김씨가 이들 망명자들의 후손이라면 같은 김수로 역시 흉노의 후예일 것입니다. 실제로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 북방유목민 계통의 유물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가야의 지배층은 흉노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기원후 668년의 대진大震 & 남북국시대


◎대진국(발해)은 어떻습니까.
“가야와 백제, 고구려는 모두 신라에 의해 정복되어 국통이 통일신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이는 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거대한 국가였던 대진국 곧 발해를 염두에 두지 않은 것입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들이 말갈족과 힘을 합해 건설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습니다. 나라이름도 처음에는 후고구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태백일사』의 「대진국본기」 첫 부분에 나오는 기록인데요, 여기서는 『조대기朝代記』라는 발해의 사서기록을 그대로 전재하였습니다.

668년 진국장군振國將軍 대중상이 서압록하를 지키다 평양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리를 이끌고 동모산에 이르러 성벽을 쌓고 나라이름을 후고구려, 연호를 중광重光이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대중상이 죽은 후 그의 아들 대조영이 홀한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대진大震으로 바꿨습니다. 발해라는 이름은 중국인들이 일방적으로 붙인 이름이고 정식 명칭은 어디까지나 대진이었습니다.

대진국은 8세기에는 5경 60주를 두었을 정도로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였습니다. 영토가 너무 넓어 수도를 다섯 곳에 두었던 것입니다. 문물도 매우 발전해 다른 나라들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렀습니다. 대진국은 고구려 멸망 직후부터 926년까지 존속했으니 얼추 935년 패망한 통일신라와 그 존속시기가 거의 일치합니다. 그래서 우리 국통맥은 북부여에서 열국시대 또는 4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와 대진국의 남북국시대로 이어진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종도사님께서 말씀하신 국통맥이 어째서 정작 우리 국사교과서에는 실리지 않는 것일까요.
“국사교과서의 우리 국통맥을 보면 단군조선이 가장 먼저 튀어나오고, 그것이 위만에 의해 망하고, 위만조선은 한사군으로 바뀌면서 국통맥이 단절됩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부여, 고구려, 옥저와 동예, 삼한이 등장합니다. 고구려가 부여에서 온 주몽에 의해 세워졌다고는 하지만, 부여는 과연 어디서 나왔는지 아무런 말도 없이 슬쩍 넘어갑니다. 옥저와 동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진한, 마한, 번한의 삼한도 진辰을 계승하였다고 돼 있지만 그것이 단군조선과 연결됐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2008년 고등학교『 국사』)한마디로 단군조선을 말하지만 단군조선으로부터 국통이 어떻게 계승되었는지 제대로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교과서 내용이 그처럼 잘못 서술된 주된 이유는,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가 단군조선에서 나온 나라임을 인정하지 않고 어이없게도 위만정권을 단군조선의 계승자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과서만 보면 한민족의 국통맥은 위만이라는 중국인 망명자에 의해 단절돼 있습니다. 또 일찍이 고구려, 백제를 탄생시킨 북부여의 존재와 역할, 의미를 전혀 알 수 없게 돼 있습니다.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은 단군조선을 계승한 나라가 위만조선 그리고 한사군이라는 패악적 신념을 가진 강단 주류역사학자들 때문입니다. 9천 년을 아홉 굽이로 흘러온 선명한 우리 역사가 있는데도 그 사람들은 그쪽으로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으려 합니다. 그들이 도대체 왜 그렇게 우리 국민들에게, 특히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단군신화’와 ‘반만년 역사’만 주입하려 하는지 갑갑할 따름입니다.”